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2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항상 (시 84편 1-12절)
우리가 예배를 시작할 때,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을 낭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는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려면 우리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언뜻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영성이라는 말을 종종 사용합니다만, 영성의 정의가 사람들마다 다양합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요,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씀은 진리의 영이시고 거룩한 영이신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의 사람이 되어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고 성령으로만 우리가 영이신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성이라는 것도 우리가 더욱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성령의 열매를 맺고, 온통 성령에 이끌려 이땅을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님을 우리가 닮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바르고 신실하고 충성되게 섬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 84편 말씀을 통해서 구약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참된 영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한 참된 영성을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영성을 소유한 자가 되어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통일성 있게 읽기 위해 신학자들은 여러 도식을 내놓았습니다. 어떤 특정 주제나 관점을 가지고 신구약을 통일성 있게 바라보는 시도가 더러 있는데, 가령 우리가 설교 때 강조하여 왔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신구약의 키워드라고 주장하며 그 관점으로 신구약의 통일성을 강조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언약’적 관점으로 연결시키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약속과 성취’의 패턴으로 신구약을 각기 대응시킵니다.
이렇게 공통점으로 엮으려는 시도 못지않게 차이점도 동일하게 강조해야 합니다. 구약의 초점은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들의 역사에 있는 반면에, 신약의 초점은 이방인을 포괄하는 교회에 초점이 놓여져 있는 듯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 이스라엘뿐인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서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언뜻 보면 큰 단절이 놓인 듯합니다.
신구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동일하게 강조하면서도 한 성경., 한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연속성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신약은 구약의 ‘보편화’라는 생각에 미치게 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특수한 케이스라면, 신약에 이르러 보편화된 이스라엘로 확장됩니다. 구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약속이라면, 신약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이미 구약에서도 이스라엘을 향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방의 빛’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이스라엘이라는 거점도시 육성과, 그 결과로 파급효과가 주위에 미치는 방식이었던 겁니다. 즉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고, 그 메시야를 통해 세계 모든 민족과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구원계획을 우리는 ‘보편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소위 아브라함 언약인데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복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그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수준이 높아지면, 즉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보편화’ 현상이 뚜렷해집니다. ‘공간의 보편화’, ‘시간의 보편화’, ‘소유의 보편화’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공간의 보편화’라 함은, 가령 성전을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4편은 시인의 성전에 대한 사모함이 간절히 드러나 있는 시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절기에 맞춰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는 순례객으로 추정되는 데, 시인은 순례의 여정 중에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사모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는 성전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심지어 10절에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한 추억 때문에 성전을 사모하는 거겠죠.
이점이 오늘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당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의 추억이 있는 예배 현장을 사모하며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는 성전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또한 넘어서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랑, 교회에서 만난 주님의 추억 때문에 교회를 사모하는 열심, 이것은 너무나도 본받아야 할 신앙인의 자세이지만, 여기서 머무르지 말고, ‘공간의 보편화’에 이르러야 합니다. 학생은 학교 교실이 교회와 같은 천국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오는, 그렇게 사모하는 마음으로 월요일에 학교에 가야 합니다. 직장인에게는 직장이라는 곳이 교회와 같은 천국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월요일에 출근해야 합니다. 가정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교회와 같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서 있는 곳 어느 곳에서나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의식이 중요합니다. 교회에 임재한 하나님, 동일하게 내 삶 속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그리고 내가 밟고 있는 어느 땅에서나. 우리는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고 만날 수 있고, 만남으로 인해 파생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겁니다.
또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시간의 보편화’입니다. 오늘 시편 저자는 4절에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고 노래합니다. “항상” 주를 찬송함이 중요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배하고 찬양하면 안됩니다. 주일은 마지노선, 영어로 bottom line입니다. 최저선입니다. 하루 하루의 삶이 주일의 삶처럼 주님을 기대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이 찬양의 향기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삶이 곧 찬양이 되어야 합니다. 삶 전부가 주님의 임재 속에서 뛰놀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만 떼어놓고 의무 방어전을 하듯이, 교회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이제 하나님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한다는 기대와 감격 속에 주일에 주님께 나와 예배하는 것일 뿐입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를 날마다 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나날이 복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영성에 있어서 ‘항상’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우리는 항상이 가능합니다. 진짜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항상’이 가능합니다. ‘항상’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주일에 예배하는 겁니다. ‘항상’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주일에 기쁨으로 예배하는 겁니다. ‘항상’ 기도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예배당에서 머리를 숙여 기도하는 겁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항상’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고 예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려운 시절에도 의식적으로 입에 감사를 달고 다니려고 하는 것입니다.
입술의 감사는 마음의 감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청교도 신앙인이요 목사였던 리차드 벡스터는 힘들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다음과 같이 지혜롭게 조언합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겠다고 결심하십시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지만, 기쁨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고 감사하고 찬양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자신이 받은 모든 것으로 인해 감사해야 하며,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감사와 찬양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감사하면 마음에서 감사가 일어닙니다.”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을 때>, 존 파이퍼 저에서 발췌)
공간의 보편화, 시간의 보편화를 우리는 ‘Anywhere, Anytime'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복이 없는 신앙, 한결 같은 신앙,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신을 내던진 삶,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어느 때든 늘 감사하고 찬양하는 복된 삶, 이는 분명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입니다. 이상이지만, 한 발짝 한 발짝 그렇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좀 뭉뚱그려서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제 신앙수준과 신앙경험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은 아마 내일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이죠.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의 영역이 점점 하나님의 것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내 삶의 영역 중에서 하나님과 무관한 영역이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겁니다.
‘Anywhere, Anytime, 그리고 Anything'. ’소유물의 보편화‘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십일조 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하고 아예 내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바치는 겁니다. 심지어 주께로부터 받은 새생명조차도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려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마지노선일 뿐입니다.
결국 인생이란, 사도 바울의 고백을 다시 고백하는 겁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면서 ‘어디에서나(Anywhere), 어느 때나(Anytime), 어떤 것이든(Anything)'에 자신을 내던져버린 사람은 정말 복된 사람입니다. 12절에서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어려운 시간을 통과하고, 아무리 어려운 공간적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에라도, 6절에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라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자에게는 그곳도 “많은 샘의 곳”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주나이다” 결국 우리 인생의 해답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때에 맞게 “이른 비”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적절한 때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여러 곳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날씨는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기후입니다. 보통 4월부터 9월까지 건기를 통과합니다. 강수량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10월이 되면 차츰 우기기 시작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내리는 비, 곧 10월 초순에 내리는 비가 이른 비입니다. 계속 지속되던 건기가 끝나고 이른 비가 내리면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이 부드러워져 땅을 갈수도 있고 씨를 뿌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 비의 은총입니다. 우기가 이렇게 지속되다가 3월이 되어 작물을 추수할 때가 이르면 열매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비가 필요한데 이때 내리는 비를 늦은 비라고 부릅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총. 이는 하나님의 개입이며 도움이라는 인식이 이스라엘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눈물 골짜기를 통과할 때”, 이른 비를 주셔서 내 삶이 풍요로운 샘과 같은 곳이 되도록 변화시켜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바로 이른 비의 은혜입니다. 눈물 골짜기와 같은 인생길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적절한 장소, 그리고 적절한 때, 바로 그때, 타이밍이 기가막힌 도움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부터 바로 그러한 은혜가 임합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의 변화, 환경의 변화를 먼저 생각합니다. 눈물 골짜기와 같은 상황이 샘이 철철 넘치는 환경으로 변화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상황을 변화시켜주신다면 하나님을 최고로, 최상으로 섬길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신앙도 달라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상황 탓, 환경 탓, 남 탓 등의 타령가만을 부르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본질을 놓쳐버립니다. “눈물 골짜기”와 같은 환경을 “샘의 곳”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개입과 이른비의 은총은 누가 풍성하게 받습니까?
5절,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가 바로 그 은총과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게됩니다. 직역배보면 주께서 힘을 주시는 사람, 마음 안에 큰 길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의역해서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마음에 큰 길, 그 큰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 하나님의 임재로 향하는 길이겠죠. 찬송가 가사처럼 비록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피곤치 않을 수 있는 것은, 상황과 환경이 나아져서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에 도취된, 그것이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 존재의 힘이 되는 그런 관계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든든한 배경이나, 혹은 인간관계의 자산이나, 사람들의 인정이나, 학력이나, 좋은 배경이나, 인기나, 명예나, 소유의 넉넉함이나, 이런 것들이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힘이 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극적으로 상황과 환경을 변화시키는 이른 비를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에는 시원하게 뚫린 하늘길의 대로가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향해 열려진, 그곳에 닿은 대로, 바로 그 큰 길을 오가며 힘을 얻고 은혜를 얻는 바로 그러한, ‘실크로드’가 아니라 ‘시온로드’가 마음 중심에 시원하게 뚫린 하나님의 사람! 이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주께로부터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디에 서 있든, 어느 시간 아래 있든, 무엇을 소유하고 있든, 어떤 상황, 환경에 놓여져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anywhere, anytime, anything, 왜냐하면 다른 곳이 아닌 내 마음 속에 하나님께 닿은 하늘길, 시온의 대로가 있어서 그 길 위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힘을 공급받아 메마른 땅을, 그럼에도 힘차게 걸어갈 수 있기에, 결국 바로 그 땅이 하나님의 윤택한 생명과 은혜와 샘의 곳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영성이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자는 누구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영이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며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거룩한 성령의 감동 감화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얻어, 성령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참된 영성의 핵심에는 ‘항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어느 때든, 어떤 상황이든, ‘항상’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입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또 고린도전서 15장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항상’, 이 단어를 마음에 두시고 신앙생활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요,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요, ‘항상’ 주를 찬송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2년 1월1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예수님과의 만남 (눅 19장 1-10절)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누굴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수많은 만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초등학생 때 만난 담임선생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는 배우자를 만난 것이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신앙을 심어주신 교회학교 선생님이나 목회자를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조영남씨 같은 경우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그의 글을 보니 시인 이상을 신적인 존재로 숭상할 정도로 이상에 빠졌고, 음악가 말러의 교향곡과의 만남도 경이로웠다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비교할만한 다른 만남을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인생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 영향력이 엄청나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이전의 삶을 죽음으로 묘사합니다.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 만나면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묘사합니다.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고백이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만남의 충격과 만남으로 인한 변화가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전의 자신의 죽음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사렛 이단 괴수인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웠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충격에 눈이 멀고 이전의 자신의 모든 확신이 무너져내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평생 동안 증거하는 삶으로 급격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의 방향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어디를 가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어떠한 변화를 경험했습니까? 이전의 삶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워졌습니까? 이전에 추구하던 방식의 삶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삭개오라는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언제 만남은 이루어지는지, 그 만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예수님과의 전혀 새로운 만남, 또다른 만남, 더 깊이 있는 만남을 추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What?
예수님과의 만남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무슨 만남입니까? 만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전의 삶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만남이요, 이전의 삶의 방향에서 정반대로 돌아서는 회개와 회심의 만남입니다.
어째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회개와 회심을 가져올까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꼭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에게만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자기를 내어놓으시는 십자가의 자기 희생적 사랑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떠안고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삭개오는 아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아닙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만남에서도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 받고 정죄당하는 인생이었던 세리장 삭개오를 예수님은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있는 그를 주목하셨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의 집에 가서도 로마제국에 복역하여 쌓은 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고 쌓은 부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이 녹아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만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 대신, 나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아가페 사랑을 보게 되고, 이전의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내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가치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는 무관한 삶이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와 같이 부끄러운 인생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친히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만남의 본질은 인생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회개와 회심을 이루어냅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거나 아니면 돈이거나,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과 명예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가족이거나, 그럴 것입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을 주관하고 다스린다면 여러분은 얽매인 인생이요 구원이 이르지 못한 삶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인생의 주인을 발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인생의 주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리장으로 성공했고, 엄청난 부를 쌓아올렸던 삭개오, 그를 여태껏 이끌어왔던 인생의 추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성공과 부가 아니었겠습니까? 매국노라는 비난, 로마제국 부역자라는 비난, 세율을 임의로 정해서 상당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 거짓말로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거짓말쟁이라는 비난 등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를 쌓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 달려왔던 그에게 돈과 성공과 출세가 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겠다는 결단, 그리고 강도질한 것처럼 거짓으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았다면 네 배나 되갚겠다는 결단을 통해서 보건대,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정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은, 즉 그 만남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십자가의 자기 희생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마음이 녹아져 이전에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방향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Why?
그러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는 그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였다는 겁니다. 여기 ‘잃어버린 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를 떠올리게 됩니다. 기존의 일백마리 양을 놔두고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온 집을 뒤지는 여주인의 비유, 그리고 소위 탕자의 비유, 정확하게는 잃어버린 두 아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되찾으려는 아버지의 비유. 이 세가지 비유 모두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길 잃은 자들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놓으신 길을 걷지 못한 채, 우리는 길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잃어버린 자였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발견되어서 바른 길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바로 그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창조주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조주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바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바로 섬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는지, 이미 성경 말씀에 다 기록해주셨는데도, 우리는 말씀을 외면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길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제시하는 바로 그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셔서,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인간이 되셨고, 그 말씀을 삶으로 구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안전한 그 길, 생명의 길,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그 길을 회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대로 만나서 길 잃은 자들이 창조주가 예비하시고 보장하시는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3. Who? When?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것처럼 인생의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느끼고 갈증과 허기를 겪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빈 공간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꽉 차서 더 이상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사람, 이를테면 자기 만족에 빠져서 자충족적인 착각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원하던 성공과 지위와 부를 얻었던 삭개오,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목표를 추구하며 달려왔던 삭개오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단 말입니까? 성공과 지위와 부로써 채워지리라고 믿고 기대하며 달려온 인생인데, 막상 그것들로 마음이 다 채워졌는데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공허감, 텅 빈 것 같은 마음을 마주하고 그는 적지않게 당황했을 겁니다. ‘인생이 겨우 이런 거란 말인가?’는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되었을 겁니다.
마침 그때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분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고, 최근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새로운 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는, 구약의 선지자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되는 예수님을 한번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겁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예수님 주위의 인산인해를 뚫고 나아갈 용기도 없었고, 거기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과 냉대를 감당해낼 수도 없었기에, 체면 무릅쓰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겁니다. 무엇이 그를 나무 위로 올라가게 했습니까? 인생의 목마름 때문이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 자리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는 존재하는가?’, ‘인생에는 왜 그렇게 고통과 아픔이 가득할까?’, ‘내 마음은 왜 이리 휑한가’, 이러한 인생의 근본적 질문이 인생의 목마름과 허기와 갈증이 될 때, 우리는 이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4. How?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삭개오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정말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덜 소중한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한 번뿐인 인생에서 꼭 얻기 위해서 매진하는 적극성을 뜻합니다. 중년의 나이,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쌓은 부로 인해서 우아한 삶이 가능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못 참습니다. 일단 하려고 마음에 먹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일단 마음에 들어오면 해야 합니다.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3절),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체면도 사회적 위신도, 명예의 손상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예수님과의 만남이 마음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공허함이라는 인생의 근본적 해답을 찾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과 돌격성과 적극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려면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라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일 수도 있고요, 때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시간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고요, 평소 자신의 습관과 행동방식과는 다른 적극성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라 올 때 붙잡아야 하는 것이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오늘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절호의 기회를 감지한 것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지 않으면 다시는 그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집념과 순진성, 그리고 저돌적인 적극성은 예수님의 주목을 받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쌌지만 예수님에게는 오직 삭개오만 보였고, 그의 이름만 기억하셨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라는 사람을 이미 훤히 알고 계셨고,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마음을 꽤뚫어보시고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물러서 그의 온 집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려는 것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러한 목마름, 목마름으로 인한 간절함과 절박함,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 이러한 자를 예수님은 주목하시고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만나주시는 겁니다.
5. Where?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이 만남은 이루어집니까?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돌무화과나무가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꼭 교회를 가리킨다기보다 교회의 역할이 곧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가 얼마나 오래 전에 심겨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심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라는 생각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심겨진 나무 위에서 한 영혼을 하나님을 부르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가 이런 의미에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이끌려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하나되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하고 교회에서 평생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며 삶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생활에 힘을 쓰고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새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를 힘쓰고, 더욱 그분을 배워 그분을 닮아가기를 힘쓰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의 법칙으로 삼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강렬히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다시 더욱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랐던 삭개오의 목마름과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과 적극성으로, 오늘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우리를 더욱 친밀하게 만나주십니다. 새해에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남으로 인해서 더 이상 길 잃은 자가 아니라, 길과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올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2년 1월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주의 길은 바닷속에 있습니다 (시 77편 19-20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주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의 길은 주님이 예비하신 길이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주의 길을 “주의 계명들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32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고 했고, 35절에서는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의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뒤져보아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무엇을 주님이 기뻐하실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주의 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아야 주의 길을 걷든지 말든지 할텐데 주의 길이 오리무중, 감추어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종종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길로 인도해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은 처음부터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의 길은 본토, 친척, 고향,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여 떠났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셨지만 이러한 주의 길을 아브라함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요셉에게 주의 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흉년의 시절을 하나님의 지혜로 잘 대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을 기근에서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총리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형들에게 속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의 가정에서 종살이 해야 했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 총리가 되는 꿈을 과연 꿀 수 있었을까요, 감옥에서 나와 햇빛을 볼 수 있을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함이라는 복을 누릴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으려는 굳은 심지를 간직하고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결국에는 주의 길로 인도하시는데요, 주의 길로 나아가기까지 우리는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겪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로 말하자면 한 번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수없는 실패를 경험합니다. 시행착오와 연이은 실패 끝에 마지막으로 주의 길을 찾는 성공에 이르면 모든 실패가 만회되고 이전의 잇따른 실패가 성공을 위한 길로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일본의 경영자들에게 존경받는 경영자로 늘 손에 꼽히는 분이 혼다자동차를 창업한 혼다 쇼이치로입니다. 이분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형제 중 다섯 명이 영양실조로 일찍 죽었을 정도로 집이 가난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길에서 자전거를 수리해주는 걸로 밥벌이를 했습니다. 혼다 쇼이치로도 자전거와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나중에 오토바이의 작동 원리도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습니다. 나중에 혼다 쇼이치로가 혼다 오토바이를 제작할 때도 그가 직접 실험하고 설계하는데 가장 중요한 연구원 역할을 하게 되었을 정도로 기계에 밝았습니다. 드디어 1950년대 초기, 혼다는 오토바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5년 안에 250개 경쟁업체를 제치고 세계 1등의 오토바이 생산 기업이 되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한창 제작할 때 그는 언젠가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혼다자동차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지금은 토요타에 이어서 일본 내 2위인 자동차기업이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자동차를 판매하는 글로벌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혼다자동차는 일본 기업 특유의 정신이 살아있는 회사로 정평이 나있는데, 이를 일컬어 혼다이즘이라고 칭할 정도로 세계 어느 곳에서 공장을 가동해도 혼다이즘 정신에 따른 스탠다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전 세계 혼다자동차 공장에서는 어디에서나 근로자가 흰색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흰색 작업복은 자동차 공장에서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기름때가 많은 자동차 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이는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는 창업 시절 평소 하얀 옷을 입고 오토바이 수리를 했는데, 이유는 하얀 옷을 입으면 더러움이 쉽게 보여 다시 갈아입게 되고, 따라서 정갈한 마음으로 일하고 고객을 맞을 때도 깔끔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흰옷을 입고 작업하면 마음까지 단정해져 보다 품질에 완벽을 기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자동차를 만드는 작업자는 의사와도 같다는 혼다 소이치로의 철학이 들어간 흰색 작업복입니다. 공장을 방문하는 본사 직원이나 연구소 직원도 마찬가지로 공장에 오면 흰색 상의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장도 예외가 없습니다. 공장은 자동차를 만드는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랍니다. 이 작업복은 일본 공장뿐 아니라 세계 33개국 62개 혼다 공장 모두에서 착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혼다이즘이라는 정신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분이 1974년에 미국의 미시간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연설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그간의 일들을 돌아봤을 때 실수와 실패, 후회할 것을 제외하면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랑스러운 것은 비록 연이어서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 잘못과 실패들이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내 경우에 성공은 여러 차례의 실패 후, 그리고 실패에 대한 반성을 한 후에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공은 그저 내가 한 일의 1% 밖에 되지 않았고, 99%가 실패였습니다.”
(책 <하버드 인생특강> 285-7쪽 참고, 아울러 중앙일보 기사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 참고)
우리가 주의 길을 찾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주의 길을 찾기까지, 주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선은 주의 길에 관심이 없을 때가 많고, 주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될 때도 나의 길로 가기를 원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주의 뜻보다는 내 뜻을 앞세우거나, 주의 계획보다는 내 계획을 우선시하거나, 주의 길로 들어서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를 우리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종종 주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가시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77편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9절에서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다”라는 고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홍해 앞에서 가로막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자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죽는 길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지만 주의 길이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주의 길이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을 때 주의 길이 비로소 드러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이처럼 극적인 요소가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너무나 극적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가실 주의 길이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주의 길을 통과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누군들 알 수 있었겠습니까, 어리석은 인생들은 홍해 앞에서 우리는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홍해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리고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를 목도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다, 우리는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홍해를 통과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서 바닷속에 주의 길을 감추어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행하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시편 저자는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지만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다”(19절)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7), 또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사를 전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일을 성취해가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고 주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주의 길이 바닷속에 있고, 주님은 우리를 주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생각하셔서 목자가 양을 인도함같이 인도해가십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서 인도해가십니다. 주님이 인도해가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주의 길이 감추어져 있어서, 심지어 바닷속에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없고 알지 못한다 해도 주님은 주의 양떼들을 인도해가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우리는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요청하십니다. 홍해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3-14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두려워하지 말고 우선 가만히 좀 있으라,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너희가 곧 보게 될 터이니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 믿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행하실 일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넜고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바닷물에 수장되었습니다. 이러한 큰 구원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심을 체험하고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의 원로목사이시며 극동방송 이사장이신 김장환목사님의 자서전적인 글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 마디로 요약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라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다섯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저를 아버지는 석달이 지나서야 호적에 올리셨습니다. 제 위로 다섯 명이나 돌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 삶에는 지독한 가난과 암담한 미래만이 펼쳐졌습니다. 일곱 식구가 작은 방에서 자다 보니 어머니는 제가 형들에게 깔려 행여나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유년 시절이 줄거울 리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중학교도 갈 수 없는 지독한 가난이 너무도 미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학비 걱정을 해야 하는 비참한 형편 때문에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해도 내 인생에 빛이 비치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랬던 제 인생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며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참담한 시대에 태어나 끼니를 걱정하며 살던 저를 하나님은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에서, 미국의 유학생으로, 주님의 종으로 한해 한해 인도하셔서 지금은 세계선교를 위해 상요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고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고 길이 열려서 인도함을 받게 된 그의 삶이 주의 길을 걷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분의 전 생애가 참으로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극동방송을 운영하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음을 간증합니다.
원래 극동방송 송신소는 서해안 소래포구 염전 인근에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외딴 뻘밭에 송신소를 세우고 방송을 송신하기 시작한 이래 40년이 훌쩍 지났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근에 신도시가 생기면서 민원이 빗발친 것입니다. 송신소의 고압선이 위험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 송신소를 옮겨달라는 민원이었습니다. 당국의 중재로 어쩔 수 없이 송신소를 이전해야 했습니다. 이때 김장환목사님은 어디로 옮겨야 할지, 이전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당황스러웠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옮기기로 결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을 때 한 장로님을 통해서 새로운 부지를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하게 하셨고, 기존 송신소 부지도 땅값이 크게 올라서 이전 비용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존 송신소 부지보다 더 입지가 좋은 곳이었습니다. 한국은 물론 북한과 중국에까지 더욱 강력한 전파를 보낼 수 있는, 송신소로서는 더 좋은 입지였습니다. 허가를 받는 까다로운 과정도 비교적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고 막막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위기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주신 것임을,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김장환목사님은 고백합니다. 이러한 간증을 말씀하시고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어딘지 모를 때에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인도하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뜻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순종하십시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김장환 저에서 발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길은 종종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심지어 상상하지도 않았던 곳에 주의 길이 숨겨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를 주의 길로 몰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의 행사를 알리시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가 알고 믿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믿고 맡기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길은 바닷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의 길로 반드시 있다는 것이요, 우리가 주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계심을 믿고 주님의 손길 꼭 붙잡고 올 한 해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2년 1월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자 (골 2장 6-7절)
오늘 새해 첫주일에 주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될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신앙의 기본과 본질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올 한해에도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이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6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 생명의 주인, 내 영혼의 주인, 그렇게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날마다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고백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일터에서도, 그리고 가정에서도,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원리에서도, 내 인생의 미래까지도,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주님의 영역이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는 늘 회개를 동반하는 믿음이 요청됩니다. 회개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돌아섬을 의미하는데요,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인간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뜻하는데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죄는 피조물 즉 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오만이요 교만이요, 성경은 그것을 인간의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는 무엇을 훔치거나 미워하거나 거짓말하는 것과 같은, 개인이 저지르는 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어령 선생은 말합니다. “이러한 원죄가 밑바탕에 깔려서 우리 사회 전체 시스템에 내재하고 있는 문명과 사회 자체에 죄가 있다고 봅니다.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라는 겁니다.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국민일보 2021년 12월 21일)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없고 동시에 영혼의 구세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이 신앙고백은 신앙의 시작일뿐 아니라 우리 믿음의 모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캠브리지대학교 채플에서 ″예수의 주되심″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학생이 루이스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이다 ′는 케케묵은 기독교의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루이스는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지요.″ ″그러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청년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아, 그러면 자네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삶 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 인정하지요″ 루이스는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네.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www.onebody.org에서 발췌)
예수님을 주님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구세주로 우리는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뜻을 구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행하라!”, 즉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기, 예수님과 동행하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삶인지 본문 7절에서는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첫째,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둘째,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워져가고, 셋째, 가르침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마지막으로 감사가 넘치는 삶, 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삶입니다. 이는 인생의 토대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안정성과 견고함을 물질적 기반에 둘 때가 많습니다. 인적 관계에 둘 때도 많습니다. 젊음과 건강에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취와 성공에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결국에는 흔들리고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른 것들에 삶의 토대를 삶는 인생은 결국에는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 때문이라고 이어령 선생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성공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기업인, 세계 모든 것을 알게 된 과학자, 모든 것을 성취한 이들도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죽음이에요. 세상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죽었어요. 그들 중에 죽음이 뭔지 알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면 종교는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종교의 이름이 무엇이라도 마지막 질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국민일보 2021.12.22.)
예수님에게 뿌리를 박고 뿌리를 내리는 인생만 영원한 거처에 닻을 내리고 정박한 배와 같은, 삶의 견고한 안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인생의 항해에서 끊임없이 파도에 따라 요동하고 표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면 견고한 토대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만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부활의 첫열매이시오 부활의 보증이셔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새해에 더욱더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다시 말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뿌리를 예수님께 박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식물이 자라듯이, 건축물이 세워져올라가듯이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신앙이 자라나고 인격이 자라나고 소망이 자라나고 인생을 통달해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주어진 이유는 어제보다 성장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일이 주어지게 된다면 내일이 주어지는 이유 또한 오늘보다 성장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성경을 알아가고 인생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도록 성장해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는 성장해서 더 이상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곽선희목사님의 설교집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미국의 부흥사 무디 목사님이 한 말을 인용합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르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분은 강조합니다. “여기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장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성장하도록 키워가고 계십니까. 많은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성장해갑니다. 평안하고 안일한 가운데서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비바람을 많이 맞는 나무라야 튼튼한 나무가 됩니다. 인격은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음으로 높은 수준의 성장을 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성장한 사람은 유치한 것을 버린다 하였습니다. 큰 것을 발견한 사람, 참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유치한 것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전에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니까 전에 소중하던 것을 분토와 같이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노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다 쉽게 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큰 것, 소중한 것을 깨닫고 나면 시시한 것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 <지식을 버린 자의 미로> (곽선희 저, 17-18쪽)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진 건축물처럼,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한 층이 더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과 다르게 내일은 더욱 아름답게 성장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그 중심성이 더욱 견고해지고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란 첫째는 인생의 토대, 무엇이 견고한 토대이며 진정한 인생의 안정성인가의 문제였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리고 뿌리를 박으라는 것이었다면, 둘째는 인생의 성장, 그리스도 안에서 세움을 받고 세워져가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믿는 것이란 믿는 것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을 행하는 것, 행하는 것이 진정 믿는 것이며, 즉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한결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됨이요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영국 성공회의 총 본산이요 성공회 수장은 켄터베리 대주교입니다. 켄터베리라는 영국 남부의 지역의 교구를 책임지면서 전 세계 영국 성공회를 관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켄더베리 교회에 니콜라이라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열 일곱 살에 교회를 관리하는 사찰집사가 되어 평생을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맡은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시간에 맞춰 교회 종탑의 종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쳤든지 런던 시민들은 도리어 자기 시계를 니콜라이 집사의 종소리에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일하면서 키운 두 아들은 캠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두 아들이 아버지 니콜라이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그러나 니콜라이는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그는 76살까지 종을 치며 교회를 사랑하고 관리하였습니다. 그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자 일어나 옷을 챙겨 입더니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종을 쳤습니다. 얼마간 종을 치다 종탑 아래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감동을 받고 영국 황실의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해 주었으며 모든 상가와 시민들은 그 날 하루 일을 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심지어 유흥주점도 문을 열지 않자 자연히 그가 세상 떠난 날이 런던의 공휴일로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에게 종을 쳤던 그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된 것입니다.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죽었으나 황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찮게 보이는 예배당 종치기를 충성스럽게 한 그는 황실의 묘지에 묻히는 영광과 자기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되는 명예도 함께 얻었습니다.” <‘햇볕 같은 이야기’ 중에서 발췌>
사도 바울은 아들과 같이 여기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배우고 확신하게 된 말씀, 그 말씀에 따라 세워진 신념, 그 믿음과 신념에 따라 확신한 바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확신하고 있는 진리에 따라 그 진리를 붙들고 끝까지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끝까지 헌신하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확신한 바를 실행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삶,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감사함이 넘치는 삶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감사로 가득한 입술이요 감사로 가득한 인생입니다.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평생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부활의 소망이 있으니까 감사,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 환난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늘 감사가 넘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어령 선생은 라틴어로 된 3대 명구를 말합니다: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국에 돌아오는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옆에서 해골을 들고 있는 노예가 장군의 귓속에 계속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속삭였다고 하죠. 그만큼 중요한 진리죠. 죽음을 기억하라는 게. 특별히 승리의 순간에 영광의 순간에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더욱 붙들어야 할 명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카르페 디엠’ 곧 현재를 붙잡으라,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기회를 잘 붙드라는 것이죠. 하여튼 아무리 미래를 위한 것이라도 현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러지 말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모르 파티’ 곧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재능,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것들을 먼저 사랑하고, 그리고 그 현실에서 현실을 극복할 방법들을 찾아내야겠죠. ‘아모르 파티’는 자족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족이요 우선 감사입니다. 그리고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차원에서 감사하는 정도로 그치지 말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입니다. 늘 감사, 감사가 넘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 하나님을 믿으니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늘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새해를 맞이하는 첫 주일에 신앙의 기본과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이요 구원하여 주시는 구세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은 사람들의 이후의 삶 역시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것,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크게 네 가지로 제시됩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께 뿌리를 박는 인생입니다. 삶의 토대와 안정성을 오직 예수님께 두는 인생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격과 믿음의 성장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믿는 것을 행하는 것이요 행하되 끝까지 진리의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한결같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새해에도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생명 되시는 예수님과 더욱 깊은 교제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31일 동산교회 송구영신예배 설교 (온라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사 62:6-12)
이땅에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다 한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바라보는 성도, 안타깝게 여기며 더욱 사랑하여주시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들인 우리 모두를 100% 전심으로 다 각각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라도 하나님이 나를 제일로 사랑하신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더욱 각별히 돌보아주시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욱 기억하시고 주목하시는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특별하게 생각하고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를 우선적으로 떠올리실까, 또 우리 동산교회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제일 먼저 떠올리실까, 누굴까요?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만 하나님이 친구처럼 여기고 벗 삼은 이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자기의 벗이라고 인정하셨고, 또 하나님은 모세와 회막에서 교제할 때에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모세와 대화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고 그를 이어서 왕을 세울 때 이스라엘 전역을 샅샅이 뒤진 것처럼 성경은 보도합니다. 주의 종 사무엘로 하여금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세울 사람을 찾아나서도록 하시는데요, 물론 하나님은 이미 찾으셨지요. 마치 구글 어스가 조그마한 동네, 자그마한 집까지 위성에서 클로즈업 해서 찾아내는 것처럼, 유대 땅 조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을 찾아내셨습니다. 다윗을 찾으시고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찾고 또 찾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21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2022년을 맞이하면서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고 찾고 찾을 때 발견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자’는 각오와 결심으로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성도, 하나님이 특별히 더욱 각별히 자신의 임재를 허락하시는 성도, 하나님이 친구와 같이 이야기나누는 친밀한 성도,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시는 성도,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러한 포부와 기대를 가시고서 맞이하시는 2022년 새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상황을 돌아보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주신 찬란한 약속들을 속히 이행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처럼 그 사람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파수꾼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여호와로 이땅을 돌아보게 하는 자’, ‘여호와로 우리 교회를 찾아오게 하는 자’, ‘여호와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게 하는 자’, ‘여호와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는데 있어서 쉬지 못하시게 하는 자’, ‘여호와로 코로나로 인해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이 땅을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는 자’, 오늘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주님, 제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라는 소망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포부를 가지고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있는 가정은 하나님이 더욱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아주실 겁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많은 교회를 하나님이 더욱 특별히 기뻐하실 겁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일하는 일터를 하나님은 더욱 축복해주실 겁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이사야 62장을 근거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과 사귐과 교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사야 62장 4절을 보십시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 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결혼한 부부와 같은 친밀함을 지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헵시바’와 ‘쁄라’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입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이며 ‘쁄라’는 ‘결혼한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이 그렇게 기뻐하는 신랑과 신부의 친밀한 관계를 지닌 자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또한 더욱 알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늘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께 사랑받는 성도입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소중히 여기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한 왕이 여자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왕은 비록 가난하지만 지혜롭고 아름다운 처녀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귀족들 중에는 여기에 불만을 품고 왕비를 무시하며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비를 쫓아내고 자기들이 원하는 여인을 왕비로 세우려고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서 왕비를 모함하였습니다.
왕은 이들의 계속되는 음모와 계략에 넘어가 결국 왕비를 폐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왕비를 내보내려고 하니까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왕비에게 왕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나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왕은 가난한 왕비가 값진 보물이라도 가져가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왕비에게 왕궁에서 가장 좋아 하는 것을 하나 가져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비는 술을 준비해서 왕에게 이별주라고 드렸는데 이 술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왕은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후에 왕이 깨어보니 마차 안이었습니다. 옆에는 왕비가 앉아 있고 밖을 보니 마차는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왕비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저에게 왕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가도록 허락해주셔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폐하를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왕은 왕비의 지혜와 사랑에 감동을 받아 다시 왕비를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왕비는 정말 지혜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왕비는 진심으로 자신이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왕을 모시고 함께 했을 때 그녀는 다시 왕비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선택하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http://www.fgnc.org/board_nLri15/50953에서 발췌)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주목하시는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헵시바’와 ‘쁄라’와 같은 주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큰 사랑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파수꾼처럼 깨어 있고 주야로 잠잠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것은 깨어 있어서 주야로 기도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로 인해서 여호와께서도 쉬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말합니다. 잠잠하지 않는 성도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성도들로 인해서도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고 졸지 않으시고 깨어 있으신다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연결된 핫라인입니다. 한 곤충학자가 거미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거미줄에 작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어미 거미가 나타나 새끼들을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거미줄이 흔들려 새끼들이 떨어지려고 하거나 다른 위험한 곤충이 접근해오면 갑자기 어디선가 어머 거미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곤충학자는 다른 거미들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다른 거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 거미가 어떻게 새끼들의 위험을 눈치 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새끼 거미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계속 정밀한 관찰의 결과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거미 새끼들의 몸에서 얇은 실이 나와 있고 그 줄이 엄마 거미와 이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새끼들이 거미줄 밖에 나가 위협을 당해 그 줄이 팽팽해지면 엄마 거미가 신호를 접하고서 어김없이 재빨리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새끼 거미의 몸에 나와 있는 줄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역시 성도들의 생명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될 핫라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의 기도라는 신호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핫라인입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 이처럼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을 늘 받을 수 있습니다. (<김장환목사와 함께,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구원이십니다>에서 발췌)
우리의 기도는, 특별히 꾸준한 기도, 정규적인 기도,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세한 것까지 챙겨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 입술에서 우리 마음에서 주야로 잠잠하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주를 위한 열심을 가지고서 주의 일에 헌신하고 주의 뜻을 이루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깃발을 들고 뭔가 앞장서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주를 위한 열심과 열정이 특별한 사람 같지 않습니까? 주님이 하시려는 일에 맨 앞장서서 주의 일에 열정과 헌신으로 임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맡은 바 사명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이 이루라고 허락하신 사명을 위해서라면 가장 큰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앞장서서 주의 일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농구의 신이라 불리며 미국 NBA에서 한 시대를 평정했던 마이클 조던을 잘 아실 겁니다. 미국의 동기 부여 전문가 중 한 명인 팻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그의 책에서 마이클 조던을 시대의 영웅으로 우뚝 서게 한 그의 모든 특성들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그는 조던의 현란한 플레이와 농구 기술, 체력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화려한 재능 이면에 오히려 숨어 있는 조던의 피나는 노력, ‘지금 여기에’ 100% 몰입하는 집중력, 열정, 집념 승부근성 등을 꼽았습니다. 한 번은 농구 캠프에서 한 참석자가 조던에게 물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했나요?” 그러자 조던은 “시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어요. 시계를 본 적도 없어요. 지칠 때까지, 아니면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연습했거든요.” 한마디로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그를 농구의 천재로 만든 것입니다.
스포츠, 음악, 예술, 학문 등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성공자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프레드 크랩스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열정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승리하는 생활을 하는 비결은 가슴을 열정으로 가득 채우는 데 있습니다. 열정이야말로 온갖 장애와 싸우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인생의 순간 순간을 즐기게 합니다” (http://cyw.pe.kr에서 발췌)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헌신과 열정으로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시고 기억에 두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많은 성도가 이땅에 있고, 수많은 교회가 이땅에 있습니다. 그만그만한 성도로 남고 싶지 않으시죠? 우리 교회가 고만고만한 교회로 평가받고 싶지 않으시죠? 하나님이 특별히 주목하는 성도와 교회, 하나님이 특별히 돌보아주시고 사랑하여주시는 성도와 교회,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드는 성도와 교회, 그러한 성도가 되고 우리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심령에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겠다는 소망이 간절히 생겨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과 교회와 일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돌봄과 사랑과 축복을 받는 공동체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내가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의 큰 복이 흘러넘치면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를 위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과 연합을 가진 성도, 마치 부부와 같은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성도, 헵시바와 같은 성도. 그리고 늘 깨어 있어서 시시때때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 계속 잠잠하지 않는 깨어 있는 성도.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더욱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앞장서서 주의 일에 힘쓰며 주신 사명을 이루어드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성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성도를 찾으십니다. 새해에는 더욱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더욱 크게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2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알파와 오메가 (계 22장 12-13절)
오늘은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에 역사를 마무리하러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약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창조를 단행하셨고, 예수님의 승천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셔서 구원 역사를 이땅의 교회가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의 가장 마지막 사건은 이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구원 역사의 다음 사건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사이에 구원 역사의 중요한 사건은 없습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미 역사는 종말에 이르렀고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종말의 완성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최종적 완성에 이를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시작된 교회시대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특별한 사건은, 즉 다음 사건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다음 사건이기 때문에 속히 오시는 것이요 임박한 재림이요 때가 가까운 것입니다. 비록 그때 이후로 2천년이 흘렀고 또 얼마나 더 있어야 예수님이 재림할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시간법에서는 언제나 예수님의 재림은 임박해 있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밤중에 도둑같이 오실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성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를 했지만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나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 3-4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만물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라는 점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도, 역사의 종말과 심판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세상이 있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고, 노아 시대 때도 세상은 이미 물로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옛 세상은 불사르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베드로후서 3장 5-7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은 노아 시대 때는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불로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왜 불로 심판하시느냐면, 물에 의한 심판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하지만 불에 의한 심판은 악한 자들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다 태워버림으로써 옛 세상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새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역사를 끝내러 오실, 그리고 종말을 완성하러 이땅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이로써 재림 신앙으로 무장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재림 신앙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야 할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이라는 상을 주시는 때요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계시록 22장 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상은 구원의 완성이요, 우리의 비천한 몸을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변케 해주시는 것이요, 더 이상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주시는 상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상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의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시러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즉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요 믿음의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예수님의 심판에 의해서 더욱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재림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라면 이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마치면서 최종적으로 결론적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 재림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직분에 충실하고 맡겨진 일에 헌신하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교회 일뿐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뿐 아니라 여러분이 이 사회를 위해 섬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매사 성실하게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수행해야 합니다.
청교도 시대에 영국에서 의회가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그 때는 신앙이 좋은 영국 사회인지라 많은 사람이 가까운 장래에 예수께서 재림할 것이라는 말세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국회의원들이 모여 국사를 의논하는 가운데 갑자기 천지가 변하고 하늘에 이상한 징조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의사당에 모였있던 여러 국회의원들이 천지가 심상치 않으니까 이제 주님께서 재림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히 국회에 앉아 있기만 해서는 되겠는가 어서 폐회하고 준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한 청교도 국회의원이 일어서서 말하기를 "만일 이 시간에 주님께서 임한다고 할 때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수천 수만 사람을 대신해서 우리의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줄 압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는 맡은 임무를 더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http://cyw.pe.kr/xe에서 발췌)
여러분은 오늘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라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한결같이 주의 일에 헌신하며 충성하는 것이 주님을 가장 잘 맞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은 마침입니다. 예수님의 창조와 재림은 각각 시작과 마침입니다. 성경은 창조로 시작하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마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성경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끝책 요한계시록의 가장 끝 말씀 계시록 22장 20-21절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성경은 마칩니다. 주님의 손이 시작하시고 친히 마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이는 그리스어 알파벳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마침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요 창조와 창조의 완성이시오, 이뿐 아니라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받아들일 때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가시고 완성해가실 것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분명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은 시작하는 손이요 또한 마치는 손입니다. 주님의 손과 팔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러니 우리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라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과 팔에 안겨서 평안함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도 주님과 더불어, 마침도 주님과 더불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연말, 또 주님과 함께 하는 연시, 연말연시를 주님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벽 작정기도회로 새해를 열고 구상하거나 제가 아는 분은 금식을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 새해를 열기 위해서입니다.
시작과 마침이 되신 주님과 더불어 그 사이에서 우리는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5장 21-22절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 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녹에 대해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으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창조주요 재림주로서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시작과 마침이 되심을 믿는다면 이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에 대해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는 휴거가 아니라 에스코트를 말함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실 때 집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집안으로 모시고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손님, 재림주로 이땅에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가서 맞이하고 이땅에 들일 것입니다. 그때에 새 하늘과 새땅으로 변화된 이땅에서 주님과 항상 함께 있으려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준비를 잘 갖춘, 우리는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까요? 베드로후서 3장 10절-14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늘 질문해야 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우리는 마땅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점과 흠’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할 부정하고 의롭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늘 성령의 불로 태우고 소멸시켜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인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시간들을 보냈으며,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거스틴이 32세에 밀라노에서 유명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하게 됐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길가에서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 사람이 됐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속에는 옛 성품이 우리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새 사람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날마다 변화의 삶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옛사람을 끊임없이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계속적으로 입어야 합니다.
(햇볕같은 이야기 /피영민 목사 글에서 발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밤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이 질문을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기도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잡념을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근신하라’는 것은 없어져버릴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쾌락에 기울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므로 깨어 있으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에서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실지 아무도 모르는 바,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을 것을 촉구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20221년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역사의 대미를 장식할, 역사를 마무리하고 창조를 완성하러 이땅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재림신앙으로 무장돼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구원을 완성하러 오시는 재림이므로 우리는 기쁘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재림신앙을 가진 자라면 이땅에서 주님께 충성되고 주의 일에 힘쓰고 헌신된 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오 시작과 마침이신 분임을 믿고 연말연시를 주님과 함께, 특별히 마무리도 주님과 함께, 시작도 주님과 함께,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작과 마무리 사이에서 우리는 늘 주님과 동행하며 인생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겠습니까? 늘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질문하고 거룩한 생활과 경건한 행실로 성장해가야 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늘 새사람을 입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늘 깨어 기도하므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시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칭찬 듣고 면류관을 얻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25일 동산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눅 1:46-56)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셨다는 소위 성육신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와 같이 아기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좋은 영향과 확신을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아기를 잉태한 젊은 여인 마리아의 마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한 위안과 확신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인 마틴 로이든 존스 목사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묵상하고서 성육신 메시지에는 3가지 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성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최고의 사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심을 보여 준 최고의 사례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메시지에 담긴 두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이 무엇을 보여주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과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을 환히 드러내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는 않으셨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잊으신 듯 보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잊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고 많은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보시는 분입니다. 영원한 현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계시지 않으시고 시간의 창조주로서 시간 바깥에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보고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나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셔서 마침내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베푸시기까지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 기다리는 기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약속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약속하신 것을 잊으셨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패배하는 것도 허락하시기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2천년이 걸렸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잉태된 아기에 관한 소식을 전달 받고 오늘 본문의 찬양을 부르기까지 2천년이 필요했습다. 그 2천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고, 나라가 멸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고, 마리아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오늘 그 시간에도 로마 제국에 압제에 시달리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백한 패배를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 같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을 받았으나 패배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끝까지 붙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간간이 계속해서 격려하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어느 때는 약속하신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하심으로써 약속을 붙들고 가도록 격려해주십니다. 비록 소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물방울들을 끊임없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며 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한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해주시고 그 약속을 붙들고 나가는 그들을 인도해가십니다.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아 잊으신 듯해 보이고 심지어 약속과는 정반대로 상황이 이루어져서 패배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작은 격려들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리고 약속을 반복해서 말씀해주심으로써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한없는 자비와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육신 메시지에 담긴 세 번째 원리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거라는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이 그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소망, 우리의 낮은 몸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거라는 영광의 소망,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될 거라는 소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아서 더 이상 우리의 눈에 눈물과 고통이 없게 될 거라는 소망, 이 모든 약속을 하나님께서 또한 신실하게 이루어주실 것임을 우리는 성육신을 통해서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겁니다. (책 <마틴 로이든 존스의 내 구주 예수> 100-137쪽 참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 마리아의 심정 변화를 들여다보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한 세 가지 성육신 메시지의 원리에다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50절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성육신이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이라는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두려워합니까? 두려워하는 이유가 수도 없이 많고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내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고, 두려움 없이 미래로 내달리는 사람보다는 현재의 두려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괜히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려 365번이나 말씀한다고 합니다. 매일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365번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두려움의 문제는 언제든 우리를 습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본문은 소위 ‘마리아의 찬가’ 혹은 ‘마리아의 찬양’이라고 불립니다. 아마 십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아라는 가냘픈 여인에게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너는 곧 임신하게 될 것이다”는 소식이 전달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이미 결혼할 상대가 정해져있던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겁니다. 이 소식에 대한 마리아의 첫 번째 반응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너무나 당황스럽고 놀랍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 법한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고지를 전달받고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여느 십대 여자 아이처럼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놀라고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겁니다. 비록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임신 소식을 알리기 전에 말한 인사말이 “은혜를 입은 자야”였고 또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했지만 마리아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1장 28-31절을 보겠습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처럼 마리아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었고 자신에게 어떠한 미래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과 무서움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상태죠.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천사가 전한 소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떠나자 마리아가 무엇을 합니까? 자신의 친척이었던, 그리고 최근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를 찾아갑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유대 산골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방금 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임신의 소식을 들었던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논의하고 상의하는데 그들이 적격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도 최근에 임신했는데 나이가 많은데다가 오랜 불임이어서 불가능한 임신을 한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낳은 아들은 세례요한이죠. 엘리사벳은 자신처럼 불가능한 임신을 하게 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1장 4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안정을 되찾은 마리아는 오늘 본문의 소위 ‘마리아의 찬가’를 부르게 됩니다. 마리아는 상당히 사려 깊은 어린 여인이었고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약속하신 구원의 위대한 약속을 자신을 통해서 이루실 거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자신의 몸에 잉태케 된 아기 예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54-55절을 보십시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잊으신 것처럼 보인 하나님께서 오랜 기다림의 끝에 약속을 이루어주시려고 기억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약속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무서움을 가져다 주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은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소위 하나님 경외의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50절의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나서 생겨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게 겁에 질려서 생겨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죄를 짓고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버리는 그러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고서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깨닫고서 마음에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입니다.
마리아가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환영할만한 일이라기보다 어느 때는 인생의 큰 도전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마 마리아에게도 ‘왜 하필 나야’,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운 마음뿐이었겠죠. 천사의 소식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소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큰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되었던 듯합니다.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엘리사벳의 말에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어린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마리아가 깨달았고 그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아기 예수를 임신케 한 것은 비단 한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정도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어마어마한 큰 일을 자신에게 행하심으로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인류를 구원해내기 위해서 큰 일을 행하신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고백이 뒤따릅니다. 전능하실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한 것입니다. 전능하심과 거룩하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으면 이 큰 구원을 이루어주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셨고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러한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마리아에게 지금 있는 두려움은 비겁한 두려움도 아니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자신의 인생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데서 비롯된 경건한 두려움이요 하나님의 경이로운 속성을 깨닫고 나서 생겨난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거룩, 위엄, 영광, 위대함과 영원하심을 어느 정도 깨달을 때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겁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하나님을 겁낼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도록 만드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은 사탄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탄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은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운 두려움이 생겨나게 하십니다. 결국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꺼이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2장 40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함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구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참되고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닌 달콤한 맛을 체험하며 그분의 은총 가운데만 모든 행복이 존재함을 깨달을 때, 깊은 내적 외경심과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은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볼 때 생겨난다. 다시 말해, 그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헤아릴 때 나타난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경건한 두려움은 주로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사랑과 인애를 아는데서 흘러나온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자비를 느끼거나 소망할 때 생겨난다. 실로 그분의 자비를 인식하거나 기대하는 일만큼 우리 영혼에 그분을 두려워할 의무를 강력히 부과하는 것은 없다.” 스펄전 목사님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을 겁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두려워할수록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하다> 마이클 리브스 저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아기로 보내시고 인간이 되게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성육신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납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두려움이요, 이 두려움 가득한 사랑만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두려움들을 물리칠 수 있는 참된 두려움입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깊이 생각해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나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시는 기쁜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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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1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계 12장 1-6절)
돌아오는 토요일은 이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절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서 아기로 태어나신 날을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성탄을 앞둔 오늘 주일예배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심령에 성탄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어떻게 오셨는가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다양하게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요셉이라는 사람과 정혼한 상태였던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출생하셨음을 증거합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아기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이 강조됩니다. 사도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이 때가 되었을 때 아들을 이땅에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해주실 수 있는 분이요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본문도 여자가 낳은 아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메시야로서 이땅에 출생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다른 성경 본문과는 전혀 다른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아기로 출생하셨을 때 출생부터 엄청난 사탄의 방해와 시련과 압제와 핍박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아이를 낳은 여자를 묘사할 때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본문 1절)고 요한은 자신이 본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특별히 구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머리에 열두 별의 관을 썼다고 했는데 열 두 별의 관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관’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왕노릇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해와 달과 별로 여자의 외모를 그리는 것은 여자가 빛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여자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 비친 교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절)고 말씀합니다. 메시야 예수를 출산하기 위한 산통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산통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조성하신 목적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에 도달하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해산의 고통으로 점철된 역사였던 것입니다. 박해로 인한 고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 고통은 메시야를 이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습니다.
한편, 용 곧 사탄은 4절에 보니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4절) 했습니다.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다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공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땅에 던져진 별들은 사탄의 속임수와 유혹에 미혹당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해산한 아이를 삼키고자 했다는 것은 출생 직후부터 메시야를 없애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비단 출생 직후 뿐 아니라 사탄이 이후의 예수님의 전 생애 속에서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직후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려고 했던 계획, 지상 생애 동안에 끊임없이 예수님을 함정과 모함, 고난 가운데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그리고 마침내 저주의 십자가로 예수님을 처형하려고 했던 것 등이 예수님을 삼키려는 사탄의 공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탄에 대해서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3절)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일곱 머리와 열 개의 뿔과 일곱 개의 왕관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곱 머리는 사탄이 소유한 지혜를, 일곱 왕관은 세상 나라의 왕권을, 열개의 뿔은 사탄의 권력을 가리킵니다. 사탄을 일컬어 에베소서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일컬었을 정도로 사탄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죽음으로 왕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삼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5절) 올려갔습니다. 5절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말씀합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은 만국을 다스릴 메시야를 가리키고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을 가리키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려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이후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높아지심을 가리킵니다. 짧게 요약한 예수님의 생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땅에 인간으로 출생하시고 사탄의 방해와 적대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신 사명을 다 이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오늘 계시록 말씀에서 ‘여자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에게 가해지는 사탄의 핍박은 구약 첫 성경책인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을 미혹하여 범죄케 한 사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 즉 여자가 낳은 아들과 사탄의 후손이 원수가 되어 싸울 것인데 메시야가 네 머리를 상하게 하는 치명상을 입힐 것이고, 사탄은 메시야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사탄의 세력을 궤멸했고, 사탄은 예수님을 없애려는 일관된 생각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시자 사탄은 이제 교회를 향해서 집중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광야로 도망했고 거기서 하나님이 “천 이백 육십일 동안” 여자를 보호·양육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서 ‘천 이백 육십일’은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곧 3년 6개월에 해당되는 기간으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시대 혹은 신약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양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도 출애굽하여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서 양육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이 교회도 광야에서 믿음의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광야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양육하시기 위해서 예비하신 곳이 곧 광야며 광야 같은 인생길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에서 말했던 광야교회요 광야학교인 셈입니다. 여자는 광야에서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육도 받습니다.
이상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전쟁과 관련해서 한 가지 교훈을 적용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적 세계로만 구성돼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더 큰 실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수면 위에 드러나있는 것보다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는 빙하가 더 크듯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보이는 현실 세계보다 더 큰 세계이고 더 큰 영향력이 미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세계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이 치열한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땅에서 예수님도 출생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치루셨습니다. 메시야의 백성 공동체도 예수님께서 사탄의 핍박과 압제를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같은 이땅에 살면서 사탄으로 인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양육시켜주셔서 사탄을 이기게 해주십니다만, 우리의 영적 각성과 깨어있음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팀 캘러 목사님은 사탄에 맞서기 위한 세 가지 물음을 강조했습니다. 첫째, 적은 누구인가? 둘째, 전쟁이 일어나는 전선은 어디인가? 셋째, 이 전쟁에서 우리가 가진 최상의 방어는 무엇인가? 적은 당연히 사탄입니다. 셋째 질문 우리가 가진 최상의 방어 최상의 공격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에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면 전선은 어디입니까? 사탄의 전선, 사탄의 주요 공격 지점이 어디입니까? 이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복음서의 내용을 가지고서 설명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광야에서 시험하실 때 거듭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기 직전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죠.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서 광야로 금식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금식기도 끝에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탄의 공격 지점이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 전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언하셨는데도 사탄은 즉각 그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로 사랑하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계시고 전폭적인 수용을 받고 계심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듯이 우리도 동일하게 공격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신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정체성,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정체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차의 엔진으로 비유합니다. 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엔진이요. 엔진이 작동해야 차가 굴러갈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정체성이 제일로 중요한데, 우리의 정체성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엔진이 작동하려면 연료를 넣어야 하는데 좋은 연료도 있는가 하면 나쁜 연료도 있습니다. 엔진을 망가뜨리는 연료도 있습니다. 나쁜 연료는 두려움, 자신을 입증하려는 욕구, 남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 자신을 무절제하게 다 표현하려는 욕구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쁜 연료도 한동안은 우리 삶을 끌고나갈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탈진하게 되고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탈진과 실망으로 끝나지 않을 좋은 연료는 언제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 인생의 삶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마음에 굳게 붙들고 광야같은 인생길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탈진하지 않고 힘차게 계속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목사님이 국민일보에 쓴 좋은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인디언들의 이야기 가운데 ‘검은독수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검은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들곰 새끼들 틈에 넣어 두었다. 독수리 새끼는 들곰처럼 멀리 날지도 못하고 매일 흙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을 보니 검은독수리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들곰이 말했다. “너는 꿈도 꾸지 마, 넌 저런 멋있는 새가 될 수 없어.”
검은독수리는 자신이 하늘을 날아볼 생각조차 못하고 들곰처럼 살다가 들곰만큼 날다가 죽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생각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내 생각 속에 나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포기하면서 사는 사람을 볼 때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영적으로 높이높이 날 수 있는 엄청난 존재임에도 자신이 처한 환경만 바라보고 검은독수리 새끼처럼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만 산다면 결국 검은독수리처럼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설동욱목사 (국민일보에서 발췌)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을 사탄은 흔들어놓으려 합니다.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인간이 되어 오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성탄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이 성탄절에 더욱 흘러넘쳐야 할 이유입니다.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고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이 성탄절에 더욱 넘쳐야 합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기쁨과 소망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 (사 66장 1-4절)
최근에 <리추얼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았는데요, 재독(在獨)철학자 한병철씨의 철학에세이입니다. ‘리추얼’은 제의, 의식이라는 뜻으로 흔히 종교 제의, 종교 의식, 종교 예전 등에 사용됩니다. ‘리추얼’은 반복하는 특징이 있고 또 공동체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개인적, 관계적 영성이라기보다 깔려진 트랙 위를 반복적으로 달리는 것이요, 그것도 공동체가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분이 보기에 현대 사회에는 제의나 의식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전통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삶에 안정화를 가져다주는 제의가 온통 사라지고 오직 자기 중심적, 자기애적 숭배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이제는 공동체적이고 반복적이고 패턴화된 어떤 형식보다 개인주의적이고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수없이 뻗어나가는 탈형식이 압도한 시대가 되었다는 진단입니다. 진정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사람들이 형식을 제거해버렸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이런 말이죠.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마음이 중요하지!’
저자는 ‘리추얼의 종말’을 이미 2018년에 말했는데 코로나 시대가 ‘리추얼의 종말’을 완성했다고 봅니다. 디지털화한 소통, 그래서 소통이 많아진 것 같아 보여도 공동체 없는 소통이요 친밀하게 만드는 소통이라기보다 자기중심성을 뽐내는 소통으로 전락했다는 겁니다. 이분은 ‘리추얼의 종말’을 좀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분은 독실한 카톨릭신자는 아니지만 카톨릭 미사에 종종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리추얼의 향수를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이분의 말입니다: “노래와 오르간 연주와 향 연기에 취하면 나를, 나의 자아를 잊게 되죠. 그리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리추얼’ 그러니까 예배 예전도 중요성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전통적인 예배 예전에 따라 주일예배를 드립니다만, 많은 교회들이 탈형식화한 예배, 경배와 찬양,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면서 예배자 개인의 감정과 선호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예전의 형식은 답답하게 느껴지고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고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심리적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느꼈는지로 예배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직도 예전을 중시하는 종교가 있다면 바로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모든 것이 예전입니다. 새벽모임을 갖는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매일 읽어야 할 성경 본문이 있고 드려야 할 기도문이 매일 있습니다. 기도도 개인 기도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드려왔던 기도문으로 공동체가 함께 기도드립니다. 정형화된 틀로 새해를 맞이하고 1년이 지나 또 그 길로 걸어갑니다. 안식일을 맞이하는 예전도 있고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형식화된 규칙이 있습니다. 유대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안전한 길을 평생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역동성과 인격성과 관계성보다는 리추얼이 제공하는, 그러니까 종교 예전, 종교 의식이 완벽하게 셋팅돼 있어서 공간적으로 전 세계 유대교 공동체 안에 머무르게 되고 시간적으로 조상들과 연결된 채 안정감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종교 비판의 핵심이 바로 리추얼, 제의화된 종교, 형식화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선지자 이사야의 이사야서의 결론인 66장도 그렇게 시작하는데요, 제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참으로 신랄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소 도살자나 사람을 죽이는 자 같을 뿐이요,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자는 개의 목을 꺾는 자 같을 뿐이요, 드리는 예물은 부정한 돼지피를 드리는 것과 같을 뿐이요 분향하는 것은 우상에게 복을 구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형식적, 반복적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거부입니다. 제의주의자들은 수많은 제의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으면서 결국에는 “자기의 길을 택”하는 자들입니다. “가증한 것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의미 없는 반복이요 생동감 없는 형식이요 하나님이 아닌 제의 자체가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많이 행해지고 많이 불러져서 익숙해졌을 뿐,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오히려 익숙함을 불러오기보다 낯설음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복적 익숙함이 친밀함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빠질 수 있는 흔한 오류입니다. 자주 예배드리고 자주 기도드리고 자주 교회에 출입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고 직분이 커질수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이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익숙함이 하나님과 친밀해짐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가장 쉬운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자주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교회에 출퇴근하고 자주 기도하고 하니까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하나님도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이 마치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이르고, 그 편안함과 안정감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익숙함은 하나님을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더 이상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함께 동행하기에 걸끄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익숙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감을 빼앗아 갑니다. 3절 끝부분에서 리추얼주의자들 곧 제의주의자들은 결국 “자기의 길을 택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익숙해졌으니까 선택하는데 하나님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수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의 길’을 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제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추얼이라는 안전판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선택하다’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요, 즉 “자기의 길을 택하며”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4절에서도 ‘선택하다’는 동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선택을 보고서 결정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사용됩니다.
제의의 반복적 익숙함이라는 패턴에 빠져서 안정감에 도취된 채 ‘자기의 길’을 택하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를 전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한 제의주의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택은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유혹당하고 미끄러져서 파탄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의 유혹과 파멸을 선택하시는 겁니까? 우리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들이 먼저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말하여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현 국회의원 중에 김진표의원이 있습니다. 경력이 화려합니다.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역임했고, 5선 의원으로서 민주당 원내대표도 역임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장로이며 국가조찬기도회장도 역임했습니다. 이분이 국민일보의 신설 코너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된 성경말씀’이라는 코너에 첫 번째로 글을 기고 했습니다. 이분에게 나침반이 된 성경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분은 정치인으로서 매일 중요한 문제를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의 순간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큰 힘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자신의 인생에 나침반이 된 계기는 2002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재정경제부 차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먼저 직속 상관인 진념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에게 상의를 드렸더니 펄쩍 뛰며 반대했습니다. “정부 수석 차관이면 다음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재경부 장관 0순위다. 떠나는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설사 정권이 재창출된다 하더라도 당신을 쓰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정부의 지지율은 10%대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다 한사코 말렸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 중에 기도하면서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음에 든 확신은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로 간구하면서 옳은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남보다 빠르게 차관이 된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었고, 존경하는 대통령을 모시고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돼 ‘2002 한·일 월드컵’ 청와대 대응팀장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월드컵은 큰 성과를 냈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봤지만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대선 직후 노 대통령 당선인은 인사차 청와대를 찾았습니다. 김 대통령은 다음 정부에서 일할 좋은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에 처음엔 사양하시다가 딱 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진표 당시 국무조정실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노 당선인의 제안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직하게 되었고, 이후 참여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맡아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2004년 정계에 진출해 17대부터 현 21대까지 수원지역 국회의원에 5번이나 당선됐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사람의 능력은 보잘것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구하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답을 주십니다. 언제나 선택할 때는 눈앞의 유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인가를 살펴야 합니다.”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때 기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복적으로 시행되는 성전 제의 뒤에 숨어서 거기서 안정감을 얻고 언제나 자기의 길을 선택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의주의자들이 수많은 예배와 제의와 성전에서의 섬김을 하면서 얻게된 익숙함과 편안함이 하나님과 친밀해짐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자기의 길을 선택함이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 주간 코로나로 인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평일 새벽예배나 수요예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에 꾸준히 참여했던 성도님들은 아마도 많은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힘든 일인지 느꼈을 겁니다. 이것이 리추얼, 제의, 반복적인 예배 형식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러한 제의중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를 빼앗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반복적인 제의가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빠져서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착각입니다. 내가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영광 받지 못하신다는 생각이죠. 내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내가 뭔가를 하나님께 준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은 뭐를 아쉬어 하는 분,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은 뭐 아쉬어서 그러시는 것 같다는 잘못된 생각에 이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빠진 신앙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땅이 하나님의 발판, 혹은 발등상이라는 말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하나님이 원수들의 목을 짓밟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복자 왕이 정복당한 왕의 목을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거민들의 목을 밟고 계시다는 것은 땅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위한다고, 가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제의요 예배인데,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착각하는 제의주의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지는 2절에서, 참된 예배, 참된 경건, 참된 영성, 참된 하나님 섬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을 주목하시는지, 어떠한 사람을 내려보시는지, 어떠한 사람을 돌보아주시는지 말씀해주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둘째, 심령에 통회함이 있는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떠는 자,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굽어보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목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다보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들을 돌보시냐면 소위 세상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충족적 자기 만족에 겨운 사람들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빈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심령에 통회함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쓰인 단어가 마음에 장애가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다리를 절며, 가령 사울의 아들, 그러니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었죠, 그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것처럼 마음에 장애를 가진 자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마음이 깨진 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두들겨 맞아서 쓰러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들겨 맞아서 쓰러져있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떠는 자입니다.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까봐 두려워하며 떠는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경건을 점검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의미 없는 반복이 되거나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을 제거해주는 안전판이 되는 신앙, 곧 제의주의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보다는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신앙인지, 아니면 겸비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임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며 주복하시며 돌보시는 은총이 함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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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 (시 127,128편)
가정은 매우 소박하지만 인간 행복의 주된 요소입니다. 가정은 분명 소박한 행복입니다만 가정을 빼고 인간의 행복을 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나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하고 나라가 건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사회의 기초임을 인정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일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잘돼야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토록 소중한 가정이지만 가정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소박함이 가정을 소박하다고 느껴지게 만들어서 가정을 소홀히여기고 성공을 추구하던 시대도 있었고 가정 중심의 사람이 작게 느껴지게 만들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유지하는데 비용과 희생이 많이 드니까 아예 포기하는 젊은이들도 생겨났고, 바람은 있으나 현실적 여건이 어려워 가정을 이룰 꿈도 꾸지 못하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202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가구수가 664만 3,354가구로서 비율이 31.7%에 이르렀습니다.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와 가정의 파괴와 이혼 증가, 특별히 황혼 이혼의 증가와 수명 연장과 고령화 등으로 인해서 1인가구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가정이 행복의 주된 요소였을 뿐 아니라 대가족 가정 체제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었습니다. 반면 오늘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법률과 치안과 경제적 안정과 의료 발달과 건강보험체계가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의 역할을 대체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이 전세계적인 유행병, 코로나의 창궐로 입증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고대 이스라엘보다 보다 안전한 체계가 구축되었다고 생각되던 현대사회 역시 여전히 전염병에 취약하고 자연재해와 인재(人災)에 취약하고 불안정한 체제임을 우리는 오늘 코로나 시대에 여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7편과 128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관건이요 우리 인생의 참된 복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이 있는 인생이어야 헛된 인생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성취가 없는 헛된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으시면 아무리 세우려 해도 세워지지 않는 게 인생입니다.
127편과 128편은 내용적으로 이어지고 표현면에서도 두 시편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요 특별히 127편 마지막 절 5절은 “복되도다”(원어로는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이란...” 즉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8편을 시작할 때 그 ‘복있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28편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 이렇게 응답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127편과 128편은 복 있는 인생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다루고 있는데요, 복 있는 인생이란 가정이든 일이든 사회관계든 신앙생활이든 사회적 섬김과 봉사든 성취가 있고 열매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성취와 열매, 수고의 결실이 있어야 헛된 인생이 아닌 복된 인생입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고 내실 있고 결실이 있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인생 다 살아놓고 헛되다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시편 말씀은 바로 그 점을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편 127편의 저자로 표기돼 있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은 이 비결을 알았음에도 인생을 헛되게 마감했죠. 그가 인생 말년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전도서에서 인생에 대해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거듭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짙은 후회가 담긴 표현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후세에게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전도서를 썼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헛된 인생길을 살아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따라 살라는 권면입니다.
시편 127편에서 솔로몬은 전도서의 지혜를 다시 들려주는 듯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물론 여기 시편 1절에서 ‘헛되다’는 말과 전도서의 ‘헛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른 단어입니다만, 의미는 비슷합니다. 내실이 없고 결실이 없다는 점에서 헛되다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는데도 결실이 없고 잠자지 않고 애써서 깨어 있었는데도 임무 완수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노력한 만큼 꼭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과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만 노력과 수고로만 결과를 산출해내지는 못합니다. 인생이라는 건축을 해야 하는 우리 인생들이 세우고 그것을 지켜내려면 수많은 수고와 노력이 뒤따르겠죠. 남의 일이어서 그 수고와 노력을 자신의 일처럼 깨닫지 못할 뿐이지만 자신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써서 겨우 이루어가는 성취를 경험한 사람은 남의 세움에 대해서 가볍게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는 얼마나 큰 수고와 땀방울과 좌절과 넘어짐과 포기와 애씀이 있었을지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요, 이분이 교회를 개척하고서 20년 정도 되었을 때 하셨던 설교였습니다. 분당우리교회라 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회요, 단 기간에 큰 성장을 경험한 교회요, 그분의 아버지 역시 목회자였는데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40일 금식기도 중에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목사가 되어서 아버지가 못 누린 은혜와 열매의 결실을 이루어가고 있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 없이 큰 성장을 이룬 교회로만 대충 알고 있는데, 이분의 고백이 지난 20년간 숱한 어려움, 말도 못하는 어려움, 아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고통과 어려움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로또에 당첨이 된다 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해서 인생을 망친 예를 우리는 종종 언론보도를 통해서 접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무엇을 말하려는 겁니까? 우리가 세우려는 집, 인생이라는 집, 신앙생활이라는 집, 일의 성취라는 집, 행복의 기초로서의 가정, 하여튼 무슨 집이든 세워지려면 피나는 노력과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또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아니, 또 필요하다기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버리는, 인생 전체를 헛되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집도 세워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수고가 컸던 만큼 헛되다는 미련과 후회를 크게 일으키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과 개입이 없으면 어떠한 것도 든든하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127편 1절이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결코 집이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시면 아무리 파수꾼이 애써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세우고 지켜내려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하나님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집’은 반드시 가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집’은 도시, 성전, 왕국 등을 뜻하며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집은 가정을 포함해서 사회생활과 신앙생활 전반, 일의 성취, 인생의 세움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물론 이어지는 논의의 강조점은 가정에 있음은 분명합니다만 가정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편 127편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구약 시편을 가르쳐주셨던 김정우교수님은 이 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여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단잠을 잘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걱정근심을 버리고 단잠을 자더라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34절에 비추어서 해석할 것을 요청합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을 하고 소득을 얻고 일의 성취를 크든 작든 경험하려면 애를 쓰고 노력해야겠죠. 일찍 일어나고 늦은 저녁까지 일해야 그나마 소득이 주어지겠죠. 노력의 당연한 결과로서 한 데나리온을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20장 말씀처럼 하루 종일 수고해서 한 데나리온을 얻을 수도 있고 고용이 늦게 되는 여러 조건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는 오후 5시에 일터에 들어가 겨우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한 데나리온을 얻을 수도 있겠죠. 하여튼 이 모든 소득은 결국 주인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든 수고하고 애써야만 ‘떡’을 먹게 돼 있죠. 그래서 ‘수고의 떡’이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떡을 먹게 됨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내일 일을 염려하기보다 걱정근심 버리고 단잠을 잘 수 있음은 내일에 주실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놔두고 오늘의 괴로움과 수고는 그 날로 족하다고 여기고 내일도 동일하게 주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신뢰하면서 단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신앙, 즉 하나님의 손길과 개입이 관건이라는 것, 우리가 집을 세우려면 또 그 집을 지켜내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함인데요, 시편 128편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128편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원문 순서를 따르면, ‘복 있도다’로 시작하여서 복 있는 사람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인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란 그의 길을 걷는 자 즉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이다, 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시고 그의 집을 지켜주시는 사람인데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편 1편을 반복해서 듣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1편 1-3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간결하게 요약해 줍니다. 우선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는 사람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으로 쉽게 번역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면 집이 세워질 수 없고 집을 지켜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말 그대로 하나님으로 인정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8편 2절을 보십시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손이 수고해서 먹는다는 것은 수고의 대가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얻은 것들로 인해서 누리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일한 보상으로서 소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일의 보람과 성취를 얻고 그래서 온 집이 누리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요 복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해야 하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오늘 시편 말씀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떠한 집도 세울 수 없고,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떠한 집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러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그래서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하나님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결국에는 복이 되는 복된 인생입니다.
안산제일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고훈목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시골교회를 섬기는 K목사는 교통사고 후 목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승합차를 운전하며 먼 데 교인들을 실어와 예배드리고 또 실어다주며 교회를 25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주일예배 뒤 교인들을 싣고 시골길을 달리다 정신장애가 있는 무당의 손녀딸을 치었습니다. 사실은 치었다기보다 열살 된 그 아이가 뛰어들었단 말이 옳습니다. 무당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몸도 건강치 못한 목사가 무슨 운전을 한다고….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교회로 가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아이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더 큰 장애를 입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과 수천만원의 합의금을 준비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아이는 넉 달 만에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무당 할머니가 합의금을 안 받겠단답니다. 왜냐 하면 정신장애인 아이가 교통사고 후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전도된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이 보상금에 쓰라고 갖다준 돈은 교육관 건축자금에 보탰습니다. K목사는 그 후로 지금까지 그곳을 지키는 가운데 기도를 계속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http://cyw.pe.kr/xe/index.php?category=374706&document_srl=309977&mid=a39에서 발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코로나 시절을 더 추워진 겨울과 함께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해야 합니다. 세워주실 수 있는 권능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믿고 주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시는 복된 사람이 되시므로 주님이 세우시는 집,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 주님이 세우시는 일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1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욥 42:1-6)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자기에 대한 인식(self image)이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가요?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은 누구에게 꺼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대체적으로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정적인가요?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욥기서를 보면 처음에 욥은 모자람이 없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경건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모범적이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뭐 하나 모자랄 게 없는 풍요로운 삶이었습니다. 너무나 안정된 삶이었습니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루 아침에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급기야 자신의 몸에 욕창까지 들어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비극을 온몸으로 겪게 됩니다. 곁에 있어주었던 아내도 떠나고 고통의 참혹함 속에서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서 욥을 찾지만 그들도 위로해주기는커녕 신앙논쟁으로 욥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과 재난과 홀로됨 속에서 처절한 외로움과 억울함과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절규가 친구들과의 논쟁 가운데 욥의 입에서 쉴새없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관계 가운데서 형성되었던 욥의 높은 자존감은, 아마 그 자존감은 하나님께서 욥의 둘레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자존감이었을 겁니다. 자존감이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욥의 삶을 축복해주셔서 인생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셨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욥의 자기 인식은 굉장히 긍정적이었고 건강했을 것입니다.
이후에 극심한 고통과 재난 가운데서 오로지 병든 몸둥아리만 남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의 평온한 인생에 들이닥쳐 온통 혼돈과 불안으로 몰아넣은 비극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욥은 하나님께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친구들의 몰아붙임에 저항하면서 스스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고, 자존감은 바닥을 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 버틸 힘도 상실해버렸습니다.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죽음을 찬미하면서 다만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처럼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한 비극이 들이닥쳤다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적극적으로 항변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서 갓난아기로 태어난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으로 인해서 많은 것들을 울타리로 둘러친 복된 인생이 되었음을 모든 것을 상실한 후 욥은 깨달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고 취한 자도 여호와이시다는 주옥 같은 신앙고백과 신실함을 견지하던 그도 결국에는 마지막 남은 신앙과 경건의 유산도 다 상실해버리고 비참함 가운데서 절규하며 원망하며 탄식하게 됩니다.
친구들과의 지리한 논쟁 가운데 군데군데 주옥같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인생 가운데 일어난 일들을 해석해주고 설명해주어야만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음을 욥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과의 소모적 논쟁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해석해주심과 설명해주심 그리고 판결해주심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이윽고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십니다만 그 대답은 욥이 물었던 질문과는 무관한 동문서답인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하나님이 욥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를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반문이 계속되고 그 질문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욥의 모습을 비쳐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완전한 백기투항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은 언뜻보면 욥을 책망하시고 그에게 윽박지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 가운데 욥의 자존감은 더욱 낮아져서 더 이상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처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욥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반문들을 하나님의 윽박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 책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받아들이라는 강요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고 깨닫기에는 지혜가 모자라고 하도 작아서 크신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책망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들이닥친 재난과 고통의 무게를 하나님은 헤아려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도 그러한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도 고통 가운데 쏟아내었던 자신의 말들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연의 위엄과 인간의 이해할 수도 없는 창조주의 섭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욥이 다소 주눅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자신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 찾아와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크심에 압도당해서 뭔가 뜻이 있으시겠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인 때문에 비롯된 것이겠지, 라며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입니다.
3절만 보면 욥이 괜히 문제제기했다가 본전도 못찾았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후 4-5절을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5절) 본전도 못찾은 문제제기, 하나님께 절규하고 부르짖었으나 대답 대신 책망을 들은 것 같은데 욥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묻고 요청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면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실 거라는 기대감이 담겨 있습니다. 극심한 재난과 고통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왜?”를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그 이유에 대해서 대답해주기는커녕 그렇다고 위로해주기는커녕 한 마디로 하나님의 대답은 “너는 누구냐?”라는 거였는데요, ‘너는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냐? 그러한 너가 어찌 나의 행사를 이해하겠느냐?’, 뭐 이런 대답으로 들리는데 욥은 오히려 하나님이 알게 해주실 거라는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욥의 오랜 요구와 절규 끝에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욥기 38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의 대답을 구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욥의 대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욥은 ‘무엇 때문에?’, ‘왜 내게 이 고통이?’를 물었는데 하나님의 반문은 ‘너는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는 나에게 어려움이 찾아오고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재난이 들이닥치고 고통이 찾아오면 ‘하나님 왜 접니까? why me?’를 묻는데 하나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why not me?’, ‘왜 너만 예외가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너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일 뿐이요 진흙에 불과한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인생입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에게 우리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윽박과 억압과 강요 앞에서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는 미천한 존재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우리,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자존감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위상은 과연 무엇입니까? 벌레만도 못한 존재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인생길을 아무 것도 모른채 걸어가면서도 그래서 하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절규하며 질문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해줄 의무가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합니까?
4-5절을 보면 왜 하나님의 그러한 반문이 오히려 욥에게 대답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단서를 찾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의 크심을 체험하고 한없이 작고 나약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발견함과 동시에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질문하지 말아야지, 어차피 이해할 수도 없을텐데 물어서 뭣 하겠어, 라고 풀이 죽기보다 욥은 크신 하나님 체험과 한없이 작은 자신의 발견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묻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 욥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체험으로 인해서 자신의 한없이 작음과 연약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묻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하나님의 반문에 대해서 욥이 찾은 대답은 미천하고 부족하고 한없이 작은 자신이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사명자, 협력자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존재,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 하나님의 대화상대자,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자기 인식을 욥이 지금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반문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욥을 대화상대자로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할 자로 그를 격상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고 그렇게 형성되었던 경건한 신앙생활로도 나름 괜찮은 삶, 다른 사람에게 선망이 되는 인생,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며 살아왔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둘레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셨기 때문이었음을 모든 것을 상실한 후에 욥은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제 모든 것을 잃고 친구들의 몰아붙임과 심지어 하나님의 책망과 윽박과 같은 음성에 주득 들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까지 처한 욥의 깨달음은 오히려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특권이었고 그 결과 자신의 위상이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대화상대자요 하나님께 질문하는 자요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자라는 자기 인식, 자신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깨달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대답이 된 것은 아닐까요? 비록 여전히 욥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고통과 재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도 말입니다.
마지막 6절의 번역과 해석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기서 ‘회개한다’고 번역한 동사는 히브리어로 ‘나함’인데요 ‘~을 슬프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한다’고 번역했는데요, 무엇을 회개하냐면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한다는 말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만, ‘티끌과 재’라는 표현이 자존감이 바닥에 처한, 욥이 극심한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형적으로 표현한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욥기 30장 19절에서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라고 욥이 탄식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처한 상황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티끌과 재’ 같다는 것입니다. 잉여인간, 살 가치도 없는데 호흡이 주어진, 아무 쓸모도 없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는 비천한 존재라는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티끌과 재’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자기 인식, 자신에 대한 생각을 거둬들이고 생각을 달리하겠다라고 번역해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극심한 절망과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바닥에 처한 자존감을 드러내주는 그러한 표현이었고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이제는 달리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으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욥기를 전공한 어떤 복음주의 학자는 6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마련한 말들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에 대한 저의 생각을 달리하겠습니다"(안근조교수, 두란노주석)
하도 인생이 어려우니까, 이해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니까, 너무 고통스럽고 절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을 상실했으니까, 신앙이 있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티끌과 재’에 불과한, 살아갈 가치도 없고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인생 전체를 부정해버렸던 욥이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비록 대답은 듣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크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체험을 했고, 동시에 자신의 보잘 것 없음과 나약함과 지극히 작음을 경험함과 동시에 ‘너는 누구냐?’는 하나님의 반문에 대해서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요 내 인생에 들이닥친 일들을 해석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해주시고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 위해서 찾아와주시는 크신 하나님의 파트너요 대화상대자요 하나님의 벗이구나’는 깨달음을 욥이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무리 인생에 풍파가 찾아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인생을 해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티끌과 재’라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이요 다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은 이전과 이후과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자신의 인생에 든든한 울타리가 다 사라졌어도 ‘너는 누구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저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대화상대자요 하나님의 일의 협력자요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벗입니다, 인생에 풍파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만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서 자신을 비천에 처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저를 더 이상 ‘티끌과 재’라는 부정적 이미지와 자존감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결연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욥을 하나님은 완전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더 큰 축복으로 그의 인생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작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동반자로 여겨주시고 파트너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히려 감사한 욥을 하나님은 완전히 복구시켜주시고 더 큰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정체성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복시켜주시는 방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인정되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절대적 순종의 사람으로 믿음의 조상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창세기 22장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그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순종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된 것일까요? 그것도 이유이겠지만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당돌하기까지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성경학자인 존 레벤슨 하바드대학교 신학자는 구약성경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의 하나로 인간이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고 그 논쟁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도전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의는 죄인과 의인을 동일시하려는,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행동이 하나님답지 못하다, 불의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펴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이 있으면 어떠하시겠냐고 협상을 벌입니다. 그 수가 45명, 30명, 20명, 열명까지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니까 결국 아브라함이 포기하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문제제기하면서 했던 조심스런 표현이 바로 ‘티끌과 재’입니다. 창세기 18장 2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굉장히 예의 바르고 조심스런 모습입니다. 하나님 경외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결코 불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고 이의제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심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 하나님의 입장을 철회하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욥은 비참과 고통과 절망과 극심히 낮은 자존감 가운데서 자신을 ‘티끌과 재’라고 말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따지고 들면서 그럼에도 자신을 ‘티끌과 재’로 여기는 겸손함으로 주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티끌과 재’가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동참시키려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동반자요 파트너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땅에서도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명자요 동역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격과 은총을 깨닫고 여러분의 일상이 하나님께 동행하시고 하나님과 의논하시고 하나님께 질문하시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주역으로서 하나님의 사명자로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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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21일 동산교회 추수감사주일 설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눅 15장 25-32절)
감사하다는 말이 영어로 ‘Thank you’죠. 감사하다는 단어 ‘Thank’는 공교롭게도 생각하다는 단어 ‘Think’와 참 유사합니다. 우연이겠지만 감사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생각의 결과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구약의 여러 절기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특별한 시간으로 허락하신 절기들이 감사의 시간이요 축제의 시간임을 생각했습니다. 창조주께 돌리는 참된 영광, 참된 예배는 결국 감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호흡이 감사요 일상이 감사요 관계가 감사요 존재가 감사요 살아있음이 감사요 인도해주심이 감사요 소망 주심이 감사요 어려움 속에서의 인내가 감사요 환난 가운데서의 성장이 감사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인해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시다는 사실로 인해서 감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짧디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 허망한 마음 금할 수 없는 인생의 덧없음 앞에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 자체에서 감사가 솟구쳐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감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서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보아도 감사하지 않을 수만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감사하지 못함에 대해서 이해가 될 때가 많고 인간으로서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못하도록 보이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목사님의 감사의 기도를 들으면 탄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으로는 거부감이 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로 흔히 말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 아들 못지 않게 첫째 아들에게도 이야기의 비중이 있고, 두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등하게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두 아들 각각에게도 예수님의 시선이 쏠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감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은 지금이 감사할 상황입니다. 예상치 못한 너무 기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사랑했으나 자신의 곁을 오랫동안 떠나있던, 그래서 죽은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감사할 상황입니다. 둘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받아서 그것 가지고 살아보려고 아버지 품을 일찍 떠났다가 저 먼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서 배고파서 움켜진 배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지만 염치가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종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생각하고서 무거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집으로 향했는데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환대와 기쁨과 즉각적으로 아들로 복원됨을 경험하고서 어리둥절할 정도로 감사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겠죠.
세계적으로 어떤 유명한 소설가, 아마 소설 <적과 흑>을 썼던 스탕달로 기억됩니다만 이분이 예수님의 소위 ‘탕자의 비유’가 가장 탁월한 단편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가나 문학가들에게 둘째 아들 탕자는 매력적으로 보이나 봅니다. 최근에 어떤 기자가 이어령씨의 인터뷰를 엮어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 보니까 앙드레 지드라는 소설가가 <탕자, 돌아오다>라는 소설을 읽고 이분이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열매가 더 달았어요”
이어령씨는 둘째 아들이 훨 낫다는 겁니다. 길 잃은 양이 훨씬 훌륭하다는 거예요. 자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고 길을 잃은 양이 되었을 뿐이지,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목자 엉덩이만 따라가는 양 99마리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시키는 대로만 사는 효자보다 스스로 존재해보겠다고 마음 먹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갔다 돌아온 자식이 더 장하고 측은하게 느껴질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어령씨는 주장합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문학가로서 상상력을 가미해서 둘째 아들을 높이 추켜 올렸지만 성경 해석가들에게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크게 부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어령씨는 예전 책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제법 성경적 의도와 부합하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불효자의 이야기도, 허랑방탕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그네 된 우리 인생 이야기로 봅니다. ‘나그네’라는 말의 원래 뜻이 밖으로 ‘나간 이’를 뜻하죠.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간 이’ 곧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되어서 뛰쳐나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독립하여 멋지게 살아보려고 떠난 이야기입니다. 익숙해서 싫어진 고향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품이 그리 좋은지 모른 채 아버지의 간섭이 싫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담스럽고 마치 내 자유를 앗아가는 듯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모든 것이 행복할 걸로 생각했으나 막상 떠나보니까 찾아온 것은 궁핍과 허무뿐이었습니다. 새 출발하고자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지만 이내 타향살이에 지칠 뿐이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참함입니다.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채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남는 건 죽음뿐인 인생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스스로 성공하면 행복할 거라는 신기루에 속아서 사막 같은 인생길을 힘겹게 달음질했지만 참된 안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점점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지고 고향땅이 푸근하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엄습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철부지 아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두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둘째 아들은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받아들여줌으로 인해서 은혜와 사랑을 진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가 저절로 나왔을 겁니다.
문제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의 입장이 이해되는 면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 했나는 생각도 듭니다. 이해되는 면은 화가 날만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서 맏이이신 분들은 첫째 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첫째이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부모에게 혼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동생들의 잘못인데 첫째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을 것이고요,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을 아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카톨릭 예수회 신부로서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셨던 분입니다. 나중에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캐나다 장애인공동체에서 섬기며 사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독실한 카톨릭 가정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맏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순종적이고 충실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에 그의 동생들은 자유분방했습니다. 형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이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동생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했으면 심하게 질책 받을 문제 있는 행동에 대해서도 동생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도 부모님이 너그럽게 이해하시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동생이 터무니없이 큰 잘못을 저지른 뒤 아버지께 혼나지 않으려고 낱낱이 털어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동생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생을 잘 이해해주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동생의 친밀함을 보고 너무 부러워 동생을 질투했습니다. 장남인 자신은 끊임없이 착하고 곧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보상으로 존중은 얻었지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부모님의 친밀한 사랑은 늘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우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되었습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은 차가운 분노입니다. 원망의 가장 큰 문제는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난받을 일 없이 떳떳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공의롭고 의로운 원망입니다... 자기의가 강한 사람의 도덕주의적 분노입니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 법을 지킨데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입니다...원망은 우리 마음의 뜰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거침없이 퍼져 나가는 잡초와 같습니다. 그 뿌리가 깊이 박혀 다른 많은 뿌리와 엉키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냥 잡초가 아니라 독초입니다. 그 독성이 우리의 관계를 해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나우웬은 큰 아들로서 자신의 내면 안에 원망이 들어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원망의 감정이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표면에 드러나고 끌어오르게 되면 분노로 표출되는데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감정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고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는 첫째 아들은 분노합니다. 아마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그래서 동생이 이제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게 될 거라는 것보다도, 그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송아지조차도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보다도,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더 화가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은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앞으로 더욱 독차지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질투일 수도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에 심한 질투를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모든 면에서 동생보다도 더 훌륭하고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첫째 아들의 감정은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교의식도 있고 경쟁의식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면 깊은 곳에 원망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분노로 폭발한 것처럼 보입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원망의 반대말입니다. 삶을 선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을 원망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한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내 것’과 ‘네 것’을 뛰어넘어 삶의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나우웬은 누구나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나의 감정과 느낌이 여전히 상처받고 원망에 차 있을 때도 나는 감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늘 원망과 감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두움 속에 나타나셔서 집으로 오라고 부르시며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극복하고 감사를 선택하는 비결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비교하지 않는 풍성한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우리를 다 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오 우리는 다 같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두려움과 질투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원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하나님을 확고히 신뢰하는데서 감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사랑, 영원한 사랑, 풍요한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묻고 나우웬이 답하다>, 크리스 프리쳇 저, 230-9쪽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두 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이십니다. 반면에 오늘 첫째 아들은 본문 29절에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겨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실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 당신의 아들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약 아버지와 둘 사이에서 그를 선택한다면 자신도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잃었던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곁을 떠나고 방탕한 삶에 잃어버렸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멀리 떨어졌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아버지에게서 이미 멀리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둘째 아들을 받아들여주신 아버지는 첫째 아들 또한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은 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머지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형이나 동생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모두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오늘 둘째 아들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집밖에 서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아버지의 참된 풍요로운 사랑 밖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첫째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함께 이 형제자매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누고 누리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오늘 추구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첫째 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원망이 있었습니다. 질투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즉 편애한다는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지 못하겠다는 욕심과 이기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정 감사해야 할 때, 마땅히 감사해야 할 순간에도 감사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해를 살면 살수록 목회자로서 저 자신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창조주를 향한 감사의 찬양,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상황과 관계없는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오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므로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 아버지의 풍요로우신 사랑으로 인한 감사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전환점 삼아 남은 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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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사랑은 어떻게 싹이 트는가? (살전 4:9)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 모두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자매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형제자매로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자녀들이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애(愛)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317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자매’라는 단어는 26번 사용되었는데요, ‘형제’라는 단어는 단순히 남자 형제만을 가리키지 않고 ‘형제와 자매’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데 ‘형제’가 사용된 것입니다. ‘형제자매’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가리키면서 가족으로서 서로 서로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분은 여러분의 형제요 여자분은 여러분의 자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를 형제자매공동체로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듯이 교회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우애하고 사랑해야 함을 뜻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진짜 형제임을 깨닫고 사랑하고 먼저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필요할까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확증해주시는 것은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집이나 토지, 가족마저도 복음을 따르기 위하여 포기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기도 하시고, 가족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할 경우에는 가족 대신 예수를 택할 수 있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가족에게만 베푸는 좁은 사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도 해주십니다. 이것들이 다 “나(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현세에서도 100배나 되돌려 보상을 받습니다.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와 자식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뿐이므로 100배 보상 받는 항목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100배 많은 자식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항목에는 아내는 없습니다. 괜히 아내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버리는 항복은 영어로 Or입니다. ‘~나’인데 반해서 100배 돌려받을 항목은 ‘And’입니다. 이것과 그리고 저것도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목록 중에 하나이면 되지만, 얻게 되는 것은 목록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 버리는 것보다 믿음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100배 돌려받았습니까? 어느 하나를 버렸는데도 이 모든 것을 100배나 돌려받았습니까? 형제자매가 100배나 늘었습니까? 늘었죠. 예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교회공동체를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처럼 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믿음 때문에 가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형제자매 혈육을 포기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를 보상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자매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로마서 14장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형제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에 관해서 한 사례를 말씀해줍니다. 로마 교회 내에 소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하나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형제공동체로서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아마 로마교회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아마 소수의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전부 이방인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전부 유대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나 대개 크게 보아 그렇게 생각하면 90%는 맞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논쟁이 있었던 듯합니다. 가령, 고기를 먹는 게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할 때 신전에서 제물로 사용되던 고기가 시장에 나와서 유통되기 때문에 꺼림칙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 그것을 코세르라고 하고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코셔 푸드라고 합니다. 상당이 까다롭습니다. 당시에도 로마교회 내 유대인 성도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했고 양심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던데 반해서 이방인 성도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 음식 문제뿐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문제와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두고도 티격태격 싸움이 있었던 듯합니다. 소위 믿음이 강한 자는 규정과 율법에 꼼꼼히 신경을 쓰는 이들을 향해서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하게 되어서 그러한 규정에 매이지 않아도 됨에도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멸시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방탕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요 조심성 없고 사려깊지 못한 이들이요 우상숭배의 가장자리를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멸시하다’, ‘업신여기다’(한글 개역개정)이고,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행해서 일관되게 ‘멸시하다’, ‘업신여기다’ 혹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를 사용합니다.
형제자매인데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고 진영이 갈려서 서로를 향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로마교회의 문제를 사도바울은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들어서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기본 입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였고 이방 신자들과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 진영에 대해서 어느 한 쪽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옳고 믿음이 약한 자가 틀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을 더욱 엄격하게 책망합니다. 로마서 14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풀어서 설명해보면 ‘만일 네 형제나 자매가 네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다면, 너는 더 이상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반목하는 두 진영 당사자들에게 서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논쟁과 싸움을 그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니까 관용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싸움을 그치라고만 했다면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집에서 자녀들을 키워보면 형제자매끼리 싸우기도 한단 말이에요. 싸운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형제자매가 아니라거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견 다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어요. 그저 형제자매니까 서로 관용하고 사랑하라고만 말할 수는 없어요. 바울은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들어서 형제 사랑을 교훈합니다.
우리가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향해서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너는 또 어찌하여 네 자매를 멸시하느냐?”고 말하면서 이렇게 싸우는 이들에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라고 권면합니다. 그 미래, 우리가 직면할 미래란 어떤 미래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설 미래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석에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싸움과 다툼과 하나되지 못함과 사랑하지 못함,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날이 있음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에 관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핵심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저 위협으로 받아들이라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날에 샅샅이 심판하실 것이니 형제자매로서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은 신학적인 것입니다.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투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 사랑의 측면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핵심은 로마서 14장 4절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것이 결정타입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님이신데, 우리는 그분 앞에서 심판받고 판단받게 될 터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를 세워주실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는 말씀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를 세워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소위 새창조를 완성해주시겠다는 것이요, 새창조된 새하늘과 새땅 곧 하나님이 지으시는 회복된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부활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한 신학자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는 것이 참말입니
까?” 이 질문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겠어요? 당신이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가 벗이 될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진정한 형제와 자매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를 가져다주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아직 부활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열매임을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형제자매임을 자각하고서 로마서 14장 19-20절 말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의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너무나 기이하고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한데 어울려 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신학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알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셔서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형제자매 가정공동체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기억해보고 그리고서 계속 서로를 향해서 비난할 것인지, 판단할 것인지, 혹은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소망이 현재적으로도 역사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고. 로마서 14장 설명은 책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에 수록된 리차드 헤이스의 설교에서 대부분 가져왔습니다)
로마교회와는 달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이러한 칭찬을 듣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해서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데살로니가 도시는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입니다. 지금도 큰 도시입니다. 학폭으로 한국에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었던 배구 선수 이재영선수 자매가 간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에서 이어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거기서 대략 3개월 정도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핍박을 피해서 베뢰아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 추정하기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던 때는 데살로니가를 떠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고린도에서 썼을 것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하고 핍박 때문에 부랴부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야 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들려온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형제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신생교회가 형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7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었고 환난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전해준 바울 일행을 그들이 본받은 것이었고 그로써 주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 사랑에 있어서 칭찬 듣는 교회,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 그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된 신생 신자들이었으나 복음의 말씀을 받고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른 복음의 신앙으로 굳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재림 신앙, 부활 신앙의 소망을 가지고 환난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을 전해준 바울과 그의 동료 실라와 디모데를 본을 받음으로 인해서 결국 주님을 본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해준 사람, 먼저 믿은 사람,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눈여겨 봅니다. 그리고서 그대로 따라하는 겁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니까 새로 들어온 새가족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이치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특별히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도할 때 어떠한 자세로 했는지 데살로니가전서 2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자기가 유모 노릇을 했다, 유모 같이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유모가 자녀들을 돌보듯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2장 11절에서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영적 아버지를 얻은 것이었고, 바울을 통해서 유모가 갓난 아이를 돌보는 돌봄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임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형제자매공동체요 하나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배움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목회자들과 먼저 믿은 성도들에게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죠. 반면에 로마교회는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모습은 서로를 향한 판단과 비판, 멸시와 업신여김 속에서 나뉘어져 다투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서 주님의 몸이 훼손당하고 있고 교회를 한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요 형제자매공동체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일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칭찬 듣는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 서로를 말 그대로 형제자매로 여기는 형제자매애로써 하나되는 교회,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직분자들은 직분자로서, 먼저 믿은 성도들은 먼저 믿은 자로서, 새로운 가족 새가족에게 형제 사랑의 본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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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의 가족 (막 3:31-35)
일상으로의 단계적 회복, ‘위드 코로나’로의 방역정책의 전환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11월 첫째 주일입니다. 최근에 또다시 확진자 수가 증가해서 우려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일상이 소중하기에 코로나 극복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긴 코로나 기간을 통과하면서 심각하게 물은 질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상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두려워하는가?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질적 질문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진정한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나누는 교제일까?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해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추구하게 된 본질적 물음입니다.
싱글레이 퍼거슨이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열 세 편의 서신을 교회들에게 보냈다고 말합니다.그는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얻게 되는 복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교제, 죄의 용서, 과거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 및 수치심의 해소, 죄의 지배 및 어둠의 권세로부터 구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영생의 확실한 소망,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라는 새로운 갈망. (<우리가 교회다>, 싱글레어 퍼거슨 저, 56-7쪽)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한 가족을 이루어 맏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해가는 것, 이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이라 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십자가, 인류 역사상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 승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교회뿐 아니라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진행. 이러한 소위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시려고 하셨던 것인가, 등의 질문도 해봅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심이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주심, 그리스도 사건은 우리에게는 소위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힘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로써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요?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비전은 교회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복음서에서 교회란 단어는 단 두 곳만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인데요, 중요성은 단연 16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직접 나온 교회에 대한 진술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은 단 한번 뿐이지만 그 중요성은 횟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곳곳에 세웠고, 오늘에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의 교회로 집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인데요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는 거의 ‘카할’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단어였습니다. ‘카할’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합이나 모임 혹은 회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교회 곧 ‘에클레시아’는 세속 헬라어의 의미(정치적 결사체로서 민회나 집회 등)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님에게로 모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예수님의 신부 공동체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려는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모이게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가족을 조성하고자 함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모임, 예수님을 하나님의 맏아들로 세우고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서 맏아들을 닮아가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 한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음으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내다보신 비전이요 꿈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일 것입니다. 가족이 우리 곁을 먼저 떠나는 것이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유입니다. 편하고 친밀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함께 함이 너무 자연스럽고 가족을 위한 생각과 기도가 가장 앞서게 만드는,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의 가족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선물로 받아 부모 자녀로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들은 형제자매를 이룹니다.
이러한 가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정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해체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마가복음 12장 25절입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한 개인으로서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서로 형제자매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아버지의 맏아들이신 아들 예수님을 맏형으로서 닮아가고 따라가는 형제자매 공동체,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되고 형제자매가 하나 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나려고 했는데 예수님 주위에 둘러싼 무리로 인해서 밖에 있는 채로 예수님께 보고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35절)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렛에서 이곳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자매에게 다소 매몰차게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낯설어보입니다만 마가복음 맥락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당시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도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오려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붙든다’는 말은 체포하다는 뜻입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뒀는데 그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집에 데려올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몰찬 반응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했다기보다 가족에 대한 본질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 영원한 가족, 종말론적 공동체는 혈연 중심의 가족을 탈피해서, 그러한 가족은 이땅에서뿐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체될 것이고, 이땅에서의 가족은 영원한 실체인 참된 가족 하나님의 가족을 가리킬 뿐이고, 이땅에서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가정을 통해서 진정한 가정, 하나님의 가족에서의 친밀한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려는 것이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가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입니다. 가족 간의 친밀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친밀한 가족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애, 형제자매애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실현해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 서로를 섬기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공동체, 이로써 함께 복을 누리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행복해지는 사랑의 공동체, 친밀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라고 우리를 한 교회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어제 라디오 극동방송을 운전하다가 들었는데요, 한 성도의 간증이 나왔습니다. 이분이 불교 집안 출신이고 시집 온 남편 집안도 불교 집안 출신인데 아이들이 먼저 교회에 나가게 되고서 이분도 자녀 친구 엄마의 전도 받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이후 복음으로 변화된 분입니다. 네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인데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둘이 사춘기가 찾아왔는데, 둘 다 엄마 말을 너무 안들어서 속상하고 힘들어하던 때에, 극동방송에서 한 목사님의 자녀양육에 관한 특강을 들었는데,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자녀를 부모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자녀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잠시 기르라고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에 회개가 되더라는 겁니다. 회개를 하고나니까 자녀들을 대할 때 좀더 여유있어지고 자녀들도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렇게 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영원할 것같은 배우자와의 사랑도 잠깐이요 이땅에서뿐이고 애지중지 기르는 자녀들도 마치 내 것인양 ‘내 새끼’하고 기르지만 자녀들 역시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의 가정도 잠깐이면 해체되고서 진정한 가족, 영원한 가족이 드러날 것인데 그 가족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이루어진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교회를 향한 꿈과 비전이라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 교회가 진정 가족의 친밀함과 사랑으로 형제자매공동체를 이루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에 가족 문화라는 게 있는가? 가족인가? 아니면 주고 받는 거래의 관계인가? 사랑과 섬김의 관계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사랑보다는 정죄와 판단인가? 사랑보다는 미움과 싫음인가?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동산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새 창조함을 받아 새로워진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각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결정적입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서 새 창조를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정체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동산교회 멤버십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동산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한 가족 구성원이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을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버세대는 우리의 부모님이고, 다음세대 교회학교는 우리의 자녀들로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부모님을 위한 기도, 교회의 자녀들을 위한 기도는 있습니까? 남녀전도회는 형제자매공동체입니까? 어떠한 소그룹 모임이든 한 분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자매 사랑으로 모입니까? 코로나 시절에 모이지 못하고 있는 구역 소그룹, 지역별 세대별 모임은 가족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모이기를 귀찮아하고 무관심한 모임, 아예 모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가족 공동체를 이루시려는 게 그분의 비전이요 예수님의 꿈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슨 유익을 취하려고만 생각하지 가족을 이루려는 생각은 아마 꿈에도 해보지 못했을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의 꿈,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친밀한 형제자매 공동체가 되므로 하나님의 꿈, 예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2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이라’, the Family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어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준비되어가고 있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로서 함께 성장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큰 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제임스 패커라는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판단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아보라. 만일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예배와 기도, 인생관 전체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그가 기독교를 잘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교회다>, 싱글레어 퍼거슨 저, 26-7쪽)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모임과 예배는 가족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으로서 무관심하지 말고 서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 아가페 사랑, 자기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먼저 믿음의 자녀들 서로에게 이 사랑을 나눕시다. 그리고 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함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씁시다.
이러한 비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비전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 가족 같은 친밀함과 따뜻함이 있는 교회로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의 행복으로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동산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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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3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기쁨과 즐거움의 복 (사 56:1-8)
제가 몇 주 전에 설교하면서 율법에 대해 깨달은 것을 잠깐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구약성경 특별히 율법의 말씀은 배워서 익히고 암송해서 기억해야 할 말씀이라기보다, 물론 그러한 학습도 어느 정도 필요하겠습니다마는 몸도 알고 있는 너무나 자연스런 자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떻게 대접받고 대우받으면 자신이 좋아하는지 배우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압니다. 상대방에게서 사랑 받기를 원하고 친절하게 대우해 주기를 원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그것을 명령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주께서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창조해주셨으니까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들도 전부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우리 존재에게 유익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명령입니다. 창조주가 제정하신 창조의 법칙이 율법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자연법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문명화되어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문명화되기 이전에도 인간 본성에 부합한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키라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면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제정하신 법칙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만 살면 복을 얻는 말씀입니다.
행복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났을 때 사람에게는 행복이 미리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행복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 오만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천사들이 회의를 열어 사람에게서 행복을 회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어디에 감춰 두느냐 하는 것이 천사들의 고민이었습니다. 한 천사가 제안했습니다. "저 바다 속 깊은 곳에 숨겨 두면 어떨까요?" 천사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른 천사가 제안했습니다.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숨겨 두면 어떨까요?" 이번에도 역시 천사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탐험 정신은 정말 대단해요. 제아무리 높은 산 위에 숨겨 두어도 찾을 거요."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천사장은 결론을 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둡시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탐험 정신이 강하다 해도 자기 마음속에 행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좀처럼 어려울 테니까." ('행복한동행' 2006년 5월호 (http://www.adventist.or.kr))
이 재밌는 이야기를 기독교적으로 적용해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부합한 자연법과 율법에 담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보약이 되어서 진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체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하나가 안식일 명령입니다. 십계명 제 4계명이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안식일은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쉬셨음을 피조물인 우리가 따라하는 날입니다. 안식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쉼이고 쉬기 위해서 멈춤이요 그침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입니다. 생업을 중단하는 날입니다. 쉬라는 것입니다. 일과 생산을 위해 소비했던 시간을 그치고 비생산적이긴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따로 정한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쉼을 누립니다. 이것이 창조주가 제정하신 창조의 리듬이요 안식일법입니다.
7일을 한 주간의 사이클로 정하고 마지막날을 안식케 하신 것입니다. 6일간 수고하고 애쓰고 나서 하루를 쉬는 날로 정해야 또 다음 한 주간을 힘있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인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 몸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율법이 바로 안식일 명령입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사이클은 창조의 리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리듬에 따를 때 몸이 최적화되어서 창조주의 의도대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창조주께서 창조를 다 마치신 후에 7일째 되는 토요일에 안식하셨던 것입니다. 일을 그치고 안식하신 그 날을 복을 주셨다,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날이 안식일이요 거룩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처럼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에 복이 깃든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날을 특별히 선정해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자신을 위한 6일간의 삶을 그치고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날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도 안식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이 복주신 날이 안식일이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시려는 걸까요?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게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을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려고 하나님의 집에 나아오는 이방인에게도 기쁨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라도 율법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리듬을 따라, 창조주가 정한 시간의 주기에 따라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따라 쉬고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에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이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을 복주십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안식일의 가장 주된 특징입니다. 이사야 58장 13절-14절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 안에서 이 안식일에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고 이 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운 날이라 여기면 하나님이 즐거움의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날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바로 지키면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받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생업을 중단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안식일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6일간 생산적으로 효율적으로 일하며 지내면서 혹시라도 탐욕의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유익만을 탐하며 살았는지, 이러한 방향을 그치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회개의 멈침이요 회개의 그침입니다. 자신의 결손과 부족만을 채우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성신학자 미르바 던의 <안식>이라는 책에 보면, 안식일의 그침에는 일을 그침, 생산과 성취를 그침, 근심과 걱정과 긴장을 그침,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침, 우리의 소유를 그침, 우리의 문화 순응을 그침,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침 등의 그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죄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치는 날입니다. 지난 6일간 자신을 위해 살면서 자칫 범했을 수도 있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돌아서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그치는 날인데 지난 6일간 쌓였던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고민도, 받았던 스트레스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미움과 무관심과 질시와 증오도, 일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도, 세상에서 경쟁에 치인 분주한 마음도, 그리고 다음 한 주간에 또 들이닥칠 여러 긴장과 걱정과 두려움 등도 안식일에 다 중단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오늘을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슬을 끊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가져올 것으로 지레 겁먹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해방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그치고 중단하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얼킨 것들로부터 해방받고 자유를 얻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중단과 그침과 멈춤을 통해서 해방받는 날입니다. 지난 6일간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 각종 어려움이나 유쾌하지 않은 경험들을 가슴에 품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 때 특별히 초대한 손님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을 괴롭힌 간수 세 명을 취임식에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감옥의 문을 나서며 내리쬐는 햇볕을 느꼈을 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이전의 고통과 원한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몸은 감옥에서 나왔어도 영혼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만델라가 시련을 이겨내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과거의 매임과 얽힘에서 자신의 영혼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몸은 자유로워도 마음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버드 인생특강> 장이츠 저, 162-3)
이처럼 안식일은 지난 6일간 아무래도 자신의 모든 것에 집중하고 살았던 시간을 중단하고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로부터 해방받고 하나님에 나아가서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집중하고 우리의 소유를 더욱 늘리고 우리를 위해 살면 즐거움과 행복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나를 초월할 때, 나를 벗어날 때, 나에게서 해방받고 다른 사람에게로 나의 시선과 관심을 돌릴 때, 그들을 섬길 때에 오히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바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날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안식일 논쟁에 보면 결론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고, 또 안식일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질병을 치유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등의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날임을 예수님은 강조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나를 위해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욱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기쁨과 즐거움의 복이 이렇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기쁨과 즐거움의 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모인 공동체, 즉 예배와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복이 임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이요 소망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므로 창조의 목적이 달성되고 피조물로서 최고의 가치로 고양되는 시간입니다. 예배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붙잡혀서 그것에 발목잡혀있고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 모든 긴장을 풀고, 이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므로 참된 자유와 거룩함을 회복하고 새 힘을 얻습니다.
특별히 주일에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해주시는 영혼의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열리는 향연이요 공급받는 영의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에 특별히 예배를 위해서 따로 시간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교제를 즐기면서 하루를 온전히 지키고 보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이로써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돈독해지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예배와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공동체로 모여서 각 지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아는 자들로서 사랑하는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적인 필요가 충족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아울러 미래를 내다봅니다. 미래에 우리는 모든 일의 완전한 그침이 있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안식이 있을 것이요,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 앞에서 열리는 영원한 향연과 축제가 있을 것이요,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을 우리는 안식일 예배 때 고취시켜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다가올 더 큰 기쁨을 미리 맛보고 내다보는 것이빈다. 안식일이 마침내 성취될 때 우리의 연약함은 영원히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영원히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주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 끝없는 기쁨의 향연과 축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복주어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유대인 성경학자인 체바트라는 분은 성경적 안식일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표징이 된다는 말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된 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안식일이 아니고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은 이 모든 안식일의 의미를 계승하고 거기다가 예수님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기쁨이 덧붙여진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의 기본적인 의미를 계승해서 그침과 쉼, 하나님을 바라봄,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위에게로 다른 사람에게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예배하고 공동체로 모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첫 창조의 완성된 안식일이 우리의 죄로 인해 첫 창조가 얼룩져버렸기에 새 창조가 시작된 부활하신 주일에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축하고 구원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시작과 더불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새 창조의 완성을 소망하며 고대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오늘 주일에, 매 주일에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