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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2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남아 있는 안식 (히 4장 1-11절)
월요일 아침에 유튜브 전주동산교회 채널에 ‘마음의 동산’을 매주 올립니다. 한 주는 제가 하고 한 주는 부교역자가 진행합니다. 내일 월요일에 올릴 ‘마음의 동산’은 ‘어떻게 새해를 맞이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출애굽시켜주시기 위해서 첫 유월절을 허락하셨죠. 유월절이 들어있는 아빕월, 나중에는 니산월이라고 불리는 달을 1월로 정해주셨습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달을 새해 첫달로 지정하시므로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바로의 왕권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참된 왕으로 섬기게 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라는 것이겠죠.
나중에 유대 왕조가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1월이 바뀝니다. 유대 월력으로 7월인 티슈라월을 새해의 첫달로 바꿉니다. 7월에는 구약의 주요 절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요. 7월 1일이 나팔절, 7월 10일이 대속죄일, 7월 15일부터 한주간 진행되는 초막절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절기가 있는 7월을 새해의 첫달로 삼은 것입니다.
7월 1일 나팔절은 우리에게 신년 1월 1일과 같습니다. 나팔절에는 숫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어서 신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룻동안 노동을 금하고 안식하면서 성회를 갖고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을 때도 나팔을 불었는데요, 나팔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주로 전쟁 때였습니다. 전쟁을 소집하거나 공격의 개시, 마침을 알리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혹은 적들의 공격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사용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선포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나팔을 전쟁 맥락에서 사용한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곳이 곧 전쟁터였기 때문에 전쟁 맥락에서 주로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새해 첫날을 맞으면서 유대인들이 나팔을 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왕권을 새롭게 마음에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따라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갖게 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새해도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왕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통해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나팔이 불릴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고 우리가 부활할 때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죠.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리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예수님은 나팔 소리와 함께 이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나팔 소리와 함께 개시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5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우리가 다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입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존의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을오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어야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왕권을 온전히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기 위해서 우리 몸이 전혀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등극,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관련이 깊습니다. 나팔을 불며 새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우리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므로 참된 안정과 번영을 소망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언제 또 나팔을 부냐면 안식일이 시작할 때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지기가 지붕에 올라가 안식일임을 알릴 때도 나팔을 붑니다.(평화신문 2013.9.1. 참고) 안식일을 맞이하면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한주간의 제칠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 주의 끝입니다. 한 주를 마무리하면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면서도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과 시작에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의 끝이고 우리의 부활은 새하늘과 새땅의 시작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이 초림해서 선포하시고 세우신 하나님나라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끝이고 시작입니다. 끝과 시작에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0년 마지막주일입니다. 지금은 연말연시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에, 우리의 종말론적인 소망, 참된 안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더욱이 올해 2020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한 해였습니다. 코로나의 창궐로 인해서 지금에까지 우리 모두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삶의 제한과 불편뿐 아니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토록 고생스런 한 해를 지나오면서 여전히 이 고생이 계속되는 연말에 우리가 하나님이 주실 참된 위로와 평강과 안식을 소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누가 안식일, 주일의 가치를 아느냐면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만이 안식일의 참된 가치, 주일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지도했던 한 청년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 그러니까 이분의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이분의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살 많은 딸과 이제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들을 둔 가정의 가장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입니다. 남겨진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요, 돌아가신지 얼마안된 남편이 꿈에서 나타나 교회를 다리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던 집안이어서 이분도 놀란 거예요. 꿈에서 들은 말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를 잘 다니셨고 자녀들은 제가 지도하는 청년부에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그분이 보험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천성 상 보험 영업이 맞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찾아다니고 말을 많이 하는 그러한 직업이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자녀를 키우고 생계를 꾸려가려다보니 맘에 맞지 않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주야로 열심히 뛰어나녔다고 합니다. 이분이 말하기를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특히 하루를 끝마치고 집에 늦게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보험상품을 이야기하는 일이 많았는데요,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피곤한 상태로 집에 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여서 밤에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밤에 안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낮에 힘들게 바쁘게 하루를 보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안식일, 오늘 우리에게는 주일인데요 이 주일에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야 안식의 참된 가치와 맛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대해 말씀합니다. 안식이라는 주제로 성경의 구원 역사를 개관합니다. 그런데 안식을 도입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히브리어로 보면 지금 읽은 창세기 2장 2-3절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문장의 각 문장은 일곱 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문장의 가운데 단어가 바로 “일곱째날”입니다. 의도적으로 ‘일곱째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목적이 엿새 동안의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칠일째의 안식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문명역사를 보면 일과 쉼의 순환이 어느 문명에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문명은 나흘, 닷새, 엿새, 여드레, 심지어 열흘을 한 주간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에까지 꾸준히 지속되어오고 인류의 표준이 된 것은 칠일을 한 주로 한 이러한 양식뿐입니다. 칠일의 한 주, 그리고 칠일째 되는 날의 안식이 우리의 내적 존재 양식과 일치하기 때문이겠죠.
하나님은 엿새 동안 힘써 창조하시고 창조의 일을 완수하시고서, 다 마치고서 제칠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제칠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르죠. 안식일이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 동사 ‘사바트’에서 파생된 단어인데요, ‘그치다’, ‘중지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일을 그침, 일을 마침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동사 ‘사바트’는 ‘그치다’는 뜻만 아니라 두 번째 의미로 ‘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것은 일을 그치고 쉼의 뜻을 지닌 말입니다. (<안식>, 미르바 던 저 참고)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이라는 주제로 성경을 전체로 읽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를 마치신 후 제칠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안식을 도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누리고 계신 안식을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주시려는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바로의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해방시켜주시고 출애굽시켜주신 이유도 참된 안식을 약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죠. 십계명의 가장 중심부에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가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4계명은 이전 1-3계명의 하나님 섬김과 5-10계명의 이웃 섬김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은 이웃과 함께하는 쉼이요 공동체와 함께하는 안식일이요 주일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저, 25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출애굽기에 보면, 이후에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죠. 성막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는 회막이요 또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이라고도 불립니다. 회막이요 증거막으로서 성막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어떠한 약속입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성취를 나타냅니다. 이 언약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성막이요 이 언약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안식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안식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주셨고, 안식을 목적으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언제나 성취가 되어도 언제든 약속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안식의 일차적 성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셔서 참된 안식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을 온전히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못한 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리고 그 땅에서 누리게 될 안식을 약속해주셨는데, 그들이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결국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기회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서 그들이 복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오직 여호수와와 갈렙만이,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다음세대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그 땅을 차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기서 안식을 얻었지만 그것이 참된 안식, 영원한 안식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시편 95편에서 다윗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 역사를 회고하면서 오늘 자신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권면하기를 그때 그 광야의 조상들처럼 강팍해져서 불순종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여호수아가 제공한 안식,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안식이 끝난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할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이 여전히 그 당시 다윗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늘 미래에 남아 있고 소망으로만 남아 있는 안식, 여전히 약속으로 남아 있느 안식이지만, 그러나 오늘 믿는 우리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라고 또한 말씀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우선 이 말씀은 예수를 믿고 새 창조의 역사를 경험하여 새롭게 된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이 약속하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장)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강조점은 오히려 미래에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구약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거울이 되어서 우리는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대한 약속을 굳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최종적인 영원한 안식은 죽음으로써 얻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안식을 소망하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올 한 해가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나팔을 불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분투하며 수고하며 애쓰며 여기까지 오셨는데요, 이걸로 끝이 아니라, 이것으로써 모든 수고가 끝나고 참된 안식을 얻는 지점이 아니라, 새롭게 다가올 2021년 역시 우리가 이 안식을 고대하고 소망하면서 이땅에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견지하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안식을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13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이땅에서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땅에서 힘써 수고하고 행한 일의 따름, 그 일의 결과로서 그들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적 안식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안식 혹은 ‘쉼’이라는 히브리어로는 ‘메누하’가 있습니다. 헤셀이라는 유대인 학자가 ‘예언자들’이라는 좋은 책을 쓴 분인데요, 이분이 ‘메누하’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누하는 행복과 고요, 평화와 조화와 같다. 이것은 어떤 다툼이나 싸움도 없으며, 어떤 두려움이나 혼란도 없는 상태이다. 좋은 삶의 본질은 ‘메누하’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79쪽)
시편 23편에 나오는 ‘쉴만한 물가’도 ‘메누하’와 같은 어원입니다. 쉼을 주는 물가입니다.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분의 양떼인 우리를 쉼을 주는 물가로 인도해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랍비의 창세기 주석에 보면 일곱째 날에 무엇이 창조되었냐면 “고요, 평온, 평화, 휴식”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의 말,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없나이다.” 진정한 안식은 오직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땅에서도 안식을 누릴 뿐 아니라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므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을 모두가 얻고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두렵고 떨림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큰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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