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20일 설교 (주일 낮)
비밀 (골 1:24-29)
지난 주간에 극동방송에 이름이 익숙한 목사님이 방송에 출연하셔서 반갑게 들었습니다. 성경지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지리로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고 지금까지 성경지리학 유일한 박사이신 이문범목사님입니다. 총신 신대원에서 오랫동안 성경지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분이 신대원을 졸업하고 언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이스라엘로 유학을 가서 히브리어를 공부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한 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영어로 수업하고 영어로 히브리어를 깊이 배우는 과정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습니다. 하루는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좀 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한 30분 내려가면 여리고가 나오는데 유서 깊은 여리고성 위에 앉았습니다. 여리고성에 앉아있는데 앞에는 요단강이 보이더랍니다.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게 이곳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곳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구약시대 때 여호수아가 제사장으로 하여금 맨 앞에서 언약궤 메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던 바로 이곳이구나는 생각이 동시에 오버랩됐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은 곳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건넌 요단강 장소가 겹치네. 왜 그렇지? 여호수아와 예수님의 이름이 똑같은 뜻 구원이라는 뜻이고, 언약궤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는데 예수님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셨지. 예수님은 영원하신 말씀이시고 그래서 진정한 언약궤가 되시네. 진정한 언약궤가 거기 서있네. 요단강 물이 열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에 들어간 것처럼,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문이 열리고 진정한 천국이 임했지.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이유는 여호수아 사건을 실제로 성취하기 위한 것이구나...’ 몇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이분의 인생의 향후 모든 것이 거기서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심지어 박사 논문 주제도 그 짧은 순간에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구약의 엘리야가 요단강 저편에서 승천했지. 승천한 그 밑에서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었고. 구약의 엘리야와 신약의 엘리야가 같은 장소에서 사역을 했구나.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을까? 구약의 여호와이레가 있었지. 아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을 위해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주신 여호와이레의 장소가 예루살렘이었지.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세겜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주셨지. 예수님이 왜 가셨지? 그리고 왜 거기서 예배를 가르쳐주셨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첫 예배 드렸던 장소도 세겜이요 여호수아도 첫 예배 드렸던 그리심산 에발산도 그쪽이지. 그래서 거기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셨구나 예수님이...’ 이런 생각들이 순간 머릿속에 전광석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래 이것을 전공해야겠다. 성경지리를 공부해야겠다...’ 이분의 평생의 사명과 목표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그 길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 내용을 듣고 많은 통찰을 얻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교사대학에서 성경신학을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성경신학이란 성경 전체를 통일성 있게 보려는 시도로서 성경의 주된 흐름, 중심적인 사상에 입각해서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보려는 시도입니다. 성경이란 무엇일까? 딱 한마디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차에 방송을 듣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납니다. 구약에서 보도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작은 지점에서 소용돌이쳐 일어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면서도 더 큰 흐름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는 구약성경역사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더 큰 흐름이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소위 명멸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더 큰 사건, 유일한 사건을 가리키며 운명을 다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역사의 흐름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죄악 역사, 그리고 그 죄악 역사를 되돌리기 위한 하나님의 개입으로서의 작은 새창조 역사들, 진정한 새 창조를 가리키는 작은 새 창조 역사들. 구약의 여러 사건들, 가령 홍수로 세계를 심판하시고서 노아와 그의 후손으로 새롭게 역사를 시작한 일종의 새창조,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뭔가 새 일을 도모하기 시작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이집트, 애굽에서 노예생활 할 때 하나님이 모세를 일으켜서 출애굽 해방시켜주신 사건, 다 뭔가 더 큰 새 창조 역사를 가리키면서 그 자체로 그 시대 내에서의 새 창조였습니다. 이렇게 새롭게 역사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출하여주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적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려는 것, 첫 사람 아담과 그의 자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하나님께서 세세무궁토록 영광받으시기 위해서 사람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 이러한 일련의 역사의 크고 작은 흐름이 한 지점에서 만나서 모여서 거대한 임패트적 사건으로 생성되었던 바, 진정한 새 창조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나라의 선포와 시작,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새창조적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이냐 아니냐 하는 점에 있음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종말론적이라는 말을 신대원다닐 때도 많이 들었고 자주 사용하기도 했지만 대충 어떤 의미라는 감은 왔지만 정확하게 콕 집어서 뭐라고 말할까 고심했는데 기본적으로 새창조라는 것이 기존의 역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새 일을 행하시고 결국 구출 혹은 구원해내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심이라면, 이런 저런 구약 사건들도 구원 사건들이지만 가령 사사시대만 놓고 보더라도 사사를 일으켜 구출해주시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정신 못차리고 죄악 짓고 하면 다시 다른 나라에게서 압제 받게 하는 과정이 되풀이됩니다. 구약역사도 창조 타락 구출(새창조) 도식 속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난 새창조와 구원은 종말론적이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극복해서 새롭게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종말론을 지향했지만 철저하게 종말론적이지 못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신약시대는 모든 게 종말론적입니다. 종말론적이다는 것은 끝까지, 영원토록 이어진다는 점에서 마지막이라는 종말론적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구약에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일했고 쓰임 받았죠.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다윗, 에스라, 느헤미야 등. 이들도 작은 구원자들이지만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구원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이들 수많은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분이 있으니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부활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사 역사 한복판에서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구원, 예수 안에 있으면 누구나 죽어도 사는 부활생명을 소망으로 주시사 이루어진 이 구원이야말로 진정 종말론적인 구원입니다! 새 창조적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셨고 때로는 성공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실패할 때도 있었지만, 신약시대에 예수 선포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라는 바운더리에 국한되었다면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는 종말론적 이스라엘이요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구약성경의 통일성 있게 보는 핵심이 종말론일 수 있겠구나,, 라는 통찰을 담아서 교사대학에서 성경신학 강의를 했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어떤 점에서는 연속성을 또 어떤 점에서는 불연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속성이 있지만 단절이라고 생각될 만큼 새로움의 요소가 덧붙여집니다. 구원을 위한 새 창조, 새 창조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끊임없는 역사적 시도, 역사속에 드리운 하나님의 개입! 그것이 신약시대에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연속성이 있으면서도, 종말론적이냐는 점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불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은 종말론을 지향하지만 종말론적이지 못했습니다. 진정한 종말은 신약시대에 이르러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그분의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그분이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진정한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부터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구원자요, 예수님을 믿는 교회가 종말론적인 공동체요,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도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종말론적인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이것이 천국의 비밀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승리와 환난에서 본질적으로 서로 결합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표현되었다는 점에서 ‘십자가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여호와의 날’이나 종말에 대한 예언이 멀리서 볼 때 하나의 봉우리로 보였다면 신약시대라는 근접한 곳에서 바라보니까 봉우리가 2개였는데 겹쳐져 있어서 하나로 보였던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말도 구분이 됩니다. 종말의 시작과 종말의 완성. 종말의 시작은 복음서와 사도 바울 서신에서 보도하고 있고 종말의 완성은 요한계시록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계시가 완성됩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 5:39-40)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종말론적인 인물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가져온 분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신 분이시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설립하신 분이십니다. 이분이 바로 성경의 주인공입니다.
그레고리 빌이라는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의 신약신학교수이신 분이 성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함께 제시하는 단어로 ‘비밀’을 말했습니다. ‘비밀’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9번 나타나는 전문용어인데 다니엘서에서만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비밀’, 그리스어론 미스테리온인데 스물 여덟 번 나옵니다. 신약성경에서 ‘비밀’이 사용된 용례를 분류해보면 ‘하나님나라의 특성’, 예수의 메시야 직분, 예수의 십자가 죽음(십자가의 비밀: 고난의 한가운데서 권능이 드러나고 승리한다는 것으로서의 십자가의 비밀), 예수의 부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이스라엘의 회복 시기 등이 ‘비밀’이라고 표현된 내용입니다. 이것들이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다가 신약에 이르러서 새롭게 드러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비밀은 이전에는 감추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계시된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 계획이나 경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드러나게 된 하나님의 지혜!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남! 그러므로 ‘비밀’은 다소 당황하게 만드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비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못하거나 파악되지 못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지혜가 마침내 계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사역과 관련됩니다. 진정한 종말론을 도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 자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26-27절에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하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도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비밀인데 정확하게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비밀의 내용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담겨 있는 비밀인데 이 비밀이 이제 드러났는데 특별히 이방인들 가운데서 이 비밀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가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2장에서 비밀은 바벨론 느브갓네살왕이 꾼 꿈에 대한 감추어진 해석을 가리킵니다. 왕의 꿈에서, 세상의 네 나라를 대표하는 거대한 신상이 있었죠. 손대지 않고 다듬지 않은 돌이 잘려 나와 그 신상을 부숴버렸죠. 그 돌은 거대한 산이 되어 온 땅에 가득차게 됩니다. 그 돌은 종말에 세상의 악한 나라들을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종말에 하나님이 악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의 비밀 예언이 신약시대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는데 비밀스럽게 성취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계시되지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추가로 계시된 비밀은 종말의 하나님의 나라가 참 이스라엘이신 메시야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입니다. 참 이스라엘이요 이스라엘의 왕이요 메시야로 이땅에 오신 분이 지금 “너희 가운데” 즉 “이방인들 가운데”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비밀의 영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이 비밀이 참으로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구약성경에서는 이방인들의 구원은 이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모여들고 유대인들의 신앙으로 회심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이 되어 언약백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신분을 확인해주는 유일한 표지는 오직 참이스라엘이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연합되는 것뿐입니다. 오직 메시야를 믿고 그분께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밀이었습니다. 새롭게 계시된 비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소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연합함으로 신분이 확인이 되는 것이며 종말의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의 소망”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비밀을 소유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로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2가지로 적용해보겠습니다.
첫째, 고난 받는 삶을 회피하지 말고 자처해야 합니다. 본문 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이 목회자로서 또한 선교사로서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받았던 고난과 괴로움이 바로 골로새교회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과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불충분해서라는 의미가 아니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고난으로 충분합니다. 또다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인 교회의 일체성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고난을 받으셨고 이후에는 메시야 자신이 직접 받을 고난은 없으시지만 이후로는 그분의 몸인 교회가 받을 고난이 종말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종말에 있을 환난에 대해 예고했고 신약성경은 그 환난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먼저 시작되었고 또한 그분을 계승하는 교회에게도 이어지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한마디로 종말론적인 환난의 시작이요 계속입니다. 그렇게 현재는 고난의 시기로 점철돼 있습니다. 그 고난을 교회가 받는 것이요, 성도들이 시련과 환난과 사탄의 미혹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받는 고난이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바울은 기쁘게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사도의 충심입니다. 교회를 위한 지도자의 헌신이요 희생입니다. 기꺼이 제일 앞장서서 고난을 받겠다는 결의입니다. 교회가 받을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먼저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내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로서 교회에 어려움이 생겨도 그걸 나 자신이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다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있을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 그럴 때만 우리의 봉사와 섬김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힘든 일을 하면서도 시험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를 아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살아가는 걸 큰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는 사람들은 자기 육체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28절에서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비밀이요 우리의 생의 비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야 하고 인격적으로 그분과 친밀하게 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말씀 공부에 치중하고 예수님과의 연합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음이 날로 깊어지고 인격적 관계가 더욱 쌓아짐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워지게 됩니다. 특별히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을 깨닫고 십자가를 나의 삶의 방식으로, 부활을 내 인생의 목표와 삶의 의미로 믿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제자훈련도 받아야 하고 성경공부도 해야 하고 기도생활에 더욱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결론적으로 29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의거해보면 “하나님께서 어디서 능력 있게 일하시는가?”라고 묻는다면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의 대답은 “바울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곳”일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 안에서 하는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과 노력이 헛되지 않은 줄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사역하고 헌신하고 희생할 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겠노라는 각오를 가지고 임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이시고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 분 안에 온갖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담겨있는 그분을 소유하고 알아가기 위해 매진하시기를 아울러 축원드립니다. 여러분의 노고와 헌신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힘있게 여러분들에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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