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코일의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는 책을 소개하는 신문 기사를 최근에 보았습니다. 그는 3년간 프로스포츠팀, 특수부대, 영화사, 코미디 극단, 보석 도둑단 등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집단을 찾아다녔습니다. 성공한 집단은 일정한 행동 양식이 있는데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친근감, 안전감, 연대감, 소속감을 은연중에라도 심어주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조직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두뇌의 최고 관심사는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에는 항상 주변 사람 특히 윗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걱정하는 부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위험감지 기능이 워낙 반사적이기 때문에 조직의 리더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안전신호를 구성원들에게 발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회사는 해마다 전 직원의 50~70%가 퇴사해서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경영진은 신입사원 교육에서 A팀과 B팀 두 팀으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A팀에게는 일방적으로 회사의 성공신화를 교육했고 끝날 때 회사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나눠주었습니다. B팀에게는 “언제 행복을 느끼나?” “일이 잘될 때는 언제인가?” 등의 질문을 던졌고 끝날 때 회사 로고와 직원 이름이 들어간 티셔츠를 선물했습니다. 7개월 후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습니다. B팀의 잔류 비율이 A팀보다 250%나 높았습니다. ‘회사가 당신을 생각한다'는 친근감, 소속감, 연대감 등이 사소한 듯하지만 회사원들의 심리적 안정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생존에 위협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서 퇴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책에서 어떤 성공한 사업가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모든 일의 전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성원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리더가 구성원들에게 소속감이나 안전감을 심어주므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게 되고 그 결과로서 구성원들이 조직을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나 연인 사이에서도 ‘사랑한다’는 사실보다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조직에서 리더가 칭찬이나 감사 표현을 자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심리적 안전감과 유대감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다윗 왕조가 바벨론에 의해서 침공당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왕은 예루살렘의 많은 귀족과 왕족을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아갔습니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순히 지리적으로만 추방당한 것이 아니라 여태껏 자신들의 삶의 안전감을 제공했던 고향땅의 상실을 경험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유일하신 여호와 신앙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었던 그들의 신앙이 성전 파괴와 함께 무너져내렸습니다. 그동안 그들의 삶의 울타리를 제공했던 든든한 세상이 상실되자 그들은 이국 땅에서 안전감을 확보하지 못한 채 표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겠죠. 이러면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간절히 원하고 무엇을 추구하겠습니까? 예전의 안전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복원력이 발동될 것입니다. 안전했던 시절, 고통 없던 시절, 든든한 울타리를 복구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이 생겨날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소망이 간절해지는 것이죠.
이러한 간절함에 불을 지피기라도 하듯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제외한 거짓 선지자들은 포로 생활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돌아갈 준비나 하라는 식으로 거짓 예언을 선포했습니다. 포로들의 열망에 부합하는 메시지여서 파급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곧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흐름을 예루살렘에서 듣게 된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쓸 때 없는 기대 접으라고. 진정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엿보게 된 선지자 예레미야는 거짓된 예언에 힘을 입은 거짓된 소망을 산산조각냅니다. 돌아가긴 할테지만 70년이나 후에나 가능할 것이며, 그러니 곧 돌아갈 거라는 쓸 때 없는 기대는 접고 그땅에서 잘 정착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라고. 그래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멈추지 말라고. 이것이 예레미야가 쓴 편지의 주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의 어려운 시기인 ‘환난과 시련’을 잘 견디고 인내하여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때를 분별하는 게 중요합니다. 인생의 ‘환난과 시련’의 시간뿐 아니라 우리 모든 삶의 매순간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서 진행됩니다. 본문 4절말씀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스라엘 멸망이 죄 때문이라거나,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거나,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땅을 상실하고 포로로 잡혀갔다는 여러 설명들이 성경에는 분명이 있지만 이 모든 미세한 차이가 되는 원인들을 종합하는 가장 근저에 있는 설명은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주권자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이냐면 70년간 거기서 복역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의 정한 때는 70년이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진한 낙관적인 기대 곧 얼마 안 있어 고국으로 돌아올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70년 만기 출소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한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정한 복역의 기간이었습니다. 70년이라는 기간은 고향땅을 상실하고 더불어 안전감을 상실한 채 생존의 위협의 고통의 시간으로 하나님이 정한 기간이었습니다. 전도서 3장 1절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즉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서 발생하는 사건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 우주에 없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2-8)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매일 매 순간을 다스리십니다. 인간 존재의 전 범위를 포괄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에는 만사가 다 때가 있습니다. 만사가 발생하기에 알맞은 경우와 적절한 기회가 있습니다. 세상 만사의 우발적 사건처럼 보이는 것들이 적절함과 적합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꼭 맞는 때에 만사를 행하십니다. 완벽한 타이밍을 가지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분별해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인정하고 환난과 시련의 시간에 관해서라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완벽한 타이밍이 있음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모든 일에 딱 맞는 때를 알고 있음을 신뢰한다면, 우리의 시간표를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이 환난을 얼른 가져가 주십시오. 가져가시기 전까지 저는 죽을 것만 같아요’라고 하나님께 협박하기보다는 우리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묻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어느 때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지금이 나에게 주어진 ‘환난과 시련’의 시간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 기간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지혜롭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막무가내로 ‘제발 이 고통 좀 치워주세요’, ‘이 고통속에서 저는 살 수가 없어요’라고 하나님께 떼쓰기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고 만사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면서 어떻게 이 시련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를 구하는 성숙한 신앙이 ‘환난과 시련’의 시간에 필요한 지혜입니다.
둘째, 고난과 함께 지내는 각오가 필요합니다. 고통과 함께 살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이 바꿔놓은 삶의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합니다. 본문 5-6절입니다: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많은 포로민들이 이제 곧 고국에 돌아갈 거라는 거짓된 기대에 사로잡힌 나머지 사는 둥 마는 둥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정한 때를 알고 그 손길을 신뢰하는 사람은 환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과할 때도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민들에게 정상적인 삶을 살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안전감을 상실한 채 이국 땅에서 포로생활을 해야 하는 삶이라도 거기에 적응해서 정상적인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포로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돌아갈 생각만 하고서 그땅에서 얼렁뚱땅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 하루 하루 충실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천국에 가야지’,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때는 반드시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니까 지금 삶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이라는 시간이 환난과 시련이라는 포로기라고 할지라도 거기서도 생존하고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상적으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거기서도 살 길을 열라는 것입니다. 고국땅에 돌아갈 것만 오매불망 생각하지 말고, 그리고 그러한 생각 때문에 사는 둥 마는 둥 살지 말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마치 여기서 영구히 살아갈 것처럼 그렇게 충실히 성실히 정상적으로 삶을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계획하고 집도 짓고 텃밭도 가꾸고 때가 되면 시집 장가도 가고 한 세대가 지내서 아들 딸들도 시집 장가보내고 할 수 있는 한 보란 듯이 번성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땅 바벨론에서도 말입니다. 심지어 7절에서는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너무 울분에 차서 ‘얼른 바벨론아 망해버려라’ 그러지 말고 어차피 그래도 안망하고 하나님이 망하게 할 때 망할 거니까 그때까지 너희 자신을 위해서라도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포로민에게는 고통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가 환난과 시련의 시간을 통과할 때 고통을 얼른 떨궈버리려고 시도하지 말고 고통과 함께 지낼 방안을 모색하라는 말씀으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고통이 있으되 그래도 감당할 수 있는 고통만 주어질테니까 고통과 공존을 모색해보고 고통과 함께라도 정상적이고 행복한 생활이 가능할 것인지를 한 번 타진해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는다면 고통과 함께 기꺼이 동거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은 아닐 것입니다.
셋째,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드십시오. 본문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환난과 시련’은 재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평안을 원하시고 결국에는 희망 찬 미래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고통속에서 지내야 할 기간을 정하셨다 할지라도 그 고통은 우리를 잿더미에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과정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에는 소망에 가득찬 미래를 실제로 가져다주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인생의 온갖 시련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려함에 있습니다. 환난과 시련으로 인해서 우리를 좌절로 몰고 가려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도록 일하십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드는 사람은 인생의 환난과 시련의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어떻게 반응할까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이때에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방법을 찾아낼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에 처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걸까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주권적 뜻에 복종하고, 비록 역경을 지나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굳은 신뢰가 있다면 우리 인생에 환난과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그 이유를 알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전도서 7장 13절에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이 구부러진 것 같을 때, 우리는 조급한 마음을 가지고 얼른 하나님께 구부러진 것을 어떻게 펴서 곧게 하셔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곧게 해달라는 우리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을 굽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곧게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곧게 하시기 위해서 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구부러져 있다면 이 헛된 세상에서 돌이키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록 우리 인생의 어떤 부분을 굽게 하신 것일 수 있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주시는 이유가 우리를 죄를 깨우쳐주시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교정해주시기 위해서 인생에 굴곡을 허락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너무 영적으로 게으르고 나태해서 인생의 굴곡의 과정을 통과하므로 깨어 있게 하시려는 선한 뜻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특별히 우리의 환난과 시련도 통제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신 뜻 안에서 우리의 영적 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인생이 구부러져 있을 때에 더욱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인생의 모든 구부러진 것들에 대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곧게 해주실 때까지 잠잠히 기다려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환난과 시련을 이용하십시오. 환난과 시련을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계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체험하고 자신의 변화를 여는 열쇠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때를 분별하고 고통과 함께 지내려는 각오를 다지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붙들고 가는 것이 환난과 시련에 대처함에 있어서 다소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이라면, 좀더 적극적으로 환난과 시련에 임할 필요도 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더욱 깊이 깨닫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있다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모든 회로애락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질 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을 열렬히 원해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시간임을 기억하고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환난과 시련기에 접어들면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2-1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여기서 바벨론이라는 시련의 기간에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정한 기간 70년을 줄여달라는 기도라기보다 이 기간을 잘 뛰어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달라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모시고 하나님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환난과 시련은 고통스럽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얼른 벗어나고 싶은 기간입니다만, 이 기간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친밀히 알고 더욱 사랑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분명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동안 변화되지 못한 채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신앙생활에 염증이 들었다면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환난과 시련의 과정을 다 통과한 욥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욥기 42장 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현재 국무총리이신 이낙연 총리가 예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머를 모르고는 그분의 전체를 알 수 없다" 며 생전의 유머를 공개한 적이 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출신으로 김 전 대통령을 취재하기도 했던 이 총리는 "반평생을 테러· 체포· 납치· 투옥· 연금 ·사형선고 같은 극단의 고통 속에 사신 분이 어떻게 저리 태평하실까 싶을 정도였다" 며 "그러나 오히려 그런 삶을 사신 분이기에 같은 유머도 다르게 들렸는지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DJ께서 정계복귀 직후에 주부들이 주로 보는 TV프로그램에서 하신 유머입니다. "내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는데 하루는 집사람이 면회 와서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나는 집사람이 하나님께 '남편 살려 주세요'하고 기도할 줄 알았는데, 집사람은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하는 거예요. 그때 나는 서운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이기는 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오늘 본문 말씀을 가지고 몇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입니다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언제나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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