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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교독 - 3. 시편 4편
■2022년 1월1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예수님과의 만남 (눅 19장 1-10절)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역사적 사건은 만남에서 비롯됩니다. 누굴 만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경험한 수많은 만남 중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은 초등학생 때 만난 담임선생님과의 만남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금 함께 가정을 이루고 있는 배우자를 만난 것이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릴 때 신앙을 심어주신 교회학교 선생님이나 목회자를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조영남씨 같은 경우는, 중앙일보에 연재된 그의 글을 보니 시인 이상을 신적인 존재로 숭상할 정도로 이상에 빠졌고, 음악가 말러의 교향곡과의 만남도 경이로웠다고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수님과의 만남과 비교할만한 다른 만남을 생각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인생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 영향력이 엄청나서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버리는, 이전의 삶을 죽음으로 묘사합니다. 죽고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 만나면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묘사합니다. 사도 바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고백이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 만남의 충격과 만남으로 인한 변화가 얼마나 컸던지 예수님과의 만남을 이전의 자신의 죽음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삶은 실제로 그랬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사렛 이단 괴수인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옥에 가두웠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그 충격에 눈이 멀고 이전의 자신의 모든 확신이 무너져내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평생 동안 증거하는 삶으로 급격하게 변화된 것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의 방향이었다면 예수님을 만나고서는 어디를 가든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어떠한 변화를 경험했습니까? 이전의 삶은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워졌습니까? 이전에 추구하던 방식의 삶과는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삭개오라는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언제 만남은 이루어지는지, 그 만남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등 예수님과의 만남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는 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들여다봄으로써 우리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이를 통해서 지금에 만족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예수님과의 전혀 새로운 만남, 또다른 만남, 더 깊이 있는 만남을 추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1.What?
예수님과의 만남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무슨 만남입니까? 만남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이전의 삶의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충격적인 만남이요, 이전의 삶의 방향에서 정반대로 돌아서는 회개와 회심의 만남입니다.
어째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회개와 회심을 가져올까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꼭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에게만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는 걸까요?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자기를 내어놓으시는 십자가의 자기 희생적 사랑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를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떠안고 십자가에서 짊어지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삭개오는 아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의 만남은 아닙니다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만남에서도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당하고 비난 받고 정죄당하는 인생이었던 세리장 삭개오를 예수님은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있는 그를 주목하셨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그의 집에 가서도 로마제국에 복역하여 쌓은 부, 백성들의 고혈을 빼먹고 쌓은 부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때 삭개오의 마음이 녹아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만나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내 대신, 나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당하시고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자기 희생적 아가페 사랑을 보게 되고, 이전의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왔던 내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가치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에는 무관한 삶이었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와 같이 부끄러운 인생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친히 수치를 당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전처럼 살아갈 수는 없게 됩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만남의 본질은 인생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회개와 회심을 이루어냅니다. 여러분에게는 누가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이거나 아니면 돈이거나, 아니면 알량한 자존심과 명예이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가족이거나, 그럴 것입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을 주관하고 다스린다면 여러분은 얽매인 인생이요 구원이 이르지 못한 삶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만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인생의 주인을 발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삭개오라는 인생의 주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리장으로 성공했고, 엄청난 부를 쌓아올렸던 삭개오, 그를 여태껏 이끌어왔던 인생의 추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성공과 부가 아니었겠습니까? 매국노라는 비난, 로마제국 부역자라는 비난, 세율을 임의로 정해서 상당 부분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서 거짓말로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거짓말쟁이라는 비난 등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를 쌓고 성공과 출세를 위해 달려왔던 그에게 돈과 성공과 출세가 그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겠다는 결단, 그리고 강도질한 것처럼 거짓으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았다면 네 배나 되갚겠다는 결단을 통해서 보건대, 그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정 우상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다는 것은, 즉 그 만남의 본질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십자가의 자기 희생적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마음이 녹아져 이전에 자신이 추구했던 삶의 방향에서 돌아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따라감으로써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2. Why?
그러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까? 예수님과의 만남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우리가 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지를 부분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유하시는 그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0절)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가 ‘잃어버린 자’였다는 겁니다. 여기 ‘잃어버린 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세 가지 비유를 떠올리게 됩니다. 기존의 일백마리 양을 놔두고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떠나는 목자의 비유, 잃어버린 동전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 온 집을 뒤지는 여주인의 비유, 그리고 소위 탕자의 비유, 정확하게는 잃어버린 두 아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되찾으려는 아버지의 비유. 이 세가지 비유 모두 ‘잃어버린 자’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길 잃은 자들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놓으신 길을 걷지 못한 채, 우리는 길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잃어버린 자였던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발견되어서 바른 길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꼭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바로 그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창조주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창조주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바로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바로 섬길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는지, 이미 성경 말씀에 다 기록해주셨는데도, 우리는 말씀을 외면하고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길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 말씀이 제시하는 바로 그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셔서,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인간이 되셨고, 그 말씀을 삶으로 구현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안전한 그 길, 생명의 길,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그 길을 회복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꼭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대로 만나서 길 잃은 자들이 창조주가 예비하시고 보장하시는 생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3. Who? When?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는 것처럼 인생의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느끼고 갈증과 허기를 겪는 사람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빈 공간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꽉 차서 더 이상 다른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사람, 이를테면 자기 만족에 빠져서 자충족적인 착각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원하던 성공과 지위와 부를 얻었던 삭개오,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목표를 추구하며 달려왔던 삭개오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단 말입니까? 성공과 지위와 부로써 채워지리라고 믿고 기대하며 달려온 인생인데, 막상 그것들로 마음이 다 채워졌는데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공허감, 텅 빈 것 같은 마음을 마주하고 그는 적지않게 당황했을 겁니다. ‘인생이 겨우 이런 거란 말인가?’는 의문을 끊임없이 갖게 되었을 겁니다.
마침 그때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분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고, 최근에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새로운 운동,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는, 구약의 선지자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되는 예수님을 한번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겁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는 예수님 주위의 인산인해를 뚫고 나아갈 용기도 없었고, 거기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과 냉대를 감당해낼 수도 없었기에, 체면 무릅쓰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던 겁니다. 무엇이 그를 나무 위로 올라가게 했습니까? 인생의 목마름 때문이요, 채워지지 않는 마음의 빈 자리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언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될 때 비로소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나님이라는 절대자는 존재하는가?’, ‘인생에는 왜 그렇게 고통과 아픔이 가득할까?’, ‘내 마음은 왜 이리 휑한가’, 이러한 인생의 근본적 질문이 인생의 목마름과 허기와 갈증이 될 때, 우리는 이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4. How?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우리도 삭개오처럼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정말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덜 소중한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이 있다면 한 번뿐인 인생에서 꼭 얻기 위해서 매진하는 적극성을 뜻합니다. 중년의 나이,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쌓은 부로 인해서 우아한 삶이 가능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참으로 실천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하고 싶은 것을 못 참습니다. 일단 하려고 마음에 먹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이 일단 마음에 들어오면 해야 합니다.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3절),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체면도 사회적 위신도, 명예의 손상도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예수님과의 만남이 마음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공허함이라는 인생의 근본적 해답을 찾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무 위로 올라간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과 돌격성과 적극성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려면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과의 만남을 위해서라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일 수도 있고요, 때로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시간을 사용해야 할 때도 있고요, 평소 자신의 습관과 행동방식과는 다른 적극성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기회는 아무 때나 오는 것이 아니라 올 때 붙잡아야 하는 것이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오늘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절호의 기회를 감지한 것입니다. 그 기회를 붙잡지 않으면 다시는 그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박감을 가지고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집념과 순진성, 그리고 저돌적인 적극성은 예수님의 주목을 받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둘러쌌지만 예수님에게는 오직 삭개오만 보였고, 그의 이름만 기억하셨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라는 사람을 이미 훤히 알고 계셨고, 그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마음을 꽤뚫어보시고 그를 주목하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물러서 그의 온 집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려는 것입니다.
잠언 8장 17절에서 말씀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이러한 목마름, 목마름으로 인한 간절함과 절박함, 그래서 더욱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 이러한 자를 예수님은 주목하시고 외면하시지 않으시고 만나주시는 겁니다.
5. Where?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이 만남은 이루어집니까? 돌무화과나무 위에서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은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돌무화과나무가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꼭 교회를 가리킨다기보다 교회의 역할이 곧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돌무화과나무가 얼마나 오래 전에 심겨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심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나중에 어떤 사람을 구원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라는 생각과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심겨진 나무 위에서 한 영혼을 하나님을 부르시고 그 영혼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돌무화과나무가 이런 의미에서 교회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섬기고자 하는 강한 열망에 이끌려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하나되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하고 교회에서 평생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며 삶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생활에 힘을 쓰고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세워가는데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새해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기를 힘쓰고, 더욱 그분을 배워 그분을 닮아가기를 힘쓰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의 법칙으로 삼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강렬히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다시 더욱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돌무화과나무에 올랐던 삭개오의 목마름과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과 적극성으로, 오늘 교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주목하시고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고 우리를 더욱 친밀하게 만나주십니다. 새해에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만남으로 인해서 더 이상 길 잃은 자가 아니라, 길과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올바른 삶의 길을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