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분이 한국에 종종 강연하러 옵니다. 몇 해 전에 한국의 신학교에 강연하러 왔을 때 학술적 강연도 했지만, 자기 삶에 대한 강연도 했습니다. 즉,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일보 지면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이분은 원래 기독교 분위기가 전혀 없는 세속적인 교사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이분의 고향이 함부르크였는데, 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 영국군이 독일 함부르크 일대에 폭탄을 쏟아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그 공습의 암호명이 “고모라 작전”이었습니다. 이때 이분이 십대 후반이었습니다. 자신이 있던 곳에 떨어진 폭탄으로 옆에 있던 친구는 사지가 다 찢겨나가 죽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멀쩡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던 그 날 밤 그는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후 군인으로 징집돼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영국에서 삼년 간 전쟁 포로 신세로 지내야 했습니다. 오랜 수용소 생활로 인해서 내적인 세계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외적인 포로상태뿐 아니라 내적인 포로상태, 즉 영혼의 포로상태였습니다. 아무런 기쁨도 아무런 고통도 못 느끼는, 육체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이미 죽어 굳어버린 생명의 껍데기만을 입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렇듯 피폐해진 상태, 곧 일종의 죽음과도 같은 상태에서 새롭게 일어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첫째는 활짝 피어난 벚꽃, 둘째는 스코틀랜드 노동자들과 그들 가정이 베풀어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친절함, 마지막으로는 성경이었습니다.
어느 날 처참한 수용소에서 어떤 차 한 대를 밀어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재미도 없이 차를 밀다가 갑자기 너무나 아름답게 꽃을 피운 벚나무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 풍성한 생명이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때 자신의 내면 안에서 다시금 생명의 불꽃이 이는 것을 느꼈습니다.
셋째, 이후 어느 영국인 군목이 성경 한 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성경을 받긴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일단 저녁마다 구약성서의 시편을 읽기로 했습니다. 그는 온 영혼으로 이 시편을 읽었습니다. 시편의 절절한 외침이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특히 시편 39편에 이르러서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며”라는 말씀이 자신의 영혼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고 12절,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는 그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뒤 마가복음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외치신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구절을 읽으면서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자신도 예수님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였습니다. 이후 그는 삶의 의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영혼의 어두운 방에 감금돼있던 자신을 예수님께서 발견하시고 끄집어 내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마지막 때에 부활할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십자가 죽음 직후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나라 운동을 활발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었구나”는 확인이었습니다. 이제 게임이 끝난 상황인 셈이죠. 예수님께 베팅을 걸어 올인했던 제자들이 베팅을 잘못 건거죠. 그러다가 예수님의 부활을 예상치 못하게 경험한 것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제자들이 만난 것은 전혀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그 부활의 빛을 받아서 예전에 예수님의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을 전혀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함께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충격으로 다가왔고 그 부활 경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부활신앙이 확실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도 부활신앙이 희미하거나 없으면 절망 중에서 일어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성도로서 자신의 부활을 믿는 부활신앙이 부족하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였으리라”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도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제자들에 의한 다양한 예수님의 부활의 증언이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는 데서 예수님의 부활의 확고한 증거를 찾는 분도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매듭짓기>라는 책에 보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증언과, 미국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때 닉슨 대통령의 보좌관들의 증언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1972년 워싱턴 소재 워터게이트 건물 안에 있던 민주당 사무실에 절도범이 들었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단순 절도 사건처럼 보였지만, 절도범 중 한 사람의 주머니 안에서 백악관 직원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되어 파문이 일 그 음모에 참여한 10여명의 보좌관들은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변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법률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에 소위 '법꾸라지'였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사건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고, 어떻게 진술해야 철저하게 은폐를 유지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닉슨 대통령의 참모였을 뿐 아니라 열렬한 지지자요 신봉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은폐 음모를 꾸몄고, 말을 맞췄습니다. 그들의 은폐 기도는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불과 18일 만에 무참하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입을 맞춘들, 그들이 꾸민 거짓말이 지켜질 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무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아직 체감하지 못한 탓입니다. 무지와 무지로 인한 불신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알지 못하다보니 부활의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지와 그 무지로 인한 불신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음의 예가 잘 보여줍니다:
미군이 뿌린 거짓 전단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74년에 직속 상관으로부터 투항명령서를 받고 나서야 필리핀 정글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51살이었습니다. 심지어 2006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옛 일본군 장교와 사병 등 80대 2명이 2006년 필리핀 남부의 민다나오섬 산악지대
오늘뿐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겠죠. 좋게 생각하면 ‘오늘밖에 없으니까 오늘이 너무 소중하니까 열심히 잘 살자’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삶을 즐길 줄 아는 자세라 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부분이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전도서 3장 12-13절에서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자의 지혜입니다. 어떤 지혜입니까?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지혜입니다. “Enjoy your life!" 혹은 ”bravo my life“라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에 대한 관점,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인생이라면, 이제는 얼마든지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그러나 부활신앙을 갖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를 삶의 모토로 내걸고 살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세상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삶의 방식이며 삶의 모습입니다. 본문 32절 하반절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그러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오늘을 소중히 여겨서 충실하게 살아갈 뿐 아니라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자신을 압도해서, 이땅은 단지 나그네길이요, 이곳에서의 삶은 천국 여정을 위한 순례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둘째로 부활신앙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이땅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숱한 고난을 당했고 죽음의 위기까지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가까이 있었던 위험을 기꺼이 무릅쓴 이유는 그가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32절 전반절에서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그가 에베소에서 거할 때 쓴 편지인데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너무나 큰적대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이 재밌는 표현입니다.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사람이 실제로 당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투사들입니다. 원형 경기장에서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재밌거리로 잘 훈련되고 완전 무장한 검투사들이 실제로 맹수와 싸웠습니다. 맹수를 가둬두었던 우리가 열리고 맹수가 경기장으로 힘차게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검투사와 한판 승부를 겨룹니다. 대부분 맹수의 승리 그리고 검투사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전날 밤 다음날 맹수와의 경기를 앞둔 검투사들은 내일 혹시라도 있게 될 불상사 앞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만찬을 가졌겠죠. 마음껏 먹고 싶은 것도 먹고 술에 취하기도 해서 죽음의 공포를 덜어냈겠죠. 그리고 맹수와의 싸움은 승리하더라도 만신창이가 되는 승리, 대부분은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 끝나죠. 검투사들의 삶의 모습이 부활신앙을 알지 못하 이에 반해서 복음을 위해서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던 바울의 삶은 고단함 그 자체여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죽는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탱시켜주었던 힘은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현재적 능력이요 죽어도 영원히 사는 부활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신앙은 이땅에서 신앙생활하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가능케하므로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 칭함을 받게 하는 능력입니다.
세례를 과신한 고린도교회의 미신적 신앙 형태가 있었다고 추측하는 분도 있습니다. 세례의 능력을 과신해서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자가 대신 세례를 받아 지옥이나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잘못된 신앙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잘못된 관행 자체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관행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서도 부활이 없다고 말할 수 있냐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부활신앙으로 아직 무장하고 계시지 못하다면 ‘내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구나’, ‘아직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국의 삶을 여기서도 누릴 뿐 아니라 다가올 세상, 다음 세상을 소망하며 이땅에서 나그네로서 천국 순례 여정의 나그네로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답게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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