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1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손바닥 (사 49:14-18)
최근에 ‘현대판 장발장’ 사연이 온라인에서 화제입니다. 30대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지난 10일 오후 인천의 한 마트 식품 매장에서 우유 2팩과 사과 6개 등 소량의 식료품을 훔쳤습니다. 해본 적이 없는 ‘어설픈 절도’여서 금세 발각됐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택시를 모는 이 아버지는 당뇨와 갑상선 질병을 앓고 있어서 6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엔 홀어머니와 7세 둘째 아들도 있었습니다. 경찰은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돼 있었지만 네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이었지만 우리 사회의 훈훈함을 경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트 대표는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고발이 아닌 선도 차원”이라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쌀과 생필품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들 부자를 훈방 조치하고, 돌려보내기 전 식당으로 데려가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씩 시켜줬습니다. 또 아버지의 일자리를 알선하고 아들에게 무료급식 카드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한 경찰은 MBC 인터뷰에서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시민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데리고 간 식당에 느닷없이 들어와 하얀 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떠났습니다.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시민은 아버지와 아들이 마트에서 선처를 구할 때 사무실 바깥에서 묵묵히 지켜봤던 인물이었습니다. 우연히 부자의 딱한 사연을 듣고는 현금을 뽑고 일부러 식당까지 따라가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살 만한 사회라는 것을 알려준 소식이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연말에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훈훈한 소식입니다. (미디어오늘 2019.12.14)
한 해가 기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 마음도 쓸쓸해지고 육신이 위축되는 분들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전주로 돌아오고 나서 아무래도 서해 바다를 많이 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로 동해바다를 많이 갔었는데, 서해는 참 쓸쓸합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와 더불어 일출보려고 동해를 가죠. 떠오르는 태양은 뭔가 희망차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의욕으로 충만하다면 지는 해는 뭔가 쓸쓸한 느낌 지울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셨던 정치인 김종필씨가 자신의 노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겠다면서 석양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어놓겠다고 공언했습니다만, 공언에 그치고 말았죠. 소위 ‘해질무렵증후군’이 있죠. 석양이 지면 마음이 스산해지고 쓸쓸해지죠. 일몰 명소가 많은 서해바다는 그래서 어딘가 쓸쓸합니다. 한 해가 기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 오히려 사랑이 역사할 공간이 생깁니다. 나태주 시인의 '사랑에 답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시입니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저는 신문에서 사람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유심히 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말들과 그들의 정신을 엿보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서 즐겨 봅니다. 신문 인터뷰도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자의 역량에 따라 어떠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최근에 이은주라는 분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이분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고 온 분이고 일본문학을 한국에 번역하는 문학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로 노인들을 돌보는 50대 여자분입니다. 최근에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경험했던 소소한 일들과 느꼈던 감정을 담은 책을 출간해서 신문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일은 어찌보면 고통과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봄 노동’이죠. ‘돌봄 노동’을 통해서 뭘 배우냐면 사랑을 배운다고 합니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석양이 깃든 노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드리면 어김없이 그들로부터도 사랑을 돌려받는다고 합니다. 이분은 자신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노인분들에게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쓴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분들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로병사를 겪으며 돌보고 돌봄 받는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대답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에요.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 그렇게 공간에 온기가 돌면 어떻게든 웃으며 살아요.” (조선일보 2019.12.14.)
역시 사람은 사랑을 주고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으시고 다함없으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 막바지입니다. 대략 기원 전 540년 경으로 추측합니다. 538년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바벨론 포로기 막바지에 전달되기를 기대했던 예언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막바지가 제일 힘든 법이죠.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도무지 끝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포기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게 우리 인생의 군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0장부터 계속적으로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시는데 아직 끝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사랑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재건하고 재번성시켜주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바로 전절, 이사야 49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히브리어에서 긍휼은 ‘자궁’(히브리어로 ‘라함’)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생각하면 긍휼이란 말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신반의합니다. 도대체 언제쯤 끝날지를 모르니까 그러는 거예요. 14절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이렇게 말한단 말예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긍휼과 인애가 풍성하세요. 절대 우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데 때때로 우리는 상황 때문에 혹은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이고 무지죠.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상황이 그러니까 그럴만도 하지 생각도 됩니다만, 우리는 진리에 기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 같은 분, 어머니 같은 분이라는 점이에요. 심지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 “하나님은 세상과 화목하셨다”(고후) 말씀하세요. 자녀는 자녀죠. 자녀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기본적으로 자녀는 자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다 젖먹이와 같고 하나님은 젖먹이는 어미와 같다는 거예요. 자기 태 곧 자궁이죠.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때때로 잊고 살아가지만 부모는 자녀를 잊을 수 없는 법입니다.
14세기 후반 영국의 영성 작가 노리치의 율리아나는 ‘하나님의 모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현존하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 은혜의 우리의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신의 모유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귀중한 어머니 예수는 그 자신으로 우리를 먹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영적인 출생 곧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시라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하나님이 자신의 손바닥에 새기는 것(파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뜻하는 말씀일까요? 구약성경에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입니다만, 신명기 6장 8절에 보면 너무나 중요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라는 쉐마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라고 말씀했는데 이를 직역하면 “네 손바닥에다 표식으로서” 묶으라고 한 명령입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팔과 손바닥에 감는 이 팔찌가 그 위에 기록된 말씀과 함께 지속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손목시계를 보는 것과 유사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무지개가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했죠.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이제는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보호해주시고 오래 참으실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의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들,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확실히 그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했던 어떤 관습을 추측해볼 수 있게 합니다. 자신의 손이나 팔에 흔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표시로 또는 상징으로 자신들의 사랑과 열심을 보여주기 위해 상처를 내는 것이죠.
이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셀 수 없는 생각을 지니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변함없으신 사랑과 충성과 열심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야 할 환경인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라는 사항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사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입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워지지 않는 증거를 어디서 보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에 상처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내 손바닥 위에 새겨져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손에 못 박은 상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손에 상처를 얻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처는 영원까지 지니고 있을 인자의 상처입니다. 그것으로 교회의 벽들을 영원히 확실하게 보호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귀중한 십자가, 그리고 그의 손의 못자국은 우리 인생의 안전한 벽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는 환난 또는 핍박 중에 있는 모든 신실한 자들을 위해 확실하고 안전한 피난처이자 성소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인 성 어거스틴은 “주여, 당신의 손이 나를 만들고 나를 형성했습니다. 진실로 그 손은 나를 위해 못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손의 행사를 무시하지 마소서. 나는 당신꼐서 당신의 손의 상처를 바라보시기를 기도합니다. 보소서, 주 하나님, 당신은 당신의 손 위에 나를 새겼습니다. 그 새긴 것을 읽으시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 그리고 2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일에 두려워서 은신처에 문을 꽁꽁 닫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라고 말씀하시고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 중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없었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도마도 마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에 도마의 마음이 녹아져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언과 분별>, 월터 모벌리 저 참고)
못 자국이 난 그리스도의 손 위에 있는 우리의 이름들이 우리의 마음을 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깊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그 사랑이 시온을 회복시키고 재번성시켜주실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불모지와 같은 메마른 땅에 시온에서 태어날 “자녀”로 넘쳐나게 하실 것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신부의 장식” 처럼 보게 될 것 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즉 신부의 장식은 시온 곧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이는 하나님의 용납해주심의 상징입니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거기다가 많은 자녀까지 생산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파멸로 인해 황폐함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포로로 잡힌 자녀가 돌아올 뿐만 아니라(49:17-18) 더 많은 자녀가 그 어미 시온을 통해서 태어날 거라고(49:19-21) 주장하십니다. 이 회복이 하도 신기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49장 21절입니다. “그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아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서의 문맥은 시온의 재건과 재번성을 일차적으로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오늘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못자국난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해주시는 동기가 되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를 위한 전적인 자기 희생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모성을 보여줍니다. 아이를 젖먹이는 어미, 자궁에서 아이를 10개월 동안 품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어미, 늘 자녀를 향한 셀 수 없는 생각에 매여 있는 어미, 그래서 자녀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자녀를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마치 자신의 손바닥에 새긴 자녀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르는 CCM곡 중에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이러한 사랑으로 훈훈한 연말을 보내시며 이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어미와 같은 사랑,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사랑,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못박힌 손에 새겨진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사랑에 감격하며 이 사랑을 더욱더 이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실천하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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