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13일 설교 (주일 낮)
사랑과 두려움 (요일 4:16-21)
동물세계를 보면 동물들은 죽음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동물이 뭐든 생각이 있겠습니까마는 죽음을 유달리 의식하는 존재는 인간 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장례식을 치르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고인류학자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유인원이 아니라 인류에 넣은 결정적인 이유가 그들의 무덤에서 꽃가루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동물, 가령 원숭이는 죽은 동료 원숭이를 매장하거나 꽃으로 장례를 올리지는 않겠죠. 과학자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이 뭐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에 “더 이상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참 대답치고는 세속적인 대답입니다. 평소에 살면서도 모차르트 음악을 듣지 않는 우리는 그럼 뭡니까? 사나 죽으나 별반 다름이 없는 거죠. 죽음에 대한 생각도 사람마다 다르고 종교에 따라 다릅니다.
퀴블러로스라는 분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로 평생을 보낸 정신의학자입니다. 이분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계속해서 임종에 다가선 사람들을 연구하였습니다. 200명의 임종 시의 환자 인터뷰 결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다음의 5단계로 죽음의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기 전에 무엇을 소원하는지도 알아냅니다. 죽기 전에 어머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어봤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퀴블러로스의 죽음에 대한 5단계 중 1단계는 ‘부정’입니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예견치 못한 충격에 대한 자기방어로 볼 수 있고, 현실에 대한 혼란과 아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단계입니다. 2단계는 ‘분노’입니다. 분노의 타겟을 죽음의 원인이 아닌 타인이나 제3의 원인에게 돌리는 단계입니다. 3단계는 ‘거래’ 혹은 ‘협상’입니다. 본인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인지하지만 인정하지 않고자 하며 이를 위해 신과 거래하고 타협하고자 하는 단계입니다. 4단계는 ‘우울’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잃는 것과 헤어질 것을 안타까워하는 극도의 의기소침의 단계입니다. 마지막 5단계는 ‘수용’입니다. 이제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면서 남겨진 자까지 생각할 만큼 안정에 들어서고 죽음 이후에 대해 소망까지 갖는 단계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연구결과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인 이어령박사가 기독교인이 되었죠. 이분이 여러 종교를 비교하면서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가장 고통스러운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를 대표하는 예수라는 분이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우리 앞에 생생하게 직접 나타내 보여주었다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외쳤지만 결국 그 죽음을 받아들이며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며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며 평온하게 숨을 거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최고의 고통의 자리에서 지복의 새 생명 곧 영생이 거듭나는 부활의 기적을 이루셨다고 평가했습니다.
기독교가 죽음의 문제를 가장 리얼하게 고통으로 나타내 보인다는 면에서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산 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예수님 자신의 말씀처럼 자신의 죽음은 마치 산모가 애를 낳는 것 같은 산통과 같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만 새로운 생명과 만나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친히 해석해주셨습니다.
그는 덧붙여 말합니다.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철저한 인식이 있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나를 도와주세요’ 하며 손을 내미는 소위 ‘타력 종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죽음 앞에 절망한 사람들은 저편에서 내미는 손을 잡으려고 한다는 점에서 철두철미하게 타력종교라는 겁니다. 반면 불교는 오로지 자력으로 업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불속으로 들어가서라도 소신공양을 할 수 있습니다. 유교에서 공자는 ‘내가 사는 것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아느냐’고 했고, 도교는 사람이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마치 신선(神仙)이 되어 자연 속으로 융합하는 것으로 죽음을 이해했습니다. (처음부터 여기까지 <월간조선> 2019년 8월호 이어령박사 인터뷰를 참고했음)
죽음에 대한 이해, 그리고 구원에 대한 이해도 종교마다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서 철저하고 날카롭게 직면하기 때문에 타력 구원,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죽음에 대한 철저한 지각이 있기 때문에 더욱 죽음에 대한 낯설음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더군다나 그리스도인은 심판대 앞에 서야한다는 최후 심판의 교리가 있어서 죽음 이후에 대해 또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두려움이 가중이 되는 것이죠. 성경은 행위에 따른 심판을 말합니다. 선악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몇 구절을 살펴보면,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2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이런 말씀들을 해석할 때 말씀 그대로 행위에 따라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 있을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복음주의 일부에서는 차등상급론의 증거 본문으로 삼기도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데 심판은 행위로 받고, 그 행위에 따라 상급이 차등해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겨우 구원 받은 한 편의 강도와 평생을 복음 증거하며 희생하며 헌신한 사람의 상급이 같을 수 있겠냐는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성경대로 ‘행위에 따른 선악간의 심판’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행위에 대한 상급을 ‘영생’이라고 보았습니다. 가령,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 5:12),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이런 구절에서 ‘상’을 하나님이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영생의 선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책 ‘기독교강요’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심은 그분의 긍휼히 여기신 결과로서 전적인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실 때 우리의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이 행위에 따라서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성도가 스스로 구원을 이루는 주체라고 생각하면 안되죠. 구원이 신자들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생각해도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르심을 받으면 그때에 이미 영생이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분이 완성에 이르도록 행하실 것임을 성경을 따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완성에 이르는 것은 신자들 스스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닮아감으로써 참 자녀임을 입증할 때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칼빈은 차등상급론을 부정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만이 기업으로 상속받는 영생과 하나님나라를 상급으로 보았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유일한 상급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점을 분명히 하면서도, 이미 약속으로 주신 구원의 복들을 신자들의 행위에 대한 상급으로 주심도 또한 동일하게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칼빈은 우리를 속이거나 놀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서 다음과 같이 이어서 말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행을 통하여, 그가 약속하신 그것들(구원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혹은 열매 맺는 것을 묵상하도록 하며, 또한 그리하여 하늘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것들에 대해 복된 소망을 갖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약속들의 열매가 행위에 따라서 이루어지도록 하셔서, 그 열매가 무르익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뿐 아니라 엄위하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행위, 선악 간에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는 교리로 인해서 두려움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을 내쫓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두려움이 마치 인간의 살갗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서 떼낼래야 떼어버릴 수 없는 것 같은데, 두려움을 내어버릴 수 있는 비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한일서 4장 18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두려움이라는 정서는 사랑이 온전하지 못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사랑에서도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음을 경험하였습니다. 물론 아득하게 느껴지겠지만 청춘남녀가 사랑하면 둘만으로도 충분하고 어떠한 두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둘이 함께하고 이 사랑이 영원하기만 하다면 무서울 것도 없고 걱정될 것도 없을 것 같은 느낌과 확신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말씀 그대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형벌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형벌이 있을 것을 예상해서 발생하는 두려움입니다. 형벌을 예상하는 이유는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벌은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받게 될 형벌이요 사랑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심판대에서 받게 될 형벌을 예상하고 그로 인해서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과의 사랑이 온전해지면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게 되고 따라서 형벌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지는 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로 눈녹듯 사라지는 겁니다. 죽음 이후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도 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랑이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되는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장 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에게 가장 소중하고도 각별한 분 그분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운데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를 살리시려고 이땅에 보냄을 받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희생당하셨습니다. 바로 거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로서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연합이요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본문 요한일서 4장 1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자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도 그 사람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 머물러서 하나님과 연합한 자는 그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대에서 우리가 서게 될 때 비록 그 심판이 우리의 행위에 따른 심판이라 하더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할 수도 없습니다. 죽음 이후가 어떻게 펼쳐질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랑으로 인해 굳게 연합된 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온전한 사랑으로 인해서 두려움이 내쫓기게 되어 우리 안에 발붙이지 못한 상태입니다. 죽고 나서 심판대 앞에 설 때 형벌을 받을 것을 염려하는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17절을 보십시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담대함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이기는 담대함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함이요 죽음 이후의 심판대 앞에서도 담대함입니다. 이 담대함은 어디서 옵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아버리기 때문에 비롯되는 담대함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연합 속에서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므로 어떠한 두려움도 이기는 담대함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사랑 때문에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서 누리는 평안이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갖게 되는 담대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에서 어떠한 것도 끊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는데, 그러한 사랑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담대함입니다.
17절 뒷부분에서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서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께서 그러하심’이라 함은 어떠한 ‘그러하심’이라는 걸까요? 두 가지로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바로 전절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를 통해 보건대 ‘주께서 그러하심’이라는 것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속에서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사랑하는 온전하신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셨다는 ‘주께서 그러하심’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우리 역시 이 세상에서 그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서 사랑이 온전해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 사랑의 연합 관계 안에서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땅에서 누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의 관계가 심판대 앞에서 담대함으로 이어져나타날 것임은 분명하겠죠.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추가적으로 다른 해석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사랑이 온전해졌다고 말할 수 있는 때가 어느 때냐면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 2:5-6),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졌다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에서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고 말씀대로 서로를 사랑하면 그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늘 아버지의 계명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그렇게 될 수 있고, 또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해져서 심판 날에도 담대함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앞날로 인해서 불안해하고, 또 언제 죽음이 임박하여 쳐들어올 것인지 두려워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하는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시는 말씀처럼 하나님과의 온전한 사랑의 관계로 굳게 연합되어 있으면, 그러한 연합은 믿음과 세례로 가능할 터인데,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해지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고 그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안에서 온전해진 사랑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연합이 공고해지고 이로 말미암아 심지어 심판대 앞에서도 어떠한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담대함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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