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6일 설교 (주일 낮)
회복 (II) (왕상 19:1-8)
오늘 본문의 엘리야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직전의 대승리를 경험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갈멜산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450명이나 되는 바알 선지자를 통쾌하게 무찌르고 자신을 죽이려고 찾던 아합에게 나타나서 오랜 가뭄이 끝났고 곧 비가 올 것이라고 자신감 있게 외쳤던 위풍당당한 모습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로 목숨 내놓고 싸워 승리한 전사 엘리야와는 너무나 대비되게 자신의 목숨 하나 부지하려고 줄행랑치고 있는 초라한 몰골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 엘리야는 탈진 상태요 번아웃된 상태입니다.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고서 본능에 충실하게 그 위기를 벗어나려고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싫었던지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몸은 지칠대로 지쳤고, 죽음의 공포에 맞서서 싸울 용기는 소진되었고, ‘나 혼자뿐’이라는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죽을 힘 다해 싸워서 승리를 한 듯했고, 실제로 위대한 승리를 거뒀지만 그것은 전투에서의 승리지 전쟁에서의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갈멜산 전투는 아합왕이 섬기고 있던 바알 종교의 바알 선지자 450명에 대해 거둔 승리였습니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섬기는 아세라를 추종하는 400명의 아세라 선지자는 갈멜산 전투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지적 전투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싸워야 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소위 죽을 힘을 다해 싸웠습니다. 사력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엘리야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불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사람들에게 입증해주셨고, 그 사실에 힘을 얻은 엘리야는 관전객으로 머뭇거리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알 선지자를 무찌를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아니면 바알인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와의 대결을 보고서 결정할 참이었습니다.
사력을 다한 싸움은 일단 승리였으나 그것이 전쟁에서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습니다. ‘산 너머 산’이라고 이제는 아합보다 오히려 이스라엘 배교를 더욱 부추겼던 왕비 이세벨과의 전투가 또한 남아있음을 엘리야는 예상치 못한 듯합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를 누리기도 전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이 날라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 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당시 사람들이 ‘내가 반드시 어떠어떠한 일을 할 것이다’고 다짐하면서 그대로 행할 것을 강조할 때 자신이 믿는 신에게 맹세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이 내리는 저주를 달게 받겠다는 각오입니다. 이세벨은 신에게 맹세를 하면서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결의를 하고 있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 동원하고 소위 죽을 힘을 다해서 싸웠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던 엘리야에게 이세벨의 위협은 죽음의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곧바로 목숨 내놓고 또다시 싸워야 하는 전투에 참여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갈멜산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붙들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는 각오로 나아갔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붙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험한 준령에 가로막히자 엘리야는 일단은 피하고 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올라가서 정복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그(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상황을 둘러보니까 도망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맞서 싸우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했습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는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해내기에는 영육이 모두 탈진한 상태여서 믿음도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고 상황에 대해 본능적으로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본능은 자기 생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에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른 이스라엘의 최남단, 네게브 사막으로 나가는 관문인 브엘세바로 도망쳤습니다. 자신을 수종들던 사환은 거기에 남겨두고 광야, 사막으로 더 내려갔습니다.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보이기 싫어서 사환을 남겨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생각을 하고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완전한 광야로 더 내려가서 자신의 초라한 몰골처럼 사막에 군데군데 자란, 그늘을 제공하기에는 빈약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읍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긋지긋하다는 것입니다. “됐어, 됐어, 이제 그만!” 이걸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더 이상 지긋지긋해서 못해먹겠다는 것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보다 살아있는 자신의 삶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거나 다름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는 판단입니다. 그러니 죽여달라는 겁니다. 절망적인 외침과 절규였겠죠. 그 힘으로 이세벨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대항했으면 갈멜산에 이은 또다른 승리를 구가할 수 있었을 정도로 사력을 다해 하나님께 절규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면 죽여달라고 간청한 후 곧바로 엘리야가 잠들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크게 절망적인 외침으로 절규했던지 그는 로뎀나무 아래서 잠들었습니다. 너무 지친 것이겠죠.
하나님은 잠들어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천사가 자고 있는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깨웠습니다. “드세요!” 여기서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닫습니다. 살려면 먹어야 한다는 이치입니다. 우리 육신은 먹어야 삽니다. 먹어야 에너지도 생기며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지친 심신을 우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동안 갈멜산 전투를 치루느라 여러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사력을 다했던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주어 먹게 하고 잠도 푹 자게 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먹고서 또 잠들었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충분히 자게 한 후 다시 어루만져 깨워서 먹을 것을 먹게 하고서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가야 할 길, 아직 다 가지 못한 길, 염려되는 것은 지금의 상태를 놓고 보면 완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으라는 것입니다. 먹고 힘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을 다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어림없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먹고 자고서 다시 힘을 충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사가 말한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는 두가지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엘리야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아합과 이세벨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완전히 배도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명이 엘리야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은 다시 이 사명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가서 다시 맞서 싸워야 합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사람들과 다시금 싸워야 합니다. 치열한 영적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누워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음식을 먹고 잠도 충분히 잤으니까 다시 사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서 하던 대로 다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에 다시 참여하기 위해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원기를 더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육의 건강과 힘의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시 싸움의 현장으로 사명의 현장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야가 가야 할 길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엘리야의 입장에서는 좀 잔인한 해석입니다. 자기 일 아니라고 그렇게 잔인하게 해석할 수 있냐는 거겠죠. 엘리야는 “아직 아니야!”라고 외치고 싶을 것입니다. “돌아가기에는 아직 회복이 덜 됐어!” 신대원 다닐 때 지금은 은퇴하신 김정우교수님의 ‘엘리야 엘리사’ 과목을 들었습니다. 이 본문 가지고서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그때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동안 이렇게 설교를 종종 했습니다. 젊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 엘리야라고 한다면 천사가 한 말이 “이제 작작하고 어서 돌아가!”로 이해했다면 좀 잔인하게 생각되었을 것 같습니다. “나 아직 아니야!”라고 항변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해석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가야 할 길은 회복을 위해서 가야 할 남아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회복만 가지고서는 온전한 회복이랄 수 없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다시 사명의 현장에 복귀하기에는 육신의 회복만 가지고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회복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선지자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과 대면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야 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길,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서 출애굽 사명을 받았던 호렙산, 출애굽한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머무르면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율법을 받았던 호렙산에 가야 할 길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새롭게 힘을 얻고 그간의 쪽팔린 행적도 만회하고 영혼이 새로워져야 다시 사명의 현장으로 복귀할 수 있는 진정한 회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말고 계속 본문을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확실히 엘리야는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육신은 확실히 회복되었습니다. 사십일을 걸어갈 정도로 힘을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서 시나이반도의 호렙산까지 더 남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힘을 얻어 호렙산까지 왔는데 엘리야가 하필이면 굴에 들어갔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굴에 들어갔다는 것은 엘리야가 여전히 영적으로 위축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굴에 들어가있다는 것은 아직도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엘리야가 천사가 말한 “네가 갈 길”을 하나님의 산 호렙산에 이르는 길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호렙산에 이르러서 굴에 들어간 처사는 너무나 소극적인 엘리야를 보여줍니다. 호렙산에서 통성기도를 하거나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해야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엘리야에게는 그러한 믿음도 그러한 결기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영혼이 위축된 상태인 듯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왜 굴에 처박혀 있느냐고 묻고 계신 듯합니다.
엘리야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10절을 보십시요.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나님, 제가 열심 빼면 시체뿐이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대단해서 여태까지 잘 싸워서왔는데, 여호와의 다른 선지자들은 다 죽임을 당하고 마지막 남은 저까지도 죽이려하는데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항변하는 듯합니다. 그나마 있었던 열정도 이제는 사라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굴에 쳐박혀 있던 엘리야를 굴 밖으로 나와서 서라고 명하십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우선은 굴 밖으로 나와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으니까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이제 엘리야에게 자신의 영광, 지나가시므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주시려고 합니다. 11절 계속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폭풍과 같은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여호와의 임재가 있지는 않았고, 이후 지진이 있어서 땅이 크게 흔들렸음에도 여호와께서 나타나시지는 않았습니다. 12절입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바람이 지나가고 지진이 지나갔으나 아무 일도 없었고, 이제 불이 나타났습니다. 불은 이전의 바람이나 지진보다 엘리야에게 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갈멜산의 불이 연상되었기 때문입니다. 불로써 응답하셔서 제물을 태워주시므로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보여주셨던 하나님, 그러나 불이 있은 후에는 “세미한 소리”가 있었을 뿐입니다. ‘세미한 소리’는 간신히 겨울 들릴 듯 말듯한 속삭이는 소리입니다. 갈멜산에서 불로써 만나주신 하나님, 어찌보면 대격변과 소란함과 기적적으로 만나주신 하나님, 이제 호렙산에서는 겨울 들릴 듯 말듯한 세미한 음성으로 엘리야를 만나주십니다.
13절입니다.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겨울 들릴 듯 말듯한 세미한 음성이 나길래 뭐라 말씀하시는지 들으려는 기대를 가지고 엘리야가 이제야 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바람, 지진, 불 등이 있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굴 밖으로 나와서 섰습니다.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세미한 음성은 동일한 음성이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굴에 쳐박혀있느냐와 다르지 않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굴 밖으로 나왔다고는 하나 엘리야는 여전히 웅크려 있었고 위축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동일한 질문에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별로 진전된 것 같지 않습니다. 엘리야는 동일하게 자신의 열정과 열심은 대단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다른 선지자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이제 자신만 남았는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동일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음성’을 다시 들려주십니다. 이것이 ‘세미한 음성’의 핵심입니다. 15-1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어찌보면 엘리야는 사역에서 이미 정점을 찍었습니다. 혜성처럼 등장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담대히 선포하면서 자신의 말이 없으면 이땅에 비가 없을 것이다, 이제 가뭄이다라고 선포하면서 등장했던 엘리야가 가뭄 통에 그릿 시냇가로 피신해서 하나님이 직접 공급하시는 음식, 까마귀를 통해서 공급해주신 먹을 것을 먹고서 생명을 부지했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고 거기서 기적을 행하고 심지어 죽은 아들까지 살리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리고서 갈멜산 전투에서 불로써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험하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인정케 했습니다. 이러한 화려한 사역은 이제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이후의 사역은 엘리야에게 후반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의 사역은 불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이요 웅장한 신적 능력이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엘리야를 통해서 세워진 사람들을 통해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극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이라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라는 조용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계획은 엘리야의 것이 아니라 엘리야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었음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을 들어야 했고, 자신의 사역 후반적의 사명에 관해서 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호렙산을 내려가서 엘리야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제시해줄 뿐만 아니라 엘리야의 물음과 항변에도 대답해주셨습니다. “나뿐이다”고 말한 엘리양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해주셨습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자신 뿐이라고 여겼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남겨놓으신 복안, 칠천 명이 남아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칠천명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를 계승할 엘리사도 포함이 되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지칠 때도 있습니다. 탈진하고 번아웃되어서 더 이상 나아갈 여력이 없다고 느낄 때도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짓누르는 상황 때문에 좌절하고 낙망하고 절망할 때도 있습니다. 또다시 전투의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힘겨운 길을 걸어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삶의 의욕조차 상실되고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회복으로, 그리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심으로써 영적인 회복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살아야 할 이유를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요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요 해야 할 몫입니다. 사명자는 결코 죽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치고 절망한 엘리야를 점차적으로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의 지치고 상한 심령을 주님이 주신 세미한 음성으로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재확립시켜주심으로 여러분들을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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