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냐고 제게 묻는다면 성경을 근거로 저는 세 가지로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24), 그리고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라고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쉽게 말해 하나님이 육신도 아니고 인생도 아니고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분으로서 우리를 초월해계시는 분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낯설은 존재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를 놀래키시고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의 감정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위에 계시고 우리를 초월해계시는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중 하나의 속성으로서 사랑이 많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들 가령 하나님의 선, 자비, 은혜, 은총, 의로움, 신실하심, 지혜로움. 인내하심 등 모두는 사랑의 속성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구체적으로 다양하게 나타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속성들을 포괄하며 통일하는 배후가 곧 사랑이며 하나님이 곧 사랑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행위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랑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진노조차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하나님이 만물을 보존하시고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의인에게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비를 내리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고,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것도 죄인들을 구원해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해주시는 것뿐 아니라 만물을 회복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갱신하셔서 창조를 완성하실 것도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라는 키워드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는 분이시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불변하시고 다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D.A 카슨이라는 세계적인 신약학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당연시하고 쉽게 믿는다고 지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허술하고 감상적이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만드는 온전한 속성과 동떨어져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는 성경이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다섯 가지 방식을 소개합니다. 성경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책 <삼위일체론>에서 삼위일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당신이 사랑을 볼 때, 당신은 삼위일체를 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사랑은 셋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연합하는 것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또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서로 사랑으로 결합시키는 사랑의 끈이라고도 했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서로가 사랑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어서 사랑으로 하나입니다.
둘째,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핌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해와 비를 주십니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적 도덕을 초월한 초도덕적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러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44-47절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해와 비를 내리시는데, 왜 너희들은 친구로 혹은 원수로 구분 지으면서 친구들만 사랑하고 원수들은 미워하냐는 말씀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들과 악한 자들에게 변화를 받고 살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된 길로 빠졌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돌이켜라! 왜 죽으려고 하느냐! 변해야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에스겔 33장 1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넷째,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쪽은 선택하지 않는 선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대표적인 구절이 말라기 1장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명기 7장에서 10장까지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이유를 여러차례 물으신 뒤 스스로 오답을 하나씩 지워가십니다. 그들의 수가 많아서도 아니고, 그들이 더 강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더 의로워서도 아니고,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가령 신명기 7장 6-8절에 보면,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조건부 사랑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면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더욱 우리에게 임합니다. 대표적으로 십계명도 조건부입니다. 출애굽기 20장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용례로 표현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말도 어느 때는 맞고 어느 때는 틀립니다.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은 주권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우리의 순종 여부에 따라 조건적으로 사랑을 베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이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시기도 하지만 또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다양한 방식을 조화해서 함께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부모는 자녀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자녀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한다고 해도 부모에게는 여전히 자녀는 자녀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녀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맥락에서 생각해봅시다. 예를 들어 자녀가 막 대학에 들어가서 운전면허를 따고 아빠의 차를 가지고 나갈 일이 생겨서 가지고 나간 경우 부모는 자정까지는 들어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정 이후에 부모가 급히 차를 쓸 필요가 있어서 그렇게 명령한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차를 가지고 나간 자녀가 친구들과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놀다가 자정이 넘게 돌아왔습니다. 그럴 때 부모라도 자녀를 이뻐해주고 사랑해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보자마자 화가 나서 분노를 쏟기가 쉬울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못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분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자녀를 향한 사랑은 자녀가 부모의 말에 순종하고 약속대로 차를 제 시간에 갖다 놓는 것에 좌우됩니다. 여전히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한결같지만 특정 상황에서는 부모의 말을 듣는 순종과 약속을 지키는 언약적 의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꼴 안보려면 아예 자녀를 갖지 않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어리석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녀가 생기면 부모의 생활반경이 영향을 받고 삶이 제한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녀를 갖는 것은 먼저 자녀는 부모의 사랑의 산물이고 사랑이 고통이나 여러 뒤따르는 수고보다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도 이와 비슷한 특징이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신 세 위격,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셨고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완전히 자충족적인 사랑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할 대상을 끊임없이 창출해냅니다. 그래서 세계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을 필요로 하셨던 것입니다. 창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고통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도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해서 자녀를 낳았지만 자녀가 태어나고 난후부터 기존의 부모의 삶에 제한과 불편함이 불가피하게 따르듯이 말입니다. 실제로 세계 창조 이후의 인류 역사는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이는 사랑의 상처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세상’은 사랑할 만한 대상이 못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하나님을 싫어하고 멀리하며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께 반영한 인간의 이기적인 질서와 시스템을 가리켜 ‘세상’이라고 합니다.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세상을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실 만큼 세상을 사랑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스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지막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여러분의 자녀를 기꺼이 내줄 수 있습니까? 설령 그렇게 한다 해도 우리와 같은 종류, 같은 동급의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만, 아버지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사랑 때문에 짓고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신 피조물인 인생들을 위해, 그것도 자기 중심적이어서 하나님께 감사할 줄도 모르고 영광 돌릴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내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사랑하는 아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주는 것은 가장 하기 힘든 일인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아들도 주셨는데 다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그보다 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삼위일체의 신비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34-35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리스도의 사랑은 아버지의 계획에 기꺼이 순종해서 이땅에 인간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의 자기 제한 자기 부인의 사랑이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희생적인 사랑이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그리스도의 사랑이고 그래서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되었고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그의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셨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스런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은 영생을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죽으실 이유는 없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거기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는 우리를 죽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을 대신 죽게 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언젠가 인터넷 상에서 어떤 사람의 질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싶습니다. 성경 말씀엔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잖아요. 제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을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고 기꺼이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 많은 성경의 말씀이 너무나 달게 느껴질 것 같아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추천받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저의 대답은 “교회를 보라! 우리를 보라! 그리고 나를 보라!”고 대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정상입니다만 다른 대답도 가능하기는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작용하여 나타납니까? 로마서 5장 5절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풍성하고 생생하게 우리 마음에다 증거해주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으로 굳게 결합시킨 사랑의 끈이신 성령께서 동일하게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묶어주십니다. 양자의 영이신 성령께서 아들 예수님과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시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롬 8:39)을 끊임없이 증거해주십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받는 사랑을 실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다 끊임없이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으로 연합되었듯이 성령 안에서 우리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으로 굳게 연합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으로 끌어올려져 사랑 안에 편입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함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이 사랑을 확신하십니까?
최근에 중앙일보에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이신 백만기란 분이 쓴 글을 재밌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때 세계 제일의 부호에 올랐던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의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부러워했지만 그는 임종을 앞두고 삶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했습니다. 그의 곁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부자 워런 버핏에게 기자가 성공의 의미에 관해 물었습니다. 그의 나이쯤 되면 높은 빌딩을 갖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길 수 있다고 해서 성공한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노후에는 자신을 사랑해줬으면 하는 사람이 사랑해주면 그게 성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분이 호스피스 현장에서 보니 죽어가는 사람이 후회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아주 달랐다고 합니다. 평소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임종을 맞이하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은 성경 안에서도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위가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사랑이시고 또 영원토록 사랑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관계속으로 우리를 끌어올려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그 분명한 목적을 아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던 기도대로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에베소서 3장 18-19절입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지식으로 다 담을 수 없는 너무나 크고 완전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202장 후렴 가사,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니 나는 참 기쁘다”
오직 사랑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 드려지는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자유하며 행복하며 지탱되는 인생을 살아가셔서 참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며 이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므로 풍성한 사랑을 누리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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