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9일 설교 (주일 낮)
나의 짐과 남의 짐 (갈 6:1-5)
인생이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유한 짐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짐을 지기가 버겁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왜 나만’ 이토록 무거운 짐에 휘둘려 살아야 하나 자기 연민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남들은 어렵지 않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든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0절에서 지혜자는 인생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인생 살면서 수고하라고 짐을 지워주셨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떠하든지 우리는 이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고달파도 우리 몫으로 할당된 짐을 어찌하든지 짊어지고 목적지까지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내가 지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짐을 우리 각자는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해서 벗어버린다면 내 몫으로 주어진 짐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짊어지지 못하고 포기함으로 인해서 나중에 후회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미련이 남는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그래서 최상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되돌아보며 아쉬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그때마다 짊어졌어야 할 짐을 이런저런 이유로 짊어지지 못한 탓입니다. 어렸을 때 자녀에게 아버지노릇 어머니노릇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장성한 아이를 보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짐은 평생 동일한 짐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짊어지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새로운 짐들입니다. 젊을 때 힘이 있을 때 짊어져야 할 짐이 따로 있고 또 노년에 새롭게 생겨나는 짐들도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시대적 소명이라는 게 있고 거기에 부응하여 응답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실로 인생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과정입니다. 책임감 있게 응답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소설가 김훈씨의 신간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역시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순신장군이 임신왜란 때 쓴 <난중일기>를 토대로 이분이 역사소설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습니다. 이순신 전문가라 할 만합니다. 이순신이라는 한 무관이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위기 앞에 소환당하여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면모가 실로 영웅적이고 초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1598년 노량대전에서 전사합니다. 그가 전사하던 날 7년간의 전쟁은 비로소 끝났습니다. 숨을 거둘 때 그는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있던 7년간 이순신의 삶은 소위 파란만장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맞이한 전쟁에서 초기에 큰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받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서 전사하기 1년 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감옥에서 치욕스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감옥에 나와서는 계급장도 없는 병졸의 신분으로 소위 백의종군 길에 나서게 됩니다. 다행히도 얼마 안돼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되었고, 곧 이어 인류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전승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는 명령대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순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조선 해군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겨우 12척의 배와 사기가 땅에 떨어진 패잔병들뿐이었습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왕에게 보내 상소문에서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남아 있고 제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저의 몸이 살아있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짧게 썼습니다.
그러나 실로 어려운 형국이었습니다. 절망적일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맞아야 하는 생사를 건 전투, 식량 부족, 병졸들의 탈영, 겨울바다의 추위, 전염병 등.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로부터 아무런 물적 인적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시에는 보통 지방 관아가 수군에게 군량미를 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군량미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피난민들의 경작지 이탈과 지방 관아의 부패 때문에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난중일기에 보면 1593년 계사년 한 해 동안 휘하 6200여명 수군 중에서 약 600명이 굶어죽었습니다. 약 10%되는 병졸들이 굶어죽었던 상황에서 나머지 병졸들이라고 온전했겠습니까. 나머지 병졸들도 극심한 배고픔과 질병이 있었습니다. 총체적인 어려움이었고 단순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모든 것을 사령관으로서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군수, 병참, 보급, 징집, 부상자 처리, 전함 제작, 화포 제작, 탄약 생산, 농경 등. 이뿐 아니라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시련과 역경도 있어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것 아닙니까. 심지어 전승을 하고 난 후에도 이순신은 직감적으로 전쟁이 끝나고서 전쟁에서 수운 공이 오히려 독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결론은 절망뿐입니다! 이순신은 어떻게 이 무거운 짐을 지도자로서 짊어지고 돌파해냈을까요?
명량해서전에서 12척의 배를 몰고 나가 적선 350여척을 대파했습니다. 일렬행대로 12척의 배를 세워서 대규모 전선과 맞장을 뜬 것입니다. 길목을 내주지 않고 일당백하고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아군의 군인들이 당연히 겁에 질려 있었겠죠. 예를 들어 거제도 현령 안위사람 사람도 진격명령이 떨어졌는데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후미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머뭇거리는 안위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안위야, 네가 물러서면 살 듯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이 말에 안위는 앞으로 나아갔고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순신은 싸우다가 죽는 길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겁니다. 이미 명량해전 출동 하루 전날 부하들에게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고, 이어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절대로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비장한 각오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입니다만, 우리 앞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고 우리가 응답해야 할 사명이 있고 짊어져야 할 ‘자기의 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입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다시 그것을 분명히 하고, 벗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 실은 내가 져야 할 짐이라는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다시 기꺼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5절 말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에는 ‘왜냐하면’이 빠진 채 번역됐습니다만, 원문에는 ‘왜냐하면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에 이어서 5절에서 ‘왜냐하면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검사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많은 일을 행했는지, 더 잘 했는지를 따져들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인해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함으로써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짊어지고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봄으로써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주어진 사명도 각자요 짊어져야 할 자기만의 고유한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서 자긍하고 잘하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들을 면밀하게 검사해봄으로써만 자랑할 근거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룬 성과와 업적과 성취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것들과 비교하고서 교만해지거나 자만의 상태로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행위들을 검사하고 살펴보고 성찰해봄으로써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자기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교만이나 자만은 남과의 비교에서 생겨납니다. 우월감 역시 긍정적으로 기능할 때도 있지만 비교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놓고 비교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오직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짊어지고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큰 짐,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다는 자기 만족에 빠져서는 안되고 오직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지고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 자기 검토, 자기 살핌이 확실하지 못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이루지 못했음에도 이루었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잘못된 비교 대상을 골라서 비교하고서 상대적으로 우월감에 빠진 채 자기 기만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자기 기만은 자신이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 정도면 됐지’라고 안주하는 마음이 들 때, 즉 된 줄로 생각할 때 즉시 찾아옵니다. 실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한 것인데 말입니다. 치열한 자기 성찰이 없으면 잘못된 비교로 인해서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스스로 속아넘어가게 되는 경우인데요, 그 내면에 교만과 자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룬 성과와 업적을 크게 보기 시작하는 교만과 자만이 내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 때 스스로 속게 됩니다.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쯤하면 됐지’라는 생각이나 자신이 이룬 성과를 묵상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자기 만족에 빠뜨려서 교만과 자만의 늪에 허우적거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자만의 늪에 빠져서 지내면 안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교만하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도 이어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2절 말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에 이어서 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은 당대 시대에 유명한 격언이었던 듯합니다. 2절의 명령, 무거운 짐, 압박해오는 무거운 짐이 있다면 공동체 안에서 함께 힘을 모아서 서로 져야 한다는 그 명령에 따라야할 이유에 대해서 “(왜냐하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어떤 일도 완수되지 못했는데도 일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속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과에 도취되어서 이룬 업적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마음과 자만하는 태도를 가지고는 공동체 구성원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질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거운 짐으로 인해서 헐떡거리는 동료가 있을 때 당연히 우리는 그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져야 할 터인데,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명령에 따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우리의 교만과 자만에 있다는 지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절 말씀이 핵심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여기서 ‘짐’은 원문에 보면 ‘무거운 짐’, ‘압박해오는 짐’을 뜻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 자기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 중에서 그 짐이 버거워서 홀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지체들이 우리 주위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짐을 함께 나눠지라는 것입니다. 무겁기 때문에 힘을 모아서 함께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연대성과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책임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질병의 고통으로 인해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투쟁하고 있는데 그 고통에 둔감한 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는 생각을 갖지 말고 그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줌으로써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들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어떤 중요한 사역을 진행하고 있을 때 어떤 책임자 한 사람만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다른 사람들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한 배를 타고 간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지고서 그 과제를 함께 힘을 모아 세워가고 이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야, 이것은 내 일이 아니야, 이것은 내가 안해도 되는 거야’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순신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순신 전라좌수사로서 임신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그러나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여러 부하들은 그 해역이 전라도 수군의 관할구역이 아니고 경상도 수군의 구역이라는 이유로 출전을 머뭇거렸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의도적으로 한 사람씩 전쟁 참전 여부에 대해 의견을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우리 구역이 아닌데 왜 전쟁에 참여하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 부하들의 의견을 오랫동안 듣고서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제 구역에만 앉아 있을 것이냐. 내가 너희들에게 물어본 까닭은 너희들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시험해본 것뿐이다. 우리는 나가서 싸우고 싸우다가 죽는 수밖에는 길이 없다. 감히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군율로 목을 베리라” 이러한 결연한 각오를 이야기하고 모든 부대가 전쟁에 나가서 임진왜란의 첫번째 승리를 얻었습니다.
다시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아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해들어온 유대주의자들과 대결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인 율법주의에 대해서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듯합니다. 단순히 문자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완성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담고 전달된 의도와 취지대로 성취되는, 예수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중심해놓은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잘 담긴 ‘그리스도의 법’의 핵심은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를 섬기는 것이요 이것이야말로 서로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자신의 짐을 지고 가기에 그 짐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서 비틀거리는, 공동체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그 짐을 함께 나눠지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서로를 사랑하는 길이요 공동체가 함께 세워져가는 과정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짐’이란 공동체 안에 혹은 내 안에 깃든 죄의 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체가 죄를 짓고 넘어져있을 때 죄의 짐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때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지체가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의 유혹에 빠져 넘어졌다면, 그렇게 범죄한 일이 드러났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냐는 겁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잘못을 바로잡고 손을 내밀어 그 손잡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의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도 한 개인의 죄로 남겨두고서 나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감사가 아니라, 그리고 죄로 인해서 넘어진 사람의 연약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의 정죄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한 배를 타고 간 우리 모두의 연약함임을 인정하고 이것이 공동체에 파급될 영향을 고려해서 얼른 손을 내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으켜 세워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뿐 아니라 나 자신도 지금은 손을 내밀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 역시 넘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는 게 지혜입니다. 나 역시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도 있음을 늘 유의하고 경계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늘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은 짐을 지고 가는 수고로움입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수고하도록 짐을 부과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등바등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라” 공동체 안에서 힘들어하는 지체가 있다면 그래서 무거운 짐에 짓눌려 비틀거리는 지체가 있다면 외면하지 말고 손을 내밀고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본 뜻과 취지대로 율법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자기의 짐을 지고,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짐을 함께 나눠짐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져가는 우리 동산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일로 기쁘게 쓰임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6월2일 설교 (주일 낮)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 (눅 11:5-13)
주간조선에 연재되는 <과학연구의 최전선>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한국의 과학자 중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분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연구동향과 연구결과 등을 설명 듣고 전해주는 연재물입니다. 언젠가 서울대 물리학과 정성훈교수의 최신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가 정성훈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물리학자로서 모르는 게 무엇인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대답입니다: “자연은 왜 이리 복잡한가? 하나의 방정식으로부터 이렇게 복잡한 현상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별로 길지 않는 단 한 줄의 수학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기술할 수 있는데 그 공식에서 생겨난 우주 삼라만상의 복잡함과 다양함이 신비스럽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공식 혹은 공리 같은 게 있습니다. 그 위에 모든 인생을 담아낼 수 있고 다양한 삶의 기반이 되는 근본과도 같은 공식입니다. 이 공식도 수학 공식처럼 단순합니다. 몇가지가 안됩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셔서 주 예수라는 것,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와 소박한 사실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인생의 파고가 다가오고 복잡한 현상에 마주하게 되더라도 이 근본 진리 위에서 다 해석될 수 있고 수용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곧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단순한 신앙의 밑바탕과도 같은 공식이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크 엘룰이라는 분이 쓴 <우리의 기도>라는 책에서 그는 현대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다양한 이유 중의 하나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아버지 개념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관계가 성립하려면 서로 간의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와 독립성이 필요하고 예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생겨나는 자부심이, 그리고 남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이 필요한 법인데, 둘째 아들 비유(소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것들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둘째 아들을 아버지 밑으로 구속하고 굴욕적인 처지를 만들고서 위신을 실추시켜놓고서 받아들여주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가부장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이미지가 현대인들에게 반감을 사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하기가 꺼려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성이 얼마나 왜곡되고 삐뚤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기원이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 어려운 연약한 자녀들을 돌보아주고 공급해주고 길러주는 역할을 하는 분으로서 아버지로 이해함이 자연스럽죠. 거기서 어떤 가부장적인 거부감을 추출해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낯설고 멀리 떨어진 관계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들어줄 것은 들어주되 모든 것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위험한 칼을 달라고 하면 어린 자녀의 손에 칼을 쥐어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단지 자녀의 필요를 채워줄 뿐입니다. 이게 아버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버지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기도하고 요청하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을 강조하십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의 요구사항에 대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주기도문으로서 가르치시고서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기도에 대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실 때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잘 이해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하나의 이야기로써 가르쳐주십니다.
밤중에 우리 집에 한 친구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정서에서 이것은 무례함이죠. 연락도 없이 밤중에 찾아온 사람이 잘못이죠. 그러나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성경이 기록된 그곳에서는 손님의 무례함보다도 손님을 융숭히 대접해야 할 의무가 더 강조되었습니다. 생판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방문해도 대접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으니 더 잘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라도 기본적으로 내놓아야 할 음식은 빵과 차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요 손님 대접의 최소한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날따라 빵이 다 떨어졌습니다. 손님이 방문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날 가족끼리 먹을 빵만 구웠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난처한 상황이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습니다. 한 가정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라면 잘 설명하고서 돌려보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만, 그당시 그곳에서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을 그렇게 대우하면 안됩니다. 만약 손님을 그냥 돌려보냈다면 그것은 그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수치스런 행동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상황은 단순히 어느 한 집이 감당해야 할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손님 대접은 마을 공동체의 전체의 명예와 수치가 달려있는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죠.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죠. 한밤중이라는 사실이 주저하게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이 무례함보다도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무례함이 더 큰 무례함이고 이 문제는 어느 한 가정에게만 수치로 남는 문제가 아니라 마을을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낸 마을의 수치가 될 문제였기 때문에 한밤중에라도 이웃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비록 잠을 청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웃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자정 가까운 시간에 옆집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면 옆집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화재가 났던지 강도가 들었던지 급박한 위기를 감지하고서 그 위기를 확인하려고 할 겁니다. 문도 열어주지 않고 안에서 물어보겠죠. 도대체 뭔 일이냐고.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대접할 거리가 마땅치 않아서 혹시 파리바게뜨나 뚜레쥬르 빵을 가지고 있냐고 하면 미쳤구나 할 겁니다.
문화적인 차이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아까도 강조했듯이 손님 접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한 개인, 한 가정, 심지어 한 마을의 명예가 달려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한밤중에라도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옆집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웃집에 찾아와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으니까 빵 세 개를 빌려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겁니다. 이웃집의 반응은 당연히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이웃사촌이라는 이유나 친한 마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해서 요청한 빵을 주지는 않을지라도 “간청함” 때문에 요구한 대로 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밤중이고 그래서 자녀들도 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빵을 찾는 소리에 다 깨어난다 할지라도 그걸 구실과 핑계 삼아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단언이요 그것을 제자들도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입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만들어내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간청함”입니다.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강청함”으로 번역했습니다만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간청함’이라는 뜻보다는 ‘뻔뻔함’, ‘수치스러움’, ‘후안무치’, ‘얼굴이 두껍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복음주의 학자들이 쓴 누가복음 주석 네 개를 비교해서 보았는데 네 분의 학자가 모두 여기에 쓰인 헬라어 단어의 원래 뜻이 ‘뻔뻔함’, ‘수치스러움’, ‘후안무치’, ‘얼굴이 두껍다’는 뜻임을 다 동의합니다만, 이 기본적인 뜻을 가진 단어가 문맥에서 특별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끈기나 인내 혹은 지속적인 간구를 강조한다는 의미 맥락 하에서 ‘간청함’ 혹은 ‘강청함’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하는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함을 강조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번역에 이미 해석이 들어간 셈이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 주석학자는 4명 중 2명이었고, 다른 2명의 학자들은 원래 뜻대로 해석해야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도가 더 잘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거나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거나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의 뻔뻔함, 수치스러움, 낯짝이 두꺼움, 혹은 체면 때문에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원래 단어의 뜻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요구하는 사람의 ‘간청함’이라기보다는 요청을 받고 있는 사람의 명예 혹은 수치 때문에라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웃집 사람이 손님 대접해야 한다는 이유로 빵을 빌려달라고 비록 한밤 중에라도 날 찾아왔더라도 비록 번거롭고 이로 인해서 자녀들이 잠에서 깬다 할지라도 만약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음날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당하게 될 수치를 생각해서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참 뻔뻔한 사람이로군’ 하는 비난입니다. 그만큼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가 소중했고 명예와 수치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일어나서 마을에 나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수군거리고 손가락질 하면서 마을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려고 했는데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예상하고서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반문하신 것이고 이에 대해 제자들은 아무런 이의가 없이 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상황입니다.
‘간청함’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세 번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강조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내세웁니다. 원래 뜻대로 ‘뻔뻔함, 수치스러움, 불명예, 체면’ 등의 원래 뜻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입장은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계심을 인정하면서 그 가르침이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한 간구 혹은 간청에 있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강조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도 끈질기게 다양하게 하나님을 설득하고 압박해야 한다는 강조가 아니라 기도해야 할 상황의 다양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기도해야 할 필요가 생긴 상황에서 기도란 “다른 사람이 제공해 줄 수도 있는 그 무엇을 구하는 것이요, 잃어버린 것이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처음의 그 위치를 알지 못했던 것을 찾는 것이요. 건물에 들어갈 허락을 얻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것”(WBC주석)입니다. 이것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생긴 다양한 상황이요 기도라는 것입니다.
만약 원래 단어의 뜻대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고서,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가르치고서, 지금 기도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까? ‘아무리 밤중이라도 설사 자녀들이 다 깰 상황이라도 손님이 찾아왔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순히 이웃사촌이라는 이유나 친구 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만약 도와주지 않을 시 다음날 아침에 당할 불명예와 수치 때문에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다. 하나님 이름의 명예 때문에라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자녀를 돌보아주셔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체면 때문에라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시고서 9-10절에 기도에 대해 가장 중요한 점을 진술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야고보서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우리는 보통 기도를 감안하지 않고서 그냥 현실적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고려해놓고 달라질 현실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기도하면 달라질 미래’, 이것을 생각해보지 않고 지금 현실적 경험에 입각해서 예측하고 생각함으로 인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달라질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고 계획도 하고 성장도 하고 추진도 해야 할 터인데 그럴 믿음이 부족하다보니 늘 현실경험에 입각해서만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냥 그렇게 동일하게 살게 되는 겁니다.
구하면 받을 것을, 찾으면 찾아낼 것을, 두드리면 열릴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인간 아버지보다 더 선한 아버지요 자녀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아들의 요청에 대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도 자녀들의 요청에 대해서 어련히 알아서 좋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날에는 부자관계도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패륜도 있고 존속살인도 있고 자녀를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부성도 간혹 언론보도로 접하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자녀가 무엇을 달라고 요청할 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녀들의 간구에 대해서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인생에게 가장 절체절명의 과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생을 원래 창조주가 설계하시고 계획하신 가장 좋은 제자리로 바꿔놓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서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누리고 느끼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므로 인생의 진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대중예술이 이룬 성과가 국민의 자부심을 드높였습니다. 봉준호감독이 세계최고의 영화제인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죠. 봉준호감독과 그리고 연기자 김혜자씨인 인연도 언론 보도에 소개되었습니다. 봉준호감독이 ‘마더’라는 영화에서 괴기한 캐릭터인 엄마 역할을 김혜자씨에게 맡긴 이유, 그리고 김혜자씨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입니다. 계기는 이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김혜자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몰랐죠. 그것을 안 건 비교적 최근인데 이를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봉준호 감독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1992년에 홍대 쪽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김혜자씨의 자택이 보였다고 합니다. 보통 연기자로서 김혜자씨의 이미지는 전원일기에 나오는 ‘국민 엄마’인데 마당에 나와 담배를 그렇게 맛있게 피웠다고 합니다. 그걸 본 봉준호 감독은 대중들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른 김혜자의 모습을 발견했고, ‘마더’라는 영화를 기획해 4년간의 설득 끝에 함께 작품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김혜자씨가 지독한 골초였다고 합니다. 거의 담배 중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34년 동안 지독하게 피워댔던 담배를 끊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김혜자씨가 어느날 카페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그날따라 ‘담배 맛이 너무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고 ‘내가 혹시 무슨 병에 걸렸나’ 걱정되는 마음에 딸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울면서 ‘사실 엄마의 금연을 위해 100일간 새벽 기도를 했다’고 얘기하더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김혜자 선생님은 그날부터 금연을 결심하고 바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5월19일 설교 (주일 낮)
사람아~ (미 6:1-8)
오해가 있으면 오해를 풀어야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겠죠. 그래서 관계를 회복시키고 복원시켜야 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금 어떠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있지 않다면, 결코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특히 직장 상사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직상 생활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 혹은 남편과, 그리고 자녀들과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그 가정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인 경우 학교에서 교우관계가 좋지 못하면 학교 생활이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 있지 못하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고맙게도,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언제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취미가 있는 인 간임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가 진토에 불과한 존재임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을 내미는 쪽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미가서 6장 말씀에도 바로 그러한 점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관계가 썩 좋지 못한 상태입니다. 6장을 읽어보면서 받게되는 느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고발당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십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마치 재판과정과도 같은 엄숙함이 느껴지는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제기하신 소송과 같습니다. 이 소송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변호하실 터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변론을 잘 듣고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묵묵히 보았던 산과 땅을 증인으로 호출하십니다. 혹은 재판정의 배심원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서 변론을 진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고발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자기를 변호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3절,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 백성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 내가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내게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나치게 요구하신다, 우리를 너무 괴롭게하신다’는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말을 좀 쉽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러한 불평의 말을 내뱉었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평을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의 핵심은 하나님의 과도한 요구로 모아집니다. 자유를 얽어매고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불만이요 원망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뭘 지나치게 요구했다고 불만이냐, 뭐 이렇게 사람들에게 조목조목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자기 변호가 이어집니다. 4절과 5절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여기, 하나님의 자기 변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의롭게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의롭게 행한 일’은 히브리어로 ‘쩨다카’의 복수형입니다. ‘쩨다카’는 보통은 ‘의’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 로마서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이것이 로마서의 주제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의’와 정확히 같은 의미로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롭게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쭉 신실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책임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 ‘공의롭게 행한 일’입니다.
로마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한다면 오늘 미가 선지자는 출애굽과 광야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의롭게 행하신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롭게 행하셨다는 걸까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실하셨다는 걸까요? 어떻게 책임을 다하셨던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과 원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고, 인생의 무거운 부담에서 참다운 해방을 주셨음을 변호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해주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노예생활,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해준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정으로 보호하셨고 축복해주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서부터 24장까지 모압왕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왕 발락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와 강성함에 겁을 먹고, 소위 용하다는 발람을 찾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발람이 처음에는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할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계속되는 요청과, 뇌물과, 그리고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쓸쩍 들려고 할 때, 하나님은 발람을 막죠. 심지어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서 발람의 잘못을 지적하시죠. 그래서 결국 모압왕 발락은 자신이 원하는 저주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고 또한 말씀합니다. 싯딤은 요단 동편에 있고, 길갈은 요단 서편에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싯딤에서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이후에 그들은 길갈에서 처음으로 진을 쳐 머물렀습니다. 싯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의 맨 마지막 정류지였습니다. 그리고 길갈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맨 처음 정류지였습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 이르는데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40년 광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도움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그리고 길갈에 이르렀습니다. ‘길갈’의 뜻은 ‘애굽, 이집트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 굴러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의 진정한 청산은 출애굽, 이집트에서 탈출했을 때 이루어진 게 아니라, 광야생활 40년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 길갈에 이르렀을 때 노예생활이 진정 끝났습니다. ‘길갈’의 뜻이 그래서 ‘애굽의 수치에서 벗어났다’입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즉, 구원 이전과 이후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정의를 위해 참된 해방을 가져다준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을 떠올리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기억해보면 곳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의롭게, 얼마나 신실하게, 얼마나 언약 백성인 우리에게 책임을 다하셨는지, 즉 ‘공의롭게 행한 일’을 깨닫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주장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너무나 과도한 요구를 하셔서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불평했습니다. 이 불평의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억울했습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니까 더욱 억울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거운 짐을 부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짐을 덜어주셔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신 분이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하나님의 변호와 주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하나님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억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입니다. 더욱이, 지금 하나님께서 여태껏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소위 ‘하나님의 의’를 행하셔서 구원을 가져다주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처럼 공의롭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예배의 현장으로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걸까? 여기서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좀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너무나 우리를 향해서 기대치가 높으신 하나님, 무엇으로도 만족하시지 않는 분, 너무나 높이 계셔서 우리네 삶을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 어떤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간다 한들 그 어떤 것이라도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는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6절 하반절과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번제물로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점점 강도가 세지죠. 1년 된 송아지로 드리는 번제는 희귀한 번제입니다. 보통은 1년 된 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1년 된 송아지로 번제를 드리는 경우는 처음으로 드려진 제사장의 위임식 때입니다. 보통의 번제와는 다른 흔지 않은 헌신, 대단한 정성으로 나아가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 같은 기름’은 그야말로 막대한 양의 제물입니다. 심지어 ‘내 몸의 열매’ 곧 ‘맏아들’을 바치면 죄 문제가 해결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서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걸까. 점점 강도가 세지는 헌신과 드림, 진정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 정도의 지극정성을 보여주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인가.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날 인정하시렵니까?’ ‘하나님 제가 어떤 헌신을 보여주어야 흡족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점점 더 강력하고 무거운 헌신을 요구하시는데...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뭐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과도한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가서 6장 1절에서 7절까지 보면, 하나님 입장에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고, 그리고 우리는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정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검사측 주장과 변호사측의 변호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이때, 중재자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나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인 ‘아담’ 곧 ‘사람’을 불러냅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온 단어죠. ‘아다마’는 ‘대지’, ‘흙’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담’ 곧 ‘사람’은 ‘흙에서 온 존재’를 의미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가 곧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불러내서 2인칭의 ‘너’로 호칭하면서 ‘하나님이 사람 너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이미 알려주셨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8절 말씀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갈 운명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서있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사람의 본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한자의 착할 선자, 선하다할 때 사용되는 착할 선(善)은 양양(羊)자 밑에 말씀언(言)이 합쳐져 있습니다. 즉, 양은 말씀을 잘 들어야 그것이 곧 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떼로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선입니다.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믿음 없는 말을 듣고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재단해서도 안됩니다. 너무나 광대한 하나님을 자신의 이성이나 경험 안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잘 알지 못한 채, 습관을 따라 신앙생활 해왔다면 우리는 다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나무의 이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그 나무의 과실을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무에 결부됐기 때문에 그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 자체에 신비한 마법적 효력이 있어서 ‘선악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않으면 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나무의 과실을 따먹으면 악, 그렇게 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해주신 말씀에 기반해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에게서 찾기를 원하신는 것은 크게 세가지로 제시됩니다.
첫째, “오직 정의를 행하며”. 우리가 읽은 본문 이전에 미가서 3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꺽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참 신랄한 비판입니다. 이어지는 4절에 보면, “그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우리가 다 경계를 삼아야 할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에게 찾으시는 것은 정의입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슈파트’입니다. 공평과 공정함으로 판결을 내리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언약백성들인 우리는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헤세드’은 언약적 사랑이며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그래서 또한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은 로마서 1장에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겸손합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함께 살아갑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제넘게 앞서가거나 제 멋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언제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늘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중한 행보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기 위함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가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선을 행하되 끝까지 행할 수 있도록,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고 끝까지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믿음에 회의가 찾아오고 삶에 시련이 들이닥쳐서 낙심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더 중한 바’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너라고 호칭하면서 알려주시고 우리에게서 찾기를 원하시는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인생 본분의 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이 길을 걸어가시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든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5월12일 설교 (주일 낮)
성경적 효 사상 (엡 6:1-3)
“태어날 때부터 다리가 마비되어 평생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지극한 돌봄과 헌신으로 별 다른 탈없이 자란 아이는 초등학교도 일반 학교로 진학을 했습니다. 이 학생이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는 수업시간에 쓴 글입니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지금까지 받은 고마움을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 보답하고 싶다.
지금의 나는 어머니의 고마움을 보답하며 살 수가 없다.
그렇기에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어머니의 어머니로 태어나서
그 무한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
이 글을 본 선생님은 큰 감동을 받아 인터넷에 올렸고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감동을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모님의 크신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글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부모님의 사랑입니다.”(<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구원이십니다>에서 발췌, 김장환 저)
최근에 한 편의 동시가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2016년 전라북도교육청 공모전 동시부문 최우수상 수상작입니다. 부안의 한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 이슬양의 시입니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이 시를 쓰기 전년도에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쓴 동시입니다. 당시에도 큰 감동을 준 시로 화제가 되었는데 올해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어떤 분이 곡을 붙여서 동요로 불러서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시 제목은 '가장 받고 싶은 상'입니다. 이슬양은 밥상을 마주할 때마다 생전에 음식을 차려주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동시를 통해 평소 못 느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밥상의 소중함을 절절하게 표현했습니다. 시 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가장 받고 싶은 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짜증 섞인 투정에도
어김없이 차려지는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상
하루에 세 번이나
받을 수 있는 상
아침상 점심상 저녁상
받아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안 해도
되는 그런 상
그때는 왜 몰랐을까?
그때는 왜 못보았을까?
그 상을 내시던
주름진 엄마의 손을
그때는 왜 잡아주지 못했을까?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을까?
그동안 숨겨놨던 말
이제는 받지 못할 상
앞에 앉아 홀로
되뇌어봅니다
"엄마, 사랑해요"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편히 쉬세요"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엄마상
이제 받을 수 없어요
이제 제가 엄마에게
상을 차려 드릴게요
엄마가 좋아했던
반찬들로만
한가득 담을게요
하지만 아직도 그리운
엄마의 밥상
이제 다시 못 받을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울 엄마 얼굴 (상)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우리의 부모님의 사랑과 헌신을 모두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보 목회칼럼에도 썼습니다만, 한국사회에서 연로해지신 부모님들이란 참으로 풍파 많고 고생 많은 삶을 지금에까지 살고계신 그런 분들입니다. 자녀 양육하고 기르고 교육시키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한 채 사셨고, 그래서 가장 늦은 나이에까지 일을 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르신들은 빈곤에 시달립니다. 이것이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부모 순종, 부모 공경에 관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성경적 효 사상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의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순종이나 복종을 강조합니다. 심지어 종교예식이나 예배보다도 순종을 더욱 강조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사울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한 여인이 그 가르침에 놀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눅 11:27)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1:28)
실제로 말씀 듣고 말씀대로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신명기 28장 1-6절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신 28:1-6)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렇듯 놀라운 축복을 약속하시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과 아울러 죄의 본질에 깊숙이 연관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모두가 다 죄인이되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하였다는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는 인생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진실입니다. 아담의 자손으로서 우리 모두는 죄악된 성향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완전히 끊지 못한 상태입니다. 우리는 결코 고분고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반항적이고 하나님께 대해서도 복종적이지 못합니다. 명령 받고 지시 받고 누군가의 아래에 있는 것을 못견뎌 합니다. ‘네가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해...’ 이것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진실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의 고통과 비참은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이러한 죄악된 성향의 결과입니다. 불순종, 불복종하는 기질은 축복을 걷어차버립니다. 순종의 정신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이무리 열심히 뛰어다닌다 해도 진정으로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이 어째서 불신앙, 수치, 비참, 그리고 살인으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이유는 누구나 자신이 주인이 되며, 모든 권위에서 벗어나고, 자기 기분대로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른 악당을 이용해 또다른 악당을 벌하신다. 당신이 당신의 주인을 속이거나 업신여기면 다른 사람이 와서 당신에게 그와 똑같이 대할 것이다. 실로 당신은 아내와 자신과 하인들로부터 열배나 더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모든 비참함이 참된 권위에 대한 불복종,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 뿌리 깊은 교만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찰입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태도에서 기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런 근본적 성향, 뿌리 깊은 본성을 극복하지 못하면 참된 행복과 형통함과 진정한 자유를 결코 누릴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 제5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십계명 제5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이 5계명은 단순히 부모 공경만을 명령하는 계명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을 실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권위에 대한 복종과 겸손을 배우고 몸에 익히라는 것입니다. 반항적이고 불순종하고 이기적인 우리의 죄악된 성향을 ‘따뜻한 방식으로’ 극복할 수 있게 하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모 공경’을 명하신 것입니다.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복종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가장 우호적인 방법으로 자신에게 이끌어들이기 위하여 그들 앞에 부모님을 두셨습니다.”
부모 공경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복종을 가르쳐주는 훈련 과정일 뿐 아니라 부모 공경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은 참으로 중요한 계명입니다. 십계명 제5계명은 인간 윤리의 시작 계명입니다. 우리의 배꼽을 쳐다볼 때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난 태어난 존재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나는 부모의 자녀다’ 이와 마찬가지로 ‘난 하나님의 자녀다.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피조물이다. 하나님이라는 더 높은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그분의 명령을 들어야 한다.’
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될 때, 나 자신이 중심이라고 생각될 때,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될 때, 너의 배꼽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나는 태어난 존재요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권위 앞에 서있는 존재요,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받아야 할 존재임을 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 운명에 부합한 길이요 그것이 진정한 복이요 참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 계명은 축복을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의 축복이 오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자유의 축복이 오듯이, 부모를 공경하면 이땅에서 장수하고 복을 누리게 될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저 오래사는 장수가 아니라 삶의 질이 높은 장수입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6장 2-3절에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제5계명 부모 공경 계명이 십계명 중에서 본격적인 약속이 주어지는 첫 번째 계명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고 인간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근본을 가르쳐주는 의미에서 중요한 첫 번째 계명으로서 약속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후자로 해석하는 분들은 십계명 제2계명에도 약속이 결부돼 있다고 봅니다. 출애굽기 20장 4-6절에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금하는 제2계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약속으로 보지 않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결과라고 단순히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 질투하신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불붙는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독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 다른 우상을 향하는 우리에게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겁니다. 그 사랑의 결과로서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손들에게 당연히 은혜가 임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를 약속이라기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자연스런 결과로 해석합니다. 명령에 대해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축복을 약속한 말씀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에 반해서 제5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면 자연스레 축복된 결과가 뒤따를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땅에서 장수하고 잘되는 축복을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부모 공경을 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은 설교 서두에서 읽어드렸던 신명기 28장의 축복과 동일한 축복입니다. 말씀에 청종하고 순종하며 율법대로 살 때 누리게 될 축복과 동일한 축복입니다. 왜냐면 원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반항적이고 불복종적인 죄악된 성향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부모의 권위를 존중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원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보상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피조물됨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됨과 비슷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특별히 에베소서 본문에서는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고 말씀함으로써 어머니뿐 아니라 놓치기 쉬운 아버지도 공경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공경하라’의 히브리어에 해당하는 단어는 ‘카베드’인데요, ‘무겁다 혹은 무겁게 여기다, 비중 있게 생각하다, 중요하게 여기다’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길일까요? 부모를 존중하고 존경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권위를 존중하며 부모의 말씀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주께 하듯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대리자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하듯 순종하고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유일하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통치를 받고 그 독보적인 존재에 걸맞게 그분에 합당하게 대우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라고 쉐마(신 6:4-5)에서 명령하고 있듯이, 부모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로 여기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은 단순한 존경과 존중의 태도에서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물질적 봉양을 포함합니다. 노년의 부모님은 일종의 인생의 안식년을 지내는 것과 같은데 돌아가실 때까지 음식, 옷, 거주지, 그리고 마지막 장례까지 적절히 봉양해드리라는 것입니다.
십계명 제5계명은 부모 공경만을 말씀하지 않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 앞에 우리가 어떠한 태도를 보여야 할지,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앞에 우리가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도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확장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분명하게 ‘효’라는 단어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성경적 효 사상입니다. 하나님 경외요 부모 공경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요 피조물로서 우리의 위치를 바로 깨닫고 만물 안에서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자기를 쳐서 복종하게 해야 합니다. 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복종하는 사람이 될 때, 그런데 우리의 복종을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피차 복종하라!”고 명령할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이유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히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고 공경할 때 우리는 복종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고, 진정으로 바른 하나님 섬김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그동안 오직 자녀 사랑으로 수고하고 헌신하신 모든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가득하시고, 젊은 세대가 노년 세대에게 적절한 존경과 예우로 섬기는 그러한 우리교회로 새롭게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5월5일 설교 (주일 낮)
천국 백성들이여, 들으라! (신 6:4-9)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 교회학교에서 가장 자주, 그리고 잘 부르는 찬송가는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일 것입니다. 이곡을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 안나 워너는 소설가였고, 이 가사도 그녀의 소설 <고백과 확증>에 처음 쓰인 것이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주일학교에 다니는 병약한 소년 조니 팩스와 교회학교 교사 존 린덴입니다. 린덴은 조니의 주일학교 교사로서 조니를 사랑하여 관심을 쏟고 가르치고 그를 위해 기도해줍니다. 어느 덧 병약했던 아이 조니는 병상에서 곧 죽음을 맞이할 것처럼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문병을 간 교사 린덴은 조니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주고서 아이에게 묻습니다. “조니, 너를 위해 뭘 해줄까?” 아이는 찬송을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린덴이 조니를 안고 처음으로 부른 찬송이 바로 <예수 사랑하심을>이었습니다. 가사를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가 날 사랑하시네. 나는 그것을 잘 아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니까. 어린아이는 예수님의 것이네. 그들은 약하지만 예수님은 강하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셨네.’ 이 찬송 가사를 통해서 린덴은 조니에게 ‘예수님은 너만을 사랑해. 네가 비록 병상에서 꽃다운 생명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지만, 그러나 조니야, 주님은 너만을 사랑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찬송을 듣고서 조니는 ‘그래,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셔, 나만을 사랑하셔’를 가슴에 새기며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느꼈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옥한흠 저, 207-8)
개역개정 찬송가에는 가사가 좀 바뀌어 있습니다만, 예전 찬송가에서는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로 의역을 해놓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전부를 요구할 때만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내어주고 우리를 위해 헌신하시는 거룩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는 것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지 못하는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 받는 사람에게도 자신이 품고 있는 그러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거룩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가 창조주인 그분에게 온전히 복종할 때만, 온전히 헌신할 때만,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랑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될 때에만 거룩한 사랑으로 인정하십니다.
구약성경의 율법과 계명은 우리가 잘 지키고 살기만 하면 복을 누리게 돼 있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어떻게 해야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것은 ‘하라’고 또 어떤 것은 ‘하지 말라’고 인생의 울타리를 든든하게 쳐주신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이땅에서도 얼마든지 형통과 번영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의 상태입니다. 샬롬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복된 삶의 상태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누리게 되는 축복입니다.
구약성경의 율법과 계명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두 번 기록돼 있습니다. 특별히 신명기 5장의 십계명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첫 세대가 광야에서 40년간 유랑생활한 후 그 다음세대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요약으로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주신 삶의 영역 곧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번성하며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려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율법의 요약인 십계명을 또 한번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요약하신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나뉘어지지 않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한 가지 사랑의 흐름이라고 한다면 결국 사랑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경쟁자와 우리의 충성과 사랑을 나눠가질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독보적이고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십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 할 수 있는 제1계명이 잘 보여줍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신 5:6-7)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너의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뿐이기 때문에 다른 우상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 앞에다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란히 놓여있는 우상들을 다 치워버리고 참되시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제1계명에 대한 마틴 루터의 해설입니다: “일반적으로 ‘신’이란 사람들이 소망하는 모든 좋은 것, 온갖 시련의 피난처가 되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을 섬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진심으로 믿고 신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거듭 말했듯이, 오직 마음의 믿음과 신뢰만이 신을 만들 수도 있고 우상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바른 믿음과 바른 신뢰가 있다면, 당신의 신은 바른 신(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바르지 못한 믿음과 바르지 못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른 신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우상). 왜냐하면 이 둘, 곧 신앙과 신은 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집착하고 있고 당신의 모든 것을 지탱하는 대상, 그것이 바로 당신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패한 마음은 성경에 의해 바른 방향을 교훈받지 못하고 성령에 의해서 새로워지지 못하면 우상숭배로 귀착됩니다. 그래서 존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제조해내는 우상 공장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마지막 열 번 째 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내용인데 이 또한 우상숭배 금지의 명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석한 대로 탐심은 곧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욕망과 탐심은 대상을 향한 집착이어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갑니다. 그것이 곧 당신의 하나님이 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의 섬김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탐심도 곧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신 하나님 외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가므로 유일하신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우리의 사랑과 충성을 빼앗아가는 우상을 타파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십계명이 율법의 요약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6장 4-9절은 율법의 심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단순히 요약해놓은 것이라기보다 모든 율법이 살아서 펄펄 움직일 수 있도록 피를 공급하는 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신명기 6장 4-9절은 유대교 신자들이나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첫손에 꼽는 계명입니다. 히브리어로 ‘쉐마’ 곧 ‘들으라’로 시작해서 이 단락을 ‘쉐마’라고 부릅니다. ‘쉐마’는 너무나 중요하니까 잘 듣고 순종하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입니다. 현대 유대교 전문가에 의하면 ‘쉐마’는 유대인 어린이들이 ‘가장 먼저 암송하는 기도문’이며, 유대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신앙과 헌신의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정통파 유대인의 경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암송하는 성경 말씀입니다.
쉐마는 십계명의 부정적인 진술 형태, 곧 ‘하지 말라’를 긍정적인 형태로 바꿔놓은 명령입니다. 하나님과 나란히 우상을 두지 말라는 게 십계명이라면 쉐마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그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이고 그 명령을 가슴에 담고서 자녀에게 하나님을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명령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 복음과도 맥을 같이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 복음이란 유일하시고 독보적이시고 절대적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마음에 품고 있던 하나님과 방불한 우상들을 다 깨뜨리고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먼저는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고서 내 안에 하나님처럼 여겨진 죄악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서 유일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그분만을 전심 전력하여 사랑하라는 천국 복음입니다.
쉐마에는 두 가지 명령이 나옵니다. 첫째는, 본문 5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질문을 하게 합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애굽땅 곧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곧 여호와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건져내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 합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되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신약성경 번역이 더 좋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은 내적 자아를 가리킵니다. 판단하고 결정하고 지정의 인격의 중심이 바로 마음인데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은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곁에 나란히 놓은 다른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마음이 나누어진 사랑과 충성이 아니라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은 문자 그래도 자신의 목숨보다도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소중히 알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목숨은 히브리어로 ‘네페쉬’라는 단어입니다. ‘네페쉬’는 혈기 있고 호흡이 있는 동물이나 생명을 가리킵니다. ‘네페쉬’는 또한 욕구, 충동 등을 가진 외적 실체를 가진 존재를 뜻합니다. ‘마음’이 내면적 자아라면 ‘목숨’은 ‘네페쉬’ 곧 숨을 쉬고 활동하는 외면적 인격을 가리킵니다. 욕구가 있고 충동이 일어나는 외면적 자아로서 외적인 활동으로 살아가는 생명이 곧 네페쉬입니다.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명령은 살아가는 모든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외면적 활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 표현이어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흡과 생명 곧 네페쉬를 주신 분이기 때문에 네페쉬를 다해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힘’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매오드’라는 단어인데 힘이라는 뜻뿐 아니라 원래 ‘매우, 많이’라는 부사로도 사용됩니다.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 함은 매우 많이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매오드’는 ‘매우, 많이’뿐 아니라 ‘재물, 재산’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것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재물과 재능 그리고 모든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전심과 전력을 다해 사랑해야 합니다. 내적 자아에서 일어나는 마음뿐 아니라 호흡을 부여받은 생명체로서 생명 다해 곧 모든 삶의 외면적 활동을 통해서, 그리고 이뿐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과 은사와 재물과 기회를 총동원하여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부터 우리 바깥으로 확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시길래 이처럼 큰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본문 4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쉐마(들으라), 이스라엘’로 시작합니다. ‘쉐마’로 시작한다고 해서 이 단락 곧 신명기 6장 4-9절을 유대인들은 쉐마라 부른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와가 언약 백성인 유대인의 하나님이신데 그분은 유일무이한 독보적인 존재이십니다. 홀로 한 분만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들은 다 상대화시켜야 할 존재들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처럼 큰 사랑을 당신의 백성에게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쉐마 명령은 바로 여호와가 유일하시고 독보적인, 비교불가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고 바로 대우해서 하나님만을 전심 전력으로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리고 그분의 존재에 걸맞게 바로 대우해야 하는 인간의 기본적 의무를 명시해놓은 것이 바로 쉐마의 첫 번째 명령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라고 말씀합니다. 쉐마의 첫 번째 명령인 하나님에 대한 바른 규정과 하나님에 대한 기본적 의무사항을 마음에 내면화해서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잘못 규정하면 자신을 잘못 알게 되고 하나님을 잘못 섬기게 됩니다. 그것이 곧 죄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버리는 겁니다. ‘마음에 새기라’는 말씀은 죄가 깃들지 못하도록 이 말씀을 내면화시켜 잘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율법 순종은 마음의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쉐마의 두 번째 명령이 나옵니다. 7절입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너’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네 자녀’라고 하는 것으로 보건대 ‘너’는 부모를 가리킵니다. 4-5절의 쉐마의 첫 번째 명령은 부모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먼저는 부모입니다. 자녀가 아닙니다. 부모교육이 우선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바로 깨닫고 자신 안에 있는 우상들을 다 치워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 되도록 전심전력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음에 새겨지고 몸에 기억될 정도로 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인 우리는 ‘내가 과연 선생 될 자격이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부모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 있지 못하면 가르치나 마나이기 때문입니다. 가르침이 효과를 낼 수 없습니다. 쉐마의 첫 번째 명령을 잘 순종하는 부모가 될 때 두 번째 명령도 지킬 수 있습니다.
쉐마의 두 번째 명령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가르쳐야 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항상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의 삶의 패턴이 자녀에게 말씀을 어찌하든지 교육하는 것에 의해서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우선적으로 자녀에게 말씀 교육하는 것에 올인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르치라’는 동사는 단순히 강의하고 끝내는 활동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가르쳐서 자녀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잘 박힌 못처럼 박히게 될 정도로 반복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듯이 자녀도 최소한 그 정도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이 되는 부모의 수준만큼이라도 자녀를 끌어올리라는 명령입니다.
부모가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부모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 말씀합니다. 본문 8-9절입니다: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한 마디로 부모가 삶의 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의 손목에 이 쉐마의 말씀을 매어두라는 것은 이 말씀을 모든 활동의 중심으로 삼으라는 것이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는 말씀은 사고와 판단의 기준과 기초를 말씀에 두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생각하는 것에나 행동하는 것에나 부모가 먼저 말씀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기도 하고 행동하기도 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이 기준이요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 문설주에 기록하라는 말씀은 집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말씀에 주목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가정을 주관하라는 것입니다. 바깥 문에 쉐마의 말씀을 기록하라는 것은 바깥 문이 성문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가정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력 아래에 두도록 말씀의 원리가 확장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쉐마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모입니다. 부모 자신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사랑하는 신앙적 기준을 분명히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생명력 있는 신앙이라면 자연스레 삶에서 드러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가르침이요 산 교훈이 되는 것이며, 구체적인 말씀 가르침에 더욱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쉐마의 원리입니다.
실제 사례를 놓고 보더라도 이처럼 말씀의 원리에 철저한 신앙을 가진 1대 신앙인은 삶에서 본이 될 뿐 아니라 자신이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철저하게 말씀에 순종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정도로 말씀 우선적 신앙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철저하게 말씀 교육을 시키게 됩니다. 그 결과 자녀 역시 바른 신앙인으로 자라날 뿐 아니라 훌륭한 인성을 지니고 소위 사회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도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역할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성경은 인생 매뉴얼입니다. 사람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복된 삶인지를 알려주신 지침이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어떠한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자녀를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대원칙을 발견할 수 있는 바 그것이 곧 쉐마이며 쉐마 명령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 잘 순종하면 우리의 자녀들이 바른 신앙, 훌륭한 인성, 그리고 성공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먼저는 부모 된 우리가 말씀에 입각하여 바른 신앙을 가지고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전심전력하여 더욱 사랑하고, 그리고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자녀들을 잘 말씀으로 가르쳐서 신앙이 다음세대에까지 이어지며 훌륭한 자녀들로 성장하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4월28일 설교 (주일 낮)
축제로서의 친교 (마 9:9-13)
둘째 아들, 소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흥건하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집 나갔고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아들이 살아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아담의 이야기요 아담의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범죄한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과거를 불문하고 받아들여주시고 그들의 돌아옴으로 인해서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만드신 사람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다시 자녀로 맞아주십니다. 조건을 높이 세워서 조건에 맞는 사람만 받아주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 품을 떠났던 사람이 누구라도 돌아오면 다시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죄에 대해서 생각이 없으시거나 마음씨가 좋아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여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취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준비해놓은 조처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온전히 아버지께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서 회복되고 수립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그분의 온전한 복종으로 이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시작된 하나님나라는 예수를 믿어 예수님과 연합한 자에게 임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합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하는 치명적인 반역 DNA를 제거하셨습니다.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반역의 DNA요 죄성이요 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성향의 치명적인 독성을 예수님께서 제거하셨습니다. 스스로 주인 행세하며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가던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누적된 죄악을 짊어지시고 둘째 아담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한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죄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반역 DNA를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로써 치료해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써 죄 용서함 받아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아울러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던 반역 DNA도 치료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고 대항하는 죄성이 어떻게 치료함 받게 되는 걸까요? 자신이 중심이고 자신이 주인 행세하던 사람의 근본 성향이 어떻게 변화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걸까요? 하나님도 없이 겁도 없이 자신이 주인 노릇하던 인생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되는 걸까요? 이것도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아담의 죄악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음을 아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본분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의 길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처음 지음 받은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지음 받은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리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서 제대로 하나님에 대한 위상과 자신의 위치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본격적인 죄성을 치료하는 시작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천국 백성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죄성은 뿌리가 깊고 피부처럼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어서 벗겨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긴 치료 과정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몇 가지 핵심 개념과 치료 기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은혜입니다. 은혜를 알면 절반의 성공에 이릅니다.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천국 백성이 은혜를 알면 하나님나라의 가장 큰 특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천국 백성답게 되는 결정적인 길이 은혜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송가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3절에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렇게 고백하며 감격스럽게 찬송하는 사람은 은혜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전제 국가나 독재 국가에서 다스리는 인간적이고 죄악된 통치와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통치인 이유는 하나님나라는 은혜가 다스리는 은혜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기쁘게 자발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얽매이게 만들거나 강압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거나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어쩔 수 없이 굴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참으로 우리를 인간답게 다스리심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통치요 은혜의 통치여서 그 나라의 백성은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임함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배설하셨고 그 잔치자리에 늘 함께 있었던 자들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를 아는 자들이 주역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 주역은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이었습니다. 다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나라의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역전이요 가치의 전도요 약탈당하고 빼앗김 당하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예수님과의 식사는 그래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식사자리에 초대된 사람의 면면이 소위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손가락질 받던 한 죄인을 부릅니다.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우리는 이 찬송가(‘인애하신 구세주여’)를 가슴으로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죄인 누구를 부르십니까? 마태복음을 쓴 마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를 부릅니다. 마태는 예수 믿고나서 붙여진 이름 인듯하고 원래 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유다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인 듯합니다. 예수 믿고 사울이 바울 되었듯이 예수 믿고서 레위에게 마태라는 또다름 이름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를 부르심은 전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세관원이었습니다. 세리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세리는 현지인이지만 로마 당국의 대표자로서 고용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통치를 받는 그땅 지역 주민들 중에서 세리를 선발했습니다. 지역 사람들과 지 역의 관습을 잘 아는 현지인들이 더 용이하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로마 당국이 정해 놓은 세금의 양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은 더 많이 세금을 징수하고 남는 것은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습니다. 욕심 많은 세리는 과도하게 징수하므로 백성들의 반감을 사서 백성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아마 마태는 가버나움 지역을 넘나드는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받거나 갈릴리호수에서 잡은 고기에 대해 세금을 징수했을 것입니다. 많은 주민들이 마태를 로마 점령자들에게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태의 부르심과 예수를 따름이 담담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마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여기서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갈릴리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는 좀더 어려운 결단입니다. 갈릴리 어부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자신의 본래 생업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마태는 건너온 다리를 폭파시켜버린 것과 같습니다. 돌아갈 수 없게 된 거죠.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주었던 본래의 직업인 세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결단입니다. 마태는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의 결단이 큰 결단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초청 받은 사람이 당황할 만한 상황입니다. 마태는 불쌍해서 불러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마태의 초청에도 응해서 그의 집에 방문해서 함께 식사하는 것까지 허락해주셨다고 볼 수 있지만 와 보니 마태의 친구들, 세리 친구들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상당히 불쾌했을 겁니다. 한 명 마태와 친구가 되는 것만해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적지 않은 사랑의 결단이 필요했을텐데 마태와 같은 세리들이 쭈욱 앉아있는 것을 보고 괜히 초청에 응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합니다. 죄인들의 소굴에 왔다는 생각에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명은 봐줄 수 있는데 여러 명은 도저히 못참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뻐하셨을 겁니다. 진정한 천국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으로 인해서 기뻐하셨을 겁니다. 천국은 죄인들이 돌아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게 아닙니까? 오히려 마태와 같이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이 많이 앉아 있으니까 오히려 기뻐하셨을 겁니다. 하나도 아니고 탕자가 여러 명이 앉아 있으니 얼마나 더욱 기쁘셨을까요? 마침내 드러난 은혜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바리새인은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단순히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고 있습니다. 왜 식사가 문제가 됩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뜻했습니다. 둘이 동지적으로 ‘하나됨’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은 예수님도 그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리새인을 포함하는 유대교의 종파들은 식탁 교제가 자신들의 그룹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 할을 했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그룹의 멤버들은 의식적인 정결례와 같은 다양한 종교의례적인 실천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을 때 공동 식사에 공식적으로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입문 의식을 치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바리새인의 심중에 예수님은 그들과 동일한 죄인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관계라면 예수님이 그들을 자신의 동료로 포함시키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들의 죄인됨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여준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문제 제기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2절) 예수님의 정확한 본뜻은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들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의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이 건강하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알지 못한 채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과 세리들은 자신들이 질병을 앓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까 그리고 자신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병든 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은 자신의 질환을 아는 자들에게 생겨납니다. ‘오직 예수’를 마음속으로 외치는 사람은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차려 놓은 잔치상은 천국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기뻐하는 잔치와 축제로서의 하나님나라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어서 오히려 주역이 되는 기이한 역설입니다. 은혜를 알 수밖에 없는 삶의 환경이요 삶의 구조였기 때문에 은혜의 왕국 곧 천국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구약성경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시며 말씀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절) 이 말씀은 제사나 예배나 율법을 지키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긍휼을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허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보다, 그리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는 것보다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행사할 때 예수님은 조심하셨고 메시야에 대한 오해의 소지도 있고 해서 예수님은 기적 행사를 자제하시려다가도 그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에,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픔 때문에 기적을 베푸시고 치료해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치료가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율법을 어겼다고 따져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은 참담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면 같은 인간으로서 축하해주어야 마땅할텐데 왜 죄인들과 식사함으로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고 같은 부류라는 오해를 사냐고 비난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보실 때 어떠했겠습니까?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맞냐고 하시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 죄인들이 너희 바리새인보다 더 큰 영적인 진보를 이룰 것을 내다보셨을 겁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보기를 원합니다. 어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전교인 야유회를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참여한 것도 기뻤지만 우리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된 분들이 많아서 더욱 기뻤습니다. 지난 주에 등록한 분도 함께 해서 더욱 기뻤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개방된 공동체가 되어서 그럴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앉아서 함께 예배드리고 그럴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역이 되는 것입니다. 소위 죄인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은혜의 감격이 더욱 커지고 그래서 예배가 살아나고 천국의 기쁨이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소위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역이 되는 교회가 아니라 중증 질환을 앓고 있어서 예수 아니면 소망도 가망도 없다고 여기는 부류가 변화를 받아 교회의 주역이 되고 그들을 심심잖게 만날 수 있는 공동체가 하나님나라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주역이 되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서로를 긍휼의 심정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하나님나라를 축하하는 잔치상이었습니다. 이 잔치에는 초대받지 못할 것 같은 부류가 언제나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은혜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손가락질 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은혜의 왕국에 가장 적합한 손님이요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치명적 독성과도 같은 반역 DNA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죄성을 온전히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 될 여력도 없고 주인 행세할 자원도 없는 부류만이 두 팔 벌려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감격 속에서 기쁨의 축제를 계속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인 이 예배가 그리고 함께 모인 소그룹 공동체가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나누며 축하하는 축제로서의 친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기뻐하는 축제로서의 잔치, 축제로서의 친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4월21일 설교 (주일 낮)
십자가와 부활 (롬 4:23-25)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구원 사건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우리가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켰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했고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에서 부활절로 이어지는 한 주일은 우리의 구원을 압축해놓은 기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십자가의 길을 걷고 십자가를 지는 시간으로서 이땅에서 보내는 ‘현재의 고난’을 지칭합니다. 우리의 전 생애는 ‘현재의 고난’이라고 부르는 기간입니다. 십자가에 동참하는 기간입니다. 이 길 끝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오늘 부활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누리게 될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는 날입니다.
매주 반복되는 한 주간의 삶은 이러한 구원의 패턴을 따라 진행됩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고난주간의 반복이요 그 길 끝에 있는 부활절의 반복입니다. 우리가 주일을 맞이할 때마다 왜 주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주일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식후 첫 날 곧 주일을 지킵니다. 구약의 안식일은 한 주간의 끝날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를 마치시고 창조 사역을 완수하신 후에 안식하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첫 창조를 뒤돌아보며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안식하셨던 것처럼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일을 지키는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이날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주일에 부활하셨습니까? 예수님을 한 주간의 첫날 곧 주일에 부활시키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은 새 창조의 시작입니다. 처음 창조는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인해서 그 결과가 죽음이었습니다. 창조주께서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처음 창조 세계에 깃든 죄악으로 인해서 죽음을 선고하셨고, 예수님의 부활로 새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처음 창조는 최종적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전혀 새로운 새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 창조의 시작이요 새 창조의 개시가 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간의 첫 날 곧 주일에 부활하심은 예수님의 부활이 새 창조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주간의 첫날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를 경축하면서 새 창조가 완성될 날을 내다보며 소망하기 위함입니다. 소망 중에 인내하며 ‘현재의 고난’을 지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보내고서 6일간의 ‘현재의 고난’의 시기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되돌아보며 회고하며 경축하는 날이라면 주일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를 경축하면서 앞으로 완성될 새 창조의 완성을 소망하며 내다보는 날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고난주간과도 같은 ‘현재의 고난’이라는 불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가 지냈던 고난주간과 고난주간이 끝나고 오늘 새롭게 맞이하는 부활절은 매주 반복되는 한 주간의 일상을 특별히 부각시켜주는 한 주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주 우리의 구원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일상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주간에서 부활절로 이어지는 특별한 한 주간은 우리의 구원 사건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조명하는 한 주간입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지나고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십자가와 부활의 패턴을 따라 한 주간의 일상을 지내게 됩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이요 구원의 패턴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땅에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보내주신 구원 열차이십니다. 탑승하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이 되셔셔 인류의 대표로써, 그리고 둘째 아담으로써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구원열차에 올라탐으로써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구원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하는 길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 있게 되려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믿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구원 사건에 동참하기 위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객관적인 생애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와 부활을 예수님이 체험하셨는데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이어서 죽은 자 가운에서 예수님을 일으키신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보내신 구원자임임을 믿는 것이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는 것이요, 이 모든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있게 됨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 안에 있게 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함으로써 죄에 대해서 죽고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새롭게 살아난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의 관건은 예수님과의 연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합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땅에 보내셨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과 합해야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핵심은 예수님과의 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할 때에 진정한 구원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주 되신 예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시는 예수님께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연합하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고 우리처럼 몸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을 굳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주되심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 백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약속을 굳게 붙드는 믿음으로만 우리는 예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예수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구원 사건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함으로써만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핵심은 오늘 본문 24절에 나오는 믿음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곧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임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 역시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자신의 몸이 이미 죽었고 자신의 아내 사라의 몸도 역시 죽었지만 하나님은 자녀를 주실 것을 약속해주셨을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즉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우리의 믿음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예수님에게 부활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처음 창조에 깃든 죄악의 결과였던 죽음을 예수님이 떠안으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이요,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고자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생명을 주셔서 그를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누구라도 새롭게 창조하시려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새 생명 가운데로 일으키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믿음으로써 동참함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객관적인 구원 사건에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함으로써 구원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비록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지만 만약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만 구원을 이루셨다면 그것은 온전한 구원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구원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다시 사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시고 구원의 방법으로 정한 것은 예수님이셨고 우리가 올라타야 할 구원열차도 예수님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셔야 했던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인류 구원을 이루시기를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만 구원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구원은 생명이고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처음 창조 때 지은 누적된 범죄함 때문에 예수님은 첫 창조의 죽음을 떠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전 것은 이렇게 청산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지었던 죄가 이렇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로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얻게 되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위한 구원 사건이요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믿음으로 동참함으로써만 예수 안에 있게 되는 부활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부활주일에 우리가 성찬식을 진행하는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서 참된 생명에 이르고 구원 받게 되듯이 우리는 성찬식에서 눈에 보이는 복음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서 그리스도의 몸을 실제로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의 구원 사건이고 우리가 믿음으로 동참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복음이지만,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찬식에서 나누어드리는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살이고 예수님의 피입니다. “이것이 내 몸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서 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에 편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에 동참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성찬식 곧 보여주는 복음의 예식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한층 강화되는 것이며 예수님의 생명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함이 어떻게 생생하게 이루어지는지 그 영적인 실제를 성찬식이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어떻게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을 이루게 하는지 성찬식을 그 실제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이면서 성례주일로 지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우리의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므로 주님의 부활생명으로 충만하고 부활의 소망으로 가득한 여러분의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4월14일 동산교회 총동원주일 설교 (주일 낮)
풍성한 생명 (요 10:9-10)
김동환목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최근에 쓴 책을 보내왔습니다. 책 제목은 <하나님을 만난 9명의 아이들>입니다. 기독교출판사가 아닌 일반 출반사로서 유명한 김영사에서 출간한 책입니다. 이분이 서울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분인데 100점 만점으로 환산했을 때 99.26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수석 졸업하였습니다. 이분이 중학교 때 하나님을 만나고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 바가 있기 때문에 이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되려고 대학교 전공을 종교학으로 정해서 종교학과에 진학했고, 총신 신대원을 거쳐 이후 청소년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박사과정도 수료했습니다. 2009년에 기독교 대안학교 ‘다니엘리더스스쿨’을 설립했습니다.
이분이 종교학과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기를 “하나님은 의지가 약하거나 부족한 사람들이 못다 이룬 욕망의 대리만족을 위해 만들어낸 인간의 욕구가 반영되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적 산물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없다”는 것이죠. 종교학과에는 각 종교를 대표하는 교수님들이 계십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를 전공한 교수와 불교 전공 교수, 그리고 유교 전공 교수, 비교종교학 전공 교수등이 있는데 예전에 기독교 담당교수로 오랫동안 봉직하고 은퇴한 정진홍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신문 인터뷰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회가 잘 유지되고 도덕적으로 건전하게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권위 있는 존재자로 사람들이 내세우고 만들어낸 개념 비슷한 식으로 말한 것이 저 개인적으로도 기억이 납니다.
하여튼 김동환 목사님이 대학교에서 처음 그 강의, ‘하나님이 없다’는 강의를 듣는 순간 그러면 ‘우리 엄마는 어떻게 살아난 것일까’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전 교회에서 이분의 어머니가 오셔서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동환목사가 일곱 살 때 이분의 어머니가 병원에서 시한부판정을 받았습니다. 병원에서 더 이상 치료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어머니 모습이 강의 도중에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몸무게가 30kg이나 될까 말까 한 앙상한 몸으로 누워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분의 집안은 대대로 불교집안이었습니다. 집에서도 불공을 드릴 정도로 돈독한 불교집안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치료를 위해서 불공을 드릴 뿐 아니라 유명한 무당을 불러 굿을 자주 하였습니다. 큰 절을 찾아다니며 부처님께 정성 어린 공양도 드렸고, 전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무당을 불러 한 달에 두 번이나 굿을 했습니다. 그래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위해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그토록 가기 싫어했던 교회를 찾아간 것입니다. 놀랍게도 교회에서 어머니의 병이 고침 받았고, 가족 모두가 기독교를 새 종교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분이 일곱 살 때 이러한 기적을 경험하고 그때 든 생각은 ‘교회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정말 있는가? 우리 엄마는 누가 살린 것인가?’ 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이분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곱 살까지 이분이 배운 기독교란 못된 꾀로 사람들을 속이고, 믿어서는 안되는 종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철저하게 조상께 제사를 드리며 조상신을 섬기고, 무슨 일이 생기면 무당을 찾고, 불교를 종교로 믿는다고 여겼던 집안이었습니다. 가끔 교회에서 전도하러 집에 찾아오면 굵은 소금을 뿌리고 문전박대했습니다. 그런 집안이었는데 이분의 어머니가 고침을 받고서 “하나님이 고쳐주셨다”는 말을 엄마 입에서 직접 듣게되니 혼란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엄마 손을 잡고 그때 이후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십년 넘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했는데 대학교에 들어와 종교학과에서 배우는 기독교란 성경 내용이 고대 근동 신화의 짜깁기, 인간이 만든 문화적 산물일 뿐이라는 폄하였습니다. 이분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학부 4년 동안 종교학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불교, 유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 사이비 종교, 이단 등을 각각 배운 후 종교 상호간의 비교종교학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열심히 각 종교를 공부하면서도 늘 머릿속에는 떠나지 않았던 의문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문화 산물이라면 하나님이 우리 엄마를 어떻게 낫게 할 수 있었을까?’는 의문이었습니다. 약간의 내면의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만든 것일까?’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 오랜 시간 씨름하고 연구했습니다.
이분에게 ‘하나님이 있다’는 말을 맨 처음 한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하던 엄마였습니다. 죽을 날을 받아놓고 있던 엄마가 교회에서 병을 치료받고 제일 먼저 한 이야기를 이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 진짜 계셔! 기독교 가짜 아니야, 사실이야 동환아! 엄마는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정말 하나님이 계시고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
이분의 엄마는 병이 낫기 전까지만 해도 아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만, 건강해진 후에는 “하나님이 엄마를 치료해주셨다”고 말하면서 “너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고, 하나님께 주의 종으로 바쳤어”라고 하면서 판검사가 아닌 목사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려고 이분은 자신의 기독교 대안학교에 찾아왔던 소위 문제아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어떻게 삶이 변화되었는지를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심층 면접하여서 하나님이 진짜 존재함을 보여주려고 <하나님을 만난 9명의 아이들>이라는 책을 펴낸 것입니다.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을 매진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 보니 문제아들이 이 학교에 입학하면 의무적으로 하루에 세 번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 세 번의 예배 때마다 함께 기도해야 할 제목이 있는데 특별히 하나님을 아직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아이들은 하나님께 “하나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 날 사랑하십니까? 안 사랑하십니까?”를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악을 쓰며 기도하다가 아니면 해야 돼서 재미로 외치다가 하나님을 만난 9명의 아이들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심각한 중독과 다양한 문제를 안고 살았습니다. 이들 모두는 하나님을 만난 이전과 이후가 극명하게 달라진 학생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만난 과정과 이후의 변화 양상이 대체적으로 유사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들의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바꿔놓았고, 그토록 공부라면 질색하던 아이들이었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학습을 실천하는 학습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한 두 달 잠깐 변화된 듯하다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아이들이 아니라 그러한 모습을 1년 이상 지속한 학생들입니다. 그 과정을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건져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라고 묘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다 양떼에 속한 양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에서 기르시는 양들입니다. 양들을 기르기 위한 우리는 악한 동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돌로 어느 정도 높게 쌓고 위에는 가시덤불을 얹혀놓습니다. 그리고 입구에 조그마한 문을 만들어놓고 그 문으로 우리에 출입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그 양 우리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문을 출입하여 들어가고 또 나가고 하면서 거기서 살아가고 그곳에서 꼴을 먹고 자라나는 양들로 우리를 비유합니다. 예수님이 양들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되어주셔서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구원 받는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는 본문 10절에 보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땅에서 양들이 잘 먹고 물도 마시고 우리에서 안전하게 생명을 잘 보존하고 유지하는 생명뿐 아니라 더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생명을 풍성한 생명이라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풍성한 생명이라 말할 수 있는데,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 유일한 원천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양무리인 우리로 하여금 이땅에서도 배불리 먹게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참된 보호와 안전이 되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처럼 양의 우리의 문이 되어주시는 예수님은 ‘문’으로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우리를 친히 기르시는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양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목자로서 예수님은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며, 그의 죽음으로 양들은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을 목자로서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모든 양떼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셨고, 양 우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버리신 희생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그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부활생명을 우리에게 약속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사는 부활생명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에 대한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름철에 강한 태풍이 오면 뿌리채 뽑인 나무를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여름철에 이파리가 무성하고 푸르른 나뭇잎들이 처음에는 푸르름을 간직해보이는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말라서 비틀어집니다. 뿌리채 뽑혔기 때문입니다. 대지라는 든든한 토대 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서 나뭇잎이 푸르름을 잃고 말라 비틀어지는 것이죠. 하나님께 연결되지 못한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연결되지 못한 인생이란 참된 생명의 근원과의 관계가 차단된 것과 같습니다. 뿌리채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잠시 잠깐은 자연적 생명에 의해 푸르름이 유지되는 것 같아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영원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말라 비틀어집니다.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유일한 연결의 끈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받고서 의롭게 됨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다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인생들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김동환목사의 이야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이분이 종교학과를 다니면서 씨름했던 주제가 ‘하나님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였습니다. 종교학과를 졸업한 이후 신학대학원에 진학해서 생각보다 쉽게 이 씨름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기원 후 지금까지 적어도 몇 억 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천국 가세요”라는 내용을 전하면서 목숨까지 잃은 사람이 수천만 명도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수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만이 유일하게 일년에 십만 명 이상이 이러한 내용을 전한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그들이 만났다고 하는 하나님은 진짜 계시는가? 아니면 그들이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만나고 싶어 간절히 찾다가 그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어떤 욕구 투사에 불과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런 허상 때문에 온갖 고문까지 인내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버리면서 수천만명이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
기원 후 180년 경에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로마 총독이었던 사투르니누스는 12명의 북아프리카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했습니다. 이들을 심문한 과정을 남긴 기록이 담담히 기술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의 관점으로 기술되었기에 극적인 자면도 없고 기적도 언급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도 구체적으로 서술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신문보도처럼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기술되었을 뿐입니다. 12명의 그리스도교인 중 한 사람인 스페라투스라는 사람과 총독과 나눈 이야기를 옮겨놓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 총독은 인간미가 있었던 사람인 듯합니다. 피고인들이 마음을 바꾸어 로마제국의 시민으로서 제국의 종교에 순응하고 로마 황제의 신적인 권능에 복종할 것을 맹세한다면 면죄해주겠다고 말합니다. 총독은 로마 황제의 신적인 권능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고 황제가 평안을 누리기를 기도하기만 하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총독은 교양 있는 사람이었고 12명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대개가 현지 출신의 노예였습니다. 총독의 말입니다: “자, 이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오. 우리는 결국 같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요.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휴정을 바라오? 30일이면 되겠소?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말기를 바라오. 구태여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필요는 없소. 간단한 일이오. 누구도 당신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오.”
이에 12명의 그리스도인을 대표하여 스페라투스가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았으며 납세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황제께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로마 정부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원천에서 나오는 명령을 따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한 달 간 생각해볼 시간을 주겠다는 제안에도 스페라투스는 똑같은 진술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게 재판은 마무리됩니다. 재판에 관해 전해지는 기록입니다: “사투르니누스 총독은 서판에 쓰인 판결문을 읽었다. 스페라투스 외 11명의 피고인들은 그리스도교의 관례를 따라 산다고 시인했다. 로마의 법도로 돌아올 기회를 주었음에도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므로 이들에게 참수형을 선고한다.”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 로완 윌리엄스 저, 174-177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오직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영접하여 참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라도 이땅에서도 충만히 실현된 생명을 얻게 되고 아울러 영원한 생명,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부활생명의 첫 열매가 되어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양의 문이 되어주시고 선한 목자가 되어주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참된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까? 성경은 약속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여러분 모두가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죽어도 사는 부활생명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4월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천국의 비밀 (마 13:1-9)
예수님은 이땅에서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셨습니다. 천국이 곧 도래할 것이며 이미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박이며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것을 촉구하는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고 이땅에 천국의 메시지를 들고 하나님의 사신(메신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가져오는 자로서 예수님 자신은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것을 많이 염려하신 듯합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천국을 이땅에 가져올 때 뭔가 기적적인 방식으로 천국이 임할 거라는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로 말미암은 오해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이 있을 것인데, 그러한 기대와 부합하는 모습으로 천국을 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천국에는 늘 기적이 끊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천국이 임하면 유대 나라가 오랜 식민통치를 끝내고 다윗 왕조를 재건할 것을 기대하는 우국충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유대인들만의 부활을 꿈꾸는 이도 있었을 것입니다. 늘 기근과 굶주림에 시달렸던 민중들이 이제는 굶을 걱정이 없어질 것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상이 가지각색이었을 것이고, 보통의 유대인들의 천국에 대한 기대는 말그대로 천국 곧 하늘 나라로서 지상 나라와는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천국을 가져오는 자로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오해도 예수님은 염려하셨습니다. 특별히 이땅에서 많은 기적을 베풀기 때문에 받는 오해가 컸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이땅에 온 메시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이땅에 내려오신 분이므로 당연히 많은 기적을 행사할 것을 기대하였고, 이러한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는 듯 예수님은 실제로 많은 기적과 치유를 베푸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이 임하려면 기적적인 방식으로 임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오해요 천국을 가져오는 자로서 예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기적을 베푸신 이유라고 할까요, 동기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죄에 매여 죽을 인생들을 향한 안타까운 연민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선함과 풍성한 은총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삶의 고통과 질병을 바라보면서 때로는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분노하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아야 했고 질병을 치유해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오해 받을 것을 염려하여 기적 행사를 자제하기도 했고 기적을 베풀고서 아무에게도 고침 받은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에, 그리고 창조 질서를 왜곡하고 인간을 나락으로 밀쳐내는 죄의 세력에 대한 분노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의도를 충만하게 누리지 못하는 질병과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예수님은 오해를 무릅쓰고서라도 기적을 베푸셨던 것입니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자랑하고 떠들었고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일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오해, 천국이 어떻게 임하는가에 대한 오해, 천국을 이땅에 도래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활동 방식에 대한 오해,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가에 대한 오해, 왜 기적을 베푸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오해, 이러한 오해에 대항하고서 이땅에 천국을 가져올 자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천국이 어떠한 것인지, 예수님 자신은 누구신지를 직접적으로 말씀하시 않으시고 예수님은 비유로써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란 그리스어로 ‘파라볼레’로서 ‘파라’ 곧 옆에다 ‘볼레’ 던지다, 곧 나란히 던져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마디로 가르치려는 영적인 진리를 추상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삶의 일상의 이야기를 그 영적인 진리 곁에 나란히 던져놓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비교’과 ‘견줌’입니다. 이해하기 쉬운 일상의 이야기를 이해하고서 그것을 견주고 비교하고 유추해서 영적인 진리를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비유가 ‘천상의 의미를 갖는 지상의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까?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을 오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땅에 천국을 도래시킬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는지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메시야로서 보냄을 받은 예수님이 이땅에 어떻게 천국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오해하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는 천국 비유로써 천국을 계시해주셨습니다.
소박한 자연 일상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천국이란 마치 이땅과 무관하고 초월적이기만 하고 내세적이기만 한 그러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처럼 이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늘 보아오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활동하시는 것이지, 위로부터 아래로 침입해 들어오는 비상한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오히려 창조주로서 창조 세계에 편만한 분으로서 이 세계의 중심에서 바깥으로 우리의 일상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분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천국의 임함은 기적적으로 오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말씀의 씨앗을 받을 때 임하는 잔잔한 물결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기적보다는 오히려 섬김과 희생으로써 임하는 천국입니다. 천국을 가져오는 분으로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사하거나 사람의 기대에 화끈하게 부응하는 방식으로서 천국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비밀 중의 비밀, 곧 메시야로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이땅에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 곧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통치와 얼마나 다른지를 예수님은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또다른 이유는 믿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관심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천국의 비밀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접적인 설명이 아닌 간접적인 비유로 가르침은 믿음과 관심이 있는 분 곧 들을 귀가 있는 분들은 한발짝 더 다가오라는 초청입니다. 아예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할 의사도 없고 오직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하나님의 나라 곧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권력의 확장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정한 천국의 모습을 그들은 원하지도 않을 것이죠. 오직 자아를 강화할 수단으로서 천국을 이용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직접 설명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비유가 제격입니다. 비유로써 무관심한 자들이나 천국을 기대하지 않는 자들은 탈락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은 회사에는 지원자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지원서가 도착합니다. 일일이 다 검토하기보다는 어떤 제한 조건을 설정하고 걸러냅니다. 일종의 스크린을 쳐놓는 거죠. 비유도 이러한 차단 효과를 냅니다. 오직 먹고 사는 것에만 온통 관심이 있어서 천국도 그러한 욕망을 달성시켜주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국을 직접 설명하시지 않고 비유로써 제시함으로 천국의 접근을 탈락시켜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을 고대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며 하나님의 회복을 원하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의 말씀을 듣고 더 큰 갈증을 느낍다. 그리고 한 발짝 더 예수님께 다가와 묻겠죠.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비유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비유뿐 아니라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관심 있고 믿음 있는 자들에게만 잘 들리는 속성이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에게만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속의 관심사에 사로잡혀서 말씀을 접하는 분들에게는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단으로 말씀을 왜곡시킬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비유만 비밀을 계시하는 게 아니라 성경 말씀 자체가 계시로서 비밀을 계시합니다. 보아도 깨닫지 못하고 들어도 알지 못하고 그러나 들으려 하면 들리고 보려하면 볼 수 있는 가까이 임한 계시의 말씀이요 천국의 복음입니다. 간절히 구하는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도 천국 비유입니다. 천국 비유로서 천국이 어떻게 임하는지, 왜 천국이 오해되고 거절되고 때로는 받아들여지는지, 천국을 가져오는 자로서 예수님은 어떻게 일하시는지, 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데 반해서 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거절하는지 등 기본적인 천국과 예수님에 관한 비밀을 계시해주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 비유를 신학자들은 강조점을 달리하면서 다음 세 가지로 불렀습니다. 주로 미국의 신학자들은 ‘씨 뿌리는 자 비유’로 말했고 주로 독일의 신학자들은 ‘네가지 토양의 비유’로 말했고 최근의 복음주의권 주석가들은 ‘씨앗들의 (운명에 관한) 비유’로 부릅니다. 각기 강조점이 다르고 각기 적용점도 다릅니다. 예전에 비유를 배우면서 비유에 나오는 구석구석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 양 영해를 한다거나 이솝 우화와 같은 알레고리화하지 말아야 함에 대해서 주의를 받았습니다. 오히려 비유에는 엄격하게 한 가지 의미가 있을 뿐이고 비유의 분명한 초점과 방향을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적으로 읽어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만, 오늘날에는 비유의 다의적 속성이 많이 강조됩니다. 한가지 뜻만이 아니라 비유 자체의 속성상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의 비밀을 계시하는 가장 중요한 비유로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세 가지 차원에서 조망해보고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비유는 ‘씨 뿌리는 자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씨를 뿌립니까? 말씀의 씨, 정확하게는 천국 복음의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리러 나가서 천국 복음을 무차별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을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선포합니다. 마태복음에서 그 선포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마가복음에서 그 선포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시지입니다.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거의 같은 뜻이지만 마태복음에서는 특별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부르기를 주저하고 하늘로 대체했다고 설명하는 분들이 대다수고 어떤 분들은 천국이라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땅에서도 지금 이루어지려고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말씀의 씨앗을 잘 받으면 천국이 임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소박하게 임합니다. 거창할 것이 없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면 천국이 임하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동산교회의 2019년 표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는 동산교회!”로 정했습니다. 가장 첫 번째 예수님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천국 복음의 씨앗을 가리지 않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복음의 씨앗을 널리 뿌리기 위해서 다음주일 총동원전도주일로 정하고 전도하는 것이고, 또 모든 민족에게 가라고 명하신 주님의 선교 명령을 받들어서 8월 초에 필리핀에 나아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려는 것입니다.
둘째, 이 비유는 ‘네 가지 토양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임하는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천국이 임해서 천국 백성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도 거절하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네 가지 토양은 복음의 씨앗을 받는 우리의 마음밭을 가리킵니다. 천국 복음을 받으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회개해야 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창조주되심을 인정하고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없이 산 인생들에게 회개를 먼저 말하는 이유입니다. 회개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이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씨 뿌리는 자’ 비유에 보면 ‘마음’을 다하여 회개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 나오는 바, 그것은 복음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진 경우입니다. 마음밭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길가에서 떨어졌기에 사탄 곧 새가 날아와 낚아채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마음에까지 말씀이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전심으로 받을 수 없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회개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못한 자들이란 처음에는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지만 믿음의 뿌리를 내리기에는 암반 위에 흙이 너무 얇은 토양입니다. 말 그대로 돌짝밭입니다. 처음에는 즉시로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고 결단도 합니다. 그러나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 환난이나 핍박이나 어려움이 찾아올 때 힘들어서 포기해버립니다. 신앙을 버립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르지 못합니다. 환난이나 핍박이나 신앙생활의 어려움이 찾아오면 자신의 목숨과 안위를 위해서 신앙을 헌신짝처럼 내팽쳐버립니다. 그래서 열매 맺지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진정한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힘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힘이요 또한 재물이죠. 흙도 풍성하고 잘만 하면 회개의 열매를 맺을 것 같은데 이미 마음밭에 가시떨기가 선점하고 있습니다.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재물에 대한 유혹, 안락한 삶에 대한 미련, 염려와 세속적 관심사에 꽉 붙들려 있어서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에게 천국 복음이 선포되면 그 진리로 자유함을 얻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어 존재의 문제를 해결받고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여서 창조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죄악으로부터 건져주시는 새 창조를 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 없이 산 인생을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여태까지 자신을 움직이고 있었던 원동력이었음을 깨닫고 완전히 방향 전환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 맺는 인생이 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정한 회개한 인생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천국 백성이 됩니다.
셋째, 이 비유는 ‘씨앗들의 (운명에 관한)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씨앗’은 말씀의 씨앗, 천국 복음의 씨앗임이 분명한데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해석해주시면서 씨앗이 단순히 말씀일 뿐 아니라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또한 가리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이라 하시지 않고 길가에 뿌려진 자라고 하셨고, 돌밭에 뿌려진 씨앗이라 하시지 않고 돌밭에 뿌려져 넘어지는 자라고 하셨고,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이라 하시지 않고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말씀이면서 말씀을 들은 사람들을 동시에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 말씀을 들을 때 마음밭이 중요하다는 강조라기보다 다소 예정론적입니다. 구조와 환경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천국 복음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우연히 굴러떨어진 곳이 어쩌다보니 좋은 토양이면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요, 운 나쁘게도 가시떨기밭에 굴러떨어지다보니 이미 선점해있는 가시떨기의 기운에 막혀 결실을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던져진 곳이 흙이 얇은 돌짝밭이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아까 ‘네가지 토양의 비유’에서는 복음의 말씀을 수용하는 우리의 마음밭이 중요하다고 강조되는데 반해서 ‘씨앗들의 비유’에서는 공동체의 토양이 강조됩니다. 공동체가 좋은 토양이면 천국 복음의 말씀을 받은 자 곧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됩니다만, 공동체가 척박한 토양 가령 돌밭이거나 가시떨기밭이면 천국 복음의 말씀을 받았더라도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각 개인의 마음밭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구조와 환경입니다! 말씀 담은 사람들이 어디로 굴러들어가느냐는 것이죠. 교회의 집합적 토양의 분위기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동산교회는 천국 복음의 말씀을 받고 더 받아 풍성하게 누리는 공동체입니까? 아닙니까? 아니면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는 환경입니까? 다르게 질문하면 우리 동산교회는 하나님나라 공동체입니까? 천국의 기쁨을 풍성하게 누리는 천국 공동체입니까? 교회의 가장 막중한 사명은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를 누리고 완성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내로써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공동체 전체의 토양이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특별새벽기도회로 모입니다. 전교인 특별새벽기도회입니다. 4월 14일 총동원주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한 주간을 보내고 이어서 다음주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이어집니다. 우리 동산교회는 기도가 흘러넘쳐서 하나님나라의 풍성함을 누리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좋은 토양이 되기 위해서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조금 더 가까이 접근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마태복음 13장 9-12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러한 천국의 축복이 우리 공동체에,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3월3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큰 소망 큰 기쁨 (겔 48:30-35)
에스겔 40-48장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입니다. 그가 본 환상은 새로운 성읍과 새로운 성전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자신이 본 환상을 전했을 겁니다. 완벽한 형태를 갖춘 새 성전과 이들이 거할 새 성읍에 관한 비전은 포로민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에스겔 40-48장에는 새 성전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돌아옵니다. 이미 에스겔은 10-11장에서 유다의 완전한 멸망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새로 건축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이 회복됩니다. 아침과 저녁마다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절기 때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롭게 됩니다.
에스겔 47장에 이르면 새 성전의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점점 많아져 큰 강처럼 흘러넘칩니다. 성전의 남쪽면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는 점점 많아져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까지 차오릅니다. 큰 강처럼 흘러가서 흐르는 곳마다 생명의 꽃을 피워냅니다. 과실을 생산해냅니다. 심지어 죽었던 사해 바다까지 흘러들어가 그곳을 생명으로 가득채웁니다. 물이 흐르는 곳마다 사계절 과실이 열매를 맺으며, 그 강곁에 늘어서 나무의 잎사귀는 모든 사람을 치료하는 약재가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침내 성전이 있는 성읍 곧 예루살렘의 새 이름이 ‘여호와삼마’로 명명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가 새 예루살렘의 이름입니다.
이 환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알기 원한다면 당대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이 환상이 어떠한 메시지로 들려졌을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본래 제사장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해가 기원전 587년인데, 그보다 10년 전에 에스겔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갑니다. 기원전 597년에 유다 왕조의 관료와 귀족과 제사장 중 일부가 바벨론으로 추방되어서 그발강가에 정착했습니다. 이때 에스겔도 포로로 잡혀갑니다. 에스겔은 본래 제사장이지만 그발강가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므로 선지자로 인정됩니다. 그발강가에서 에스겔이 본 맨 처음의 환상은 무엇이었습니까? 에스겔은 바퀴 달린 전차를 보았는데 그 전차가 하나님의 보좌를 떠받들고 있는 전차였습니다. 이 보좌 전차에 바퀴가 달려있었는데 바퀴가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영광과 임재를 철수하고 오히려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나아가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퀴 달린 보좌 전차는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장면을 에스겔은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서, 감람산에 올라가서 예루살렘 전경을 되돌아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마치 바퀴 달린 보좌 전차에 함께 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철수하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먼저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거합니다. 그들의 성전이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맨 처음 환상이 바퀴 달린 보좌 전차였다면 마지막 환상은 에스겔 40-48장에서 본 새롭게 된 예루살렘 성읍과 새 성전의 장관이었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던 해까지 에스겔이 본 환상의 주된 내용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포로로 잡혀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거로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하여 더 큰 심판이 남아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포로로 잡혀간 동족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남게 된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했고 하나님께서 완전한 파멸에까지 이르게 하시지 않을 거라는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셔서 예루살렘에서 내쫓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에스겔 11장 16절에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바벨론에 먼저 포로로 잡혀간 그들에게 자신이 직접 성소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중보 건축물 즉 성전이 필요치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성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성전입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성전의 크기와 구조와 제사 제도와 제사장직을 자세하게 규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포로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성전조차 필요치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포로민들 가운데 거하셔서 친히 성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성전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지막 환상과 마지막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입니다. 어떠한 회복입니까? 실제로 바벨론 포로민들이 대략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기원전 538년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실제로 성전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중수합니다. 다시 성전이 세워지고 제사 제도가 시행되고, 예루살렘 성읍도 원래의 형태를 회복합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졌지만 이전 성전에는 있었던 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웠던 소위 광야교회의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습니다. 솔로몬왕이 지은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포로민들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어렵게 지은 제2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보도가 없었습니다. 성전을 완공했을 때도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기록된 성경은 없습니다. 다만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포로민들이 돌아와서 지은 새 성전에 앞으로 가득할 영광에 관한 약속을 주셨을 뿐입니다. 학개서 2장 6-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다시 건축된 제2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에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게 되면 그때 영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을 약속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도 재건하고, 또 성벽도 중수하고 성읍도 재건했지만 온전한 회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가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에게서 벗어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페르시아에, 그리고 이어서 알렉산더제국의 후예인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전 63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본 새 성전과 새 성읍, 그리고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 삼파’ 곧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이름을 얻은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진정한 회복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 곧 에스겔 40-48장의 환상은 장차 올 메시아 시대에 관한 환상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실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진 회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 회복은 가까이는 바벨론 포로상태로부터 본국으로 귀환하는 회복이며, 멀리는 앞으로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한 회복이며, 더 멀리는 앞으로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회복될 것에 관한 비전입니다. 다만 이러한 궁극적인 회복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숙했던 옛 언약에 관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이며 성전의 제사제도이며 성전의 제사장직인데, 이것들이 회복된다는 것, 특별히 그 성전과 성읍이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는 성읍이 될 것임을 예고하심은 당대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온전한 회복의 그림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미리 내다본 미래는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함께 본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회복과 궁극적으로 성취될 온전한 회복을 동시에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저 멀리 장엄한 산맥을 다소 위에서 바라볼 때 여러 큰 산이 겹쳐져 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산과 산이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면에서 보는 산맥은 하나의 큰 산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오래 전 선지자가 본 미래에 관한 환상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회복된 미래를 볼 뿐이지만 산과 산이 겹쳐져 있음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선지자가 본 미래의 회복은 포로기 이후의 성전 재건이며 하나님섬김의 회복이며, 아울러 또한 세상 마지막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너무나 먼곳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두 광경을 하나로 조망할 뿐입니다.
‘여호와 삼마’로 명명된 새 예루살렘과 성전에 관한 환상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이미’라 함은 어떤 점에서 ‘이미’입니까? 신약성경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신약성경은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사십 육년 동안 지었던 헤롯 성전을 삼일 동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듣는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도대체 웬 해괴망측한 말이냐는 것이죠. 요한은 이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예수님이 성전의 진정한 회복이십니다. 진정한 성전이십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죄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만 진정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정한 성전이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머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여호와 삼마’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에스겔이 본 마지막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지막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의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된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을 만났고 또한 만나고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입니다. 아직 아닙니다. 이게 회복의 끝이 아닙니다. 회복되어야 할 더 큰 회복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요한도 환상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 새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서 보석같이 빛나는 장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성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이 되어주심으로 새 예루살렘성에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바벨론에 사로잡혀와서 그발강가에서 정착했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셔서 성소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셨던 약속과 동일한 비전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에스겔이 본 환상과 비슷한 환상을 봅니다. 신약성경에서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그때까지도 에스겔이 본 환상이 아직은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입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는 점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보고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거룩하게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때가 되면 하나님을 보고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호와 삼마 곧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회복, 궁극적인 회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는 새 예루살렘에서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곳으로서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드릴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과 새 성읍에 관한 환상에 따르면, 성전 구역, 성전 뜰, 성전 벽, 성전 건물의 완벽한 대칭과 이스라엘 백성의 정확한 배치가 있는데요,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이 세우신 흠없는 제사장들에 의해, 하나님이 정한 절차와 방법대로 합당한 예배가 이루어질 새 성전에 관한 환상은 완전한 예배를 궁극적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는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완전한 예배, 순전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에서 우리는 한눈 팔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고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서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만이 될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상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이 분명히 보여질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밝히 보여질 때에만 우리는 감히 다른 것들에 시선을 두지 않고 다른 것들을 예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전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성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 모든 성도들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신 분들을 거기서 모두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소망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소망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오직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 영광이 우리를 압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0-48장의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본문 35절입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오늘날에는 ‘빅’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보통의 자료나 정보가 아닌 ‘빅 데이터’,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큰 방향의 거대담론을 보여주는 ‘빅 퀘스천’(큰 질문),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빅 소망’, ‘빅 기쁨’ 즉 큰 소망과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분의 영광에 압도당해서 그분을 예배하게 될, 온전한 예배, 완전한 예배, 순전한 예배의 그날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우리가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오직 예수 안에서 만나므로, 그리고 오직 예수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큰 기쁨을 누리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3월24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기회로 (행 16:22-34)
토론토대학의 심리학교수인 조던 피터슨이라는 분이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쿼라’라고 하는 질의응답 사이트에 글을 올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터넷 사이트 ‘쿼라’에서는 누구나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 이가 공감하면 ‘추천’ 버튼을 누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면 ‘비추천’을 누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은 위로 올라가서(상위 ranker)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글은 아래로 내려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이분이 심심할 때 간혹 들어가곤 했던 ‘쿼라’에서 한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그 질문은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분이 임상심리와 종교심리를 폭넓게 공부한 분이고 원래는 하버드대 심리학교수였으나 본국인 캐나다로 돌아와서 토론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일하고 있었기에 이 질문에 할 말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생각하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인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정리해서 올린 글이 바로 이 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분이 올린 대답의 글을 읽은 사람이 무려 12만명이나 되었고, 2300명에 의해 추천을 받았습니다. 이 사이트 ‘쿼라’에 올라온 약 60만 건의 질문 중에서 추천수가 2000회를 넘긴 답글은 수백 건에 불과한데, 이분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공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의 답변을 확대하고 보강해서 쓴 책이 바로 <12가지 인생의 법칙>입니다. 당연히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겠죠.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 중에서 인생의 제1법칙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몸가짐이나 정신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강조입니다. 몸가짐이나 몸짓이 바뀌면 심리도 변화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 실험 중에서 실험 참가자에게 얼굴 근육을 한 번에 하나씩 움직여 슬픈 표정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고서 심리 상태를 확인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 과정에서 더 슬퍼졌다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 근육을 하나씩 움직여 행복한 표정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고 심리 변화를 확인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 과정에서 더 행복해졌다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 마음의 감정은 몸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 때문에 기존의 마음의 감정 상태가 증폭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가슴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왜소하고 자신감 없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스스로도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굉장히 소극적인 자세인데 이런 자세는 마치 등 뒤에서의 공격을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게 되고 그래서 무력감과 무기력이 더욱 증폭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세와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패배자의 자세를 하고 다니면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 때문에 패배자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허리를 쭉펴고 어깨도 펴고 당당한 자세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사람을 다르게 보고 그것에 맞게 대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겉모습에만 해당되는 인생의 법칙은 아닙니다. ‘똑바로 선다’는 것은 또한 정신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려운 고난과 고통 앞에서, 그리고 인생의 재앙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움츠려드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불굴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말입니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하겠다는 뜻이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방주를 지어 홍수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지키고, 바로의 압제와 폭정으로 고통받는 동포들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겠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겠다는 뜻이고, 과부와 어린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자로서) 전하겠다는 의미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옳은 것과 편한 것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분은 강조합니다. 먼저 자세부터 반듯하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구부정하고 웅크린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기회가 늘어납니다. 그 결과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고, 실제로 좋은 일이 생기면 자신감도 커지는 선순환에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 실라는 인생의 혹독한 시련과 외부의 박해에 대항에서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인생법칙을 실천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2차 선교여행 도중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인 빌립보라는 도시에 이르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2차 선교여행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함께 했던 바나바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고 했습니다만, 바나바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바나바와 갈라서게 됩니다. 1차 선교여행 때 힘들어서 마가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버린 일이 있었는데, 바나바는 이번 2차 선교여행 때 마가를 데려가서 다시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 일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싸우게 되어 갈라섭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 구브로섬(싸이프러스)으로 선교여행을 떠났고,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를 택해서 그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출발부터 삐거덕거린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이후도 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방문했던 곳을 재차 방문해서 세워진 교회를 다시 돌아보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1차 선교여행 때 교회를 세웠던 터키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이상하게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잘 안된단 말이에요. 성령님께서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더디게 진행됐던 이유가 있음을 바울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께서 밤에 바울에게 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아시아 터키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에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말하는 거예요.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서 즉시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유럽으로 가라고 하시는 거구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게 된 바울 일행은 즉시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첫 번째 이른 도시가 바로 빌립보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보에서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귀신 들려 점을 치는 한 여종이 바울 일행만 보면 따라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행 16:17)라고 크게 외치는 겁니다. 볼 때마다 그러는 거예요. 며칠을 그러는 거예요. 바울이 안되겠다 싶어서 여종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버렸습니다. 귀신이 나오니까 소위 신기가 없어지고 그래서 점도 못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종의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돈을 못벌게 되니까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관리에게 고소했습니다. 이들이 유대인으로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로마의 도시 빌립보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성을 요란하게 한다는 죄목으로 고소한 것이죠. 여기에 많은 무리가 가세하게 되자 관리들은 법에 의거하지 않고 고발당한 바울과 실라에게 심한 매질을 한 후에 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3-24절입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차꼬’를 차게 되면 아주 불편해집니다. 죄수들이 앉은 자세로 있을 때나 바닥에 누웠을 때에 잠을 잘 수 없도록 큰 불편을 초래하는 고통을 주기 위해서 중죄인에게 차꼬를 채운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심한 매질로 인해서 아마 밤중에나 깨어났을 것입니다. 깨어나고서 잠자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한밤 중에 깨어 있게 되었고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러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선교여행,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뒤늦게 알고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오게 된 2차 선교여행, 그런데 결과는 심한 매를 맞고 차꼬에 채인 채 감옥에 갇히는 너무나 분명한 실패와 시련입니다. 얼마나 좌절됐겠습니까? 얼마나 낙심이 들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쯤되면 절망해버렸을 것입니다. 뒤늦게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선한 사업에 힘쓰다가 이렇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것도 심하게 맞아서 밤중에나 깨어난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다가왔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섰습니다. 크게 찬송하였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들릴 정도로 크게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마 다른 죄수들이 생각하기에 ‘저 사람들 뭐야!’, 그랬겠죠. 관리들이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면서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고 주의를 줬던 간수도 참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제네들 뭐야!’
바울과 실라의 반응은 이후 간수의 반응과 비교가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6절입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버렸습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고 바울과 실라뿐 아니라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고서 잠을 자고 있던 간수가 깨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서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것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27절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간수는 죄수들을 잘 지켜내지 못하면 자신에게 임할 엄벌을 알았을 겁니다. 특별히 “든든히 지키라”는 특별 명령을 받고 수감된 바울과 실라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이후 얼마나 큰 벌을 받게 될 것인지, 그는 알았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더더욱 자살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때 바울이 간수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지릅니다. 28절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바울은 자결하려는 간수를 안심시키려고 자신과 실라뿐 아니라 죄수들이 아직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다른 죄수들은 아마 어안이 벙벙하고, ‘이게 뭔일인가’ 하고서 도망갈 생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간수는 바울 앞에 엎드리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29절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간수가 왜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을까요?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고서 이러한 비상사태에 직면해서 두려움이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두려움과 무서움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관리들처럼 간수도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으로 알았고, 그들이 섬기는 종교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고, 간수 역시 관리들이나 많은 빌립보성의 무리들처럼 바울과 실라는 맞아도 싸고 감옥에 갇혀도 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들을 감옥에서 든든히 지키라는 책무를 맡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밤에 바울과 실라가 곡조를 알 수 없는 종교적 노래를 부르고 주문처럼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던 차에 이러한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니까 ‘이거 뭔가 잘못됐구나. 이분들을 때리는 게 아니었는데, 이분들을 가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분들은 신의 대리자들이 아닐까’ 하는 종교적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갑자기 일어나 비상한 재난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이후 옥문이 열려서 죄수들이 도망가서 자신이 받게 될 처벌 때문에 두려움이 더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분의 무서움과 두려움은 신의 대리자들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섬기는 신이 이 정도로 땅을 흔들고 차꼬를 풀게 하고 옥문을 열어버리는 기적을 보여주었다면 이후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신의 진노 앞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사자, 신의 대리자로 여겨진 바울 앞에 두려워서 엎드렸던 것입니다.
간수는 엎드려서 당연히 종교적인 질문을 합니다. 30절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를 물었는데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는 말하고는 조금 의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단어와 그당시 빌립보라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살고 있던 로마제국의 간수가 생각하는 ‘구원’은 그 의미가 달랐을 겁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구원’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소테리아’라는 단어입니다. ‘소테리아’는 당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어떤 뜻이었냐면 당연히 세속적인 뜻이었습니다. 어떤 위험으로부터 구출이나 보호, 안전, 질병에서의 치료와 건강, 축복이나 혜택과 같은 좋은 상태 등을 뜻했습니다. 영적인 구원이나 영원한 구원 같은 개념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아마 빌립보 간수도 이러한 뜻에서 ‘구원’ 곧 ‘소테리아’를 말했을 겁니다. 벌어진 이 상황, 그러니까 아직 죄수들이 도망가지는 않았다 해도 옥문이 열려진 이러한 상황에서 죄수들이 도망갈 것이고, 괜히 죄도 없는 신의 사자 혹은 신의 대리인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갇히게 해서 앞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신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나 어떻게 살아야 해?’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바울에게 가져오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었을 겁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적을 불러온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 게다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거냐는 질문을 받은 바울은 ‘바로 이때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복음 전할 기회라고 바울은 포착했습니다. 31절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바울의 대답은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마 간수의 질문의 의도를 알았을 겁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건지 묻는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에다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개념을 더해서 포괄적인 의미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러한 상황도 벗어날 수 있고, 어깨를 펴고 다시 당당히 살 수 있게 될 것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정한 구원, 영적인 구원, 영원한 구원, 신의 심판과 진노 앞에서도 얻을 수 있는 기독교의 구원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는 누구십니까? ‘주 예수’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간수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선생들이여’라는 말은 정확하게는 ‘주인들이여’, ‘주인님’ 이러한 뜻입니다. 간수가 보기에 신의 대리자 혹은 신의 사자로 여겨진 바울과 실라는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에 바울은 진정한 주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 우리의 유일하신 주님이신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벗어날 수 있고, 헤쳐나갈 수 있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대답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말이기도 하고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이요 간증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왜 밤중에 노래를 불렀던 걸까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실패를 경험하고 좌절을 겪고 낙심하고 심지어 절망적이라고 여길 만한 상황에서, 심한 매질에서 이제 막 깨어난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는 소위 ‘밤의 노래’를 부르고 왜 기도했던 걸까요? 주 예수님께 기도했겠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겠죠. 예수님만이 주님으로 통치하시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할만한 상황조차도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반응했는데 반해서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간수는 자신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자살하려고 시도했단 말입니다. 그러한 간수에게 내가 믿고 구원 받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고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이요 방금 전에 경험한 자신의 신앙간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집안 전체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예언처럼 간수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그 집안 전체가 구원 받을 것을 말했습니다. 32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간수와 그의 온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고, 이들은 빌립보교회의 첫 열매인 두아디라의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와 더불어 빌립보교회의 기둥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온 가족이, 그리고 여러분이 작정한 아직 예수 믿지 못한 사람들이 다 주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이땅의 온갖 곤경과 어려움에서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이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므로 큰 기쁨이 여러분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3월1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 7:37-39)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 동기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이론인데요, 무엇이 동기가 되어서 사람을 움직이는가를 설명하려는 이론입니다. 인간성의 가장 근본 성향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세기에 큰 족적을 남겼던 정신의학자 중에 지금에까지 유명세를 떨치는 3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프로이트와 아들러, 그리고 마지막으로 빅터 프랭클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다 유대인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생각한 인간의 근본 동기는 각기 다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능을 따라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을 인간 본성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비록 의식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은 욕망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인간 행동이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고 나선 아들러는 어려서부터 형성된 열등감을 행동의 주된 동기로 보았습니다. 열등감을 극복하고 그것을 보상하려는 ‘권력에의 의지’가 인간의 주된 동기라는 것입니다. 소위 명예욕이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이었던 빅터 프랭클은 쾌락원리나 명예욕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성향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누구나 인간에게는 주어진 것으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그래서 불가피하게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으나 찾지 못하고 그 의지가 좌절될 때 인간은 실존적 공허감을 느끼고 인생의 허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 공허감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소위 대용품이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과 욕망과 본능에 따르는 삶이요, 아들러가 말한 명예욕이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요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삶일 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자에게 인기가 있는 분입니다. 왜냐면, 이분의 주장, 삶은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은 주어진 삶에 책임감 있게 응답해야 할 사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에 따라 동기화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이해가 결국에는 인간이 자기를 넘어선, 다시 말해 자기를 초월한 어떠한 대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자기 초월과 인간의 지향성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무의식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무의식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적 본능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무의식도 있다고 보았는데, 신학적 견해에 따라 그렇게 본 게 아니라 꿈이나 양심 같은 인간 현상을 분석함으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꿈의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무의식에는 근본적으로 종교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았고, 양심의 분석을 통해서 외부에서 주어진 양심의 초월성을 드러내보였습니다. 외부에서 주워진 양심을 통해서 삶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음을 보았고, 그래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기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를 지향하게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종교심과 초월적 양심이 지향하는 대상 곧 무의식의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분은 자신이 신학자가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위로부터의 삶의 의미’보다 ‘아래로부터 삶의 의미’를 아울러 강조를 하기는 합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상황에 맞게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일컬어 ‘아래로부터 삶의 의미’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쓴 책 제목이 <무의식의 신>인데 원제는 ‘궁극적 의미를 향한 인간의 추구’입니다. 책 전체의 흐름과 논증은 오히려 인간 정신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도달한 신학의 도입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이분이 심리 요법 상담 치료 요법을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입니다. 의미 심리 치료법입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성향이 좌절된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줌으로써 정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치료법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동기 이론이나 의미 요법은 자신의 실존적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분이 2차 세계 대전 때 유대인 포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년을 지내야 했는데, 대부분이 죽어나간 그곳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그 안에서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미래에 실현될 의미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정했던 사람들만이 대부분 생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박탈해가는 곳이었습니다. 수용소 감독감들이 수감자들에게 약 50kg이나 되는 젖은 소금 부대를 옮기라고 지시했습니다. 넓은 수용소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짊어지고 간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수용소 입구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된 노동으로 인해서 너희는 자유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잘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수감자들에게 무거운 소금 부대를 옮기는 고된 노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고문이었던 것입니다. 무의미한 고역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좌절시킴으로 인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시름시름 죽어나갔던 것입니다.
아우슈피츠 체험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심리분석을 실존론적 심리 분석이라 불렀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성향이 좌절될 때, 즉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허감과 허무감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공허감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맨탈 붕괴현상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그대로 따라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허감이나 허무감은 결국 다른 충동으로 이어지는데 그 결과를 빅터 프랭클은 세가지로 보았습니다. 우울증, 중독, 공격성입니다. 우울증이나 중독현상 가령 알콜중독이나 성중독이나 마약중독과 같은 중독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적 성향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공허감과 허무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적으로 이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우울증 환자나 중독 환자나 공격적 성향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탓이라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삶의 의미도 하나의 주된 요소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간 존재가 지향하는 대상이 되는 무의식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해명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 치료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은 누구라도 자신에게로 와서 신선하게 흐르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청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미 예수님은 허기와 굶주림에 찬 인생들에게 자신에게로 와서 생명의 떡을 먹으라고 초청한 바가 있고, 이번에는 목마름의 해갈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이 끝나던 제7일이나 팔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구약의 3대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동안 물이 없는 그곳에서 반석에서 물을 공급하여 주시고, 먹을 것이 없는 그곳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공급하여 주셔서 인도하여 주신 광야 40년의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초막절은 시기적으로 가을 추수를 끝내고 풍성한 추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기후적으로 초막절은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이른비가 내릴 즈음에 위치에 있습니다. 오랜 건기를 지내고 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물을 기원하는 축제의 절기가 곧 초막절입니다. 광야에서의 물없음과 물이 귀한 곳에서의 물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유대인의 절기로서 초막절, 이 명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성전뜰에서 일어서서 크게 외치는 장면입니다.
일주일간 지속되는 초막절 절기 때 제사장들은 소위 물의 의식을 치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님 탄생 약 200년 전부터 시작된 초막절 의식입니다. 제사장들이 실로암못으로 내려가서 물을 담을 수 있는 금으로 된 용기에다가 물을 담고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의 뜰에 있는 제단을 올라가 제단위에다 그 물을 붓는 의식입니다. 매일 한차례 진행하던 물붓는 의식이 초막절 끝날에는 일곱 번 반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 째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이 끝나면 제사장은 손을 듦으로 의식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아마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친 것이 아닐까 드라마틱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물이 귀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물을 제단에 부음으로써 풍성한 물을 기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체험하기 위해서 초막절에 자신의 집뜰에 장막을 치고 불편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일종의 광야체험을 한 것입니다. 광야생활의 가장 큰 불편함은 물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초막절에 실로암못에서 물을 가져 제단에 붓는 의식은 풍성한 물을 가져다주실 하나님의 은총의 시대를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갈증을 영원토록 해갈시켜주실 하나님의 개입을 소망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종말론적 소망이 반영된 종교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의식을 집행하고 바라보았던 유대인들이 가득 모인 성전 뜰에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물붓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제사장이나 유대인 순례객들은 목말라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닙니까? 광야에서 그토록 아우성을 치고 하나님께 투정하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이유도 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광야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시게 하셨던 것처럼 풍성한 물을 한량없이 부어주셔서 유대인들의 오랜 기갈을 해갈시켜주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물붓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인생들에게, 그래서 늘 허기에 차있고 목마름에 어쩔 줄 몰라하며 실존적 공허감과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마시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생수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신선하게 흐르고 솟구시는 물을 주셔서 마시게 함으로 인생의 오랜 갈증을 해갈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배’는 누구의 배를 가리킵니까? 초대교회부터 2가지 해석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견해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입니다. 생수의 근원은 예수님 자신이시고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로 해갈을 먼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생수의 통로로서 생수의 원천이 되어 그들 역시 해갈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배’를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보아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생수의 유일한 근원이시오 생수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이미 죽은 예수님을 확인 사살하기 위해서 로마 병정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예수님의 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3-34절입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의 배에서 흘러나온 이 물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께서 초막절의 물붓는 의식이 끝날 무렵에 외쳤던 풍성하고도 신선한 생수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흘러넘치는 생수는 곧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신 이후에야 그 배에서 흘러나오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완수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 아버지에게서 받아서 보내실 성령님이 임할 순간에 성취될 해갈의 약속입니다.
믿는 자들만이 받게 될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생수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마름의 진정한 해갈입니다. 공허감과 의미 없음과 허무감의 진정한 치료약이십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향방 없이 표류하면서 다른 것들을 대용품으로 삼아서 끊임없는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헛된 시도 끝에 기진하고 탈진한 인생에게 성령이 오심은 인생의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와 방황을 끝장내버리는 사건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의 진정한 해갈이요 삶을 의미로 충만케 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며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얻게 되는 성령님은 인생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무의식에서 지향하고 추구하던 존재인 바, 바로 그분을 우리가 소유하게 됨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참된 자유와 해방이요, 참된 해갈과 만족이요, 참된 의미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름효과(Name-Lettet Effect)’란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이름과 유사한 문자를 가진 직업과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가 2002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예일대학 심리학과 교수 조지프 시몬스와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샌디에고 캠퍼스(UCSD) 심리학과 조교수 레프 넬슨은 지난 5년간 메이저리그 선수 6398명,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밟고 있는 1만5000명 등 총 5개 집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2002년부터 학계에 알려진 이름 효과에 따르면, 톰(Tom)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름과 비슷한 ‘도요타(Toyota)’차를 구매하고 토론토(Toronto)에 살 가능성이 높고, 데니스(Dennis) 데나 (Denn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치과의사(Dentist)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또 이름이 C나 D로 시작되는 미국 학생은 A나 B로 시작되는 학생보다 낮은 학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름이 K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는 삼진 아웃(Strikeout, 약자 K로 표시)을 당할 확률이 월등히 높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를 맡았던 넬슨 교수는 “이름 효과는 주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면서 ”부정적 단어와 연결되는 이니셜은 부정적인 효과를 내기 쉽다”고 밝혔습니다. 시몬스 교수는 이름 효과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보다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존재인가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자기가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의이름과 관계없이 언제나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 남산편지(http://www.nsletter.net) (http://www.adventist.or.kr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이냐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유함으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에 의해 소유된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다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혼돈은 이로서 끝났습니다. 목마름, 공허감, 허무감,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방에 날라갔습니다. 이러한 존재임을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므로 인생의 진정한 생명수를 제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3월1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방법 (사 28:23-29)
어느 유명한 수학자의 학생시절 경험담입니다. 그는 언젠가 수학 시험을 치는 날 그만 지각을 하였습니다. 시험장에 들어서니 이미 시험지는 배부되었고 칠판에는 두 문제가 적혀 있었습니다. 늦게 시험지를 받아 쥔 그는 시험지에 있는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었으나 칠판에 있는 두 문제만은 도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교수님에게 그 문제들을 집에 가서 풀어와도 되겠느냐고 요청해서 결국 허락을 받았습니다. 3일간 씨름을 해서 한 문제를 풀었으나 다른 한 문제는 도저히 풀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고생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한 문제를 포기한 채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 교수님은 껄껄 웃으면서 “그날 칠판에 적어 놓은 문제들은 어려워서 아인슈타인도 풀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자네는 늦게 와서 그 말을 못들었네.” 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풀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풀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으나 그는 못들었기 때문에 풀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한 문제를 풀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문제를 풀어 주시길 원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을 때, 우리는 문제를 해결받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http://cyw.pe.kr/xe/index.php?mid=a23&page=25&document_srl=318131)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과, 이 문제는 도저히 풀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접근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화에 나오는 학생이 그나마 어려운 두 문제 중 한 문제라도 풀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문제가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해결 방법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해야 그나마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모를 때 보통 어떻게 하십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께 문의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우리가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29절)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농부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단 농부뿐 아니라 교육가에게는 교육하는 방법을, 정치가에게는 나라와 국민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법관에게는 잘 판단하여 선고할 수 있는 방법을, 상인들에게는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경영”이며 “지혜”입니다.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9절)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모든 해법과 방법이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경영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본문 23절에서 하나님은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1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들어야 할까요?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인 우리 인간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농부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기에 앞서 어떤 작업을 합니까?
본문 24-25절을 보십시오. “파종하려고 가는 자가 어찌 쉬지 않고 갈기만 하겠느냐 자기 땅을 개간하며 고르게만 하겠느냐 지면을 이미 평평히 하였으면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에 심지 아니하겠느냐”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에 먼저 땅을 갈고 개간하고 고르게 하고 평평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농부는 “소회향을 뿌리며 대회향을 뿌리며 소맥을 줄줄이 심으며 대맥을 정한 곳에 심으며 귀리를 그 가”(25절)에 심습니다. 소회향이나 대회향은 주로 향료로 사용되던 식물입니다. 약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소맥은 밀이고 대맥은 보리입니다. 그런데 소회향이나 대회향 같이 종자가 작은 것들은 지면에 뿌리면 되었던 반면에 이보다 종자가 큰 소맥과 대맥은 줄을 지어 심거나 혹은 구획을 나눠 심었습니다. 그리고 밀의 일종인 '귀리'는 가장자리에 심었는데, 이는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듯 식물 종류별로 씨를 뿌리는 적당한 방법을 하나님께서 농부들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26절에서 “이는 그의 하나님이 그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음이며” 하나님께서 농부에게 “적당한 방법"으로 일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여기서 ‘적당한 방법’으로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로서 ‘공의’나 ‘공평”으로 흔히 번역됩니다. 특별히 재판관이 공정하고 공평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여기서는 이 단어가 ’적당한 방법‘으로 번역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가르쳐주셨을까요? 추측해보건대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에게도 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여러 번 경험을 한 후에 바른 방법을 배우게 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농부는 곡식을 추수하고서 곡식의 이삭을 떨어서 낟알을 거두는 타작을 합니다. 타작을 할 때도 곡식의 종류별로 다르게 타작합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소회향은 도리깨로 떨지 아니하며 대회향에는 수레 바퀴를 굴리지 아니하고 소회향은 작대기로 떨고 대회향은 막대기로 떨며” 타작을 할 때 어떤 것은 도리깨로, 또 어떤 것은 수레바퀴를 굴려서, 또 어떤 것은 작대기나 막대기로 합니다. 곡물에 따라 타작하는 방법이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낟알의 크기와 낟알이 잘 떨어지는 지 등을 고려해서 적절한 도구를 가지고 타작하는 것입니다. 소회향과 대회향과 같은 자그마한 곡식의 낟알을 큰 타작기구를 쓰거나 수레바퀴를 굴려서 털어낸다면 알곡들은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미세한 작업을 요하는 향신료에 이런 큰 장비를 사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이어지는 28절에서 “곡식은 부수는가, 아니라 늘 떨기만 하지 아니하고 그것에 수레바퀴를 굴리고 그것을 말굽으로 밟게 할지라도 부수지는 아니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곡식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타작하지만 부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부숴지도록 하면 안돼죠.
이사야 선지자는 농부들이 이런 원리들을 하나님 즉 창조주로부터 배웠다고 말합니다. 29절에서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경영이 기묘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혜와 모략이 인간에게 놀라움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위치한 이사야 28장은 북이스라엘 곧 에브라임이 멸망하기 직전에 선포되었던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이 심판의 말씀을 이사야가 지금 가져온 이유는 남유다도 동일하게 북이스라엘이 걸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대로 가면 남유다도 멸망당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입니다. 특별히 세력을 떨치며 점점 남유다를 공략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서 남유다 히스기야왕이 반앗수르 정책을 펼치고 애굽을 의지하여 애굽과 동맹을 맺은 정치외교적 상황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맥락속에 오늘 본문이 위치합니다.
이런 맥락속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농업 모략을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농업 모략처럼 하나님의 역사 모략도 놀라운 것이며 성공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농부들이 하나님의 교훈을 탐구하여 그 방법대로 행하여 추수하는 것처럼,정치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교훈을 얻고자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방법에 귀를 기울이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방법뿐 아니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경륜이 있는 분이시고, 이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 관심과 모략과 지혜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모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 경륜을 거스르지 말고 유다왕조가 한 세기 전의 유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했던 실수를 따라가지 말라는 간청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모든 문제 해결을 위한 적당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로 그 적당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서 삶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를 친한 친구로 삼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성경 잠언 말씀을 읽고 좋은 친구가 어떠한 친구인지에 대해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에게 어떠한 사람이 좋은 친구인지를 가르쳐야 하고, 또 자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친구가 되도록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단 농부에게만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적성과 재능을 주셔서 각자에게 적합한 직업으로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땅에서 먹고 살게 해주시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농부에게 적당한 방법을 보이사 가르치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알려주셨으면 하는 방법이 있으면 무엇인가요?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고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키는 무엇일까요? 가장 적당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마스터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말씀은 인생의 매뉴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보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에게는 방법이 있고 해답이 있음을 믿고 성경 말씀을 읽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경영이 기묘하며 지혜가 광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적당한 방법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창조세계에 넘치는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과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5-17절에서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알 게 되고, 이뿐 아니라 성경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삶의 법칙도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배워서 익히고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바로 섬기면서 이땅을 보람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인이 가장 순종하지 않는 성경 말씀이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부천대학교에서 유아교육을 가르치는 전성수교수라는 분은 이 질문을 하고 자신이 대답합니다. 신명기 6장 6-7절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신 6:6-7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성경은 분명히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6장 7절의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에서 볼 수 있듯 항상 자녀에게 부모가 직접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 말씀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6절에서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바르게 잘 사는 길을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가르치면 평생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구석구석 모든 말씀을 다 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평생 동안 반드시 잊지 말고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의 진리라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은 말년에 나이가 너무 많아서 치매에 걸렸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것들을 거의 다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나이도 자신의 생일도 몰랐습니다. 하도 답답해서 제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 선생님이 알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뉴턴은 빙긋 웃고 대답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 되신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내가 확실히 알고 있지.” 다른 것 다 몰라도 좋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내 구주가 되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를 힘써 알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앞에 새로운 미래가 전개될 것입니다.
- <지식을 버린 자의 미로> (곽선희 저, 68쪽)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사의 모든 크고 작은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 분임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당한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귀기울여 듣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적당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어느날 예술가들이 모여 각자가 당면하고 있는 고통에 관해 토론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증오, 경제적 궁핍, 창작활동에 대한 무력감, 나빠지는 건강 문제 등... 사람들마다 나름대로의 비법을 말합니다. 독한 술을 마시거나 지인들을 찾아가 고통을 호소하고 때로는 폭력적 증오와 파괴적 본능을 분출하는 방법 등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게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 하이든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우리집에는 작은 골방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나의 기도실입니다. 고통이 닥치면 나는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골방에서 나올 때면 나는 언제난 희망의 빛을 발견합니다."
기도는 신비로운 능력을 발휘합니다. 기도는 어둠을 쫓아내고 고통의 주름살을 제거합니다. 우리도 심각한 삶의 문제로 인해 고난을 겪을 때 즉각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로 문제를 해결하려고하는 성숙한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http://blog.naver.com/jooane2?Redirect=Log&logNo=120151702955)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농부에게 자동적으로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시지는 않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과학의 발전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심어놓으신 창조의 법칙과 방법을 발견하고 활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그것들을 발견해내고 개발할 수 있는 잠재력이 주어져있을 뿐입니다. 개발과 발전은 열심히 노력하고 탐구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국 창조세계에 가득한 아름다움과 진리도 노력하는 자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떠한 믿음과 또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요?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 적당한 방법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심 또한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말씀과 기도로써 문제 해결을 위한 적당한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 이땅에서 성공적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2월24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선물 (엡 2:1-10)
오늘 본문은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장 본질적인 대답을 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 인간의 비참한 상태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동기가 무엇인지, 왜 우리를 구원해주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구원 받은 이후의 영광스러운 상태는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이 모든 주제를 통합하는 키워드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선물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기 이전의 우리의 상태는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 죄로 인해서 죽은 자들이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게 구원입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구원입니다. 죄로 인해서 죽었던 우리는 사탄의 결박 아래서 사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2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인간은 창조주에 의해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어서 자유롭다고 생각되는 그때에도 진정 자유롭지 못하고 누군가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거나 사탄의 통치를 받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죄 가운데서 행하면서 사탄의 권세 아래에 결박 당하고 사탄의 통치 아래서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사탄의 통치를 받은 이유는 사탄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탄 때문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해서 사탄의 통치 아래로 기어들어갔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살다보니 그것이 곧 사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다 죄악된 욕망뿐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였고 우리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머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이것이 과거의 우리들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상태입니다.
어항속의 물고기는 물속에서 삽니다. 평생을 그렇게 삽니다. 그것이 전부인 양, 다른 세상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물속에서 살아갑니다. 물밖으로 옮겨져서 강이나 바다에 놓이고 나면 이전의 어항속의 답답함을 느낄 수 있을까,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다른 세상을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통치 아래서 자신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는 사람도 그 세계에서 누군가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지금 자신의 삶이 너무 자연스럽고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입니다. 자신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세계에서 탈출해서 바깥 세상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자신의 과거의 모습이 비정상적이고, 자유롭다고 생각했으나 사탄의 세력의 결박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착각속에 살고 있습니다.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조차 알지 못한 채 정상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참한 상태를 가장 잘 아는 분이 누구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시죠. 우리를 만드시고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러한 비참한 상태를 가장 잘 아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그러한 마음 아픔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 세계에서 끄집어내셨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나님의 자비로우심과 그 자비로 인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비롯된 마음입니다. 죽었던 우리의 비참함을 가장 잘 아시고 보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 큰 사랑” 때문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수와 함께 일으키신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비참함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차마 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십니다. 우리의 사정을 잘 헤아려주십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아픔 당하고 상처 받은 우리의 비참함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큰 선물도 주셨는데, 이보다 작은 선물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에서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죄로 인해서 죽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서 사탄의 압제 아래 살던 우리를 끄집어내신 하나님, 이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현재의 고통과 아픔에 눈감고 계시겠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환난과 곤고와 아픔을 외면하시겠습니까? 가장 비참한 상태에서 끄집어내셔서 구원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이보다 작은 비참함은 외면하시고 작은 선물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5절을 다시 보십시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가 뜻하는 바가 6절에 나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일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에서 완료형 동사가 쓰이고 있습니다. 이미 완료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비록 미래의 일이지만 완료되었다고 말하는 이유는 구원의 확실성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으로서 객관적으로 구원을 확실하게 이루신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안에서만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그것도 풍성한 은혜임을 알리시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 때문에 비롯된 구원의 선물이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이유는, 다시 말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객관적 사건으로 인해서 구원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유는 이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지극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빈손들고 나아가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받음으로써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적으로 예수 십자가의 공로입니다.
그러면 이 큰 구원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원은 새 창조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에서 ‘만드신 바’는 그리스어로 ‘포이에마’인데요, 하나님이 수행해서 빚어낸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수행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품이요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새 창조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에 이 선한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것입니다. 처음 창조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일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이요 또한 새 창조의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주신 목적은 예수 안에서 전혀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선한 일을 위하여 살도록 변화시켜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선한 일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가는 삶일까요? 선한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요 선한 삶을 사는 것일텐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킬까요? 이번 주에 예전에 보았던 세 권의 책을 다시 끄집어내 읽어보았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구약학 교수인 존 바턴의 <온 세상을 위한 구약 윤리>와, 미국 예일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기독교윤리학 교수인 존 헤어의 <우리는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가?>와, 작고하신 독일의 저명한 조직신학자 판넨베르크의 <기독교윤리의 기초>라는 책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선한 삶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다시 이 책들을 읽어보았습니다. 공통된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선한 삶은 하나님의 계명,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선하고 참으로 인간다운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만 가능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물론 우리의 의지적 결단도 필요하겠습니다만, 우리의 행동 이전에 그 행동을 가능케 하는 본질적 요소가 바로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였는가, 얼마나 소망 없는 상태였는가, 형벌 받을 것밖에 없는 죄악된 존재였는가를 바로 보고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얼마나 더할 나위 없이 영광스러운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비참한 상태에 갇혀 있던 우리를 끄집어내시고 새로운 영광스런 약속으로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으로 자연스레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속죄와, 비록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다라고 칭해주시는 칭의와, 비록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동참하기에는 너무나 더러운 자들이지만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우리를 거룩하게 빚어가시는 성화로 완성되는 구원의 전 과정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참된 순종, 자발적 순종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 곧 선한 일을 행하며 살아가는 선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우리 한 사람 구원을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함께 그리고 역할 분담하여 일하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주십니다. 우리를 변화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결국 선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되게 해주십니다.
구원이 무엇인지 확실히 아는 사람들은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며, 이로써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앎으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입양되어 하나님 아버지를 자녀로서 닮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품이 변하지 않고 어찌 선한 일을 하는 자로 변화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선한 삶은 어떤 경지까지 이르는 삶일까요?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경지에까지 이르시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로마서 12장 17-21절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아이들을 여럿 길러보니까 어릴 때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웁니다. 한 대 맞은 얘는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듯 그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아이들의 모습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간다면 악을 악으로 맞대응하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늘 아침 고층빌딩에 오르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급히 탄 후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버튼 밑에 붙은 글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버튼을 누르지 마세요.15초 후면 자동으로 문이 닫힙니다’ 15초를 기다렸습니다. 잠시지만 한참이나 기다린 듯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얼마전 대형 빌딩을 관리하는 관리인의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승객들이 무심코 누르는 ‘닫힘’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몇십 개의 엘리베이터를 가동할 경우 수억 원의 전기료를 절약할 수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작은 실천이 이토록 많은 돈을 절약할 수 있다니요. 우리가 무심코 누르는 이유는 그것을 공짜로 이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엘리베이터는 공짜로 이용합니다. 사용료를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도 그럴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주인은 우리가 공짜로 이용하는 엘리베이터를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전기료를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짜지만 주인은 공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공짜 은혜-값싼 은혜’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대가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도,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하나님도 공짜였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공짜로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뿐인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시키신 것입니다.” (정학진목사 설교 중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모든 변화가 구원에 대한 바른 이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넘치게 되며, 구원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달게 느껴지게 되며, 구원을 통해서 주어진 약속의 영광스러움과 축복의 보상을 알게 되어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더욱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이란 무엇인지, 우리를 위해 거저 선물로 주신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고 선한 삶,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2월1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복종과 저항 (롬 13:1-7)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 1-7절에서 바울은 통치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발적 복종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로마서 12장부터 시작되는 윤리적 가르침의 일부입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윤리적 가르침의 전체를 집약해주는 근본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에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이제 그들의 “몸” 곧 일상의 삶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동물을 죽여 하나님께 바치던 과거의 제사와 달리 이제 순종하는 삶으로써 살아 있는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것이 영적이고 합당한 예배 방식입니다. 몸으로 드리는 삶의 예배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삶에 힘써야 합니다. 거룩함을 이루는 길은 이 세대에 물들지 않고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 곧 생각이 달라져야 합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사고방식이 변화를 받고 이렇게 해서 행동양식이 변화되고 삶의 방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몸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어야 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정치나 권력의 영역에서도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삶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통치 권력에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영적 예배의 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1절)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성도들이 복종해야 할 ‘위에 있는 권세’는 다스리는 통치자와 권력자를 가리킵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국가 혹은 정부, 그리고 국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당국자들입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위에 있는 권세”라는 피라미드 구조의 맨 정점에 로마 황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에 “위에 있는 권세”를 국민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본문의 현대적 읽기라 할만합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하고 부연하기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로 설명합니다. 지금의 대통령도 국민이 투표로 선출했죠. 그래서 대통령의 권력도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것이죠. 이런 의미로 “위에 있는 권세”를 정부의 통치자로 보기보다 국민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의 권면,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명령도 통치자들을 겨냥한 것으로 봅니다. 권력을 위임받았으니까 권한을 남용하거나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지 말고, 주권자인 국민적 요구에 잘 순응하라는 명령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원래 의도를 넘어서는 현대적 해석이어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명백하게 본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대상으로 제시된 “위에 있는 권세”는 당시 로마의 통치자와 행정 관료들입니다. 이들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이들에게 위임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위임되었고, 그리고 국민들이 투표라는 절차를 통해 그 권리를 다시 소수의 통치자에게 위임하는 구조이기는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께만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간 권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권력 자체에 대한 맹종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 권력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 1-7절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고 이어서 ‘왜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는 듯이 바울은 본문에서 ‘왜냐하면’을 뜻하는 단어를 일곱 번이나 사용합니다. 바울은 왜 복종해야 하는지, 복종의 근거를 제시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통치 권력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는 것입니다. 통치 권력이 하나님에 의해 세워졌는데, 만약 우리가 통치 권력에 반항한다는 것은 그 권력을 세우신 하나님께 반항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신적 통치의 대리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권력자들의 통치에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통치 권력에 불복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에 불복하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이란 통치 권력에게 주어져서 휘두르게 된 ‘칼’로써 이루어지는 심판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 둘을 다 포함한 것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는 말씀을 보면 통치자가 하나님의 징벌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하고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는 걸로 봐서 통치자가 대리하는 하나님의 진노의 실행으로서의 심판으로 보는 견해가 더 좋습니다.
복종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통치권력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정의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권선징악이라는 바람직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통치권력은 부지불식 간에 하나님의 뜻에 봉사한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즉 통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이용하여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장려하고, 이로써 죄악이 넘치는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통치자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한다면 칭찬을 받지만, 악을 행한다면 통치자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력자들에게 기꺼이 복종해야 합니다. 두려움 때문에 혹은 강제력 때문에 복종하는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이어야 합니다. 통치자의 정당한 요구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복종하는 동기도 진노 때문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복종하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양심을 따른다는 것은 양심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양심이 있으므로 선악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판단해보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복종이 아니라 신앙양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양심을 가지고 잘 분별해서 통치자의 권력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권력이요, 통치자에게 복종함이 곧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세금 내는 문제를 통치 권력에 대한 복종이라는 일반적 진리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합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통치자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말할 뿐 아니라 여기서는 ‘하나님의 일꾼’이라 부릅니다. 통치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권력을 가지고 악을 응징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수행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에서 사용된 ‘주다’라는 동사는 그냥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빚진 것을 되갚다’는 뜻으로서 여기서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를 이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슨 세금이든 통치자에게 내야 할 세금은 너무 절세하려고 하지 말고 성실하게 납부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 약간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역자’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통치자들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응징하는 일에 “항상 힘쓴다”고 말하면서 “복종하라!”고 명령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당연히 모든 권력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나 ‘하나님의 일꾼’이 권력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말은 아닙니다. 단지, 권력자들이 세상의 질서 유지라는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된다는 사실을 묘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에 무조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복종의 조건이 있습니다. 통지자들이 선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전제를 근거로 하여 그 통치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복종의 조건을 설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존재하는 모든 정권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명령했다면, 굳이 정부의 순기능을 길게 강조하지 않았을 겁니다. 만약 권력자들이 선을 장려하거나 악을 응징하는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만약 그 기능을 포기하거나 역행한다면 복종이 아닌 저항이 필요합니다. 복종해야 할 정당한 근거가 사라지면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양심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려야 하겠죠.
하나님이 위임하신 권력이라는 것도 권력이 절대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뜻이라기보다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로마서 13장을 잘못 해석하면 선한 권력뿐 아니라 당시 로마제국처럼 사악한 권력에도 복종하라고 했으니까 우리는 어떠한 정부 권력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합니다.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독재정권이라 해도 일상적 통치 행위는 정상적이어야 하고, 방금 전에 말한 권력의 순기능을 수행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없을 때 저항해야 합니다. 국가 권력자들이 긍정적 의미에서 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악한 통치를 수행할 때는 불복종을 선언하고 저항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를 응징하는 권력의 존재 이유를 망각했을 때 저항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물론 로마서 13장의 관심사는 불의한 통치권력에 대한 불복에 관심을 두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13장은 정부 권력에 대한 순종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 악한 정부에 대한 저항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놓고 보면 성경적 상식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권력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고 악한 권력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에는 소위 권력자들의 불의한 요구에 대해 복종하지 않고 저항한 소위 ‘거룩한 저항’의 사례가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이 공평과 정의라는 하나님이 그들을 세우신 목적을 저버렸을 때 하나님은 그 왕을 심판했고 그 왕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복종은 이유 있는 복종이고 양심에 따라 이유 있는 불복종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저항도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교만하고 악한 권력을 반드시 물리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국 본토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2001년 9·11테러 때 공격을 당했죠. 미국 본토가 직접 공격을 당한 일대 사건이었죠. 911 이후 미국 부시 대통령은 워싱턴 대성당에서 국가위기에 맞서 국민적 단합과 정신적 힘을 고무시키기 위해 예배를 드리죠. 형식적으로는 각 종교인들을 초청한 것이었지만, 설교자가 빌리 그래이엄 목사였죠. 기독교 예배였죠. 그때 부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역사 앞에서 우리의 책임은 이미 분명합니다. 이번 공격에 대응하고 세상에서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후 부시 대통령은 정치지도자에서 종교지도자로 완전히 바뀐 듯이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후 많이 사용되던 용어는, <전쟁의 신학>(의로운 전쟁), <의로운 제국>, <악의 축>, <테러와의 전쟁은 현대판 십자가전쟁> 등이었습니다. 2004년에 이러한 일련의 흐름에 맞서서 미국 내에서 200명이 넘는 신학자와 기독교 윤리학자가, 이들 대부분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복음주의자들이었는데, 이런 정치적 분위기와 주장이 교회들에 스며들어 우리의 신앙고백 자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여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 성명서의 제목은 ‘폭력의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라!’였습니다. 그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포함됐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국가의 경계를 따지지 않는다.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다. 국가 정체성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이 먼저다” 이들의 비판의 핵심은 부시 행정부가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혼동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천상적이고 영적인 나라와 지상적이고 시민적인 나라를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천상적이고 영적인 나라는 교회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지상적이고 시민적인 나라는 국가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쉽게 말해서 칼빈은 교회와 국가를 다른 두 영역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은 천상적이고 영적인 나라뿐 아니라 지상적이고 시민적인 나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로 보았습니다. 교회와 국가 모두 하나님의 나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기관으로 보았습니다. 두 나라 모두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하나님에 의해 다른 방식으로 통치를 받는 기관으로 보았습니다. 이 두 나라는 이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의미 있는 적극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땅에 사는 동안 두 나라의 모두의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국민입니다. <기독교강요>에 나오는 칼빈의 말입니다: “사람에게 이중적 통치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나는 영적인 통치인데, 이것으로 양심이 경건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배운다. 다른 하나는, 시민적 통치인데, 이것으로 인간으로서와 시민으로 해야 하는 여러 의무를 배운다. 이것은 보통 영적 관할권과 세속적 관할권으로 불린다. 전자의 통치는 영혼의 삶에 관계가 있는 반면, 후자의 통치는 현세의 문제들, 즉 음식과 의복뿐 아니라 거룩하고 고결하고 절제있게 자기 동료들과 살아가는데 필요한 법률을 제정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전자는 영혼 안에 좌소를 가지고 있고, 후자는 다만 외부 행동을 규제한다. 우리는 전자를 영적 나라로, 후자를 시민적 나라로 부를 수 있다.” 법률을 전공한 칼빈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칼빈은 두 나라를 명료하게 구분했고, 이 둘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국가를 보는 입장도 교회 안에서 구분됩니다. 어떤 분들은 국가가 처음부터 주어진 창조질서에 속한 것으로 봅니다. 국가라는 것이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간 본성의 반영이고 인간 본성의 실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율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 질서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다른 분들은 국가는 인간의 타락이후 죄의 파괴적이고 과격한 역사를 제재하기 위한 구속질서 혹은 보존질서에 속한 것으로 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에 따르면, 국가는 타락 이후 죄악된 인간의 악을 징벌하고 선을 장려하기 위한 칼의 권세를 지녔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서 세상 권세에게 칼과 법이 맡겨진 것은 악한 자를 벌하고, 경건한 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국가는 보존질서에 속한 것으로 봅니다.
올해로 31운동 100주년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구약성경에서 강조한 ‘거룩한 저항’의 역사적 사례라 할만합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독립운동의 자양분이요 원동력이라 할 수 있었던 31운동입니다. 1919년 3월 1일 삼일 만세운동이 시작되고 난 이틀 후 기독교인들에게 일종의 행동강령과 같은 ‘독립단 통고문’이라는 문서가 돌려졌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존경하고 고귀한 독립단 여러분이여, 어떤 일이든지 일본인을 모욕하지 말고, 돌을 던지지 말며, 주먹으로 때리지 말라. 이는 야만인이 하는 바니, 독립의 주의를 손상할 뿐이니 행여 각각 주의할지며, 신자는 매일 세 차례 기도하되 일요일은 금식하며 매일 성경을 읽되 월요일은 이사야 10장, 화요일은 예레미야 12장, 수요일은 신명기 28장, 목요일은 야고보서 5장, 금요일은 이사야 59장, 토요일은 로마서 8장을 돌아가며 다 읽을 것이라.”
당시 일본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스스로 최고의 민족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면서 온갖 악한 짓들을 다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왕을 신격화하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교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백 년 전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 걸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무리 대단해도 오만한 세상 권력은 하나님이 반드시 물리쳐 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양심을 따라 거룩한 저항의 불길에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삼일운동은 우리 민족이 하나 되어 만들어 낸 위대한 기독교 역사요 유산입니다. 독립운동 서명자 33명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전국에 흩어진 교회들이 네트워크가 되었습니다. 남녀노소, 신분, 지역, 환경을 초월하여 우리 민족이 이렇게 하나 된 적이 없습니다.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온 민족을 하나 되게 한 것입니다.
올해로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해서 우리가 오늘 본문 로마서 13장 1-7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에 의해 위임된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와 권력자에 복종하고, 또한 어떤 기준에 의해서 불복종을 선언하고 저항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두 나라 백성으로서 이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우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2월1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무지개 약속 (창 9:8-17)
하나님은 대홍수로 말미암아 죄악된 인류를 청산하고 노아와 그의 자녀들과 더불어 새롭게 인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홍수 이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장면입니다.
노아 언약은 다른 말로 하면 보존 언약 혹은 자연 언약이라고도 불립니다. 노아 언약의 주된 내용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자연의 규칙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창세기 8장 21-22절에,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약속은,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자연 질서가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창조의 질서는 보존될 것입니다. 앞으로 땅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자연현상이 규칙적으로 계속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아담 이래로 인간이 악한 성향으로 기울어졌기 때문에 아무리 심판한들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심판으로 변화될 수 없다는 판단입니다. 인간성향을 뜯어고치기 위해서 심판한다고 해도 변화되지도 않을뿐더러 심판이 수행된다면 인류는 지구에서 생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악행과는 무관하게 범죄한 인류가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대홍수로 인류를 심판하셨습니까? 창세기 6장 5-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세상에 범람한 악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할 정도로 근심하셨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절당하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을 정도로 사람의 악이 극에 달했다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 지은 것을 후회했다는 발언은 창조 행위에 대한 부정인데, 그렇게라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악을 보시고 절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아 대홍수는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홍수가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약속은 더 이상 인간이 죄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 주어져야 맞겠죠.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현실을 하나님은 정확히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인류가 모두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아서 생존의 길이 열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와의 약속에서 하나님은 그 어떤 요구사항이나 조건을 내걸지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자연질서의 안정적 운영과 법칙의 영구성을 약속해주셔서 죄악된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대홍수를 겪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자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이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니고 어떻게 급변할지 모르는 무서운 곳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대홍수 사건은 기존의 창조질서의 붕괴였고 자연 질서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까지 익숙했던 자연법칙이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도 있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얼마든지 비정상적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경험한 것입니다. 극단적인 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고 밤이 지나면 다시 해가 떠오르는 자연의 순환과 자연의 규칙성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안할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불안에 떠는 노아에게 자연현상의 규칙성을, 그리고 자연법칙의 불변성을, 자연의 예측가능성을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자연법칙의 단순성에 놀라워합니다. 복잡해보이는 자연현상을 간단한 수식으로 기술할 수 있다는데 과학과 수학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이르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그 이상은 과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 없다는 과학자들도 있고, 자연법칙만 가지고 우주를 설명할 수 있으니까 굳이 자연법칙을 만든 창조주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과학자들도 있기는 합니다.
몇 해 전에 작고한 스티븐 호킹 박사가 쓴 책 <시간의 역사>는 이해하기 상당히 어려운 책입니다. 그런데도 전 세계적으로 약 천만부나 팔린 초 밀리언셀러 책입니다. 아마 책을 사놓고 다 읽지 못한 책 중의 대표적인 책으로 꼽힙니다. 책을 소유는 하되 얼마나 읽었는가를 가늠하는 지표를 호킹지수라고 합니다. 책을 사놓고 몇 쪽까지 읽었냐를 확인하는 건데요 쉽게 설명하면, 독자들이 책을 읽다가 밑줄을 친 구절이 맨 마지막에 어디에 나타나는지를 보고 그 쪽수를 전체 책 쪽수로 나누어 비율을 따져 지수로 산출하는 방식입니다. 지수가 낮을수록 조금 보다가 책을 덮었다는 뜻이겠죠. (한국일보 2014.7.15.) 그런데 <시간의 역사>의 맨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책이 끝납니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물음의 답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인간 이성의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스티븐 호킹은 겸손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무신론자로 기울어진 것인지 무신론적인 신념을 공개적으로 자주 발언했습니다만, 적어도 <시간의 역사>에서는 다양한 자연현상을 통일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자연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신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둘째, 노아 언약의 주된 내용은 다시는 홍수로 인해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본문 9-11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홍수가 나더라도 노아 때처럼 온 인류와 생물을 다 멸절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홍수 이후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던 노아와 그의 후손들과 심지어 동물들과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약속의 대상이 노아나 노아 가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더 나아가서 모든 생물이라는 사실이 특색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가장 소중한 존재이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가장 소중하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 특히 동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노아언약은 하나님이 창조의 질서로 새겨넣으신 자연법칙과 질서를 보존해주시겠다는 약속이요, 이번 대홍수와 같은 사건으로 자연과 인류를 심판하지 않고, 인류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땅이 있는 동안 전지구적 전인류적 심판을 유예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인류와 자연이 최후의 심판 때까지 보존될 거라는 약속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류와 자연을 보존해주시지 않으시면 이 세상은 망해서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노아언약의 표징은 무지개입니다. 본문 12-1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무지개는 자연현상 중의 하나입니다. 자연법칙에 따라 빛의 성질에 따라 빛이 굴절해서 내는 다양한 색깔입니다. 무지개를 지목하므로 하나님은 일반적인 자연현상을 증거로 삼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신실성을 확증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15절에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실 때마다 당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무지개를 지목하신 것입니다. 무지개를 증거로 삼으셨는데, 대홍수에 대한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무지개를 보고서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노아는 대홍수의 참극을 겪고서 자연의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아시는 하나님이 노아의 마음을 안심시켜주시고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려고 친숙한 자연현상을 증거로 삼아 언약을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노아에게 무지개로써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대홍수를 겪었기에 먹구름이 밀려오는 것만 보고서도 두려워하기 쉬운 연약한 인생 노아야 그러나 두려워하지 마라. 구름 사이에 떠오르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안심하기를 바란다. 앞으로 죄악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처럼 대홍수를 내리는 일은 없을 것임을 내가 약속하마’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걱정하고 계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질병으로 인해서, 질병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는 사업이 잘못되지는 않을지,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지는 않을지,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잘 자라날 수 있을지, 혹시라도 자녀들이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지는 않을지, 이런 저런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살아가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미래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과 좌절감으로 하루하루 지낼 수도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을 해결하고자 다른 이런 저런 시도로 안정감을 도모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진정한 안전감과 보호를 제공해줄 수 없습니다. 돈과 권력과 인간관계에서 인정도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연약한 인생의 피난처가 되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로써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는 것만이 그 약속을 신뢰할 때 우리에게 참된 평강이 찾아오고 두려움을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시커먼 먹구름이 끼고 비가 오면 가슴이 철렁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때마다 무지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간혹 보이는 무지개를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모든 육체를 가진 땅의 모든 생물 사이의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은 이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대홍수를 겪고 트라우마를 지닌 노아에게 하나님이 계속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노아에게 거듭 확신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 무지개를 언급하시므로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한 겁니다. 이처럼 약속의 증거는 무지개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그의 후손들과, 심지어 모든 동물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인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속을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실 것을 확신시켜주시려고 무지개를 증거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와 같으실 찐대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얼마나 더욱 약속의 하나님이시며 더욱 신실한 하나님이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와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나라와 대비되는 세상 나라의 수립이여 세상 나라의 존속을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비록 죄악된 세상이지만 일반은총을 내려주셔서 하나님의 심판에서 유예시키고, 세상 나라를 자연법칙과 내면적 정의와 양심으로 존속하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는 세상 나라의 방식대로 마지막 최후의 심판 때까지 보존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상 나라의 존속과는 달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구원 열차를 타고 하나님의 보좌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 질서속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세상 나라의 존속과는 다른 구원입니다. 세상 나라의 존속에 대한 약속과는 차원이 다른 더 큰 생명에 관한 약속입니다. 세상 나라의 법칙과는 다른 하나님나라 질서 아래서 구원 열차로 하나님의 보좌로 이동하고 있는 중입니다. 노아언약이 인류 일반과 맺은 언약이고 심지어 동물과도 맺은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이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사랑을 입어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무지개로써 얼마나 큰 약속을 해주시는 걸까요. ‘인생의 먹구름이 들이닥치는 것만 보고서도 두려워떠는 인생아, 과거의 아픔과 상처는 과거로 족하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두려워마라 내가 너를 보호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울러 성경 말씀을 통해 너무나 많은 영광스런 미래와 소망을 약속해주신 하나님께서 무지개로써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거라는 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지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그러므로 우리가 약속하신 것을 확신할 수 있고 그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절에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 당하셨습니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들을 대신하셨습니다.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셔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20절에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명이라” 하나님께서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노아로 하여금 방주를 만들게 합니다. 그 방주에는 노아와 그의 가족 총 8명만이 타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들은 홍수에도 불구하고 물을 통해 세상을 심판하실 때 물을 통해 오히려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방금 전에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간다고 했는데, 노아의 방주는 물을 통해 구원을 얻고서 물 위가 아니라 마른 땅인 아라랏산으로 이동해가는 여정에 있습니다. 즉 지금 이 땅의 교회는 그 옛날 노아 시대에 심판의 홍수로 넘치는 물 위에 떠서 마른 땅, 곧 아라랏 산을 향해 가던 방주처럼, 하나님께로 향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그 목적지 곧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이르셨고 모든 영적 권세들을 굴복시킨 주로써 교회를 하늘 보좌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사도는 노아 방주로써 구원 받은 사건을 현재 오늘날 우리 교회가 받고 있는 구원을 예표하는 모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보십시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의 홍수나 노아의 방주가 의미하는 심판과 구원의 참된 실체가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고 사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란 한 번 받고 마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 떠서 결국 아라랏 산으로 나아가듯, 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가는 긴 여정으로 구원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례란, 단순히 성도가 한 번 받고 그저 교인이 되는 가입 절차도 아니고, 혹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실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공포하는 것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다는 단회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도 아닙니다. 세례는 노아의 홍수 심판과 구원이 내다보았던 참된 실체로서 새하늘과 새땅을 찾아 나아가는 긴 여정 전체를 가리킵니다. 만약 방주가 아무 데도 이르지 않고, 그저 평생 물 위에만 떠 있다면 그것을 구원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일종의 방향과 목적을 잃은 구원이라면 참된 구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노아의 방주를 탄 것만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는 정도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이동해야 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 이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세례의 의미입니다.
다시 21절을 보십시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는 번역보다 옛날 개역한글판 번역이 더 좋습니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세례란 육의 더러운 것을 벗어버리는 것만이 아니라 이것도 포함하지만 더 깊은 의미는 성도가 받는 세례는 옛 죄에서 용서함을 받고 죄된 생활을 그치도록 하는 목적만이 전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선으로 악을 이김으로써 때로는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이동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8-21절 말씀은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심을 받은 교회가, 세상 속을 지나며 악을 만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발자취를 충실하게 따라 가므로 결국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영광스런 목적지 곧 하나님의 보좌에 이르게 됨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의 세례는 그저 단순한 입교식 정도가 아니라 여정의 시작이며 목적지에까지 이르는 전 여정임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썩어질 세상, 더러운 세상, 허무한 세상에서 부름을 받고, 구원의 방주를 타고 그 안에서 인내하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나라를 유업으로 받았으니, 이 소망을 붙들고 힘을 다해서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세례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이미 들어가 있는 하나님나라의 시작이요 완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지개 약속으로써 세상에서 단순히 생존을 보장받는 데에 머무는 게 아니라 더 큰 생명, 더 큰 약속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영광스런 약속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 되신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것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그 믿음의 평강과 소망을 누리며 사시는 참된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2월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사랑받는 형제 (몬 1:8-19)
우리가 자녀들에게 가끔 친구를 잘 사귀라고 말해줍니다. 논어에 보면 유익한 친구와 해로운 친구를 판가름하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유익한 친구는 첫째,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둘째, 신용을 중히 여기는 사람. 셋째, 견문에 넓어 박식한 사람입니다. 반면 해로운 친구는 아첨하는 사람. 둘째, 앞에서 아첨하고 뒤에서 비방하는 사람. 셋째,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서 좋은 친구를 사귀라고 권면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참으로 유익해서 어디서나 환영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므로 꺼려지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이 되지 못하고 해가 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없으면 안된다고 누구에게나 인정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본문 11절입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본문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되돌려보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오네시모가 과거에는 빌레몬에게는 무익한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빌레몬에게뿐 아니라 바울 자신에게도 유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원래 어떤 관계였습니까? 오네시모는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집의 종이었습니다.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냐면 당시 로마 시대에 흔히 있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주인이었던 빌레몬의 것을 훔쳐서 도망쳤습니다. 골로새지역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주인의 집을 벗어나서 멀리 로마에까지 왔다가 어쩐 일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던 것 같습니다. 마침 그때 그 감옥에 바울도 수감돼 있었는데 거기서 바울을 만나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일컬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10절)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오네시모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믿음의 자녀가 되도록 영적인 아비의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나이 많은 바울의 수감생활을 여러모로 도와주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쓰는 편지, 오늘 본문에서 오네시모를 일컬어 “그는 내 심복이라”(12절)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심복’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내장이나 심장과 같이 너무나 자신에게 소중하고 긴요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의 원래 주인이었던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는 오네시모를 자신의 곁에 두고 자신의 동역자로서 함께 복음도 전하고 자신을 돕도록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이었던 빌레몬이 그것을 승낙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빌레몬서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낼텐데 그를 잘 영접해주고 예전에 그가 불법으로 도주하면서 돈을 훔친 것이 있다면 바울이 대신 갚아주겠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11절)라고 말했던 이유는 주인에게서 도망갔을 뿐 아니라 주인의 것을 훔쳐 손실을 끼쳤던 무익한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사람을 입게 되어 사도 바울을 곁에서 섬기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당시 노예이름 중에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 뜻은 ‘쓸모 있는’ 입니다. ‘쓸 만한 자’ 정도가 적합한 뜻일 것입니다. 노예이름으로 딱입니다. 그런데 오네시모 곧 ‘쓸 만한 자’가 주인에게 나쁜 짓을 해서 쓸모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서 그는 다시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오네시모의 이름의 언어유희를 사용해 빌레몬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오네시모에게 기회를 주고 다시 그를 회복시키라고. 그가 전에는 무익했으나 이제는 예수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자신의 이름 따라 나에게 너무나 유익한 자가 되었으니 용서하고 화해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사도이고 빌레몬도 바울에 의해서 복음을 들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오네시모를 굳이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지 않고 그냥 오네시모를 자신의 곁에 두고 자신을 섬기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 빌레몬에게 저지른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안 이상 바울은 그것을 그냥 없는 것처럼 덮어둘 수는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제 바울에게 오네시모는 부족함이 없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었지만 그 변화가 완성되고 과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벌레몬의 자발적 용서와 수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자신의 과거뿐 아니라 자신의 잘못까지도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주인의 집에서 도망쳐나왔던 일, 그리고 나올 때 돈을 훔쳐서 달아났던 일 등을 고해성사하듯 바울에게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네 죄를 모두 용서하셨으니 양심의 부담을 덜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과 오네시모 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네시모와 빌레몬 간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으로만 끝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 율법 레위기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는 제사인 속죄제와 죄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배상해야 하는 속건제와의 차이입니다. 속죄제의 경우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 분명 죄가 사해집니다. 그러나 속건제의 경우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남에게 입힌 손해를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용서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서 그의 용서를 받기를 원했던 이유입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 주인의 집에서 도망갔다가 다시 잡혀온 노예는 잔혹한 형벌에 처해졌습니다. 도주 노예를 숨겨준 사람도 상당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당시에 노예는 주인에게는 실제로 값비싼 재산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까지 훔쳐서 달아난 경우라면 비단 물질적 피해뿐 아니라 주인 빌레몬에게는 배신감과 더불어 엄청난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딱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다시 잡혀 돌아오기만 하면 잔인하게 앙갚음 해주리라고 다짐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 노예들은 종종 별 심각한 잘못이 없어도 잔혹 행위를 감내해야 했던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보낼 뿐 아니라 이렇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부탁할 때 어떠한 태도로 부탁하고 있나요?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빌어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하지 아니하고 다만 자신이 연장자로서, 또 신앙의 동역자로서 빌레몬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발적이고 기꺼이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고 그와 화해하고서 다시 그를 자신에게로 돌려보내주기를 위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강력하게 제시하므로 빌레몬을 설득하고자 합니다. 빌레몬을 설득하기 위해서 신학적인 이유도 하나 첨가합니다. 15절에서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 곁을 잠시 떠나게 된 것이 어떻게 빌레몬 곁에 영원히 두게 함이 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서 도주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도주 사건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는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게 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그 결과 오네시모와 빌레몬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는 새로운 관계 하에서 이땅에서는 물론 장차 천국에서도 영원히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상당히 정성을 들여 오네시모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인 빌레몬에게 신신당부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의 부탁은 생각보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기에는 참으로 힘든 권면이었습니다. 단순히 종의 과거를 용서해주고 덮어주라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되어 그리스도인이 된 오네시모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해주라는 요청입니다. 그런데 빌레몬이라는 이름은 ‘필레오’ 곧 사랑한다는 단어의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스어(헬라어)로 사랑하다는 단어는 아가파오가 있지만 필레오 역시 사랑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바울이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빌레몬을 일컬어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빌레몬 역시 이름따라 사랑을 받는 자인데 그 사랑을 받는 자로서 이제 그 사랑을 오네시모에게 나타내주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1절에서 빌레몬을 일컬어 ‘사랑 받는 자’라고 말하고서 16절에서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대우하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를 받고서 빌레몬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생각했을까요. 오네시모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듣고 단순히 기뻐했을까요. 글쎄요. 아마 빌레몬이 바울의 권면을 잘 따르고 오네시모를 용서해주고 그를 바울에게 돌려보내주었기 때문에 극히 개인적 서신이라 할 수 있는 빌레몬서가 성경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빌레몬은 골로새교회의 유력한 성도로서 바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잘 알아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앙이 돈독하더라도 배신감을 느끼는 대상에게, 그리고 분노를 일으키는 대상을 용서해주고 화해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 노예 관계 아래서 말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네시모를 받아들이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권면과 요청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권면입니다. 기존 세상 질서에서 살아가지 않고 새로운 구속 질서, 새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권면입니다.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인 데이비드 반드루넨이라는 신학자는 하나님나라 백성의 윤리를 다음 세 가지로 집약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삶의 윤리로서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정의를 능가하는 용서입니다. 정의는 비단 하나님나라에서뿐 아니라 일반 세상 나라에서도 위정자가 수행해야 할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통치자에게 칼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정의로 다스리라는 것이고 올바로 판결하라는 것이죠. 이를 우리 천국 백성들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는 용서와 화해의 윤리가 천국 시민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모든 시민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응당 받아야 할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길 잃어버렸을 때 목자처럼 잃어버린 양을 건지시고, 자비로운 왕과 같이 자신의 빚을 탕감해주신 은혜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권면하면서 은근한 압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네시모가 네게 빚진 것이 있다면, 그리고 돌려받기를 원하면 자신이 갚아주겠다. 그러나 너 역시 나 바울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있지 않느냐 내가 굳이 말하려 하지 않아도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네게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느냐’고 은근히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 백성들에게는 정의를 능가하는 용서와 화해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은 희소성을 뛰어넘는 관대함으로 특징지워집니다. 일반 경제학 법칙은 자원의 희소성을 알고 그것을 전제로 해서 학문을 세워갑니다. 자원이 모두에게 골고루 돌아갈 만큼 충분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희소성의 원리에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가 부자들이 드린 많은 액수의 헌금보다 더 많이 드린 것입니다. 때때로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연보가 되기도 합니다. (고후 8장) 고린도후서 9장 8절에서는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안될 것 같아도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에서는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에서는 희소성을 뛰어넘는 관대함이 있고, 우리는 그 관대함을 드러내보여줄 수 있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폭력을 일축하는 복음 전파입니다. 하나님은 강압이나 회유나 협박이나 폭력이 아니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람을 믿음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은혜를 알게 하므로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입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사회 규범에도 충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당시의 문화와 제도 속에서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속한 재산입니다. 물론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빌레몬과 다를 바 없는 영적 자유인이지만 당시 그리스 로마세계의 사회 규범 차원에서 볼 때 오네시모는 심각한 범죄자입니다. 만약 바울이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지 않고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면 당시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시쳇말로 오네시모와 바울을 두고 “저런 못된 짓을 하는 것들이 무슨 그리스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쯧쯧 혀를 찼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겁니까? 우리는 하나님나라 백성이지만 하나님나라 백성일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민이기도 합니다. 사회 규범의 제약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즉 우리는 두 나라 국민입니다. 그러므로 두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국가가 될 수 없고 복음이 문화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생활과 사회생활, 그리고 복음을 가지고 기존 문화권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두 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로, 멸시받던 노예가 사랑받는 형제로 변화되어서 그렇게 대우받는 것이 하나님나라입니다. 오네시모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노예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사랑을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셔서 자녀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빌레몬서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의 한 예입니다. 바울이 당시 세상에서 통용되던 방식과 정반대되는 요청과 권면을 빌레몬에게 했던 이유는 빌레몬이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만 정의를 능가하는 용서가 가능하고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세상 나라의 법과 질서와 문화에도 잘 순응했습니다. 바울은 한 마디로 두 나라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빌레몬서에서 우리는 두 나라 백성으로서 바울의 충성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 질서보다 더 높은 질서인 하나님나라의 구속 질서의 요청을 받고 윤리적 결단을 해야 하는 빌레몬의 고뇌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두 나라 백성으로서 세상 문화에도 잘 순응하지만, 하나님나라의 구속 질서를 따라 살아가므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루어 서로를 사랑하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 받는 형제가 되는 우리 동산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민족의 큰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일가친척과 우리 이웃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월 2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세상을 향한 출정식 (슥 9:9~17)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전 생애는 이 세상 나라의 주관자인 사탄과의 대결로 특징지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특히 예수님의 생애의 가장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는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의 말씀의 성취입니다. "내(=뱀)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아담을 유혹하여 넘어뜨린 사탄에게 내린 심판의 말씀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에서 예수님은
발꿈치 부상을 당하지만, 뱀의 후손은 가장 중요한 머리가 상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사탄과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승리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로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때 성령으로 충만해지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장면에서 함께 등장합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나서 광야로 나가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십니다. 40일간의 기도가 끝난 후 사탄의 시험을 받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한 치명적인 유혹은 무엇입니까? '네가 메시야라면 메시야로서 세상에 드러나야 하지 않겠느냐? 메시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정받으려면 하나님의 방법보다 사탄의 방법이 더 훨씬 뛰어나다.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렸는데도 머리털 발끝하나 상하지 않는 쇼를 보여주면 세상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너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앟겠느냐?'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를 지므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으시고 사탄에게 경배하지 않으시고 말 한 마디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유혹을 거절하고 말씀으로 승리하시자,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 4:11)"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만, 그러나 마귀가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후의 사역 곳곳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방해하기 위해 교묘하게 활동합니다. 영화 'passion oif Christ'에도 보면 사탄은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는 그 때에도 모습을 보입니다.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를 띠면서 말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사역의 길목 고비고비마다 예수님을 방해했습니다. 방해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의 뜻처럼 대적했습니다. 사탄은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사탄은 때로 자신 휘하의 귀신들을 동원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형을 언도받은 것도 사탄이 군중들을 충동질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 어떤 사람보다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했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 수행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 아들의 일, 곧 하나님의 일을 막으려고 했던 거죠.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점점 더 올라감에 따라 자신의 승리가 가까웠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서 회심의 미소를 띠고 승리의 v의 포즈를 취하고 승리의 기쁨에 도취됐을 겁니다. 사탄은 처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온 것을 보고 굉장히 긴장했을 겁니다. 그래서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밀착 마크에 들어간 거죠. 농구나 축구에서 잘하는 공격수한테는 전담 수비수가 따라붙듯이 예수님에게도 사탄이 언제나 따라붙었죠.
사탄의 공세에 따라 예수님이 밀리는 듯 했습니다. 예수님은 선으로 악을 이기시기를 원하셨기에 교묘한 방해 공작에 대해 힘으로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 나라의 흐름과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 가져오려면 세상적, 마귀적 방식을 완전히 거부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까지 밀렸던 겁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기에 사탄의 공격이 더욱 더 활발해질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탄과 어둠의 영적 세력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이 우리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절규하신 것도 그 위에서 칠흑과도 같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역으로는 사탄이 활개를 칠 수 있는 상황의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 전 예수님의 고뇌와 고투를 압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날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혈투를 여러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땅에 엎드리어 될 수 있는대로 이때가 자기에게서 지나가기를 구하여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막 14:34-36)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막중한 부담감, 십자가 죽음과 고통 앞에서 인간적인
갈등과 하나님을 향한 호소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죠. 자신의 죽음이 결국 하나님의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죽음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영적인 법칙과 하나님의 계획을 외면할 순 없었죠. 그리고 그 짐을 짊어지고 가리라고 결심합니다. 그래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던 겁니다. 십자가가 사탄의 머리통을 박살낼 사건이라는 비밀을 사탄은 몰랐습니다. 그 비밀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지혜와 경륜 안에 있었던 것으로서 부활 이후에, 그리고 오순절 성령을
충만히 받고나서 제자들이 깨달았던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죄값을 지불해버리셨습니다. "죄의 품삯은 사망이니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 귀결된 법칙을 따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인간의 죄 문제가 처리되었습니다. 이 후 사탄의 세력은 결박되었고, 궤멸되었습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돈을 빚졌다고 가정합시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집에 쳐들어와 협박하고 괴롭힙니다. 빨리 돈 갚으라고못살게 굽니다. 매일 찾아와서 괴롭힙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마련해서 그 빚을 다 갚아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빚쟁이들이 더 이상 찾아와서 괴롭히지 못합니다. 돈을 갚았기 때문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죄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이에 빌붙어서 우리를 어찌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을 궤멸시키셨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서 "우리를 거스르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서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한 왕,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곧 메시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왕 곧 메시야의 오심뿐만 아니라 그분의 성품과 사역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언의 말씀입니다. 본문 9절 말씀을 보십시오. "시온의 딸아 크게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릴 왕이 오실 것이니까 크게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실 이 왕은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겸손한 왕이십니다. 나귀는 말과 비교했을 때 겸손함을 상징하기에 적합한 동물입니다. 겸손한 왕이시지만 또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메시야 왕으로서의 통치의 특징은 공의가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겸손하고 공의롭게 다스린 결과 전 우주적인 평화가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통치는 병거와 병마와 화살과 같은 온갖 무기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제거함으로써 적들의 무장을 완전히 해제시킬 것입니다. 이로써 열방에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메시야로 예루살렘에 오시는 왕은 겸손한 왕이요, 자기 백성을 구원할 의로운 구원자요, 평화의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실 구원과 평화(샬롬)는 십자가에서 메시야의 피로써 맺은 언약 곧 새 언약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흘리는 피,는 영원한 유효성을 갖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라고 말씀하시는데 직역하면 "소망의 죄수들"입니다. 죄수처럼 갇혀 있지만 소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육신 장막 안에 살면서 죄의 유혹에 시달리면서 광야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이므로 완전한 영광의
자유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죄수처럼 갇혀 지내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인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우리 인생에 소망이 있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스가랴 9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므로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1-3절에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귀를 끌고 오라고 보내십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합니다. 혹시 나귀 주인이 "내 나귄데 당신들은 뭣하는 것이요?"라고 묻는다면 "주가 쓰시겠다"고만 말하면 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 이어지는 마태복음 21장 4-5절에서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고 이 사건이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최종 목적이 십자가에 이르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십자가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거기에 이르는 도달 과정조차도 겸손함으로 특징지워지는 여정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가져온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는 사명을 이루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려는 사명을 이루는 자리가 예루살렘이요 또한 십자가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에 나아가려고 하셨을 때 겸손한 방식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명을 가진 자라면 오직 겸손하게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사명을 이루어야 할 장소였던 예루살렘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세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고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오늘 예배는 세상을 향한 입성이요 출정식, 전쟁에 나가는 출정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13-17에서 이 질문에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용사이시고 전사이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하나님이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전쟁, 곧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신의 무기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와 나귀 새끼를 가져오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죠. 그 때 제자들이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므로 하나님나라의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쟁, 곧 사탄과의 전쟁은 우리가 서있는 삶의 자리에서 언제든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은 바로 이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주님의 성품을 따라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특별하게 강조했던 독일의 설교자 블룸하르트는 말합니다 "하나님나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먼저 이 땅에서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사는 곳에서 그리고 우리가 일하는 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일을 주님을 위해 힘써 행해야만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살아가는 이유가 되며 우리 삶속에서 점점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주님께서 친히 강림하실 것이며 이 싸움을 하나님께서 친히 싸우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를 도구로 해서 하나님이 친히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반드시 드러나게 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전쟁에 임하듯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실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이 바로 그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전사가 되어주셔서 그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낼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14절), 이어지는 15절 전반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삶의 자리에서 사탄의 유혹에 맞서서 소위 거룩한 전쟁 곧 성전을 수행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친히 호위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떄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축복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16절을 보십시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하나님은 왕이 되시고 하나님의 백성은 그 분의 통치 아래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왕관에 박힌 보석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처럼 영화롭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마지막 17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하여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케 하리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추수 때의 풍성함과 같을 것입니다. 축복과 평화와 번영이 청년과 처녀, 곡식과 새 포도주를 통하여 잘 나타납니다. 이 모든 풍요로움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신 메시야 예수 안에서 우리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마음에 굳게 간직한 채, 삶의 자리에서 비록 힘든 투쟁과 싸움 같을지라도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므로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업을 달성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모두가 하나님나라의 분명한 비전과 소망을 가슴에 품고 우리를 위해 친히 싸우실 하나님을붙들고, 사랑할 수 없는 세상을 향해서 뜨거운 사랑으로써 나아가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월2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영적 해방과 자유 (마 12:22-30)
한 기독교 인터넷 언론 사이트에서 관심을 끄는 제목을 보았습니다. "직원 예배 말고 복지 챙기는 기독교인 사장님"이라는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독실한 신앙인이 대표로 있는 중소기업 이야기였습니다. '행일미디어'라는 중소기업인데요, '행복한 일터'의 줄임말로 '행일'을 회사명으로 정한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대표이신 백승주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안수집사님입니다. 이분이 8년 전에 창업한 이 회사는 주로 기업과 공공 기관을 상대로 인쇄물과 홍보물을 제작하는 회사입니다. 현재 직원이 12명이고 연평균 매출액이 약 13억원정도 되는 회사입니다. 지난 3년간 영업이익이 매년 30% 이상 성장한 건강한 기업입니다. 이 회사는 매년 추구하는 가치와 정신을 담은 '우리의 약속'이라는 조항을 갱신합니다. 전 직원들이 모여서 정하고 수정해나가는 방식으로 매년 갱신합니다.
이 회사에 걸려있는 '우리의 약속' 12개 조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일한다
2. 우리는 직원의 만족이 고객의 만족보다 우선하기를 원한다
3.우리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도움을 주도록 노력한다
4.우리는 회사의 주인은 직원임을 명심하고 직원을 위해 좋은 것을 제공한다
5. 우리는 건강하고 반듯한 회사를 만들어 나 자신과 사회에 당당하게 살아간다
6. 우리는 새 식구를 맞는데 신중히 결정하고 헤어지는 직원에게는 재회를 기약한다
7. 우리는 불완전하기에 실수할 수 있음을 알고 실수보다는 수습에 집중한다
8. 우리는 중요한 사안에 직원들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고 결정한다
9. 우리는 서로를 깊이 신뢰하고 더욱 신뢰가 쌓이도록 노력한다
10.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으며, 배움과 사랑으로 함께 한다
11. 우리는 우리의 이익을 위해 이웃(고객, 거래처...)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12. 상기의 약속들은 계속 보완 발전시켜 나간다”
이 조항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나요? 회사를 이끄는 대표의 철학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조항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분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철학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분이 대학을 졸업하고서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기업이 너무나 잘 알려진 기독교 기업을 표방하는 대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업은 비정규직 대량 해고, 높은 업무 강도, 아르바이트 임금 체납 등으로 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분은 50-60명이 근무하는 중견 규모의 중소기업으로 이직했습니다. 사장은 교회 안수집사님이었습니다. 참으로 독실한 신앙인이어서인지 사내 예배를 잘 드리는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에서는 독실한 교인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직원들이 봤을 때는 탐욕스럽 기업가였습니다. “직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 중 하나가, 회사는 매년 발전하고 사옥도 커지는데 직원들 삶은 점점 팍팍해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사례를 통해서 백승주 대표는 일부 기독교인 경영인이 기독교 기업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성경의 정신과 맞지 않게 경영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분의 말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상 논리를 따라가는 기독 경영인을 보면 화가 난다. 기독교인들이 구별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맘몬주의에 물들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 기업'이라고 표방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있다. 차라리 직원들이 어떻게 하면 회사에서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지, 월급이나 복지 수준을 높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중요하다." (뉴스엔조이, 2019.10)
사탄의 유혹은 아주 실제적으로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사탄적 통치 아래로 떨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사탄적 통치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듯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사탄의 통치를 받을 것인가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의 원리를 살아내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갈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의 싸움입니다. 이것은 실상 영적전쟁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대조적으로 제시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은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므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적으로 드러난다는데 있습니다.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도 못하는 한 사람을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즉시로 귀신을 내쫓으시므로 그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말도 하고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를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가 아니라면 이러한 기적을 베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당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외세 식민 세력을 무찌르고 다윗 왕조를 재건할 거로 기대했는데, 예수님이 혹시 메시야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사안에 대해서 정반대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귀신을 내쫓은 것은 귀신의 왕이라 할 수 있는 바알세불, 아마 사탄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을 바알세불의 권능을 빌려서 귀신을 내쫓은 거라고 사건을 해석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도 귀신이 들렸는데 아주 센 귀신, 곧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에게 지펴서 그 권능을 힘입어서 쫄따구 귀신을 내쫓은 거라고 자신들이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서 폄하했습니다.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결론에 이르는 논리를 논리적이지 않게 개발한 것이죠. 예수님은 결코 메시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폄하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주 침착하게 논리적으로 대응합니다. 본문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만약 그들의 말이 맞다면 이것은 사탄의 나라에서 자기들끼리 분쟁하는 것이 될텐데, 그렇게 되면 어찌 사탄의 나라가 서겠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탄이 바보냐는 것입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니라면 왜 멀쩡히 한 육체를 점령해서 거주하는 귀신을 사탄이 내쫓겠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논리를 추가로 대서 이들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바리새인들이나 당시 유대교에서도 축사 곧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니네들의 논리라면 그들은 누구를 힘입어 귀신을 내쫓느냐는 반문입니다.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대답할 수는 없겠죠. 그러니 나도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예수님의 반박입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의미심장을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본문 28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면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도래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동안 사탄의 압제와 통치 아래서 그것이 정상인 줄 알고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왔더라도 지금 예수님 만나서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이 축출되어 사탄의 나라가 종식되었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가 온 것이죠.
예수님은 이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본문 29절입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사탄의 나라, 사탄의 집에는 수많은 세간 곧 살림살이가 있죠. 사탄의 지배 아래서 사탄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람들을 사탄의 집에서 끌어내고 계셔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데, 지금 이 일이 발생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사탄보다 더 강한 자가 되셔서 강한 자 곧 사탄을 결박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강한 자 곧 사탄의 지배 아래서 오랫동안 신음하면서, 이제는 그것이 정상이 되어서 그렇게 사탄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더 강한 분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도래시켜주었다면 이미 사탄을 예수님께서 결박하셨음을 입증한 셈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30절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나 유대교 사람들 중에서 귀신을 내쫓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역이 아니라면 하나님나라 사역이 아니라는 점을 예수님은 덧붙여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역은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허무는 사역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 전도할 때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겁니다. 주 예수와 함께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는 선포입니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과 전 생애가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에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아버지뿐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일절 우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므로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심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이땅에 가져왔고 증거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어야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공공선을 위한 선한 일을 수행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 하나님나라의 일이 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하나님나라를 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서 영역보다는 통치를 강조해야 마땅합니다. 영역은 정적이라면 통치는 역동적입니다. 영역에는 한 번 들어가고 거기서 정적으로 거주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통치는 역동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수시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느냐 아니면 사탄적 통치 아래로 다시 굴러 떨어지느냐를 강조합니다.
설교 서두에 예를 들었던 행일 미디어 대표 백승주집사님이 왜 사탄의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왜 사탄적 방식으로 기업을 운용하려는 유혹을 받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배만을 더 불리고 싶다는 유혹이 어찌 없겠습니까. 이분이 회사를 창업하기 전에 근무했던 기독교 기업을 표방하는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이 직원 예배는 정기적으로 잘 챙기면서도 정작 종업원들의 복지나 행복에 대해서는 둔감했다면 이는 이미 사탄적 방식으로 회사를 운용하고 있다는 증거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아담의 자손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끈질긴 유혹의 사슬을 끊고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회사를 만드는 비전을 이분이 갖지 못했다면 아까 보았듯이 그렇게 회사를 운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익이나 탐욕에서 초월하여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므로 역동적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회사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행일미디어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느 단체나 심지어 어떤 교회라도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수시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는 연약한 죄인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따라 혹은 매 사안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갈 수도 있고 원래 아담의 자손으로서 익숙했던 방식인 사탄적 방식에 굴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지어 베드로에게도 사탄아 물러가라고 엄히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올바로 신앙고백한 직후에 예수님이 자신이 메시야로서 고난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고하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잡고 만류하자 예수님이 그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역동적인 실체로서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이 나라를 예수님께서 이땅에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역동적인 실체로서 우리에게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이루어가려면 우리는 사탄적 유혹과 사탄적 방식의 통치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해야 합니다. 사탄을 내쫓아야 합니다.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으로! 오직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통치를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게 됩니다. 이는 한편으로 순간순간 매 선택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말씀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므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성령 안에서 삶을 살아가므로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머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예수님을 믿어서 포로생활을 끝내라는 도전이기도 합니다. 사탄의 지배와 압제 아래서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왔던 사탄의 포로생활을 끝내고 영적으로 해방 받아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므로 참 자유를 누리라는 부르심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보면 사탄을 일컬어 “공중의 권세 잡은 자”로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탄의 지배 아래 사탄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일컬어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탄의 지배를 받아서 사탄적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탐심과 욕심을 따라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에는 사탄의 나라의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사탄의 나라에서의 삶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는 삶이요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사탄에게 100% 책임을 전가할 수 없습니다. 결국 내 욕망과 탐심이 결국 사탄적 삶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머무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은 성령 안에서의 삶이요 그래서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삶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끈질긴 사탄의 유혹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유일하신 통치를 받으므로 다른 어떤 것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은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삶입니다.
미국 맥도날드의 한 매장에서 햄버거 패티 안에 지렁이가 들어있었다는 소문이 퍼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맥도날의 매출이 급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악의적인 거짓 소문이었습니다. 이에 맥도날드는 거짓 뉴스에 대응해서 매장마다 ‘맥도날드 햄버거에는 지렁이가 없습니다’라는 문구를 걸어놓았고 광고도 하고 방송도 내서 사실이 아님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도 매출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지렁이가 없습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지렁이를 떠올리게 되어서 맥도날드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습니다. 맥도날드는 더 이상 지렁이 얘기를 하지 않고 새로운 음료와 감자튀김을 홍보하며 대대적인 행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매출이 회복되었습니다. 새로운 제품에 집중하게 하니 지렁이를 잊어갔기 때문입니다. (김장환 저,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구원이십니다 中)
우리가 죄를 이기고 사탄적 방식과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집중하기보다 우리에게 이미 베풀어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힘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음을 깨닫고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권능으로 이미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의 피로써 이미 승리하였고 거듭 승리할 수 있습니다. 순간순간 다가오는 사탄의 유혹과 사탄적 삶의 방식을 단호히 “사탄아 물러가라!”하고 거부하고 사탄을 내쫓음으로써 영적인 해방을 받고 자유를 누리시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천국 백성된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월1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 (사 61:1-9)
오늘 본문은, 특히 본문 1-2절은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실 메시야의 사명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결과로서 이루게 될 사명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것은 특정한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누군가를 세우셨음을 의미합니다. 1절 전반부에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워서 그에게 영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사명을 수행하도록 여호와의 종에게 기름을 부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라고 말하는 화자는 여호와의 종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종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그 사명의 내용이 총 다섯 가지로 제시됩니다. 1-3절에서 ‘~하기 위하여’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라메드’가 여러 번 사용되었는데, 여기에 여호와의 종의 사명이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 사명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아름다운 소식’ 혹은 ‘기쁜 소식’은 ‘하나님이 다스린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아름다운 소식이요 기쁜 소식입니다.
두 번째 사명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는 ‘마음이 부서진 자’를 가리킵니다. 왜 마음이 부서지냐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죄를 짓고 넘어졌기 때문이고, 또한 말씀대로 의롭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환난과 고난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이기도 하고, 가끔은 세상에 가득한 불의와 불법과 폭력과 억압 때문에 깨어진 심령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 사명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포로된 자에게 선포되는 자유는 히브리어로 ‘데로르’인데요, 이 말은 기본적으로 액체와 같은 물질이 막힘없이 흘러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게 자유죠. 그리고 ‘놓임’은 ‘열림’을 뜻합니다. ‘갇힌 자’에게는 열리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언제 자유가 선포됩니까? 언제 ‘데로르’가 외쳐집니까? 바로 희년의 때에 ‘데포르’가 선포됩니다. 레위기 25장 10절에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일곱 번의 안식년이 지나서 오는 대속죄일에, 즉 50년째 되는 속죄일에 희년이 선포됩니다. 희년이 시작되는 날에 선포되는 외침이 바로 ‘자유’(데로르)입니다. ‘데로르’는 희년에 선포되는 자유를 가리킵니다. ‘데로르’의 선포는 종의 해방, 땅의 회복, 빚의 탕감을 가져다줍니다. ‘데로르’로 대표되는 희년은 하나님이 회복하신 통치,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 이땅에 임할 자유와 정의를 내포합니다. 희년의 도래와 희년의 때에 선포되는 자유가 바로 ‘가난한 자에게 전해진 아름다운 소식’이자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침’의 구체적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사명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2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수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가난한 이들을 대적한 세력을 파하심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연약한 백성들의 눈물을 씻어주시는 보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의 해’는 여호와가 베푸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의 때를 가리킵니다. 이 역시 희년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윌리엄 메이어 박사라는 분이 북한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1000여명의 미군들을 조사했는데, 그들로부터 수집한 증언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강철이나 콘크리트 벽은 없었지만 정신적인 독방에 갇혀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포로들 사이에는 극단적 절망이 자포자기 병이 되었습니다. 이 병에 걸린 포로들은 담요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막사 구석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서 이틀도 못 넘기고 죽어갔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자포자기병’은 후에 ‘미라스무스’라는 병명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일종의 정신병으로 절망 때문에 저항력과 면역 체계가 약해지고 인내심이 고갈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무서운 것은 바로 이 병으로 당시 미군 포로 38%가 사망했다는 것입니다. 미군이 수용됐던 북한군 포로수용소는 생각보다 신체적 학대가 적은 편이었지만 많은 포로가 수용소에서 죽어나갔습니다. 철조망 안에 갇히지도, 무장한 적군의 감시를 받지도 않았지만 아무도 탈출을 시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북한군이 사용했던 교묘하고 무서운 심리전술 때문이었습니다. 규칙을 위반한 동료를 밀고할 때마다 보상으로 담배를 줌으로써 밀고를 부추겼습니다. 그리고 규칙을 위반한 자에게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아 그 규칙 위반자가 북한에 포섭된 첩자인 것처럼 의심하게 하는 고도의 심리전을 폈습니다. 또 자아비판을 통해 포로를 모아 자신이 했던 나쁜 짓을 동료에게 고백하게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포로들 사이에 서로 간의 신뢰감이나 존중감, 그리고 서로에 대한 관심을 사라지게 하고 희망과 긍정적인 마음을 빼앗아갔습니다. 고향에서 날아온 애정이 담긴 편지는 전해주지 않았지만 친척 중 누군가가 죽었다거나 남편을 기다리길 포기한 아내가 재혼을 결심했다는 부정적인 편지들은 곧바로 전달됐습니다. 포로들은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신과 국가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송두리째 상실해버렸습니다.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절망과 포기만 있는 곳, 바로 그 수용소를 지옥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밥을 굶겨도, 고문을 해도 견뎌내던 포로들이 결국 버텨내지 못한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사례 같습니다만 이런 게 포로된 자입니다. 그런데 희년이 이르러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갇힌 자에게 놓임’이 선포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다섯 번째 사명은 “모든 슬픈 자를 위로”(2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슬픔을 당한 자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주십니다. 종을 보내 종의 사명 수행을 통해 위로해주십니다. 이분이 가져다주실 위로는 정신적 위로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애통하는 자” 즉 “슬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입니다.
팔복의 첫 번째 복과 두 번째 복이 이러한 축복된 시간들을 규정해주는 듯합니다. 마태복음 5장 3-4절에 “심 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의 종이 행할 위로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어떤 위로가 될까요? 슬픈 자를 위로하는 내용이 3절에서 제시됩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3a)
한 마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참된 자유와 해방이요 역전입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근심이 찬송으로 반전되는 것입니다.
지난 20세기에 교회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는 '오순절 성령 운동‘입니다. 신학적 해악도 분명히 있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둔감했던 교회들을 성령의 바람으로써 깨어나게 한 긍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 거의 5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이 영적 운동은 오순절교파의 출현을 낳았고, 특히 중남미에서 급성장한 대형교회는 대개가 오순절 교단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근대 성령운동은 한 가난하고 무식한 흑인 노예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윌리엄 조셉 시모어는 미국에서 막 해방된 흑인 노예의 아들로 1870년에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과 계속 이어지는 백인들의 인종차별과 특히 기성교회의 천대를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에 경제공황이 닥쳐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그는 로스앤젤레스 빈민가 한 마구간에서 흑인들에게 하늘로부터 임하는 성령의 역사와 은사에 관해서 설교했습니다. 그로부터 오늘의 오순절 운동이 시작됐습니다. 백인교회의 차별로 인해서 번번이 쫓겨났던 그는 그런 교회의 제도나 직분을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성령과 직접 교통하며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설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언을 강조하고 신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받을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에는 신학적 오류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방언이나 신유보다도 흑백의 인종장벽 제거가 더 성령의 은사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확실한 징표라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에 긍정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영성이 인간 역사로부터 떨어진 하늘을 거니는 영성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겪는 고난과 아픔과 정의롭지 못한 현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실천적인 영성이라는 점을 바람직하게 강조했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합니다. 성령은 자유롭게 하시는 영으로서 불어오는 곳마다 참된 자유와 해방과 역전을 가져다주십니다.
흑암의 권세와 결박에 갇힌 자들에게, 슬픔과 눈물로 지새는 자들에게, 마음이 깨져버려서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 삶의 어려움속에 신음하는 자들에게, 찾아와서 위로해주시며 참된 자유와 해방과 인생 역전을 가능케해주십니다. 여호와께서 보내실 여호와의 종도 성령으로 충만케 되어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케 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종이 수행할 다섯 가지 사명은 곧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결과로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사야 본문을 예수님께서 자신이 자란 고향 나사렛 회당 모임에서 읽었습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4장 14-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신 후에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자신의 고향 갈릴리 나사렛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셔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펼쳐 말씀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포함되는 이사야 61장 1-2절 말씀입니다. 자신의 고향 마을의 회당에서 랍비라 칭함을 받았던 예수님을 누군가 세워서 성경을 낭독하게 한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자청하신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61장 1-2절을 낭독하게 된 것도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명선언문임을 알고 선택하신 것인지, 그날에 읽어야 할 성경 본문으로 할당된 것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서 말씀을 읽고나서 두루마리로 된 이사야서를 덮어 그걸 맡은 사람에게 건넨 뒤에 회당에 앉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를 직역하면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을 때 성취되었도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의 메시아적인 약속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그런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자기 고향 사람이어서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메시아를 사칭한 것으로 생각해서 예수를 절벽에서 밀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증언은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성취란 바로 하나님나라가 임했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그의 통치에, 그의 부활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도래한 하나님나라에 관해서 어떤 설교자는 한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빛이라고는 일절 찾을 수 없는 칠흑 같이 어두운 밤에 서있는 인생들에게 손전등이 주어진 거로 비유했습니다. 손전등이 있어서 어두운 밤길을 헤쳐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둠을 밝히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단, 손전등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손에 손 잡고 수많은 군중이 자신의 손전등을 들고 있으면 그나마 세상의 어둠이 밝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주가 밝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밝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해야 한다기보다 단지 새벽이 찾아오면 됩니다. 손전등이 주어진 것은 새벽의 여명이 동터왔음을 가리키는 징표에 불과합니다. 손전등을 들고서 다가올 새벽빛을 향해서 돌아서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여명은 왔으되 아직 밝게 태양이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있으면 태양이 떠오를 것을 기대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 삼아서 거기에 온통 마음을 두고 어두운 현실을 헤쳐나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미 임했지만 아직은 아닌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다시 3절을 보겠습니다. 3절 후반절에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여호와가 보내실 기름 부은 받은 자 곧 여호와의 종이 사명을 감당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날 사역의 결과입니다. 여호와가 보내신 종은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 슬픈 자를 위해 사역했는데, 소위 세상에서 밀려나고 연약하고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이 사람들이 앞으로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심으신 ‘의의 나무’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 통치의 결과로서 이들을 각처에 심어놓으실 것인데 자신이 심겨진 곳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의의 나무’라 불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트루디 여사는 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이자 극동방송 이사장이신 김장환목사님의 부인입니다. 요즈음 이분의 기도제목은 “심겨진 그곳에 꽃 피게 하소서!”인데, 이는 평생의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이분의 확고한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어디가 됐든 하나님이 심겨놓은 곳에서 꽃 피고 열매 맺는 삶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한 삶이라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한국에 심어놓으셨는데 여기서 충성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요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에 온지 60년이 넘은 지금의 시점까지 한 번도 남편에게 미국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분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땅에서 펼친 아름다운 사명자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곳으로 옮겨 심겨달라고 하나님께 떼쓰는 사람은 많지만 지금 주어진 곳이 하나님에 의해서 심겨진 곳임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이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면서 심겨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거기서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디가 됐든 하나님이 심겨진 곳에서 사명의 꽃을 피워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고 그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의 모습입니다.
1-3절에서 언급된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된 자, 약한 자, 슬퍼하는 자들은 여호와의 종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들었고 자유와 놓임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슬픔과 탄식이 변하여 기쁨과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경험한 역전은 자신에게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오래 허물어져 있던 것들을 다시 지을 것이고 옛적부터 황폐했던 것들을 다시 세울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그리고 이들은 “여호와의 제사장”,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고 불리게 될 것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이제 여호와의 종의 사명이 그대로 우리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황폐한 심령을 가진 채, 아무 소망 없던 우리가 메시야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서 일어서게 되었고 진정한 소망을 갖게 되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예수님의 사명을 이땅에서 계승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받아서 이 사명을 감당할 때에 세상은 우리를 일컬어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9절입니다.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강하고 능력 있는 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통해 허물어진 곳들이 다시 새로 세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난한 자들과 포로된 자들, 애통해하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명,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사명을 이땅에서 계승하는 우리 교회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