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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부활절 설교)
사망과 음부의 열쇠 (계 1장 9-20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서론입니다. 사도 요한이 어떻게 해서 소아시아 7교회에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사도 요한이 선지자로서 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고 밧모라는 섬에 일종의 유배를 당한 상황입니다. 거기서 주일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을 때 그 영광에 압도되어서 죽은 자 같이 되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진 사도 요한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손길로 그 위에 얹으시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영광스런 주님의 환상에 압도되어서 주님의 발앞에 바짝 엎드릴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요한이 핍박 받고 유배당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었었지만 지금은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역사를 주관하시고 요한 자신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니까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뜻합니다. 로마제국의 핍박과 압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한에게 유일한 주권자가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당하고 있는 핍박과 어려운 상황은 이미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우리는 ‘고난을 지나 영광에 이르는 삶’이 성도의 삶이요, 이미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셨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시는 길을 제시해주셨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의 생애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난을 지나 영광에 이르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님에 대한 같은 신앙을 가진 자로서 자기 자신도 너희의 형제이고 너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환난, 특별히 십자가 고난, 그리고 그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에 동참하므로 예수님의 통치에 동참하여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성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환난이 예수 안에서 받게 된 환난이요 이미 예수님이 받으신 환난이요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므로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환난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환난과 고통을 잘 참고 인내함으로써 예수님의 은밀하고도 역설적인 왕노릇에 동참하고 있는 자 곧 성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주님으로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성도에게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위로요 우리의 심판이시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죽었다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전체 삶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죽음이요 죽고 결산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죽음입니다. 죽는 길밖에 없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우리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이전의 죄악된 삶이 다 결산되었고 옛사람의 죄악을 청산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덩달아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는 극이 세례식입니다. 짧은 드라마요 퍼포먼스가 곧 세례식입니다. 부활주일에 세례식을 갖는 교회 전통이 그래서 옹호가 됩니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전에 먼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요단강에서 물에 잠기셨습니다. 원래 ‘세례’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물에 잠기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잠겨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동방교회에서 혼돈의 물에 갇혀 죽음에 이른 것으로 봅니다. 혼돈의 물, 구약성경 전반에서 물은 혼돈과 암흑의 세력이나 심판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물은 특히 노아 홍수에서 물로써 심판하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혼돈의 물, 흑암의 물, 죽음의 물, 심판의 물에 잠김으로써 완전히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는 “내가 받는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는 이유가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길인데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메시야로서 왕권을 얻으면 자신들을 예수님의 왕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실 때 “내가 받는 세례”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7-38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 곧 고난의 잔, 죽음의 쓴 잔을 말씀하고서 “내가 받는 세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죄인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아울러 하나님께 처절하게 버림받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내다보면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돈과 죽음과 흑암과 심판의 물에 푹 잠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세례였던 것입니다. 물에 잠긴 예수님이 따시 물 위로 올라오신 것은 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내다보며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물밖으로 나오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독생자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부활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하기 위한 세례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기 위하여 물에 빠지는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기 위하여 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점철되고 죄악으로 누적된 삶, 총체적인 나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지, 우리 혼자 죽는 것이라면 영원한 멸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해서 예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게 하려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빠진 물이 그저 심판의 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물이 됩니다. 노아의 홍수의 물이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지만 구원의 방주를 그 위에 뛰우는 구원의 물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노아 홍수 때의 물은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노아의 가족 8명에게는 그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물이었던 바, 그들이 노아의 방주 구원의 방주에 타고 물 위에 띄움을 받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더 이상 심판의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에게는 구원하는 물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그 물은 곧 세례를 가리키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고 깨끗해져서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주가 물을 타고 가다가 결국 아라랏산에 걸려서 정박하고 그들이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아서 구원에 이른 것처럼, 또한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계신 어린양의 보좌 앞까지 인도되어 완성에 이르는 구원과 같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하게 찾아가는 것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즉 세례란 것이 공동체 입문의식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입문의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오신 하늘 아버지의 음성처럼 우리가 세례받을 때 들려오는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이후 평생의 삶에 걸쳐서 하나님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전 여정 동안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변화되어가는 계속되는 세례의 과정임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셔서 죄인의 대표로서 물에 빠져 죽으신 것이요 자신은 죄가 없는 분이시므로 물에서 걸어나오신 것이라면, 우리의 세례는 예수님과 합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하나되기 위하여 받는 세례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고 죽으심과 합했기 때문에 그의 다시 사심에 합해서 부활에 이르게 됨으로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세례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처한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서 그 이유를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부활하셔서 이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고, 이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으로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열쇠와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에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죽음과 인생의 지옥행의 키를 쥐고 계시다는 뜻도 물론 포함돼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심지어 예수님이 지옥에서 다시 살아나오셨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죽었다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극심한 죽음의 고통, 마치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온몸으로 받으실 정도로 육신적 정신적 형벌과 고통을 받으시고서 지옥에서 생환해나오신 것이 곧 그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 이를 근거로 지옥강하, 지옥에 내려가심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실제 4세기경부터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들어갔고 이후에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여러 논란도 있었지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은 사도신경의 조항에 예수님의 지옥 강하가 들어가는 게 맞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역사적으로 지옥 강하가 빠져 있습니다만, 종교개혁가들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다음에 지옥에 내려가심을 고백하고서 사흘 만에 부활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존 칼빈과 우리 교단의 신학인 개혁신학은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물리적 공간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전후에 극심한 영적 고통을 받으심으로 해석하며 지옥 강하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통해서 드러난 극심한 고통, 곧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적 고통이나 혹은 장사지내고서 사흘 간 죽음에 머문 기간에 받은 죽음의 고통이 지옥강하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으로 고통과 사망을 몸소 겪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과 같은 인생의 모든 혹독한 고통을 영적으로도 겪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사망의 열쇠뿐 아니라 지옥의 열쇠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영역뿐 아니라 지옥의 영역 또한 주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놓이게 된 것이요, 죽음에게 종노릇하는 인생에게 생명의 소망을 주실 뿐 아니라, ‘내 삶이 지옥같다’고 탄식하고 절규하는 인생들에게 먼저 자신이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통과 하나님의 버림받음을 경험한 자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환난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돌봄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심을 알려주시려고 자신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9년에 “죽음을 준비하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너는 지옥과 영원한 고통을 네 자신 안에서... 보아서는 안된다... 천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는 너 때문에 지옥에 갔고, 영원히 저주를 받은 자처럼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너를 보고 너 자신 안에서 너를 보지 마라... 그는 지옥의 문을 부숴버렸고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이끌어내셨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셨다.”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마치 지옥에 내려가신 것처럼 고통을 받으셨던 바, 그것은 지금 여기서 지옥의 고통과 같은, 마치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환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찾아와주셔서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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