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교수가 최근에 낸 <굿 라이프>라는 책에 보면 행복을 주제로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네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덴마크, 부탄, 영국, 그리고 우리나라입니다. 덴마크는 유엔에서 발표하는 국가별 행복 순위에서 가장 자주 1위에 등극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나라의 절반밖에 안되는 작은 나라지만 덴마크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 할 수 있는데요, 덴마크인들만의 라이프스타일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부탄은 행복 지수면에는 덴마크에 훨씬 못미치지만 인구 70만의 이 작은 나라가 행복을 국가의 정책 목표로 선언했습니다. 국가의 중요 정책을 결정할 때 ‘과연 국민들이 이 정책을 통해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나라입니다. 영국은 최근에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하는 등 국민들의 행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영국 통계청은 정기적으로 영국인들의 행복을 측정하고 있는데요, 다음 네 가지 질문을 통해 영국인의 행복을 측정합니다:
1. 전반적으로 요즘 당신의 삶에 얼마나 만족하십니까?
2. 전반적으로 당신이 인생에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다고 느끼십니까?
3. 전반적으로 어제 얼마나 행복을 느끼셨습니까?
4. 전번적으로 어제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습니까?
이상의 네가지 질문을 통해서 영국인들의 행복을 측정하는데 특별한 점은 2번 문항 “전반적으로 당신이 인생에서 하는 일들이 얼마나 가치 있다고 느끼십니까?”입니다. 이 질문은 영국인답게 삶의 의미와 목적을 묻는 질문을 넣어둔 것인데요 이로써 행복이란 인생의 의미와 관련돼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인데요. 행복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이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부의 수준에 비해서 훨씬 낮은 수준의 행복감을 경험하는 대표적인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행복 수준은 국가경제 규모와 국민소득수준에 근거해서 대략 예측이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GDP 수준으로 예측되는 것보다 훨씬 낮은 행복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행복이 경제적으로 잘 사는 것 이상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샘플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이 책에 보면 외국의 어느 심리학자가 행복의 본질을 다음 네 가지 차원으로 정의했습니다.
1. 즐거움을 경험하는 것
2.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가령 괴롭고 화나고 죄책감 들고 겁에 질리고 짜증나고 불안한 감정이 드는 부정적인 경험을 하지 않는 것
3. 타인의 웰빙(복지증진)에 기여하는 것
4. 자신이 성장하는 것
이 기준에 의거해 보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입니까?
시편은 1편 1절의 “복 있는 사람”이라는 두 단어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복 있는’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쉐르’입니다. 이 단어가 구약성경 다른 곳에서도 쓰였습니다. 신명기 33장 29절에도 ‘아쉐르’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여기서는 ‘아쉐르’를 ‘행복한’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글 개역개정에는 ‘행복한’이라는 한국말이 총 11차례 나오는데요 방금 읽은 신명기 33장 29절도 그 중 하나입니다. 이곳을 제외하고 10번이나 사용된 ‘행복한’은 히브리어 ‘토브’를 번역한 말입니다. ‘토브’는 가장 기본적인 뜻이 ‘좋다’, ‘선하다’입니다. 처음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창조된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좋았더라’가 히브리어 ‘토브’입니다. ‘보시니 행복하셨다’고 번역해도 무방합니다.
히브리어 ‘토브’를 ‘행복한’으로 번역한 10곳 중에서 한 곳이 신명기 10장 13절입니다: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여기서 ‘행복’이 ‘토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하여 지키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을 위하여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의 ‘토브’ 곧 하나님의 행복이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범죄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목적도 사람의 ‘토브’ 곧 사람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행복하려고 우주만물과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들이 행복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목포에 가면 가장 큰 교회인 목포 사랑의교회가 있는데요, 거기서 목회하시는 백동조목사님께서 행복목회를 주창하고 행복목회 컨퍼런스를 정기적으로 개최합니다. 이분이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분은 목회철학을 ‘행복’에 두고 행복한 목회를 하려고 노력하고 계십니다.
오늘 시편을 시작하는 1편 1절의 처음 단어가 ‘아쉐르’ 곧 ‘복된’, ‘복 있는’으로 시작합니다. 이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번역해도 무방하지만 ‘복’과 ‘행복’에는 어감상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행복’은 ‘복’에다 ‘행’이 덧붙여진 단어인데요, ‘행’이 다행 혹은 요행이라는 의미의 한자말입니다. 국어사전에서 ‘행복’의 정의를 보니까 첫 번째로 나오는 뜻이 ‘복된 좋은 운수’입니다. 즉 행복이란 ‘우연히 찾아오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나오는 뜻이 ‘생활의 만족과 삶의 보람을 느끼는 흐뭇한 상태’입니다. 요즈음 우리가 보통 행복이라고 말할 때에는 두 번째의 뜻을 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절의 ‘아쉐르’를 단순히 ‘복 있는’으로 생각해도 좋고 ‘행복한’으로 생각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1편은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냐면 악인들과 엮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의인으로서 악인들과의 교제를 피하는 사람입니다. 악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을 지칭하는 다양한 표현입니다. 1절에는 세 개의 동사가 나옵니다. ‘걷다’, ‘서다’, ‘앉다’입니다.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다’, 죄인들의 길에 ‘서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다’입니다. 걷다가 서고 그리고 앉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꾀’는 악한 조언이나 충고를 가리킵니다. 악인들의 조언과 충고를 지침으로 삼고 따라간다는 뜻이 아니라 별 생각없이 어떤 충동에 이끌리어 악한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뇌나 망설임도 없이 감정에 이끌리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죄악된 성향으로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민이나 성찰도 없이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채 사탄의 목소리에 이끌려서 죄악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들의 꾀를 따르며 걷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좀더 진전된 죄의 길을 가게 됩니다. 무심코 걸어가던 사람이 이제는 멈춰섭니다. 죄인들의 길에서, 기로에 섭니다. 갈림길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래도 되나’, ‘이쪽은 분명히 죄인들의 길인데 그리로 가도 되나’는 걱정이 슬며시 자신을 사로잡습니다. 잠깐의 내면의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수도 있죠. 그래서 마음의 갈등이 생겨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여 오만한 자들과 자리를 함께 하게 됩니다. 오만한 자들과 회합을 갖고 이제 본격적인 프로 죄인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죄를 짓는데 프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갈등도 없습니다.
죄가 한 사람을 점령해버리는 구체적인 진전을 ‘걷다’, ‘서다’, ‘앉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표현했습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범죄를 생각하면 1절의 악인의 모습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형 가인과 동생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창세기 4장 5절에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동생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음을 알고 가인의 내면에서 화가 끓어올랐습니다.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말은 직역하면 ‘가인의 얼굴이 내려갔다’입니다. 아마도 가인은 눈을 내리깔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눈을 돌려버린 것이며 하나님을 더는 보지 않겠다는 시선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왜 화가 났을까요? 동생에 대한 시기심 때문일까요?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다는 열등감 때문일까요? 아마 가인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평가나 칭찬이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고, 보잘 것 없는 아벨에게 뒤쳐졌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가인은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의 원인을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출발했습니다. 악한 성향을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서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거두어버린 가인을 찾아와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6-7) 하나님은 가인에게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할 것이 없다.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한다면 두려울 것도 없고, 좌절할 것도 전혀 없으니 너와 죄 사이에 일어나는 끝없는 싸움의 정체를 바로 깨닫고, 죄가 끊임없이 너를 넘어뜨리려 하겠지만 죄에 지배당하지 말고 죄를 다스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삼키고 지배하려고 하지만 죄에 지배당하지 말고 죄에 굴복하지 말고 도리어 죄를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지금 가인은 죄인들의 길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죄의 출입구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두 번 무너지면 ‘길’이라는 말의 뜻처럼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가인 내면에서 너무나 죄악된 성향 탓에 자연스럽게 끓어오르는 분노, 미움, 원한 등에 사로잡혀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죄를 이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서 걸어갔던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죄의 기로에, 죄의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가인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4장 8절입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가인은 하나님이 제사를 받으시느냐 안 받으시느냐 하는 것보다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아벨에게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가인은 자기보다 보잘 것 없는 아벨이 자신의 위상을 해친다는 사실에 마음이 상했고, 자기애 때문에 자신을 불편하게 만든 아벨을 죽였던 것입니다. 자신 때문에라도 아벨은 사라져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계획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아벨을 들로 불러내어 죽여버렸습니다. 가인이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주저 앉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인의 삶과 그의 후손의 삶을 들여다보면 죄를 짓는 것이 그들의 주요 삶의 거처가 되었고 자기애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갔습니다.
본문 1절에서 행복한 사람이란 내면의 죄악된 충동을 따라 생각없이 걷다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지점 앞에서 잠깐 갈등하며 서 있다가 자기애를 결국 포기하지 못하고 죄의 자리에 주저앉아서 그것이 삶의 방식이 되고 죄 짓는 게 거처가 되는 그러한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늘 가까이에 두고 묵상하기도 하고 소리내어 읽기도 하며 그 말씀을 적용해서 삶의 지침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행복 매뉴얼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는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무엇이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인생의 본질을 말씀이 제시해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따라 하나님에게로 이르는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마치 어떤 사람과 같냐면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나무가 물이 없고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있으면 잎사귀도 푸르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그 동일한 나무를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곳에 옮겨 심으면 때가 되면 열매를 맺고 잎사귀도 마르지 않습니다. 관건은 나무가 심겨진 곳에 풍성한 물이 있느냐 물이 없느냐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이냐 없는 사람이냐,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냐 그렇지 못한 사람이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하게 축복해주셔서 어떠한 보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의 삶에 성경 말씀의 진리가 실천되므로 자연스럽게 복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의 복으로 복주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곳에서 살아가다보니 풍성한 열매를 맺고 형통하고 복된 인생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물을 공급받는 나무는 자연스레 번성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인생은 자연스레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살게 돼 있다는 말씀입니다. 설사 고통과 환난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행복한 인생은 물이 풍성하게 흐르는 곳으로 옮겨 심겨진 나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며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참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연결되어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7-8)
인생에게는 두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뿐입니다. 두 가지 길 밖에 없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악인들의 꾀를 따라 걷다가 죄인들의 길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죄를 이기지 못하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죄를 먹고 마시며 죄를 거처삼아 죄악된 삶의 방식을 따라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말씀을 삶의 원리를 삼아 순종할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풍성한 임재에 뿌리를 내리고 결실을 맺으며 살아갈 것인가, 인생은 언제나 두 가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길’과 ‘악인들의 길’입니다. 오직 ‘의인들의 길’만 여호와께서 아시는 길입니다. 오직 ‘의인들의 길’만 창조주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입니다. 오직 ‘의인들의 길’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길입니다. 반면 ‘악인들의 길’은 하나님 없는 인생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인생이요 자기애를 끝까지 관철하는 길이요 그래서 결국은 멸망입니다.
<테드, 미래를 보는 눈>이라는 책에 보니 프랑수아 를로르의 소설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이라는 소설 내용이 나옵니다. 꾸뻬 씨는 정신과 의사로서 전 세계를 방랑하며 행복의 비법 23가지를 찾아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가 어렵사리 찾아낸 행복의 비법이란 것이 고작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별로 대단할 것 없는 누구나 아는 평범한 것들이었습니다. 결국 행복의 파랑새는 지금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영과 진리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는 것이 행복이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이 행복이요,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이 말씀에서 가르쳐준 원리대로 삶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래서 하나님이 알아주고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늘 우리는 끊임없이 죄의 유혹과 내면의 죄악된 성향의 충동 아래서 살아가고 있지만, 생각없이 일어나는 죄의 충동을 따라 걷지 않고 늘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순종하므로 죄인들의 길에 들어서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악을 거처 삼아 자리를 잡고 앉지 아니하므로 더욱더 복된 삶을 살아가시는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 11:28-30)
오늘 말씀은 다소 독특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늘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만, 오늘 본문에서만은 “내게로 오라”고 직접적으로 초청하셨습니다. 이러한 초청은 신약성경에서 이곳이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향하여 자신에게 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모두를 향하여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쉬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안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좁게 보면 당시 종교 교사였던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과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그들이 역사와 전통속에서 만들어낸 구전(구두) 율법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613가지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구전 율법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던 당대 유대인들은 구전 율법도 기록된 말씀만큼이나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구전 율법의 방대한 의무 조항은 율법 자체보다도 훨씬 더 무거웠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규정들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준은 턱없이 올라만 가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좌절감이나 실패는 점점 깊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죄와 죄책의 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래 ‘수고한’이라는 단어는 ‘피곤한’과 비슷한 뜻입니다. 힘든 일이나 오랜 여행 때문에 지친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짐 진’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눌려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삶의 무게 때문에 피곤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신에게 나아오라고 친밀하게 외치시고 계십니다. 자신에게 나오면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데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 우리를 부르심이며 예수 믿는 자들을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멍에와 종교의 짐에 치여 사는 인생이 아니라 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삶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오기만 하면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이어지는 29절에서는 제자의 길(제자도)이라는 멍에로 부르셨고 그 멍에를 짊어질 때 오히려 쉬게 될 것임을 덧붙이셨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오라는 초청은 제자의 길로 나오라는 초청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라는 부르심입니다. ‘멍에’는 본래 무거운 짐을 나르기 위해서 두 소를 연결하는 나무로 된 구조물입니다. 그래서 ‘멍에’는 비유적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것에 종속되는 것을 묘사합니다. 신약성경에서 ‘멍에’는 모두 율법을 나타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라’고 말하시므로 율법의 본뜻을 성취하고 계시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르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와서 자신에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본래 정신을 따라 율법을 지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게 배우라’는 동사는 제자가 되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에서 “제자로 삼아”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배우라’는 동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선교적 명령이며 승천하실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위탁하신 대위임령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가서 제자 삼는다’는 것이 복음 전파해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게 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이는 예수께 대한 인격적 헌신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우리를 초청하심은 먼저 예수님을 믿고 그분에게 자신을 드리고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확립하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가르침에 충실히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멍에나 짐은 “내게로 오라”와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요청하시는 예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와 교제입니다. 예수님과 맺는 관계 때문에 오히려 그 짐이 가볍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로 와서 배우면 우리가 쉼을 얻게 되는 이유는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시 종교 교사였고 율법의 해석자였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는 대비되는 예수님의 인격적 면모입니다. 많은 바리새인들이 교만, 명예와 자리에 대한 선호, 특별한 칭호로 부름 받기를 원함,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 있다는 특권의식이 있었던데 반해서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12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하나님의 선함이나 예수님의 겸손함이 잘 대조되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여느 율법 교사와는 달리 율법의 본래적 의미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쉬었습니다. 예수님이 부과한 율법 해석의 짐은 가벼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길이라는 멍에는 쉬운 멍에이고 짊어지기에 무겁지 않은 가벼운 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로 나온 사람들은 비록 멍에를 지고 짐을 짊어진다고는 해도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멍에가 쉽고 그 위에 올려놓는 짐이 가볍다고는 하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자의 길은 큰 희생을 요구합니다. 제자의 길은 삶을 예수님께 인격적으로 헌신하고 위탁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이고 ‘좁은 문’입니다.
로완 윌리엄스의 책 <제자가 된다는 것>에 보면 ‘제자’의 원래의 뜻은 말 그대로 어떤 스승의 ‘학생이 됨’을 뜻합니다. 제가 지난 권사회 연합 헌신예배 때도 강조했습니다만 신약성경에서 ‘제자’는 오늘날의 학생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제자란 스승과 함께 거하면서 스승의 모든 말을 듣고, 스승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고, 스승의 집문 앞에서 자고, 스승이 식탁이나 거리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지 지켜보는 사람을 뜻합니다. ‘제자’는 배우는 자로서 쉬지 않고 스승을 바라보며 스승의 말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며 이를 위해 스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제자가 이렇게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변화입니다! 스승을 그대로 모방하여 닮아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도입니다. 누가복음 14장 27절에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기독교의 대표적 고전인 '천로역정'에서도 배움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순례자 크리스천이 ‘의심의 성’을 탈출해 ‘기쁨의 성’에 다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기쁨의 성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목자 네 사람의 영접 가운데 비밀스런 계시를 받습니다. 목자들의 이름은 각각 "지식" "경험" "경계(신중함)" 그리고 "성실" 이었습니다.
순례자가 ‘의심의 산’을 벗어나 ‘기쁨의 산’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은 중년의 위기를 잘 넘기고 후반전에 잘 진입한 것을 의미합니다. 기쁨의 산에 올랐을 때 만난 네 명의 목자가 준 계시는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후반전을 어떻게 잘 달려갈 것인가에 대한 지침입니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특별히 지식과 경험과 경계(신중함)와 성실이 필요합니다. 그중 지식을 먼저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 심장합니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배움을 멈추기 쉽기 때문에 이를 특별히 강조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배움을 멈추면 고집을 부리기 쉽고 자신의 과거 성공이나 실패에 얽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배우는 사람이 먼저 보고 앞서 걸어가는 지도자가 됩니다. 지속해서 배우는 자가 새로은 시대의 장을 열게 됩니다. 요셉, 다니엘, 바울 등 성경의 인물들은 배우는 자세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격변하는 시대 속에 살면서도 시대를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가졌고, 결국엔 하나님 나라의 별과 같이 빛나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단순한 학생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만남을 유지하는 스승과 학생 관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우리는 이렇듯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 일생을 살아간 성프란체스코가 어느 날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가 영안이 열려서 하늘 보좌를 보는데 보좌가 비어 있어요. 그래서 물었습니다.
'천사님, 저 자리는 왜 비어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프란체스코가 장차 앉을 자리란다. 그 자리는 교만한 천사가 쫓김을 받은 자리이니 겸손한 성프란체스코가 앉을 자리로 예비해놓았느니라'
이 놀라운 광경을 본 제자가 성 프란체스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자라고 생각한다.'
'선생님 말씀은 온당치 못합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만약 우리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이 세상 악한 자에게 주었다면 나보다 훨씬 더 선한 자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은혜를 많이 받고도 보답하지 못한 죄인이다.'
그때 제자는 마음으로 중얼거렸습니다.
'하늘에서 보여준 환상은 참으로 옳은 일이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부여하신 짐을 가져가지는 않으십니다. 단지 우리에게 그 짐을 지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져야 할 짐을 가볍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멍에를 지는 것은 짐에다가 또다른 짐을 추가하는 격이지만 멍에는 다른 짐을 가볍게 해주는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도 멍에로 인해서 감당할 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끄는 짐승들이 멍에를 함께 멜 때 그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끌 수 없는 무거운 짐을 끌고 가기도 합니다. 멍에는 자기 힘으로는 벅찬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짊어지지 못할 정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러한 멍에 아래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멍에’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기 짐, 자기 십자가를 지는 법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감당하셔야 했던 짐은 우리 모두의 짐을 합한 것보다 더 무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두의 짐을 친히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로 와서 배우라고 초청하시는 것은 자신과 함께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자는 초청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발맞춰 인생의 여정에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나뿐 아니라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메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발맞춰 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께서 이 짐을 어떻게 지고 가셨는지를 보고 똑같이 하라는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영국에서 어떤 여행사가 영국 런던에서 에딘버러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에 대해 상품을 내걸고 공개 응모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대답이 있었습니다. 비행기로, 혹은 기차로, 비행기로 가면 공항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버스로 가야 한다 등 여러 대답이 있었습니다. 1등으로 당선된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 1등 수상작이었다고 합니다. 가장 빨리 가는 길,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이라는 엉뚱한 듯하면면서도 기발한 대답이 1등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과 동행하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인생은 지루하거나 의미 없게 느껴질 수 없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에도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중에 하나는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은 로마서 1장에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겸손합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함께 살아갑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찬송가 가사에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최근에 돌아가신 김종필씨의 묘비가 화제가 됐습니다. 묘비 전문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생각이 곧고 바르므로 사악함이 없다를 인생의 도리로 삼고, 경제가 궁핍하면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는 말을 치국의 근본으로 삼아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하여 헌신 진력 하였거늘, 만년에 세월의 허망함을 한탄하며 쓸데없이 말 많은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그냥 웃기만 한 자가 내조의 덕을 베풀어준 영세 반려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이분의 명언이 있습니다. 그는 정치는 허업이라고 자주 말하고 했습니다. 기업인은 노력한 만큼 과실이 생기지만 정치는 과실이 생기면 국민에게 드리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정치인은 열매를 맺어놓으면 국민이 따먹지 정치인은 먹는 건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러한 JP가 자신의 묘비에다가 ‘세월의 허망함’을 말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잠시 잠깐 후면, 승리는 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싸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며, 나는 생명수 강가에서 쉼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예수님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신앙을 바로 이해한 분입니다. 선한 싸움을 마치고 예수님이 주시는 안식을 사모하면서 그는 영면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드러운 초청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로 와서 예수님의 가르침이라는 멍에를 메고서 예수님에게서 배우면 참된 쉼을 얻게 될 거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는 예수님의 제자도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무거운 짐을 예수님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도의 핵심은 두 구절로 집약해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그리고 갈라디아서 6장 2절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것은 자유롭게 된 사람이므로 노예처럼 굴종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의 동기로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에 있어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고 서로 서로의 짐을 함께 짊어지므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에게 참된 자유와 참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대니얼 코일의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는 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그는 3년간 프로스포츠팀, 특수부대, 영화사, 코미디 극단, 보석 도둑단 등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집단을 찾아다녔습니다. 성공한 집단은 일정한 행동 양식이 있는데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친근감, 안전감, 연대감, 소속감을 은연중에라도 심어주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조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두뇌의 최고 관심사는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에는 항상 주변 사람 특히 윗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걱정하는 부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위험감지 기능이 워낙 반사적이기 때문에 조직의 리더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안전신호를 구성원들에게 발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는 해마다 전 직원의 50~70%가 퇴사해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경영진은 신입사원 교육에서 A팀과 B팀 두 팀으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A팀에게는 일방적으로 회사의 성공신화를 교육했고 끝날 때 회사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나눠주었습니다. B팀에게는 “언제 행복을 느끼나?” “일이 잘될 때는 언제인가?” 등의 질문을 던졌고 끝날 때 회사 로고와 직원 이름이 들어간 티셔츠를 선물했습니다. 7개월 후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B팀의 잔류 비율이 A팀보다 250%나 높았습니다. ‘회사가 당신을 생각한다'는 친근감, 소속감, 연대감 등이 사소한 듯하지만 회사원들의 심리적 안정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생존에 위협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서 퇴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어떤 성공한 사업가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모든 일의 전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성원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이나 안전감을 심어주므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고 그 결과로서 구성원들이 조직을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도 ‘사랑한다’는 사실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조직에서 리더가 칭찬이나 감사 표현을 자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심리적 안전감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다윗 왕조가 바벨론에 의해서 침공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은 예루살렘의 많은 귀족과 왕족을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아갔습니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지리적으로만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여태껏 자신들의 삶의 안전감을 제공했던 고향땅의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유일하신 여호와 신앙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었던 그들의 신앙이 성전 파괴와 함께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동안 그들의 삶의 울타리를 제공했던 든든한 세상이 상실되자 그들은 이국 땅에서 안전감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겠죠. 이러면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예전의 안전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복원력이 발동될 것입니다. 안전했던 시절, 고통 없던 시절, 든든한 울타리를 복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생겨날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소망이 간절해지는 것이죠.
이러한 간절함에 불을 지피기라도 하듯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제외한 거짓 선지자들은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돌아갈 준비나 하라는 식으로 거짓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포로들의 열망에 부합하는 메시지여서 파급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곧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예루살렘에서 듣게 된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쓸 때 없는 기대 접으라고. 진정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엿보게 된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짓된 예언에 힘을 입은 거짓된 소망을 산산조각냅니다. 돌아가긴 할테지만 70년이나 후에나 가능할 것이며, 그러니 곧 돌아갈 거라는 쓸 때 없는 기대는 접고 그땅에서 잘 정착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라고.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멈추지 말라고. 이것이 예레미야가 쓴 편지의 주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어려운 시기인 ‘환난과 시련’을 잘 견디고 인내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때를 분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생의 ‘환난과 시련’의 시간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삶의 매순간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서 진행됩니다. 본문 4절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멸망이 죄 때문이라거나,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거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땅을 상실하고 포로로 잡혀갔다는 여러 설명들이 성경에는 분명이 있지만 이 모든 미세한 차이가 되는 원인들을 종합하는 가장 근저에 있는 설명은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권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냐면 70년간 거기서 복역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의 정한 때는 70년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진한 낙관적인 기대 곧 얼마 안 있어 고국으로 돌아올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70년 만기 출소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복역의 기간이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기간은 고향땅을 상실하고 더불어 안전감을 상실한 채 생존의 위협의 고통의 시간으로 하나님이 정한 기간이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즉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사건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우주에 없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2-8)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매일 매 순간을 다스리십니다. 인간 존재의 전 범위를 포괄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에는 만사가 다 때가 있습니다. 만사가 발생하기에 알맞은 경우와 적절한 기회가 있습니다. 세상 만사의 우발적 사건처럼 보이는 것들이 적절함과 적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꼭 맞는 때에 만사를 행하십니다. 완벽한 타이밍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분별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고 환난과 시련의 시간에 관해서라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완벽한 타이밍이 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딱 맞는 때를 알고 있음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시간표를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이 환난을 얼른 가져가 주십시오. 가져가시기 전까지 저는 죽을 것만 같아요’라고 하나님께 협박하기보다는 우리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느 때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지금이 나에게 주어진 ‘환난과 시련’의 시간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지혜롭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막무가내로 ‘제발 이 고통 좀 치워주세요’, ‘이 고통속에서 저는 살 수가 없어요’라고 하나님께 떼쓰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고 만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면서 어떻게 이 시련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구하는 성숙한 신앙이 ‘환난과 시련’의 시간에 필요한 지혜입니다.
둘째, 고난과 함께 지내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고통과 함께 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바꿔놓은 삶의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많은 포로민들이 이제 곧 고국에 돌아갈 거라는 거짓된 기대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는 둥 마는 둥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정한 때를 알고 그 손길을 신뢰하는 사람은 환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과할 때도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민들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안전감을 상실한 채 이국 땅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하는 삶이라도 거기에 적응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포로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돌아갈 생각만 하고서 그땅에서 얼렁뚱땅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하루 하루 충실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가야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반드시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지금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이라는 시간이 환난과 시련이라는 포로기라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생존하고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살 길을 열라는 것입니다. 고국땅에 돌아갈 것만 오매불망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사는 둥 마는 둥 살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마치 여기서 영구히 살아갈 것처럼 그렇게 충실히 성실히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계획하고 집도 짓고 텃밭도 가꾸고 때가 되면 시집 장가도 가고 한 세대가 지내서 아들 딸들도 시집 장가보내고 할 수 있는 한 보란 듯이 번성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땅 바벨론에서도 말입니다. 심지어 7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너무 울분에 차서 ‘얼른 바벨론아 망해버려라’ 그러지 말고 어차피 그래도 안망하고 하나님이 망하게 할 때 망할 거니까 그때까지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도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포로민에게는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가 환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과할 때 고통을 얼른 떨궈버리려고 시도하지 말고 고통과 함께 지낼 방안을 모색하라는 말씀으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고통이 있으되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어질테니까 고통과 공존을 모색해보고 고통과 함께라도 정상적이고 행복한 생활이 가능할 것인지를 한 번 타진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는다면 고통과 함께 기꺼이 동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셋째,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드십시오. 본문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환난과 시련’은 재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평안을 원하시고 결국에는 희망 찬 미래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고통속에서 지내야 할 기간을 정하셨다 할지라도 그 고통은 우리를 잿더미에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소망에 가득찬 미래를 실제로 가져다주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인생의 온갖 시련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함에 있습니다. 환난과 시련으로 인해서 우리를 좌절로 몰고 가려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일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드는 사람은 인생의 환난과 시련의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반응할까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이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주권적 뜻에 복종하고, 비록 역경을 지나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은 신뢰가 있다면 우리 인생에 환난과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전도서 7장 13절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이 구부러진 것 같을 때, 우리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얼른 하나님께 구부러진 것을 어떻게 펴서 곧게 하셔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곧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을 굽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곧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곧게 하시기 위해서 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구부러져 있다면 이 헛된 세상에서 돌이키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록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을 굽게 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주시는 이유가 우리를 죄를 깨우쳐주시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정해주시기 위해서 인생에 굴곡을 허락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서 인생의 굴곡의 과정을 통과하므로 깨어 있게 하시려는 선한 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우리의 환난과 시련도 통제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 안에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인생이 구부러져 있을 때에 더욱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구부러진 것들에 대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곧게 해주실 때까지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환난과 시련을 이용하십시오. 환난과 시련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체험하고 자신의 변화를 여는 열쇠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를 분별하고 고통과 함께 지내려는 각오를 다지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고 가는 것이 환난과 시련에 대처함에 있어서 다소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이라면, 좀더 적극적으로 환난과 시련에 임할 필요도 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회로애락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질 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을 열렬히 원해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환난과 시련기에 접어들면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2-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여기서 바벨론이라는 시련의 기간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정한 기간 70년을 줄여달라는 기도라기보다 이 기간을 잘 뛰어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모시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환난과 시련은 고통스럽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얼른 벗어나고 싶은 기간입니다만, 이 기간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친밀히 알고 더욱 사랑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분명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동안 변화되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신앙생활에 염증이 들었다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의 과정을 다 통과한 욥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욥기 42장 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현재 국무총리이신 이낙연 총리가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머를 모르고는 그분의 전체를 알 수 없다" 며 생전의 유머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출신으로 김 전 대통령을 취재하기도 했던 이 총리는 "반평생을 테러· 체포· 납치· 투옥· 연금 ·사형선고 같은 극단의 고통 속에 사신 분이 어떻게 저리 태평하실까 싶을 정도였다" 며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삶을 사신 분이기에 같은 유머도 다르게 들렸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DJ께서 정계복귀 직후에 주부들이 주로 보는 TV프로그램에서 하신 유머입니다. "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는데 하루는 집사람이 면회 와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나는 집사람이 하나님께 '남편 살려 주세요'하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집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서운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이기는 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몇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언제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7월 한 달간 ‘환난과 시련을 이기는 법’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환난과 시련과 고통’에 앞서 우리를 점령하는 군대가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군대가 먼저 우리를 점령합니다.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고통의 징후만 보고서도 몸은 먼저 두려움에 반응합니다. 두려움에 벌벌 떱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으로 건너가실 때 큰 광풍이 불어닥쳐 위태로운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배에 물이 가득차게 된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두려움이 물보다 먼저 배에 들이닥쳤습니다. 출항할 때 보이지 않던 두려움이 어느 새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함께 동승하고 있는 예수님은 배 깊은 곳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급박하게 전개되는 위기의 순간에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막 4:38) 제자들에게는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죽음의 공포를 코앞에 목도하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다급한 제자들의 요청을 따라,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람을 ‘꾸짖으시다’는 귀신을 꾸짖고 쫓아내는 예수님을 연상시킵니다. 실제로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다에게 한 명령,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점잖은 번역입니다. 그 뜻은 더 정확하게는 “입 다물어!”(Shut up!)입니다. 예수님의 위엄과 권능에 가득찬 명령 탓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막 4:39)고 말씀합니다.
가는 곳마다 이제 하나님나라를 가져오는 예수님의 움직임에 저항하면서 예수님의 운동 반대방향으로 불던 바람과 바다를 동원한 사탄의 방해를 자신의 권능으로 꾸짖고 물리친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을 향합니다. 제자들을 꾸짖습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 4:40)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아직도 나를 모르는구나! 얼마나 더 봐야 되겠느냐, 얼마나 더 경험해야 되겠느냐!’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폭풍 앞에서, 아니 폭풍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그 점을 몰라서 폭풍으로 인한 두려움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배에 두려움이 타게 된 것입니다. 배에 예수님이 타고 있음을 잊은 탓입니다.
두려움의 광풍이 순식간에 진압되고 고요함이 깃들었을 때 제자들은 또다른 차원의 두려움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준 대자연의 위압으로 인한 두려움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 4:41). 직역하면 큰 두려움으로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자신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준, 그래서 너무나 크게만 느껴졌던 대상조차 순간 진압해버리고 순종하게 만드는 이분은 누구란 말인가. 이분은 얼마나 큰 분이란 말인가.’ 인간을 사로잡고 옭아매고 힘겹게 하는 두려움이란 것의 실상이 폭로되는 것입니다. 막연한 두려움의 뿌리에 접근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허상이 드러나자 진정한 두려움이 다가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접한 사람들은 새로운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이전의 두려움은 환경이 누그러져서 사라진 게 아니라 더 큰 두려움을 가져온 예수님 때문에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전에 평안과 안락을 가져다 준 것이든, 두려움과 공포와 걱정을 가져다 준 것이든, 아니면 그저 그런 것이든, 예수님 앞에 서게 될 때 짜그라들며 자취를 감춥니다. 이제는 예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압도당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노예가 되든지, 아니면 더 큰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분에게 순종하므로 두려움에서 해방되든지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할 분을 우리가 모시게 될 때 여태까지 우리를 무서움에 떨게 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인생, 거기에 참된 평안과 참된 안전이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이 믿음으로만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시인 이성복씨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분이 언젠가 중국 계림에 갔을 때 500마리 호랑이 떼 앞에 먹이로 던져진 소를 봤다고 했습니다. 그 소가 파랗게 질려서 다리뼈가 부러지도록 울타리에 제 몸을 마구 던지더라는 겁니다. 이것이 어디 동물만의 문제입니까. 생사 앞에 선 누구나 이렇죠.
이분의 어머니가 99세에 돌아가셨습니다. 60대부터 오래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좋다 하셨는데, 죽기 전엔 일주일을 우셨다고 합니다. 울음을 참으려고 이불깃을 깨물었다고도 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도 85세까지 살다 가실 때 죽음 앞에 처한 그 눈빛이 이루 처량할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두려움이란 좀 사치스런 것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지낼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근심과 어려움만을 생각합니다. 우리보다 더 힘겨운 다른 사람의 극심한 고통은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자신의 문제는 태산처럼 크고 중요하게 여기지만,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각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고통을 함께 나눈다면, 이것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컴패션’(Compassion)의 뜻입니다만, 자신의 문제 때문에 두려워하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시편 63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표제를 보니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 가운데 두 번이나 광야로 내몰렸습니다. 광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장인이었던 사울왕이 자신을 질시해서 죽이려 할 때 그의 추격을 피해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광야를 수색해들어오는 사울의 군대를 피해 광야 이곳저곳을 도망다니며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채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도망나닌 것입니다. 다윗이 나중에 왕이 되고서 또다시 광야로 내몰렸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찬탈했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급히 광야로 줄행랑을 쳐야 했습니다. 이 두 경우 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다녔습니다. 살기 위해서 더 강한 세력의 추적을 피해 광야로 도망다녔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조여들어오는 죽음의 위협을 피해 달아난 것입니다.
광야생활의 불편함에다가 언제 붙잡혀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덧붙여졌습니다. 광야,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본문 1절)에서 불편함을 견뎌야 했고 외부의 더 강한 세력이 좁혀들어오는 죽음의 그물에 갇히지 않기 위해 다윗은 필사적으로 벗어나야 했습니다. 광야생활의 환난과 시련,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그는 무엇을 했습니까?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간절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주님이 지켜주시고 이 상황에서 구출해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두려움 앞에서 그는 절박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갈망했습니다.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죽음의 두려움보다 더 큰 인생의 두려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생명을 잃을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만큼 생명은 소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는 우리의 한 생명입니다.
알랭드보통이라는 분이 쓴 <불안>이라는 책을 보니까 톨스토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톨스토이가 50이 되기 전에 썼던 위대한 소설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로 인해서 세계적인 명성과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그가 51세 때 새삼 깨달음을 얻었는데, 여태껏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강해지고, 더 유명해지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더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과 야망을 가지고 살아왔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욕망은 불안한 욕망이라 할 수 있는 것들로서 이 욕망이 어느 정도 채워지자 순간 ‘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주된 이유는 50이 넘기 시작하자 그가 죽음의 힘을 의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기 시작하자 이전의 욕망과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의 답을 찾으려 했고 그 결과 남은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됩니다. 소설가로서 그가 이때 썼던 소설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입니다.
이반 일리치는 지위에 목을 맨 사람입니다. 그는 고등법원 판사로서 높은 지위의 사람입니다. 이 판사의 생활을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요약합니다: “이반 일리치가 일에서 얻는 기쁨은 자만심이 주는 기쁨이었다. 사교에서 얻는 기쁨은 허영이 주는 기쁨이었다. 반면 카드 놀이를 하면서 얻는 기쁨이야말로 진짜 기쁨이었다.” 이반 일리치에게는 오래전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고, 자식들과 소통은 안되고 이해할 수도 없고, 친구도 없습니다. 굳이 친구라 한다면 그의 높은 지위를 선망하는 사람이거나 반대로 그의 출세를 도와줄 사람뿐입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이반은 마흔 다섯 살 때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점차 몸 전체로 퍼져갑니다. 의사들도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몸이 너무 피곤해져 일도 하지 못하고 식욕도 떨어지고,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카드 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도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반 자신에게는 너무나 슬픈 사실이었지만 그의 많은 동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그가 죽으면 자신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면 승진도 하고 보수도 오를 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의 처남을 그 자리에 앉힐 수 있을 것을 기대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조차 이반의 죽음을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받게 될 연금 규모가 줄어들 것을 걱정했습니다. 결혼을 앞둔 딸은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결혼 계획이 엉망이 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반은 자신이 여태껏 시간을 낭비했고 껍데기만 품위가 있는 듯하지만 황폐한 삶을 살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삶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 눈에 중요해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살아왔는데 막상 자신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관심이 있었다면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의 지위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족조차도 그가 부유한 아버지이자 가장이었기 때문에 존중했을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한 자산이 곧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아무에게서도 어떠한 사랑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이반 일리치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아무도 그에게 그가 바라는 동정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랜 고통 끝에 이제 병든 아이처럼 동정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순간들이 있었다. 어린 아이를 위로하고 달래듯이 누가 안아주고, 입맞추어주고, 울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턱수염이 허연 중요한 관리였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갈망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많은 사람들이 조의를 표하러 왔습니다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카드 놀이 계획이 어그러진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습니다.
상당히 허망한 이야기입니다. 어찌보면 이 이야기는 나이 오십이 되기까지 마치 이반 일리치처럼 살아왔던 톨스토이 자신의 이야기를 각색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죽음의 경고’를 감지하고 여태껏 살아온 자신의 삶을 성찰하면서 쓴 소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합니다. 그래서 죽음이 힘이 있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보다 귀한 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헤세드를 노래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주의 인자하심’ 곧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불변하는 사랑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셔서 언약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고 다윗이 깨달은 것입니다.
지금 다윗 자신은 자신의 생명을 어찌하든지 보호해보겠다고 죽음의 위협을 피해 생명을 구하려고 도망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도 어려운 광야 구석구석을 피해다니면서 상습하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지내고 있는 다윗입니다. 얼마나 생명을 지키려고 안간힘 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달콤하게 추억하면서 드리는 고백이 아닙니다. 단순히 감사의 고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생사를 넘나들며 광야생활의 결핍과 불편을 겪으면서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벌벌 떨면서 드리는 영적투쟁의 확신입니다. 욥도 다윗처럼 이러한 고백을 해야 했습니다. 욥이 자신의 소유한 집과 재산 등 안락한 삶을 빼앗기고, 고귀한 명예와 인생의 존엄도 빼앗기고, 심지어 자식도 빼앗기고, 이 모든 것을 잃은 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자신의 생명, 그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고백하기까지 욥에게 들이닥친 환난과 시련이었던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가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이 구절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든 예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질문을 합니다.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내 사랑이 당신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지 솔직해 말해줘요.” 남자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소.” “그게 다예요?”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모든 즐거움과 행복도 버릴 수 있소.” “그게 다예요?”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내 명성이나 명예도 포기할 수 있소.” “그게 마지막인가요?”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형제와 가족, 친구도 포기할 수 있소. 오직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만 있다면 말이오.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정말이지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소.” 여자가 말합니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하나까지도 포기할 수 있나요? 내 사랑을 위해 내어줄 수 있나요?” 남자가 대답합니다. “설마 당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내 생명까지 내어놓으라는 말이요? 내 생명이 없다면, 어떻게 당신의 사랑을 즐길 수 있겠소! 제발 그것만은 요구하지 마시오. 그러나 내게 당신의 사랑은 그 이상이오. 당신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하오.”
하나님은 죽음보다 강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아가서 8장 6절에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향해 질투하시고 그 사랑에 반응할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도 그리고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의 생명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고백을 듣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그냥 나올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광야생활의 혹독한 환난과 시련속에서, 생명이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구할 때나 가능한 고백입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우리는 삶의 진실을 정직하게 대면할 수 없는 탓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 인생의 시작이요 우리의 구원주로서 우리 인생의 마지막, 곧 알파와 오메가 되신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사랑의 소중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묻는 여인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물으실 때 여느 그리스도인이라도 “적어도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적게 사랑합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러한 고백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네게 어떤 가치가 있느냐?”
때로는 우리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우리도 때가 되면 떠나야 할 것입니다. 소중한 생명도 우리 곁을 떠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가장 고상한 고백은 주의 인자하심 곧 주의 사랑이 생명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러한 고백을 하기까지 우리를 계속해서 이러한 상황으로 내몰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간절히 드려도 하나님은 가끔 사랑하는 사람을 하늘로 데려가시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육체적인 생명은 빼앗아가실찌라도 사랑으로 우리를 덮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삶 이편이든 저편이든, 이승이든 저승이든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입혀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더 우월합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다윗은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욥이나 다윗이나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나 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아멘.
이러한 고백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난 자들의 고백이며, 아니면 이 고백과 선포로 말미암아 죽음의 두려움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고백만 있다면 환난이나 시련, 두려움 같은 것은 금새 축출돼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심지어 우리의 생명보다 더 귀합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써 믿음으로 승리하시고 환난과 시련을 이기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제압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미국 동부의 대형 건축설계회사 팀하스의 대표인 하형록회장의 이야기를 신문 인터뷰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경영철학으로 20년 만에 미국 동부 최고의 건축설계회사로 성장한 팀하스입니다. 이분이 원래 사업가가 아니라 건축학을 전공하고 설계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이분이 32세에 심실빈맥증으로 고속도로 상에서 의식을 잃게 된 사건이 삶의 전환점이었습니다. 심실빈맥증은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다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는 질병입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졌지만 심장 이식이 아니면 살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에게 꼭 맞는 심장이 나타났습니다. 의사가 그 기쁜 소식을 전달하면서 덧붙였던 말 때문에 그는 심장을 포기하고 옆방의 여자에게 양보했습니다. 의사가 맞는 심장이 나타났다고 축하하면서 안해도 될 말을 한 겁니다: "옆방에 있는 여자는 이틀이면 죽어요. 그녀가 기다리는 심장이 당신 것과 똑같아요." 이 말을 듣고 이분이 크게 놀라고 당황해하자 의사는 "이 심장은 당신 거예요. 당신 차례가 맞아요. 우리가 안 뺏어가요. 당장 수술하십다!"라고 수습하고서 얼른 병실을 나섰습니다. 의사가 말을 던지고 병실 문을 나가는 사이, 대략 3초간 생각하고서 그는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그 여자가 확실히 죽나요? 나는 며칠을 더 살 수 있나요?" 의사는 여자는 곧 죽고 그는 일주일이나 길면 3주 정도를 더 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사에게 미련 없이 "이 심장을 그 여자에게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분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심장을 기다리며 5개월 동안 한 기도가 하나님이 자신을 살려주시면 자신의 남은 생을 이웃을 위해 살 거라는 거였습니다. 심장을 양보하고서 정확히 일주일 뒤 그는 호흡곤란으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한 달쯤 되었을 때, 기적적으로 그에게 맞는 또 하나의 심장이 나타났습니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그는 건강한 몸으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몸은 건강해졌는데 2년여의 투병생활로 인해서 돈이 다 떨어졌습니다.
가족 생활비가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약값을 감당할 수도 없었습니다. 한 달 약값만 무려 170만원 정도가 들었는데 돈이 없어서 다른 심장병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약을 구걸해서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집 린다와 데이비드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약을 사서 먹으라며, 직장에서 받은 보너스라고 하면서 2만 달러의 돈이 들어있는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그 돈은 평범한 회사원인 남편과 부잣집에서 청소부 일을 하는 아내가 한푼 두푼 모아둔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 돈을 단지 이웃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준 겁니다. 더 놀라운 건 그 부부는 나중에 돈을 갚으러 찾아갔을 때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 돈을 갚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We want to be a part of your suffering", "우리는 당신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어요." 그래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후 하형록은 자신의 차고에다 컴퓨터 한 대만 갖다놓고 건축설계회사를 차렸습니다. 그리고 몇 달만에 미국에서 두번째로 큰 신용카드 회사의 신축 사옥 공사 감리를 의뢰받았습니다. 그는 그 회사 부회장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웃을 돕기 위해 세운 회사지만, 사실 나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심장 이식 환자"임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큰 회사가 생긴지 얼마 안되는 직원도 없는 하형록의 회사에 건물을 맡겼습니다. 그 회사가 왜 그랬는지 본인도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회사의 부사장이 당시 암으로 2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여서 하형록의 말을 가슴에 새겼나봅니다. 그래서 그 부사장이 적극적으로 하형록의 회사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부고 소식과 함께 전해진 그 부사장의 유언은 자신이 죽은 후에도 하형록이 성공하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연이 알려지자 이후에 많은 회사의 주차 빌딩 설계 의뢰가 쇄도했습니다. 몇 해 전 하형록의 회사 팀하스는 청년들이 일하고 싶은 미국 100대 기업으로 선정되었고 오바마 대통령은 그를 국립건축과학원의 종신 이사로 임명했습니다. 이러한 기적과 같은 일들을 연이어 경험하면서 그가 몸으로 체득한 축복의 원리를 'favor'로 설명합니다. 우리 말로 '호의'라고 번역할 수 있는 단어인데요. 자기희생을 바탕으로 한 이웃사랑이 ‘페이버'의 핵심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면 하나님께서 그 희생을 기억하고 축복을 부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희생이 없으면 착한 일에 불과해요. 그냥 착한 일은 보통 사람이 다 하는 거예요. 희생이 있어야 감동을 줘요. 착한 일은 눈물이 안 나요. 희생해야 눈물이 나는 거예요.” 기자가 어떻게 그 짧은 3초 만에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었냐고 묻자 하 회장은 “아주 간단합니다. 제가 희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이식을 받은 심장은 알코올 중독자의 심장이었습니다. 이식용으로 적합하지 않은 심장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받아 6년을 살았습니다. 6년 후 다시 발작을 일으켰을 때 다행히 십 대 소년의 튼튼한 심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의사가 두 번의 이식 기회를 다 썼기 때문에 앞으로 또 문제가 생기면 끝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심장에 연결된 혈관 두 개가 막혔습니다. 마땅히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 사이에 의료법이 바뀌어서 첫 번째 심장이 알코올 중독자의 것이라 부적격으로 카운트에서 제외되었고, 결과적으로 한 개의 심장이 더 남았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에게 ‘심장은 당신에게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이웃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나에게, 이웃의 심장이 없이는 한 번의 숨도 편히 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한 신의 담보물’이라고 답했습니다.
이분이 쓴 책이 서점에 여러 권이 나와 있는 것을 보기는 했는데 단순히 신앙간증집으로 생각해서 책을 사보지 못했는데 이분의 예전의 인터뷰를 최근에 보고서 이분의 책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이 2만 달러를 아무 조건 없이 준 이웃이 한 말입니다. “We want to be a part of your suffering”, “우리가 당신의 고통의 일부분이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영어로 ‘compassion’(컴패션)은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 깊은 동정, 긍휼, 자비로움 등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함께’를 뜻하는 ‘com’과 ‘고난’을 뜻하는 ‘passion’이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compassion’(컴패션)은 원래 어려움을 함께 하고 나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과 함께 고난 받음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동정이나 연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이상의 뜻으로 누군가가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낼 때까지 그 고통을 나누며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 컴패션이라는 국제 어린이 양육/구호단체의 이름이 그래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compassion(컴패션)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움인데요. 하나님의 자비로움은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과 곁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요, 그들의 고통과 환난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compassion’(컴패션)의 뒷부분 ‘passion’은 고난이라는 뜻보다는 ‘열정’이라는 뜻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전에 멜 깁슨이 제작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패션, 혹은 그리스도의 열정으로 오역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뜻합니다. 하여튼 ‘passion’은 정열 혹은 열정이라는 뜻과 고난 혹은 수난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즉 ‘passion’은 정열 혹은 열정이어서 당사자에게는 고난 혹은 수난인 셈입니다. 하나님의 ‘passion’은 하나님의 열정으로 인한 하나님의 고난이며 고난을 당할 각오가 돼있는 하나님의 열정입니다. 한 마디로 자발적인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열정적인 사랑의 고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생겨난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 신학자였던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은 그의 자비 가운데에서 사람들과 함께 고난당하신다. 그는 무정한 분이 아니다”고 말했고, 또한 “이 고난이 사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고난은 세계의 짐을 지고 견디어냄으로써 이 세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고난이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킴으로써 구원의 아픔을 당하시는 아버지의 고난이다. 이것은 우리의 죄와 병을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아픔의 고난이다. 영원한 하나님은 인간을 너무나 진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들과의 투쟁 속에서 고통을 당하시며 그들의 죄로 인하여 그의 사랑 가운데에서 상처를 당하신다.”
왜 제가 장황하게 영어 단어 뜻풀이를 했냐 하면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사야 63장 7-14절인데요. 63장 7절부터 64장 끝까지 ‘이사야의 기도’라고 불립니다. ‘이사야의 기도’는 한마디로 ‘하나님의 자비로움’, ‘하나님의 긍휼하심’, ‘하나님의 compassion(컴패션)’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구원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현재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처지를 탄식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이사야 63장 7-14절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셨는지를 회고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비’와 ‘긍휼’과 ‘컴패션’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셨다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황폐해지고 참담해진 현실 가운데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이전처럼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건져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문 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이사야 선지자는 과거에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 간에 맺은 언약관계의 특징들을 생각해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여러 성품들 곧 자비,사랑, 은총 등을 나열한 후에 그 성품들이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베풀어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7절에서 ‘자비’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요, 예전에 룻기를 강해하면서 중요하게 언급했던 단어입니다. ‘헤세드’는 여기서 자비로 번역했지만 원래 뜻이 언약에 근거한 변함없는 사랑을 가리킵니다. 한글성경에는 문장의 순서가 뜻을 따라 번역했지만 히브리성경에 보면 본문 7절은 ‘헤세드’로 시작해서 ‘헤세드’로 마칩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마칩니다.
8-9절은 여호와의 헤세드가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즉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그분의 백성으로 삼고 백성들의 모든 고통에 동참하시며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가 바로 ‘Com+Passion’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시련 기간 동안 내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셨다는 뜻입니다. 광야라는 어려움을 통과하는 그들과 하나님이 내내 함께하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선지자의 독특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사상은 참으로 독특한 믿음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극히 자기 낮추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가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 그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다는 말씀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통이 곧 하나님의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가득한 고통과 환난은 넘치는 사랑 때문에 사랑 받을 대상을 창조하고자 이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께 영향을 미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환난이 어찌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받는 고통과 환난은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하나님을 눈물짓게 합니다. 우리의 고통이 곧 하나님의 고통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통을 당한 우리를 잘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너무나 극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좌우편에 강도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으셨고 고난당하는 우리의 아픔을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해하실 뿐 아니라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셨음, 곧 ‘하나님의 컴패션’을 믿는다면 우리가 환난이나 고통을 당할 때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그런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희망을 생생하게 붙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사실 자체만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7월 한 달 동안 ‘환난과 시련을 이기는 법’을 주제로 설교하고자 합니다. 환난과 시련이 없는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생은 고난이 끊이지 않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더더욱 필수 코스입니다. 마틴 루터는 “고난은 우리가 자기만족과 자기 기만이라는 겉치장을 벗겨버리고 우리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을 직면하도록 하는 하나님의 도구다”라고 말했습니다. C.S.루이스는 고통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귀에 크게 들려지도록 만들어주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메가폰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고난 받는 삶이라고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13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가족 바깥에 있다는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임을 식별하는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환난과 시련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고통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 믿음은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그런 어려운 상황가운데서도 희망을 생생하게 붙들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며 위로가 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러하듯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체험에 동참해야 합니다. 세상의 고난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의 고통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치고 그분을 슬프시게 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들이 고통받지 않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고난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줄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냉혹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받는 고통을 위해 애쓰는 것은, 피조물이 고난 받는 것을 목도하는 하나님의 고통을 줄여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우리가 무감각해지지 않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팀하스의 하형록 회장처럼 기업을 운영해도 ‘우리는 이웃을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경영철학으로 경영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웃 하형록씨에게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2만 달러를 주면서 "We want to be a part of your suffering", "우리는 당신의 고통에 동참하고 싶어요."라고 말한 이웃집 사람처럼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컴패션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의 길입니다.
래리 크랩이라는 기독교 상담학자가 쓴 <행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예수님처럼 행복하기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관계 안에 존재하시는 관계적 하나님을 바로 알아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관계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예수님처럼 더 나은 사랑을 실천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꺼히 희생하는 사랑이야말로 더 나은 사랑이고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기꺼이 희생하는 사랑’은 당연히 우리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것이지만, 우리는 고통에 집착하고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보다 삶의 분명한 목적을 바로 잡고 하나님처럼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을 충분히 잘 알고 거룩한 사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사랑을 위해 싸우면서 나아갈 때 이보다 더 긴급한 것은 없다고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올해도 벌써 반년이 지나고 오늘 7월 1일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감사의 날로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6개월 간 당연히 고통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 우리와 함께하셨음을 믿는다면 지난 6개월이 지워버리고 싶은 기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오히려 축복의 시간임을 고백하고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가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냐고 제게 묻는다면 성경을 근거로 저는 세 가지로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쉽게 말해 하나님이 육신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분으로서 우리를 초월해계시는 분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설은 존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를 놀래키시고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의 감정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초월해계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 하나의 속성으로서 사랑이 많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들 가령 하나님의 선, 자비, 은혜, 은총, 의로움, 신실하심, 지혜로움. 인내하심 등 모두는 사랑의 속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속성들을 포괄하며 통일하는 배후가 곧 사랑이며 하나님이 곧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진노조차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의인에게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도 죄인들을 구원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해주시는 것뿐 아니라 만물을 회복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갱신하셔서 창조를 완성하실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불변하시고 다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D.A 카슨이라는 세계적인 신약학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쉽게 믿는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허술하고 감상적이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드는 온전한 속성과 동떨어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다섯 가지 방식을 소개합니다. 성경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랑을 볼 때, 당신은 삼위일체를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사랑은 셋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연합하는 것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사랑으로 결합시키는 사랑의 끈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서로가 사랑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어서 사랑으로 하나입니다.
둘째,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해와 비를 주십니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적 도덕을 초월한 초도덕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러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47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해와 비를 내리시는데, 왜 너희들은 친구로 혹은 원수로 구분 지으면서 친구들만 사랑하고 원수들은 미워하냐는 말씀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과 악한 자들에게 변화를 받고 살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켜라! 왜 죽으려고 하느냐! 변해야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에스겔 33장 1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넷째,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쪽은 선택하지 않는 선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말라기 1장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7장에서 10장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러차례 물으신 뒤 스스로 오답을 하나씩 지워가십니다. 그들의 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그들이 더 강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더 의로워서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명기 7장 6-8절에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조건부 사랑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더욱 우리에게 임합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도 조건부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용례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말도 어느 때는 맞고 어느 때는 틀립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은 주권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우리의 순종 여부에 따라 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시기도 하지만 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다양한 방식을 조화해서 함께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부모는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자녀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한다고 해도 부모에게는 여전히 자녀는 자녀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녀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자녀가 막 대학에 들어가서 운전면허를 따고 아빠의 차를 가지고 나갈 일이 생겨서 가지고 나간 경우 부모는 자정까지는 들어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정 이후에 부모가 급히 차를 쓸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명령한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를 가지고 나간 자녀가 친구들과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놀다가 자정이 넘게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 부모라도 자녀를 이뻐해주고 사랑해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보자마자 화가 나서 분노를 쏟기가 쉬울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자녀를 향한 사랑은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약속대로 차를 제 시간에 갖다 놓는 것에 좌우됩니다. 여전히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한결같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부모의 말을 듣는 순종과 약속을 지키는 언약적 의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꼴 안보려면 아예 자녀를 갖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어리석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생기면 부모의 생활반경이 영향을 받고 삶이 제한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녀를 갖는 것은 먼저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산물이고 사랑이 고통이나 여러 뒤따르는 수고보다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도 이와 비슷한 특징이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세 위격,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고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자충족적인 사랑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할 대상을 끊임없이 창출해냅니다. 그래서 세계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고통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해서 자녀를 낳았지만 자녀가 태어나고 난후부터 기존의 부모의 삶에 제한과 불편함이 불가피하게 따르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세계 창조 이후의 인류 역사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이는 사랑의 상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세상’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못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께 반영한 인간의 이기적인 질서와 시스템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합니다.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세상을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스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지막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여러분의 자녀를 기꺼이 내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우리와 같은 종류, 같은 동급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만,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랑 때문에 짓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피조물인 인생들을 위해, 그것도 자기 중심적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영광 돌릴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아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주는 것은 가장 하기 힘든 일인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들도 주셨는데 다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의 신비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34-35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버지의 계획에 기꺼이 순종해서 이땅에 인간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의 자기 제한 자기 부인의 사랑이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희생적인 사랑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그래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되었고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스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영생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으실 이유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거기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죽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게 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언젠가 인터넷 상에서 어떤 사람의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엔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을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고 기꺼이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 많은 성경의 말씀이 너무나 달게 느껴질 것 같아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추천받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저의 대답은 “교회를 보라! 우리를 보라! 그리고 나를 보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정상입니다만 다른 대답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나타납니까? 로마서 5장 5절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고 생생하게 우리 마음에다 증거해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으로 굳게 결합시킨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묶어주십니다.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 8:39)을 끊임없이 증거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다 끊임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연합되었듯이 성령 안에서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굳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으로 끌어올려져 사랑 안에 편입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이 사랑을 확신하십니까?
최근에 중앙일보에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이신 백만기란 분이 쓴 글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 세계 제일의 부호에 올랐던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부러워했지만 그는 임종을 앞두고 삶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했습니다. 그의 곁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워런 버핏에게 기자가 성공의 의미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의 나이쯤 되면 높은 빌딩을 갖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다고 해서 성공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을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호스피스 현장에서 보니 죽어가는 사람이 후회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달랐다고 합니다. 평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임종을 맞이하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성경 안에서도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사랑이시고 또 영원토록 사랑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관계속으로 우리를 끌어올려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그 분명한 목적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대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에베소서 3장 18-19절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너무나 크고 완전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02장 후렴 가사,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나는 참 기쁘다”
오직 사랑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 드려지는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며 행복하며 지탱되는 인생을 살아가셔서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므로 풍성한 사랑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믿음의 부모는 자녀를 기르면서 자녀를 위해 곧잘 기도합니다. 자녀가 잘 자라나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자녀에게 무엇 무엇이 필요하니 달라는 요청 기도만을 우리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어린 자녀에게 기도가 필요한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가 기도할 때 자녀가 경험하게 될 ‘신뢰’와 ‘아늑함’의 경험 때문입니다. 엄마가 자녀와 함께 기도할 때, 특히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자리에 누워서 드리는 기도를 듣는 자녀는 따뜻함과 안락함을 느낍니다. 엄마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신단다”는 기도를 듣는 어린 자녀는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안전함과 감싸 안는 듯한 사랑의 든든함을 느낍니다. 이뿐 아니라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하는 기도의 경험은 하나님이 저 멀리 떨어져서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말을 걸을 수 있는 하나님, 우리의 말벗이 되어주시는 친밀한 하나님으로 자녀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뿐 아니라 부모가 자녀와 함께 기도할 때 자녀는 부모와 긴밀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많은 자녀들이 성장한 이후에 자신이 어렸을 때 ‘엄마 아빠와 함께 기도 좀 해봤으면’ 하는 아쉬움을 가진 자녀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도해주는 부모가 없어서 내가 이렇게 됐다는 원망이 아니라 친밀감과 유대감에 대한 갈망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아는 것은 특별히 힘든 시기를 지날 때 큰 힘과 위로가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무너져내리지 않고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분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주시는 분이 성령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님이 강조되지만 또한 로마서 8장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에서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그리스도의 기도와 성령의 기도뿐이요 우리는 연약해서 제대로 기도할 수 없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와 같이”로 시작합니다. 바로 앞 부분, 24-25절에서 ‘소망’을 말했는데, 그 ‘소망’이 연약한 우리를 구원에 이르도록 지탱시켜주듯이 그와 마찬가지로 성령도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의 구원은 구원의 첫 열매를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중이지만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의 완성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 소망 바라보고 잘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아직도 기다려야 할 소망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우리를 지탱시켜주듯이 성령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셔셔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처한 연약한 상황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첫 열매를 누리고 있지만 아직은 아닌 과도기적 상황에 처한 연약함입니다. 비록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지만 아직 찬란한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지 못해서 신음하는 연약함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만, ‘신음’ 혹은 ‘탄식’이라는 말이 로마서 8장에서 세 번이나 나옵니다. 산고를 겪고 있듯이 신음하고 탄식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로마서 8장 21-22절입니다.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아직은 아니라는 이유에서 피조물도 산통을 겪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아직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받지 못한 고통입니다. 그래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둘째, 심지어 이미 성령을 선물로 받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조차 탄식합니다.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심지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도,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고는 있지만, 앞으로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온전한 구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아니어서 산통을 겪고 속으로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탄식입니다. 셋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도 탄식하고 계십니다. 본문 26절에서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의 탄식은 피조물의 탄식이나 우리의 탄식과는 달리 단순한 탄식이나 신음이 아닙니다. 성령의 탄식은 성령의 기도입니다. 성령이 기도할 때 내는 탄식입니다. 이 탄식은 우리가 내는 한숨이나 신음소리와는 달리 “말할 수 없는 탄식”입니다. 즉 무언의 탄식입니다. 우리의 귀에 들리지도 않고 들린다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탄식입니다. 이 탄식과 더불어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해주시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워달라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연약함에 휩싸여서 이미 구원의 첫 열매를 받아 누리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 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한 우리 성도들을 위한 탄식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에 휩싸여 있어서,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더더욱 우리가 기도해야 마땅하고 구원의 여정을 달려가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 연약함 때문에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앞에 놓인 우리를 위한 성령의 고통스런 탄식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탄식하는 성령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놓인 시대적 한계 때문에 우리는 연약해서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기도의 목적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바라는 많은 것 중에서 과연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빌 바’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피조물로서 광야 같은 세상길을 걸어가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정말로 필요한 간구를 할 수 없는 연약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게 드려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살 동안은 극복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여정 속에서 우리의 위치에 의해 불가피하게 제한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탄식할만한 상황에서 성령께서 친히 중보기도로 우리의 이 연약함을 극복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우리의 기도에 성령이 뭘 덧붙여주셔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하나님께 상달될 수 있도록 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은 우리의 탄식과는 구분되는 전적으로 성령의 탄식이며 성령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고 우리가 설사 그 소리를 듣는다 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령께서 직접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중보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고통을 하감하시고 우리의 고통과 처지를 아시고 신음하는 우리와 공감하면서 그리고 우리를 위로해주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드리는 성령의 탄식이며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기도의 목적과 무슨 기도가 꼭 필요한지를 알지 못해서 시대적 제약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하나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해서 고통 속에서 탄식하는 우리, 결코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간구할 수조차 없는 연약한 우리를 위해서 성령께서 직접 나서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부합하는 중보기도를 하나님께 친히 드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닌 것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우리가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완전한 중보의 기도를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중보기도는 매우 효과적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이’ 곧 하나님과 ‘성령의 생각’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 8장을 첫째주에 살펴보면서 ‘영의 생각’ 곧 ‘성령의 생각’을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령의 생각은 생명이고 평안이라 했습니다. 성령의 생각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일치된 생각이기 때문에 생명이며 그래서 하나님과의 평화여서 우리의 평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깊은 것을 통달한 생각이어서 하나님과 일치된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부합한 기도여서 매우 효과적인 중보 기도입니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는 단지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그래서 우리를 위로해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된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효과적인 중보기도 사역입니다. 성령의 기도는 구원을 이미 받았다고는 하나 구원의 여정 중에 있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확실하게 보증해주고 보장해주는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현재의 고난’을 불가피하게 겪으면서 속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성령께서 구원의 완성에 이르도록 안전하게 지켜주십사 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효과적인 기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현재라는 불가피한 고난의 시간들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성령이 도와주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며 이 간구로써 아무리 역경에 처한 성도들이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선 곧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루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탄식은 산고의 탄식입니다. 기쁨이 앞에 놓여 있는 산통입니다. 이것은 임신과 출산의 신음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새로운 창조를 경험했지만 옛 창조세계 안에서 여전히 살아갑니다. 새 창조는 성령께서 예수 안에서 지금도 이루어가고 있지만 아직 완성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고통스럽지만 해산을 하고 난 후에는 찾아오는 기쁨이 앞에 놓여있음을 아는 잠깐 동안의 탄식입니다. 힘겨운 산고에 이어 새 생명이 태어나면서 찾아올 걸로 기대하는 엄청난 기쁨을 기대하는 탄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지금도 이끌어내고 있는 전혀 새로운 새 창조세계입니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고통속에 탄식하며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산통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고 성령께서도 우리와 더불어 참여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산파가 되십니다. 새로운 창조세계 안에서 우리는 구원받고 부활의 몸을 입고서 처음 창조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창조 목적에 부합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창조세계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생각은 사도 바울의 독창적 사상입니다. 다른 성경뿐 아니라 성경 밖 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 사상입니다. 물론 성령께서 바울에게 영감을 주셔서 깨우쳐주신 진리이겠습니다만, 바울이 깨달을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해볼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성령이 ‘양자의 영’ 곧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성령 곧 양자의 영을 받아서 더 이상 종처럼 비굴하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을 당당하게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는 종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만 주인에게 와서 구걸하듯이 간청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인과 떨어져 있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다릅니다. 당당하게 달라고 요청하며 그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즐깁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자관계입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은 대담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하나님께 마치 내가 권리가 있는 듯이 하나님께 아빠라고 부르면서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움을 힘입은 우리의 간구에 강조점이 주어진 로마서 8장 15절과는 달리 갈라디아서 4장 6절에서는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글 성경에는 우리가 아바라고 부르는 것처럼 번역했는데, 실제 원문에 보면 성령이 아빠 아버지라고 우리 안에서 외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아바라 외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 예수님께서도 이땅에서 기도하실 때, 대표적으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 아빠(아바)라고 하나님을 부르셨고, 주기도문 역시 아빠(아바)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빠라고 부름은 기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기도를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26절에서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기도란 성령이 친히 간구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기도가 된다, 안된다, 너무 여기에 얽매이면 안됩니다. 왜냐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기도는 내 안에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결과는 성령충만입니다. 성령의 발언을 통한 성령의 충만입니다. 내 영의 강건함입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고, 성령이 가져다주시는 은혜의 뿌듯함과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죄의 영역과는 정반대인 성령의 영역 안에서의 거룩함입니다. 꼭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모든 기도의 일차적인 응답은 기도 중에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내 소원이 지금 바로 응답되지 않더라도, 분명히 그것은 안된다고 하나님이 no라고 말한다 해도, 내 기도가 지금 응답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기도하게 하고, 지금 이 기도의 순간에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기도에 관한 진리가 있습니다.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깨달은 건데 기도는 내 언어로, 내 의지로, 내 마음먹은 대로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령이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도뿐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기도가 되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말과 언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할 때에 우리의 기도가 비로소 기도가 되고 하나님과 통하는 교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하나님의 선물이요 전적인 은혜입니다. 기도가 효과적으로 되어지는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이땅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증거하시는 사역의 일환으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것처럼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까? 힘들게 기도의 자리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습니까? 기도할 바도 알지도 못하고 큰 맘 먹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갔지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임재보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차단된 느낌으로 좌절할 때도 많으니까 오직 성령께 맡기고 편안하게 드러누워 있어도 되는 겁니까? 기도는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자크 엘룰의 <우리의 기도>라는 책에서 연약해서 기도할 수 없는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한 기도라도 효과적으로 하나님께 들려지게 될 것이며 그래서 응답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하게 되는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실현되고 응답된 기도가 될 뿐 아니라 이로써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됩니다. 이책에서 저자는 기도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갈망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하나님나라를 가져와달라며 하나님이라는 ‘산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아뢰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소망’을 가진 자들이 가지는 삶의 주요한 특징이 기도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때때로 돌아서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돌아와 다시 말씀하도록 요청하는 끈질긴 투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확신이며 소망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가 됩니다.
어떤 기도 사역자는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기도는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시고 우리가 다시 그것을 주님께 말씀 드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때 그분이 손을 펴시고 능력을 베푸셔서 이땅 가운에 그분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래리 크랩이라는 사람이 쓴 <파파 기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잘 구슬러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받아내고, 그것이 가뭄에 콩 나듯이 겨우 성공했을 때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게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기도는 주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자가 되는 법을 배우는 기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해서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담대함으로 나아가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기도의 자리에 앉아서 경험하게 되는 좌절이 있더라도 이것이 우리의 기도를 포기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이것 자체가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역사로 효과적인 기도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존을 표현하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모든 선한 것만을 창조하신 선하신 창조주에게 피조물 된 우리가 의존하고 있음을 특징적으로 나타내주는 겸손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진행 중인 목적에 우리의 자신의 삶을 맞추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 흥미로운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구글의 데이터과학자인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라는 사람의 인터뷰였는데, 이분은 구글의 검색창에서 전세계 사람들이 무엇을 검색하나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검색창에서 검색하는 단어나 문장을 추적해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빅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사람입니다. 결과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상식이 틀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불안감'은 교육 수준이나 생활 수준이 높은 도시에서 많이 검색될 거로 생각했지만 실제로 ’불안‘이라는 단어는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낮은 농촌 지역에서 가장 높게 검색됐습니다. 이런 식으로 얻은 의외의 결론들은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아주 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쓴 책 제목이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일 정도입니다. 이분은 유일하게 도날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적중하여 유명해진 사람인데요. 구글 검색창을 분석해보니 클린턴을 지지하는 흑인들이 예상보다 투표율이 저조할 것을 예상해서 트럼프 당선을 예측했습니다. 정말로 투표할 유권자라면 ‘투표할 곳’이나 ‘투표 방법’을 검색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기 몇 주 전, 여론조사는 흑인 대다수는 트럼프에 반대하고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흑인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 투표 방법이나 투표 장소를 검색한 비율이 매우 낮게 나왔습니다. 실제로 클린턴은 흑인의 낮은 투표율 때문에 타격을 입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반사이익을 얻게 되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더 나은 삶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구글 검색 데이터에 따르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5년간의 연구에서 그가 내린 결론은 “우리 모두는 더도 덜도 할 것 없이 공평하게 엉망진창!”이라는 것입니다. 검색창 속에 담긴 사람들의 욕망이 실제보다 야비하고 추잡하다는 사실이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결론이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러한 성향을 통계적으로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이요 전적으로 부패한 모습이 세계 최강의 검색 엔진인 구글의 검색창에 의해서 확인되었다는데 의의가 있을 듯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요 죄성 가득한 죄인의 모습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로마서 8장 1-11절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이란 보통 죄성이 가득한 인간이 죄로 인해서 죄와 사망과 율법의 권세 아래 갇혀 있음을 표현한 말이라고 흔히 해석됩니다. 여기서 ‘법’은 권세나 세력으로 번역됩니다. 죄를 더욱 심히 죄되게 드러내는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죄성이 구글의 검색창에서 드러나듯이 그대로 다 드러나게 되고 죄의 결과로서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게 된 인류의 비참함을 묘사해주는 말로 흔히 해석됩니다. 죄와 율법과 사망의 세력권 안에서 그 권세 아래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더욱 죄를 짓는 방향으로 치닫고 그 끝이 결국 죽음에 이르는 비참한 죄의 노예 상태를 표현한 말로 흔히 해석됩니다. 이에 반해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죽을 몸을 살리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권세로 이해합니다. 한마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생명이 되셔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는 부활생명이 되시는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던 인류를 해방시켜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성령의 법’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만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육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죄의 세력을 심판하시고 죄의 세력에게 사망이라는 유죄 선고를 내리셨고 사형을 집행하셨기 때문에 죄의 세력을 처리하시고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거룩한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여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법’은 흔히 ‘율법’, 곧 구약성경의 십계명을 필두로 한 모세 율법을 가리킬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서 ‘법’을 율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모세 율법이 죄 아래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 되지만 동일한 율법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율법이 약속한 의와 생명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강조입니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죄에 대해서 죽으므로 죄의 세력권에서 해방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새로운 영역 속으로 우리가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죄의 세력이 처리되고 죄 문제를 해결 받은 그리스도 안에 거룩한 성령이 능력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만이 구약의 모세 율법이 약속한 약속, 곧 ‘의와 생명의 약속’, 레위기 18장 5절에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율법을 성취할 수 있게 됩니다.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주어진 율법이 ‘죄와 사망의 법’이 된 이유는 인간의 부패한 심성과 뿌리 깊은 죄성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 문제 해결 받고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율법이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절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육신 때문에,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육신 안에 거하는 죄의 세력 때문에 율법은 원래의 목표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죄인이 율법을 지켜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와 생명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율법이 못했던 것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어떻게 ‘의와 생명’의 목표를 성취하실 수 있었습니까?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던, 그래서 원하는 선이 있어도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원치 않는 것들을 행하게 했던 죄의 세력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성령을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4절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생명의 성령을 따라서 살아가면 율법이 약속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율법이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준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생명의 성령’은 거룩한 능력의 영이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는 빚진 자입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던 우리가, 그래서 결국 죽어야 했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해방 받아 ‘생명의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께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께 빚진 자입니다. 성령님께 빚진 자입니다. 특별히 성령님께 빚진 자로서 우리의 의무는 거룩한 성령을 따라 거룩한 생활에 힘쓰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거룩한 성령을 선물로 받고도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살지 못하고 예전처럼 하고 싶은 대로 죄악된 욕망을 따라 살게 되면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어지는 14절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미 지난 시간에 9절에서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한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리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며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가 받은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켜주시는 ‘양자의 영’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삼아주시는 ‘양자의 영’이십니다. 한 집안의 자녀와 대비되는 존재가 그 집안의 종입니다. 종은 아들이 될 수 없고 아들의 특권과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종은 두려움에 의해 사로잡혀 있습니다. 종은 주인을 무서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종으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의 자녀로 입양시켜주셨습니다.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는 종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 얼마나 친밀한 부름입니까. 단순히 부른다고 하지 않고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한 이유는 특별히 기도할 때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 말 ‘아빠’에 해당하는 말이 아람어로 ‘아바’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말이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일부 남아있습니다만 신약성경은 그리스어(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일부 아람어 단어를 그리스어로 그대로 실은 것들이 몇 개 있습니다. 아마 깊은 인상을 주었던 말이었기 때문에 보존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바’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도 ‘아바’로 시작합니다. “아빠, 하늘에 계신”으로서 기도를 드리는 기도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을 친밀하게 부릅니다. 자녀가 부르듯이 부릅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신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5-36절에서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 대로 이 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충만하게 받으셨던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하게 교제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시는,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주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동일하게 하나님을 부를 때, 특별히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께서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해주시고 확신을 갖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확신 있게 압니다.
하나님의 가족의 자녀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갖게 된 우리는 하나님을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친밀함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녀된 신분의 특권입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가 앞으로 누리게 될 특권은 또한 무엇입니까? 17절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자녀된 신분을 갖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맏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될 상속자입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물려받게 될 상속자입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서 하나님의 우주 대권을 물려받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토록 왕노릇 하게 될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상속자입니다. 한마디로 천국 백성입니다. 다만 앞으로 얻게 될 영광을 위해서 필수 코스를 거쳐야 하는 바 그것은 바로 고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고난 당하시고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 우리는 영광을 얻기 위해서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고난당해야 합니다. 그리고서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읽지는 안했습니다만 이어지는 18절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고난은 잠깐이요 영광은 영원합니다. 고난은 감당할만한 고난이요 영광은 감당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로마서 8장은 확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처럼 큰 확신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죽었던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영이요 죽음이 아닌 부활생명의 영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주시는 ‘양자의 영’으로서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도록 해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그래서 성령은 또한 ‘기도의 영’이십니다. 로마서 8장 26-2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은 연약해서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친히 기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도록 이끌어주시는 ‘기도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6월 마지막주에 살펴볼 성령에 관한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굳게 연합시켜주시는 ‘사랑의 영’이십니다. 로마서 5장 5절에서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로마서 8장의 대미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왜 끊을 수 없습니까? 우리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는 성령께서 사랑의 연합의 영으로서 우리를 하나님께 굳게 매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로마서 8장은 확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처음 시작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확신의 선언이었고 마무리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하나님과 친밀함에 대한 확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확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확신, 이러한 확신이 울려퍼지고 있는 장이 바로 로마서 8장입니다. 확신의 찬가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바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주시고 확신을 심어주시기 때문에 비롯된 확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확신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친밀함에 대한 확신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 확신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성령으로죠! 성령의 역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2장 3-6절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친밀한 확신을 하나님께 순종할 때 갖게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씀에 순종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욱 확신 속에 거하려면 예수님이 행하셨던 대로 행하고, 예수님이 사셨던 대로 사는 길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25편 14절에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해서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에서도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확신과 그러한 관계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존경,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말씀 순종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리라고 마음먹고 신실하고 겸손하게 그렇게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서 언급했던 구글의 데이터과학자인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라는 사람의 인터뷰 기사를 언급하므로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분이 원래 하바드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대출신청서에 쓰는 단어를 바탕으로 누가 대출금을 갚을지 예측하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대출금을 제대 안 갚느냐면 가족을 언급하고 자비심에 호소하고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채무 불이행을 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하나님을 언급하는 사람은 돈을 안 갚을 확률이 2.2배나 높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은행이 ‘하나님을 언급하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혹은 설교자로 ‘하나님 팔이’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우리 안에 계시는 양자의 영이신 성령의 아들 삼아주시는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친밀하게 아빠 아버지로 부르면서 확신 있게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확신의 사람인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에 단기선교팀 준비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선교에 대한 강의를 해주시는데 참으로 유익한 시간으로 도전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바울선교회에 속한 허은영선교사님이 오셔서 단기선교 위기관리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강의 서두에 조정 경기를 예를 들어서 현재에 충실하고 맡겨진 일에 헌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미래를 우리는 예측하지 못하고 내다보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주어진 일에 충실하게 오늘 하루를 헌신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가십니다.
조정 경기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선수들은 나아가는 쪽을 바라보며 노를 젓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쪽을 등지고서 힘껏 노를 저어갑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노를 저을 뿐입니다. 물론 조정 경기에서 나아가는 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이를 타수라고 합니다. 배(경기정)의 방향을 잡는 키잡이 역할을 하는 타수를 제외하고 노를 젓는 전 선수는 배가 가는 방향을 등지고서 열심히 노를 저을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미래를 예상하기도 힘들고 심지어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합니다.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지 등을 잘 알지 못합니다. 단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헌신할 뿐입니다. 마치 나아가는 방향을 등을 지고서 힘껏 노를 젓고 있는 조정 선수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그러한 수고와 헌신을 사용하십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최선을 다하여 사명을 이루려는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은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단지 주어진 말씀에 순종할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씀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웅장한 계획을 이루어가십니다. 어찌보면 미래도, 하나님의 계획도 알지 못하는 소위 뭣 모르는 우리의 헌신과 열심을 하나님은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펼쳐가십니다.
룻기에 나오는 주인공 나오미와 룻, 그리고 보아스의 삶이 엮어가는 한 편의 드라마는 별로 특별할 게 없습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 고향땅을 등지고 모압 땅에 이주한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떠날 때엔 나오미에게 남편도 있었고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모압땅에서 십여년을 지내는 동안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베들레헴에 홀로 돌아오고자 했던 나오미 곁에는 이제 모압 여인 며느리 룻뿐이었습니다. 이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의 현실은 어떻게 먹고 살까를 걱정해야 하는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고향땅에 돌아와 이삭줍기로 연명해야겠다고 생각했던 룻과 나오미에게 뜻밖의 사건이 펼쳐지는데 우연히 들어선 밭이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라는 사람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그의 밭과 그의 종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을 이루어가는 삶이었습니다. 당시 최고로 취약계층이라 할 수 있는 룻이 우연히 들어선 곳이 하나님의 율법이 존중되고 실천되어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한 천국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삶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룻이 천국의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보아스가 밭 모퉁이를 다 베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율법과 흘린 이삭을 줍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남겨두라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서 룻이 수혜를 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는 이방 거류민을 돌아보라는 율법의 말씀에 따라 보아스는 룻을 더욱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율법이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기쁘게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죽은 엘리멜렉을 대신해서 그의 기업을 되사서 기업을 회복해 준 ‘기업 무를 자’가 되었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우선 순위의 ‘기업 무를 자’가 있었습니다만 그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해서 다음 순위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보통 ‘기업 무를 자’의 순서가 우선 형제, 다음에 삼촌, 사촌, 근족의 순서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 무름의 일순위는 아니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일순위였던 사람이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해서 다음 순위였던 보아스가 기업 무름의 책임을 지게 된 것입니다. 룻기 4장 5-6절에 보면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가장 일순위 ‘기업 무를 자’는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율법을 지킬 정도로 사랑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아무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이름조차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기업 무를 자’는 히브리어로 ‘고엘’인데 ‘고엘’의 역할은 하나님께 기업으로 물려받은 땅이 이런 저런 이유로 친족 외의 사람에게 팔렸을 경우에 이를 되사서 되찾아주는 책임을 짊어집니다. 레위기 25장 23-25절에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든 기업으로 받은 땅을 팔게 된 사람의 땅을 되사서 돌려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고엘입니다. 고엘은 자신의 재산 상의 손실과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헌신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어려움 당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실천하기 어려운 제도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 중의 한 사람임을 알았고 이 사실을 룻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나오미에게서 ‘기업 무를 자’에 관해 알게 된 룻이 대담하게 보아스에게 결혼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룻 3:9) 룻은 보아스에게 이스라엘의 율법이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혜택, 즉 기업 무를 자로서 보아스에게 의무를 이행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룻이 생각하기에 이 길만이 자신이 살 길이고, 이는 하나님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정된 율법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요구이고 이제 공은 보아스에게 넘어갔음을 은근히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해줄 것을 부드럽게 부탁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 아울러 계대결혼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계대결혼이란 자녀를 얻지 못한 채 죽은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의 아내를 위해 시동생이나 가까운 친족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줌으로 죽은 사람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잇게 하는 율법을 말합니다. 이는 또한 혼자 남은 과부의 생계를 책임지게 하려는 율법이기도 합니다. 신명기 25장 5-6절에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계대결혼을 율법에 넣어놓은 이유는 자녀 없이 죽은 자의 아내를 보호하고 부양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죽고 자녀도 없는 홀로 남겨진 과부의 삶을 돌보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한 친족의 땅이 그 친족 안에 계속 남아 있기 위해서는 죽은 형제의 기업을 이을 남자 후손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땅이 친족 밖의 사람에게 넘어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대결혼이나 고엘 제도는 모두 어려움에 빠져 삶의 생존을 이어가는 것을 걱정해야 할 형편에 처한 사람을 가까운 친족이 구원해내는 당시의 사회보장 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실천하려면 어려운 형편에 처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계대결혼이나 고엘 제도를 실천하지 않으면 형벌이 따르는 그러한 율법은 아닙니다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에게 보여주는 사랑의 실천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율법이며 이 율법을 지키므로 하나님 닮은 성품을 드러내는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보여주는 율법입니다.
율법의 사람 보아스가 율법에 정신에 투철해서 기업 무름의 책임을 이행한 결과가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오늘 룻기서는 결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13절입니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룻이 결혼생활이 10년이 넘도록 자녀를 얻지 못했는데 하나님은 보아스를 통해서 룻에게 아들을 주었습니다. 이 아들은 룻에게뿐 아니라 그녀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14-15절입니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베들레헴 사람들이 룻이 낳은 아들을 보고 오히려 나오미의 “생명의 회복자”이며 나오미의 “노년의 봉양자”라 칭하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탄식했습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룻 1:20-21)
이러한 상태였던 나오미가 이제 며느리 룻이 낳은 아들로 인해서 생기를 되찾고 생명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살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돌아올 때는 다 상실하고 홀로, 그때는 룻이 얼마나 자신에게 기여할 지를 알지 못해서 오직 혼자뿐이라고 탄식했던 나오미, 룻을 투명인간 취급했던 나오미, 완전히 텅 빈 상태로 돌아왔던 나오미가 이제는 충만한 상태로 가득채워져서 생명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축하의 말이 바로 ‘생명의 회복자’란 말입니다. 룻이 낳은 아들은 또한 나오미의 ‘노년의 봉양자’가 될 것임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오미의 노후를 책임지게 될 봉양자가 될 것임을 축하하는 것인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확신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다시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이 아이가 다름아닌 룻이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룻이 누구냐 하면 시어머니 며느리에게는 일곱 아들보다 귀한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왜 룻이 그토록 귀한 며느리냐면 룻이 시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룻이 시어머니에게 지극 정성을 다하고 사랑으로 섬긴 것을 보건대 룻이 낳은 아들이 비록 자신에게는 친할머니가 아니더라도 나오미에게 얼마나 잘 할 것일까를 예상하면서 하는 축하의 말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그간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여준 사랑을 보니까 룻은 나오미를 사랑하는 사람인데 룻이 낳은 아들은 얼마나 나오미를 사랑해서 섬기고 봉양할 것인가를 예측하면서 하는 말인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보여준 사랑, 율법 정신에 투철한 사랑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일상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쓰임받는 위대한 구원 역사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자신들의 선택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 크게 쓰임받을지 알지 못한 채 룻과 나오미는 단지 일상에서의 사랑의 실천, 일상에서의 율법의 순종에 헌신했을 뿐입니다.
몇 해 전에 신문에서 손양원목사님 관련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내 아버지는 성자의 두 아들을 죽였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기사였습니다. 손양원목사님은 누구나 잘 아실 것입니다. 애양원이라고 문둥병환자들의 집단 거주지에서 문둥병과 함께 목회를 한 사랑의 성자이십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은, 예전 여순 사건 때 손양원목사님의 두 아들이 공산주의에 물들은 한 젊은이에 의해 반동으로 몰려 처참하게 살해를 당합니다. 반란군 쪽에 선 공산주의 추종 학생들에 의해 예수쟁이에 친미파라는 이유로 손양원목사님의 두 아들이 총살을 당합니다. 반란이 진압된 뒤 두 아들을 죽인 학생들 중 한 명이 체포돼 사형장으로 끌려가는데, 손 목사님이 이 학생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이 아이를 죽이면 내 아들들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이 아이를 회개시켜 내 아들로 삼고 사람 되게 하겠습니다"고 애원하면서... 그렇게 해서 손양원목사의 양자가 된 사람이 안재선입니다.
제아무리 성자로 존경받는 손양원목사님이라지만 자식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곁에서 손 목사님을 지켜보셨던 생존자들은 말합니다. 재선이와 마주앉아 밥을 먹을 때는 돌멩이를 삼키는 것처럼 마음이 괴롭다, 털어놓으시더라고. 하지만 재선 앞에서는 언제나 의연하셨답니다. 네 실수를 나는 벌써 용서했다, 아니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다, 위로하시면서."
손양원 목사님은 양아들인 안재선이 목회하기를 원하셔서 신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안재선도 신학 공부를 즐거워했고, 동기들과 교수들로부터 총명하고 유머러스한 신학도로 인기가 많았답니다. 빈민촌 공부방 교사로서도 열심히 활동하기도 하고. 하지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의 사슬에서 안재선은 방황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느 누가 '사람을 죽인 자'로부터 복음을 듣고 싶어할까요?“라고 물으며 자책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견뎌내야 할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 그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을 포기하게 됩니다. 안재선은 손양원 목사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해 여수 앞바다의 무인도로 들어가 양식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한 뒤 일가족을 데리고 상경해서 서울 상계동에 정착해 근근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가 암으로 4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 신문 기사는 그 안재선의 아들 기사입니다. 안재선의 아들 역시 목사가 됐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한 분이 인사를 하며, “내가 네 작은 아버지다”라고 말하고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책 <사랑의 원자탄>을 주고 갔더랍니다. 그분이 손양원 목사의 친아들인, 막내아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이 안재선의 아들 역시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재선의 아들도 그 일로 많이 방황하게 되지만 안재선이 죽을 때 아들에게 신학을 공부해 목회자가 되라는 유언을 남겨서 그 역시 여러 우여곡절 끝에 목사가 되고, 그토록 가보기를 꺼렸던 땅, 애양원에 40년만에 찾아가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에서 기억에 남을만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토록 성자였던 손양원목사님 역시 인간이었다는 점입니다. 타고난 성자는 어찌보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손양원목사님 일기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 나환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진동하는 악취에 코를 막고 고통스러워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리고서 '저들이 내 눈에 천사로 보이게 해달라'고 몇날 며칠을 기도한 뒤에야 비로소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손으로 어루만질 수 있었고, 다시 힘들어지면 기도로 극복하면서 평생 그들의 반려로 사셨다는 겁니다.
타고나는 성자는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사랑장으로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4-7절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도바울의 이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한 예찬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사랑, 이것은 다른 말 할 것 없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 집착의 나락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사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온갖 종류의 이기적인 자기 집착을 극복해낼 때, 바로 거기서 사랑이 임합니다. 사랑이 이기적인 자기 집착에 떨어지지 않은 유일한 곳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한 군데뿐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사람만이, 지난 삶을 벗어버리는 사람만이, 자기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가슴 속에 충만하게 공급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이 보여준 사랑, 보아스가 보여준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책임 지는 사랑이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그리고 보아스는 룻을. 이렇게 사랑의 일상이 보여준 드라마는 당대의 잔잔하고 감동스런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일상,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루어지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들어 올려주셨습니다.
룻이 보아스에게서 낳은 아들이 누구입니까? 본문 17절입니다.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룻이 낳은 아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였습니다. 22절,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룻과 보아스의 인애와 사랑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추수를 하셨습니다. 단순히 그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해결되고 남편을 얻고 가정을 얻는 안락함을 회복했다는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그들의 자손으로 다윗 왕을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낳은 다윗을 통해서 사사시대의 혼란과 공허와 무질서를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근접한 다윗 왕정을 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더 나아가서 전 인류를 위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셔서 예수님의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온 세상 죄를 사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일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도구는 보아스나 룻 같은 평범한 백성들의 사랑과 율법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과 자신의 뜻을 역사속에서 펼쳐가시려고 룻과 보아스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순종과 사랑을 사용하십니다.
다시 조정 경기를 생각해봅시다. 미래는 내 소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이후 어떻게 전개될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알지 못합니다만 다만 현재에 충실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달아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의 사소한 일상도 주님의 손길에 의해 들어올려져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위해 크게 사용될 줄로 믿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5월 한 달 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룻기서 말씀의 시대적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는 암흑기라 할 수 있습니다. 룻기 앞에 있는 사사기는 사사시대의 역사를 다 보여주고 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사사시대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이 구절은 왕정이 도입되기 이전을 가리킵니다. 다윗 왕조가 세워지기 이전의 혼돈의 시대를 집약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사사시대의 혼돈은 인간 왕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부재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으므로 생겨난 혼돈과 무질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 함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기준이 되지 못하고 각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즉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시대가 곧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에 왕이 없었다는 고백은 결국 하나님의 율법이 존중되지 못하고 삶의 기준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주된 특징은 하나님의 통치의 부재요 하나님의 율법의 경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응당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지키며 살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갔습니다. 결과는 혼돈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습니다.
사사시대는 여호수아 이후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출애굽한 후 모세의 지도 하에 광야 40년을 지내고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총 사령관이 되어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곧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지파별로 분배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따라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동시대의 세대가 생존해있을 동안에는 천국이 이루어지는 듯했습니다만, 그들이 다 죽은 후에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후의 세대는 “다른 세대”였습니다. ‘다음 세대’가 안타깝게도 ‘다른 세대’가 되었습니다. 사사기 2장 7-10절에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가 죽고 그의 동시대의 사람들이 다 죽은 후 펼쳐진 상황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다음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모 세대에게 행했던 놀라운 일들, 가령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약속의 땅을 정복했던 일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세대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유명한 고별 설교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습니다. 여호수아 24장 15절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의 도전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과 같이 굳은 맹세를 가지고 대답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 하오리니”(수 24:16), “백성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우리가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우리가 청종하리이다 하는지라”(수 24:24)
이스라엘 백성들의 다짐은 한 세대 이후에 공허하게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변덕스럽고 결심조차 흔들리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 해도 한 세대 만에 하나님을 아는 신앙을 다 까먹었다는 사실이 충격적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 곧 ‘다음 세대’는 신앙에 있어서 ‘다른 세대’입니까, 아니면 ‘같은 세대’입니까? 최소한 부모가 아는 하나님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부모에게 행한 일에 대해서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주지 못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져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세대’가 되지는 않았나요?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진 시대였습니다만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의 세대는 하나님도 율법도 알지 못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사시대의 암흑기가 찾아왔습니다.
룻기는 그러한 사사시대에 한 가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흑암의 땅이 되어버린 사사시대의 암흑이었습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그녀의 며느리 룻은 당장 생존부터가 당면 문제였습니다. 모압 여인 룻은 당장 입에 풀칠을 해야 했습니다. 마침 보리를 추수하는 기간이어서 들에 나가 이삭이라도 주어서 먹을 것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도 눈치 보이는 일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은혜를 베풀어야 이삭이라도 주울 수 있음을 룻은 알았고 당장 먹을 것이 없었기에 무작정 들로 나갔습니다.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이었던 보아스의 밭에 이르렀습니다. 3절입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가다보니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었는데 보아스라는 사람은 자신의 시댁쪽의 친척이었습니다. 물론 룻은 보아스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했죠. 또 하나의 우연은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른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밭에 나와서 룻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아스는 처음 보는 여인이 누구인지 자신의 종에게 물었습니다. 종은 보아스에게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돌아온 모압 여인이며 아침에 이삭을 주을 수 있도록 부탁해서 지금까지 허락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친족인 나오미 집안이 모압에서 어떤 일을 겪었고 나오미와 며느리 이방 여인 룻만이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룻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을 뿐 아니라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이삭을 줍는 룻에게 눈치를 주지 못하게 했으며 심지어는 일부러 이삭을 떨어뜨려 줍게 함으로써 자신의 친족 나오미와 룻의 먹을 양식을 공급해주려 했습니다. 식사할 때 보아스는 룻으로 하여금 배불리 먹게 했습니다. 14절입니다.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룻이 얼마 만에 배불리 먹고 음식을 남길 수 있었을까요? 룻은 오늘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앞으로 생계 걱정은 안해도 될 상황이 되었다고 말한다면 다소 섣부른 예단일까요?
룻과 보아스와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모든 만남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어마어마한 만남입니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룻에게 다가온 보아스는 단순히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함께 왔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만남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큰 어마어마한 만남이라 할 수 있는데 보아스와 함께 그의 하나님나라가 함께 왔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삶과 그의 일터와 그의 가정에 임한 하나님나라가 보아스의 배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의 하나님나라가 룻에게 다가왔기 때문에 룻은 대박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우연히 들어선 보아스의 밭이 실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보아스는 사사시대라는 암흑기에 한 줄기 빛으로 존재했습니다. 온통 어둠뿐인 시대에 보아스와 그가 거느린 사환들과 그의 밭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사사시대에 그러나 보아스는 하나님의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삶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의 생애에 율법에 순종하므로 하나님나라가 임했음을 가리키는 몇 가지 증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밭에서 곡식을 베고 추수를 하는 일꾼들에게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4절)고 인사했고 일꾼들은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나이다”(4절)고 응답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의 종들을 존중하며 종들과 신앙적 인사를 주고받는 인격적 관계를 형성한 주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종들뿐 아니라 이방 여인 룻에게 관대함과 친절을 베푼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친족에 속한 사람이라는 이유보다도 이방 여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친절함과 관대함을 베풀었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에 불과한 자신에게 보아스가 은혜를 베푼 사실에 대해 의아해했습니다. 10절에 보면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이에 대한 보아스의 대답은 11-12절에 나오는데 간단히 말하면 ‘룻, 당신이 이방 여인이기 때문이오.’라 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11-12절) 보아스가 룻을 주목한 이유는 그가 이방 여인으로서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행한 효행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룻이 자신의 고국과 부모를 버리면서까지 시어머니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타국 백성에게로 오게 된 것을 보아스는 눈여겨봤습니다. 룻은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류하는 이방 거류민이 되었는데 보아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룻을 보호해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즉 보아스가 룻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이유는 룻이 자신의 부모와 고국을 떠나 알지 못하는 백성에게로 왔기 때문인데 이방 거류민을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이방 나그네’, ‘이방 거류민’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는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그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지금 약속의 땅을 차지해서 정착해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과거 애굽에서 나그네였고 거류민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율법의 정신에 투철하게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하게 된 룻을 율법을 따라 돌아보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을 허락해줍니다. 룻이 먼저 보아스의 사환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7절) 이는 사환이 보아스에게 한 말인데요 룻이 곡식 베는 자를 따라서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보아스에게 보고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밭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꼭 밭주인에게 허락을 받아야 사항은 아닙니다. 그래도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 일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룻이 사환에게 허락을 구한 이유는 단순히 이삭을 줍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라는 간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담대한 요청이며 특별한 은혜를 요구하는 부탁입니다.
당시에 추수하는 풍경은 먼저 낫을 들고 베는 자들이 곡식을 먼저 벱니다. 이들은 보통 남성들이 하는 일입니다. 이들의 뒤를 여자들이 뒤따른데 이 여자들은 베어진 곡식들을 품에 안아서 묶습니다. 즉 베는 자들이 곡식을 낫으로 베어 놓으면 ‘묶는 자들’이 잘려진 이삭들을 모아 품에 모아서 단으로 묶습니다. 이렇게 베는 자들과 묶는 자들의 일이 끝난 후에 단들을 밭에서 타작마당으로 옮기게 됩니다. 이삭을 주우려는 가난한 사람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는 것은 보통 이렇게 단들을 타작마당으로 옮긴 후입니다. 그런데 룻의 요청은 베는 자들을 바로 뒤따라서 아직 추수가 진행 중인 밭에서 이삭을 줍겠다는 것입니다. 단을 타작마당으로 옮겨놓기 전에 이삭을 줍게 해달라는 요청입니다.
다시 7절을 보십시오.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룻이 사환에게 이삭줍기를 요청한 이후에 즉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잠시 집에서 쉰 것을 제외하고 아침부터 쭉 내내 자신의 요청사항에 허락이 떨어지기까지, 지금까지 계속 밭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는 자를 따라서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달라는 요청은 밭 주인만이 허락해줄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에 어쩌면 룻은 불가피하게 밭주인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룻은 이삭을 본격적으로 줍지 못한 채 주인의 허락을 받기까지, 다른 밭으로 가지 않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속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환의 보고를 듣고 보아스는 즉시 룻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율법 레위기 19장 9-10절에 보면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룻은 가난한 사람이었고 또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거류민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룻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율법은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그대로 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이러한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룻에게 호의를 베풀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보아스가 율법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율법을 따라 그가 그의 친족 엘리멜렉 집안의 기업 무를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분배 받은 땅을 이런 저런 이유로 빼앗겼다면 가까운 친족 순서로 그 기업을 되사주어야 하는 의무가 발생하는데 이는 율법의 요구입니다. 이는 미망인이 된 친족 여인을 거둠과 더불어 기업을 되사서 가문을 잇게 하는 책임인데 보아스는 이 책임을 율법에 순종하므로 떠맡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보시겠지만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게 되며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합니다.
이런 여러 증거를 종합해보면 보아스는 하나님의 율법이 삶의 기준이 되는 사람이고 그 율법을 기쁨으로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아스의 삶에는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율법의 순종이어서 보아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했고 보아스가 소유하고 있는 종들에게도, 그리고 그의 밭에도 하나님나라가 임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수혜를 룻이 받고 있습니다. 룻이 이스라엘 내에서도 가장 취약 계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룻은 이방 여인이고 남편을 잃은 과부며 거기에다가 봉양해야 할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그녀가 살던 시대는 사사시대였습니다. 사사시대의 전형적 특징을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스라엘에 돌아와서 결코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직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사사시대에, 그래서 온통 어둠으로 점철된 암흑기에 보아스라는 사람과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그의 종들과 그의 밭과 그의 가정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기에 룻이 우연히 들른 곳이 바로 보아스였고 그의 종이었고 그의 밭이어서 하나님나라에 온 것입니다. 비록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어마어마한 만남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사시대의 대다수의 사람들과는 달리 보아스는 하나님의 법을 기쁘게 순종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룻은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존중되고 지켜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 당시 사회의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이방 여인 룻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와의 만남은 엄청난 혜택을 가져옵니다. 보아스에게 임한 하나님나라를 가지고 보아스는 룻과 우연히 만나서 룻의 삶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관건은 우리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 그리고 우리의 교회에 하나님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연히 우리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우리의 가정을 들른 사람들에게, 우연히 우리의 일터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우리의 교회를 찾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달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의 요구로 다가오는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임해야 우연히 들른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새롭게 될 수 있습니다. 소망을 찾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처럼 말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는 원리입니다. 보아스가 밭의 귀퉁이를 수확하지 않고 남기거나 흘린 이삭을 줍지 말라는 율법을 지켰다고 하나님이 더 많은 수확을 얻게 해줄 거라고 약속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율법을 지키면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적입니다. 레위기 19장에서 제시된 이 율법은 결국 이웃 사랑의 한 예로서 제시된 율법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이웃 사랑의 맥락 속에서 추수할 때 다 거두려하지 말고 이삭을 남겨두라는 율법이 나온 것입니다. 이 율법의 가장 큰 수혜자가 바로 룻입니다. 룻이 우연히 들른 밭이 보아스의 밭 곧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에 룻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룻이 살 수 있게 된 것은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가지고 실천하게 된 보아스의 율법 실천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되고 율법이 실천되는 사회에서는 연약한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됩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율법을 억지로라도 지키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비법입니다. 그래서 율법도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율법이 제시한 하나님의 비전을 일상에까지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세상인지 가장 명확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따르면 우리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해서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 백성의 참된 삶을 보아스는 보여줍니다.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 사랑을 가지고 지키는 율법, 말씀에 순종, 다른 사람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푸는 관대함,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 받은 축복을 나누는 축복의 통로, 이로써 우연히 만나게 된 약한 이웃이 살아나고 생존을 걱정해야 했던 룻이 회복될 수 있었던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소유하고 간직했던 보아스! 천국은 이와 같이 값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 44절에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이처럼 진귀한 천국을 소유한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시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고 혜택을 베풀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이 귀한 축복을 자녀들에게 나누므로 이제 더 이상 자녀들 곧 다음세대가 ‘다른 세대’가 아니라 ‘같은 세대’가 되는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시카고 대학의 카시오포 교수팀의 오랜 연구에 의하면 현대인의 가장 총체적인 사망 요인은 사고나 암이 아니라 외로움이라고 합니다. 외로움은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더욱 큰 문제로 부각됩니다. 외로움은 나이든 어르신들이 가장 흔히 겪으면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이가 더욱 들어갈수록 독거노인의 비율이 급증하는데 이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노부부가 흔히 서로에게 ‘내가 먼저 갈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만 이런 말은 혼자 남겨질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은 먼저 떠난 배우자가 마음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더욱 외롭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나오미는 연이은 상실을 경험하였습니다. 고향 베들레헴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자 나오미와 그의 남편 엘리멜렉,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이국땅 모압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고향을 떠날 때는 그래도 남편도 있고 두 아들도 있어서 비록 새로운 환경이더라도 나오미의 마음의 든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에 거주한 지 얼마 안돼 남편이 죽었습니다. 두 아들은 현지 모압 여인인 룻과 오르바를 만나 각각 결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결혼한 지 10년 쯤 지나서 두 아들도 그만 죽게 됩니다. 남은 자라곤 나오미 자신과 모압 여인 며느리 룻과 오르바뿐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입장에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당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에 흉년이 끝나고 먹을 것이 많아졌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모압을 떠난 직후에 나오미는 며느리인 룻과 오르바에게 그들의 고향 모압에 남아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고향땅에 남아서 재가해서 여느 사람처럼 소박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라고 말합니다. 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와봤자 아무 소망이 없을 거라고 말하면서 재차 그들을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노인이었을 나오미가 혼자 고향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보다 며느리라도 함께 데리고 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고통이 뒤따를 것을 몰랐을 리 없었던 나오미였지만 그들을 데려간다면 그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나오미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은 이방 모압땅에서 과부로 지내지 않으려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온다면 그들의 처지가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우려한 듯합니다. 그래서 재차 그들을 만류하고 그냥 모압땅에 남을 것을 종용한 듯합니다. 진심으로 그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결국 오르바는 나오미 곁을 떠나 고국 모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나오미는 세 번째로 룻을 설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나오미는 오르바의 떠남을 강조하면서 룻 역시도 자신을 떠나 자신의 고향 곧 모압 백성과 모압의 신 그모스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룻이 눈 한번 감고 ‘오르바도 떠났는데 내가 떠나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오르바의 떠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오는 것은 사람의 가장 근본이 되는 정체성을 버려야 되는 것인데 그래도 따라오겠냐고 룻의 선택의 엄중한 결과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장 근본이 되는 정체성은 민족적 정체성과 종교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압 여인인 룻이 나오미를 따라온다면 가장 근본이 되는 정체성 곧 모압 사람이라는 것과 모압 신 그모스를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오미를 따라온다면 룻이 모압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야 할 것이며 그모스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임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정곡을 찌르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신의 각오를 밝힙니다. 16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은 모압 백성과 모압 신에게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에 대해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될 것이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 부분을 해석할 때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가려는 이유가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진리이기 때문에 어떠하든지 따라붙으려 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실제로 룻의 대답에서도 더 이상 모압 백성과 모압 신이 자신의 백성과 신이 아니라 이제는 시어머니 나오미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하나님이 앞으로 자신이 속할 백성이 되고 자신의 하나님이 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룻이 나오미로부터 여호와 신앙을 소개 받고 개종을 선택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룻은 나오미를 따라가려는 결심이 이미 섰기 때문에 나오미의 세 번째 설득에 대해 어머니가 어디를 가든 따라갈 것이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정체성도 포기할 수 있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단순히 대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 동기가 아니라 인간적 동기에 이끌려서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따라가려고 결심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룻은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떠나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자브’라는 동사인데요 이 동사의 원래 뜻은 ‘버리다’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떠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자브’입니다. 여기서도 단순히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고대 유대 사회에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가정을 이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고서 남자가 부모의 집에서 살거나 부모의 집 가까이에서 살았습니다. 오히려 떠나는 것은 아내죠. 아내가 자신의 부모 곁을 떠나 남편의 부모가 사는 곁에서 확대된 가정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에서 ‘떠나’ 곧 ‘아자브’는 ‘버리다’ 혹은 ‘저버리다’의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 남자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변하게 되는데 결혼 전에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이 부모에 대한 것이었다면 결혼 후에는 그의 아내에 대한 것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곧 ‘남자가 부모를 저버리고’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남자가 이제는 하나님께서 짝지어 세워주신 아내와 한 가정을 이루고 그 가정을 우선하라는 말씀입니다. 십계명 제5계명으로 ‘부모 공경’을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은 의외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실 가정에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라고 대답했는데 이 대답은 어머니를 뒤로 하고 돌아가는 것은 곧 어머니를 ‘버리는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어머니를 버리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돌아간다면 시어머니는 홀로 남게 되고 그것이 곧 시어머니를 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룻 자신이 홀로 된 시어머니를 떠난다면 자식 없는 늙은 여인을 사실상 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나오미가 세 번이나 돌아가라고 권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룻이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룻은 연로하고 홀로 된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민족을 버렸고 자신의 민족의 신을 버렸던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그 결과 어머니의 백성이 자신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룻이 나오미가 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니도 어머니라는 생각에 그랬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고불변의 진리는 며느리는 결코 딸이 될 수 없고 시어머니는 결코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큰 아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돼서 며느리 자랑을 자주 했습니다. 시댁에 와도 마치 친정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생각해서 참 좋다고 자랑했습니다. 어느 날에는 며느리가 시댁 소파에서 스르르 잠이 들어서 아예 소파에 누워서 잤다고 자랑했습니다. 그 집은 아들만 두었는데 딸이 생겼다고 좋아했습니다. 며느리가 딸 같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는데 언젠가 제게 정색을 하며 며느리는 결코 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실을 깨닫는데 몇 달이면 족했나봅니다.
정신과의사가 쓴 <당신과 나 사이>라는 책에 보면 며느리는 절대 딸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하는 단락이 나옵니다. “앞으로는 딸처럼 대할게, 너도 나를 친정엄마라고 생각해”라는 시어머니의 말은 실현 불가능한 말이라고 단언합니다. 시어머니야 그만큼 친해지자는 뜻에서 한 말이겠지만 그런 말을 자주 할수록 며느리는 부담감에 짓눌려 오히려 튕겨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에는 한계가 있고, 서로 그 한계를 빨리 인정할 때 오히려 관계가 발전하는 법임을 강조합니다. ‘왜 아직도 나는 시어머니가 불편한 걸까’라는 고민을 갖고 있는 며느리가 있다면 ‘불편하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을 염려해주는 시어머니’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시어머니의 경우엔 ‘불편하지만 그래도 내 아들과 살아주는 고마운 며느리’라고 생각하면 불편하기만 했던 관계도 서서히 발전해 조금은 편해질 것입니다. 그 정도 거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는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룻이 시어머니도 어머니라는 생각에 시어머니를 버리지 않고 따라나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소위 전통적 충효사상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종교적 이유도, 그리고 효 때문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룻은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일까요? 나오미를 두고 떠나는 것이 곧 나오미를 버리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에 룻의 선택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룻기에서 자주 사용되고 강조되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지난 시간에 본 룻기 1장 8절에서는 ‘선대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선대하다’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인애’, ‘인자’, ‘긍휼’, ‘자비’, ‘사랑’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헤세드이고 또 사람 간의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헤세드’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들 서로 간에 ‘헤세드’를 보여줄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해주시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대해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땅한 삶의 모습 곧 ‘헤세드’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고 기대할 수도 없었던 이방 여인에게서 지금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보다 지금까지 한 집에서 지냈던 나오미라는 연로한 여인을 두고 자기 살 길을 찾아 나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마저 떠나면 말 그대로 혼잣몸이 되는데 인간적으로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이기 이전에 그리고 윤리적으로 효를 실천해야 하는 당위 이전에 하나님의 헤세드가 룻에게 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대되는 모습을 지금 이방 여인 룻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룻은 모압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는 여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모압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할 여인입니다.
룻의 단단한 결심을 보고 나오미도 룻을 주저앉히려는 생각을 버리고 룻과 함께 자신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오자 십 수년 만에 나오미를 보게 된 마을 사람들이 놀라서 외칩니다. 본문 19절입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돌아오자 온 동네가 떠들썩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20-21절) 나오미라는 이름의 뜻이 나의 즐거움 혹은 즐거운 사람이라는 뜻인데 자신의 인생은 오히려 쓰디 쓴 사람 곧 ‘마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드셨기에 자신을 ‘마라’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나갈 때는 풍족하게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비어서 왔다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비록 흉년으로 나갔어도 그때는 남편도 있었고 두 아들도 있어 든든했는데 이제는 혼자서 돌아왔다는 탄식입니다. 나오미의 말속에는 며느리를 얻어서 돌아왔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며느리는 결코 딸이 될 수 없고 더더욱 아들도 될 수 없기 때문이겠죠.
오히려 성경 저자가 나오미가 비어서 온 것이 아니라 룻과 함께 돌아왔음을 강조합니다. 22절입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이 절을 직역하면 “나오미가 돌아왔는데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이 그녀와 함께 하였다. 룻은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이었다”입니다. 두 가지 강조점이 있습니다. 나오미가 텅 빈 채로 혼자 돌아온 것이 아니라 물론 남편과 아들 둘은 잃고 돌아왔지만 대신 룻이라는 며느리와 함께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룻이라는 여인은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나오미를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라고 부르면 자연스럽습니다. 나오미가 이방땅 모압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 저자는 오히려 룻을 일컬어 ‘모압에서 돌아온 여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버리고 떠날 수 없어서 끝까지 그녀를 따라 베들레헴까지 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룻이 신앙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은 모압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온 여인, 모압에서 여호와 하나님에게로 돌아온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텅 빈채로 고향땅에 돌아왔다고 생각하여 말했지만 성경은 이미 그녀에게는 하나님이 곁에 두어 함께 있게 한 큰 선물인 룻이 함께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룻을 얻은 것입니다. 나중에 나오미가 얻게 된 룻이 나오미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이어지는 룻기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룻을 얻게 된 이유는 룻에게 보여준 그의 헤세드, 비록 시어머니라도 며느리를 생각하는 진실한 마음과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홀로 베들레헴에 돌아가기보다 두 며느리를 모두 데려가는 편이 본인에게는 좋은 선택이었을 테지만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생각해서 그들을 두고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며느리를 데리고 돌아온다면 며느리가 베들레헴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든 바꿔보려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며느리를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굉장히 인간적인 배려이며 상대방을 배려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곧 입장 바꿔서 생각해본 것입니다. 이러한 나오미의 품성이 없었다면 룻이 굳이 시어머니를 따라나서려고 했을까요?
인간관계는 늘 상호관계입니다.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는 너가 될 수 없고 너는 내가 될 수 없는 관계이지만 그럼에도 나오미와 룻의 멋진 관계처럼 헤세드로 맺어진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될 때 삶은 풍요롭게 됩니다. 텅 빈 채로 돌아왔다고 탄식하는 나오미, 홀로 남겨진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탄식하는 나오미 곁에는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있게 허락하신 룻이라는 선물이 있었습니다. 이후 룻을 통해 나오미의 텅 빈 상태가 얼마나 풍요롭고 충만하게 바뀌는지 우리는 이어지는 룻기 강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안중에 없던 사사 시대, 흉년이 들어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떠나야 했던 사사시대가 어떻게 막을 내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황금시기인 다윗 왕조가 세워져 텅빈 시대가 풍요롭고 충만한 시대로 바뀌는지가 룻기의 구속사적 특성입니다.
혈연보다 진하고 영원한 것이 하나님나라 가족의 DNA입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끝까지 따라나섰던 이유는 시어머니라는 측면보다 자신이 떠나게 되면 나오미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헤세드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 서로에게 나타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이러한 헤세드로 뭉친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이며 하나님의 가족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막 3:34-35)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곧 하나님께서 서로 간에 어떠한 관계가 되어 서로를 섬겨야 할 것인지를 삶에서 실행하는 자가 곧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연세대 심리학과 서은국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실화가 나옵니다. 2011년 가을 뉴욕 맨해튼에 살고 있던 39세 된 남자 제프 렉스데일이라는 사람이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외로움에 몸부림 치고 있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그는 하도 외로워서 노란 종이 한 장에 자기 전화번호와 간단한 문장 하나를 적어 맨해튼 시내 곳곳에 붙였습니다. ‘뭐든 대화하고 싶은 사람은 저에게 전화하세요. 외로운 제프.’ 제프는 전화로라도 단 몇 명의 대화 상대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남겨놓은 것인데 그에게 실제로 연락을 한 사람은 무려 7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뉴욕 맨해튼이라는 지역 특성상 뉴욕은 물론 영국, 캐나다, 나이지리아, 말레이시아, 심지어 한국에 사는 사람들까지도 제프에게 전화했습니다. 대부분 자신도 외롭다는 하소연과 함께 힘내라는 응원 메시지가 줄을 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사람입니다. 레바논 속담에도 “사람이 없다면 천국조차 갈 곳이 못된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책에서 저자는 행복은 사람이고 인간관계라고 단언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 먹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고 강조합니다. 단순히 낭만적이고 소박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신의 심리학적 연구 성과를 통해서 내린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의 비결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헤세드를 주고 받는 것입니다. 헤세드를 주고 받을 수 있는 곳은 바로 교회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애와 사랑을 베풀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헤세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 우리가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헤세드를 베풀었기 때문에 룻은 보답으로 나오미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룻의 선택은 먼저 받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이렇게 헤세드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텅 빈 나오미의 삶과 생존이 불투명했던 룻의 삶을 참으로 행복하고 풍요롭게 바꿔놓았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가족 관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헤세드로 풍성한 교회, 서로가 서로에게 헤세드를 베푸는 교회, 가족 안에서도 가족들이 서로 헤세드를 베푸는 아름다운 가정, 그렇게 되므로 여러분의 삶에 행복과 참된 만족이 가득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가족이라는 인연 (룻 1:1-14)
‘결혼은 인륜지 대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결혼만큼 중요한 이벤트는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결혼제도가 앞으로 퇴출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신문 기사 중 “결혼의 '몰락'…프랑스 등 유럽 10개국 혼외출산이 절반 넘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유럽 젊은이들이 점점 더 결혼을 기피해서 유럽에서 결혼관계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가 해마다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슬란드,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내 10개국의 경우 혼외출산 신생아 수가 전체 신생아의 절반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가히 결혼제도의 몰락, 결혼제도의 실종이라고 할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입니다.
월간 신동아에 보면 젊은 시절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의대 교수로 크게 성공하여 지금까지 연구활동을 하고 있는 독일 본 대학 의대 종신직 교수 이종수 박사의 글이 연재되고 있습니다. 올해 90세이신데 아직도 현역입니다. 이분이 독일에서 반세기 이상 거주하는 동안에 결혼식이란 단어가 자신의 머리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합니다. 최근 약 30년간 독일에서 타인의 결혼식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며 애도 낳고, 동성연애자도 동거생활을 합니다. 필요하면 조용히 시청에 가서 결혼신고서에 서명을 합니다. 그러면 법적 부부가 됩니다. 그리고 굳이 법적으로 부부가 되지 않고 단지 동거만 해도 법적 부부와 동일한 권리를 부여 받습니다. 동거생활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짐에 따라 독일 정부가 세금 혜택이나 자녀 수당도 법적 부부와 똑같이 받을 수 있도록 가정법을 변경했기 때문입니다. 동거 가정에서 자란 아이도 법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차별 받지 않도록 법적 조치를 취해놓았습니다. 가령 동거자가 기른 애들이 이력서를 쓸 때도 사회에서 사생아라는 차별이 없게 부모 이름을 적는 칸을 없앴습니다.
세금 정산을 하기 위해 세무서에 제출하는 신청서에도 ‘배우자/생의 반려자’라고 구분돼 있습니다. 결혼한 배우자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하는 생의 반려자가 법적으로 동등하게 취급되도록 국가가 배려한 것이죠.
이러한 급격한 결혼제도의 변화는 1969년 동방정책을 주도한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간통죄를 폐지한 후 시작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20년간 통치해오던 기독교민주연합의 정권을 사회민주당이 빼앗아오고서 제일 먼저 형법에서 간통죄를 폐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혼율이 상승했고, 이혼 시 재산 분배, 위자료, 그리고 자녀 양육 문제 등에 대한 법 개정이 이뤄졌습니다. 그로 인해 이혼 수속 자체가 복잡해졌습니다. 이혼이 복잡해지자 1980년대에 들어서 젊은 세대는 우선 동거생활을 해보고서 필요하면 결혼하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아예 결혼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2016년에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독일이 1969년에 간통죄를 폐지했는데 한국은 약 50년 정도 늦었습니다. 오늘날 독일은 결혼식이란 단어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는데 앞으로 우리도 그러한 전철을 밟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사람마다 결혼을 하는 이유도 가지각색이고 오늘날에는 결혼을 안 하는 이유도 많죠. 결혼연령도 많이 늦어지고 있고, 자녀도 평균 한 명 정도만 출산합니다. 이혼율도 상승해서 약 40%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근대 유럽 왕실에서는 사촌간 근친혼이 유행했는데 정치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왕실과 귀족에서는 근친혼이 보편적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의 영향으로 근친혼이 완전히 사라졌고 동성동본의 결혼도 금지됐습니다.
성경에서 결혼제도를 도입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제일 처음에 중매를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담을 지으시고 아담이 홀로 거하는 것이 보시기에 좋지 않아서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셨죠.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으시고 그녀를 아담에게로 데려왔을 때 아담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뼈와 내 살로 만들어진 존재로서 너무나 친근한, 한마디로 ‘살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인류 최초의 가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은 아마 창조세계의 대표자이자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큰 책임을 떠맡았는데 이 책임을 혼자 지는 것이 심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중한 그 일을 같이 할 수 있도록 돕는 여자를 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와의 창조 후에는 아담 혼자 하지 않아도 되고 모든 것을 함께 의논해서 할 수 있게 되어서 아담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혼자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또한 외로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아담에게 맡기신 일이 심히 크기 때문에 이처럼 돕는 배필을 주셔서 너무 힘들지 않게 일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자가 남자의 부속품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주 서 있는 존재로서 서로가 서로에게 인격적 완성을 가져다주는 존재입니다. 서로를 반영하고 비추어보면서 정체성을 세워가고 상호 간의 보충을 향하도록 지어진 존재입니다. 부부는 상호 간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는 존재입니다. 부부가 가지는 의의는 단지 후손을 태어나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실현의 확장이나 도움을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부부는 그것 자체 안에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남과 여로 창조된 인간 실존의 성적인 분화는 창조 질서에 속하는 것입니다. 변경할 수 없는 창조 질서입니다. 이 창조 질서는 인간의 인격성이 남녀간의 공동체 곧 부부 안에서 표현되고 달성되는 것임을 시사합니다. 즉 부부가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영적인 결합을 통해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는 전인격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부는 나의 절반을 버리고 상대방의 절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한몸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깨닫게 하시고 자신을 비움으로 상대방의 절반을 받아들이고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부부는 하나님과 공동체를 이루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인격적인 운명과 미래에 대한 하나의 표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로 만나 가정을 이룹니다. 성경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제비 뽑아 기업을 분배하는 여호수아 14장부터 19장까지를 보면 계속해서 반복하는 구절이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 결혼과 가족에 대해 가정의 회복을 역설하는 우리들교회의 김양재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완성하고 마치는 기준은 바로 가족이다. 가족을 우선으로 여기고 지키는 사람이 인생을 완성하고 성공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나라를 완성하는 영혼 구원의 사역이 외부 전도나 선교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가족대로 그 기업을 분배하신다. 가족이 우선이라고 하신다. 내 가족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가족이 한 믿음이 되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선교의 장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서 내 가족만 잘 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가족이 영혼 구원을 위해 쓰임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이번 달에는 한 가정의 이야기이자 한 가문의 회복의 이야기인 룻기를 4번에 걸쳐서 강해하고자 합니다. 룻기는 한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나오미를 중심으로 바라보는 한 가정입니다. 이 가정이 어떻게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또 어떻게 어려움을 회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보기를 원합니다. 나오미 가정을 통해 우리의 가정을 들여다보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룻기는 사사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본문 1절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라고 말씀이 시작됩니다.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과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게 됩니다. 흉년 때문에 먹을 것이 없어 살고자 이방 모압땅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엘리멜렉 일가는 유다 베들레헴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좁게 이야기하면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은 아주 조그만 시골 마을이었지만 나중에 너무나 유명한 마을이 됩니다. 구약의 미가 선지자의 예언 때문인데요.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고 예언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 곧 에브랏을 가리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은 바로 에브라다 마을에 살다가 모압땅으로 곡식을 구하러 간 것입니다.
룻기 마지막에 보면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재가해서 낳게 된 아들이 오벳인데 오벳이 다윗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습니다. 룻은 다윗의 증조 외할머니가 됩니다. 그러므로 룻기의 이야기는 다윗의 조상의 이야기이며 먹을 것이 없어 이방땅에 곡식을 구하러 간 언약 백성 가정이 어떻게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풍성하고 가장 은혜스러운 시기였던 다윗 왕조를 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영적으로 궁핍한 인생들이 풍성한 은혜를 얻게 되었는지를 내다보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불행하게도 모압땅에서 거류하기 얼마 안된 때에 나오미의 남편 아비멜렉이 그만 죽습니다. 아버지 아비멜렉이 죽고 그의 두 아들이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아 결혼하게 됩니다. 이제 고향땅으로 돌아오기가 점점 어려워진 형국입니다.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은 각각 모압 여인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삼습니다.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이 십년쯤 지나서 둘 다 죽게 됩니다.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고향땅을 등져야 했던 나오미의 가정이 이제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되었습니다.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게 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으로서 경험하기 벅찬 모든 고통을 모압에 거주하며 겪게 됩니다. 나오미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고통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13절 끝부분에서 나오미는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이러한 고통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고 마음이 쓰디 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오미가 당한 고통, 나오미의 가정에 들이닥친 비극에 대해서 까닭이 무엇인지를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이 원인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떠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 해석은 결코 바람직한 해석이 아닙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모압땅에 간 것을 꼭 잘못된 것으로만은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야곱 일가도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간 예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이들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오미의 가정에 한 인간이 겪기 벅찬 비극이 들이닥쳤다고만 말해야 합니다. 나오미 개인에게 이 고통이 더 큰 고통이 되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그 고통을 가져다주셨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치셨습니다!
요즘도 남편을 잃고 여자 혼자 삶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당시에는 여자 혼자 생존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여인이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은 존재 근거를 상실함이나 진배없습니다. 고대 시대에는 여인의 존재 근거는 남편과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존재 근거가 상실되었을 뿐 아니라 생존의 보장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과부로 남게 된 나오미, 두 아들을 잃게 된 나오미, 그녀는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없어 보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한 소문을 듣습니다. 6절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나오미에게 한 소식이 전달되었는데 고향 베들레헴에 양식이 풍족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양식을 주심도 하나님의 공급하심의 결과라는 해석이었습니다. 사실(팩트)은 곡식이 많아진 것이고 해석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곡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해석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들이닥친 비극은 하나님이 자신을 치신 것으로, 그리고 고향땅에 돌아갈 수 있도록 양식을 주심은 하나님의 돌아보심과 공급하심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었습니다. 물론 이 믿음이 나오미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던 것입니다만 이 믿음 때문에 나오미는 살 길을 열게 되었습니다. 어떤 성경 주석가는 나오미의 더 큰 고통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어차피 살 길이 막막했던 나오미는 십 여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두 며느리와 함께 십 여년 간 삶의 터전이었던 모압땅을 박차고 나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특별히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라는 표현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있던 곳‘은 당연히 모압 지방인데 다시 표현한 것으로 보면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습니다. 삶의 어려움이라는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살 길이 막막할 때 벗어나는 시작은 ’있던 그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와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나오미가 절망과 비탄 속에서 한 일은 있던 그곳에서 박차고 나온 것입니다. 고향이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주권적 통치로 다스리시는 공급자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정의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합니까? 우리 가정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손을 쓸 수조차 없는 지경에 처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을 치셨음을 믿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를 돌아보시는 하나님이심을 신뢰하고 ‘있던 그곳’에서 나와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야곱은 딸 디나가 강간당하고 세겜 족속의 사람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거기서부터 나와서 벧엘로 향했습니다. 처음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길거리에서 유숙하던 두려움에 떨던 밤에 자신을 만나주셨던 벧엘의 하나님에게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는 결심을 하고 함께 유다 베들레헴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갔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떠난 지 얼마 안돼서 나오미가 며느리들에게 말합니다. 8-9절입니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가 생각해보니 지금 자신이 이방땅에서 홀로 과부로 지내는 막막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만약 며느리들이 자신을 따라 자신의 고향으로 온다면 그들의 신세가 지금 자신의 신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한 듯합니다. 자신은 이방땅에서 과부로 살지 않으려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자신을 따라오는 며느리들은 모압 여인들이므로 베들레헴에 오면 자신처럼 이방땅의 과부 신세가 됨을 걱정한 듯합니다. 두 며느리가 지금까지 자신의 아들들과 자신에게 ‘선대’했던 그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대해주셔서 자신들의 고향에 그대로 남아서 재가할 길을 허락해주시기를 축복하고 돌려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선대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인애’나 ‘인자’라는 말로 번역해도 좋습니다. 나오미에게 젊은 며느리들이 인애를 베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인애를 베풀어주셔서 자신들의 고향에서 남편들을 다시 만나 가정이 제공하는 따뜻함과 위로를 받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축복을 비는 것입니다. 귀찮아서 떼어버리려는 의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며느리들의 앞길의 행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과 입 맞춤으로 더 이상 자신에게 헌신할 필요가 없고 더 이상 충성을 바칠 의무에서 벗어났음을 알려주고 작별하려고 합니다.
나오미의 심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며느리들은 울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와봤자 아무런 소망도 아무런 소득도 없을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자신에게 또다시 아들이 생길 가능성도 없고 그래서 자신이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르바는 모압에 그대로 남기로 하고 모압땅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 나오미가 함께 했습니다. 14절입니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선택의 갈림길에서 며느리 오르바는 상식적인 선택을 하고 며느리 룻은 이상한 선택을 했습니다. 우리는 오르바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오르바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기의 살 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자기의 길을 찾았지만 이후 여호와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룻은 시어머니를 붙좇는 선택을 했는데 이는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 듯한 선택이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룻의 선택이 있었기에 성경은 룻을 일컬어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으로 부릅니다. 룻기에서 두 번이나 같은 표현을 써서 룻을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나오미야 당연히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으로 불려야 마땅합니다. 모압 지방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으니까요. 그런데 룻을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으로 부르는 것은 조금 맞지 않는 듯한 표현입니다. 룻기 1장 22절에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어로 보면 여기에 룻을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으로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룻기 2장 6절에서도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여기서도 룻을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여인’으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렇게 유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남편이 없었고 그래서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먹을 양식을 어떻게 구할 것인지, 생존의 문제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미래의 불확실성과 불투명성이 아니라 나오미뿐 아니라 이방 여인 룻이 여호와의 언약 백성이 되어서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까 언급했던 김양재목사님의 ‘결혼을 지켜야 하는 11가지 이유’라는 책의 한 대목을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결혼의 목적은 행복이 아닌 거룩이다. 이땅에서 부부로 만나 가족으로 맺어진 이유는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서다. 그 목적을 붙잡지 않는다면 모든 결혼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100퍼센트 죄인인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살아가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행복을 좇으면 불행해진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인 거룩을 좇으면 행복은 저절로 따라온다... 부부가 서로 복종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결혼의 목적인 거룩을 이루기 위해서다. 흠이 많은 아내, 허물이 많은 남편을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기 위해 복종과 사랑의 명령을 주신 것이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남편, 아내라도 구원을 위해 복종하고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흠이 없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우리의 가정을 돌아보고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가족으로 묶어주셨는지를 생각해보고 서로가 하나님나라라는 공동의 목적으로 연합한 가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영생불사(永生不死)는 인류의 오랜 꿈입니다. 중국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장생불노약을 찾으려 했습니다. 서복이란 사람이 동쪽의 신선들이 사는 잠신산에 그런 약초가 있다는 보고를 올리자 진시황은 서복에게 명령하여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서복이 찾아다닌 지역 중에 우리나라 경상남도 함양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함양군내의 한 절에 새겨진 부조에 ‘불로초 원정대’ 형상이 새겨져있습니다. 그 부조에 새겨진 불로초는 산삼으로 보입니다. 함양군은 지리산과 덕유산 등 해발 1천미터 이상 되는 산이 15개나 있어서 전국 최대의 산삼의 고장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함양군은 해마다 산삼축제를 열어서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병장수, 영생불사는 인류의 오랜 꿈입니다. 이집트의 미라도 그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집트인이 죽은 시체를 보존한 건 영혼이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현대판 미라라 할 수 있는 것은 냉동인간입니다. 냉동인간은 불치병에 걸려 죽은 사람을 죽음 직후 급속 냉각시켜 보존하였다가 먼 훗날 의료기술이 발달하여 불치병의 치료법이 개발되면 해동시켜서 살려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기초하여 시작하였습니다. 사망하면 즉시 시신을 얼음통에 집어넣고, 산소 부족으로 뇌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심폐소생기를 사용하여 호흡과 혈액순환 기능을 복구합니다. 이어 몸속의 혈액을 모두 뽑아내고 특수 부동액으로 대체합니다. 그리고서 며칠 뒤 시체를 영하 196도에서 급속냉동해 보존합니다. 현재 냉동 상태로 보존된 사람의 수는 250구에 달합니다. 미국에만 4개 업체가 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략 비용은 2억 3,000만 원 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해동할 때 세포 손상을 막고 뇌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지가 관건인데 현재 기술로는 어렵다고 합니다.
가장 최근에 인류의 영생불사의 꿈은 두뇌의 신경회로의 정보와 그것의 총체인 인간의식을 다운받아 저장해서 육체가 죽더라도 다른 육체를 선택한 다음 의식을 옮겨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는데 까지 성장했습니다. 아직은 다분히 공상과학적인 아이디어인데요. 2075~2080년까지는 이 기술이 널리 보급돼 누구나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류는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힘입어서 어떻게든지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어보려는 노력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죽음은 인류의 원수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고린도전서 15장 25-26절에도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인류의 원수는 죽음 곧 사망 맞습니다! 이뿐 아니라 지금도 하나님의 우편에서 하나님의 통치 대권을 위임받아 다스리고 계시니 예수님의 원수도 사망입니다.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창조세계에 깃든 죽음이라는 존재는 모두에게 원수입니다. 없어져야 할 원수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극복 곧 죽음의 죽음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죽음이라는 원수의 박멸은 하나님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가 내다보았던 소망이었습니다. 본문 54절에 보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은 이사야서 25장 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기원전 8세기에 예언한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사 25:6-8)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여금 먼 훗날에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조세계에서 사망의 축출 과정은 마치 철권 통치를 휘두르고 있는 독재자의 축출만큼이나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본문 55-56절을 보십시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현실세계는 사망이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인류 역사의 챔피온으로 등극했습니다. 사망은 불패신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망에게는 독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맹독성 동물이 물어서 생기는 상처나, 독침을 가진 전갈이 찌르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망이 쏘는 것’ 곧 사망을 가져오는 독침이 바로 죄입니다. 독이 든 주사와 같은 게 바로 죄입니다. 죄라는 주사바늘에 찔리면 사망을 일으키는 독이 온몸에 퍼져서 죽게 됩니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죄라는 주사바늘에 찔리면 독이 온 몸에 퍼져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죄라는 주사바늘이 날카로우면 날카로울수록 살짝 스치기만 해도 죽게 되는데 바로 “죄의 권능”이 ‘율법’입니다. 죄가 생생하게 힘을 발휘하는데 악용되는 게 바로 율법입니다. 죄성이 율법을 만나면 살아납니다. 죄가 심히 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죄라는 주사바늘이 칼날처럼 날카로워져서 살짝 닿기만 해도 치명적인 독이 몸에 주입되어 결국 죽게 됩니다. 그래서 죄와 율법과 사망이 삼각편대를 이루어서 인류 위에 왕노릇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세계와 현실세계에서의 사망의 승리입니다. 사망의 왕노릇입니다. 무적 무패 신화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서 사망을 내쫓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망의 철권 통치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찰스 콜슨의 책 <이것이 교회다>에 보면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축출되는데 한 교회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말해줍니다. 차우셰스쿠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공산주의 국가 루마니아 인민공화국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는 모택동의 문화대학명과 북한의 김일성을 흉내낸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루마니아를 철권 통치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자 공산당 서기장, 국가평의회 의장, 국방위원회 위원장, 공산당 위원장 등을 겸임했고 그의 첫째 아들은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둘째 아들은 비밀경찰 총책임자, 셋째 아들은 국가경제기획원 부원장 등 주요 국가 기구 수장을 모두 자신의 친인척으로 메웠습니다. 이러한 족벌 정치 외에도 비밀 경찰 세쿠리타테를 앞세운 공포정치를 펼쳤습니다.
그가 거주하던 인민 궁전은 정말 궁전이었습니다. 궁전에 들어가는 입구가 정문으로부터 1km이고, 홀이 전부 최고급 대리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궁전을 짓게 된 계기가 차우셰스쿠가 평양을 방문해서 김일성 궁전을 보고 이보단 훨씬 더 좋은 궁전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궁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1조원이 넘는 돈을 들여 궁전을 지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궁전 밑에서도 지하 궁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차우세스쿠 집무실 방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450미터 지하에 또 다른 집무실이 있었는데 핵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집무실이었습니다. 그 곳에 한 달 먹을 식량을 비축해놓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막강했던 차우셰스쿠의 철권 통치가 어떻게 막을 내린지 아십니까?
차우세스쿠를 몰락시킨 루마니아 혁명은 1989년 12월 17일, 티미쇼아라 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몇 해 전에 이 교회에 부임한 토케스 목사는 교회를 향한 정부 당국의 탄압에도 선지자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공산체제에 순응해서 교인들이 거의 떠났던 교회에 부임했지만 2년이 안돼서 교인들이 5천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차우세스쿠 정부는 그를 체포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 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함께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습니다. 급기야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시민 시위대에 맞불을 놓으려고 관제 집회를 기획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루마니아의 시민들이었기에 관제 집회에 동원된 시민들이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관제 집회가 반정부시위로 변질되자, 비밀경찰 세쿠리타테가 시위대를 유혈 진압했습니다. 차우세스쿠는 세쿠리타테만으로는 힘들겠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동원했는데 당시 국방부장관이 시위대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자살했습니다. 국방부장관의 자살을 계기로 군대조차 시민의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결국 차우세스쿠는 헬리콥터 편으로 궁을 탈출했지만, 12월 23일 혁명 시민들 측에 체포되어 12월 25일 총살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차우셰스쿠의 25년간의 철권 통치가 불과 한 주만에 막을 내리고 루마니아에 봄이 찾아왔습니다. 무지무지한 철권 통치가 단지 한 주만에, 그것도 한 목회자의 체포와 평화적 촛불 시위가 발단이 되어서 무너져내렸던 것입니다.
역사는 급변합니다. 철옹성을 자랑하고 철권 통치를 자랑하는 사망도 한 순간에 무너져내릴 것입니다. 그 급변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 51-52절입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강조점은 순간적 변화입니다. 이미 죽은 자들은 순간적으로 다시 살아나고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사람들도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외형만이 아니라 존재 내면과 존재 전체가 변화될 것입니다. 이렇듯 급격한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변화되지 않는 몸을 가지고서는 하나님이 만드실 새 창조세계를 받고 거기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현재의 몸 곧 혈과 육은 결국 썩고 부패하고 죽을 것이지만 커다란 나팔소리가 온 우주에 울려퍼질 때 순식간에 죽은 자가 영광스런 몸으로 살아나고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조 때 창조세계를 완비한 후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셔서 거기에 입주시켰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새 창조 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기존 세계를 변형시키시고 거기에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입주시킬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그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변환 이후에 잘 단장된 신부 곧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와서 입주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품에 있던 천상의 교회가 이땅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미 이땅에 있는 교회라도 하나님 품에 있던 천상의 영광스런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부활은 사망의 사망, 사망의 축출, 사망의 패배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승리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본문 57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아까 사망이 인류 역사에 철권 통치를 자랑하고 무적 무패 행진을 계속하는 챔피언에 등극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실은 이미 역사의 한 복판에서 의문의 1패를 당했습니다. 단순히 1패에 불과한 패배가 아니라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서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대규모의 추수 곧 성도들의 부활을 가져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미 발생했던 겁니다. 언제 발생했습니까?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죽음에게 죽음이 이미 선고됐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억누르던 사망의 권세를 깨뜨린 일대 사건입니다. 최후에 있을, 마지막에 되어질 일이 이미 앞당겨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기존 창조세계에 대해 새창조를 진행하고 계심을 만 천하에 선포하신 겁니다. 맨 마지막에 멸망받아야 할 원수인 사망 권세를 이미 제압하심으로써 새 창조의 비전을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본격적인 하나님나라의 시작입니다. 새 시대의 개막입니다. 옛창조 세계를 뚫고 새창조가 드러난 사건입니다.
사망의 패배와 우리의 부활 승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의 승리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에서 사도 요한은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봅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6). 피조세계 전체를 대표하는 네 생물과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이십 사 장로들이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 5:9-10)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고 또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저 받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저 받을 뿐입니다. 부활도 그저 받을 뿐입니다. 승리도 그저 받을 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로 주어짐입니다.
우리는 4월 한 달 간 다섯 번에 걸쳐서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을 강해했습니다. 부활에 관한 긴 논의는 마지막 58절에서 마무리됩니다.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말씀합니다. 약간 의외입니다. 부활에 관한 결론으로는 다소 의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활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그러므로 이렇듯 놀라운 소망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그러니 다함께 기뻐합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잘 참읍시다!”는 말로써 마무리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결론은 지금 현재의 우리의 삶입니다.
몸의 부활을 확실히 믿는다면 지금 우리가 비록 썩어질 몸을 갖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 해도 이 몸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 더없이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뿐만 아니라 이 몸이 지금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급격하게 변화시키기를 원한다면 지금 우리의 몸으로, 그리고 이 몸이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삶의 노력이 중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강조했듯이 우리는 썩어지고 욕되고 연약한 혼적 몸을 심지만 하나님은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영의 몸을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전혀 다른 영광스러운 몸, 오직 성령께서 삶의 엔진이 되고 주장하시는 영적인 몸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장차 입게 될 것이지만, 사도 바울이 심고 거둠이라는 비유를 가지고 몸의 부활을 설명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을 결실 맺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땅에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앞으로 사라져버릴 세계를 위한 헛된 노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창조세계를 새롭게 갱신하고 변혁시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수행해내는 역할과 섬김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거룩함에 이르기 위한 노력, 인격의 성장도 그대로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 예수 믿게 된 옆의 지체도 그대로 여러분 곁에서 친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 곧 주의 일에 대한 수고와 노력, 가령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서로를 향한 섬김, 의를 추구하려는 행동, 직업에의 성실, 일과 노동,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돌아보는 돌봄, 주님의 몸된 교회를 향한 헌신, 신앙성장과 인격성장 등 주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이 결코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2-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하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는 말씀은 미래의 소망이 현재로 침투에 들어와 현재의 삶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된 소망이라면 현재의 삶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몸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땅에서 몸으로 행하는 일들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몸으로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는 합당한 삶의 예배를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 몸을 가지고 수행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삶의 모든 발자취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합당한 예배가 되도록 지금 현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제물’이란 원래 죽여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살아 있는 제물로 드리라는 말씀은 마치 죽어서 하나님께 바쳐진 짐승처럼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는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 내 자신의 고집이나 아집을 다 버리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약 시대의 참 예배는 주일날 드리는 예배뿐만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드리는 헌신된 삶입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는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의 몸의 부활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아멘.
신대원 다닐 때 어거스틴이 쓴 ‘신국론’(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읽다보니까 그 책에서 우리가 부활할 때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인가의 논의를 장황하게 다뤘습니다. 젊을 때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 마지막의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 이전 삶에서의 신체적 결함을 그대로 갖고 부활할 것인지 아니면 온전하게 회복된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지를 토론의 재료로 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다소 사변적인 논의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몸’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즉시 외형과 외모를 생각합니다. 형태와 모양과 젊음과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그런 몸으로 부활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오히려 몸을 이끌어가는 동력, 힘, 엔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외형의 변화보다도 동력이 어떻게 다르냐가 관건입니다. 이땅에서 몸을 움직이는 생명력과 부활의 몸을 이끌어가는 생명력이 어떻게 다르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활의 몸은 성령에 의해 이끌려지는 영의 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은 자연적 생명력, 혹은 혼적 생명력에 의해 지탱되는 몸이라면 앞으로 우리가 입게 될 부활의 몸은 성령에 의해 활성화된 몸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장차 우리가 덧입게 될 부활의 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몸이 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논의를 이어가면서 부활의 몸이 구체적으로 어떠할 것인지를 논하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35절에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라는 질문을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무덤 속에 있는 육신은 전부 썩어 없어지고 해체될 텐데 웬 몸의 부활이냐는 반문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의심 없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지금의 몸과 동일한 육체를 지닌 채 부활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마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도 바리새인으로서 이러한 유대인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영광스런 빛에 의해 사흘 동안 눈이 멀 정도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이전의 예수님의 인성의 모습과는 다른 영광스런 광채를 지닌 부활의 몸을 입고 계셨음을 바울은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전에 알고 있던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시면서도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을 입고 계신 예수를 바울이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대 유대인의 통념과는 달리 부활의 몸은 이땅에서의 몸과 동일한 모양의 몸이 아니라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이 될 것임을 그때 깨달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이전의 몸과의 연속성뿐 아니라 비연속성도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고 여러분의 옆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지금의 모습과는 달라도 누군지는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동일성과 정체성이 유지되면서도 지금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전에 바울은 우선 그 다름이 가능한 일임을 논증합니다. 이미 죽어서 무덤 속에서 다 썩어서 해체된 몸이라도 부활의 몸을 입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화장을 해서 뼛가루만 남은 시신이라도 부활의 몸을 입는데 하등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씨앗과 그 씨앗이 만들어내는 장래의 작물의 형체를 예를 들어 말합니다. 이전의 몸과는 다른 부활의 몸이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논증합니다. 씨를 뿌릴 때 씨가 땅에 떨어져서 땅속에서 썩어 해체됩니다만, 그 씨에 생명력이 있어서 씨는 장래의 형체를 만들어냅니다. 본문 36-37절에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라고 말씀합니다. 작물의 씨앗이 종류에 따라 다릅니다만 씨앗의 형태만 보고 그 씨가 만들어낼 장래의 형체가 어떠할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땅에 뿌리는 것은 작은 씨에 불과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태를 갖춘 작물이 되고 열매가 됩니다. 물론 씨 안에 장래 형체가 DNA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씨의 모습과 장래 작물의 모습에는 어떠한 상응성이나 필연성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임의적입니다. 씨앗이 특정 모양 형태의 작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력이 관건입니다. 38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이를 유추해서 부활의 몸에 적용해보면 우리의 몸이 썩어져 해체가 된다 해도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의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부활의 몸으로 입혀주실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처음 창조 때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생명체를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다양한 모습으로 창조하신 창조주의 능력이 각 사람에게 부활의 몸을 입혀주실 때 지금의 몸과는 다른 모습의 몸을 주시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40-4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몰몬교는 사람이 부활하고서 입게 될 부활의 몸의 영광스러움이 다 다를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본문의 강조점은 하늘에 있는 일월성신의 빛의 세기가 다 다르게 다양하게 창조되었듯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은 부활이라는 새 창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될 것이기 때문에 각 사람이 지금의 몸과 다르게 부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되지 않을 거라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부활의 몸이 이전의 몸과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42-43절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마치 씨앗을 땅에 뿌리면 그 씨앗이 죽고 썩고 해체되어서 전혀 새로운 모습의 작물의 형체를 얻게 되는 것처럼 이전 몸을 심으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부활할 것인데 부활의 몸의 특징은 썩음이 아니라 썩지 않음이며, 욕되고 수치스럽고 죄된 몸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몸이며, 약하고 죽는 몸이 아니라 강해서 죽지 않는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썩음과 썩지 않음은 단순히 썩고 부패하고 해체되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지금의 몸은 계속 하강해가지만 부활의 몸은 계속 상승해갈 것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계속 기능이 떨어지고 기력이 떨어지고 늙어가서 결국 죽고 썩어져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진작부터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러나 부활의 몸은 썩지 않고 약해지지 않고 나날이 새로워질 것입니다. 활력과 능력이 계속 증가될 것입니다. 점점 약해짐(decrescendo)이 아니라 점점 강해짐(crescendo)이라는 과정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옛 창조세계와 우리의 몸은 디크레센도의 과정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디크레센도가 크레센도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9-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지금 창조세계와 우리 몸이 계속 하강국면과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니까 고통 속에 탄식하면서 계속 디크레센도 과정을 겪고 있지만 앞으로 새 창조의 역사로 부활의 몸을 입게 되어 디크레센도가 역전되어 크레센도로 바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지금 우리의 몸은 누추함과 비천함과 욕됨을 특징으로 합니다. 죄의 권세 아래서 죄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수치와 불명예를 담고 있는 몸입니다만 앞으로 입게 될 부활의 몸은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영광의 몸이란 주목할 만하고 무게 있고 위풍당당한 몸을 뜻합니다. 기쁨으로 빛나는 영광스런 몸으로서 죄를 지을 수 없는 몸이 될 것입니다.
C.S.루이스의 책 <영광의 무게>에서 그는 앞으로 우리가 입게 될 영광이 얼마나 클지 평범한 사람이라도 여신이나 남신처럼 숭배하고 싶을 정도가 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책의 한 대목입니다:
평범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이들은 그저 죽어서 사라질 존재가 아닙니다. 국가, 문화, 예술, 문명과 같은 것들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며 그것들의 수명은 우리 개개인에 비하면 모기의 수명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농담을 주고받고, 같이 일하고, 결혼하고, 무시하고, 이용해 먹는 사람들은 불멸의 존재들입니다. 불멸의 소름끼치는 존재나 영원한 광채가 될 이들입니다.
약하디 약한 몸, 질병에 취약한 몸, 사건 사고에 휘말리기 쉬운 몸을 벗고 부활의 몸은 강해서 질병도 아픔도 죽음도 슬픔도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이땅에는 수많은 질병이 있습니다. 국제질병분류표에 의하면 질병의 총수는 12420개나 됩니다. 이토록 많은 질병과 질병에 취약한 신체가 곧 우리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강함을 특징으로 합니다.
썩지 않음과 썩음, 영광스러움과 욕됨, 강함과 약함 등이 부활의 몸과 지금의 몸을 대조하는 특성이라면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몸을 움직이는 엔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엔진은 혼적인 생명력이냐 아니면 성령의 생명력이냐 하는 차이입니다.
본문 44절을 보십시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지금 이땅의 몸은 ‘육의 몸’이라면 부활의 몸은 ‘신령한 몸’, ‘영의 몸’입니다. ‘육의 몸’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정확하게는 혼의 몸, 혼적인 몸, 자연적인 몸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44절은 혼적인 몸으로 심겨지고, 영적인 몸으로 일으켜진다. 부활된다. 혼적 몸이 있으면, 영적 몸도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연적 생명력에 의해 움직이는 몸, 기가 공중으로 소산되지 않고 응축되어 움직이는 몸이 바로 혼적인 몸입니다. 이에 반해서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활성화되고 움직이는 몸이 영의 몸입니다. 지금 우리의 몸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성령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부분적으로만 그렇습니다. 여전히 옛 사람의 실패와 이기적 욕망과 자아에 의해 성령의 영향력이 사그라들기도 하며 성령의 소욕보다는 육체의 소욕이 앞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덧입혀줄 부활의 몸은 온통 성령이 이끌어가는 성령의 전이 되어서 죄를 지을 수 없고 날로 새로워져서 하나님과 충만한 가운데 교통하는 몸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45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첫 사람 아담 곧 인류의 조상 아담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흙덩어리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을 반향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생령’은 ‘살아있는 생명’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네페쉬 하야’입니다. 그런데 ‘네페쉬 하야’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표현이 아니고 창세기 1장 20절과 24절에서 물에 있는 생명체 곧 물고기와 땅에 있는 가축과 짐승도 ‘네페쉬 하야’ 곧 ‘살아 있는 생명’곧 생물로 번역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호흡하심으로 살아 있는 생명이 되어서 ‘혼적 몸’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혼적 몸’은 ‘혈과 육’으로 구성된 옛 창조의 자연인의 몸이며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직접 주어져서 성령에 의해 이끌리고 활성화되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45절을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마지막 아담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마지막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람의 아들 곧 인자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할 때 우리가 입게 될 영적 몸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결정된 존재, 하나님의 영에 의해 변화되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점유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영적 몸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의 힘을 입은 몸이어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혼적 몸’이 옛 창조의 자연인의 몸이어서 우리가 다 경험하듯이 늙고 쇠약해지고 병들고 죽고 썩어지고 죄의 권세 아래 쉽게 떨어져 연약하고 비천하고 욕된 것이지만 ‘영적 몸’은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해서 썩지 않고 강하며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46절에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첫 번째 사람은 혼적 존재로 지음 받았다면 인류를 대표하는 둘째 사람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영을 주셔서 생명으로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 곧 종말의 아담이십니다. 47절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예수님은 믿는 자들을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다’는 말이 중생이라는 말의 뜻입니다. 우리가 거듭난다 혹은 중생한다는 말을 씁니다만 이말은 우리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48-49절입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땅에 속한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었었지만 이제는 하늘에 속한 둘째 사람 예수님의 형상을 입게 되었고 또한 앞으로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장 18절에서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빌립보서 3장 20-21절에서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구원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하나님과 같이 됨을 뜻합니다.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이땅에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오신 예수님이 종말의 아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이 아니라 흙으로 빚어진 첫 사람 아담의 형상을 입고 있지만 장차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하나님과 같이 됨을 얻어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에 참여하여 신적인 생명 곧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게 됨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이지만 이땅에서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부활의 몸은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사로잡힌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첫 사람 아담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몸으로서 하나님과 같은 영광스런 신적인 생명 곧 영생으로 충만한 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큰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음 시간에 볼 본문입니다만, 고린도전서 15장 5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영광스러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상속받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썩어지고 비천하고 욕되고 약한 몸을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몸으로,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가는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첫 불입금/납입금 혹은 계약금 조로 주시므로 부활의 영적 몸을 입을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이러한 부활생명을 소망으로 삼고, 즉 푯대로 삼아서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나날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아가기를 연습해야 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 말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 위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강상중이라는 재일교포가 있습니다. 이분은 재일교포로서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분입니다. 지금은 일본의 어느 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독특해서 한 번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뾰족한 답변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살아야 하는 아주 특별한 이유를 말해줄 걸로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이분이 이 책을 쓴 계기는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고독과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2장의 제목이 “왜 이토록 고독한가?”일 정도로 그는 고독을 고통스럽게 경험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로 인한 원전 사고 등을 겪고서 ‘후쿠시마 사람들이 이런 사태를 당했는데도 굳이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이 생겨났습니다. ‘중증의 질환을 않으면서 왜 살아야 하는가?’, 자주 자기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는 ‘정직한 비관론’을 말합니다. 솔직히 미래가 별로 밝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안이한 낙관론 처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무거운 질문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해가자고 제안합니다. 비록 고통스런 인생이지만 고통 속에서 철저하게 고민하고 그리고 삶을 긍정하자고 결론 내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린 책이 있습니다. 예일대학교 교수가 쓴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 교양 강의 중에서 ‘죽음’을 주제로 강의해온 것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이분은 무신론자로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기계로 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인간은 어느 정도 결함 없는 기계로 태어나지만 점점 낡게 되고 때때로 부품을 교체하기도 하고 결국 고장 나서 어느 날 쓸모없이 돼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이분의 주장은 죽음은 완전히 끝이고 그러니까 솔직히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사는 것이니까 다른 미련 갖지 말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 살 것인가?’를 고민해서 가치 있는 것을 스스로 찾아 그걸 목표 삼고 열심히 살자는 것입니다. 이게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의미가 있기나 하다면 말입니다.
이 책의 리뷰 중에서 날카로운 댓글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철저한 무신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이 철학적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질문만 던져줄 뿐이죠. ‘신이 없으니 삶은 무의미하다’ 정도가 이분이 내릴 수 있는 솔직한 대답이겠습니다.”
어떤 이유든 죽음이란 인간의 숙명입니다. 자유의지와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죽음’이라는 그 운명을 주신 분에게 어떤 답변을 들어야 속이 시원해지고 진정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는 누구입니까?’
‘죽음이라는 인간의 고장을 수리할 수 있는 기술자는 누구입니까?’
기독교에서는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길로 봅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소위 ‘죽음’이라는 고장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거뜬히 새 인간으로 수리될 수 있다는 그 능력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끊임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부활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이 부활신앙이야말로 영원한 희망의 근거입니다.
죽음이란 새로 태어나는 길입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보람과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1절에서 말씀합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반도체 검사장비인 테스트 핸들러를 처음으로 국산화 한 분이 국내 대표적인 벤처기업인 1세대로 알려진 미래산업 설립자 정문술씨입니다. 현재는 미래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는 사재 300억원을 카이스트에 출연했습니다. 그래서 카이스트 이사장도 지냈습니다.
그는 1980년 5월, 18년간 다녔던 중앙정보부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그 후 3년간 실직자 생활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18억원의 거액의 부채를 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희망도 없자 가족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딸이 “압구정동에 있는 교회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는데 죽기 전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소망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날 설교는 욥의 고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는 “하나님이 욥에게 준 고난은 미워서 죄 값으로 준 것이 아니라 정금같이 단련시켜 사용하기 위해 준 선물이었다”는 요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정문술씨는 다시 살아야 할 삶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후 계속 소망교회에 다니면서 다시 사업에 도전해 은행돈 한푼 안 쓰는 초우량 벤처기업을 일구었던 것입니다. 정문술씨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후 인생은 이전과 다른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비유합니다. 잠은 쉼이고 안식입니다. 잠은 잠에서의 깸을 함축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안식이고 새로운 날의 깨어남이라는 의미에서 잠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잠자는 자들 중에서 맨 첫 번째로 살아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앞으로 있게 될 대규모 수확에 앞서 첫 번째 수확의 표본 다발이 첫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첫 수확을 보면 이어질 대규모 수확의 추수의 질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첫 열매가 좋으면 뒤이을 수확의 질도 높을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있게 될 일반적인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활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29절, 조금 길지만 읽어보겠습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본문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의 시제의 강조점은 예수님이 죽었지만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리스도만 유일하게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속한 자”(23절)만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게만 속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믿음과 세례, 그리고 성찬, 그리고 복음의 말씀을 들으므로 예수님과 연합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새 생명의 영역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팔복에 관해서 책을 썼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어떤 출판사 대표가 산상설교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이분이 2년 동안 산상설교의 구절 구절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느낀점과 깨달은 점을 담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이론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이런 이론에 힘입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해나갔다. 그런데 내가 행복이라 이름지은 것은 남에게서 빼앗지 않으면 안되는 것뿐이었다.
내가 안달을 하며 얻으려고 한 것은 부, 명예, 권력 같은 것이었는데, 내가 그걸 차지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얻으려고 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과 다투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가며 살아온 것이다” 이렇게 성찰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늑막암에 걸려 죽음 앞에 이른 아버지가 가족들 전부를 소집했다고 합니다. 유언을 하려나보다 생각했는데 모아 놓고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합니다. 풀풀 한숨만 쉬더랍니다. 이윽고 임종의 순간이 왔고, 아버지는 한마디 탄식을 남기고 숨졌다고 합니다. “슬프다. 내가 죽다니!” 이 말에 저자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느꼈다면, 나 역시 죽음과 맞닥뜨리면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죽는다면 나는 무언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행복이라고 그토록 갈구해마지 않은 것, 즉, 부, 명예, 권력을 남과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차지했다고 치자. 그런 것이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을까? 아니다. 구해줄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남에게서 빼앗은 것은 언제라도 다시 빼앗길 수 있으며 결국에는 죽음으로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가는 것이다“ 그의 결론적 고백은, ”나는 내 인생의 허위를 보고 만 것이었다. 나는 여태껏 헛 살아왔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나가다가는 비참하고 무의미하게 끝날 뿐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영원한 행복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하게 된 것이 바로 산상수훈이었고 특별히 팔복의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해서 눈이 뜨여진 것이죠.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부활신앙을 가지고서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 말해서 새 생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는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삶은 다름아닌 용서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많은 백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하죠. 그 결과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는 특별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오랜 백인통치의 종지부를 찍고, 1994년에 처음으로 국민의 직선투표에 뽑인 첫 흑인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넬슨 만델라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무려 26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생활했습니다. 이전의 백인통치자들의 인종차별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한 투쟁 때문에 26년 간이나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90년에 감옥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과거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한 인권 침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합니다. 한마디로 과거사 청산에 나선 거죠. 과거사 청산을 위해 그는 위원회를 조직하는데 그 위원회 이름이 ‘진실과 화해위원회’입니다. 위원회는 약 3년 동안 이만 천 삼백여건의 진정 사건을 조사해 305만명이 인권 침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위원회는 특히 가해자라 하더라도 진실을 증언할 경우 사면토록 했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에도 큰 힘을 쏟았습니다. 심지어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대해 화형,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기도 했습니다. 응징과 처벌보다는 진실과 용서를, 보복보다는 화해를 추구한, 피해자에 의해 주도된 ‘진실과 화해위원회’였던 겁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위원장은 영국성공회 주교였던 투투주교였습니다. 영국성공회는 교리적으로는 카톨릭보다는 개신교에 가깝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보여준 용서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용서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가 생명을 선택하는 실천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새 생명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생명을 가져오는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이 2009년에 <울지마 톤즈>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분이 수단 남부 톤즈라는 지역에서 천주교 신부요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했고, 이분이 원래 의사 출신이어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거기서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책이 구성돼 있습니다. 그분이 그후 돌아가셨는데 이후에 KBS 스페셜에서 다큐멘터리가 있었고, 그것이 극장판으로 개봉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분의 사랑의 헌신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그 책 끝부분에 KBS 스페셜다큐를 촬영했던 PD가 쓴 글이 있었는데, 그분의 글을 읽으니 고 이태석 신부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다큐 촬영차 수단 톤즈 현지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 신부님의 사랑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떠난 후 모든 것이 10년 전으로 되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곳, 오로지 증오와 살인만이 가득했던 곳,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땅에서, 진료소를 세우고 병자를 치유해주고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역을 10년 가까이 했던 곳, 그래서 좀 사랑의 씨앗이 막 싹을 틔우려던 차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는 푸념이었습니다. 한때는 매일 200-300명의 환자로 북적대던 곳도, 이제 텅 비어버렸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그곳을 떠난지 2년도 안됐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간호사도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태석 신부가 거기에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제가 이태석 신분에 관심을 갖게 될 무렵에 평소 같으면 수단 내전에 관심이 없었을텐데 우연히 수단에 관한 국제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본다고,,, 관심이 없으면 스쳐지나갔을텐데 이 책 때문에 수단에 대해 조금은 관심을 갖게 된 탓인지 수단 관련 국제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용인즉 수단이 남수단과 북수단으로 갈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수단이 국민투표를 거쳐서 분리 독립하기로 최종 결정됐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남부 수단이 UN의 193번째 국가가 될 거라는 보도였습니다.
수단 북부는 아랍계 셈족이며 이슬람교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수단 남부는 아브리카계 함족이며 상당수가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20년 가까이 이들이 종교내전, 그리고 종족내전 등으로 무려 200만명이 죽고 약 400만명이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정말로 비극의 땅, 사망의 땅입니다.
이처럼 사망의 냄새가 진동하는 그 땅에서 생명의 꽃을 피워낸 이가 바로 고 이태석 신부였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한 분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황무지에 장미꽃을 피워내는 하나님,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길을 내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3장 19-20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예수님이 이땅에서 걸으신 그 길은 누구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이것이 일반 역사 현상입니다만, 유독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역사의 흐름에서 유일하게 죄악된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유일하게 떨쳐버린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이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죽음이 아닌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안된다고 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열등감에 쉽게 빠진 채 나는 살 가치조차 없다는 자기비하의 감정에 함락됩니다. 생명보다 죽음이 더 강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문화가 내 안에 고동쳐야할 생명력을 삼켜버리는 듯합니다. 생명의 충동보다 죽음의 충동이 더 강렬해진 시대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기운이 꺾여버릴 수밖에 없는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게 꺾여버릴 것이가, 아니면 다시 일어설 것인가.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취약합니다. 약합니다. 가끔 성취도 맛보도 인정도 얻고, 잠깐 동안 살아갈 힘을 관계 속에서 얻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또 좌절하며 자기연민에 빠지며 열등감에 휩싸입니다. 삶의 활력과 생명력은 상실되고, 우리 영혼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지고 있는 조건에 좌지우지되고, 상황에 좌우되고, 한계가 뚜렷한 여러분들의 내재적인 재능과 자원을 가지고 언제까지 발버둥치시렵니까? 언제까지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일상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남보다 조금 앞섰다고 기뻐하며 살만하다고 느끼다가, 남보다 조금 뒤처지게 될 때 좌절하며 낙심하는 이러한 반복을 언제까지 계속 하시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셔 우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힘있게 능력 있게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분이 한국에 종종 강연하러 옵니다. 몇 해 전에 한국의 신학교에 강연하러 왔을 때 학술적 강연도 했지만, 자기 삶에 대한 강연도 했습니다. 즉,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일보 지면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분은 원래 기독교 분위기가 전혀 없는 세속적인 교사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분의 고향이 함부르크였는데,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 영국군이 독일 함부르크 일대에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공습의 암호명이 “고모라 작전”이었습니다. 이때 이분이 십대 후반이었습니다. 자신이 있던 곳에 떨어진 폭탄으로 옆에 있던 친구는 사지가 다 찢겨나가 죽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멀쩡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 날 밤 그는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후 군인으로 징집돼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삼년 간 전쟁 포로 신세로 지내야 했습니다. 오랜 수용소 생활로 인해서 내적인 세계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외적인 포로상태뿐 아니라 내적인 포로상태, 즉 영혼의 포로상태였습니다. 아무런 기쁨도 아무런 고통도 못 느끼는, 육체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이미 죽어 굳어버린 생명의 껍데기만을 입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듯 피폐해진 상태, 곧 일종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새롭게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활짝 피어난 벚꽃, 둘째는 스코틀랜드 노동자들과 그들 가정이 베풀어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친절함, 마지막으로는 성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처참한 수용소에서 어떤 차 한 대를 밀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재미도 없이 차를 밀다가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게 꽃을 피운 벚나무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풍성한 생명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때 자신의 내면 안에서 다시금 생명의 불꽃이 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둘째, 스코틀랜드 수용소에서 스코틀랜드 사람들과 함께 도로건설 작업을 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의 옷에 붙은 포로 수감 번호로 그를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전쟁의 원수였던 자신을 친절함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들의 친절함과 연대 덕분에 그는 다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셋째, 이후 어느 영국인 군목이 성경 한 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성경을 받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단 저녁마다 구약성서의 시편을 읽기로 했습니다. 그는 온 영혼으로 이 시편을 읽었습니다. 시편의 절절한 외침이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특히 시편 39편에 이르러서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며”라는 말씀이 자신의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12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는 그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뒤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외치신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구절을 읽으면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도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였습니다. 이후 그는 삶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방에 감금돼있던 자신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시고 끄집어 내셨습니다.
이후에 이분이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기로 작정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노동수용소에 있을 때 영국에 있는 어떤 수용소 얘기를 들었는데 신학 공부를 할 수 있는 특이한 수용소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수용소에 갈 것을 신청했고 그곳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전후 독일의 목사 양성을 위해서 개설된 포로 수용소 내의 신학교였습니다. 포로로 잡힌 신학교 교수들이 포로가 된 대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생존하는 신학자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어두운 시절이 지나간 뒤 바로 그 수용소에서 자신의 인생에 태양이 떠올랐다고...
이분의 강연을 읽고 제가 든 느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먼 미래에만 되어질 것이 아니라 지금도 활발히 역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하고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처음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어리둥절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유대인으로서 당대 유대인들의 통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십자가 죽음 직후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활발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었구나”는 확인이었습니다. 이제 게임이 끝난 상황인 셈이죠. 예수님께 베팅을 걸어 올인했던 제자들이 베팅을 잘못 건거죠.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치 못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제자들이 만난 것은 전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 부활의 빛을 받아서 예전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을 전혀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부활 경
험으로 인해서 다시금 그들이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부활신앙이 확실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도 부활신앙이 희미하거나 없으면 절망 중에서 일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성도로서 자신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이 부족하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라”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도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믿을 만한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당시에도 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실제로 살아있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증거하는 부활의 증인들 뿐 아니라 실제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한 사람들의 목록을 바울이 제시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성경에 나타나는 부활의 증거가 다소 상이한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만 오히려 그 점이 부활 증언의 신빙성을 높여줍니다.
제자들에 의한 다양한 예수님의 부활의 증언이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는 데서 예수님의 부활의 확고한 증거를 찾는 분도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매듭짓기>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과,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들의 증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1972년 워싱턴 소재 워터게이트 건물 안에 있던 민주당 사무실에 절도범이 들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단순 절도 사건처럼 보였지만, 절도범 중 한 사람의 주머니 안에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어 파문이 일
기 시작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의 발단입니다. 이후 의혹이 계속 확대되어 갔습니다. 이듬해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모여, 닉슨 대통령은 애초 사건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조직적인 사건 은폐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 음모에 참여한 10여명의 보좌관들은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변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법률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소위 '법꾸라지'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사건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고, 어떻게 진술해야 철저하게 은폐를 유지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닉슨 대통령의 참모였을 뿐 아니라 열렬한 지지자요 신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은폐 음모를 꾸몄고, 말을 맞췄습니다. 그들의 은폐 기도는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불과 18일 만에 무참하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말을 맞추었음에도 집요한 검사의 심문 앞에서 그들의 진술이 엇갈린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반드시 허물어지고 맙니다. 거짓이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증언들이 제자들에 의해 꾸며진 거짓이라면 그 거짓은 이미 2천년 전에 공중으로 분해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법률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입을 맞춘들, 그들이 꾸민 거짓말이 지켜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했다면 우리도 진짜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이유, 곧 우리의 부활신앙이 부족한 이유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여기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제대로 된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자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직 체감하지 못한 탓입니다. 무지와 무지로 인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지 못하다보니 부활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그 무지로 인한 불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음의 예가 잘 보여줍니다:
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일본의 항복으로 끝났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일본 정부는 격전지에 있던 일본군에게 귀환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극히 일부 일본군 중에서 부득이 본 부대에서 이탈했던 몇몇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육군 소위 오노다 히로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노다 히로는 일본 정부가 직접 패전을 알리는 전단을 뿌린 것을 보았지만 그 전단을 보고도 종전을 믿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뿌린 거짓 전단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74년에 직속 상관으로부터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필리핀 정글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51살이었습니다. 심지어 2006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옛 일본군 장교와 사병 등 80대 2명이 2006년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섬 산악지대
에서 발견됐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이들이 소속된 일본군 30사단은 필리핀에서 미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들은 종전 직후 사단이 철수할 때 합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그때까지만 해도 본국에 돌아가기를 꺼리는 이유는 혹시 “돌아가면 군법회의에 회부될까봐...”였다고 합니다.
이들은 종전 이후 달라진 현실에 대해 무지했고, 달라진 현실을 알려준 전단을 불신했습니다. 그리고 군법회의에 회부될까봐 두려워했던 바 그것도 무지와 불신의 결과였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모자란 이유도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동시에 이말은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19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다가올 세상, 다음 세상이 있음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오늘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겠죠. 좋게 생각하면 ‘오늘밖에 없으니까 오늘이 너무 소중하니까 열심히 잘 살자’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자세라 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부분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전도서 3장 12-13절에서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자의 지혜입니다. 어떤 지혜입니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지혜입니다.
“Enjoy your life!" 혹은 ”bravo my life“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 대한 관점,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생이라면, 이제는 얼마든지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삶의 질, 살아가고 있는 우리 얼굴의 표정에 관계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그러나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를 삶의 모토로 내걸고 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세상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삶의 방식이며 삶의 모습입니다. 본문 32절 하반절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오늘을 소중히 여겨서 충실하게 살아갈 뿐 아니라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자신을 압도해서, 이땅은 단지 나그네길이요, 이곳에서의 삶은 천국 여정을 위한 순례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고난을 당했고 죽음의 위기까지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가까이 있었던 위험을 기꺼이 무릅쓴 이유는 그가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2절 전반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그가 에베소에서 거할 때 쓴 편지인데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너무나 큰적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재밌는 표현입니다.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 실제로 당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투사들입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재밌거리로 잘 훈련되고 완전 무장한 검투사들이 실제로 맹수와 싸웠습니다. 맹수를 가둬두었던 우리가 열리고 맹수가 경기장으로 힘차게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검투사와 한판 승부를 겨룹니다. 대부분 맹수의 승리 그리고 검투사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전날 밤 다음날 맹수와의 경기를 앞둔 검투사들은 내일 혹시라도 있게 될 불상사 앞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만찬을 가졌겠죠. 마음껏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술에 취하기도 해서 죽음의 공포를 덜어냈겠죠. 그리고 맹수와의 싸움은 승리하더라도 만신창이가 되는 승리, 대부분은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죠. 검투사들의 삶의 모습이 부활신앙을 알지 못하
는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에 반해서 복음을 위해서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던 바울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여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죽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탱시켜주었던 힘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현재적 능력이요 죽어도 영원히 사는 부활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이땅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능케하므로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칭함을 받게 하는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죽음도 남다릅니다.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과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도 다릅니다.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죽은 자들을 위하여 받는 세례’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세례를 과신한 고린도교회의 미신적 신앙 형태가 있었다고 추측하는 분도 있습니다. 세례의 능력을 과신해서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자가 대신 세례를 받아 지옥이나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관행 자체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관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부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냐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임종 시 떠나보내는 것과 관련해서 해석을 합니다. 부활신앙이 확고한 신자가 그 신앙 때문에 숭고한 태도로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임종 시에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이 보게 됩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하고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숭고하고 평안한 죽음을 보고서 충격을 받아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를 염원하면서 죽은 자처럼 신앙을 갖기 위해서 자신도 죽은 자를 위하여 세례를 받게 되는 경우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아직 무장하고 계시지 못하다면 ‘내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직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국의 삶을 여기서도 누릴 뿐 아니라 다가올 세상, 다음 세상을 소망하며 이땅에서 나그네로서 천국 순례 여정의 나그네로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는 죽음조차도 남다릅니다. 숭고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평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일가친척과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죽음,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그러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무장하여 이러한 역사의 주역이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