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1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손바닥 (사 49:14-18)
최근에 ‘현대판 장발장’ 사연이 온라인에서 화제입니다. 30대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지난 10일 오후 인천의 한 마트 식품 매장에서 우유 2팩과 사과 6개 등 소량의 식료품을 훔쳤습니다. 해본 적이 없는 ‘어설픈 절도’여서 금세 발각됐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택시를 모는 이 아버지는 당뇨와 갑상선 질병을 앓고 있어서 6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엔 홀어머니와 7세 둘째 아들도 있었습니다. 경찰은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돼 있었지만 네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이었지만 우리 사회의 훈훈함을 경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트 대표는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고발이 아닌 선도 차원”이라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쌀과 생필품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들 부자를 훈방 조치하고, 돌려보내기 전 식당으로 데려가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씩 시켜줬습니다. 또 아버지의 일자리를 알선하고 아들에게 무료급식 카드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한 경찰은 MBC 인터뷰에서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시민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데리고 간 식당에 느닷없이 들어와 하얀 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떠났습니다.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시민은 아버지와 아들이 마트에서 선처를 구할 때 사무실 바깥에서 묵묵히 지켜봤던 인물이었습니다. 우연히 부자의 딱한 사연을 듣고는 현금을 뽑고 일부러 식당까지 따라가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살 만한 사회라는 것을 알려준 소식이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연말에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훈훈한 소식입니다. (미디어오늘 2019.12.14)
한 해가 기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 마음도 쓸쓸해지고 육신이 위축되는 분들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전주로 돌아오고 나서 아무래도 서해 바다를 많이 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로 동해바다를 많이 갔었는데, 서해는 참 쓸쓸합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와 더불어 일출보려고 동해를 가죠. 떠오르는 태양은 뭔가 희망차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의욕으로 충만하다면 지는 해는 뭔가 쓸쓸한 느낌 지울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셨던 정치인 김종필씨가 자신의 노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겠다면서 석양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어놓겠다고 공언했습니다만, 공언에 그치고 말았죠. 소위 ‘해질무렵증후군’이 있죠. 석양이 지면 마음이 스산해지고 쓸쓸해지죠. 일몰 명소가 많은 서해바다는 그래서 어딘가 쓸쓸합니다.
한 해가 기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 오히려 사랑이 역사할 공간이 생깁니다. 나태주 시인의 '사랑에 답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시입니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저는 신문에서 사람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유심히 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말들과 그들의 정신을 엿보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서 즐겨 봅니다. 신문 인터뷰도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자의 역량에 따라 어떠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최근에 이은주라는 분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이분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고 온 분이고 일본문학을 한국에 번역하는 문학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로 노인들을 돌보는 50대 여자분입니다. 최근에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경험했던 소소한 일들과 느꼈던 감정을 담은 책을 출간해서 신문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일은 어찌보면 고통과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봄 노동’이죠. ‘돌봄 노동’을 통해서 뭘 배우냐면 사랑을 배운다고 합니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석양이 깃든 노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드리면 어김없이 그들로부터도 사랑을 돌려받는다고 합니다. 이분은 자신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노인분들에게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쓴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분들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로병사를 겪으며 돌보고 돌봄 받는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대답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에요.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 그렇게 공간에 온기가 돌면 어떻게든 웃으며 살아요.” (조선일보 2019.12.14.)
역시 사람은 사랑을 주고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으시고 다함없으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 막바지입니다. 대략 기원 전 540년 경으로 추측합니다. 538년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바벨론 포로기 막바지에 전달되기를 기대했던 예언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막바지가 제일 힘든 법이죠.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도무지 끝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포기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게 우리 인생의 군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0장부터 계속적으로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시는데 아직 끝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사랑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재건하고 재번성시켜주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바로 전절, 이사야 49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히브리어에서 긍휼은 ‘자궁’(히브리어로 ‘라함’)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생각하면 긍휼이란 말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신반의합니다. 도대체 언제쯤 끝날지를 모르니까 그러는 거예요. 14절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이렇게 말한단 말예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긍휼과 인애가 풍성하세요. 절대 우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데 때때로 우리는 상황 때문에 혹은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이고 무지죠.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상황이 그러니까 그럴만도 하지 생각도 됩니다만, 우리는 진리에 기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 같은 분, 어머니 같은 분이라는 점이에요. 심지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 “하나님은 세상과 화목하셨다”(고후) 말씀하세요. 자녀는 자녀죠. 자녀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기본적으로 자녀는 자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다 젖먹이와 같고 하나님은 젖먹이는 어미와 같다는 거예요. 자기 태 곧 자궁이죠.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때때로 잊고 살아가지만 부모는 자녀를 잊을 수 없는 법입니다.
14세기 후반 영국의 영성 작가 노리치의 율리아나는 ‘하나님의 모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현존하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 은혜의 우리의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신의 모유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귀중한 어머니 예수는 그 자신으로 우리를 먹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영적인 출생 곧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시라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하나님이 자신의 손바닥에 새기는 것(파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뜻하는 말씀일까요? 구약성경에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입니다만, 신명기 6장 8절에 보면 너무나 중요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라는 쉐마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라고 말씀했는데 이를 직역하면 “네 손바닥에다 표식으로서” 묶으라고 한 명령입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팔과 손바닥에 감는 이 팔찌가 그 위에 기록된 말씀과 함께 지속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손목시계를 보는 것과 유사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무지개가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했죠.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이제는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보호해주시고 오래 참으실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의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들,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확실히 그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했던 어떤 관습을 추측해볼 수 있게 합니다. 자신의 손이나 팔에 흔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표시로 또는 상징으로 자신들의 사랑과 열심을 보여주기 위해 상처를 내는 것이죠.
이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셀 수 없는 생각을 지니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변함없으신 사랑과 충성과 열심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야 할 환경인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라는 사항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사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입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워지지 않는 증거를 어디서 보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에 상처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내 손바닥 위에 새겨져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손에 못 박은 상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손에 상처를 얻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처는 영원까지 지니고 있을 인자의 상처입니다. 그것으로 교회의 벽들을 영원히 확실하게 보호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귀중한 십자가, 그리고 그의 손의 못자국은 우리 인생의 안전한 벽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는 환난 또는 핍박 중에 있는 모든 신실한 자들을 위해 확실하고 안전한 피난처이자 성소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인 성 어거스틴은 “주여, 당신의 손이 나를 만들고 나를 형성했습니다. 진실로 그 손은 나를 위해 못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손의 행사를 무시하지 마소서. 나는 당신꼐서 당신의 손의 상처를 바라보시기를 기도합니다. 보소서, 주 하나님, 당신은 당신의 손 위에 나를 새겼습니다. 그 새긴 것을 읽으시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 그리고 2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일에 두려워서 은신처에 문을 꽁꽁 닫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라고 말씀하시고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 중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없었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도마도 마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에 도마의 마음이 녹아져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언과 분별>, 월터 모벌리 저 참고)
못 자국이 난 그리스도의 손 위에 있는 우리의 이름들이 우리의 마음을 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깊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그 사랑이 시온을 회복시키고 재번성시켜주실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불모지와 같은 메마른 땅에 시온에서 태어날 “자녀”로 넘쳐나게 하실 것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신부의 장식” 처럼 보게 될 것 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즉 신부의 장식은 시온 곧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이는 하나님의 용납해주심의 상징입니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거기다가 많은 자녀까지 생산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파멸로 인해 황폐함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포로로 잡힌 자녀가 돌아올 뿐만 아니라(49:17-18) 더 많은 자녀가 그 어미 시온을 통해서 태어날 거라고(49:19-21) 주장하십니다.
이 회복이 하도 신기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49장 21절입니다. “그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아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서의 문맥은 시온의 재건과 재번성을 일차적으로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오늘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못자국난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해주시는 동기가 되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를 위한 전적인 자기 희생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모성을 보여줍니다. 아이를 젖먹이는 어미, 자궁에서 아이를 10개월 동안 품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어미, 늘 자녀를 향한 셀 수 없는 생각에 매여 있는 어미, 그래서 자녀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자녀를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마치 자신의 손바닥에 새긴 자녀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르는 CCM곡 중에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이러한 사랑으로 훈훈한 연말을 보내시며 이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어미와 같은 사랑,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사랑,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못박힌 손에 새겨진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사랑에 감격하며 이 사랑을 더욱더 이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실천하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영생 (딛 2:11-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장래 우리 앞에 펼쳐질 내세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망과 영광이 얼마나 큰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말할 때 대전제는 구원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극적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 간증을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예전에 소개한 바 있던 조혜련씨 간증이 국민일보에 역경의 열매라는 코너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조혜련씨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된 계기가 참 재밌습니다.
조혜련씨가 재혼을 했는데 남편이 두 살 어린 연하입니다. 두 살 어린 남편이 늘 반말을 했습니다. 남편에게 서로 “존댓말을 쓰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조건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평생 존댓말을 할 테니 교회 한 번만 가자!” 주일 교회에 한 번만 함께 가주면 평생 존댓말을 해준다는 것이었으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번만’에 강조점을 두고서 교회에 따라갔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혹시나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잠시 후 예배가 시작되는 종이 울렸습니다.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불렀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을 듣는 순간 그만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눈물과 함께 자신의 지난 생애가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 나는 정말 쓸데없는 자다. 쓸데없는 가스나로 태어나서 엄마가 죽으라고 엎어놨고, 대학에 합격해서 돈 버리는 짓을 했다며 부지깽이로 얻어맞았고, 열심히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했지만 결국은 오해를 받으며 욕만 듣던 나, 그런 쓸데없는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찬양대의 찬송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라는 가사가 또 꽂혔습니다. ‘내 형편은 나를 낳은 엄마도 형제들도 내 아이들도 모른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불도저처럼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는 누구란 말인가?’
색다른 느낌을 갖게 된 첫 번째 교회 예배 후 다음주에 다시 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날은 담임목사님께 인사도 드렸습니다. 남편이 목사님께 내가 누구인지 소개했을 때 “조혜련 성도님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참 많이 분주하게 사신 것 같네요. 이제 그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면 좋을 것 같네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돈과 명예 때문이었을까,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알지도 못 한 채 늘 분주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분주함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떻게 내려놓는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 그 주님이신 건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조혜련씨의 간증은 오후 예배 때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조혜련씨가 지금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너무나 열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분의 간증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 쓸데 없는 자’를 왜 구원하여 주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다 해야 하는 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과 더불어 우리의 역할도 말씀합니다. 디도서 1장 1-3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신 자들에게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데, 이것들은 전도 곧 복음 전도와 말씀 전파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부르심이지만 사람을 통해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내서 구원 받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로서 가르쳐주시고 양육해주십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여기서 “양육하시되”는 단순 교육만이 아니라 징계도 포함합니다. 훈련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을 훈육시켜주시는데 회초리를 들고 교육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매를 맞기도 합니다. 엄한 아버지처럼 회초리를 대기도 하십니다.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양육하십니까? 부정적으로는, 경건하지 않은 것,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십니다. 단순히 악한 것들, 세상적인 것들을 피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싫어서 내다버리게 하십니다. 악을 피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죠. 적극적으로 갖다 버리라고 명하십니다.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과 물리치고 버리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버린다는 말에는 미움과 혐오가 들어가 있는 말입니다. 죄악에 대해서, 경건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혐오해서 다 갖다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은 무엇입니까? 요한1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에 말씀하고 있듯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 이 세상에 속한 이 세상 정욕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양육하시는 걸까요? 긍정적으로는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훈련시켜주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신중함’, 다른 말로 하면 ‘근신함’입니다. 예전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근신함’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스스로 자기 관리를 잘하여 절제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self-controlled) 자기 관리가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의로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른 삶,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건함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 중심에 “하나님 있음”입니다. 구체적으로 경건이란 야고보서 1장 26-27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것이 경건이요 하나님 있는 인생의 삶의 모습이요 언어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함양해야 할 것은 함양하려는데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경건하지 않은 것들, 이 세상 정욕을 혐오해서 물리치고 갖다 버려야 하고, 가져야 할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중, 근신, 절제, 자기 관리, 자기 통제입니다. 가져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로움 바른 삶 윤리적 도덕적인 삶이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실 뿐 아니라 이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내세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도 알 도리가 없으니까 다만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말씀할 뿐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마라나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기대요 우리의 기다림입니다. 여기서 ‘복스러운 소망’은 ‘영생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디도서에는 ‘영생의 소망’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아까 읽었던 디도서 1장 2절에 보면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의 소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히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또 디도서 3장 6-7절에 보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요 작정이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을 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영생을 소유한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 영생하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유대인에게, 혹은 구약성경에서 영생은 시간적 지속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의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는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자연적 존재 곧 육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첫 창조 때 영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도 영생은 두 번째 창조, 곧 새 창조로만 주어질 약속이었습니다. 새 창조로만 다가올 세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창조로만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곧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 첫 사람 아담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아담이 품고 있었던, 그리고 우리도 품고 있는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타락하기 이전에 죄가 없는 상태였던 첫 사람 아담과 영광스럽게 부활한 상태에 있는 마지막 아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부패한 상태에 있을 때와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죄가 없는 상태와 영광스런 부활의 상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뿐 아니라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습니까?어떤 사명 감당에 신실하지 못했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 창조 명령이라 불리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고, 사명 감당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영생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누리는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3장 22-23a,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서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내쫓았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입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복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땅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값없이 마시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생명나무로 시작해서 생명나무로 끝납니다. 생명나무 곧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첫 사람 아담에 의해서 좌절되는 듯해 보였지만 하나님은 둘째 아담, 마지막 사람, 종말론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 타락하기 이전이라도 그것은 자연적 생명에 불과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게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더 영광스러운 상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약시대에 이르러 생각해보니까 아담이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함으로써 들어가야 했던 영생의 상태는 오늘 우리에게는 결국 부활의 몸을 입고 들어가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라도 아담 역시 신실했다면 썩지 아니할 영원한 몸의 상태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라도 아담은 자동적으로 영생을 보장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생의 소망을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이 복스런 소망,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영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을 살리심으로써 주실 부활생명이요 썩지 아니하는 몸을 입혀주심입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스러운 소망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너무나 분주하고 그것은 너무 멀리 있어서 당장의 발등의 불만이 관심사가 아닌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영생의 소망,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죠.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형벌, 죄값을 받으셨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죄의 노예상태였던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입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주심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이땅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한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이땅만 바라보지 말고 참된 소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땅에서 때로는 훈련하시고 때로는 징계하시고 때로는 교육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다듬어서 복스러운 소망, 부활생명의 상태를 얻고 영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품고 계셨던 계획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작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값없이 오직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를 하나님이 불러주셨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값없이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덧없는 이 세상에 속한 가치들에 사로잡혀 지내다 인생을 탕진하기보다는 이 세상 정욕은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훈련받고 다듬어지고 교육 받아서 경건하고 의롭게 이땅을 살아가고, 특별히 영생의 소망,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그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혀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이땅에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그리스도의 보혈 (계 5:6-10)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생애로 기억되지 죽음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소위 종교의 창시자라는 사람들 역시 추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들의 가르침이나 숭고한 생애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다르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나 그분의 가르침은 분명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역시 주목할만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기억되고 전해졌습니다.
꼭 종교와 무관하더라도 죽음으로써 기억되는 분들도 역사에 더러 있습니다. 가령 이수현열사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떤 훌륭한 일을 그의 생애속에서 수행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이분이 자신을 바친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억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분이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을 때 뛰어들어 취객의 목숨을 구했으나 자신은 열차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27세의 한국인 청년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에 대해서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모리총리가 한국의 김대중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귀국의 청년이 일본인을 구하고자 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잃은 것을, 어제 다보스에서 귀국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본국민, 그리고 각하를 비롯한 모든 한국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서 돌아가신 이수현 군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수현 군의 부모님께도 진심으로 조의 및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하고, 위로하여 드렸습니다. 이수현군의 용기 있는 숭고한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귀국의 우정의 가교가 된 이수현 군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그 용기를 기리고, 유가족 및 한국 국민 여러분께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https://blog.naver.com/dgbtbilions7530/221451247261)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특히나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훌륭한 위인들의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되기는 해도 죽음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주목할만한 기적 행사와 가르침보다도 오히려 그분의 십자가 희생적 죽음으로써 더 많은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고 계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더욱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했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알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해주는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도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일주일에 과도한 집중을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전체 분량의 1/3을, 누가복음은 1/4을, 요한복음은 무려 절반을 할애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한 주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존스토트 목사 저 참고)
이어령선생이 기독교신앙을 갖기 전에 미국의 한 조그만 교회에 가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한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아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듯합니다. 투구를 쓴 로마 병사가 망치를 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못이 박히며 뼈가 부서지는 생생한 장면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머리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꾹 눌러써 피가 흐르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데 로마 병사들의 채찍질로 인해서 살점이 툭툭 떨어져나갑니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못을 박는데 못에 박히면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이분이 이 영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나 살인자도 고통스럽게 죽는 장면을 보고서 통쾌하다는 생각보다는 저질렀던 죄는 잊혀지고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일진대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갖기도 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어령선생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십자가형을 옛날 우리나라 사형법이었던 효수형과 비교합니다. 효수형은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의 목을 베어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저잣거리에 전시하는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처형이 바로 죄인에게 엄청난 고통뿐 아니라 수치를 주는 효수형과 비교할만한 것입니다. 그래도 효수형은 죽여놓고 수치를 주는 것이고 죽을 때는 고통없이 즉시 죽게 하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형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흘려 말려죽이는 고통스런 죽음이고 맨몸으로 못을 박아 십자가형틀에 달아서 죽을 때까지 수치스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이 고안한 사형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효수형 때 사용했던 장대와 같은 게 로마시대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채택했다는데 의아한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이어령 저 참고)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어떤 사람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를 버린 희생적 죽음이었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힐 정도로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5장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본 환상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한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비쳐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천당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서계셨던 것입니다. 어린양께서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7절입니다.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께 들려져있던 두루마리를 어린양 예수께서 취하셨습니다. 둘둘만린 두루마리는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해져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5장 1절에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으로 봉하였더라”고 묘사된 그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 다니엘서가 예언하고 있는 바로 종말의 비밀에 관해 봉인된 두루마리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를 비밀스럽게 담고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가 이제 예수님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획과 작정이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실행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아울러 가리킵니다. 창조의 목적에 관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세상의 심판에 관한 두루마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이러한 일들이 실행되게 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적합한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창조세계에 대하여 주권과 통치를 다시 행사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도래한 것입니다.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어린양에 의해서 해제되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두루마리를 취하자 주위에 있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경배드리며 찬송합니다.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관한 계획, 구원에 관한 계획, 세상 심판에 관한 계획 등을 담고 있는 종말에 관하 비밀스런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그 인봉을 떼어 공개하기에 적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분이 적격이냐면 예수님께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그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이요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 때문에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그 인봉을 떼어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과 구원의 경륜과 하나님의 온갖 작정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당연히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의 말처럼 용서가 하나님이 하시는 전문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내세울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요? 어린양의 피가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하나님에게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 심각하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떤 기독교 작가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왜 그렇습니까? 죄는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단순한 위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은 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본 결과 용서는 거의 불가능한 과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난제, 곧 딜레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죄에 대해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충돌, 이로 인한 난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에서 친히 어린양이 흘리신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이, 어린양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리를 취하셔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며 우리 대신 흘리신 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앞의 책 참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은 예수님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희생을 원하십니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축복을 가지고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 쏟아져내렸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 옥한흠목사님은 설교 <예수를 따라가려면>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문제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무겁게 가질 필요가 없음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려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숨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날마다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됩니다. “고난과 가난과 질병 속에서, 핍박과 실패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와 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설교에서 러시아의 유명 작가인 솔제니친의 예화를 소개합니다.
반체제 인사였던 솔제니친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형을 선고 받고 수년에 걸쳐 고생을 했으며 나중에는 서방 세계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중노동을 했습니다. 결국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으며 심한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중노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삽으로 모세를 퍼 엎는 일을 하던 그는 너무 지친 나머지 이렇게 말하고 삽을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못하겠소. 이제는 끝이오. 삽자를 놓는 즉시 감시하는 사람이 와서 나를 사정없이 때리겠지만, 나는 아예 그 매를 맞고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오.” 그리고 매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옆에서 일하던 크리스천 죄수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삽으로 모래 위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는 솔제니친이 십자가를 보는 순간 싹 지우고 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솔제니친은 십자가를 보고 나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만큼 힘이 솟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삽을 들어 모래를 퍼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솔제니친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여러 달에 걸친 중노동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예화를 들고서 옥한흠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처럼 대단합니다. 십자가를 보기만 해도 힘을 얻는데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는 얼마나 클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 선배들이 이미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 결국 하나님이 능력과 기쁨과 위로를 주셔서 십자가를 거뜬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의 맛을 모르는 것이요. 아직도 어린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힘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 희생과 예수님의 흘리신 고귀한 보혈의 피를 기억하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해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힘과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1월24일 동산교회 총동원주일 설교 (주일 낮)
천국의 사냥개 (눅 15:1-7)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개그우먼 조혜련씨의 간증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장손이어서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딸이었습니다. 첫째를 딸로 낳았을 때 친할머니는 “그래 첫째 딸은 재산이라 카더라”면서 마음의 위로로 삼으셨습니다. 또 둘째와 셋째도 딸이었습니다. 넷째마저도 딸을 낳자 엄마의 실망은 물론이고 할머니의 역정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할머니는 문을 빼꼼히 열고 “아들이가? 딸이가?”라며 성별 확인을 하시고는 딸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와서 밭매라!”고 하셨습니다. 일거리를 준비해 아들을 낳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엄마는 그동안 한 번도 꾸지 못한 태몽을 꿨습니다. 꿈속에 커다란 호랑이가 먼 곳에서부터 돌진해 엄마 뱃속으로 훅하고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용맹스러운 호랑이가 꿈속에 나타났으니 누가 아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매일 다르게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주입했습니다.
“니는 아들이다. 아들이어야 한데이. 나를 살려낼 아들이다.”
호랑이 태몽이었지만 결과는 딸! 조혜련씨가 다섯째 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우짤끼고. 배신자 가스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한테 들은 말은 배신자였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던 아기를 거꾸로 엎어놓은 채 이불을 뒤집어씌웠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가스나! 그냥 확 죽어버리라.’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목도 못 가누는 아이를 엎어놓는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겠죠. 그만큼 실망감이 컸습니다. 한참 뒤에 엄마가 이불을 들쳐보니 땀을 잔뜩 흘리면서 목을 돌려서 숨을 편하게 쉬면서 아주 잘 자고 있더랍니다. 갓난 아기가 엎어놓았는데도 고개를 돌려서 숨을 쉬고 생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질긴 목숨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딸을 낳은 엄마는 여덟 번째 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조혜련씨의 어머니가 남묘호렌게쿄(남녀호랑개교)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자연스레 조혜련씨는 어미니를 따라 이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열심히 믿었냐면 전에 다른 종교생활을 할 때엔 하루에 10시간씩 100일동안 주문을 외며 기도한 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십자가들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던 조혜련씨가 44년간 하나님을 부정하다 지난 2015년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개그우먼 이성미집사가 캐나다에 있을 때 조혜련이 김영철과 함께 방문을 했는데 욕도 잘하던 이성미 집사가 얼굴에 광채가 나서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자 사실 요즘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있다고 하며 너를 위해서도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조혜련은 언니 고맙지만 내 이름은 빼줘라고 했을 정도로 거부감이 컸습니다. 돌아와서 이성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각자 종교를 존중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성미 집사가 한국에 와서도 조혜련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며 전도했는데 너무 극성으로 전도하니까 전화번호를 삭제해버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분이 예수를 믿게 된데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재혼하게 된 이후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조혜련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주었을 때 비로소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학교 다닐 때는 진화론을 믿었고 다른 종교에 심취했을 때는 윤회설을 믿었는데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고백하자 순간 자기의 힘겨웠던 과거가 스쳐지나가며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자기를 내팽개치듯 키웠기에 자신은 항상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죽을 힘을 다해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것이 자기를 너무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장에나가 어머니가 재배한 쑥갓을 내다팔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습니다. 시장에서도 매장이 없이 노점상처럼 팔다보니 단속반이 나와서 뒤엎고 회수해갈 때도 당돌하게 가져가지 말라고 사정사정해서 돌려받기도 했던 억척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라다보니 평소에도 인정 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힘든 인생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자기의 모든 짐과 죄의 짐을 대신 지게 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조혜련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전에는 힘겨울 때 술에 의지했는데 이제 주님을 의지하며 이보다 든든한 백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마음의 평안을 찾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성경이 너무 달콤해서 성경을 잘 알기 위해서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기도제목은 32명이나 되는 친족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고 예수만 사는 기독교인 되는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그녀의 어머니 최복순 씨도 하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분의 변화는 조혜련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어머니는 딸에게서 배워서 성경 읽기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었을 때는 하루 10시간 기도를 올려도 복잡했던 마음이 성경을 읽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편안하고 걱정도 없다”고 어머니는 말합니다. 허리 건강 때문에 성경 읽기가 편하지만은 않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에 벌써 예수 믿은 지 1년 만에 벌써 성경 8독째를 끝냈다고 하니 그 어머니의 그딸이라 할 만합니다. 어머니는 성경 읽기에서 나아가 성경 암송에도 도전했습니다. CTS기독교TV가 주최한 제4회 부산국제성경암송대회에 최고령으로 참가하게 된 겁니다.
조혜련씨의 간증을 들으니 이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놀라운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루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조혜련씨의 구원을 위해서 7년간 도고기도한 개그우먼 이성미씨가 있었고, 조혜련씨가 소속된 연예기획사 사장이 독실한 신자인데 이분도 14년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번만 교회 출석하자고 권한 지금의 남편, 이들의 합작품으로 하나님은 조혜련을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조혜련씨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추적에 결국 조혜련씨가 백기투항한 것이죠.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수학자요 철학자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석학 버드란트 러셀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이 책에 대한 응답으로 스토트 목사님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쓴 것입니다. 이분이 그리스도가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자신의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결단 때문도 아니고, 바로 ‘천국의 사냥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자신을 추적하고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천국의 사냥개’로 지칭했는데, 조금은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존 스토트목사님 자신도 우려하면서도, 영국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서식하는 콜리라는 사냥개는 목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양치기 개인데, 너무나 좋은 사냥개라는 점에서 그냥 그 표현을 쓰기로 합니다.
원래 ‘천국의 사냥개’라는 표현은 한 시인의 시의 제목입니다.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로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칠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감으로,
두드린다-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
가여워라, 너는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존재인지!
너처럼 비천한 자를 사랑할 이 누가 있으랴,
나, 오직 나 외에는?
...
내가 너에게서 가져간 모든 것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는 것이라...
일어나라,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를 통해서 시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끈질긴 추적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애송하는 시편 23편은 어떻게 시작됩니까?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마지막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로 마무리됩니다. 이를 좀더 쉽게 번역해보면,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더 쉽게 번역해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추적하고, 붙어다니며 괴롭게 하고, 내 걸음 하나하나를 미행하리니” 참으로 끈질긴 추적, 목적이 분명하고, 자애롭지만 무자비한 추적입니다. 이 열심에 굴복당하지 않을 영혼은 없습니다. 바로 이 열심히 여러분을 오늘 이 자리에 불러내셨고 오늘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손가락질 받던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종종 나누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중동지방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평화와 신뢰와 형제애와 용서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한 신학자는 말했습니다.(요하킴 예레미아스) “한 마디로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의 의미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자신의 사명과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하나님께로부터 전달하라고 받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9장 10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시려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식탁 교제를 함께 한다는 비난을 받고서 예수님은 한 이야기로써 응답하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는데, 자신에게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다 방치하기까지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추적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 한 양이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 무리에서 이탈하여 위태한 상태에 처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되찾았을 때의 감격과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본문 5-6절을 보십시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어깨에 메고 온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이 부상을 당했거나 잘 먹지 못해서 주린 상태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양의 무리에서 이탈해서 목자의 품을 떠난 양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분주하게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결국 생명이 소진되는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죽을 위기에 처한 양을 되찾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돌아와서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되찾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던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회개하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여 창조주께로 돌아오면 하늘 아버지가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라면 하나님은 두 팔 벌려 받아들여주십니다.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죄인들에게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열심과 추적을 받고 있는 우리가 이 사랑을 외면한다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의 끈질긴 사랑과 추적의 결과로써 이 자리에 오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에 굴복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전에 달려왔던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만 느껴지는 허탈감,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면 안되겠다는 자책감, 그리고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 열매 맺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새로운 마음, 오늘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넘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굴복하시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다시금 영접하고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1월10일 성례주일 설교 (주일 낮)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1-10)
성찬식은 성만찬 혹은 주의 만찬으로도 불립니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고 불립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셔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라는 의미입니다. 이땅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식탁의 자리로 초대하셨는데 그중에는 주로 죄인과 세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난과 비판을 자주 받았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식사에 대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6) 예수님께서 일부러 죄인들의 집에 찾아가서 식탁을 함께 하기도 했고 또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들을 초대하셔서 식사를 함께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식탁의 특징이었고 ‘주의 만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사역 중의 하나는 함께 식사하기였습니다. 죄인들을 초청하여서 환대하시고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심이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함께한 공동체를 일컬어 ‘밥상 공동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올해 표어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는 동산교회’라고 했는데 여러 주된 사역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초대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초청하고 환대하면서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도 주된 사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밥상 공동체’로 의도하셨던 것은 하나님나라의 임함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예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이와 같다고 실제로 보여준 것입니다.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은혜의 왕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 주위로 몰려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받아들여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마련한 성대한 식사로 묘사합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가심으로써 오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식사를 제공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성대한 혼인 잔치로 묘사합니다. 하나님나라를 혼인 잔치로 비유한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나라 곧 천국이 혼인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합니다. 왕은 손님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었음을 분명히 알리면서 초대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혼인 잔치에 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또 어떤 사람은 사업장으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초대장을 배포하는 왕의 종을 오히려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초대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포기하고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아무나 데려오게 합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손님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연회장에 손님들로 가득차서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임금은 연회장을 둘러보다가 제대로 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14) 초대에 응해서 단순히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초대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혼인 잔치로 비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구원의 복과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풍성한 식탁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과 은혜를 보여줍니다. 구원과 생명, 기쁨과 평화의 풍성함을 잔치 비유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함께함, 우리의 가장 큰 복이 주님을 뵙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더 큰 잔치, 더 큰 풍성한 식탁이 배설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 나오는 소위 ‘어린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부릅니까?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증거한 사람이 누굽니까? 세례요한이죠. 요한복음 1장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상 죄를 없이하고자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이라고 말하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죄를 없애기 위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어린양은 구약성경에서 유월절에 먹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집트(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구원해주신 해방절입니다. 출애굽 전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애굽 땅을 치고 장자를 칠 때 그 집을 넘어가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넘어간다는 의미에서 유월절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어린양을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서 어린양을 불에 구워 먹습니다. 유월절 저녁식사의 단골 메뉴가 어린양 고기입니다. 유월절 만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유대 명절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이때가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육신의 가족이 아니라 영의 가족인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고, 이때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때의 주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었고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어린양 고기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에 함께 한 유월절 만찬에는 어린양 고기가 없었습니다. 왜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유월절 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해방을 기념하면서 먹었던 어린양 고기는 진정한 유월절 양,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거기서 흘린 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 1:19)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중에 성찬식을 제정하십니다. 떡을 떼어주면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바로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므로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성찬식을 제정하면서 하셨던 말씀 중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이 있는데요, 마가복음 14장 25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래에 정해진 때가 오기 전까지는 의도적으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요 이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할 날입니다. 그때가 돼서야 예수님은 포도의 열매를 다시 마실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은 성대한 메시야의 연회에 관한 언급이요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언급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다시 오셔서 더 풍성한 잔치로 영적으로 배불리 먹게 해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19장 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달라도 한참 달라지겠죠. 하나님나라의 완성입니다. 온전한 통치의 수립입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어린양과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는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신부로서 준비된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우리의 준비는 우리가 입게 된 예복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이 예복을 친히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어진 옷을 입고서 그 은혜 아래서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9절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청함을 받은 자들’만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죠. 그래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식은 이런 점에서 소망을 다시 되새기고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결단하는 예식입니다. 어떠한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실 더 풍성한 축복과 영광스러움과 기쁨의 교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사로서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을 친히 뵙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풍성한 식탁과 교제를 소망하면서 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주님을 향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의 심령에 불일 듯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서 신부로서 합당한 예복을 갖추기 위해서 이땅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주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곧 그리스도로 옷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1월3일 설교 (주일 낮)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리 스트로벨이라는 분은 현재 미국에서 기독교의 역사성과 진리됨을 설득력 있게 증거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현재 목사로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법조 전문기자였습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서 시카고 트리뷴이라는 신문사에 입사해서 기자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법조 분야의 탐사보도를 해서 상을 받았던 신문기자였습니다. 이분이 언론인답게 신앙에 있어서 지독한 회의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습니다. 이분의 표현에 의하면 “술에 절고 자아에 도취되어 부도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분의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었고, 믿고 나서 아내의 성품과 가치관이 이분이 보기에도 좋은 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좋은 쪽으로 변화된 것은 알겠는데,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죄악된 심성 때문인지 예전의 아내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탐사전문기자답게 이분은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를 논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기자의 호기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랄 수 있는 부활의 역사성을 무너뜨리고자 증거를 찾아나섰습니다. 이분이 로스쿨에서 배운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요. 증거나 증언을 평가해서 그게 확실한지 아니면 성립이 되지 않는지를 분간하는 것이 이분의 전공이었습니다. 2년 가까이 탐색한 끝에 예수님의 부활이나 기적에 대한 법률가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기적은 대개 신빙성이나 설득력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누적되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강력하게 입증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분도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이분은 자신의 체험에 입각해서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예수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인지를 조사해가는 과정으로 기술된 책입니다. 신약성경 사본과 신약신학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성경 기록의 역사성에 회의적인 전문가도 찾아다니면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라 결론과 판결을 내리는 과정으로 기술된 책입니다. 예수에 관한 사안에서 이분이 내린 결론은 복음서의 보도는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창조는 역사다>라는 책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쟁점을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인터뷰해서 창조에 관한 케이스에 대한 결론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쓴 세 번째 케이스는 <기적>에 관한 사안입니다. 과연 성경에서 보도하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기적이 과연 가능한지를 탐사한 책입니다. 이전의 책들처럼 이번에도 이분은 기적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그 점을 힘써 강조하고 설파하는 전문가에서부터,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기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와, 그리고 기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신학자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적 케이스에 관해서 이분이 내린 판결은 오늘날에도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성경이 보도하는 기적이 믿을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이분이 인터뷰한 분 중에서 인디애나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캔디 브라운이라는 분은 하버드대학교에서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고 석박사를 받은 분으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연구합니다. 이분은 질병 치유에 미치는 다른 사람의 기도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이분에게 “기도의 효과를 조사할 때 과학이 어떻게 쓰일 수 있습니까?”를 질문했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는데, 우선 기도 전후의 진료 기록부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진단된 병명이 있었나요? 엑스레이나 혈액 검사나 기타 진단 절차를 통해 병이나 부상이 밝혀졌나요? 나중에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그리고 임상연구도 합니다. 임상 연구는 기도 후에 벌어지는 일을 측정하려고 단기간에 국한하여 진행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캔디 브라운교수는 과거 기도의 효과에 관해서 학문적으로 입증된 여러 연구 사례를 열거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수행한 연구에 관해서도 말해주었습니다. 이분은 실제로 치유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곳에 가서 연구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기적이 많이 보고되는 곳을 찾으려 했습니다. 보통 초자연 현상이나 기적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되는 곳은 주로 문맹률이 높은 지역입니다. 아무래도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언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료 해택이 빈약해서 병자들이 의지할 데가 기적밖에 없는 곳에서 기적이 자주 발생하고 보고됩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기적의 능력을 베푸시는 경우가 많음을 알고서 이분은 그런 곳을 찾으려 한 것입니다. 이분이 선택한 곳은 아프리카 남동 해안에 자리안 모잠비크였습니다.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참담한 내전을 겪은 지역이고 기독교인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나라입니다.
그곳에 가서 20년 넘게 모잠비크에서 선교사로 섬기면서 치유의 은사를 보여주었던 한 선교사 부부와 함께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이 선택한 질병은 심인성 치유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였습니다. 이 팀은 기도 직전에 여러 표준검사와 기술 장비로 청력이나 시력 수준을 측정했습니다. 기도를 받게 한 후 즉시 환자를 다시 검사했습니다. 기도는 선교사 부부가 했는데 짧으면 1분, 어떤 때는 5-10분까지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누가복음 4장 40절처럼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항상 신체 접촉을 병행하면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받은 실험 대상자는 총 24명이었습니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기도 후에 청력은 매우 의미 있는 차도가 있었고, 시력은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도를 보였습니다. 검사받은 피험자 거의 전원이 차도를 보였습니다. 아주 극적인 결과도 있었습니다. 어떤 대상자는 가청 임계치가 50데시벨도 더 떨어졌습니다. 보통 100데시벨은 근처의 오토바이나 잔디 깍는 기계의 소리고 80데시벨은 믹서기 소리고 50데시벨은 보통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고 0데시벨은 정적입니다... 시력의 의미 있는 차도는 시력 검사를 받은 집단 전체에서 고르게 측정되었습니다. 향상된 시력은 실레로 평균 열배 이상 정확해졌습니다.” 브라운 교수는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앞도 볼 수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한 노인 여성은 기도 전에는 양쪽 귀 모두 100데시벨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석을 뚫는 드릴이 돌아가도 듣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후에는 오른쪽 귀와 왼쪽 귀가 각각 75데시벨과 40데시벨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위해서 기도한 두 번째 기도 후에 검사해보니 시력도 맹인 수준에서 확연하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서던 메디컬 저널>이라는 전문 학회지에 실렸습니다. 이후에 브라운 교수는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반복 연구를 실시했고 결과는 이전 실험과 유사하게 기도의 효과를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리 스트로벨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고 신약성경이 보도하는 기적 사건이 믿을만하다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분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이분의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날마다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일반 의술로 안돼서 고쳐보려고 침술, 안마, 건강 보조식품, 대체요법 등을 써보았지만 이분의 아내를 괴롭히는 만성 근육통인 섬유근육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벌써 수십년째 이분의 아내는 쑤시고 욱신거리는 통증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 인터뷰를 수행하면서 이분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가능하고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게 되었지만 속으로 “그런데 내 아내는?”이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아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치유해달라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아직도 차도가 없습니다. ‘왜 우리 아내에게는 기적이 없을까?’
그래서 이 책에서 리 스트로벨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한 미국의 신학교 교수를 찾아갑니다. 이분 역시 아내가 몇 년 전에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은 분입니다. 이분 역시 아내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왔지만 소위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로 힘겹게 신앙을 이어가는 분이었습니다. 이분과 인터뷰를 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더랍니다: “때로 우리에게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면 ”주님, 무엇이든 주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그 일을 저도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당장은 아주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순종과 순복의 기도, 신뢰와 믿음의 기도입니다.”
캐서린 마셜이라는 분이 <기도에의 모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이분은 ‘수용’과 ‘체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용과 체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념은 ‘이게 내 상황이다. 나는 단념하고 이대로 주저앉는다’라고 말한다. 체념은 하나님 없는 우주의 흙바닥에 누워 최악의 사태에 자신을 방치한다. 수용은 ‘이게 당장 내 상황인 건 맞다. 나도 현실을 냉철히 직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아버지께서 무엇을 보내시든 내 손을 벌려 기꺼이 받아들인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수용은 결코 희망의 문을 닫지 않는다.” 또한 이분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싶습니다. 제 기분과 상관없이 제 영혼은 영원히 믿을 만한 진리를 아오니 곧 아버지께서 제 곁에 계시고, 저를 사랑하시며, 제게 가장 좋은 길을 홀로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의지의 행위로 이 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낸시 거스리라는 여성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강한 믿음의 정의란 하나님께 기적으로 고난을 없애 달라고 전심전력으로 간구한 뒤 그대로 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측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을 조종하여 내 뜻을 관철시키는 재간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복하려는 의지다.”
윌리포드라는 경건한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실 확실한 공식은 없으므로 예수께서 언제는 허락하시고 언제는 안된다고 하실지 알 수 없다. 이게 절대주권의 이면이다. 가부와 조건과 시기와 방법은 다 그분의 소관이다. 그분이 어떻게 결정하실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믿음의 근거를 특정한 기도 응답에 둘 게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에 두면 된다. 기적은 일시적이지만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은 영생 곧 진정한 삶을 가져다준다.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안된다고 하셔도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조언합니다.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면 하나님께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지만 신뢰하고 싶습니다’라고 아뢰라. 이게 소망의 출발점이다.” (<기적인가 우연인가>, 리 스트로벨 저 참고)
오늘 다니엘서 본문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이 바벨론의 신의 큰 금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지방 관리와 백성을 신상 낙성식에 강제로 참여시켜 그 앞에 참배하도록 한 내용입니다. 이때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앞에 절하고 신상을 섬기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들이 굽혀 경배하기를 거절했다고 왕에게 보고했을 때 느브갓네살왕은 당장 이들을 죽이기보다 먼저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회유라는 형식이지만 이는 배교를 종용하는 것으로서 협박이 가미되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불에 쳐넣을 거라는 협박이었습니다. 이러한 협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절)
이들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이들의 즉각적인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존귀를 받아야 하고 우리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구원 경험보다 거룩하고 인간의 목숨보다 숭고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박해를 당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이땅에서 구원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손길의 개입과 도움을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죽음 이후에까지도 계속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러한 말씀에 따라 신앙고백을 가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젊은이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건져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땅에서도 극적인 반전의 개입과 도우심을 자주 펼치십니다만, 때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기독교 역사에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이땅에서가 아니라 내세에 가서야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실 때에라도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붙들어야 합니다.
1919년 4월18일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의 제암리교회 성도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예배당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목격자이자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불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찬송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속에서 건져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김회권 저, 153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수준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역사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사람들의 순교적 신앙,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고서, 어떠한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기대하는 믿음이면서도 동시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신실하심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 아니하실라도’의 믿음이 있어서 이땅에서의 기적보다도 더 큰 구원과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0월27일 설교 (주일 낮)
쓰임 받는 사람 (행 6:1-7)
지난 4월에 프랑스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났습니다. 첨탑이 붕괴되고 지붕의 상당수가 불에 탔습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며 깊은 슬픔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재건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전문가들마 의견이 다릅니다만 어떤 사람은 재건하는데 30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복원 과정이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에 착공을 시작하고 134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무려 100년이 넘게 지은 건물로 프랑스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건축물로 칭송되곤 했습니다. 그처럼 유서 깊은 건물이 화재로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져내렸습니다. 위엄과 위용을 드러내기까지 100년을 넘게 기다려야 했던 노트르담 대성당 공사에 참여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아마 건축 과정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자부심과 뿌듯함과 신앙심을 가지고 임했을 것입니다. 유한한 시간을 덧없는 인생길로 살아가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기쁨으로 동참했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면서 영원을 쌓는 작업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우리 역시도 이곳 예배당을 쌓아올리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참여한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전 역사를 위해서 쓰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쁘게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일은 실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자체가 그리스의 몸으로서 보이는 가시적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직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주시고 직분자들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분자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유한한 시간을 덧없는 인생길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도구가 된다는 뿌듯함과 가치를 깊이 인식하는 자에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과정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직분을 논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직분을 부여하시는 목적을 에베소서 4장 12절을 따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임을 말합니다. 직분자들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교회의 각 지체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은 성도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임을 강조합니다. 아울러,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께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능력과 은사를 주셔서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회의 직분을 두 부류로 분류합니다: “통상직” 혹은 “항존직”과, “비상직” 혹은 “임시직”으로 나눕니다. 교회의 항존직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되며, 임시직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교회의 임시직은 초창기 교회의 설립의 시기에 필요했던 “비상직”으로서 지금은 사도나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의 역할이 주된 기능이므로 오늘날 목사로 계승되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자로서 계시 기록이 완결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도들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시행하는 일을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 직분은 이후 조직된 교회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항존직으로서 목사는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면서도 사도와 달리 특정 지역 내에서 각각에게 맡겨진 양떼를 목양할 소명이 부여되었습니다. 교사의 직분은 “성경 해석”을 통해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를 보존하는데 있으며 목사는 이러한 교사직을 겸합니다. 장로는 다스리는 직분입니다. 문자적으로 연장자를 의미하죠. 장로는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직분을 감당합니다. 집사의 직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역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볼보는 사역으로 이루어집니다. 은사 목록에서 소위 “구제하는 자”와 “긍휼을 베푸는 자”에 해당됩니다. 집사 직분의 고유한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안수”를 받으므로 직분에 나아가는데 안수는 직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합법적으로 부여됨을 선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직분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상이 칼빈이 말한 직분론입니다. 직분론을 마무리하면서 칼빈은 강조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 (<30주제로 풀어쓴 기독교 강요>, 문명호 저, 296-306쪽 참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교회의 직분 중에서 집사가 최초로 세워진 과정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특별히 베드로의 설교로 한 번에 3천명이 회심하고 또 5천명이 회심한 이후 예루살렘교회는 소위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나날이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났고, 수적으로 증가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많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이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교회에 바치니까 이 물질을 가지고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4장 34-35절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바친 재산을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들을 필요에 따라 분배해주는 일도 사도들이 했던 큰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시행하는 중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느 교회처럼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에도 교인들의 종류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대개가 그리스 문화권에서 살다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사람들이었던데 반해서 ‘히브리파 유대인’은 유대땅에서만 살아서 아람어를 구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는 율법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을 겁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좀 이방인적인 개방적 특성이 있어서 율법 조항에 심하게 매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고, 이에 반해서 ‘히브리파 유대인’은 성전 율법 체제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자라났고 그 구속력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한 차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크게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을 겁니다.
‘헬라파 유대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지만 본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이유는 아마 고향땅, 특별히 거룩한 도시에서 묻히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황혼의 때에 타국에 있던 자신의 생활터전을 정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과부에 대한 돌봄 문제가 자주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과부들은 구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겁니다.
문제는 과부를 구제할 때 아무래도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은 주로 북쪽 갈릴리 출신으로서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였기 때문에 구제 업무를 감당할 때 헬라파 과부들이 소외되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헬라파 성도들이 히브리파 성도들에게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이런 문제가 불거지자 사도들이 중재에 나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자신들에게 마땅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 전체를 ‘제자’로 명명했다는 점과 교회의 핵심사역이 크게 두 가지, 말씀사역과 구제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나오겠습니다만 말씀사역은 단순히 복음 전하고 말씀 가르치는데 국한되지 않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사도들이 말씀사역과 더불어 구제사역까지 모두 맡아서 했지만, 이제부터는 말씀의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사역은 교인들 중에서 선택된 일꾼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제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3-4절)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제자들, 그러니까 오늘날 용어로 공동의회의 멤버인 전 성도들에게 자격을 갖춘 7인을 그들이 선택하면 그 7인에게 구제업무를 전담하도록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도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구제업무를 전담할 사람의 자격은 세 가지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의회가 어떻게 7인의 집사를 선출했는지는 보도하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의 자격을 통해서 보건대, 아마 전체가 참여하는 투표로 선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집사의 직분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세상 지혜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드러난 성령의 지혜, 위로부터 난 지혜여야 합니다. 세상 지혜와는 다른 위로부터 난 지혜, 성령의 지혜입니다. 이 세 가지가 집사의 자격입니다.
사도들은 구제사역은 제쳐두고 이제 말씀 사역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말씀 사역을 들여다보니 기도와 말씀입니다. 이게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기도를 본질적으로 말씀의 사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기도를 말씀의 사역 앞에 두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말씀의 사역’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역입니다. 복음 전하고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제자로 세우는 사역으로서 말씀 사역은 기도가 앞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 사역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위험과 찬란함을 찬양했던 시편 119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무엘도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고 말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말씀을 듣기 위한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주셔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말씀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래야 진리의 광맥을 캐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보면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와, 세례와 성찬의 성례와, 이에 더불어 기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보는 겁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도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보았습니다. 기도로 말씀을 깨닫기 때문이며,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이와 동시에 깨달은 말씀으로 주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송영>, 유해무 저, 204-228쪽 참고) 그래서 “기도와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습니다. ‘힘쓴다’는 말은 본문 이전에서도 두 번이나 사용됩니다. 1장 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말씀하는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가 성령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또 2장 42절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글성경의 번역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만 힘쓴 것 같이 번역을 했습니다만 이 절에는 동사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힘쓰다”라는 하나의 동사에 네 가지 활동이 다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힘썼고, 서로 교제하기를 힘썼고, 떡을 때는 일에 힘썼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네가지 활동 모두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도로서 그리고 사도는 사도로서 각자 직무에 힘을 쓰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을 쓰기 위해서 구제사역을 선출된 집사에게 맡기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힘씀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인내를 가지고 끈질기게 모든 힘을 다하여 충성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유상섭 저, 178-9쪽)
사도들의 제안에 예루살렘교회의 전 성도들이 화답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는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5-6절) 선출된 일곱 집사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과부가 구제 대상에서 빠지게 되는 일로 인해서 원망과 불평이 생겨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해결책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이 구제사역을 맡기는 것으로 일단락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지혜요 선출 과정 가운데 개입하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열두 사도들은 대개 갈릴리 출신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헬라 문화에 친숙하지 못한 본토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대개가 히브리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단 두 사람, 안드레와 빌립만이 그리스식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12명 전부가 히브리파 유대인이었고 이름도 대개가 히브리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선출된 일곱 집사의 경우 모두가 그리스식 이름이고 이를 통해서 보건대 이들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회중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충분히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히브리파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출된 일곱 집사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혈연과 지연과 학연 등, 이러한 인간적 조건보다도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서 공동의 지성과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이고 성령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역사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령충만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를 축복해주셨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다는 것은 사람의 수가 불어나 번성하듯이 말씀이 많아지고 확산됨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점점 왕성하여’라고 번역한 동사가 사도행전 7장 17절에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여기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라고 번역한 동사와 같은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번성하여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교회의 제자 수가 더 심히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왕성함이요 말씀의 부흥이요 교회의 부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많은 것들을 가진 성령의 충만한 역사와 순수한 열정과 헌신이 보존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에도 여느 교회처럼 문제가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와 온 공동체 구성원의 전적인 참여와 헌신을 보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직분자가 세워지고 직분자들의 역할 분담을 통해서 교회는 더욱 건강하고 더욱 활력있게 성장해감을 보게 됩니다. 우리 동산교회도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처럼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직분자를 세워감으로써 건강하게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0월20일 설교 (주일 낮)
비밀 (골 1:24-29)
지난 주간에 극동방송에 이름이 익숙한 목사님이 방송에 출연하셔서 반갑게 들었습니다. 성경지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지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고 지금까지 성경지리학 유일한 박사이신 이문범목사님입니다. 총신 신대원에서 오랫동안 성경지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분이 신대원을 졸업하고 언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스라엘로 유학을 가서 히브리어를 공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한 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영어로 수업하고 영어로 히브리어를 깊이 배우는 과정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습니다. 하루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한 30분 내려가면 여리고가 나오는데 유서 깊은 여리고성 위에 앉았습니다. 여리고성에 앉아있는데 앞에는 요단강이 보이더랍니다.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게 이곳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곳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구약시대 때 여호수아가 제사장으로 하여금 맨 앞에서 언약궤 메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던 바로 이곳이구나는 생각이 동시에 오버랩됐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은 곳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건넌 요단강 장소가 겹치네. 왜 그렇지? 여호수아와 예수님의 이름이 똑같은 뜻 구원이라는 뜻이고, 언약궤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지. 예수님은 영원하신 말씀이시고 그래서 진정한 언약궤가 되시네. 진정한 언약궤가 거기 서있네. 요단강 물이 열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에 들어간 것처럼,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문이 열리고 진정한 천국이 임했지.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유는 여호수아 사건을 실제로 성취하기 위한 것이구나...’ 몇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이분의 인생의 향후 모든 것이 거기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박사 논문 주제도 그 짧은 순간에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가 요단강 저편에서 승천했지. 승천한 그 밑에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었고. 구약의 엘리야와 신약의 엘리야가 같은 장소에서 사역을 했구나.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을까? 구약의 여호와이레가 있었지. 아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주신 여호와이레의 장소가 예루살렘이었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세겜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지. 예수님이 왜 가셨지? 그리고 왜 거기서 예배를 가르쳐주셨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첫 예배 드렸던 장소도 세겜이요 여호수아도 첫 예배 드렸던 그리심산 에발산도 그쪽이지. 그래서 거기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구나 예수님이...’ 이런 생각들이 순간 머릿속에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 이것을 전공해야겠다. 성경지리를 공부해야겠다...’ 이분의 평생의 사명과 목표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그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 내용을 듣고 많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교사대학에서 성경신학을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성경신학이란 성경 전체를 통일성 있게 보려는 시도로서 성경의 주된 흐름, 중심적인 사상에 입각해서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보려는 시도입니다. 성경이란 무엇일까? 딱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에 방송을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구약에서 보도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작은 지점에서 소용돌이쳐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면서도 더 큰 흐름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구약성경역사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더 큰 흐름이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소위 명멸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더 큰 사건, 유일한 사건을 가리키며 운명을 다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죄악 역사, 그리고 그 죄악 역사를 되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서의 작은 새창조 역사들, 진정한 새 창조를 가리키는 작은 새 창조 역사들. 구약의 여러 사건들, 가령 홍수로 세계를 심판하시고서 노아와 그의 후손으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한 일종의 새창조,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뭔가 새 일을 도모하기 시작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집트, 애굽에서 노예생활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일으켜서 출애굽 해방시켜주신 사건, 다 뭔가 더 큰 새 창조 역사를 가리키면서 그 자체로 그 시대 내에서의 새 창조였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적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려는 것,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께서 세세무궁토록 영광받으시기 위해서 사람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 이러한 일련의 역사의 크고 작은 흐름이 한 지점에서 만나서 모여서 거대한 임패트적 사건으로 생성되었던 바, 진정한 새 창조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시작,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창조적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냐 아니냐 하는 점에 있음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을 신대원다닐 때도 많이 들었고 자주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충 어떤 의미라는 감은 왔지만 정확하게 콕 집어서 뭐라고 말할까 고심했는데 기본적으로 새창조라는 것이 기존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새 일을 행하시고 결국 구출 혹은 구원해내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심이라면, 이런 저런 구약 사건들도 구원 사건들이지만 가령 사사시대만 놓고 보더라도 사사를 일으켜 구출해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정신 못차리고 죄악 짓고 하면 다시 다른 나라에게서 압제 받게 하는 과정이 되풀이됩니다. 구약역사도 창조 타락 구출(새창조) 도식 속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난 새창조와 구원은 종말론적이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극복해서 새롭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종말론을 지향했지만 철저하게 종말론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신약시대는 모든 게 종말론적입니다. 종말론적이다는 것은 끝까지, 영원토록 이어진다는 점에서 마지막이라는 종말론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구약에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일했고 쓰임 받았죠.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다윗, 에스라, 느헤미야 등. 이들도 작은 구원자들이지만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이들 수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분이 있으니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사 역사 한복판에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구원, 예수 안에 있으면 누구나 죽어도 사는 부활생명을 소망으로 주시사 이루어진 이 구원이야말로 진정 종말론적인 구원입니다! 새 창조적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셨고 때로는 성공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신약시대에 예수 선포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는 바운더리에 국한되었다면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종말론적 이스라엘이요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구약성경의 통일성 있게 보는 핵심이 종말론일 수 있겠구나,, 라는 통찰을 담아서 교사대학에서 성경신학 강의를 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어떤 점에서는 연속성을 또 어떤 점에서는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속성이 있지만 단절이라고 생각될 만큼 새로움의 요소가 덧붙여집니다. 구원을 위한 새 창조, 새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역사적 시도, 역사속에 드리운 하나님의 개입! 그것이 신약시대에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종말론적이냐는 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종말론을 지향하지만 종말론적이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종말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그분의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진정한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부터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구원자요,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종말론적인 공동체요,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도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종말론적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승리와 환난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결합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십자가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여호와의 날’이나 종말에 대한 예언이 멀리서 볼 때 하나의 봉우리로 보였다면 신약시대라는 근접한 곳에서 바라보니까 봉우리가 2개였는데 겹쳐져 있어서 하나로 보였던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도 구분이 됩니다. 종말의 시작과 종말의 완성. 종말의 시작은 복음서와 사도 바울 서신에서 보도하고 있고 종말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계시가 완성됩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종말론적인 인물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온 분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신 분이시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설립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성경의 주인공입니다.
그레고리 빌이라는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의 신약신학교수이신 분이 성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제시하는 단어로 ‘비밀’을 말했습니다. ‘비밀’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9번 나타나는 전문용어인데 다니엘서에서만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비밀’, 그리스어론 미스테리온인데 스물 여덟 번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비밀’이 사용된 용례를 분류해보면 ‘하나님나라의 특성’, 예수의 메시야 직분, 예수의 십자가 죽음(십자가의 비밀: 고난의 한가운데서 권능이 드러나고 승리한다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의 비밀), 예수의 부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이스라엘의 회복 시기 등이 ‘비밀’이라고 표현된 내용입니다. 이것들이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신약에 이르러서 새롭게 드러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밀은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 계획이나 경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드러나게 된 하나님의 지혜!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남! 그러므로 ‘비밀’은 다소 당황하게 만드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비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하거나 파악되지 못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마침내 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사역과 관련됩니다. 진정한 종말론을 도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 자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26-27절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하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도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비밀인데 정확하게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비밀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담겨 있는 비밀인데 이 비밀이 이제 드러났는데 특별히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가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비밀은 바벨론 느브갓네살왕이 꾼 꿈에 대한 감추어진 해석을 가리킵니다. 왕의 꿈에서, 세상의 네 나라를 대표하는 거대한 신상이 있었죠. 손대지 않고 다듬지 않은 돌이 잘려 나와 그 신상을 부숴버렸죠. 그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차게 됩니다. 그 돌은 종말에 세상의 악한 나라들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종말에 하나님이 악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비밀 예언이 신약시대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는데 비밀스럽게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계시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추가로 계시된 비밀은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가 참 이스라엘이신 메시야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참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로 이땅에 오신 분이 지금 “너희 가운데” 즉 “이방인들 가운데”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비밀의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이 참으로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구약성경에서는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모여들고 유대인들의 신앙으로 회심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되어 언약백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신분을 확인해주는 유일한 표지는 오직 참이스라엘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연합되는 것뿐입니다. 오직 메시야를 믿고 그분께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밀이었습니다. 새롭게 계시된 비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소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연합함으로 신분이 확인이 되는 것이며 종말의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비밀을 소유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로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2가지로 적용해보겠습니다.
첫째, 고난 받는 삶을 회피하지 말고 자처해야 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이 목회자로서 또한 선교사로서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받았던 고난과 괴로움이 바로 골로새교회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과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불충분해서라는 의미가 아니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고난으로 충분합니다. 또다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일체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고난을 받으셨고 이후에는 메시야 자신이 직접 받을 고난은 없으시지만 이후로는 그분의 몸인 교회가 받을 고난이 종말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종말에 있을 환난에 대해 예고했고 신약성경은 그 환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먼저 시작되었고 또한 그분을 계승하는 교회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한마디로 종말론적인 환난의 시작이요 계속입니다. 그렇게 현재는 고난의 시기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 고난을 교회가 받는 것이요, 성도들이 시련과 환난과 사탄의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받는 고난이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바울은 기쁘게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사도의 충심입니다. 교회를 위한 지도자의 헌신이요 희생입니다. 기꺼이 제일 앞장서서 고난을 받겠다는 결의입니다. 교회가 받을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먼저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로서 교회에 어려움이 생겨도 그걸 나 자신이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 그럴 때만 우리의 봉사와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시험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살아가는 걸 큰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28절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비밀이요 우리의 생의 비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하고 인격적으로 그분과 친밀하게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말씀 공부에 치중하고 예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이 날로 깊어지고 인격적 관계가 더욱 쌓아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을 깨닫고 십자가를 나의 삶의 방식으로, 부활을 내 인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로 믿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훈련도 받아야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고 기도생활에 더욱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의거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디서 능력 있게 일하시는가?”라고 묻는다면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의 대답은 “바울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과 노력이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고 헌신하고 희생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겠노라는 각오를 가지고 임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이시고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분 안에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담겨있는 그분을 소유하고 알아가기 위해 매진하시기를 아울러 축원드립니다.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힘있게 여러분들에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2019년 10월13일 설교 (주일 낮)
사랑과 두려움 (요일 4:16-21)
동물세계를 보면 동물들은 죽음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동물이 뭐든 생각이 있겠습니까마는 죽음을 유달리 의식하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장례식을 치르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고인류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유인원이 아니라 인류에 넣은 결정적인 이유가 그들의 무덤에서 꽃가루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 가령 원숭이는 죽은 동료 원숭이를 매장하거나 꽃으로 장례를 올리지는 않겠죠.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이 뭐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에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참 대답치고는 세속적인 대답입니다. 평소에 살면서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지 않는 우리는 그럼 뭡니까? 사나 죽으나 별반 다름이 없는 거죠. 죽음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르고 종교에 따라 다릅니다.
퀴블러로스라는 분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로 평생을 보낸 정신의학자입니다. 이분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계속해서 임종에 다가선 사람들을 연구하였습니다. 200명의 임종 시의 환자 인터뷰 결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다음의 5단계로 죽음의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기 전에 무엇을 소원하는지도 알아냅니다. 죽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퀴블러로스의 죽음에 대한 5단계 중 1단계는 ‘부정’입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견치 못한 충격에 대한 자기방어로 볼 수 있고, 현실에 대한 혼란과 아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단계입니다. 2단계는 ‘분노’입니다. 분노의 타겟을 죽음의 원인이 아닌 타인이나 제3의 원인에게 돌리는 단계입니다. 3단계는 ‘거래’ 혹은 ‘협상’입니다. 본인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인지하지만 인정하지 않고자 하며 이를 위해 신과 거래하고 타협하고자 하는 단계입니다. 4단계는 ‘우울’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잃는 것과 헤어질 것을 안타까워하는 극도의 의기소침의 단계입니다. 마지막 5단계는 ‘수용’입니다. 이제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남겨진 자까지 생각할 만큼 안정에 들어서고 죽음 이후에 대해 소망까지 갖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연구결과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이어령박사가 기독교인이 되었죠. 이분이 여러 종교를 비교하면서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가장 고통스러운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우리 앞에 생생하게 직접 나타내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외쳤지만 결국 그 죽음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며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며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고의 고통의 자리에서 지복의 새 생명 곧 영생이 거듭나는 부활의 기적을 이루셨다고 평가했습니다.
기독교가 죽음의 문제를 가장 리얼하게 고통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면에서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처럼 자신의 죽음은 마치 산모가 애를 낳는 것 같은 산통과 같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만 새로운 생명과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친히 해석해주셨습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철저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하며 손을 내미는 소위 ‘타력 종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죽음 앞에 절망한 사람들은 저편에서 내미는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타력종교라는 겁니다. 반면 불교는 오로지 자력으로 업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속으로 들어가서라도 소신공양을 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는 ‘내가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아느냐’고 했고, 도교는 사람이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마치 신선(神仙)이 되어 자연 속으로 융합하는 것으로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월간조선> 2019년 8월호 이어령박사 인터뷰를 참고했음)
죽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해도 종교마다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서 철저하고 날카롭게 직면하기 때문에 타력 구원,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죽음에 대한 철저한 지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죽음에 대한 낯설음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최후 심판의 교리가 있어서 죽음 이후에 대해 또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가중이 되는 것이죠. 성경은 행위에 따른 심판을 말합니다.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몇 구절을 살펴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런 말씀들을 해석할 때 말씀 그대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복음주의 일부에서는 차등상급론의 증거 본문으로 삼기도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데 심판은 행위로 받고, 그 행위에 따라 상급이 차등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겨우 구원 받은 한 편의 강도와 평생을 복음 증거하며 희생하며 헌신한 사람의 상급이 같을 수 있겠냐는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성경대로 ‘행위에 따른 선악간의 심판’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상급을 ‘영생’이라고 보았습니다. 가령,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이런 구절에서 ‘상’을 하나님이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영생의 선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책 ‘기독교강요’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심은 그분의 긍휼히 여기신 결과로서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실 때 우리의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행위에 따라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주체라고 생각하면 안되죠. 구원이 신자들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을 받으면 그때에 이미 영생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완성에 이르도록 행하실 것임을 성경을 따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완성에 이르는 것은 신자들 스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감으로써 참 자녀임을 입증할 때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칼빈은 차등상급론을 부정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이 기업으로 상속받는 영생과 하나님나라를 상급으로 보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유일한 상급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미 약속으로 주신 구원의 복들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심도 또한 동일하게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우리를 속이거나 놀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서 다음과 같이 이어서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행을 통하여, 그가 약속하신 그것들(구원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혹은 열매 맺는 것을 묵상하도록 하며, 또한 그리하여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들에 대해 복된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약속들의 열매가 행위에 따라서 이루어지도록 하셔서, 그 열매가 무르익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엄위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행위, 선악 간에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교리로 인해서 두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내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두려움이 마치 인간의 살갗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떼낼래야 떼어버릴 수 없는 것 같은데, 두려움을 내어버릴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이라는 정서는 사랑이 온전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사랑에서도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물론 아득하게 느껴지겠지만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둘만으로도 충분하고 어떠한 두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둘이 함께하고 이 사랑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무서울 것도 없고 걱정될 것도 없을 것 같은 느낌과 확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말씀 그대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형벌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형벌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발생하는 두려움입니다. 형벌을 예상하는 이유는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벌은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받게 될 형벌이요 사랑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대에서 받게 될 형벌을 예상하고 그로 인해서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사랑이 온전해지면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게 되고 따라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는 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로 눈녹듯 사라지는 겁니다. 죽음 이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도 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되는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하고도 각별한 분 그분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땅에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희생당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로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연합이요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본문 요한일서 4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서게 될 때 비록 그 심판이 우리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라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 이후가 어떻게 펼쳐질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인해 굳게 연합된 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내쫓기게 되어 우리 안에 발붙이지 못한 상태입니다. 죽고 나서 심판대 앞에 설 때 형벌을 받을 것을 염려하는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담대함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기는 담대함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함이요 죽음 이후의 심판대 앞에서도 담대함입니다. 이 담대함은 어디서 옵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아버리기 때문에 비롯되는 담대함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므로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는 담대함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사랑 때문에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서 누리는 평안이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에서 어떠한 것도 끊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그러한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담대함입니다.
17절 뒷부분에서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서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그러하심’이라 함은 어떠한 ‘그러하심’이라는 걸까요? 두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전절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를 통해 보건대 ‘주께서 그러하심’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는 온전하신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셨다는 ‘주께서 그러하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그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 사랑의 연합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의 관계가 심판대 앞에서 담대함으로 이어져나타날 것임은 분명하겠죠.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추가적으로 다른 해석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랑이 온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어느 때냐면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졌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고 말씀대로 서로를 사랑하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늘 아버지의 계명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그렇게 될 수 있고, 또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져서 심판 날에도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앞날로 인해서 불안해하고, 또 언제 죽음이 임박하여 쳐들어올 것인지 두려워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시는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로 굳게 연합되어 있으면, 그러한 연합은 믿음과 세례로 가능할 터인데,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온전해진 사랑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공고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심지어 심판대 앞에서도 어떠한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함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19년 10월6일 설교 (주일 낮)
회복 (II) (왕상 19:1-8)
오늘 본문의 엘리야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직전의 대승리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갈멜산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450명이나 되는 바알 선지자를 통쾌하게 무찌르고 자신을 죽이려고 찾던 아합에게 나타나서 오랜 가뭄이 끝났고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자신감 있게 외쳤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목숨 내놓고 싸워 승리한 전사 엘리야와는 너무나 대비되게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줄행랑치고 있는 초라한 몰골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엘리야는 탈진 상태요 번아웃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서 본능에 충실하게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던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몸은 지칠대로 지쳤고, 죽음의 공포에 맞서서 싸울 용기는 소진되었고,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죽을 힘 다해 싸워서 승리를 한 듯했고, 실제로 위대한 승리를 거뒀지만 그것은 전투에서의 승리지 전쟁에서의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갈멜산 전투는 아합왕이 섬기고 있던 바알 종교의 바알 선지자 450명에 대해 거둔 승리였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섬기는 아세라를 추종하는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는 갈멜산 전투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지적 전투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싸워야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소위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사력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사람들에게 입증해주셨고, 그 사실에 힘을 얻은 엘리야는 관전객으로 머뭇거리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알 선지자를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바알인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을 보고서 결정할 참이었습니다.
사력을 다한 싸움은 일단 승리였으나 그것이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산 너머 산’이라고 이제는 아합보다 오히려 이스라엘 배교를 더욱 부추겼던 왕비 이세벨과의 전투가 또한 남아있음을 엘리야는 예상치 못한 듯합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누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이 날라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당시 사람들이 ‘내가 반드시 어떠어떠한 일을 할 것이다’고 다짐하면서 그대로 행할 것을 강조할 때 자신이 믿는 신에게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이 내리는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각오입니다. 이세벨은 신에게 맹세를 하면서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 동원하고 소위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던 엘리야에게 이세벨의 위협은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곧바로 목숨 내놓고 또다시 싸워야 하는 전투에 참여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갈멜산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붙들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나아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붙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험한 준령에 가로막히자 엘리야는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올라가서 정복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그(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상황을 둘러보니까 도망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맞서 싸우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했습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는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해내기에는 영육이 모두 탈진한 상태여서 믿음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상황에 대해 본능적으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본능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른 이스라엘의 최남단, 네게브 사막으로 나가는 관문인 브엘세바로 도망쳤습니다. 자신을 수종들던 사환은 거기에 남겨두고 광야, 사막으로 더 내려갔습니다.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이기 싫어서 사환을 남겨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생각을 하고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완전한 광야로 더 내려가서 자신의 초라한 몰골처럼 사막에 군데군데 자란, 그늘을 제공하기에는 빈약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읍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됐어, 됐어, 이제 그만!” 이걸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더 이상 지긋지긋해서 못해먹겠다는 것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보다 살아있는 자신의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판단입니다. 그러니 죽여달라는 겁니다. 절망적인 외침과 절규였겠죠. 그 힘으로 이세벨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대항했으면 갈멜산에 이은 또다른 승리를 구가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력을 다해 하나님께 절규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면 죽여달라고 간청한 후 곧바로 엘리야가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크게 절망적인 외침으로 절규했던지 그는 로뎀나무 아래서 잠들었습니다. 너무 지친 것이겠죠.
하나님은 잠들어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천사가 자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깨웠습니다. “드세요!” 여기서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는 이치입니다. 우리 육신은 먹어야 삽니다. 먹어야 에너지도 생기며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지친 심신을 우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동안 갈멜산 전투를 치루느라 여러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사력을 다했던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어 먹게 하고 잠도 푹 자게 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먹고서 또 잠들었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충분히 자게 한 후 다시 어루만져 깨워서 먹을 것을 먹게 하고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가야 할 길, 아직 다 가지 못한 길, 염려되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놓고 보면 완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을 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먹고 자고서 다시 힘을 충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사가 말한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는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엘리야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완전히 배도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이 엘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은 다시 이 사명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가서 다시 맞서 싸워야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과 다시금 싸워야 합니다. 치열한 영적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음식을 먹고 잠도 충분히 잤으니까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서 하던 대로 다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에 다시 참여하기 위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원기를 더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육의 건강과 힘의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시 싸움의 현장으로 사명의 현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좀 잔인한 해석입니다.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잔인하게 해석할 수 있냐는 거겠죠. 엘리야는 “아직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돌아가기에는 아직 회복이 덜 됐어!” 신대원 다닐 때 지금은 은퇴하신 김정우교수님의 ‘엘리야 엘리사’ 과목을 들었습니다. 이 본문 가지고서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그때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이렇게 설교를 종종 했습니다. 젊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엘리야라고 한다면 천사가 한 말이 “이제 작작하고 어서 돌아가!”로 이해했다면 좀 잔인하게 생각되었을 것 같습니다. “나 아직 아니야!”라고 항변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해석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은 회복을 위해서 가야 할 남아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회복만 가지고서는 온전한 회복이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다시 사명의 현장에 복귀하기에는 육신의 회복만 가지고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출애굽 사명을 받았던 호렙산, 출애굽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머무르면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율법을 받았던 호렙산에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새롭게 힘을 얻고 그간의 쪽팔린 행적도 만회하고 영혼이 새로워져야 다시 사명의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진정한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말고 계속 본문을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확실히 엘리야는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육신은 확실히 회복되었습니다. 사십일을 걸어갈 정도로 힘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시나이반도의 호렙산까지 더 남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힘을 얻어 호렙산까지 왔는데 엘리야가 하필이면 굴에 들어갔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굴에 들어갔다는 것은 엘리야가 여전히 영적으로 위축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굴에 들어가있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엘리야가 천사가 말한 “네가 갈 길”을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는 길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호렙산에 이르러서 굴에 들어간 처사는 너무나 소극적인 엘리야를 보여줍니다. 호렙산에서 통성기도를 하거나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그러한 믿음도 그러한 결기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위축된 상태인 듯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왜 굴에 처박혀 있느냐고 묻고 계신 듯합니다.
엘리야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0절을 보십시요.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나님, 제가 열심 빼면 시체뿐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대단해서 여태까지 잘 싸워서왔는데, 여호와의 다른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남은 저까지도 죽이려하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는 듯합니다. 그나마 있었던 열정도 이제는 사라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굴에 쳐박혀 있던 엘리야를 굴 밖으로 나와서 서라고 명하십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우선은 굴 밖으로 나와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니까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 엘리야에게 자신의 영광, 지나가시므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합니다. 11절 계속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폭풍과 같은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여호와의 임재가 있지는 않았고, 이후 지진이 있어서 땅이 크게 흔들렸음에도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지는 않았습니다. 12절입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지나갔으나 아무 일도 없었고, 이제 불이 나타났습니다. 불은 이전의 바람이나 지진보다 엘리야에게 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갈멜산의 불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불로써 응답하셔서 제물을 태워주시므로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보여주셨던 하나님, 그러나 불이 있은 후에는 “세미한 소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세미한 소리’는 간신히 겨울 들릴 듯 말듯한 속삭이는 소리입니다.
갈멜산에서 불로써 만나주신 하나님, 어찌보면 대격변과 소란함과 기적적으로 만나주신 하나님, 이제 호렙산에서는 겨울 들릴 듯 말듯한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십니다.
13절입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겨울 들릴 듯 말듯한 세미한 음성이 나길래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엘리야가 이제야 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람, 지진, 불 등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밖으로 나와서 섰습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미한 음성은 동일한 음성이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굴에 쳐박혀있느냐와 다르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굴 밖으로 나왔다고는 하나 엘리야는 여전히 웅크려 있었고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동일한 질문에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별로 진전된 것 같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동일하게 자신의 열정과 열심은 대단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선지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이제 자신만 남았는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이것이 ‘세미한 음성’의 핵심입니다. 15-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어찌보면 엘리야는 사역에서 이미 정점을 찍었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면서 자신의 말이 없으면 이땅에 비가 없을 것이다, 이제 가뭄이다라고 선포하면서 등장했던 엘리야가 가뭄 통에 그릿 시냇가로 피신해서 하나님이 직접 공급하시는 음식, 까마귀를 통해서 공급해주신 먹을 것을 먹고서 생명을 부지했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고 거기서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죽은 아들까지 살리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서 갈멜산 전투에서 불로써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인정케 했습니다. 이러한 화려한 사역은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이후의 사역은 엘리야에게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사역은 불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이요 웅장한 신적 능력이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엘리야를 통해서 세워진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이라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라는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계획은 엘리야의 것이 아니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을 들어야 했고, 자신의 사역 후반적의 사명에 관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호렙산을 내려가서 엘리야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물음과 항변에도 대답해주셨습니다. “나뿐이다”고 말한 엘리양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셨습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자신 뿐이라고 여겼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복안, 칠천 명이 남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칠천명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를 계승할 엘리사도 포함이 되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지칠 때도 있습니다. 탈진하고 번아웃되어서 더 이상 나아갈 여력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짓누르는 상황 때문에 좌절하고 낙망하고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또다시 전투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힘겨운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삶의 의욕조차 상실되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회복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심으로써 영적인 회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요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요 해야 할 몫입니다. 사명자는 결코 죽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치고 절망한 엘리야를 점차적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의 지치고 상한 심령을 주님이 주신 세미한 음성으로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재확립시켜주심으로 여러분들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19년 9월29일 설교 (주일 낮)
평탄한 길 (스 8:21-23)
우리는 평탄한 길을 걷기 원하지 험악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은 세월을 보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애굽왕 바로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47장 8-9절입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평생의 삶이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이었다는 회고입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평생 우여곡절이 많았고 어떻게 백삽십세까지 살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쉽지 않은 삶이었다는 고백이겠죠.
우리 모두는 ‘험악한 세월’을 지내기보다 ‘평탄한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복음송 “내일 일은 난 몰라요”의 1절 가사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리라 생각합니다. “평탄한 길 주옵소서!”, 이러한 마음의 소원이 응답되는 복된 인생,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라서 본문에서도 에스라가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에스라는 유다 백성들이 2차 포로 귀환할 때 지도자입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한 후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지 약70년이 되었을 때 바벨론에서 1차로 유다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차 포로 귀환으로 약 5만명의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가 BC 538년입니다. 이보다 대략 80여년 후에 2차 포로 귀환이 있었습니다. 이때 지도자가 에스라입니다. 에스라의 지도 아래 1758명의 유다 백성들이 돌아왔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 관리였고,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율법을 잘 알고 율법을 가르친 학사였습니다. 에스라 7장 6절에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라고 에스라를 소개합니다.
에스라는 아마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왕으로부터 유다 파견을 명 받았던 것 같습니다. 왕이 제국의 고위 관리였던 에스라를 본국으로 보내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 정책 중 하나는 각 나라의 종교법을 존중하고 그 법을 활용하여 식민지의 치안과 행정과 사법을 안정적으로 경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은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되었습니다. 라이벌 경쟁상대인 애굽과의 직접적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지대의 역할로 인해서 유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중요성이 인정되었습니다. 유다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유다의 성전체제를 정비하고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유대교 율법에 능통하고 성전에 익숙한 제사장 출신이면서도 페르시아법을 잘 아는 관리가 필요했고 그 일에 에스라가 적격이었습니다. 페르시아왕은 그를 일종의 전권대사로 파견해서 유대교 율법에 맞게 성전체제를 개혁하고 행정권을 수행하고 사법권을 확립하게 했던 것입니다.
왕의 부임 명령을 받고서 에스라는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에스라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돌아가서 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려면 제사장 계층이나 레위인이 대거 함께 해야 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고 에스라는 본국으로 돌아갈 유다 백성들을 모집하였고, 특별히 제사장 출신과 레위인을 신경 써서 모집했습니다. 유다 달력으로 1월 1일에 모집 공고를 내고 모집하고서 1월 12일에 바벨론 아하와 강가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약 4개월의 험난한 여정을 보내고서 5월 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2차 포로귀환의 지도자로서 바벨론땅을 출발하기에 앞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에스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본문 에스라 8장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에스라는 유다땅으로 돌아갈 1500여명의 사람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지 적어도 10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이제는 생활터전이 완전히 바벨론화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결심과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린 자녀도 있었고 중요한 소유물들도 함께 했습니다. 가다가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앞날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특별히 더욱 위험하게 생각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전을 회복하고 개혁하고 성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바벨론에게 사로잡혀 빼앗겼던 중요한 성전 기구들을 가지고 갔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개혁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물도 가지고 갔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액수일 거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 거대한 행렬이 도둑떼에 쉽게 노출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한 소문이 이미 제국 안에 파다하게 퍼졌을텐데 길에서 매복하던 군사들이 이들을 공략할 수도 있을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위험은 에스라가 자초한 측면이 큽니다. 에스라가 왕의 임명을 받고 본국으로 귀환할 때 왕의 도움과 군사력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에스라 8장 22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왕의 임명을 받고 왕의 전권대사로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여서 제국의 군사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손쉬운 길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기보다는 왕에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왕과 자주 알현할 수 있었던 고위관리였던 그가 왕에게 가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선, 곧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도우실 것을 종종 말해왔는데 막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왕의 군사력에 의존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왔던 것의 신뢰성이 타격을 받을 것을 에스라는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확실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별 것 다 걱정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도움이고 하나님의 간접적인 도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참 유난스러운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라보다 13년 후에 그러니까 BC 445년에 제3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던 느헤미야는 에스라와는 반대로 아닥사스다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제국의 군사력의 도움을 받고 안전하게 유다 백성들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와 비교하면 에스라는 어찌보면 근본주의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스스로 위기를 자처한 형국입니다. 편안 길, 쉬운 길을 마다하고 오히려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정면돌파하려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더욱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금식을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평탄한 길”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에, 그리고 닥쳐올 위기가 너무 크게 예상되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탄한 길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금식은 무엇입니까? 금식은 말그대로 곡기를 끊는 것입니다. 곡기를 끊음으로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의 능력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이요 금식기도입니다. 에스라는 온 이스라엘로 금식하게 하면서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기도하되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새벽예배 때 이사야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23장까지 보았는데요 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국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대개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 이유, 열국이 심판당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면 바로 그들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제국을 심판하셨고 또한 교만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열국은 그렇게 심판을 당하고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하는 것은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에 이스라엘을 더욱 정결하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욱 아름답게 빚어가십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생의 상식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평탄한 길’은 요원한 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범죄하고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겸손하게 엎드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서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금식하면서 겸비하게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2차 포로귀환 백성들과 에스라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낙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평탄한 길”을 주셨습니다. 에스라 8장 31절입니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2차 포로귀환 백성들은 무사히 안전하게 예루살렘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평탄한 길”을 달라고 그들이 드렸던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평탄한 길은 무엇입니까? 에스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페르시아왕의 군사적 호위를 받고 안전을 미리 확보하여 사전에 위험을 대비하고, 그렇게 예루살렘을 향해서 떠나는 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에스라는 전도 대상자라 할 수 있는 왕에게 조그만 오해나 하나님의 명성에 흠이 가는 것이나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모순을 염려해서 평탄한 길을 거절했습니다.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는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구하고 있습니다.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서 평탄한 길을 구하는 역설입니다. 왕이 제공하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진정한 왕이시고 이 우주의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이 제공해줄 수 있는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평탄한 길은 안락한 길이 아닙니다. 쉬운 길도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의 도움을 구하면 오히려 평탄하게 갈 수도 있을 터인데 오히려 믿음으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평탄한 길은 오히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평탄한 길은 믿음으로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길이요, 하나님이 가장 좋은 대책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금식하며 겸비하고서 평탄한 길을 허락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만 임하는 도움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이 들어 죽음에 가까웠을 때 어렵게 낳은 독자 이삭의 신붓감을 구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어느덧 40세가 되어 노총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며느리를 구하는 소위 ‘평탄한 길’은 가까운 곳에서 즉 가나안 족속 중에서 며느리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쉬운 길이 아니라 믿음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멀리 떨어진 자신의 고향 나홀성으로 자신의 종을 보내서 거기서 이삭의 신붓감을 찾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고향땅에서 떠나게 하셨을 때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어려운 순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다보니까 순종을 할 때 평탄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삭은 약속의 자녀, 약속의 씨로 여김을 받고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인이 아니라 자신의 동족에게서 신붓감을 구하려고 충성스러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저 멀리 자신의 고향땅에 보냅니다. 가서 신붓감 구해오라는 특명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24장 7절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의 대단한 믿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 약속한 말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이 땅을 차지하려면 이 땅에서 거주해야 하고, 씨가 계속 자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러면 이땅에서 결혼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아무에게나 장가보낼 수 없는 노릇이죠. 이러한 약속을 붙들고서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면서 ‘내가 지금 너를 저 멀리 내 고향땅에 보내서 적절한 신붓감을 구해오라는 명령은 운동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약속을 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너보다 앞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순적하게 신붓감을 예비해놓으신 신붓감을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는 믿음의 말을 합니다.
나중에 이삭의 신부로 리브가라는 여인이 선택되죠. 리브가를 만난 것도 극적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땅 어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엘리에셀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조롭게 만나게 해달라”, “평탄한 길”을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평탄한 길’을 위한 간구는 종 엘리에셀 이전에 아브라함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리브가를 만나고서 그의 집에 가서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40절) 아브라함이 종에게 하나님께서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서 너에게 평탄한 길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 역시 아브라함의 고향땅 어귀에 이르러서 평탄한 길, 순적한 길을 구했던 것입니다. 종은 아브라함의 이 말을 가슴에 담고 간직하였고 고향 마을 어귀에서 하나님께 또 다음과 같이 그래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42-43절)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평탄한 길과 형통함을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평탄함과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에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도 평탄함과 형통함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물론 조건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모세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에게 벅찬 과제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과 걱정뿐이었을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평탄함을 원하느냐, 형통함을 원하느냐, 그러면 말씀대로 순종해라!”고 약속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탄한 길은 손쉬운 길이나 발쭉뻗고 아무 걱정없이 지내는 삶도 아니고, 안락한 길도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려다보니 믿음으로 살아가는 과정속에서 평탄한 길을 구하므로 응답받는 길입니다. 때로는 위험이나 모험을 자처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선택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에 의해서 결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망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결정하는 믿음의 선택이기 때문에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험난함이 예상되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평탄한 길을 구하여 얻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에스라처럼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평탄한 길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을 순적하게 형통하게 이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여생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로 인해서 ‘평탄한 길’로 인도함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9월22일 설교 (주일 낮)
회복 (시 51:10-17)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은 평가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심각한 죄를 짓고 이후에 그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죄 때문에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갈망하며 드린 오늘 시편 51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의 면모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다윗이 결정적으로 넘어진 소위 밧세바 사건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왕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대의 왕의 가장 큰 책무는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할 때 내세웠던 이유 중 하나가 이민족과 전쟁할 때 왕의 역할이었습니다. 전쟁을 기획하고 전쟁에 참전하는데 제일 앞장서야 할 왕의 역할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전쟁은 주로 긴 겨울의 우기가 끝나는 봄철이었습니다. 봄이 되자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만 다윗왕은 참전하지 않고 군대장관 요압이 사령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때가 다윗 왕권의 최전성기였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굳이 다윗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워낙 충성스럽고 용맹한 요압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듯합니다. 하여튼 다윗은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적절한 나날을 보내던 다윗은 석양이 질 무렵 지붕 위에 올라가서 백성들의 집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날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충성스런 군인이요 다윗의 신하였던 우리아라는 사람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때는 목욕하는 여인이 누군지 몰랐을 겁니다. 자신의 왕궁 사람을 시켜서 누군지 알아보게 했고 그 여인을 궁에 들였습니다. 그리고 범죄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왕궁에 소식이 들이닥쳤습니다. 밧세바가 보낸 사람 편에 임신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다윗의 잔머리가 발동되었습니다. 한참 최전방에서 전쟁에 참전 중인 우리아를 특별휴가 명목으로 왕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은 전방 소식을 우리아에게서 듣는다는 이유였으나 오랫동안 전쟁 통에 집에 들르지 못한 우리아를 집에 가게 해서 밧세바와의 불륜의 열매를 덮어버리려는 불순한 의도였습니다. 너무나 충성스러운 군인이어서인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돌고있는 자신의 아내에 관한 소문을 알게 돼서인지 우리아는 자신의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만 집에 가서 편하게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다윗은 술을 잔뜩 먹여서 취하게도 하고 별 수를 다 써보았지만 우리아는 길에서 잘지언정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 방법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죄를 도모했습니다. 죄라는 게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지어야 하는, 소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죄의 특징입니다. 다윗의 잔머리는 무조건 충성하는 충견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전쟁에서 적군의 손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의 봉인된 편지를 전장에 복귀하는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다윗의 잔인함입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잔인함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심복으로서 편지를 들자마자 다윗의 의도를 알아챘습니다. 우리아를 죽이되 표나지 않게 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 우리아를 투입에서 적군과 맞서 싸우다가 우리아를 제외하고 후퇴하여 우리아가 적군의 손에 죽게 하라는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표나지 않게 하려고 우리아뿐 아니라 몇 명의 동료 군사들을 죽게 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요압이 다윗에게 편지로 보고하자 다윗은 우리아뿐 아니라 몇 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죽은 것에 대해 괘념치 말라는 의미로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기 마련이니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답신했습니다.
우리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이 밧세바를 궁으로 들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밧세바 임신으로 인해 촉발된 위기가 말끔히 해결된 듯 보였습니다. 다윗이 드디어 발뻗고 잠잘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이처럼 일단락된 것처럼 상황이 종료되었는데 이때 성경은 그동안 다윗이 죄짓는 것을 지켜만보고 계셨던 하나님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일을 말끔히 해결하고 완료했다고 스스로 안전하게 느끼고 종결지으려 할 때 하나님이 나섰습니다. 다윗의 ‘이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더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죄를 다 짓고난 후에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는 경우입니다. 아예 죄짓지 못하도록 사전에 개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이 자초지종을 나단 선지자에게 알려주셨을 겁니다. 나단은 어찌보면 목숨 걸고 다윗을 찾았습니다. 직접적으로 다윗을 언급하지 않고 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다윗이 편안하게 끝까지 무장해제한 채 듣게 합니다. 마을에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양을 보유한 부잣집이었습니다. 반면에 암양 한 마리 밖에 갖지 못한 가난한 집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잣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부잣집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려고 자신의 많은 양이 아니라 한 마리 암양만 가지고 있는 가난한 집의 양을 빼앗아서 자신의 손님에게 대접합니다. 권력과 힘으로 그리한 것이겠죠.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정의의 사도인양 노발대발합니다. 내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그런 부당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나단 선지자에게 어디에 사는 누가 그런 죄를 지었는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일벌백계해서 정의와 공의를 세워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짧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이었을 겁니다. 충격에 망연자실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는 속사포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베풀어주셨는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시고 평강과 번영을 주시기까지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어주셨는지를 일러주었습니다. 부족할 것이 없이 축복해주셨고 설사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간구하면 이것도 저것도 주실 터인데 왜 정욕과 욕심과 탐욕에 이끌려 빼앗았느냐며 책망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범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처사라고 선지자는 책망했습니다. 그리고서 심판을 선고했습니다. 앞으로 영원토록 다윗의 집안에 칼부림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의 말을 듣고서 다윗은 핑계를 대거나 자신의 죄악에 대해 발뺌하거나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담백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습니다.” 자백을 했습니다. 밧세바에게 그리고 우리아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범했지만 죄는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 죄의 열매인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가심으로써 죄의 열매를 회수하셨지만 다윗의 회개로 인해서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상당히 큰 죄 정도가 아니라 죽을 죄,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만 죄의 결과가 두고두고 다윗의 집안에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1편은 표제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붙어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습니다”라는 죄 고백 후에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과 심정을 담은 참회시를 지었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회개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서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용서해주시고 정결케 해달라고 시 전반부에서 기도한 후 오늘 우리가 읽은 후반부에서는 죄로 인해서 깨어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요 죄로 인해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의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처럼 심각한 죄를 지은 경우가 우리에게는 아마 없을 겁니다. 심각한 죄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죄를 짓거나 실수로 발을 헛디뎌 실족한 경우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와 헌신과 열정이 밋밋하고 미지근한 현 상태를 타개하고 예전 하나님과의 첫 사랑의 때와 같이 회복하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다윗의 회복의 기도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회복입니다. 첫 사랑의 회복이요 거룩함의 회복이요 헌신과 열정의 회복이요 비전과 사명의 회복이요 삶의 의미와 의욕의 회복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까? 세 가지를 간구합니다. 첫째, 우리가 읽은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필요합니다. 천지창조 때 처음 창조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했던 창세기 1장의 동사가 여기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처럼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창조해주셔야 진정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죄 용서함 받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죄 용서함 받고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사슬을 끊고 죄로부터 해방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령과 영혼을 새롭게하는 창조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정결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의 자아가 새로워질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해 넘어지지 않으려면, 그리고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내적 자아가 전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새 창조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회복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심령과 영이 전혀 새로워지려면, 우리의 마음과 영에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전혀 새로운 새 창조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전혀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전부가 새 창조의 역사로 새로 지음받게 됩니다. 단순히 죄에서 용서받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다시 지음 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아서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인생의 항해의 키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인생과 삶의 주체가 되시는 겁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워진 우리의 심령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에서 이루신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이게 진짜 회복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까? 둘째, 11절을 보십시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내주가 있었지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내주하신 것은 아니고, 또 내주하시되 영구적으로 성령이 내주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직임으로 부르신 사람들, 가령 사사나 선지자나 왕이나 성전 지을 때 기술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내주하셨지만 영구적 내주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윗의 간구도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성령께서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염려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의 영으로 충만해서 지혜롭게 공의로 이스라엘을 그간 다스려왔는데 이번 범죄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밀하게 계시해주심이요 알려주심이요 이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케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을 거두어가심은 하나님 앞에서 쫓아냄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우려합니다.
신약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 오순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를 짓고 넘어지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덮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철수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과는 반하게 성령을 소멸하게 만드는 죄악을 걱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에 힘쓰지 않고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거하시지 못하고 성령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것을 일컬어 성령의 소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다시 동일한 죄로 인해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전혀 새롭게 지음 받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우리가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받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복을 원하십니까? 지금의 상태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를 이길 수 있고 무미건조하고 미지근한 신앙상태를 벗어나서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회복이 무엇입니까? 셋째, 12절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합니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즐거워야 합니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기에, 어려울 때 도와주시고 위로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알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에서 비롯되는 헌신이요 섬김입니다. 구원이 너무나 달콤한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기대하게 됩니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져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가슴을 설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것이 회복을 위한 간구입니다.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제일 첫 번째 표적이 무엇입니까? 표적이라 함은 다른 무엇을 상징하거나 가리키는 신호입니다. 일부러 이 표적을 행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의 참 정체성을 내보이셨습니다.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인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첫 선을 보일 때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어떤 표적이었습니까? 즐거운 잔치가 되어야 할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난처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파티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넌지시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소 냉정하게 들리는 대답을 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는 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때는 곧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입니다. 어머니의 포도주를 청하는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처럼 심각하게 자신의 죽음의 때와 연결시키는 걸까요? 포도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옳소이다. 나는 이 세상에 축제의 기쁨을 가져올 수 있고 죄책과 수치로부터 인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나이다. 기쁨을 주러 내가 세상에 왔나이다. 그러나 어머니여, 그러러면 내가 죽어야 하나이다. 내 백성이 기쁨과 축제와 복의 잔을 마시려면 내가 죽음의 잔을 마셔야 하나이다”
이 첫 번째 표적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사역의 목적은 축제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잔치의 주인이니 결국 기쁨을 주로 왔노라 그래서 나의 정체를 드러내는 행동이자 첫 기적은 바로 만인에게 웃음을 주는 일이니라 나를 믿는 이들은 지금부터 기쁨의 강물을 마음에 품고 그 기쁨의 첫맛을 보리라 그 맛은 한없이 고달프고 메마른 시대에 생수처럼 깊은 위안과 새 힘을 주리니 결국 나는 그것을 주러왔노라 그래서 이것이 나의 첫 표적이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축제의 기쁨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믿는 이들의 부활을 이루어 우리의 모든 악과 사망과 눈물을 그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생질문>, 팀 캘러 저, 93-117쪽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모르면 예수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씻어야 할 얼룩과 죄책과 수치가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이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러한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므로 이 회복을 경험하고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9월15일 설교 (주일 낮)
열매 맺는 인생 (겔 47:1-12)
여러분 6월 17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세계 사막화 방지의 날’입니다. 전 세계의 기후변화와 무리한 개발과 자연환경의 오남용으로 인해 사막 지역이 넓어지는 사막화가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막화방지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적인 사막화만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막화 또한 무서운 기세로 우리의 정신을 좀먹고 있습니다. 세상의 현실은 나날이 광야와 같은 불모지가 되어가고 죄로 인해 죽음의 사막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세상을 향해, 그것에 맞서 사막화를 극복하는 생명의 관개용수 활동이 교회의 숭고한 사명입니다.”(김회권교수)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성전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핵심 내용이 성전의 본래 기능의 회복입니다. 회복된 성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본래 제사장 가문의 사람입니다. 유다 왕조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서 그는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환상과 비전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의 핵심은 회복된 성전입니다. 성전이 본래 기능을 회복하는 비전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흘러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적은 양의 물이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물줄기로 커져갔습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발목을, 점차 무릎을, 그리고 허리를, 나중에는 능히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멀스멀 물이 조금씩 나와 흘러가는데 그 물이 점점 많아져서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는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났습니다. 성전이 회복되어 성전을 통해 생명수가 세계 전역으로 흘러가므로 죽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심지어 죽은 사해 바다조차 생명이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물줄기가 커져 강이 되었는데 강 좌우가에 있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새로운 열매를 산출했습니다. 강 좌우 가의 과실나무는 잎이 번성하고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죽었던 것들조차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신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과 비전을 우리도 보고 그 생명의 사역에 쓰임받으므로 열매 맺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거대한 강물처럼 크게 불어난 물은 처음에는 성전 건물의 문지방에서 스며 나왔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성소와 성소 안에 있는 성전 건물은 동쪽에 출입문이 있습니다. 바로 동쪽 성전 문 입구에서 물이 스며나왔습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7장 38-39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성전은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물과 피가 쏟아져나왔다고 말씀합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로 깨끗해진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과 비전은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로부터 쏟은 보혈의 피와 그 육체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성령이 지금도 강같이 흘러 지금도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처음에는 발목이 물에 잠기고 다음에는 무릎이 잠기고, 다음에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마지막에는 헤엄쳐야 할 만큼 많은 물이 있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처럼 되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천 척은 약 450m 가량 됩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은혜체험은 점점 깊어져야 하고 신앙은 전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체험과 신앙의 전진과 성장과 성숙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로지 성령충만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스며나온 물이 불어나서 발목이 잠기고 이어서 무릎이 잠기고, 다음에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마지막에는 헤엄쳐야 할 만큼 많은 물이 있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처럼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갑자기 뻥튀기처럼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흘러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점진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점점 수심이 깊어졌습니다. 발목, 무릎, 허리 깊이, 나중에는 온 키를 덮어버리는 강물! 이 가운데 어떤 상태에서 우리가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었다고는 해도 발목만 물에 잠긴 상태라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일 것입니다. 발목만 잠긴 상태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맘대로, 욕심과 본성대로, 예전 그대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란 마틴 루터가 말한 죄 짓는 자유로서 노예의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결국 죄짓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구속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의 소욕이 온통 우리를 지배하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물이 발목만 찰 때와 허리까지 찰 때를 비교해보십시오. 허리에까지 물이 차면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더욱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결국에는 누구도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오직 강물의 흐름에 맡긴 채 수영해야 할 정도로, 키를 넘길 정도로 거대한 강수가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오직 성령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입니다. 이때에는 육체의 생각보다 우리가 성령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고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경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정도 물이 찼다고 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합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거듭거듭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인 전부가 성령의 이끌림과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성전 밑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물이 거대한 강수가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까?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었던 것들이 되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성전의 동쪽 입구에서 스며나온 물이 동쪽으로 흘러갔습니다. 동쪽에 무엇이 있길래 동쪽으로 흘러갔습니까? 거기에 죽음의 바다 곧 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바다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의 생명수 강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왜 죽음의 바다 사해가 되었습니까? 사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면 표고가 제일 낮아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너무나 깊은 곳에 생긴 바다이다보니 물이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 없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다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이 계속 증발해 염도가 너무 높아져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생명수가 유입되므로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사해조차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의 물고기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1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까요? 사해의 모든 부분이 되살아나면 사해에서 더 이상 소금이 생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실생활뿐 아니라 제사드릴 때도 언제나 꼭 필요한 것이므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생명수가 유입되므로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사해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복음을 들고 나가면 변화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미 선지자 에스겔은 에스겔 37장에서 죽음의 아골골짜기에 가득한 시체,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서 마른 뼈로 널려있는 죽음의 공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그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이미 죽은지 오래된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와 같이 죽은 영혼으로 가득한 사막의 현실 한복판에서 어떻게 생명의 역사가 꽃피워질 수 있었습니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역사,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믿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생명의 복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을 전달해야 합니다. 누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을 굳게 믿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12절에서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과실나무가 맺게 될 새 열매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서 생명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마치 시편 1편에 나오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며 준행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적용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강물 좌우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말씀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이 나무들은 생명으로 푸릇푸릇한 상록수와 같고, 세상의 병든 것과 아픈 것을 치료하는 약재가 될 것입니다. 생명수로 소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생명을 전달하는 전달자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대한 강물처럼 크게 불어난 물이 온갖 것들을 살리는 화려한 생명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러나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12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하나요? 모든 은혜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은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피조물이 되고 성령의 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로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현장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현장이요, 이곳에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고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가는 곳마다 나아가면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수가 강처럼 세상을 향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으로 가득찬 사해 바다까지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서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생명의 자리, 죽음이 아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통로로 우리가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다 생명수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써 맺고 싶은 “새 열매”가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가을에 맺고 싶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우리의 인격이 더욱 성장하기를 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과 섬김으로 다른 지체들을 대해주고 그들이 이로써 기쁨을 얻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으로 인해서 소망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포로상태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수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을 내다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과 비전은 이와 같습니다. 좌절로 주저앉았던 자리를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환상과 비전에서 나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러한 환상과 비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비전이 오늘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성령과의 교통속에서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서 실현되는 축복이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요한복음 15장 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생명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열매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가을에 우리가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강물 좌우에 심겨진 상록수와 같아서 다달이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9월8일 설교 (주일 낮)
근심과 기쁨 (벧전 1:3-9)
인간이라면 누구나 근심이나 고통은 싫고 기쁨과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근심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서 얻게 된다는 것이 삶의 법칙인 듯합니다. 삶이 그런대로 잘 굴러가서 별 걱정 없이 마냥 순탄하기만 하다면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기쁨이라면 ‘난 차리라 기쁘지 않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냥 굴곡 없이 평탄한 삶을 원한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슬픔과 기쁨의 굴곡을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밋밋한 직선의 길 위에서 살고 싶다’ 등등.
그러나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목적지를 정하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나는 별로 원하는 게 없으니까 특별한 기쁨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근심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탄한 길로만 인도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마치 내가 선택하고 정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지지를 받고 도움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지를 향해서, 그리고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점, 인생의 종착지점인 목적지 곧 피니쉬라인(finish-line),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길. 이 길 위에 놓여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근심과 기쁨으로 수놓도록 역사하십니다. 근심과 기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단련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인생의 새로운 출발지점은 어디입니까? 자연적 출생으로 시작되는 인생이 아니라 영적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성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위로부터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자연적 출생으로 시작된 인생이 아니라 이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새출발입니다. 거듭남으로 인해서 우리는 자연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거듭남의 근거가 되는 사건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구원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 구원 열차에 올라타면 우리도 구원 받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부활생명을 받고 영적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자들은 살아있는 소망을 품고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지점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기대와 설렘입니까? 어떤 산 소망입니까? 앞으로 펼쳐질 인생,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인생에게 어떤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까? 어떠한 산 소망을 가득 품고 이제 인생이라는 경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스도인이 품게 된 살아서 꿈틀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시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즉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세상이 아니라, 더럽지 않고, 즉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이 아니라, 쇠하지 않는, 즉 허무하게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헛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해주심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해주신 것이어서 ‘하늘나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업으로 받게 될 하늘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는 5절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이고 9절에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입니다. 결국 산 소망이란 우리가 믿음으로 얻게 될 구원이요 우리가 상속받게 될 영원한 하늘나라에 관한 소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그 구원 사건에 믿음으로 합류하여거듭나서, 새로운 인생의 출발지점에 서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망이며 최종 목표 지점, 피니쉬라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가 달려갈 길의 피니쉬라인입니다. 목표 지점, 골인 지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는 하나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거룩해지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거듭남 곧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전에 입고 있던 허름한 운동복을 출발지점에서는 그대로 입고 있기 마련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고 새로운 운동복이 제공되지는 않습니다. 예전의 허름한 운동복을 입고 그러나 새로워진 심령과 마음속에 새롭게 품게 된 산 소망을 가지고 옛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출발지점에 선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경주가 어느덧 골인 지점에 이르렀는데 피니쉬라인을 통과하자마자 너무나 영광스럽게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과도 같고, 예수님의 비유에서 ‘겨자씨 비유’와도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겨자씨가 다 자라면 엄청나게 큰 거목이 되는 겁니다. 큰 나무가 되어서 많은 새들이 깃드는 그러한 거목이 될 줄 아주 작디작은 겨자씨를 뿌릴 때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음을 뒤늦게 알게 될 뿐이죠.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상속 받게 될 영광스러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적 생명의 미약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됨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이토록 시작과 끝이 찬연하게도 대비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토록 놀라운 결말, 어떻게 가능합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살아있는 소망을 품게 하시고 새로운 출발지점에 세워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경주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의 일을 해주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세 가지는 다 현재형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십니다. 보호해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우리가 목표지점에 이르지 못할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겁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이 썩을 세상’에 몸과 마음이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더럽지 않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더러운 죄악된 세상에 몸과 마음이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쇠하지 않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것들에 몸과 마음이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그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지금도 능력의 팔로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능력 보호’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도달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일은 근심도 주시고 그 근심에 맞설 수 있는 기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근심과 기쁨을 아울러 주십니다. 근심을 집어삼키는 큰 기쁨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지만 왜 근심하게 됩니까? 인생의 시련이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걱정 근심이 없는 때가 우리 인생 가운데 얼마나 될까요? 끊임없는 근심 걱정이 우리를 짓누르고 염려와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잠깐’입니다. 근심, 걱정, 한숨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는 것 같은데 ‘잠깐’이라고 말합니다. 왜 ‘잠깐’입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리게 될 안식과 기쁨에 비교했을 때 이땅에서 고통의 삶이 잠깐이라는 의미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결국 끝이 있고 그 이후에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있기 때문에 ‘잠깐’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즉 상황이 좋지 않아서 걱정 근심을 하게 되었는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 그럴 일이 아님을 깨달아서 거기서 얼른 탈출할 수 있기 때문에 ‘잠깐’일 수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으로 인해서 근심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소망을 생각해보니, 그리고 그 소망을 바라보니까 더 이상 근심에 빠져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잠깐’ 근심하다가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게 변화되어서가 아닙니다. 상황은 여전하고 시련과 고통도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근심하다가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왜 잠깐 근심입니까? 그리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겁니까? 그리고 왜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이것을 알면 어려움 가운데서도 더 이상 근심이 아니라 잠깐 근심으로 끝내고 큰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고난과 시험에는 ‘믿음의 연단’을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믿음의 확실함’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예전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믿음의 시련’으로 번역했습니다. 더 좋은 번역은 ‘연단’입니다. ‘믿음의 연단’입니다. ‘불로 연단하여도’에 사용된 ‘연단하다’로 번역된 동사의 명사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연단’이라는 말은 검증을 거쳐서 진짜임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마치 광석에 들어있는 금을 정련하기 위해서 그 돌을 불속에 넣어 다른 것들은 다 녹이고 금만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진짜 금만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이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진정함과 진짜됨을 드러내는 검증의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연단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연단을 거치게 돼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믿음의 연단’ 과정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입구가 좁은 꽃병 안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안에 들어있지만 꽃병이 깨지기 전까지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소중한 결혼반지를 꽃병에 넣어두게 되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실수로 그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믿음의 연단’이란 이와 같습니다. 깨어질 때 그 속에 있는 모든 더럽고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깨어질 때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추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던 것인데,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고 고통이 들이닥칠 때 그 충격으로 인해서 깨어질 때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은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보여주고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드러내줍니다. 잡동사니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연히 넣어둔 소중한 결혼반지도 찾게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주신 소중한 믿음을 다시 찾게 됩니다. 신혼 때의 신랑 신부 간의 순결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상징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깨어진 꽃병에서 소중한 결혼반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반지처럼 소중한 진짜 믿음으로 단련되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순결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도 연단 받고 있는 중입니다. 순전한 믿음과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다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7절) 하려고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할 만한 상황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 과정을 통해서 금도다 귀한 믿음으로, 그리고 진짜 믿음으로 검증되고 판명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와 선한 양심>, 채영삼 저 참고)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이 찾아와 근심을 하다가도 ‘잠깐 근심’으로 마치고 오히려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요, ‘믿음의 연단’ 과정을 거치고서 금보다 귀한 믿음,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단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근심을 삼켜버리는 기쁨’이 되기에 ‘잠깐 근심’이요 큰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연단’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데, 그 연단 과정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한 ‘잠깐 근심’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됨으로 인해서 주 앞에 설 때 칭찬을 받게 할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여정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세 번째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믿음의 연단’ 과정을 겪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생겨나게 됩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처음에는 소망, ‘산 소망’을 말하고, 그리고 이어서 믿음, ‘연단된 믿음’을 말하고, 이제 주를 향한 사랑을 말합니다. 연단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믿음, 순전한 믿음, 금보다 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됩니다. 참된 사랑의 교제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잠깐 근심’ 이후에 진정한 큰 기쁨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요, 주님과 교제를 나눔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이를 일컬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찬송가 499장 가사처럼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기쁨이 없다면 세상살이의 근심 가운데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에 목적이 있음을 안다고 해도, 그래서 그 과정이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고 단련시키는 유익이 있음을 안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서 근심이 ‘잠깐 근심’으로 마무리되고,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기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나를 향한 주님의 돌보심과 주님의 위로와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게 되니까 주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뜨거운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사랑의 교제의 기쁨과 즐거움을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이 ‘잠깐 근심’이 되고 오히려 더 큰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아무런 아픔이나 슬픔이나 고통이나 시련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가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 믿음으로 동참해서 거듭난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소망을 품고 출발지점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려고, 그래서 목표 지점까지 이르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신앙 여정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도록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의 팔로 붙들어주시는 겁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소망에 관한 확실한 믿음을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우리 인생에게 허락하십니다. 소위 ‘믿음의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근심하게 되지만 그 근심이 ‘잠깐 근심’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연단’의 목적을 알고,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갖게 될지를 알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떠한 칭찬을 받게 될 것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련과 어려운 인생의 고비고비를 겪으면서 우리는 더욱더 분명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예배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오직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요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여정 가운데서 구원의 길 위에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빚어가십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친 후에 우리가 목표 지점에 도달하면 순간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우리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절), 결국 구원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이요, 그래서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시달림과 어려움과 고통이 있으십니까? 이 놀라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의 은혜를 알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심으로 근심은 ‘잠깐 근심’으로 기쁨은 ‘평생 기쁨’, ‘영원한 즐거움’으로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9월1일 설교 (주일 낮)
신혼 때의 사랑 (렘 2:2,13)
도올 김용옥선생이 하버드대학교에서 불교에 관해 강의할 때 미국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하더랍니다: “그럼 불교는 일종의 심리학입니까?” 도올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아~ 그렇죠. 그렇구말구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이분이 언젠가 한 신학대학에서 불교에 관해 강의할 때였습니다. 목사후보생인 신학대학원 학생이 질문하더랍니다: “그럼 불교는 무신론입니까? 불교의 핵심 교리인4법인에 신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없군요.” 도올이 대답했습니다. “아~ 내 강의를 정말 잘 들으셨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최근에 이분이 또 책 한권을 내셨더라고요.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 관한 책입니다. 이책에서 이분은 불교를 대략적으로 소개합니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사법인이라 부르는 4가지 명제입니다. 이것만 정확히 알면 불교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제행’ 곧 모든 현상,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사물, 사건, 그 모든 것은 ‘무상’ 곧 항상됨이 없고 찰나찰나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 쉽게 말해서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제행무상은 두 번째 명제인 일체개고(一切皆苦)로 이어집니다. ‘일체개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명제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존재하는 모든 물건과 사물과 사건은 무아 곧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에 소위 실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상뿐이지 현상 배후에 본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는 마지막 명제인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이어집니다. 제법이 무아 곧 모든 것에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에 들게 되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열반’은 ‘니르바나’인데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열반은 불을 끈 상태입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욕망의 불을 끈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죽고 나서 가는 곳이나 죽고 난 이후의 상태를 뜻하지 않고 살아서 얻게 되는 상태입니다. 즉 번뇌의 불길이 다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법 곧 모든 것이 무아 곧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아무런 집착이나 욕망의 불이 꺼진 열반의 상태에 들어가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싯달타(석가모니)는 이것을 제일 먼저 깨닫고 제일 먼저 성불한 사람이 된 것이죠.
진정한 불교 전문가들은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도올이 이해한 불교는 이 책을 읽어보니까 정확히 파악이 되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 혹은 불교의 신관이 무엇인지 대략 감이 잡힙니다. 기독교하고는 참 많이 다름을 느낍니다.
성경의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추상적 원리나 깨달음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체임을 전제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선지자가 전달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선지자는 생생한 언어로 하나님에 관해 말해줍니다. 특별히 선지자가 전하는 인상적인 대목은 하나님을 신혼 때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참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신혼부부였냐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직후 시작된 광야생활이 허니문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광야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2장 2절을 보십시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시절을 일컬어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청년들의 순애보적인 사랑, 신실한 사랑, 마치 그 사랑뿐이라고만 생각하는 순결한 사랑이 ‘청년 때의 인애’요,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한 광야시절은 ‘신혼부부의 사랑’과 같았다는 하나님의 회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부부의 관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입니다. 광야시절이 신혼부부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만을 생각하는 그 신혼의 달콤한 사랑의 허니문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최근에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지는 CCM곡 중에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를 소개해드립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안타깝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 하나님을 향해서 순수하고 신실하고 뜨거웠던 사랑의 시간은 우리가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씨앗조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혼의 허니문을 지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야, 갈증과 허기로 괴로움을 겪는 광야, 바로 그 광야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만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셔서 양식 삼아 살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말입니다.
평생을 신혼부부처럼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부부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는 이것 저것이 없어서 불편하고 여러 가지 위협도 받고 미래도 불확실하고 보장받는 길이 없었던 시절인데도 하나님은 분명히 내 안에서 살아계셨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이러한 은혜가 광야에서는 있었습니다.
교회사의 훌륭한 신앙인들 중에는 평생을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짧디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혼의 허니문과 같이 달콤한 교제를 누렸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젊은 선교사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분이 대학생 시절에 쓴 일기입니다: “하나님! 제게 거룩한 부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의 것이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찬 삶을 원합니다.” 이분은 에콰도르의 살인 부족인 아우카 족에게 전도하러 갔다가 이십 대28살의 나이에 순교했던 짐 엘리엇입니다. 이때 짐 엘리엇과 함께 갔다가 같이 순교한 네 명의 친구, 이렇게 다섯 명의 아내들이 나중에 아우카 부족의 마을로 들어갑니다. 오랜 노력 끝에 이 다섯 명의 부인들이 그 부족을 변화시키죠. 이러한 내용이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책 <전능자의 그늘>에 의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알려졌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예일대학교 2학년 때 거듭나서 29살에 죽었습니다. 그는 인디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인디언 말을 배우고 인디언 말로 전도하고 설교했습니다. 많은 인디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자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인디언 마을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쳤더니 또 감미로운 열정이 나를 사로잡아 또 기도했습니다. 주님! 기도가 너무 좋습니다!” (<청년설교1>, 김회권 저, 150-151쪽)
저도 대학시절에 다니던 교회 대학부에서 은혜 받고서 이 책을 읽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고 크게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어서 나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하고 마음에 소원을 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이처럼 달콤하고 벅찬 기쁨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책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들은 위기와 어려움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지만 나름 행복하고 안락하다고 여겨지는 시기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지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또다시 광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행복과 만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는 맘몬 숭배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이 연장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진짜 광야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인생들은 목마르고 허무주의라는 늪에 빠집니다. 광야시절의 불편함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영적 공허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진짜 광야생활 중입니다. 광야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과 신혼 때의 사랑을 누리게 해준 곳이 되는가 하면, 이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며 살다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됨으로 인해서 어디에 있든 그곳이 진정 광야같이 메마른 곳이 되는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기에 인생의 비극이 있습니다. 진짜 광야생활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광야생활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여기서 ‘생수’는 ‘살아 있는 물’, 즉 흐르는 물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물이 있는가 하면 웅덩이로 대표되는 고인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흐르는 물, 곧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로 가면 그 생수를 마실 수 있고, 목마르지 않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웅덩이를 팠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물을 모아두기 위해서 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판 웅덩이는 밑이 빠져있어서 결코 물을 담아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때를 따라 반석의 물을 구하는 것은 때론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느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려는 자만감에 반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반석의 물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로 혹은 자신의 힘으로 평안과 안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무익한 시도요 헛된 시도요 결과를 달성치 못한 시도였습니다. 물이 고일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헛수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혀 물이 없는 반석에서도 물을 내셔서 갈한 심령을 채워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 곧 흐르는 물의 근원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잡으려고 모아 둘 수는 없지만 언제나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마치 신혼 때의 사랑의 관계처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비록 그 물을 저장해서 내 소유로 삼고 필요할 때 내 힘으로 떠서 이용하는 그런 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과도 같은 하나님의 풍요함이요 신실함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늘 신선하게 매일 인생에 흘러넘치는 생수를 구하려는 노력 대신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이게 만들고 그것을 든든한 안전판 삼아 살아보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 곧 생수는 그렇게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대신에 우리의 심령에 무엇을 채워넣으려 해도 결코 만족이 없고 결코 기쁨이 없습니다. 결국은 헛된 시도 끝에 도달하는 덧없음이요 허무주의요 일체의 고통일 뿐입니다.
젊은 청년 때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결국 파탄난 상황입니다. 신혼 때의 뜨거운 열정이 식고 부부가 서로 딴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씨를 뿌리기조차 어려운 척박한 광야에서 서로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던 부부가 이제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빠져서 서로를 바라보는 대신에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청년 때의 순결한 사랑의 관계입니까? 신혼 때의 열정적 사랑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고 다른 것들로 대체하려고 이런 저런 웅덩이를 파는 시도를 하게 된 소위 파탄난 관계입니까? 흐르는 물을 매일 신선하게 공급받기보다 보관하여 든든한 안정감을 확보하고 내가 필요할 때 길러 쓰려고 웅덩이를 파서 담아두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고 열심히 웅덩이를 파는 헛수고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께 매일 의존하려는 삶이 힘들어서 마음의 안전과 미래의 담보를 위해서 물을 담아보려고 헛된 시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새 정국에서 강남좌파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강남좌파라는 말을 만들고 처음 사용한 분이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교수입니다. 좌파인데 강남의 생활에 젖은 좌파입니다. 삶의 취향은 부르주아이면서 그리고 그러한 안락한 삶을 포기할 용기도 없으면서 좌파적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강남좌파라 부릅니다. 강남좌파와 달리 골수 운동권 분자도 여전히 이땅에 있습니다. 최근에 월간 신동아를 보니까 민경우라는 분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분은 골수 운동권, 운동권 중에서도 PD계열이 아니라 더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던 NL계열의 운동권인 분입니다. 1965년생인 이분이 원래 1983년에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습니다.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운동권 이념에 경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재입학했습니다. 전형적인 386세대죠. 스무 살 민경우는 학생운동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현재 권부(權府)를 주름잡고 있는 ‘운동권 친구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는 학생회장 출신의 386 운동권이 ‘젊은 피 수혈’ 명목으로 제도권에 하나둘 흡수될 때도 운동 현장에 남았습니다. “나는 우리 아들을 과학고나 특목고에 보내지 않았고 과외도 안 시켰다. 심지어 재수학원도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으로 일했습니다. 통일연대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 기간 두 번에 걸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2005년 출소한 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NL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내부 자정활동”에 나섰습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2012년부터 운동가의 삶을 접고 협동조합 형태로 서울 금천구에서 학원을 운영했습니다. 지금은 “수학교육 혁신에 인생 3기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을 과학기술과 경제·기업에 친화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찌보면 전향한 것이기도 한데요.
이분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분이 그리스도인인 것 같지는 않은데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없이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 변혁을 위한, 20대 초반에 가졌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서 평생을 일관되게 줄기차게 노력하며 달려온 삶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할까? 이런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모든 인생의 활동들은 아무리 사회적으로 가치있고 보람되고 결실이 있다고 해도 참된 생수를 제공해주지는 못합니다. 흐르는 생수는 구덩이를 파서 담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모든 활동들은 헛되고 무익한 시도로 그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 되고나서 이후의 이런 저런 활동들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마치 신혼 때와 청년 때의 사랑의 관계처럼 생생하게 유지되지 못한 채로 이런 저런 활동들을 계속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코 대체할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사역보다, 일보다, 헌신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으로 생생하게 유지하고 발전시켜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광야에 서있으십니까? 그러면 절호의 기회입니다. 신혼 때의 사랑을 회복할 절호의 찬스입니다. 씨를 뿌릴 수조차 없는 광야에 서있으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사랑스럽고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어느덧 9월 1일 가을입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각종 모임과 예배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영혼이 살찌우시고 영적으로 성장, 성숙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깊어짐으로 인해서 한때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그 풍성한 사랑을 누렸던 신혼 때의 사랑을 회복하시는 2019년 가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8월25일 설교 (주일 낮)
가까이하지 않음은 멀어지는 것입니다! (신 4:1-9)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관계에도 때로는 가까움 뿐 아니라 때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함을 강조한 말입니다. 인간 사이에 적당한 거리가 없으면 불이 위협하듯 인간관계를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친밀한 사이라도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한 법입니다.
멀찍이 떨어져서 숲을 바라보면 숲에 나무가 붙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 간에 다 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만약 나무들이 고독해서 더욱 가깝게 붙으려고 하면 그래서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자라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너무 가깝게 붙어 있으면 내실을 다지지 못한 채 위로만 자라게 됩니다. 햇볕을 더 받기 위해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소위 웃자라는 것이죠. 내실이 없이 위로만 자라는 겁니다. 가지도 뻗어야 하고 잎도 만들어야 하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몸통을 가꿔가야 하는데, 온통 키가 자라는데 집중하다보니 몸통이 가늘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약한 비바람에도 견디지 못해 쓰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무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라야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물론 친밀한 사이일수록 ‘거리’를 말하면 이상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양립되기가 쉽지 않은 의존 욕구만큼이나 독립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하는 욕구만큼이나 서로에게서 떨어져 있고 싶은 독립 욕구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더 가깝게 다가가서 사랑을 주고받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어느 때도 나 자신만의 공간에 남아있기를 원할 때도 있습니다. 나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독립성이 침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친밀감과 거리감은 인간관계의 영원한 숙제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쌍방이 어느 한쪽은 친밀해지고 싶어하는데 다른 한 쪽은 거리를 두고 싶어하면 관계가 제대로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데 나는 움찔하거나 뒷걸음칠 때가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관계의 딜레마라 할 수 있죠. 예전에 언젠가 칼럼에서도 언급했던 바,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말한 고슴도치의 딜레마라 할 수 있죠. 우리는 인간관계의 양상에 따라 최적의 거리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과 나 사이>, 김혜남 저 참고)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역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인간을 찾아온 역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역사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너무나 멀어진 하나님, 영어로 ‘God above us’,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 ‘God with us’,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되셔서 인간과 함께 거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땅에 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우리의 심령 가운데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인해서 ‘God within us’,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관계와는 달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리를 유지하려는 태도는 옳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가꿔나가야 합니다. 점점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발전시켜 나아가고 하나님과의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3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3가지는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이끌며 결국에는 완성시키는 세 가지 단계처럼 여겨집니다.
첫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여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목전에 두고서, 그 땅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에게 모세가 마지막으로 율법을 선포한 설교입니다.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충만하게 실현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친밀하게 가꿔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 씀에 귀기울여 듣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가감없이 구석구석 살펴보고 적용함으로써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말씀하심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집중하여 듣고 읽고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귀기울여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온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최근 아마존의 한 작은 부족을 위한 성경이 번역됐습니다. 브라질 아마존에 살고 있는 바나와 부족을 위한 성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성경 이름도 ‘바나와 이야기 성경’입니다. 부족원이 고작 100여명이라고 하는데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부족 중 하나라고 합니다. 성경 번역은 한 한국인 선교사의 손끝을 거쳐 완성됐습니다. 1999년부터 바나와인들과 살고 있는 강명관 선교사가 번역을 했습니다. 강 선교사는 사역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바나와인들을 위한 성경을 번역한 것인데요. 바나와족이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어서 브라질의 공용어인 포르투갈어 알파벳으로 소리나는 대로 성경을 번역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포르투갈어 알파벳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바나와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번역한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이 담긴 100가지 이야기를 발췌해 번역했다는데,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은 5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 속에서 몸을 파고드는 독충과 싸웠던 시간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아주 단순한 언어로 대화하는 바나와 사람들에게 성경의 추상적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번역하는 것도 까다로웠다고 합니다. ‘어린 양’을 번역할 때의 에피소드가 재미있는데요. 아마존 밀림에 양이 살 리가 없죠. 강 선교사는 바나와 사람들에게 익숙한 돼지로 번역할까도 고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보기 때문에 의미가 왜곡될 우려가 커 포기했다고 하는데요. 결국 양을 보여주는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수백 ㎞ 떨어진 도시로 나가 어렵게 살아있는 양을 구한 뒤 마을로 돌아와 양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면서 양이 성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도 가르쳤다고 해요. 일종의 시청각 교육을 한 셈입니다.
또 아마존에 양이 없다보니 마땅한 이름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뭐라고 붙일까 고민하는데 강 선교사가 부인 심순주 선교사와 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자주 들은 바나와 사람들이 “우리도 양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해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성경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세계에 흩어진 여러가지 선교 기관 가운데 “위클리프 성경 번역회”라는 선교기관이 있습니다. 거기서 섬기는 선교사님들은 신앙에 투철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남미나 아프리카나 조그마한 나라 부족들이 모여사는 곳에, 쓰는 말은 있어도 글이 없는 그 곳에서 그들은 언어를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그 언어를 가지고 성경을 번역합니다. 한 사람이 마태복음을 번역하고 죽으면 누군가가 뒤를 이어 다시 그 곳에 좇아가서 마가복음을 번역하고, 또 죽으면 다음 사람이 가서 사도행전을 번역합니다.
이 선교회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 하나가 남미의 어떤 마을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성경 번역을 하다 보니까 그 마을 언어 가운데 “순종”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일을 꼭 하라고 하면서 “꼭 해야 된다” 이런 뜻으로 말을 하는 가운데 계속 이 말을 강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일을 꼭 해야 된다. 네 모든 마음으로”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심부름 가는 아들 뒤에서 아버지가 말합니다.“네 마음을 나누지 말라” 그래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번역하기를 “마음을 나누지 않고 모든 마음으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길게 번역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http://www.euisung.net 에서 발췌)
하나님의 말씀을 온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다 생존하였느니라” 우상숭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잘 섬긴 사람들만 살아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붙어’는 남자가 결혼하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을 이룰지니라”(창 2:24)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부부간의 한 몸 됨에 표현된 단어입니다. 이는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언약적 충성을 묘사하는 단어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붙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딱 달라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자녀가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처럼 마치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붙어 있으십니까?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고 계십니까? 성령충만하십니까?
세 번째 단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주도권은 그러나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완성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야 관계가 완성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마음을 품고 노력하면 하나님께서 더욱 친밀하게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려는 마음을 품고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기도함으로써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하는 것, 그렇게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친밀하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더욱 친밀하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꼭 필요할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요청이면서도 하나님과의 교제 수단입니다. 하나님을 친밀히 알아가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가까이 다가오시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수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므로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소유하고 하나님께 붙잡힘 바 된 것입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가꿔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귀기울여 듣고 그 말씀에 온 마음을 다해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는 계속적으로 기도로 숨을 셔야 합니다.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가까이 나아가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찾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가까이오셔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고 친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아름답게 가꿔나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가까이 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더욱 가깝게 해주십니다. 가까이 하지 않음은 그냥 머물러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가꿔나가고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소원해지게 됩니다. 너무나 멀어지게 됩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면 바로 결과가 나타나게 돼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가꿔나감으로써 하나님이 더욱 가깝게 찾아오시는 인생, 하나님께 완전히 붙들린 인생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8월18일 설교 (주일 낮)
여호와를 섬기는 것 (말 3:13-18)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이산화탄소나 메탄과 같은 온실가스의 증가로 인해서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후변화는 다음 세대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지구의 평균 기온은 18세기 산업혁명기보다 이미 1도 가량 높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2015년 195개국 정상이 모여 파리 기후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최소한 지구의 온도를 산업혁명기때보다 2도가 넘지 않도록 목표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지구 평균 기온보다 1도 이상 더 오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지구의 평균온도가 현재보다 1도 이상 높아지면 지구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전문가들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25m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처럼 해수면이 상승하면 고도가 낮은 지역이나 저지대에 있는 나라들이나 전 세계 해안가의 평야지대와 강 하구의 삼각주 지역이 물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인구의 약 30%가 해안지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막대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인류의 대멸종을 경고하기도 합니다. 안토니오 구테헤스 UN 사무총장은 ”2020년까지 경로를 바꾸지 않으면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며 기후변화에 대한 각국의 노력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작 개별 국가의 정상들은 적극적 노력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입니다. 2017년에 트럼프대통령은 파리기후협약의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다른 나라들도 협약을 이행하는데 머뭇거리고 있습니다.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 배출을 제로 상태를 만들겠다는 목표가 시들어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절대 다수는 과학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직하게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지만 당장의 눈앞 의 이익 때문에 예측가능한 과학적 진실이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류는 파국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트럼프와 같은 지도자들이 기후변화 문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과학에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당장의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호황을 맞이해야, 그리고 업계의 이익을 대변해야 선거에서 득표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지도자 뿐이겠습니까.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인류의 미래에 진짜 이득이 되는 게 무엇인가보다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채 살아갑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만 좇다가 인류는 사라질 운명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중앙일보 2019.8.17.)
눈앞의 이익이 영원한 이득을 눈감게 만듭니다! 당장의 현실만 해쳐나가려 하다보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해질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 인생에게 진짜 이득이 될지 우리는 진정 예측하지 못하는 걸까요? 먼 미래를 내다보기보다 당장 발등의 불부터 끄려 하는 어리석음이 인생의 나약함을 보여줄 뿐입니다.
미래를 예측하는데 어려움이 많은 게 현실입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극지방의 빙하를 녹여 해수면의 온도를 상승시킬 것은 불 보듯 뻔한데,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서 고위도의 해수의 밀도에 변화가 생기면 지구 해류의 순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고위도 지방에는 오히려 평균 온도가 내려가는 빙하기가 출현할 것을 예측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말해지지만 실제로 어떻게 될지는 확실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과학적 예측은 그나마 어느 정도 정확하게 예측이 됩니다만, 정치적인 판단에 관한 예측이나 사회변동에 관한 예측은 정확한 예측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미국의 정치분석가로서 정확히 선거 결과를 예측하여 유명세를 탄분이 있습니다. 네이트 실버라는 젊은 분입니다. 2012년 미국 대선이 민주당 오바마와 공화당 롬니가 맞붙었습니다. 여론조사결과 박빙의 승부가 예측되었지만 대부분의 선거 전문가들이나 여론조사기관의 예측은 공화당 롬니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네이트 실버는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 확률을 91%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예측은 수많은 자료들 중에서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자료들을 엄선하고 과학적, 통계학적으로 분석하여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그의 예측이 적중하여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뿐 아니라 미국 50개 주의 상원의원 당선자도 정확하게 예측하였습니다.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이 처음 대통령에 당선될 때도 그의 예측은 정확하였습니다. 그러나 2017년 트럼프와 힐러리의 대선 때는 그의 예측이 빗나갔습니다. 그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이 될 확률이 71.4%로 보았지만 실제로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대선 족집게’라는 별명을 얻었던 그지만 이로서 정치적 예측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정치적 예측뿐 아니라 경제 예측도 어렵고 우리 인생의 미래에 관한 예측도 어렵습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무엇이 우리 인생에 진정한 이득이 될지 알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당장 자신의 눈이 보기에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여 거기에 몰빵하고 그 이익을 붙잡기 위해서 애쓰지만 먼 미래에도 정작 자신에게 진정한 이득이 되는지는 예측을 하지도 않고, 예측 할 수도 없고, 성경이 말하는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보지 않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대차대조표나 손익계산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현 시점에서 내 인생에 무엇이 득이 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손이 되는지, 이익은 무엇이고 손해는 무엇인지, 자산이 얼마고 부채는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서 이전과 비교해서 무엇이 손해가 되었고 무엇은 또한 이익이 되었는지를 작성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가 지금은 그렇게 보여도 먼 미래에도 자신에게 이득이 될 것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4-6절에 보면,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여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육체를 자랑할 만한 것이 있다면 율법에 맞게 8일 만에 할례를 받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나면서부터 된 것과, 이방인으로서 할례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게 아니라 혈통적 이스라엘 민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 자신이 12지파 중에서 남유다에 속했던 베냐민 지파였다는 것, 히브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정통 히브리인이었다는 것 등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출생으로 얻게 된 특권들이죠. 이뿐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열성으로 성취한 것들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성결과 경건에 힘쓰는 바리새인이었고, 이단 세력이라고 생각되는 교회를 박해했고, 성경 율법을 놓고 보더라도 계명을 잘 지키는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음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그가 자랑스러워했던 것들일 뿐입니다. 이어지는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여기서 ‘유익’은 대차대조표에서 좌변에 기록하는 이익(자산)을, ‘해’는 우변에 기록하는 손해(부채)에 해당하는 회계용어입니다. 이전에 자랑스러워했고 추구했던 것들이 바울 자신의 인생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추구해야 할 가치로 여겼습니다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한 이후에는 그것들이 유익이나 이득이 아니라 손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족보나 뛰어난 혈통, 바리새인으로서의 율법적 성취와 열성을 과거에는 이익으로 생각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그러한 것들이 이익이 아니라 손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이익이 아니라 손해라고 깨닫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3장 8절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자신의 주로 아는 지식의 탁월한 가치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인생의 막대한 이윤이요 자산임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 있다면 다른 어떤 것들이 없어도 자신의 인생장부는 큰 플러스요 흑자임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마치 시장에서 교환을 할 때 압도적으로 높은 가치와 같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그리스도를 얻는다면 그 인생은 결국 남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오히려 인생의 손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들을 손해로 처리해버린 것입니다. 마치 배설물과 같이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얻으려는 목표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이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에 충성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바울은 하나님과 경쟁하는 것들은 무엇이든 해로 여기고 손해라고 기록해버린 것입니다. 굉장히 올바른 처사죠.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고 하나님께만 충성해야 하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유일한 통치만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작성한 인생의 대차대조표는 진리에 입각한 대차대조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작성한 대차대조표는 진리에 입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인생에 플러스가 안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장 이득이 안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내뱉은 말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완악한 말이었다는 겁니다. 표면적으로 대놓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실제로는 하나님께 완악한 그들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스르는 완악한 말’로 규정하신 것은 어떠한 것일까요? 14-15절을 보십시오. 먼저 14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헛되고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완악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자신의 인생에 당장의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왔지만 고단한 현실은 바뀌지 않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삶이 곤고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무슨 유익이 있냐며 헛될 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관점은 당장의 눈앞의 이익에 국한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면 당장 인생사가 나아져야 할 텐데도, 그러한 인생의 당장의 이득이 없으니까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더 이상 갖지 못하고, 하나님이 행하실 변화를 기대하기를 포기하고 체념한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기대의 상실이요 더 이상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오히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플러스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는 교만한 인생이 오히려 잘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은커녕 오히려 번성하고 세움을 입고, 악행하는 자들이 세움을 입으니까 이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셔야 하는데 실제 현실은 오히려 하나님도 없는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데도 문제 없이 잘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섬김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악행하는 자가 잘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시험하는데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제재도 없고 재앙도 없고 화도 없고 오히려 잘만 되더라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거스르는 완악한 말로 규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 헛되고 아무 인생에 유익이 없다는 불평과, 악을 행하는 자들이 도리어 번성한다는 불평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을 들여다보고 인생의 고통스런 삶의 탄식을 하나님이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세상에 불의가 가득하고 불의한 자가 오히려 득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사람들이 말들을 하는 바로 그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바로 그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도 서로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 나와있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말을 들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소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리에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해두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해주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기억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기념책’에 기록해두심은 하나님의 기억해주심을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상징입니다. 누구를 기억해주신다는 겁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기억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들, 그래서 여호와를 섬기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응답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행하실 것임을 믿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보십시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기념책에 기록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것입니다. ‘특별한 소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세굴라’인데요, 보석 같이 귀하게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장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것도 헛되다고 말하지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이들을 소중한 보석처럼 여겨주실 것이며, 마치 아비를 섬기는 아들을 아끼는 부모 같이 그들을 아껴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18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여기에서 ‘돌아와서’, ‘분별하리라’는 두 개의 동사는 대부분의 주석가들의 의견대로 ‘다시 보게 될 것이다’를 뜻하는 표현입니다. 너희들이 악인에 비해서 의인이 어떠한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에 비해 그분을 섬기는 자들이 어떠한지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헛되게도 여호와를 섬기냐며 비웃고 조롱하던 이들이 결국에는, 당장의 이익적 관점으로만 생각하던 그들이 결국에는 전혀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침내 오셔서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을 아끼실 그날이 이르면, 이들은 경악할 정도로 놀라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비웃던 그들이 오히려 존귀케 되고, 악인의 최후를 보게 될 때의 당혹감과 경악과 놀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삶이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요, 겸손과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며 아름다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요, 많은 사람들이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그 섬김이 하늘에서 해같이 빛나리...”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다니엘서 12장 3절에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섬김을 다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결국 분별해내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새벽예배 때마다 지금 전도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리고 번성한 시대의 왕이었던 솔로몬이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니까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와 노력과 영화가 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반면에 오직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알고 살아가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다 누리고 인생 말년에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 지혜자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당장의 눈앞의 이익만을 좇고 그 이익이 생각만큼 없다고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아예 접어버리고 더 이상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섬김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정한 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섬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종말의 축복, 썩어지지 아니하는 영생의 면류관을 얻는 복락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8월11일 설교 (주일 낮)
이기는 자 (계 21:1-7)
CCM곡 중에 ‘승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강명식씨가 작사하고 부른 노래입니다.
승리
강명식 사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絶緣)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오 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모두 힘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결과가 어떠해도 주님만 빛나시고
주님 평안 내안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승리라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주님만 내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요한계시록은 생각만큼 신비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면 미래에 되어질 일을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 이유가, 미래에 되어질 일을 족집게처럼 짚어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미래에 되어질 유일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도래할 것’이라는 점뿐입니다. 역사의 끝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형태로 우리의 눈에 보여질 것이라는 웅대한 비전을 요한계시록은 보여줍니다. 그 도래가 영광스럽고, 우리의 소망이 헛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도래라는 점은 그 도래가 무척이나 어렵게, 수많은 난관을 뚫고, 방해하는 적대자를 물리치고서, 지연의 지연을 거듭한 끝에 역사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오늘 본문에서 그 하나님의 완성된 나라를 맛 볼 사람을 이 땅에서 “이기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사람들을 일컬어서 “이기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 7개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긴다” 혹은 “이기는 자”라는 표현이 각 교회마다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가령,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고 하였고,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전달된 내용 중에 3장 21절에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여기서도 “이기는 그에게는”이라고 표현하죠. 다른 교회를 향해서도 승리를 강조합니다. 여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예수님이 이겨서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같이 라오디게아 교회도 이기면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7교회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낙심치 말고 굳건히 서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인내하고 견뎌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기는 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계시록 1장 9절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환난과 참음이 꼭 필요한 바, 그렇게 환난을 잘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자신 역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기는 자가 될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은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동안 죄악된 세상에서 옛 자아가 영향 받기 쉬운 죄의 잔존한 세력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세상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b)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시대의 상속자입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옛 시대의 거주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 한복판에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도 새 시대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과 기준에 맞추지 않고 그것들을 거슬러서 살아가다 보니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미움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따라서 살려 하지 않고, 경험을 따라 살지도 않고, 이 세상 지혜를 추구하지도 않고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고난이 있고 어려움도 많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이겨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구원의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하고서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4 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승리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인한 부활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과 죄와 죽음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승리는 갈보리에서 결정적으로 거둔 승리요 이를 일컬어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이라 칭하는 전쟁이요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승리한 바로 그 방식으로써 우리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는 이후 잔당 소탕 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국지적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해줍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통치하는 자신의 나라를 이땅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죠. 이 전쟁은 우주적 전쟁입니다. 어둠의 영적 세력에 대항하는 우주적 전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본문 21장에서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이 의가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으로 변환되고, 이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와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상징하는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땅에 임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5-6절) 창조로써 우주를 여시고 역사를 여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와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써 창조의 원대한 목표를 이루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때에는 처음 창조가 완전히 새롭게 되어서 만물이 갱신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므로 인생의 모든 목마름이 풍성한 은혜로 해갈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승리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 승리의 책인 셈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적 도래가, 그리고 우리 신앙인의 관점에서는 신앙생활의 최종적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이기 때문에 이겨야 합니다. 인생도 하나의 거대한 싸움이므로 여기서도 이겨야 합니다. 크고 작은 인생의 싸움, 사역의 싸움, 내면의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겨야 합니다. 누굴 이기고 어떻게 이겨야 할 것인가가 자연스레 뒤따르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적 도래를 방해하는 적대세력은 무엇이며, 신앙생활의 최종적 승리를 어렵게 하는 세력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적 도래라는 대단원의 막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에 땀이 나게 할 정도로 긴장감을 가져다주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대단원을 최종적 승리로 마감하려는 우리의 가장 큰 위협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에서 그 일차적 적대세력은 ‘바벨론’으로 호칭되는 로마제국이며, 그 제국의 황제입니다. 특별히 역사적 맥락에서 그것은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당시 로마제국이며, 황제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의 전체적 흐름과 일치하게 로마제국과 그 황제와의 대결에 국한하지 않고,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소위 ‘정사와 권세’를 그 배후로 지목합니다. 공중의 권세잡은자 곧 사탄의 세력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적 승리는 ‘정사와 권세’에 대한 승리이며, 하나님나라의 완성적 도래는 ‘정사와 권세’를 깨드리고서 임합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역사를 드러내며 폭로하고 있고, 그 역사의 끝에 하나님나라의 완성적 도래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역사의 심판,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나라의 완성적 도래가 있을 것이며, 거기에 우리 신앙의 위대한 승리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역사라고 말한다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행동,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흐름입니다. 죄악된 흐름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네 삶, 인간 역사입니다. 자기 확장, 자기 이익, 자기 중심성,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는 일 등을 하나님 없이 자기 안의 내재적인 자원을 가지고 수행하고자 하는 것, 이게 바로 역사의 추진력이고 역사의 동력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드러내고 폭로하고 정죄하여 심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수많은 상징과 환상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역사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역사를 종말에 이르게 합니다.
이 승리는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가져오는 사명 감당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나라가 이땅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를 적대하는 세력에 대한 승리요 이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힘겹게 오고 있고 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는 확보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으로 언급되는 부류는 용 혹은 옛뱀으로 불리는 사탄과, 이땅에서 사탄의 대리자들인 짐승들 등입니다. 우리의 이김은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합니다.
바로 그렇게 승리한 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땅에 임하는 새예루살렘성, 그런데 그것은 천상의 교회로서 지상의 교회의 원래 소속이 바로 천상입니다. 바로 그 새예루살렘성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 희생과 죽음을 통해 신실하고 충성된 증인이 됨으로써 역사를 구속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증인으로서 증언 방법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흐름에 반하고 역사의 악함을 폭로해주는 십자가를 짊어짐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렇게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그 방법과 그 방식대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식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겁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신앙인의 최종적 승리를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리하면, 요한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당시 소아시아 7교회에게 다시 새롭게 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이었고, 그 사명을 이루는 방식에 대한 말씀이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 말씀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델이 됨을 요한계시록은 풍부한 상징과 이미지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 그래서 최후의 승리에 이르게하는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비결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르는 길에 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세상의 흐름과 역사에 반하는 어린양으로서 이 죄악된 세상에 드러남에 있습니다. 힘과 폭력과 강함이 득세하는 이 어둠의 시대 한 복판에서 “어린양”으로 빛을 비춰주셨던 예수님처럼 바로 그렇게 “어린양”으로 서 있음에 승리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환경과 형편과 상황에 좌우됨 없이, 사람들의 주된 가치관을 거슬러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진리의 길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영원한 모범이 ”어린양“으로 불리었음을 상상하려고 애쓰라.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연인의 마음에 걸림이 될 것이다. 누가 어린양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사도 바울 역시 이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고후 12:9,10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드러나셨기 때문에 유다의 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약함과 무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강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진리 위에 교회가 서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사명 감당이 거기서 비롯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계시록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승리는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가져오는 사명 감당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나라가 이땅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를 적대하는 세력에 대한 승리요 이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힘겹게 오고 있고 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는 확보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승리한 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땅에 임하는 새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믿음의 백성들 모두가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므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기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8월4일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을 찾고 기다리자! (시 40:1-3, 16-17)
성경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시는 하나님’이시되 전부가 이미 왔다고 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오시는 하나님’이시며 요한계시록 표현에 의하면 ‘장차 오실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든 영원토록 우리에게 다가오실 부분이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크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유한자인 우리가 받으려면 끝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현재도 오시는 하나님이 장차 오실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남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 좋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기를 힘쓰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기를 구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신앙입니다. 손에 잡히도록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그래서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는 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더 기다리기 위해서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겁니다. 더욱더 기대를 가지고 기다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겁니다.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더욱 앙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찾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기다림의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힘써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토록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 응답이 오기까지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듣고 응답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말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위기의 때에 기도하고서 하나님의 응답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지,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기보다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부르짖는 간구에 응답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에 대해서 종교개혁가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는 더욱 천천히 우리를 구원하실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고 있는 상황에 유의하고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만일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하나님께서 활동하시지 않고 주무시고 계신 것처럼 보여질 때, 이는 우리를 속이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굽힘이 없는 용기와 믿음으로 참을 수만 있게 된다면, 우리가 그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적합한 시기는 마침내 오고야 말 것이기 때문이다.”
– 칼빈 주석 시편 40편 1절 중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다림을 외면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절에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간절히 기다리던 끝에 하나님의 응답이 극적으로 임했습니다.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말 그대로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나를 끌어올려주시고, 나의 피난처가 되시사 안전한 반석 위에 두 발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응답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도와주신 겁니다.
그 결과 극적으로 자신을 건져주신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전과 전혀 다른 하나님 체험으로 인해서 이 찬양은 “새 노래”로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새로 배운 찬송이어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체험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하게 되어서 “새 노래”로 부르는 찬송이라 칭한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나님의 극적인 역사는 그 역사를 체험한 나에게는 찬송이 되지만 그 역사를 목도한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됩니다. 기도 응답의 결과로서 임한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과 수렁에서 끌어올려주신 기적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지혜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는 찬송이 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것이어서 새 노래의 찬송이 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간접 체험한 것이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이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크신 역사와 놀라운 행하심을 보고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그 두려움이 변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40편 전반부는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으로 상징되는 큰 위기에서 건짐을 받은 경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위기를 다윗왕이 처한 전쟁의 위기로 봅니다. 승산이 없는 전쟁이거나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전쟁을 앞두고 다윗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허락해주심을 감사한 시입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대신에 하나님께서 높고 단단한 “반석”위에 서게 하셔서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어주셨음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극적 위기 탈출 체험과 건짐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러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입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넣어두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교훈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노래가 시편 40편 전반부의 시입니다.
아프리카의 케냐에 선교사로 일하던 히킨슨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밤 히킨슨 부부는 나이로비로 가기 위해 마침 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마우마우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은 선교사들을 살해하여 시체를 토막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으로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차가 고장이 나서 멈추었고 다시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차안에서 하루 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이 되어서야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목적지인 나이로비에 도착하였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그 지역의 한 지도자가 선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날 밤 일단의 폭도들이 히킨슨 부부를 습격하기 위해 차로 접근을 하였는데 열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서
무서워 도망을 왔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히킨슨 선교사는 "열 여섯 사람이라고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몇 주 후 히킨슨 부부는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휴가 기간 중에 친구인 클레이 브렌트가 질문을 하였습니다. "최근 자네에게 위험한 일이 있었지?" "왜 그러는 데?" "사실은 지난 3월23일 자네와 자네의 가족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 교회로 달려가 기도를 하였었네" "그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열 여섯 명의 성도들이었네"
(- http://cafe.daum.net/cgsbong/21kg)
성경에는 생명이 위태로워지는 큰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부르짖는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관해 수많은 사례를 말씀합니다. 바이올라 왈덴이라는 분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만약 홍해가 당신 앞을 가로막고 있고, 왼쪽에는 산이요 오른쪽에는 광야가 있으며, 뒤에서는 애굽 군인들이 말을 타고 쫓아온다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라. 왜냐하면 그 상황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홍해와 같은 어려움에 둘러싸여 있을수록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홍해를 하나님의 기적적인 권능으로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마라’라는 지역에서 물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정해주셨고 모세가 그것을 물에 던지니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 순종하고 의를 행하면 모든 질병으로부터 치료해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6절입니다.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뿐 아니라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응답을 보고합니다. 역대하 20장에 나오는 소위 ‘여호사밧왕의 기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5). 히스기야왕의 기도, 바울의 기도도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2-4절에 보면,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합니다.
이번 주에 있을 단기선교활동을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에 대한 감사, 오늘 본문의 다윗처럼 큰 위기에서 극적으로 건져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 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미국 역사에 내려오는 기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네소타 주의 이야기입니다. 1874년부터 77년까지 3년에 걸친 가뭄과 심한 메뚜기 떼로 농작물은 전멸하고 대경제공황에 빠졌습니다. 1877년 4월 27일 주지사 필스베리씨는 모든 주민에게 감사기도의 날을 선포하였습니다. 농작물이 전멸하였으나 몸이 살아있고 앞으로도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미네소타 주민 전체의 감사기도가 하늘을 덮었습니다. 정말 믿기 어려운 사실은 들판을 덮었던 메뚜기 떼가 며칠 사이에 전부 죽은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설명을 시도하나 기적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http://blog.daum.net/sjl0212/6038891)
시편 40편 후반부는 또다시 들이닥친 위기의 순간에 과거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음을 되돌아보면서 다시 하나님의 개입과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체험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기도에 응답해주셔서 극적인 위기로부터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맛보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함으로 주를 찾는 자들은 누구라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과거에 오셨던 하나님이 이제 다시 오시는 하나님으로 찾아오셔서 인생의 위기 가운데 극적인 도우심으로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오시는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에게 또한 장차 오실 하나님으로 체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주를 찾는 자는 모두가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소서라고 왕이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극적인 건짐과 도우시는 손길을 갈망하는 자들은 그들의 소망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체험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한갓 미물에 불구하고 연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지만, 이러한 우리를 생각해주시고 도와주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그러나 오래 지체하지 말고 기도에 응답해달라는 간청으로 이 시편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시 다윗은 인생에 들이닥친 위기, 특별히 전쟁의 위기 하에서 다시 한 번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 가운데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건져주시고 그의 발을 “반석”위에 세워주시고 그의 걸음을 견고케 해주셨던 것처럼, 다시 들이닥친 인생의 큰 위기, 국가적 전쟁이라는 큰 위기 앞에서 왕으로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왕이 왕으로서 국가를 위해 드리는 기도이며, 백성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이며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온 백성들이 함께 주를 찾고 그 결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고, 이 큰 위기 앞에서 주님의 극적인 구원을 기다리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하심으로 응답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연약한 인생들에게 유일한 도움, 진정한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뿐임을 다윗은 고백하며 더 지체지 말고 응답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의 도움이 되어주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고,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인생의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오실 하나님, 장차 오실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큰 위기로부터 극적으로 건져주시기까지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간절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간절히 기다리면서 여호와를 찾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기다리도록”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리가 오직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존해 줄 것을 기대하거나 요망하지 않게 될 때 우리의 믿음이 순전한 것으로 증명됨을 알 수가 있다. 이 세상에서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과 수단을 궁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만 기대하도록 가르치고 계시는 구원을 멸시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 칼빈 주석 시편 40편 16절 중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립시다! 기다리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찾고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믿음의 순전함을 증명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 자신의 도움이심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믿음의 순전함을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게 온갖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위기의 때에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셔서 여러분의 입술로 하여금 새노래를 넣어주셔서 “하나님은 위대하시다!”고 고백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7월28일 설교 (주일 낮)
뿌리는 기쁨 거두는 기쁨 (요 4:27-38)
세계적인 대문호인 톨스토이가 쓴 <고백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쓰기 이전에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라는 장편 소설로 세계적 문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나이 오십이 되기 전에 이미 세계적 대문호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그는 40대 후반에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에 관해서 해답을 찾지 못해 거의 3년간 정신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 시절의 고백입니다: “나의 삶은 정지되어 버렸습니다. 나는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잠잘 수는 있었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게 삶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땅에서 꼭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되는 것,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 마음속에서 원하는 어떤 것이 있어도, 내가 그것을 이루든 못 이루든 그 결과는 무의미할 것임을 나는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겪은 문제의 핵심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지나간 자신의 삶은 온통 악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모든 게 죽음에 의해 사라져버리는 온통 신기루와 같은 삶에 대해 회의가 찾아온 것입니다.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죽음으로 끝날 인생이라면 삶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시절, 그는 매 순간 자살 충동을 느꼈습니다. 자살 충동이 자라나는 것만큼이나 그는 하나님을 찾으려 발버둥쳤습니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찾으려고 하기 이전에 그는 이미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역사나 철학이나 문학뿐 아니라 과학책까지 뒤적였습니다. 삶의 해답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상황이 심각해졌을 때, 그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나섰습니다. <고백록>의 제12장의 제목은 “하나님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는 먼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존재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은 모든 원인들의 원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의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생각해볼수록, ‘이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과 내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금세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께 간절히 하소연하듯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주여,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나를 구해 주십시오! 오, 주여, 나를 가르치셔서 내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하소연할 분도 없다는 생각에 곧 사로잡히게 되어 또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윽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통렬한 슬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거야.” 이러한 고백을 하고 나면 자신 안에 어떤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살아갈 가능성과 삶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도 또다시 절망속으로 빠져들어서, 자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수백번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3년 가까이 통과할 무렵, 지나간 생각들을 정리하는 어느 때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지난 3년간 내 안에서 생명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이 수백 번이나 반복되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만 오직 살아있을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는 내가 살아나고,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잊어버렸을 때에는 내가 죽는구나, 이렇게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을 잃었을 때 죽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찾을 때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네가 찾고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순간 톨스토이 안에서 어떤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없이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 안과 주변의 모든 것이 환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 빛이 톨스토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체험 이후로 자살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톨스토이는 ‘삶의 힘’을 찾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던 어떤 ‘의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름 붙였던, 그 ‘의지’입니다. 불교와 회교까지 여러 종교도 연구했고 섭렵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모국어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신앙의 본질은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는 의미를 삶에 부여하는데 있다. 신앙은 ‘나는 왜 살고,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신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가 알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의지에 굴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의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그 의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그 의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굶주린 거지를 넓은 과수원의 기계실에 데려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면서, 거기에 있는 어떤 장치의 손잡이를 위아래로 조작하는 일을 시킵니다. 거지는 자신이 왜 이곳에 데려와져서 이 손잡이를 조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이 과수원이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그 손잡이를 조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잡이를 조작하는 순간, 비로소 그는 그 손잡이가 펌프를 작동시키고, 그 펌프는 물을 길어 올려서 과수원 곳곳으로 이어진 수로로 내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과수원의 과일들을 거두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허드렛일들을 하던 그에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중요한 일이 맡겨지게 될 것이고, 그는 자기가 속한 과수원의 구조와 운영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거기에 더 깊숙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자기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 목적에 부합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이란,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함께 둘러 앉아서 “우리가 왜 손잡이를 조작하는 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토론하고 숙고를 거듭한 후에, “주인은 어리석거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이 유일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인데, 우리가 알게 된 유일한 것은 우리 삶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삶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사람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내리는 결론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불행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하므로 이땅에서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업에 동참할 때 인간이 참된 만족에 이르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노력이 결국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땅에 태어났고, 인간의 목적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총체적인 의미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드는 느낌은 톨스토이가 감수성 짙은 소설가로서 하나님을 찾는 과정과 자신의 내면의 일지를 뚜렷하게 드러내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변호를 위해서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톨스토이가 얻어낸 결론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땅 수가성의 야곱의 우물에서 뜨거운 정오에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영적인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영적인 대화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여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절) 이 말은 수가성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뜨거운 정오에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여인이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닐까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는 사이에 마을로 음식 구하러 간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음식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잡수라고 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 제자들은 ‘그 사이에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드렸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알쏭달쏭한 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주님이 먹고서 힘을 내고 살아갈 힘을 얻는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보냄 받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것’은 방금 전에 있었던 수가성 여인의 회심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수가성 여인에게 메시야이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여인에게 한줄기 삶의 빛을 제공한 것, 그렇게 살아갈 이유와 삶의 목적을 찾아주신 것! 한마디로 전도한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는 양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두 가지 격언을 언급하십니다. 첫 번째로,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5-36절), ‘통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씨를 뿌리고 어떻게 바로 거둘 수 있겠느냐, 씨 뿌린 후에 최소한 4개월은 지나야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지만 지금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림과 동시에 추수하게 되지 않았느냐. 파송과 수확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 종말의 축복이 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에 왔느니라. 이런 시대는 뿌리고 거두고 거두고 뿌리는 일들이 풍성하게 동시에 이루어져서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나 모두가 기뻐하는 축제의 시간들이다. 지금 이렇게 수가성 여인이 마을 사람들을 몰고 우리에게 나아오고 있지 않느냐’ (30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한마디로 지금은 복음의 씨앗을 뿌림과 동시에 거둠이 있는 수확의 시대, 추수의 시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히려 일꾼이 모자랄 정도의 결실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자는 뿌리는 자든 거두는 자든 모두가 함께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시절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격언을 소개하십니다. 37-38절입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새로운 시대는 하도 풍성한 시절이라 파종과 수확이 동시에 일어나고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모두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의 시간이라 해도, 뿌리는 자가 그동안 있었기 때문에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라는 격언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역사의 과정속에서 씨를 뿌리고 심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수확이 가능케 된 것이라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깝게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심은 복음의 씨앗이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옴으로 추수하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이 이 마을 사람들을 추수하러 예수님께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세례요한이 사마리아 근처 요단강 가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뿌렸고 그 이전에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뿌렸고 오늘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복음의 생수라는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그 수확을 오늘 제자들이 별 노력없이 거두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게 우리 인생의 양식과 같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일’이란 문맥의 흐름을 보면 우리 인생에게 씨를 뿌리고 심고 거두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됩니다. 씨를 뿌린다고 꼭 우리가 거두게 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은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로 자리매김한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간증을 그분이 쓴 <보호하심>이라는 책에서 보았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고신 교단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으로 정말 경건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조그만 개척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그만 17일째 되던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 이분이 한참 민감한 10대였는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교회를 불같이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으시고 그 담임목사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이 참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린 나이에 당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이분의 어머니였습니다.목사인 남편이 그토록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회의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이때 이후로 막내였던 이찬수목사님에게 “네가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 하시는 중에 돌아가셨단다. 하나님께서 너무 빨리 부르셔서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 그러니 자식인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이 견딜 수 없이 싫었습니다.
이분이 목사가 되고 언젠가 미국집회를 마치고 어머니가 계시는 시카고에 들렀다가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처녀 시절 예수님을 영접한 어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분의 머릿속으로 지난날에 대한 필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40일 금식기도를 하러 가셨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오셨던 그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날에도 어머니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택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서 이분의 가정은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해야 할 만큼 풍랑은 여전히 거세게 일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시는 주님’, 자신의 모든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이 늘 돌보실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어머니의 믿음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만들었다고 간증을 합니다.
끈질긴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서른 살 때 목회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도의 열매를, 교회를 향한 그 기도의 열매를 자식인 자신이 지금 말도 안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두게 된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한지 6년 만에 1만명의 성도가 모이는 구원의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뿌리고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누가 뿌리게 될지 또 누가 거두게 될지 모를 일이고, 내가 심는다고 내가 거두게 될 거라는 보장은 없어도 내가 뿌린 씨앗은 반드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보장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만약 거두게 된다면 그것은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씨를 뿌린 노력의 결실임을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의 도움의 결과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가장 결정적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땅에 떨어져 썩어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놀라운 희생의 결과로써 새로운 은혜의 시대, 놀라운 결실의 시대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를 뿌리면서 또한 거두기까지 하는 종말론적인 풍요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결코 ‘헛됨’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삶, 이런 인생에는 삶의 회의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처럼 삶의 힘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심고 또한 무엇을 거두어야 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하나의 씨 뿌림에 비유합니다. 언제나 선택에 직면하는 우리의 삶은 마치 어떤 밭에다 씨를 뿌릴 지를 선택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는 육체라는 밭이고, 하나는 성령이라는 밭입니다. 육체라는 밭 안으로 (‘위하여’보다 ‘안으로’가 더 나은 번역임) 씨를 뿌린 사람은 그 육체라는 밭으로부터 ‘부패’라는 소출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썩어 버린 것을 수확한다는 말 자체가 역설이죠. 궁극적인 멸망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일 뿐입니다. 썩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라는 밭에다 인생의 씨를 뿌린 삶, 곧 세속적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반면에 성령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은 성령이라는 밭으로부터 영생이라는 값진 소출을 거둘 것입니다. 영생이란 성령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삶,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뿌려짐으로써 우리가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씨를 뿌리고 거두는 영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은 성령이라는 밭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끝은 영생이라는 소중한 수확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씨앗을 마음껏 뿌리고 또 풍성하게 수확하는, 삶의 의미가 충만하고 삶의 목적이 분명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