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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8)
가장 큰 능력 (요 14장 1-14절)
최근 CBS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 서울 오륜교회 김은호목사님이 출연해서 자신의 목회 여정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 된 순간이 언제였나요?” 대답합니다. 성도들의 임종 예배 때라고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임종예배를 위해서 병실 문에 들어서면 가족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환자들 중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얼굴빛이 흑갈빛으로 변해 있고,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둘러선 가족들에게도 슬픔이 가득합니다. 먼저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부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리고서 간단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이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는지, 그래서 예수님이 이 영혼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셨고, 예수를 믿으면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이땅을 떠날 수 있다는 영광스런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환자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얼굴빛이 변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별의 슬픔 또한 사라집니다. 복음을 전하고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합니다. “지금 눈을 감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의식이 없는 분도 있지만 복음을 듣고서 확신을 가짐을 어떤 이는 말로 혹은 눈빛으로 또 고개 끄덕임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 “성도님, 잠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나요.”라고 이별하고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받습니다. “목사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이 순간이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된 때라고 말합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 확신시키고자 성도의 마지막 순간에도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교회를 섬기면서 참으로 많은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도들의 임종예배뿐 아니라 성도의 부모님의 임종예배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연락을 받고 갔지만 미처 신앙을 갖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계신 분을 위한 임종예배도 있었습니다. 아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저 역시 복음을 전했는데, 임종이 가까운 분들 중에서 한 사람도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꼭 임종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죽음이 가까이 온 분들은 병상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도의 임종예배 때는 주로 누가복음 23장 4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교회의 일원으로 예배를 드리며 섬기신 분들의 임종 순간에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된 임종을 맞이하도록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성찬에 참여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과의 연합을 공고히 해가는 게 성도이니까 임종의 순간에도 예수님과 온전히 합해서 온전히 일치해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죽음도 예수님처럼 맞이하고 죽자는 것입니다. 온전히 아버지 품에, 아버지 손에 맡기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멎으신 예수님처럼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고, 찬송가 가사처럼 “숨질 때에까지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3절)라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도전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 영생을 얻는 것, 내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확신은 예수님과의 연합,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 그렇게 부부의 하나됨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합해서 온전히 하나됨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과 말씀과 같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과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즉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니까 우리가 어찌하든지 예수님과 합해서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연합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장은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예수님의 고별 강화, 혹은 고별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아마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식사를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사이에 제자들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기도를 마친 후에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당국자가 보낸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가 됩니다.
고별 강화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핵심적으로 가르치시고자 하는 말씀은 스승의 떠남에 임박해서 혼란에 빠지고 동요하는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키고 예수님의 떠남으로 인해서 그들이 얻게 될 더 큰 유익,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혼란스럽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 중 한 명 가롯 유다는 이미 뛰쳐나갔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조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고 토로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겪으실 하나님의 버림과 하나님의 진노 받을 것을 내다보시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요 12:27)라고 토로하신 것입니다. 스승이 동요하니 제자들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지막 식사 자리라고 예감된 자리에서 배신할 제자가 뛰쳐나가고 수석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도 뒤숭숭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에 사로잡혀 요동하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뒤숭숭하고 불안하고 스승의 임박한 죽음 예고가 도대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어야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지낼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지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버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뿐입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어서 안심하자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임종의 때에 마지막 호흡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셨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되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아버지의 집에서 거할 곳을 마련하는 것임을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상황에 맞게 상황에 따라 어느 때는 유치원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가 생생하게 와닿도록 비유로써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것으로 인해서 제자들의 근심이 가중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은 마치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떠남이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처’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동사 ‘거하다’, 가령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등에서 사용된 ‘거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혹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떠남과 죽음이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인데 아버지의 집에 너희들을 위한 거할 곳을 마련하고 예비하면 다시 너희에게로 와서 너희를 그 거처로 영접하여 너희도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효력과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영원한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 안에 우리가 거하게 해주시겠다는 구원의 확신이요 내세에 대한 확신을 비유로써 제자들에게 쉽게 안심시키려고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이었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려는 길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길이요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길, 예수님이 떠나서 가시려는 길은 목적지가 아버지 품입니다. 아버지 품속에서 독생하지 예수님께서 아버지 품속으로 되돌아가시려는 길입니다. 그 목적지를 알지 못하니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함은 당연하겠죠. 제자 도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방금 읽은 6절의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은 도마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의심을 품기로 유명한 도마가 예수님께서 물었던 것입니다.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6절입니다. 그 길,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나있는 길, 하나님에게로 난 길, 하나님 품속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있는 그 길은 바로 예수 자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소유하면 바로 아버지 품속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을 알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길을 알고 싶어하고 도를 알고 싶어하고 삶의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다 길(Way)입니다만,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께로 나있는 길, 그 길 자체가 되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진리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해주시는 진리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거룩한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의 신앙개념의 확립이나 신앙사상의 발전이나 믿음의 견고한 터전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도 생각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을 성령으로 확립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지만 온전히 사랑의 연합 가운데서 하나이심은 성령 안에서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시고 그래서 또한 아들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이 구원이요 그렇다고 해서 구별과 구분이 말소되지 않은 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지만 온전히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써 구별됩니다. 자기를 아들로서 자기를 비움으로써 아버지와 구별됩니다. 아버지에게 복종함으로써 아들로서 구별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피조물로 창조주와 구별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복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별됨과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짐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에 결국 성령이라는 인격이 계시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일치되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론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결국 같은 내용이라고 말하는 신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원래부터 계시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활동인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결국 같은 말이라는 이해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결국 우리 구원을 위한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같다’는 신학명제를 제 자신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한 자신을 믿으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 되어야 할지 예수님이 도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온전히 하나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이요 그래서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진정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능력이요 절대자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믿음의 능력이요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능력입니다. 기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3-14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음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어제 우연히 차를 타고 오다가 극동방송을 들었는데 김장환목사님이 진행하는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게스트로 개원의협회장이고 산부인과 의사회장이신 김동석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분이 이제 곧 있을 의사협회장에 출마하시려고 하는 분이라는 소개였습니다. 이분의 아내가 사랑의교회 이혜옥집사인데요, 이분이 1990년대 초부터 사랑의교회에 출석하시고 구역모임 다락방에도 참여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런데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의사 부인이요 살기 좋은 강남에, 자녀들도 잘 자라주고 있어서 참 행복한 여자라고들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허전함과 늘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이 뭘까 알려고 생각도 하고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2007년에 ‘아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 ‘내 안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서 참된 평안이 찾아왔고 모든 관계들이 달라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말씀의 능력대로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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