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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1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끝까지 (삼상 29장 1-11절)
우리가 “참, 극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흔하지는 않아도 종종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거나 사건이 일단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이야기가 참으로 극적입니다.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 영원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향한 흘러넘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시고 실행하신 창조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역시나 처음 창조 때 각오하셨던 위험 부담이 컸던 예상처럼 사랑 때문에 창조했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창조는 사랑 때문이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받지 않을 수 없는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완벽한 자유의지를 지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인간에 의해 거절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죠.
역시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고통이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하는 자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시험하시는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일생이라는 시험 기간 동안 사랑이라는 시험을 치루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전 생애를 걸쳐 인생이라는 시험지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너의 외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신작 소설 <사랑이 한 일>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한 이야기를 깊게 들여다본 소설입니다. 아들 이삭의 독백으로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바치라고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이 자신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시험을 받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으면서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애끓는 마음을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시험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로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사랑 때문에 시험했고 사랑 때문에 아들을 바쳐야 했던, 모든 게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으로 가는 여정 내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한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한 마디 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아들 이삭이 장작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냐는 물음에 대해서 “그분이 요구하셨으니 그분이 마련하실 테지.”라고 말한 게 전부였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시험을 치루고 결판이 났을 것이지만 모리아산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미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보이는 대답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향한 전적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아브라함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무서운 것이면서 전적 신뢰요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시험은 일단락되었고 아브라함은 시험에서 통과했습니다.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테스트에서 통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랑 때문에 비롯된 창조였고 그래서 사랑 때문에 이후에 겪게 되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하는 사랑으로서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에서 통과했지만 그의 대다수 후손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중심되는 요구,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시험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시험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미래와 종말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 과정의 절정이요 역사 진행의 변곡점입니다. 이로써 종말이 왔고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창조를 완성하고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드라마의 극적인 결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입니다. 시험에 통과한 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긴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종말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극적입니다. 그래서 성경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극적 타결이요 극적인 결말입니다. 우여곡적을 통과하고 결국 창조가 완성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요 창조 목적 달성입니다.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풍성한 기쁨을 누리는 창조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에게도 시험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일생도 믿음의 시험의 연속이었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여러 시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생애 후반부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시험은 인생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기말시험이었던데 반해서 오늘 다윗의 일화는 작은 사건이 일어나고 일단락되는 작은 드라마의 작은 시험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결국 끝에 이르러 극적 타결이라는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끝까지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시험입니다. 해법이 보이지 않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해답이 있음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시험입니다. 결국 좋은 것을 주실 선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시험입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내정에 의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사울왕에게 쫓겨 유대 광야 이곳저곳으로 피신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는 불안이 늘 다윗을 뒤따라다녔습니다. 사울의 창끝을 피해 이리로 혹은 저리로 몸을 숨겨야 했던 다윗이지만 운좋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이유로 죽이기를 거부하고 그 사실을 사울에게 알림으로 사울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피신생활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닙니다. 얼마나 힘들었든지 도피생활 끝에 붙잡히 범인들이 붙잡히고 나서 오히려 잘 되었다고 말하고 그날 밤 편안한 잠을 잔다고 할 정도로 피신생활은 고통스러움의 연속입니다. 불안으로 점철됨 삶입니다. 발뻗고 잠을 자지 못하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지내는 고통입니다. 마피아 두목들이 호화스런 피신생활을 하지만 붙잡히기도 전에 단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대개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체포돼 종신형 혹은 사형 언도를 받기 전에 이미 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생활에 지쳤는지, 사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사울의 대적 블레셋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가드를 다스리던 아기스에게로 투항하고 그의 부하가 되고 그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저 남쪽 시글락의 한 성을 얻어서 거기서 6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주위의 여러 족속들을 약탈해서 얻은 이익을 아기스에게 공납하고 나중에 자신이 유다의 왕이 되면 잠재적 위협이 될만한 싹을 자르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고 그나마 나름 안정된 삶에 적응할 무렵, 위기가 발생합니다. 다윗의 일생에 작은 일화지만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결국 끝에 이르러 극적인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는 작은 드라마 사건입니다. 위기가 무엇인지 삼상 28장 1-2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의 근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신임하면서 자신을 향한 충성을 보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대적인 사울의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데 다윗도 함께 하라는 명령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까지 내려놓은 사람인데 아기스의 말을, 사울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왕으로 세움 받을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윗의 굳은 마음은 변질이 없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게다가 자신의 동족을 대적하여 싸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근심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가 나중에 왕이 된다 해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이미 받았고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 해도, 만약 자신이 이스라엘 군대를 대적하여 승리를 거둔다 해도 양심의 가책을 두고두고 받아야 할 것이고, 순리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불명예를 두고두고 받아야 할 것이고, 아기스의 의도도 자신을 왕 삼아주기 위함이 아님을 공언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도 도움이 될 게 없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절했다가는 속내를 들키고 충성심 없는 자라고 간주되어 블레셋 내에서 입지가 없어질 것이 불보듯 뻔한 딜레마적 상황입니다.
벗어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며칠을 불면의 밤, 근심의 시간을 보내고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결국 전쟁터에 나오게 된 다윗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9장 1-2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으이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인위적으로 사울을 제거하지 않았고 선으로 악을 대응했던 다윗이, 이제 사울을 죽이는 앞잡이노릇을 하게 된 비극적 상황 앞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전장에 끌려나오게 된 다윗은 이제 어쩔 수 없겠구나, 포기하는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사울을 죽이고 이후를 도모해야겠다는 인간적 야망도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들이 다윗에게 주어진 시험이 아니었을까요. 끝까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으로 일관해서 큰 손해를 당한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마지 못한 척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선택, 인위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처럼 마지 못한 척 자신의 인간적 야망과 욕심을 충족할 것인지, 만약 그렇게 해서 사울을 이어 왕이 된다 한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두고두고 후회할 일, 순리를 거스르고 인위적으로 한 일이 될 것입니다. 여태껏 인위적으로 인간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버텨온 다윗인데, 이 딜레마적 시험에서 무너져내릴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올곧게 응답할 것인지를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길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좀 안정을 찾은 블레셋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사울의 창의 위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받아줄 리 만무하고 다시 쫓기는 불안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기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다윗은 어느 정도 자포자기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자기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책임이 다윗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왜 이스라엘과 대립 관계에 있는 블레셋으로 기어들어온 것인지, 이미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탓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께서 이 또한 다윗을 훈련하고 단련하는데, 사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섣불리 어떤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은, 행동반경이 좁은 상황에 갇힌 다윗은 상황에 내몰려 결국 전장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데, 아기스왕의 절대적 신임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된 아기스의 용인술에 대해서 블레셋 방백들, 아마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방백들이 다윗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동안 숨겨두었던 속내를 드러내 사울과 연합해서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블레셋 방백들이 불안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아기스왕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아기스왕은 다윗을 믿었고 다윗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방백들의 반대 때문에 뜻을 접지 않을 수 없었고, 다윗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극적인 문제 해결을 보게 된 것입니다.
표정 관리할 극적인 해결의 과정에서 다윗의 반응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좋은 패를 쥐고게 되었지만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다윗의 포커 페이스일까요? 아니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복수나 하자, 사울을 제거하자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좌절되자 보여준 반응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적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문제 해결을 본 것은 분명합니다. 전자인 경우라면 당연히 해피엔딩이고 후자인 경우라도 두고 두고 후회할 일이나 불명예를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이므로 결국 다윗에 좋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어쨓든 다윗은 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경험하게 된 것이요, 이로써 고뇌의 밤은 끝나게 되었고 사건은 극적 타결을 보고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작은 시험에서 다윗이 시험에 통과했는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랑,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보여주었는지, 본문만 가지고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시편에서 여러차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보건대, 전 생애를 걸쳐 이루어진 시험에서 통과한 아브라함과 다윗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시작한 창조니까 사랑 때문에 종말이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작한 분이 마무리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물론 끝까지 가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기대를 끝까지 가져가는 게 어쩌면 제일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는, 그렇게 시험에 통과하는 인생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좁은길입니다.
지나영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의대를 나온 분으로서 미국의 존스홉킨스대 소아정신과 교수가 되신 분입니다. 이분이 최근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습니다. 대구 카톨릭의대를 졸업하고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인턴을 거치고 원하는 대학 병원에 레지던트 시험을 쳤는데 그만 떨어졌습니다. 그곳을 너무나 가고 싶었기에 1년 후에 레지던트 시험을 재수하기로 하고 남은 1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예전에 미국에 가서 1년간 어학공부도 하고 미국 의사 면허증을 따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미국 의사 국가고시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서 아예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미국에 남아 결국 존스홉킨스대학 병원의 소아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아정신과 의사로서 잘 나가던 그가 3년 전에 돌연 이름 모를 병마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병명을 알지 못한 채 몇 개월을 고생하다가 알게 된 그의 병명은 자율신경계 손상으로 인한 오한, 빈맥, 서맥, 저혈압, 어지럼증, 두통, 수면장애, 위장장애가 동시에 나타나는 ‘신경매개저혈압’과 ‘기립성빈맥증후군’으로 확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병은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고 완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적응하고서 일상을 살아가고 고된 의사로서 일해야 하는 병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 이후가 확연이 구분될 수 없는, 이제는 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불편하고 고통스런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이 기독교출판사가 아닌 일반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책 첫페이지가 성경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잘 나가던 인생이 거친 풍파를 갑자기 당하면서 그 고통의 과정을 이겨내고 극복하고 적응해가면서 느낀 소회를 나누는 책입니다. 이분은 강조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합니다. 긍정적인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강조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는 찬송가 구절을 인용하면서 ‘왜 내게 건강이라는 가장 큰 복을 앗아갔을까?’하며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복들을 세어보는 연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장 힘들더라도 원망하는 마음을 먹기보다는 조금 더 긍정적인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간증입니다. 결국 이분이 선택한 삶은 자기실현을 넘은 자기초월,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삶의 목표로 삼고 지금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 가운데서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분이 저랑 동갑이더라고요.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이제 후반전이 막 시작될 무렵에 이렇게 자기 초월의 길로, 사랑 가운데서 행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까지 이런 자세로 갈 수 있으면 우리 인생 괜찮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인생의 여러 사건들은 끝에 승부가 날 때가 많습니다. 끝에 결론이 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 끝에서, 하나님의 시험에 우리가 통과했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에 대해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응답했는지가 끝에 이르러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끝에 이를 때까지 불면의 밤, 고뇌의 밤,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의 대단원 결론 클라이맥스는 요한계시록이고 아브라함의 시험도 극적으로 대단원에서 해결되고, 오늘 다윗의 작은 사건도 결국 일단락됩니다.
끝을 아는 신앙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끝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면서 인내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끝을 알려주셨지만 당장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끝에 이르는 과정이 순탄할지 아니면 고통스러울지 알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결국 해피엔딩일, 소망을 말씀해주십니다. 결국 소망임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축복해주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결국 영생이며 새하늘과 새땅일 것을 알려주십니다.
한 사건의 견지에서도 이야기 형태로 진행되는 사건도 극적 해결을 끝에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끝까지 견디고 끝까지 믿고 신뢰하면서 그 과정에는 오직 인내와 감사와 긍정적인 자세와 태도로써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보인다면 우리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비롯된 시험에 합격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우리 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시는, 사랑으로써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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