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이라는 재일교포가 있습니다. 이분은 재일교포로서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분입니다. 지금은 일본의 어느 대학교에서 총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쓴 책 중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이 독특해서 한 번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뾰족한 답변을 듣지는 못했습니다. 살아야 하는 아주 특별한 이유를 말해줄 걸로 기대했는데 그렇지는 못했습니다.
이분이 이 책을 쓴 계기는 그를 평생 따라다니는 고독과 외로움 때문이었습니다. 2장의 제목이 “왜 이토록 고독한가?”일 정도로 그는 고독을 고통스럽게 경험해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있었던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로 인한 원전 사고 등을 겪고서 ‘후쿠시마 사람들이 이런 사태를 당했는데도 굳이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이 생겨났습니다. ‘중증의 질환을 않으면서 왜 살아야 하는가?’, 자주 자기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그는 ‘정직한 비관론’을 말합니다. 솔직히 미래가 별로 밝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안이한 낙관론 처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고민하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무거운 질문들에 대해 하나씩 대답해가자고 제안합니다. 비록 고통스런 인생이지만 고통 속에서 철저하게 고민하고 그리고 삶을 긍정하자고 결론 내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린 책이 있습니다. 예일대학교 교수가 쓴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예일대학교 교양 강의 중에서 ‘죽음’을 주제로 강의해온 것을 묶어놓은 책입니다. 이분은 무신론자로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지만 자유의지를 갖고 있는 기계로 봅니다. 처음 태어날 때 인간은 어느 정도 결함 없는 기계로 태어나지만 점점 낡게 되고 때때로 부품을 교체하기도 하고 결국 고장 나서 어느 날 쓸모없이 돼버립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이분의 주장은 죽음은 완전히 끝이고 그러니까 솔직히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사는 것이니까 다른 미련 갖지 말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 살 것인가?’를 고민해서 가치 있는 것을 스스로 찾아 그걸 목표 삼고 열심히 살자는 것입니다. 이게 의미 있는 인생입니다. 의미가 있기나 하다면 말입니다.
이 책의 리뷰 중에서 날카로운 댓글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교수님은 철저한 무신론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해석하려 합니다. 그 때문에 당연히 이 철학적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질문만 던져줄 뿐이죠. ‘신이 없으니 삶은 무의미하다’ 정도가 이분이 내릴 수 있는 솔직한 대답이겠습니다.”
어떤 이유든 죽음이란 인간의 숙명입니다. 자유의지와 노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죽음’이라는 그 운명을 주신 분에게 어떤 답변을 들어야 속이 시원해지고 진정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죽음’은 새로 태어나는 길로 봅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소위 ‘죽음’이라는 고장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면 거뜬히 새 인간으로 수리될 수 있다는 그 능력에 대한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끊임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부활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부활신앙입니다. 이 부활신앙이야말로 영원한 희망의 근거입니다.
반도체 검사장비인 테스트 핸들러를 처음으로 국산화 한 분이 국내 대표적인 벤처기업인 1세대로 알려진 미래산업 설립자 정문술씨입니다. 현재는 미래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습니다.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는 사재 300억원을 카이스트에 출연했습니다. 그래서 카이스트 이사장도 지냈습니다.
그는 1980년 5월, 18년간 다녔던 중앙정보부에서 해고되었습니다. 그 후 3년간 실직자 생활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리고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당시 18억원의 거액의 부채를 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무런 희망도 없자 가족들과 함께 죽기로 결심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고 있던 어느 날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딸이 “압구정동에 있는 교회 목사가 설교를 잘한다는데 죽기 전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소망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참석했는데 그날 설교는 욥의 고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는 “하나님이 욥에게 준 고난은 미워서 죄 값으로 준 것이 아니라 정금같이 단련시켜 사용하기 위해 준 선물이었다”는 요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정문술씨는 다시 살아야 할 삶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이후 계속 소망교회에 다니면서 다시 사업에 도전해 은행돈 한푼 안 쓰는 초우량 벤처기업을 일구었던 것입니다. 정문술씨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이후 인생은 이전과 다른 인생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비유합니다. 잠은 쉼이고 안식입니다. 잠은 잠에서의 깸을 함축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안식이고 새로운 날의 깨어남이라는 의미에서 잠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잠자는 자들 중에서 맨 첫 번째로 살아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앞으로 있게 될 대규모 수확에 앞서 첫 번째 수확의 표본 다발이 첫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첫 수확을 보면 이어질 대규모 수확의 추수의 질이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첫 열매가 좋으면 뒤이을 수확의 질도 높을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앞으로 있게 될 일반적인 부활의 첫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29절, 조금 길지만 읽어보겠습니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입니다! 본문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의 시제의 강조점은 예수님이 죽었지만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리스도만 유일하게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속한 자”(23절)만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됩니다.
생명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새 생명의 영역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팔복에 관해서 책을 썼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는 어떤 출판사 대표가 산상설교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이분이 2년 동안 산상설교의 구절 구절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면서 느낀점과 깨달은 점을 담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나의 이기적인 행동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이론은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이런 이론에 힘입어 나만의 행복을 추구해나갔다. 그런데 내가 행복이라 이름지은 것은 남에게서 빼앗지 않으면 안되는 것뿐이었다.
내가 안달을 하며 얻으려고 한 것은 부, 명예, 권력 같은 것이었는데, 내가 그걸 차지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다른 사람과 다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얻으려고 내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들과 다투고, 그들의 것을 빼앗아가며 살아온 것이다” 이렇게 성찰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다고 합니다. 늑막암에 걸려 죽음 앞에 이른 아버지가 가족들 전부를 소집했다고 합니다. 유언을 하려나보다 생각했는데 모아 놓고 아무 말씀이 없었다고 합니다. 풀풀 한숨만 쉬더랍니다. 이윽고 임종의 순간이 왔고, 아버지는 한마디 탄식을 남기고 숨졌다고 합니다. “슬프다. 내가 죽다니!” 이 말에 저자가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느꼈다면, 나 역시 죽음과 맞닥뜨리면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죽는다면 나는 무언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행복이라고 그토록 갈구해마지 않은 것, 즉, 부, 명예, 권력을 남과의 소모적인 투쟁 끝에 차지했다고 치자. 그런 것이 나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을까? 아니다. 구해줄 수 없을뿐더러 그것은 원래 내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남에게서 빼앗은 것은 언제라도 다시 빼앗길 수 있으며 결국에는 죽음으로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가는 것이다“ 그의 결론적 고백은, ”나는 내 인생의 허위를 보고 만 것이었다. 나는 여태껏 헛 살아왔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렇게 나가다가는 비참하고 무의미하게 끝날 뿐이다. 나는 참으로 행복해지고 싶었다. 영원한 행복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하게 된 것이 바로 산상수훈이었고 특별히 팔복의 가르침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렇게 해서 눈이 뜨여진 것이죠. 제대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부활신앙을 가지고서 이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시 말해서 새 생명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서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제는 죽음이 아닌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삶은 다름아닌 용서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아프리카 최남단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네덜란드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많은 백인들이 이주해서 정착하죠. 그 결과 소수의 백인들이 다수의 흑인들을 지배하는 특별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오랜 백인통치의 종지부를 찍고, 1994년에 처음으로 국민의 직선투표에 뽑인 첫 흑인 대통령이 선출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넬슨 만델라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무려 26년 동안이나 감옥에서 생활했습니다. 이전의 백인통치자들의 인종차별정책이었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반대한 투쟁 때문에 26년 간이나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990년에 감옥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1994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첫 흑인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과거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한 인권 침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합니다. 한마디로 과거사 청산에 나선 거죠. 과거사 청산을 위해 그는 위원회를 조직하는데 그 위원회 이름이 ‘진실과 화해위원회’입니다. 위원회는 약 3년 동안 이만 천 삼백여건의 진정 사건을 조사해 305만명이 인권 침해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위원회는 특히 가해자라 하더라도 진실을 증언할 경우 사면토록 했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에도 큰 힘을 쏟았습니다. 심지어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대해 화형,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기도 했습니다. 응징과 처벌보다는 진실과 용서를, 보복보다는 화해를 추구한, 피해자에 의해 주도된 ‘진실과 화해위원회’였던 겁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위원장은 영국성공회 주교였던 투투주교였습니다. 영국성공회는 교리적으로는 카톨릭보다는 개신교에 가깝습니다.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보여준 용서는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용서를 실천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에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가 생명을 선택하는 실천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새 생명의 영역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생명을 가져오는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 이태석 신부님이 2009년에 <울지마 톤즈>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분이 수단 남부 톤즈라는 지역에서 천주교 신부요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했고, 이분이 원래 의사 출신이어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거기서 사역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있었던 일들을 중심으로 책이 구성돼 있습니다. 그분이 그후 돌아가셨는데 이후에 KBS 스페셜에서 다큐멘터리가 있었고, 그것이 극장판으로 개봉되기까지 했습니다.
이분의 사랑의 헌신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그 책 끝부분에 KBS 스페셜다큐를 촬영했던 PD가 쓴 글이 있었는데, 그분의 글을 읽으니 고 이태석 신부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다큐 촬영차 수단 톤즈 현지를 방문했을 때, 그는 이 신부님의 사랑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부님이 떠난 후 모든 것이 10년 전으로 되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던 곳, 오로지 증오와 살인만이 가득했던 곳, 소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땅에서, 진료소를 세우고 병자를 치유해주고 영혼을 어루만지는 사역을 10년 가까이 했던 곳, 그래서 좀 사랑의 씨앗이 막 싹을 틔우려던 차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는 푸념이었습니다. 한때는 매일 200-300명의 환자로 북적대던 곳도, 이제 텅 비어버렸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그곳을 떠난지 2년도 안됐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간호사도 있었지만, 차이가 있다면 이태석 신부가 거기에 없었다는 것뿐입니다.
수단 북부는 아랍계 셈족이며 이슬람교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반해, 수단 남부는 아브리카계 함족이며 상당수가 기독교도라고 합니다. 20년 가까이 이들이 종교내전, 그리고 종족내전 등으로 무려 200만명이 죽고 약 400만명이 삶의 터전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정말로 비극의 땅, 사망의 땅입니다.
이처럼 사망의 냄새가 진동하는 그 땅에서 생명의 꽃을 피워낸 이가 바로 고 이태석 신부였습니다. 하나님도 그러한 분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황무지에 장미꽃을 피워내는 하나님,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길을 내어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3장 19-20절에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예수님이 이땅에서 걸으신 그 길은 누구도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독한 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이것이 일반 역사 현상입니다만, 유독 예수님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역사의 흐름에서 유일하게 죄악된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유일하게 떨쳐버린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안된다고 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열등감에 쉽게 빠진 채 나는 살 가치조차 없다는 자기비하의 감정에 함락됩니다. 생명보다 죽음이 더 강력한 것처럼 보입니다. 죽음의 문화가 내 안에 고동쳐야할 생명력을 삼켜버리는 듯합니다. 생명의 충동보다 죽음의 충동이 더 강렬해진 시대의 한 복판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우리의 기운이 꺾여버릴 수밖에 없는 위태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게 꺾여버릴 것이가, 아니면 다시 일어설 것인가.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취약합니다. 약합니다. 가끔 성취도 맛보도 인정도 얻고, 잠깐 동안 살아갈 힘을 관계 속에서 얻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그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또 좌절하며 자기연민에 빠지며 열등감에 휩싸입니다. 삶의 활력과 생명력은 상실되고, 우리 영혼에는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고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지고 있는 조건에 좌지우지되고, 상황에 좌우되고, 한계가 뚜렷한 여러분들의 내재적인 재능과 자원을 가지고 언제까지 발버둥치시렵니까? 언제까지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일상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까? 남보다 조금 앞섰다고 기뻐하며 살만하다고 느끼다가, 남보다 조금 뒤처지게 될 때 좌절하며 낙심하는 이러한 반복을 언제까지 계속 하시렵니까?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셔 우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러한 부활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힘있게 능력 있게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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