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11일 설교 (주일 낮)
이기는 자 (계 21:1-7)
CCM곡 중에 ‘승리’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강명식씨가 작사하고 부른 노래입니다.
승리 강명식 사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더 좋고 편한 가능성의 유혹을 절연((絶緣)히 잘라버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 가는 것 바로 승리라네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오 하고 싶은 말 그 많고 많은 말 모두 힘겹게 억누르고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결과가 어떠해도 주님만 빛나시고 주님 평안 내안에 있으면 그것이 바로 승리라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승리가 무엇인줄 아는가 오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을 허옇게 잠재우고 주님만 내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오직 주님만 따라가는 것 오직 주께서만 말씀하게 하는 것 주님만 내 안에 사시게 하는 것, 바로 승리라네
요한계시록은 생각만큼 신비한 책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을 잘 이해하면 미래에 되어질 일을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 이유가, 미래에 되어질 일을 족집게처럼 짚어주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미래에 되어질 유일한 사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도래할 것’이라는 점뿐입니다. 역사의 끝에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 형태로 우리의 눈에 보여질 것이라는 웅대한 비전을 요한계시록은 보여줍니다. 그 도래가 영광스럽고, 우리의 소망이 헛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한 도래라는 점은 그 도래가 무척이나 어렵게, 수많은 난관을 뚫고, 방해하는 적대자를 물리치고서, 지연의 지연을 거듭한 끝에 역사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도래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씻겨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오늘 본문에서 그 하나님의 완성된 나라를 맛 볼 사람을 이 땅에서 “이기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나라를 상속할 사람들을 일컬어서 “이기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 7개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도, “이긴다” 혹은 “이기는 자”라는 표현이 각 교회마다 빠짐없이 등장합니다. 가령, 처음 교회인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2:7)고 하였고,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전달된 내용 중에 3장 21절에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여기서도 “이기는 그에게는”이라고 표현하죠. 다른 교회를 향해서도 승리를 강조합니다. 여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예수님이 이겨서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은 것같이 라오디게아 교회도 이기면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7교회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이 하나님나라의 성격과 전적으로 일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낙심치 말고 굳건히 서라!는 것입니다. 끝까지 잘 인내하고 견뎌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기는 자가 되라는 권면입니다. 계시록 1장 9절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환난과 참음이 꼭 필요한 바, 그렇게 환난을 잘 인내함으로 말미암아 자신 역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기는 자가 될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에 이르기까지 고난과 같이 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은 즉각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 동안 죄악된 세상에서 옛 자아가 영향 받기 쉬운 죄의 잔존한 세력의 영향을 받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세상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b)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시대의 상속자입니다만, 우리는 여전히 옛 시대의 거주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 한복판에 여전히 살고 있으면서도 새 시대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과 기준에 맞추지 않고 그것들을 거슬러서 살아가다 보니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미움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을 자초하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따라서 살려 하지 않고, 경험을 따라 살지도 않고, 이 세상 지혜를 추구하지도 않고 오직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고난이 있고 어려움도 많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이겨야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구원의 완성에 이를 수 있음을 확신하고서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4 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승리요,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인한 부활 승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인해서 이 세상의 주관자인 사탄과 죄와 죽음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승리는 갈보리에서 결정적으로 거둔 승리요 이를 일컬어 요한계시록은 아마겟돈 전쟁이라 칭하는 전쟁이요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승리한 바로 그 방식으로써 우리도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결정적 전투에서 승리는 이후 잔당 소탕 작전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의 국지적 전투에서 승리를 보장해줍니다. 우리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예수님은 자신이 통치하는 자신의 나라를 이땅에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최전선에 있는 것이죠. 이 전쟁은 우주적 전쟁입니다. 어둠의 영적 세력에 대항하는 우주적 전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본문 21장에서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이 의가 거하는 새하늘과 새땅으로 변환되고, 이어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와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상징하는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이땅에 임하는 순간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5-6절) 창조로써 우주를 여시고 역사를 여신 하나님께서 새 창조와 하나님나라의 완성으로써 창조의 원대한 목표를 이루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때에는 처음 창조가 완전히 새롭게 되어서 만물이 갱신되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므로 인생의 모든 목마름이 풍성한 은혜로 해갈을 얻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승리의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 승리의 책인 셈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적 도래가, 그리고 우리 신앙인의 관점에서는 신앙생활의 최종적 승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이기 때문에 이겨야 합니다. 인생도 하나의 거대한 싸움이므로 여기서도 이겨야 합니다. 크고 작은 인생의 싸움, 사역의 싸움, 내면의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완성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겨야 합니다. 누굴 이기고 어떻게 이겨야 할 것인가가 자연스레 뒤따르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적 도래를 방해하는 적대세력은 무엇이며, 신앙생활의 최종적 승리를 어렵게 하는 세력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나라의 완성적 도래라는 대단원의 막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에 땀이 나게 할 정도로 긴장감을 가져다주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생활의 대단원을 최종적 승리로 마감하려는 우리의 가장 큰 위협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에서 그 일차적 적대세력은 ‘바벨론’으로 호칭되는 로마제국이며, 그 제국의 황제입니다. 특별히 역사적 맥락에서 그것은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당시 로마제국이며, 황제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의 전체적 흐름과 일치하게 로마제국과 그 황제와의 대결에 국한하지 않고,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소위 ‘정사와 권세’를 그 배후로 지목합니다. 공중의 권세잡은자 곧 사탄의 세력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최종적 승리는 ‘정사와 권세’에 대한 승리이며, 하나님나라의 완성적 도래는 ‘정사와 권세’를 깨드리고서 임합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역사를 드러내며 폭로하고 있고, 그 역사의 끝에 하나님나라의 완성적 도래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즉, 역사의 심판, 역사의 종말에 하나님나라의 완성적 도래가 있을 것이며, 거기에 우리 신앙의 위대한 승리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역사라고 말한다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행동,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흐름입니다. 죄악된 흐름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네 삶, 인간 역사입니다. 자기 확장, 자기 이익, 자기 중심성, 자기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는 일 등을 하나님 없이 자기 안의 내재적인 자원을 가지고 수행하고자 하는 것, 이게 바로 역사의 추진력이고 역사의 동력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역사를 요한계시록은 드러내고 폭로하고 정죄하여 심판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수많은 상징과 환상의 이미지를 동원하여, 역사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역사를 종말에 이르게 합니다.
이 승리는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가져오는 사명 감당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나라가 이땅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를 적대하는 세력에 대한 승리요 이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힘겹게 오고 있고 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는 확보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으로 언급되는 부류는 용 혹은 옛뱀으로 불리는 사탄과, 이땅에서 사탄의 대리자들인 짐승들 등입니다. 우리의 이김은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능합니다.
바로 그렇게 승리한 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땅에 임하는 새예루살렘성, 그런데 그것은 천상의 교회로서 지상의 교회의 원래 소속이 바로 천상입니다. 바로 그 새예루살렘성에 영광스럽게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 희생과 죽음을 통해 신실하고 충성된 증인이 됨으로써 역사를 구속하고, 세상을 구원하는, 바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데, 증인으로서 증언 방법은 예수님처럼 이 세상의 흐름에 반하고 역사의 악함을 폭로해주는 십자가를 짊어짐이라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렇게 희생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의 그 방법과 그 방식대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식만이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겁니다.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신앙인의 최종적 승리를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리하면, 요한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당시 소아시아 7교회에게 다시 새롭게 사명을 일깨우는 말씀이었고, 그 사명을 이루는 방식에 대한 말씀이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그 말씀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델이 됨을 요한계시록은 풍부한 상징과 이미지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승리의 비결, 그래서 최후의 승리에 이르게하는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비결은, 하나님의 어린양을 따르는 길에 있습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며, 세상의 흐름과 역사에 반하는 어린양으로서 이 죄악된 세상에 드러남에 있습니다. 힘과 폭력과 강함이 득세하는 이 어둠의 시대 한 복판에서 “어린양”으로 빛을 비춰주셨던 예수님처럼 바로 그렇게 “어린양”으로 서 있음에 승리의 비결이 있는 것입니다. 환경과 형편과 상황에 좌우됨 없이, 사람들의 주된 가치관을 거슬러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진리의 길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에 대해 키에르케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 영원한 모범이 ”어린양“으로 불리었음을 상상하려고 애쓰라.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연인의 마음에 걸림이 될 것이다. 누가 어린양이 되기를 바라겠는가?” 사도 바울 역시 이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고후 12:9,10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온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드러나셨기 때문에 유다의 사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약함과 무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강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진리 위에 교회가 서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사명 감당이 거기서 비롯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오늘 요한계시록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비결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승리는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가져오는 사명 감당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나라가 이땅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나라를 적대하는 세력에 대한 승리요 이김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렇게 힘겹게 오고 있고 또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결정적인 승리를 우리는 확보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승리한 자들만이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땅에 임하는 새예루살렘성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믿음의 백성들 모두가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므로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는 이기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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