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25일 동산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눅 1:46-56)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셨다는 소위 성육신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와 같이 아기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좋은 영향과 확신을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아기를 잉태한 젊은 여인 마리아의 마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한 위안과 확신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인 마틴 로이든 존스 목사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묵상하고서 성육신 메시지에는 3가지 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성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최고의 사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심을 보여 준 최고의 사례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메시지에 담긴 두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이 무엇을 보여주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과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을 환히 드러내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는 않으셨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잊으신 듯 보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잊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고 많은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보시는 분입니다. 영원한 현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계시지 않으시고 시간의 창조주로서 시간 바깥에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보고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나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셔서 마침내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베푸시기까지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 기다리는 기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약속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약속하신 것을 잊으셨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패배하는 것도 허락하시기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2천년이 걸렸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잉태된 아기에 관한 소식을 전달 받고 오늘 본문의 찬양을 부르기까지 2천년이 필요했습다. 그 2천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고, 나라가 멸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고, 마리아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오늘 그 시간에도 로마 제국에 압제에 시달리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백한 패배를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 같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을 받았으나 패배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끝까지 붙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간간이 계속해서 격려하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어느 때는 약속하신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하심으로써 약속을 붙들고 가도록 격려해주십니다. 비록 소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물방울들을 끊임없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며 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한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해주시고 그 약속을 붙들고 나가는 그들을 인도해가십니다.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아 잊으신 듯해 보이고 심지어 약속과는 정반대로 상황이 이루어져서 패배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작은 격려들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리고 약속을 반복해서 말씀해주심으로써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한없는 자비와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육신 메시지에 담긴 세 번째 원리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거라는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이 그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소망, 우리의 낮은 몸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거라는 영광의 소망,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될 거라는 소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아서 더 이상 우리의 눈에 눈물과 고통이 없게 될 거라는 소망, 이 모든 약속을 하나님께서 또한 신실하게 이루어주실 것임을 우리는 성육신을 통해서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겁니다. (책 <마틴 로이든 존스의 내 구주 예수> 100-137쪽 참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 마리아의 심정 변화를 들여다보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한 세 가지 성육신 메시지의 원리에다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50절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성육신이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이라는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두려워합니까? 두려워하는 이유가 수도 없이 많고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내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고, 두려움 없이 미래로 내달리는 사람보다는 현재의 두려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괜히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려 365번이나 말씀한다고 합니다. 매일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365번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두려움의 문제는 언제든 우리를 습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본문은 소위 ‘마리아의 찬가’ 혹은 ‘마리아의 찬양’이라고 불립니다. 아마 십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아라는 가냘픈 여인에게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너는 곧 임신하게 될 것이다”는 소식이 전달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이미 결혼할 상대가 정해져있던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겁니다. 이 소식에 대한 마리아의 첫 번째 반응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너무나 당황스럽고 놀랍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 법한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고지를 전달받고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여느 십대 여자 아이처럼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놀라고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겁니다. 비록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임신 소식을 알리기 전에 말한 인사말이 “은혜를 입은 자야”였고 또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했지만 마리아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1장 28-31절을 보겠습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처럼 마리아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었고 자신에게 어떠한 미래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과 무서움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상태죠.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천사가 전한 소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떠나자 마리아가 무엇을 합니까? 자신의 친척이었던, 그리고 최근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를 찾아갑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유대 산골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방금 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임신의 소식을 들었던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논의하고 상의하는데 그들이 적격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도 최근에 임신했는데 나이가 많은데다가 오랜 불임이어서 불가능한 임신을 한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낳은 아들은 세례요한이죠. 엘리사벳은 자신처럼 불가능한 임신을 하게 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1장 4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안정을 되찾은 마리아는 오늘 본문의 소위 ‘마리아의 찬가’를 부르게 됩니다. 마리아는 상당히 사려 깊은 어린 여인이었고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약속하신 구원의 위대한 약속을 자신을 통해서 이루실 거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자신의 몸에 잉태케 된 아기 예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54-55절을 보십시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잊으신 것처럼 보인 하나님께서 오랜 기다림의 끝에 약속을 이루어주시려고 기억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약속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무서움을 가져다 주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은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소위 하나님 경외의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50절의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나서 생겨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게 겁에 질려서 생겨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죄를 짓고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버리는 그러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고서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깨닫고서 마음에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입니다.
마리아가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환영할만한 일이라기보다 어느 때는 인생의 큰 도전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마 마리아에게도 ‘왜 하필 나야’,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운 마음뿐이었겠죠. 천사의 소식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소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큰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되었던 듯합니다.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엘리사벳의 말에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어린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마리아가 깨달았고 그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아기 예수를 임신케 한 것은 비단 한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정도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어마어마한 큰 일을 자신에게 행하심으로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인류를 구원해내기 위해서 큰 일을 행하신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고백이 뒤따릅니다. 전능하실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한 것입니다. 전능하심과 거룩하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으면 이 큰 구원을 이루어주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셨고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러한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마리아에게 지금 있는 두려움은 비겁한 두려움도 아니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자신의 인생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데서 비롯된 경건한 두려움이요 하나님의 경이로운 속성을 깨닫고 나서 생겨난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거룩, 위엄, 영광, 위대함과 영원하심을 어느 정도 깨달을 때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겁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하나님을 겁낼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도록 만드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은 사탄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탄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은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운 두려움이 생겨나게 하십니다. 결국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꺼이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2장 40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함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구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참되고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닌 달콤한 맛을 체험하며 그분의 은총 가운데만 모든 행복이 존재함을 깨달을 때, 깊은 내적 외경심과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은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볼 때 생겨난다. 다시 말해, 그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헤아릴 때 나타난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경건한 두려움은 주로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사랑과 인애를 아는데서 흘러나온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자비를 느끼거나 소망할 때 생겨난다. 실로 그분의 자비를 인식하거나 기대하는 일만큼 우리 영혼에 그분을 두려워할 의무를 강력히 부과하는 것은 없다.” 스펄전 목사님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을 겁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두려워할수록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하다> 마이클 리브스 저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아기로 보내시고 인간이 되게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성육신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납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두려움이요, 이 두려움 가득한 사랑만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두려움들을 물리칠 수 있는 참된 두려움입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깊이 생각해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나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시는 기쁜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863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