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28일 설교 (주일 낮)
축제로서의 친교 (마 9:9-13)
둘째 아들, 소위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흥건하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집 나갔고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아들이 살아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뻐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탕자의 이야기는 실제로는 아담의 이야기요 아담의 후손들의 이야기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을 떠났던 범죄한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과거를 불문하고 받아들여주시고 그들의 돌아옴으로 인해서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로서 하나님께서 오래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쁘게 맞아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만드신 사람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다시 자녀로 맞아주십니다. 조건을 높이 세워서 조건에 맞는 사람만 받아주시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 품을 떠났던 사람이 누구라도 돌아오면 다시 자녀로 받아주십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죄에 대해서 생각이 없으시거나 마음씨가 좋아서 그러시는 게 아닙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여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조치를 취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준비해놓은 조처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온전히 아버지께 복종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서 회복되고 수립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그분의 온전한 복종으로 이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시작된 하나님나라는 예수를 믿어 예수님과 연합한 자에게 임합니다. 예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합하여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에 적대하는 치명적인 반역 DNA를 제거하셨습니다. 아담의 자손이라면 누구나 갖고있는 반역의 DNA요 죄성이요 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성향의 치명적인 독성을 예수님께서 제거하셨습니다. 스스로 주인 행세하며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아가던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누적된 죄악을 짊어지시고 둘째 아담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처리한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죄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반역 DNA를 치료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로써 치료해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써 죄 용서함 받아 죄 문제를 해결 받고 아울러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던 반역 DNA도 치료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손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고 대항하는 죄성이 어떻게 치료함 받게 되는 걸까요? 자신이 중심이고 자신이 주인 행세하던 사람의 근본 성향이 어떻게 변화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걸까요? 하나님도 없이 겁도 없이 자신이 주인 노릇하던 인생이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되는 걸까요? 이것도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예수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아담의 죄악이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음을 아는 것이요 적극적으로는 우리가 걸어가야 할 인생의 본분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천국 백성의 길임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처음 지음 받은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롭게 지음 받은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우리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서 제대로 하나님에 대한 위상과 자신의 위치를 바로 깨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본격적인 죄성을 치료하는 시작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천국 백성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만큼 인간의 죄성은 뿌리가 깊고 피부처럼 우리에게 달라붙어 있어서 벗겨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긴 치료 과정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몇 가지 핵심 개념과 치료 기법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은혜입니다. 은혜를 알면 절반의 성공에 이릅니다.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천국 백성이 은혜를 알면 하나님나라의 가장 큰 특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천국 백성답게 되는 결정적인 길이 은혜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송가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3절에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이렇게 고백하며 감격스럽게 찬송하는 사람은 은혜를 바로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전제 국가나 독재 국가에서 다스리는 인간적이고 죄악된 통치와 전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통치인 이유는 하나님나라는 은혜가 다스리는 은혜의 왕국이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들은 기쁘게 자발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얽매이게 만들거나 강압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거나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어쩔 수 없이 굴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참으로 우리를 인간답게 다스리심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통치요 은혜의 통치여서 그 나라의 백성은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가 임함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배설하셨고 그 잔치자리에 늘 함께 있었던 자들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들과 세리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은혜를 아는 자들이 주역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 주역은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이었습니다. 다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나라의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역전이요 가치의 전도요 약탈당하고 빼앗김 당하는 하나님나라입니다. 예수님과의 식사는 그래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식사자리에 초대된 사람의 면면이 소위 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손가락질 받던 한 죄인을 부릅니다.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우리는 이 찬송가(‘인애하신 구세주여’)를 가슴으로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죄인 누구를 부르십니까? 마태복음을 쓴 마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마태를 부릅니다. 마태는 예수 믿고나서 붙여진 이름 인듯하고 원래 그의 이름은 레위입니다. 유다 레위지파에 속한 사람인 듯합니다. 예수 믿고 사울이 바울 되었듯이 예수 믿고서 레위에게 마태라는 또다름 이름이 주어진 것 같습니다. ‘마태’라는 이름에는 ‘하나님의 선물” 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를 부르심은 전적인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세관원이었습니다. 세리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세리는 현지인이지만 로마 당국의 대표자로서 고용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은 식민통치를 받는 그땅 지역 주민들 중에서 세리를 선발했습니다. 지역 사람들과 지 역의 관습을 잘 아는 현지인들이 더 용이하게 세금을 징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리들은 로마 당국이 정해 놓은 세금의 양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은 더 많이 세금을 징수하고 남는 것은 자신의 주머니에 챙겼습니다. 욕심 많은 세리는 과도하게 징수하므로 백성들의 반감을 사서 백성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아마 마태는 가버나움 지역을 넘나드는 상인들로부터 통행세를 받거나 갈릴리호수에서 잡은 고기에 대해 세금을 징수했을 것입니다. 많은 주민들이 마태를 로마 점령자들에게 동족을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마태의 부르심과 예수를 따름이 담담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마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여기서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갈릴리 어부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과는 좀더 어려운 결단입니다. 갈릴리 어부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을 따르다가도 아니다 싶으면 자신의 본래 생업으로 돌아올 수 있지만 마태는 건너온 다리를 폭파시켜버린 것과 같습니다. 돌아갈 수 없게 된 거죠.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주었던 본래의 직업인 세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결단입니다. 마태는 그렇게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마태의 결단이 큰 결단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마태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을 초청하였습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초청 받은 사람이 당황할 만한 상황입니다. 마태는 불쌍해서 불러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래서 마태의 초청에도 응해서 그의 집에 방문해서 함께 식사하는 것까지 허락해주셨다고 볼 수 있지만 와 보니 마태의 친구들, 세리 친구들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상당히 불쾌했을 겁니다. 한 명 마태와 친구가 되는 것만해도 큰 용기가 필요하고 적지 않은 사랑의 결단이 필요했을텐데 마태와 같은 세리들이 쭈욱 앉아있는 것을 보고 괜히 초청에 응했다는 생각이 들었을 법합니다. 죄인들의 소굴에 왔다는 생각에 후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한명은 봐줄 수 있는데 여러 명은 도저히 못참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뻐하셨을 겁니다. 진정한 천국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으로 인해서 기뻐하셨을 겁니다. 천국은 죄인들이 돌아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게 아닙니까? 오히려 마태와 같이 손가락질 받는 죄인들이 많이 앉아 있으니까 오히려 기뻐하셨을 겁니다. 하나도 아니고 탕자가 여러 명이 앉아 있으니 얼마나 더욱 기쁘셨을까요? 마침내 드러난 은혜의 왕국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과는 달리 바리새인은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단순히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문제 삼지 않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고 있습니다. 왜 식사가 문제가 됩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라는 것을 뜻했습니다. 둘이 동지적으로 ‘하나됨’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함께 식사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는 것은 예수님도 그들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바리새인을 포함하는 유대교의 종파들은 식탁 교제가 자신들의 그룹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역 할을 했습니다. 음식을 나누는 그룹의 멤버들은 의식적인 정결례와 같은 다양한 종교의례적인 실천을 통해 거룩하게 되었을 때 공동 식사에 공식적으로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미 입문 의식을 치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예수님을 보고 있는 바리새인의 심중에 예수님은 그들과 동일한 죄인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이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눌 정도로 친밀한 관계라면 예수님이 그들을 자신의 동료로 포함시키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렇다면 예수님이 그들의 죄인됨을 용서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여준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의 문제 제기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12절) 예수님의 정확한 본뜻은 건강하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들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의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이 건강하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질병을 알지 못한 채 건강하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고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과 세리들은 자신들이 질병을 앓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을 하니까 그리고 자신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배반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까 병든 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예수님에 대한 간절함은 자신의 질환을 아는 자들에게 생겨납니다. ‘오직 예수’를 마음속으로 외치는 사람은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태가 차려 놓은 잔치상은 천국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은혜를 아는 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기뻐하는 잔치와 축제로서의 하나님나라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은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어서 오히려 주역이 되는 기이한 역설입니다. 은혜를 알 수밖에 없는 삶의 환경이요 삶의 구조였기 때문에 은혜의 왕국 곧 천국의 주역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구약성경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시며 말씀합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13절) 이 말씀은 제사나 예배나 율법을 지키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긍휼을 원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허를 찌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보다, 그리고 율법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는 것보다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어찌 인간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행사할 때 예수님은 조심하셨고 메시야에 대한 오해의 소지도 있고 해서 예수님은 기적 행사를 자제하시려다가도 그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에,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는 아픔 때문에 기적을 베푸시고 치료해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질병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을 고쳐주셨는데 그 치료가 안식일에 일어났다고 해서 율법을 어겼다고 따져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은 참담하셨을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예수님과 함께 기쁜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면 같은 인간으로서 축하해주어야 마땅할텐데 왜 죄인들과 식사함으로 자신의 격을 떨어뜨리고 같은 부류라는 오해를 사냐고 비난하고 있으니 예수님이 보실 때 어떠했겠습니까?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 맞냐고 하시고 싶은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 죄인들이 너희 바리새인보다 더 큰 영적인 진보를 이룰 것을 내다보셨을 겁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더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의 심정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보기를 원합니다. 어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전교인 야유회를 즐겁게 다녀왔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참여한 것도 기뻤지만 우리 교회에 나온지 얼마 안된 분들이 많아서 더욱 기뻤습니다. 지난 주에 등록한 분도 함께 해서 더욱 기뻤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개방된 공동체가 되어서 그럴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앉아서 함께 예배드리고 그럴 것 같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의 주역이 되는 것입니다. 소위 죄인들이 많아지고 그래서 은혜의 감격이 더욱 커지고 그래서 예배가 살아나고 천국의 기쁨이 충만하게 흘러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별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소위 건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역이 되는 교회가 아니라 중증 질환을 앓고 있어서 예수 아니면 소망도 가망도 없다고 여기는 부류가 변화를 받아 교회의 주역이 되고 그들을 심심잖게 만날 수 있는 공동체가 하나님나라 공동체입니다. 이들이 주역이 되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서로를 긍휼의 심정으로 사랑하며 섬기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식탁 교제는 하나님나라를 축하하는 잔치상이었습니다. 이 잔치에는 초대받지 못할 것 같은 부류가 언제나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은혜의 성격을 더 잘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손가락질 받는 부류의 사람들이 은혜의 왕국에 가장 적합한 손님이요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아는 자들만이 치명적 독성과도 같은 반역 DNA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죄성을 온전히 치료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 될 여력도 없고 주인 행세할 자원도 없는 부류만이 두 팔 벌려 하나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감격 속에서 기쁨의 축제를 계속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모인 이 예배가 그리고 함께 모인 소그룹 공동체가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나누며 축하하는 축제로서의 친교가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며 기뻐하는 축제로서의 잔치, 축제로서의 친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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