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1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이제는 안심하라! (행 27장 20-26절)
로드니 스타크는 워싱턴대학교 사회학 교수입니다. 이분이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기원후 처음 5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발흥했는지 당시 사회에 깊은 관심을 품고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 방법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급성장 요인을 밝히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이책에서 5세기의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과 확장을 촉진한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3-4세기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을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는 기원후 312년경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기독교인들이 차별 없이 돌본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끝없는 열정과 헌신의 열매들이 모든 이교도들에게 명백해졌다. 이 끔찍한 재앙의 와중에 그들만이 가시적 행동을 통해 그들의 연민과 자비를 증명해보였다.”
기원후 250년경 키프로스섬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이 기간동안 카르타고의 주교가 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이교도들 모두에게 자비와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신자들에게만 필요한 사랑의 돌봄을 베풀어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거기에는 훌륭할 것이 전혀 없지만, 이교도들보다 뭔가 더 나은 일을 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완전해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원 후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창궐한 전염병의 영향 하에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환자들에게 베풀었던 돌봄에 관해서 디오니소스 주교가 말합니다: “우리의 형제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몸을 사리거나 서로만을 생각하지 않고 위대한 사랑과 성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위험에 개의치 않고 환자들의 보호를 떠맡아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기면서 그들과 함께 평온하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도 병에 걸린 다른 이들에 의해 감염되어 이웃의 병을 자신들의 몸에 지고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리 펭그렌이라는 역사학자는 기독교의 원수 사랑과 박애 그리고 돌봄으로 인해 전염병 치료에서의 사회적 책임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고 평가합니다. (<환대와 구원>, 조슈아 지프 저 참고)
대구 경북 지역이 신천지로 인해서 코로나19의 최대 피해 지역이 됐습니다만, 그곳 교회에게는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 복음의 불모지인 그곳에 부흥의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대구 경북 지역 교회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신천지 세력의 와해와 더불어 대구 경북 지역의 복음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세계보건기구 WHO가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해서 펜데믹을 선언했습니다. 펜데믹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선포하는 감염병의 최고 경고 등급으로,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일컫죠. WHO는 지난 12일에 펜데믹 선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의 규모가 전세계적으로 급속도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첫 발병 사례가 발생한 이후 70여일 만에 세계 확진자 수가 12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확진자가 발생한 국가만 해도 118개 국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확산세가 지속되면서 심한 '감염 불안'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들도 늘고 있습니다. 특히 확진자나 자가격리자들의 스트레스가 고조된 것은 물론 기존에 공황장애 같은 불안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증세가 악화되는 일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확진자 다수는 스트레스 고위험군에 들어서 죄책감을 갖거나 동선이 공개돼 사생활 침해를 받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상이 유출돼 욕설 문자 등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몸에 대한 증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감염병 전염에 대한 불안으로 소위 '상상 코로나'가 올 수 있습니다. 발병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어디가 조금만 안좋아도 코로나에 걸린 것 아닌가 하는 불안입니다. 어느 정도 불안을 느끼는 건 정상적 반응이지만 악화하면 병적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전문의들은 감염 위기 상황에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안, 분노, 짜증, 혐오 등의 부정적 감정과 트라우마를 '두 번째 화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건강, 경제적 위협 등 현실적 고통은 피하기 어렵지만 2차적인 심리적 반응은 관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의료진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소위 '심리 방역'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심리방역이란 감염위기 상황에서 효과적인 위기 의사소통과 고위험군에 대한 정신건강 서비스를 통해 감염병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증세는 전국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최근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일상생활이 절반 이상 정지했다는 응답자는 10명 중 6명에 이르고, 코로나19 뉴스를 접할 때 떠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불안’(48.8%)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심리 방역을 강화하기 위해 '코비드(COVID)19 심리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코비드19 심리지원단은 '심리 방역을 위한 마음 백신 7가지'를 제시했습니다. △격려 백신-나를 격려하기 △긍정 백신-좋은 일 하기 △실천 백신-수칙을 솔선수범 실천하기 △지식 백신-제대로 알기 △희망 백신-끝이 온다는 것을 알기 △정보 백신-도움 받는 법 알아두기 △균형 백신-이성의 균형 유지하기 등을 제시했습니다. (CBS노컷뉴스 2020.3.6.)
위기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는 어찌보면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 역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바울이 겪고 있는 위기상황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서 해와 달과 별도 보지 못한 채 십여일에 걸쳐 배 안에서 표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본문 20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사도행전 27장과 마지막장 28장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군대에 의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고 있는 바울을 보여줍니다. 배를 타고 호송되던 중 폭풍을 만나 배가 좌초될 위기를 겪고 표류하고 있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입니다만, 여기서 오직 바울만이 평온합니다. 276명이 타고 있는 이 배 안에는 공포와 패닉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1-25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장을 면하였더라면...”이라고 바울이 이미 제안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9-11절에 보면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은 선교사로서 곳곳에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항해에 관한 실제적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해하기에는 적합지 않은 때임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수에 불과한 신분이었을 뿐입니다. 사람들, 특히 결정권자인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항해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바울의 제안이 배에서 바울이 행했던 첫 번째 말이었습니다. 죄수 바울의 두 번째 말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1-25절입니다. 바울의 연설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풍랑에 떠밀려 표류한지 14일이 되는 지금,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안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겁니까? 그가 지난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계획을 내가 가지고 있다. 이 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생명을 네게 맡겼다. 한 사람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해를 받는 것은 오직 배뿐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결코 코로나19에 안 걸린다거나 걸려도 죽지 않는다거나 이렇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라기보다 중요한 것은 극심한 위기상황에서도, 큰 풍랑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요,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이라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죽게 되는 그리스도인도 아마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공포와 패닉과 두려움이 아닌 죽음 앞에서도 평온, 위기 앞에서의 평안입니다. 이를 가능케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믿음이요, 상황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붙드는 믿음이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풍이 클 수록 고요도 크다.고난이 클 수록 위로도 크다. 오르막이 클 수록 내리막도 크다. 상처가 클 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즐겨 부르고 있는,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찬송가는, 작사자인 스패포드(Spafford) 교수의 엄청난 비극 속에서 탄생한 찬송가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속의 욥기”라고 불립니다. 스패포드는 변호사였고 또한 법학 교수였을 뿐 아니라 무디 교회의 회계 집사였습니다.
1871년에, 이토록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에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화재로 집은 불타 버리고, 재산은 전부 잿더미로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서입니다. 자신의 집 뿐만 아니라, 무디 교회도, 그만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화재로 300명 가까이 사망하고, 시카고의 9 km²에 달하는 지역이 불에 타고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화재로 인해서 스패포드의 부인은 충격으로, 화재의 커다란 충격으로 인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하였습니다. 스패포드는 무디 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어서 불에 탄 교회당의 재건 때문에, 그의 부인과 네 명의 딸이 먼저 여행을 떠나고, 자신은 며칠 후에 뒤따라 가기로 했습니다.
부인과 네 딸이 탄 여객선은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2시, 모든 승객들이잠든 시간에, 여객선은 영국 선적의 화물선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충돌을 당한 여객선은, 2백 26명의 사람을 실은 채로, 바다 속으로 침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를 하기 직전에 실신한 채로, 구명정에 의해서 구조가 되었으나 4명의 딸들은 모두 익사를 당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슬픔을 가득 안고 아내를 데리고 오려고, 서둘러서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탄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 지점을 지나 갈 때에,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인해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사고가 난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 한참 울부짖던 스패포드에게 지금까지 일찍이 체험을 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평안을 느낀 스패포드는, 얼른 종이를 꺼내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Bliss)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 주면서, 작곡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스패포드가 혹독한 고통과 아픔 중에서 체험한 평안을, 세상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안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폭풍이 없어서 평안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서의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https://blog.naver.com/leesanginkr/221828012723)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장로는 “조국이여 안심하라”를 붙여놓고 늘 외치셨습니다. 늘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풍랑속에서 소망이 일절 없는 것같은, 표류하는 배속에서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뱃사람들이여, 그리고 동료 죄수여, 그리고 로마군인들이여, 276명의 모든 탑승객들이여 이제는 안심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리고 하나님이 한 사람의 생명도 해를 받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개 죄수의 신분에 불과해서 처음 제안, 항해를 중단하자는 제안을 거부당했습니다.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수에 불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연설을 합니다. 바울이 행한 연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냥 듣고 있습니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연설은 사도행전 27장 31-34절에 나옵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바울이 무엇을 제안했습니까? 섬에 가까이 온 것을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들이 선원들이요 노를 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조그마한 거룻배를 내려서 도망가려고 하자 이를 눈치챈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말해서 그것을 못하도록 끊어내라고 제안하고 군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서 바울이 제대로 식사를 준비해서 하자고 제안하자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리더십이 위기의 순간에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수에 불과한 사람의 말이어서 바로 일축당했지만 이제는 이 배의 영적인 리더십이 공고하게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위기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곧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리더십이 위기의 때에 배라는 세속사회 안에서 공고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 그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만 진정한 믿음과 신앙,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비롯된 용기가 있었고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 속에 피어나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찰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비롯된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의 시간속에서 유독 오직 바울만이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함께 겪는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다르게 반응하여, 비겁 대신 용기를, 절망 대신 소망을, 두려움 대신 평안을, 거짓소문과 가짜뉴스 대신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보여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보게 될 것이요, 배속에서 리더십이 세워진 바울처럼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폭풍 속의 평온, 위기 시의 담대함, 두려움과 패닉과 공포 대신 용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믿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함.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이 아닌 참된 평안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276명 중 오직 바울뿐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에게 있는 이 믿음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믿음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고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믿음도 생기고, 평안도 생기고, 담대함도 생기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경을 자주 읽고 많이 읽고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들었던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는 위기도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에서 구조의 총책임자처럼 리더십을 위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를 통해서도 하실 일을 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 그리스도인의 용기,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국가여 안심하라! 이제는 안심하라!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꼭 코로나가 그리스도인은 빗겨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우리는 복원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 영생의 소망이 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긴 담대한 능력!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천지는 위축되고 복음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대구 경북지역이 부흥하게 되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코로나19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드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3월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다시(Again) (창 35장 1-7절)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까?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 함은 직접 눈으로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는구나를 확신하게 된 체험을 가리킵니다.
벧엘에서 야곱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가로채고서 에서에게 죽임을당할까봐 부모 품을 떠나서 저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죠. 야곱의 어머니가 잠깐 외삼촌집에 가 있으라고 했죠. 형의 노가 잠잠해질때까지 거기에 있다가 오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난생 처음으로 부모 품을 떠나서 저 멀리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 벧엘이라는 곳에 이르러 길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브엘세바에서 출발했으니까 벧엘에 이르기 위해서는 며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벧엘에 이르러서 길에서 언뜻 잠에 들었는데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사다리(계단)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의 꿈을 꾸게 되었고, 긴 사다리 끝 하늘쪽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았습니다.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3)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아직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보호와 위안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법한 말씀입니다.
꿈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서 자신이 누웠던 그곳을 ‘벧엘’이라고 명명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한 여호와 하나님을 야곱이 이곳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 28:20-21)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무사히 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되실 것이라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들어서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삭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제는 야곱이 직접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된 체험입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하나님으로만 존재하시지 않고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고백된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그래서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곳이요, 이뿐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불확실한 미래와 어두운 미래속으로 뚫고 들어갈 용기를 얻었던 곳이 또한 벧엘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 불확실한 미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20년간이나 지내야 했던 앞으로 펼쳐질 두려운 미래의 발걸음을 힘있게 내딜 수 있게 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습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였던 속임수 대장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여러 번 속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멸시를 받고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던 야곱의 삶, 외삼촌 라반 밑에서의 길고 긴 20년의 세월을 참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 체험이었고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벧엘이 밧단아람에서 야곱을 지탱시켜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벧엘로 다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세겜 지역입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대략 40킬로미터 정도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왜 벧엘로 가라고 하신 걸까요?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벧엘로!”, 그리고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 네가 형 에서에게서 도망칠 때 두렵고 떨리는 공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확신하게 되었던 벧엘, 이후 20년의 고된 밧단아람에서의 삶을 지탱시켜주었던 힘의 근원이 되었던 벧엘, 그 벧엘로 다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떠한 상황이길래 야곱에게 벧엘로 다시 가라고 명하신 걸까요? 야곱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나요? 자신의 딸 디나가 세겜 땅에 거하는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자 디나의 오라비들이 속임수로 결혼을 약속하고 단 조건을 내걸기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몰 집안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한참 고통스러워하는 제 3일에 그곳을 급습해서 하몰 집안 일가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하몰뿐 아니라 강간을 저질렀던 그의 아들과 그 집안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닮아서 세겜 족속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 집안은 세겜에 잠깐 거주하고 있는 유목민인데 세겜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죽였으니 닥쳐올 보복을 야곱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어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아내 레아의 소생이어서 그런지 소극적이었던 야곱이 몰살 당할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야곱의 위기의식과 다급함이 창세기 34장 30절에 표현돼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죽음의 공포, 멸절당할 것 같은 위기를 야곱이 느끼고 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도망갈 때 해가 지고 처음 벧엘에 이르러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가 지금 다시 야곱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셨는지 야곱은 즉시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3) 자신에게 벧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야곱이 상기하였던 것입니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야곱은 벧엘로 즉각 갔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입증된 벧엘, 지난 이 십 여년의 긴 고통의 터널 가운데서 나를 지탱시켜주었고 그 소망의 말씀 붙들고 험난한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벧엘, 그러나 다시 고향땅에 돌아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벧엘입니다. 다시 위기가 들이닥치고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게 된 상황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예전처럼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는 요청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위기의 때에 두려워하던 너를 찾아와서 만나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십 여년의 긴 고통의 터널 끝에 이제 가나안에 다시 돌아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던 야곱, 그러나 그 결과로 벧엘을 잊어버렸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위기와 다급함을 주셨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태와 안일에 빠져있던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 일신하여서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특권이라고, 특혜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옆에 믿음의 동료가 함께 한다는 것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바른 복음의 기초 위에 말씀 위에 세워진 정통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크게 의식하지 못했고 자부심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코로나19가 이제 모든 것을 바꿔버렸습니다. 당연시했던 모임을 이제는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이 힘들 때 함께 모여서 교제를 나누었던 형제자매를 이제는 쉽사리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순탄한 삶, 특별한 문제거리도 없이 평범한 삶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보증수표인 줄 알고 그렇게 신앙생활해왔습니다. 이정도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엿이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름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습니다. 코로나 19 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의문시되었습니다. 예배생활을 규칙적으로 하지 못함과 기도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과연 하나님을 섬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하는 확신도 조금은 허물어진 느낌입니다. 위기가 신앙의 감별사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바닥까지 드러내보일 법한 위기의 때입니다. 바이러스의 습격을 어떻게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작지만 새록새록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입니다. 다시 위기와 어려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다시 벧엘로!”입니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을 위해서 야곱이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불쑥 찾아오셨을 뿐입니다. 단지 야곱의 마음이 낮아져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도 대개가 마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힘들고 어려운 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쑥 찾아와주셨습니다.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경의 하나님을, 혹은 내 부모의 하나님을, 내 이웃의 하나님을, 비로소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생각해보면 벧엘에서의 나의 체험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벧엘에서의 하나님 체험이 없었다면 아마 하나님을 포기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아직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벧엘에서 불쑥 만났던 하나님 체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다시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기존 생각이 붕괴되고 있는 요즈음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벧엘로 가서 나를 만나라!” 지금 신앙상태에 안주하지 말고 지금 헌신에 만족해하지 말고 이 어려운 때에 다시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시고 교육하실 때 반복을 사용하십니다. 위기의 반복이요 어려움의 반복이요 그래서 또한 은혜의 반복입니다. 은혜로 우리를 불쑥 만나주시고 다시 위기를 맞아 허둥지둥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벧엘로 가라고 은혜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첫 번째와는 달리 야곱은 준비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야곱이 느낀 주된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6-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똑똑이 기억하고 있는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냥 갈 수 없었습니다. 준비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오늘 본문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입고 있던 옷도 갈아입고서 그러한 준비를 하고서 벧엘로 다시 나아갑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두려워할만한 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는 것입니다. 벧엘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인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외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고 정결한 심령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처럼 불쑥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은 우리의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함,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갈급함과 사모함, 이러한 준비가 없이는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함과 정결함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만큼 소중하게 높아져있는 우상들을 다 깨뜨리고 전심으로 순결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변화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빠졌던 안일한 신앙생활을 일소해버리고 다시 새로워진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우리는 곧 다시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갔던 마을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예배당에서 서로 만나고 예배를 드릴 때 기분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서 예배하게 될 때의 감격을 머릿속에서 그려봅니다. 그 감격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고 지속적인 변화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다시 찾은 벧엘에서, 예배와 하나님에 관한 태도는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의 태도와 각오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은혜인 줄 알지 못했고 당연시했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뒤로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임을 새삼 깨닫고 감격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의 우리의 나태와 안일과 거짓과 기만을 다 회개하고 심령이 성령으로 정결해지고 순수해져서 ‘오직 하나님뿐이구나’. ‘오직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목회자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던 삶에서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었고, 정독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얼른 찾아 스쳐지나듯 읽어야 했던 좋은 책들도 다시 정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유튜브에서 워십팀들의 경배와 찬양 영상을 많이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워십팀, 가령 제이어스나 어노인팅 그리고 마커스워십 팀등의 예배 실황과 그들의 찬양곡들을 듣고 보면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팀들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태도에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의 태도에서 그곳에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큰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고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제 자신에게도 메마른 땅의 생수와 같은 은혜의 단비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관건은 우리의 거룩함과 정결함이고, 이뿐 아니라 우리의 목마름과 주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을 채워주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감정과 태도를 가지고 우리는 새로워진 심령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유투브에서 여러 유명 인사들의 간증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간증은 마커스 워십팀에서 찬양인도자로 섬기고 있는 소진영간사의 간증이었습니다.
이분이 지금은 40이 되었는데 2005년 25살에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온지 얼마 안된 글리벡이라는 획기적인 신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습니다. 근육 경련, 구토 등의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습니다. 이 약을 6개월 복용하자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이 약을 평생 복용하겠느냐며 골수이식을 하자고 해서 오빠가 가능해서 이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 조혈모세모를 이식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단 받은 날보다 오히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에 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다시 글리벡을 복용하기로 했습니다. 계속 복용해오던 중에 나이 30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당연히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면 약을 끊어야 하는데 남편과 주위 분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약을 복용해오고 있는데 약을 끊으면 재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나도 아이를 갖고 싶고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하나님께 울면서 솔직한 마음을 꺼내 기도했습니다. 당연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마음이 늘 있었지만 이날만은 마음에 뭔가 큰 평안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도 아이를 가져봐야겠다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 남편, 부모님 등을 설득해서 아이를 갖기 위해서 시도를 했습니다. 몸에 남아 있는 약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몇 개월이 지난 후 본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약을 끊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나니까 의사선생님이 한 달만 더 두고보자며 그때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며 다시 약을 복용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마침 그 달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때가 2015년이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안지 딱 10년만에 불가능해보였던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서 만든 찬양곡이 ‘오직 예수뿐이네’라는 곡입니다.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이 곡에 얽힌 기가막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분이 어느 날 마커스워신 찬양집회 끝나고 가는데 어떤 분이 급히 뛰어와서 자신을 붙잡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친오빠가 얼마 전에 죽어서 자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찬양집회에 한 번만 같이 가자고 제안해서 그날 찬양집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엄마가 자신의 오빠를 잃고, 그러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데, 이 찬양을 듣고 가사를 적고 주방에 붙여놓고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고 수시로 가사를 읽으면서 하루 하루를 견디며 버티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엄마가 자신한테 그러더래요. “이 찬양곡을 쓰신 분이 어떤 분일까 이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마가 자신에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날 찬양집회에 와서 하나님이 답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 곡을 쓴 분이 바로 소진영간사임을 알게 된 것이죠. 물론 이분은 소진영간사의 아픔을 알지는 못하죠. 이 말을 듣고 있던 소진영간사는 자신에게 고통이 있었던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자신에게 이런 시간을 주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심은 어려운 위기의 때이니까 지혜롭게 기도하면서 극복하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오히려 우리 인생에게 무엇이 남을 수 있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특별히 신앙인에게는 오직 하나님뿐이요 오직 주님뿐이심을 분명히 깨닫고 이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입니다.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전혀 새로운 결단과 각오로써 이후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요청입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뿐이요 오직 주님뿐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얻고 이후 삶의 방향이 그 방향으로 지속된다면 이 위기의 시간이 분명 축복의 시간, 전화위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이겨내시고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3월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은총의 표적을 보이소서!
오늘 주일예배는 동산교회당에서 모여서 하지 않고 가정에서 인터넷 영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모임을 갖지 말라는 당국의 권고를 진지하게 듣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이 되거나 민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 모이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상황이 이처럼 되었는지 망연자실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상황이 너무 위태해서 이때가 기도해야 할 때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10가지 기도를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모여서 기도회를 진행하지는 못해도 가정에서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홈피 팝업 창에도 올려놓았고 교회 본당 현수막에도 부착했습니다. 10가지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우리의 기도
1.보건·방역 당국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감염 확산이 멈추기를
2.전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와 기본 규칙 준수로 확산세가 차단되도록
3.국민은 국가를 신뢰하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나라다운 나라로 서도록
4.방역의 최전선에서 애쓰는 실무자들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5.질병에 걸린 자들을 치유,회복시켜 주소서
6.회개와 각성과 깨어 있는 한국교회 되도록
7.재난적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치유하는 한국교회 되도록
8.교회,예배,말씀,기도 등 영적생활의 소중함을 깨우치도록
9.신천지에 미혹된 사람들이 어서 속히 나오도록
10.주여,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여 주소서
이상의 10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가정에서 함께 전심전력으로 기도합시다! 절실히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상황이 절박합니다. 재난적 위기요 국가적 위기요 한국교회의 위기입니다.
이번 주간에 주일에 한 번 설교를 준비하다보니 이전보다 부담이 훨씬 줄었습니다만 마음의 부담은 더욱 컸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생겨 이런 저런 책도 읽었지만 기도해야겠다는 부담이 너무 컸습니다. 홀로 목양실에서 매일 1-2시간씩 기도를 했지만 혼자 기도하는 게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혼자서는 기도를 못한다기보다 매일 새벽예배 때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1시간보다 홀로 1시간 기도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악물고 기도를 했고 우리 교역자들도 매일 한 시간씩 전임사역을 하는 부교역자 4명이 지하 기도실에 가서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릴레이기도를 했습니다. 그만큼 위태로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이럴진대 모일 수 없는 성도들의 고충은 얼마나 클까 생각해봅니다. 영적 생활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목회자보다 더욱 힘든 시간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전화위복 시켜주실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뜻이 계신 줄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6편 말씀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많은 다윗의 시 어떤 시보다도 더욱 절박하고 다급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상황 역시 절박하기에 그리고 절박한 기도가 다급하게 요청되기에 우리의 기도제목을 삼고자 시편 86편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시인 이상이 그랬죠. “인간의 모든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고 그리고 이어서 “그 기교 때문에 더더욱 절망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의 말 앞부분은 참이고 뒷부분은 하나님 없는 인생에게는 맞는 말인 듯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인생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여튼 “인간의 모든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는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무나 절박해서 사람들은 이런 시도 저런 시도 다 해볼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너무 위태하고 마음이 다급하고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군더더기 없는 진실한 기도겠죠.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보니 여느 기도처럼 응답이 조금 늦게 와도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닐 때 우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가 될까요?
1-4절의 간구를 보면 하나님의 응답을 간청하면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도록 뭔가 근거를 마련해보고 근거를 제시하려는 다윗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브루거만이라는 구약학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1절,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처지가 딱하다는 걸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셔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하고 궁핍하니까 다른 힘이 없고 다른 데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니까 기도에 응답해달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헤쳐나갈 길이 없다는 호소입니다. 2절입니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다윗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악인들에 둘러싸여서 공격을 당하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저는 경건하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저를 지켜주세요. 저를 건져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입니까? 하나님앞에서 자기의를 내세우는 겁니까? 자기 자랑입니까? 그렇기보다는 절박한 간청입니다. 절박하게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겁니다. 건져달라는 겁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저의 경건은 헛것으로 간주될 터이요 제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사람들이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몰라라 하시면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 살아계시지 않는 겁니다, 이 정도 뉘앙스로 읽힙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위기가 아니라 평소 때라면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당치도 않은 자기자랑이요,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거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기도를 요구합니다. 다급한 기도는 이것 저것 갖다 대는 겁니다. 응답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비상한 상황입니다. 뭐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재빠른 응답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런 아픔과 이런 고통과 이런 긴장과 이런 위기 가운데 계속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전대미문의 이런 사태 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고고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도, 어려운 때니까 기도로 극복하기 위해서 모여서 기도할 수도 없는, 그래서 힘을 쓰려고 해도 힘을 쓸 수가 없는, 이사야서에서 말한 대로 해산하려는 여인인데 해산하려고 하나 해산할 힘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한국교회 우리 성도들, 우리 목회자들, 우리 모두 큰 것이 아니더라도 알량한 것이라도 우리의 경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경건이라도 이거라도 봐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은 아니지만 알량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나와서 이 믿음 보아서라도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신자라면 하나님 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됐잖아요? 새신자 때는 뭔 기도를 해도 잘 들어주신다면서요. 이렇게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모이지 못하고 언제까지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언제까지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드리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3절입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본 시편의 핵심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겁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은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해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은혜도 지금 당장 주어지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이런 절박감이 있습니다. 왜냐면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져올 수는 없고 하나님의 일방적 호의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지만 상황이 너무 다급하니까 지금 당장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안되니까 근거를 대고 있는 겁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어야 할 이유를 대는 겁니다: “내가 종일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은혜가 임할 것을 믿지만 바로 지금 은혜가 임하도록 종일 기도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루 하루가 힘겹고 은혜의 골든타임이 지나가면, 즉 자신이 죽고 나서 임하는 은혜라면 부활의 은총이기는 하겠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종일 다급하게 어서 속히 임하도록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며 시작한 기도는 마지막에도 은혜를 구하며 마칩니다. 본문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어디서 많이 본듯한 내용이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죠. 그러나 언약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멸하고자 했지만 모세의 간절한 중재의 기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화가 누그러지고 다시 언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보고서 살 자가 없으니 영광이 지나가게만 해주겠다, 얼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형상의 뒤만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죠. 모세에게 지나가시면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모세가 보았던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계시해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한 마디로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화를 절제하시고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을 용서해주시는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은 언약관계를 신실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을 보지 않았습니다만,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은 다르지 않습니다. 아들의 영광은 그래서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영광이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구약성경에서 ‘인자와 진실’과 같은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계시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아들에게도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곧 아버지의 영광이요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요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세 관련 일화를 언급하고 평소 암송했던 말씀을 가지고 다윗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면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체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 것도,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수립하게 한 것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 전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우리가 믿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고서 다윗은 17절에도 이어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표적이라도 우선 보여달라는 겁니다. ‘은총의 표적’은 ‘상황이 좋게 될 것 곧 ‘토브’를 위한 표적’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라는 것은 복되다는 것이요, 선하다, 좋다 이런 뜻이 있죠. 토브란 한 마디로 문제가 해결되고 위기가 극복되고 상황이 좋아지는 이런 토브, 결국 이 토브가 기도의 목표죠. 기도해서 안정을 되찾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고 위기가 극복되고 다시 신앙생활이 영적으로 풍성한 신앙생활으로 회복되는 상태, 이러한 기도 응답이 당장은 아니어도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표적을 보여주는 것은 지금 당장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층 안정을 되찾지 않겠냐는 겁니다.
코로나19가 지금 당장은 하루에도 수백명이 확진되고 마스크는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타도 옆에 탄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할지라도 ‘은총의 표적’만 보여주신다면 그 표적 붙들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박멸되고 학교는 정상으로 개학하고 경제활동도 다시 재개되고 다시 요한계시록 성경공부하러 모이고 기도하러도 모이는 정상적인 삶, 안정된 삶, 좋은 삶으로의 회복은 앞으로 한 두 주 안에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해도 그것의 전조 혹은 징조, 징표, 표적이라도 보여주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 아닙니까? 소망 가운데 인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은총의 표적 보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은총의 표적이 필요합니다. 이 사태가 한국교회의 갱신과 변화의 계기가 되는 전화위복의 표적, 가령 이 일로 인해서 각 교회 추수꾼으로 들어가있는 신천지 위장 성도들의 명단이 이제 곧 드러날텐데 알아서 제발로 나가고 지들이 진리라고 믿는 곳에 가서 지들끼리 모여 더욱 가깝게 밀착해서 박수치고 아멘 아멘하고 신천지 교주랑 함께 어울려서 지지고 볶게 되는 전화위복, 그때는 제발 바이러스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더욱 순결하고 말씀에 입각해서 건강해지는 그러한 변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멸에 앞서 나타나게 될 표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상황이 자꾸 심각해지기만 하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은총의 표적’이 필요합니다. “은총의 표적을 우리에게도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절)
기도하면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에게는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극적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힘을 모아 함께 기도한다면 이 어려움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상황이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만 받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아닐 겁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변화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꼭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변화입니다. 어려움을 통과하고서 순결하게 단련된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결한 마음입니다.
시편 86편은 키아스틱 구조 혹은 동심원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키아스틱 구조 중에서 중앙집중적 구조를 이룹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시편 맨 첫 부분과 맨 끝 부분이 내용적으로 유사합니다. 맨 첫 부분 다음 부분과 맨 끝 부분 바로 전 부분이 또한 내용적으로 유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운데 맨 중앙에 가장 중요한 사상이 나오고 그 중앙을 전후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대칭구조를 이루는 중앙집중적 구조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상은 바로 한 번 나오는 맨 중앙에 있는 내용입니다. 맨 중앙이 바로 1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이 시의 핵심이 바로 11절입니다. 86편 전체가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서 건져달라는 간청이지만 가장 중요한 간구는 다윗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행하심을 신뢰하며서 그 뜻을 알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주의 도를 내게 가르쳐달라는 것은 여호와의 길을 알게 해달라는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을 텐데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온 데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길입니다. 그것을 가르쳐달라는 기도입니다. 깊으신 뜻을 알고자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내가 진리 가운데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내가 진리 가운데 걸어간다는 것은 여기서 하나님의 길에 상응해서 나 또한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믿고 의지하고 나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서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두려워하고 높이면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절박하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이 드린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박국이 기도했던 것처럼 “여호와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우리 모두의 기도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시선을 끌어온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라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 상황이 급반전되지 않을 상황이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은총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실 하나님이심을 믿지만 이 어려운 상황을 버텨내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는 ‘은총의 표적’이 우리에게 시급합니다. 아울러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깊으신 뜻을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그 뜻을 따라 우리도 진리의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마음을 다해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높여야 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받는 계기가 되도록, 이러한 어려움이 전화위복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도록 우리는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로 말미암아 상황도 좋아지고 우리도 변화되는, 그렇게 넉넉히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2월2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8)
표적 (요 2:1-11)
우리가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을 보았습니다. 총 다섯 명의 제자(사도 요한,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를 부르셨는데 나머지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핵심 제자들을 부르신 후 공생애의 첫 번째 사역이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이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 초대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의 친척 결혼식이 아니었나 추측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나는 북쪽으로 10km 이내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온 나다나엘,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해주신 나다나엘의 고향이 바로 가나였죠. 가나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중에 그만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결혼식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흥겨운 잔치고 신랑 신부에게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혼인잔치는 더욱 중요해서 일주일동안이나 지속됩니다. 신랑측에서 연회를 주관하는데 신랑의 친구나 친척이 연회장을 맡아서 혼인잔치를 주관합니다. 흥겨운 잔치기 때문에 혼인잔치 때 포도주는 필수였고 참여한 사람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취하기도 합니다.
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수치와 명예를 중시하는 팔레스타인 문화권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각한 사태입니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알려주십니다. 기적을 요청했다기보다 이 사태를 발빠르게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평소 의지했던 큰아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입니다. 가장 흥겨워야 할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가장 핵심이 빠진 상황입니다.
혼인잔치에 오는 사람들은 꼭 초대받지 않아도 마을 잔치처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이들에게 굉장히 무례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 일가에게 굉장히 큰 불명예요 수치스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어떤 상황일까요? 뭔가 핵심이 빠졌다는 것이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인데요. 기쁨이 사라진 것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동력이 사라진 것이기도 합니다. 계속 흥겨움을 이어가야 할 잔치에서 한마디로 김이 빠진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뭔가 주저앉은 분위기입니다. 많은 무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는 신천지가 한몫 했습니다만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하나로 보는 듯합니다. 한마디로 니들 종교 갖는 건 뭐라고 안겠는데 사회에 피해만 주지 말아라, 종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듯합니다.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2020년 연초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다 보니 막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 동력이 꺼지고 주저 앉게 된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잔치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모임은 당분간 폐지되고 가정예배로 대체해야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오늘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동력이 상실되어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성령께 붙들리지 못한 채 여러 세상살이의 근심걱정에 함몰돼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이어가고 있다면 우리에게도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흥겨워야 할 교회가 적막해지고 뜨거운 기도의 함성이 울려퍼져야 할 교회에 기도가 사라지고 기쁨의 찬송이 감격스럽게 불러져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심령이 되었다면 분명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수님께 아뢰고 다시 주님께로 더욱 나아가야겠죠.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러한 문제상황을 예수님께 아뢰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좀 퉁명스럽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다 한들 내가 관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역하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역하면 “당신과 관계된 이 문제가 어떻게 우리들 모두의 공통 관심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문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자관계를 생각하고 어머니가 큰 아들을 찾고 그에게 문제를 알려준 것인데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는 지금 어머니에게 그 틀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구속 사역을 완수하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면서 이제는 더 이상 모자관계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좀 서운하게 들릴 수 있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도 대단합니다. 이 놈이 날 서운하게 했다고 토라지기보다 이 난처한 상황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아들이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기적을 베풀 것이라는 기대감이라기보다 평소 아들을 의지하고 아들이 가정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을 토대로 아들이 이 상황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선 거절하신 이유는 가정사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개인의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당사자들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심각한 대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예수님의 온통 관심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이루어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과업뿐입니다. 그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 예수님의 온통 관심사요 그 때를 위해서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그 때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돌아가실 그 때를 가리킵니다.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기적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로 읽힙니다.
예수님이 지나치게 과민하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러시는 걸까요? 포도주와 혼인잔치는 구약성경에 보면 메시야 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 혼인잔치를 벌이시고 연회에서 포도주를 함께 나눌 종말론적 잔치에 대한 기대를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25장 6-8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혹시라도 지금 예수님께서 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에서 포도주를 풍성하게 공급해주신다면 혹시라도 민감한 사람들이 이 잔치를 메시야의 혼인잔치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메시야 시대의 연회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메시야로 추앙되거나 스스로 주장한다고 간주되어서 아직 아닌데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아직 아닌데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때에 자신이 이땅에 보냄을 받은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온통 관심사가 그러다보니 다소 민감한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은 이 상황의 전개를 미리 다 내다보고 여기서 행할 기적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의미하고 가리키는 표적이라는 점을 지금 주위의 사람들, 특히 제자들에게 알리려는 의도로 문제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무겁게 대답하신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즉,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에서 당사자들의 난처한 문제만을 해결해주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종말, 메시야가 가져올 새 시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연회요 축제의 자리, 거기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종말론적인 미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고 백성들의 수치를 제해주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심으로써 영생을 선물로 주실 바로 그 미래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지금 가까이 왔다는 징조로서 혹은 징표로서 그러니까 표적으로서 이 기적을 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내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이 사건을 첫 번째 표적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려면 끝도 없을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였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수많은 기적 중에서 선별해서 7가지의 기적, 그것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7가지가 표적으로 뽑힌 이유는 특별히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 표적은 기적 너머의 의미, 그러니까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행사를 통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그리고 마지막 표적인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오늘 첫 번째 표적,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풍성한 포도주로써 연회를 계속 흥겹게 이어가도록 하신 기적도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시대의 도래, 메시야가 가져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 그 결과로써 눈물이 씻겨지고 수치가 제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망이 영원히 폐하여지고 영생을 선물로 주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 곧 십자가에서 그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질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괜시리 심각하게 오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기적을 표적으로 보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요청에 처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거절한 듯 보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기적 사건을 제대로 표적으로 해석하도록 해석의 지침을 제공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의도를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셨는지 모르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의 어머니는 아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 난처한 상황을 나 몰라라 할 분이 아니라고 확신해서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움과 풍요로움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인들에게 명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유대교 정결례는 복잡하고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쉽게 이해해서 깨끗해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손님들에게도 정결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그 용도로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에다가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물을 가득 다 채우자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연회장이 그 물을 마셨는데 이미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고 사람들이 취했을 때 안좋은 포도주를 내는데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숨겨놓았다가 이제야 내놓냐며 책망 아닌 책망을 했습니다.
이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고 가리키는 숨은 의미가 있는 표적입니다. 기존 유대교의 정결례, 구약의 율법은 겉사람을 깨끗케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속사람까지 전인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돌항아리에 담긴 물을 가지고서는 진정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붉은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부르을 받아야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전 삼아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야 시대의 축복, 죄 용서함 받고 깨끗해진 심령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그 결과로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복은 오직 예수님의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대신해서 포도주와 같이 붉은 피를 쏟으실 때 가능해지고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 제자들, 지난 시간까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사람들이 특별히 제자들이 물을 단순히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만 보고서 예수님 참 대단하다, 그렇게 말해서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했던 새 시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구나, 이를 통해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얻게 되는 영광이요 곧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독생자의 영광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영광,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약 모세가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드러날 것이기에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구약 출애굽기에서 말한 인자와 진실이 많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주가 떨어지셨습니까? 잔치를 주관하는 신랑 신부에게는 수치와 불명예요, 잔치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흥이 떨어져버린 것이요,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의 기쁨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의 동력이 꺼져버린 상황입니다. 상당히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결단하고 예수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다시 포도주를 우리 안에서 일으키셔서 다시금 즐겁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다시 우리 안에서 성령의 불길로 타오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의미와 활력을 되찾게 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의 상황, 한국교회의 상황은 잔치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상황입니다. 성령의 불길이 태우고자 해도 태울 재료가 사라져버린 상황입니다. 신종 코로나로 인해서 이것은 거의 재난 수준이요 막 일어나려고 하는 교회가 다시 주저앉게 되는 상황이요,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연초에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상황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주심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다시 잔치의 흥겨움과 기쁨을 회복시켜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혼란한 아픔과 어려움과 그리고 우리 각자의 심령을 다시 새롭게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이 오늘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2월9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6)
개명(改名) (요 1:35-42)
미국의 철학자요 저술가인 윌 듀런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50년에 걸쳐서 집필한 <문명이야기>나, 철학의 입문서로 아직까지 활용되는 <철학이야기>를 저술한 분입니다. 1930년 가을 이분이 자신의 집에서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을 때 멋진 정장을 입은 한 신사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은 자살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대 미국에서 유명한 철학자인 듀런트가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다면 자살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듀런트는 먼저 직장을 구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직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드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듀런트를 찾아왔던 한 신사는 결국 아무런 해답도 듣지 못한 얼굴로 떠났습니다.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우연하게도 그 해에 자살하겠다는 사람의 편지를 여러 통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이분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떠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윌 듀런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다른 유명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 전역뿐 아니라 세계 각 분야에서 유명 인사들을 선별하여, 총 100명인 그들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편지를 발송하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대부분의 문인들과 과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해서 말하면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하기를 꺼렸고 상당히 회의주의적인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냥 일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라는 식의 답변이 많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간디의 답변은 종교적 색채를 띠었습니다. 간디는 종교와 도덕을 같은 것으로 보았고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합니다.”, “나의 위안과 행복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봉사에 있습니다. 신적 본질은 모든 생명의 총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어둠과 모든 악한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있습니다”라고 도덕교과서처럼 대답했습니다.
불가지론이면서도 반 기독교적 입장을 지닌 영국의 수학자요 철학자,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드란트 러셀의 답변은 가장 회의론자다운 답변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려니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삶에는 의미도 뭣도 없다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유명 인사들의 답장을 받고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윌 듀런트는 자신 나름대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정립해봅니다. 이분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나 인생의 만족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나 가치에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즉 삶의 활력과 원동력은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적 이타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입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에게 인정받는데서 자신의 노력의 원동력을 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정 즉 배우자와 아이 그리고 해야 할 일, 어찌하든지 일자리를 찾아내서 거기서 근면한 노동을 하는 것 등으로 삶의 의미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윌 듀런트 지음) 참고)
아무리 거창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해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최근 신문에 한 네덜란드의 작가요 저널리스트인 분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분의 동생이 4년 전에 안락사를 택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치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의 동생이 10여 년 전부터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알코올 중독이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발작했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어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르게 다쳐서 왔고, 그래서 경찰과 의료진이 수시로 집에 드나들었고, 치료소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고 그에 따라 수치심도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형의 품에 안겨서 안락사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반대했던 형도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의무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동생도 자신의 일기에서 “버러지 같은 이 삶을 정말 끝내고 싶다.”고 썼습니다. 안락사에 대한 고민을 1년 반 동안 하고서 안락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처음에 이분의 동생의 삶은 멀쩡했습니다. 하던 사업도 일주일 내내 일해야 했을 정도로 번창했고 가정에는 아내와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사우나가 딸린 멋진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술을 마시다가 심해져서 알코올 중독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서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코올 중독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로 인한 고통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죽기 직전 부모와 함께 웃는 얼굴로 사직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공허감이 늘 자리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다. 그가 원했다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었고, 다른 길도 없었다. 그는 죽고 싶어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동생과 함께 그 길을 가준 것이었다.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지지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지금 네덜란드에서 발생하는 안락사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택하는 안락사는 전체 안락사 중 1% 수준이라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부터 안락사가 합법화돼 있었지만 육체 질병이 아닌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한 최초 사례로 당시 논란이 됐습니다. 그래서 당국의 심의와 허가를 얻는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한 해에 안락사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오천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형제간의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는 삶의 부조리함과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 한 켠의 느낌을 자아냅니다. 동생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고 존엄한 죽음을 함께 맞이하고 그 길을 마지막까지 가준 사랑(?), 다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본인 외에는 알 도리가 없어서 그 고통에 대해서 잘 참지 못했다라는 판단은 내리면 안됩니다만 그것이 진정 형제 사랑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정신적인 공허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삶에 대한 확신과 삶의 의미와 는 전혀 다른 세계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한 형제가 등장합니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를 했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자신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나서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신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그분이 주인이라면 자신은 종의 역할도 할 수 없는 비천한 종이다’ 이러한 증거를 거듭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음날에 예수님의 거니심을 보고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거기서 흘린 피로 인해서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듣고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사람 중에서 두 명의 제가가 예수님을 찾았고, 그중의 한명이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이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시자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오히려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면 더 시간을 함께 하고 그분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하루 일정을 마치시고 숙소로 돌아온 시간이 열시, 그러니까 오늘날 시간으로 오후 4시쯤 되었습니다. 해가 지고서는 보통 이동하지 않는 상례를 생각해볼 때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아마 예수님과 저녁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서 안드레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대로 이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부리나케 자신의 형 베드로를 찾았습니다. 본문 41절입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그리고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우리들을 이끌어줄 강하고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기 원합니다. 아니 단순히 가르쳐줄 스승보다도 삶의 진리를 보여주고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분을 따라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처음 사례(철학자 윌 듀런트)에서 접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지 한편으로는 궁금해하면서도 알 수 없다는 입장 때문에 그 질문을 묵살해버리고 그저 살아갑니다. 자신의 욕망 충족과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얻는데 삶의 원동력을 삼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고통이 너무 심해지면 삶을 버릴까도 생각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드레는 자신이 믿고 따랐던 스승 세례요한을 신뢰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보겠다고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서 그분과의 만남을 가졌고 그분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서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이 증거했던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인류 구원을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요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로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가 지금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고백하지만 메시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십자가 죽음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서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신앙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이에 반해서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알아보았던 것이 참으로 대단한 통찰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였음을 지난 주일에 생각해본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유월절 어린양이 단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자로 입증되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안드레가 세례요한의 증거에다가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서 체험한 결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깨닫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인생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보통 우리는 존재 가치를 자신의 활동으로 사람들의 인정으로 그리고 자신의 기여와 업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의와 의미를 그런 식으로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바로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어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생명을 받았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면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요 진정한 생명의 충동이 바로 자리잡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살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광명을 얻은 것이죠. “광명을 얻었네!” 영원한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빛이란,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한복음 강해 (1) 중에서)
바로 그러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최고로 바르고 올바른 신학적인 증언을 자신의 스승 세례요한에게서 들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분이 진정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소망이다!, 바로 이러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나면 최고의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죽기를 원하는 동생에게 편안한 죽음의 길을 허락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형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 죽음 이후의 부활의 소망이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신 예수님에게로 내가 사랑하는 형제와 이웃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안드레처럼 말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나자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형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리고서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인생을 꽤뚫어보시고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아셨습니다. 그에게 별명을 지어주셨고 그것이 베드로의 새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새로 지어주신 별명 혹은 이름은 게바입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베드로입니다. 그렇게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왜 시몬이 반석이 되었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올바르게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라고 새롭게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너는 반석이다. 너라는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를 교회의 반석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늘 설교와 성경읽기와 성경공부 등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듣고 증거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삶에서 일상에서 어려운 순간마다 예수님에게로 나아가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요한계시록에서 사도 요한이 본 천상, 하늘 보좌의 환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새벽예배 때 에스겔 1장을 어제 보았습니다만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늘이 열리고 눈이 가득한 바퀴달린 하나님의 보좌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을 뿐 아니라 그분을 몸소 체험하고 실제로 그분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열리고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가벼운 일상의 무게중심이요 덧없고 공허한 시간속의 영원이요 무가치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인생의 궁극적 가치,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로 나오십시오. 그분을 열망하십시오. 그분에 관한 증언을 듣고 배우고, 그리고 몸소 직접 만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를 예수님은 만나 주시고 인생에 대한 확신을 주실 뿐 아니라 살아가야 할 이유도 그 안에서 찾게 해주십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정답임을 사랑하는 형제와 이웃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와 우리의 형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변화와 계획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물고기 잡는 밥벌이로 인생사에 크고 작은 일에 웃고 울던 베드로라는 한없이 나약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를 주님의 나라의 반석으로 삼아주시는 획기적인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이땅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손 안에 들려진 도구로서 새로워진 존재와 신분과 이름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만남과 사귐으로 인하여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1월26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4)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기 (요 1:19-28)
지난주에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났던 하나님의 영광 곧 독생자의 영광, 다시 말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그로써 자신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예수님만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자기를 비우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만하게 됨으로써 짧은 생애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신 것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과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분의 간증을 어제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주보 칼럼에도 썼습니다만 성악가가 부르는 찬송가에 필이 꽂혀 지난 주 내내 찬송가를 들었습니다. 또다른 성악가가 없나 해서 유투브에서 검색해보니까 이용훈이라는 한국의 테너 가수가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오페라 가수일뿐 아니라 본인은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그 바쁜 와중에도 선교활동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세계의 3대 오페라 극장에서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고 특별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렇게 활동을 하면서도 지난 2014년부터 서울대학교 성악과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너무나 바빠서 교수를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수락했고 특별히 모교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희생을 감수하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그는 2019년까지 공연 일정이 꽉 차있었습니다. 서울대 성악과가 불법 레슨과 성추행 사건 등으로 인해서 교수가 많이 줄어들어서 교수를 채용하려고 했는데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서로 싸워서 1년 6개월간 교수를 한 사람도 채용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분을 특채로 교수로 임용한 것입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었고 이분이 찬양하는 곡을 거듭 들었습니다. 원래 신학을 공부하다가 경영학도 공부하고 음악과 관계없이 지내다가, 이분이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했다고 합니다. 찬양 인도를 하는데 이분의 목소리를 듣고, 성악과 학생이었던 이분의 친구가 자신이 가르쳐줄 테니까 성악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해서 노래를 더 잘하고 싶어서 성악을 배웠고 노래를 부르는 게 즐거워서 이 길을 가리라 마음먹고 5개월만에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했습니다.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이었습니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행복하게 노래를 하고 배움의 과정에 있던 차에 그만 성악계의 어떤 비리와 가슴 아픈 일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이제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서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고심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네가 노래할 때가 가장 기쁘다. 너는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니?”, 하는 음성을 듣고 어렵지만 마음 추수르고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부유했던 집안이 갑자기 폭망해서 돈 한 푼 없이 도망치다시피 미국 뉴욕의 한 음대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음대생이 백팩에 빈 큰 패트병을 가득 담아서 학교에 갔습니다. 물로 배를 채우려고. 학교가 약수터였습니다. 거기서도 실력을 인정 받았고 독일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이 해고되는 바람에 공연을 2주 앞두고 전격적으로 주인공으로 캐스팅됩니다. 독일에서도 역시 먹을 게 없어서 오전에 다같이 연습하고 런치 타임을 갖는데 자신은 식사를 사먹을 돈이 없어서 극장에서 그냥 쉬었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해도 차비가 아까워서 그냥 극장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재개된 연습에 다시 참여했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주인공으로 노래를 연습해야 하는 일은 참으로 고된 일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연습날이 이어지고 계속 그렇게 하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하루는 집에 갖다 오자라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독일 도시에서 축제가 열린 듯했습니다.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길 한복판에 독일식 소세지를 구워서 판매하는 노점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배고파서 가격표를 봤는데 50유론가 그 정도 가격으로 판매하더랍니다.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50유로가 없어서 저 소세지를 못사먹는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절로 쓴웃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음성이었고 주님의 강력한 임재를 그 자리에서 경험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었고 주님으로 충만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임재만 있다면 평생 가난하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날 오후에 다시 극장에 돌아왔는데, 이날부터는 합창단과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합창단에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서울대 성악과 선배들이 두 세명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부터 점심, 저녁 걱정은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섬김을 받고 잘 준비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겪고서 주님의 은혜로 대타로 출연하게 된 첫 데뷔무대에서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고 이후 유럽 여러 극장에서 계약을 맺고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2007년이었고 데뷔가 곧 대박이었습니다.
드디어 2010년에는 미국 진출과 더불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전속 가수가 되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미국 무대에 데뷔한 이듬해 2011년에 일본에서 쓰나미가 있었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5년에 한 번 일본에 가서 대규모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단원 중에서 선별해서 스타만 데리고 오페라 하우스 모든 직원들이 셋트까지 총동원하고, 오케스트라 단원까지 대대적으로 5년에 한 번 일본에서 공연을 갖습니다. 오페라 가수들이 그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공연이고 유명한 공연입니다. 2010년에 데뷔했기에 자신이 갈 위치가 아닙니다. 그때 세계적인 스타 테너가 일본 환경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원자력 사고 때문에 방사능 유출 문제로 인해서 자신의 건강 때문에 안간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올릴려고 했던 작품이 '돈 카를로스', 이분이 바로 전 시즌에 메트로폴리탄 데뷔 공연했던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대타로 자신이 가게 됩니다. 일본 사람들이 자신을 궁금해 하고 동양인이기도 하고 한 번밖에 안선 사람이 오니까 주목을 했습니다. 인터뷰 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습니다. 오페라 공연이 다 끝나고 난 후 싸인해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1시간 이상 걸려야 할 정도로 줄을 서있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본팬들이 싸인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가수들이 하얀 테이블에 앉아 싸인했습니다. 자신도 생전 처음으로 싸인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싸인은 "지저스 러브스 유"(Jesus loves you), 그리고 말씀도 아는 것 생각나는대로 써줬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오래 걸렸죠. 벌써 옆에 동료가 짜증나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사람, 이름만 대면 아는 테너, 성격이 괴팍한 분으로 정평이 나있던 분입니다. 카메라도 돌아가고 있었고 기자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테이블 치면서 손가락질 하면서 "종교활동하는 거 그만 하라고!" (Stop it!) 그냥 침묵하고 대응하지 않고 계속 싸인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점점 큰 괴성을 질렀습니다. 15-20초 동안, 그래도 반응이 없으니까 혼자 열받고 괴성 지르고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팬들이 다 쳐다보고 카메라 돌아보고 기자도 있고... 얼굴 찡그리지 않고 계속 싸인했습니다. 싸인회 끝나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극장장한테 보고 올라갔고, 사람들이 적당히 좀 하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어려워 밤새 뜬눈으로 밤새고 아침 QT 말씀 폈습니다. 말씀이 안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어제 일에 대해 어떤 기사 났다 보려고. 이용훈 검색해보았더니 기사가 났습니다. 기사 내용인즉, 신인인데 떠오르는 별처럼 탁월한 공연 했다. 그런데 싸인회 할 때 문제 일으켰는데 기자가 "지저스 러브스 유"를 따옴표로 인용해온 것입니다. 이것만 안했더라면 인터네셔널하게 발전할 텐데 한계가 있다. 아쉽다. 이런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기사를 확인한 후 다시 큐티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말씀을 봤습니다. 그날 QT 구절은 빌립보서 1장 18절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웬 말씀이 이런가 생각했는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데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분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지역 언론사에 인터뷰할 때마다 예수님 언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선교사로서 그렇게 말을 해도 방송에서는 다 짤렸습니다. 이번에는 기자에게 내달라고 안했는데도 "지저스 러브스 유"가 실린 것입니다. 그 문구를 넣은 거, 부탁 부탁해도 안넣어주던 것을. 그 문구를 넣어준 겁니다. 그때 주님이 생각나게 해주신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의 말씀이었습니다. 조롱 받았지만 자신은. 그렇지. 그래. 내가 외치는 소리라고 했는데 그가 흥하여야 하겠고 내가 쇠하여야 하리라. 그런데 내가 왜 아파하는 걸까. 그분의 이름이 실렸고 그분의 사랑이 증거됐는데 내가 잠깐 모욕당했다고 왜 슬퍼하지... 이것이 내 삶의 좌우명인데.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게 그리스도니! 너무 기뻐서 일본 공연 잘 마쳤습니다. 마지막 날 자기 방에 화환이 와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팬들에게 싸인하면서 지저스 러브스 유 할 때 단 한 명도 나도 예수님 믿어요 하는 분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천명 싸인을 해주었는데도 말입니다. 4회 공연을 했는데도. 응답하는 관객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공연 때 화환이 왔는데 리본에 지저스 러브스 유. 역시 한 명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공연 마치고 그 화환을 들고 나가는데 일본 부부가 오시면서 너 맘에 들어 너무 맘에 든다 인사하고 감사하다 너 예수님 믿어 아니 안믿는데 근데 어떻게 그랬더니 네가 맨날 쓰니까 지저스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너도 사랑하겠구나 생각이 들어 자신도 그냥 그렇게 썼다... 그때 갑자기 성령님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구나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구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고 누구도 믿는 것 같지 않은 공격받고 비난받고 복음이 없는 것 같은 땅에서도 하나님이 그것 다 보시고 계셨구나 용훈아 내가 널 사랑한다 오직 답답했으면 찾다가 찾다가 없으니까 내가 널 사랑한다. 이런 응답을 받아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외에도 이분이 세계적 성악가로서 무대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간증들이 굉장히 은혜가 넘쳤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여튼 이분은 자신의 성대 결절로 인해서 한동안은 노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 잠깐 무대를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붙지 않는 성대를 가지고도 지금껏 세계적인 무대에서 주연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삶의 멘토는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오직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고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가치로서 자신을 바라본 것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나의 길’과 ‘주님의 길’뿐입니다. ‘나의 길’은 영원에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끝이 있습니다. 도중에 끊깁니다. 반면에 ‘주님의 길’은 영생에 이르는 길이요 도중에 끝나지 않고 목표에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나의 길’을 추구하다보면 도중에 끝나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지나온 길이 허망하게 느껴지며 출구를 찾지 못해 허둥댈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은 나의 길과 주님의 길이 일치되는 것이겠죠.
박노해 시인이 충만한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습니다: “진정하고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의 길이 주님의 길이 될 때, 바로 이때가 충만한 삶입니다. 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충만해져야 충만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충만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사람이 세례요한에게 무언가 물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고, 또 엘리야도 아니라고 했고 사람들이 종말에 올 것으로 기대했던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은 종말론적인 새 시대를 가져올 종말론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러면 너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도대체 세례운동을 왜 하는 거고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세례요한은 구약성경 이사야 말씀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절) 세례요한의 길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고 그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자신의 길임을 그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달았고 그래서 짧은 생애 살았지만 참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 세례요한의 예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방법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 내용과 비결은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의 직분과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말라기선지자가 예언한 종말에 오기로 예정된 엘리야냐고 물었을 때 세례요한은 부인했습니다만, 실은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오리라 약속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엘리야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사역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야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데 세례요한은 자기를 비운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비운다면 내가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서, 내가 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너무 큰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이어집니다.
둘째,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도대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 사람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종말론적인 새 시대를 가져올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세례는 왜 베풀고 도대체 무슨 권위로 세례를 베푸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대답합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26-27a)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와 이어서 요한이 했었음직한 말, 그러나 여기서 생략된 말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메시야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를 넣어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다 그렇게 나옵니다.
물세례는 새 시대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실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위한 회개의 세례였고, 회개를 하는 목적은 다가올 시대의 생명 곧 영생을 얻고자 함인데 그 생명은 자신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내 뒤에 오실 분이신 메시야 자신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써 가져다주실 것임을 세례요한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세례요한 자신이 하는 일 모두가 주님의 도우심의 결과일 뿐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물세례는 주님이 주실 성령세례를 위한 준비에 불과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역할의 기여를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로 자신을 비울 수 있었던 세례요한의 자기 비움, 그래서 하나님으로 충만함은 자신이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자신은 그냥 흉내만내는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용훈 테너도 간증에서 계속 강조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무대에 나가 자신이 노래를 하지만 자신이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깨달음은 자신의 사역의 한계, 결국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비하면 자신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자신의 사역은 도무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사역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 중요성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주님이 하시려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요, 결국 주님이 하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세 번째로 이어집니다.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 자신의 작음과 주님의 크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신발에 관련된 일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당시에는 제자가 노예가 하는 일을 스승을 위해 하도록 했습니다. 단 하나 신발과 관련된 일, 특히 신발끈 풀어주는 거나 신발 들어주는 것은 제자가 해서는 안되고 그 일은 너무 비천해서 오직 노예만 할 수 있다고 랍비들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크심에 비교해서 너무 작고 비천해서 그 노예만이 할 수 있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처음 두 가지 것들, 자신의 사역이 주님이 하실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각, 그래서 자신의 사역과 역할에 아무런 의미와 중요성을 부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주님의 크심을 그가 알았고 그것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이고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를 비울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도 또한 그로 인해 영화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자신도 영화롭게 되고, 쓰임받는 사명자로서 충만한 삶을 삽시다! 세례요한처럼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으로 충만함으로써 진정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1월1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2)
증언 (요 1:6-13)
가끔 인간은 참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운명’을 작곡했을 때 그는 이미 청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밀레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시력을 잃고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화가 박환씨입니다. 그는 40여년 가까이 그림을 그려온 중견 화가입니다. 2013년 큰 교통사고로 당해 머리를 크게 다쳤고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고 얼굴에는 많은 인공뼈가 박혔고,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고로 인해서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사고 이후 몇개월간 좌절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생명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희망이 없으니까 살 이유가 없잖아요. 하루라도 일찍 죽는 방법을 고민했죠. 동생 팔을 잡고 매일 걷던 집 앞 도로가 있었는데 하루는 차도에 뛰어들려고 시도했어요. 마음속으로 어머니께 다 인사하고, 하나, 둘, 셋을 속으로 세고 있었죠. ‘이때다’ 싶었을 때 동생이 “초록불이야, 오빠. 가자 이제”라고 팔을 잡아끌어 정작 시행은 못 했어요.” 한번은 그가 11층 아파트의 거실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던 것을 가족들이 발견해 붙잡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일어선 그는 연필 대신 핀과 실로 스케치하고, 손바닥 촉감으로 색을 구분해 그림을 그립니다. 작년에 세번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작 자신의 눈으로 본인의 그림을 확인하지는 못합니다. 지금 그림이 완성된 것인지, 아니면 더 칠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설 때가 많습니다. 집중했던 작품에서 마음이 떠날 때, 그림을 마무리합니다.
이분에게 가장 큰 아픔은 자신의 작품을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답답함입니다. “만약 내가 앞을 볼 수 있다면 햇빛과 사람의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제일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생각한 대로 그려놓은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잘 표현을 했는지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막말로 미칠 노릇이죠.”
전에는 세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그림을 그렸다면 시력을 잃고나서는 선의 경계가 모호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고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다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고 평가합니다. 이분의 소망은 소박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은 소망만 품고 있습니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까닭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나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예술적 호평은 바라지도 않아요. 제 그림을 보고 누군가 감동을 받고 희망을 얻는다면 그게 기쁜 일이죠.” (한겨레신문 2020.1.11.)
연초에 듣게 되는 참으로 희망의 메시지요, 박환 이분은 참으로 희망의 메신저라 할만 합니다. 이분의 기사를 보고서 드는 느낌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축복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알다’와 비슷한 의미면서도 직접 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 시간에 볼 말씀입니다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광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에게서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쓴 복음서입니다. 요한은 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봄,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목격자로서 복음서를 쓰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그가 쓴 요한일서 1장 1-2절에서도 목격자됨이 강조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만 목격자로서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공관복음, 그러니까 마태복음, 마가, 누가 역시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복음서를 기술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태 역시 자신이 직접 본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여인들의 증언에 토대를 두고 복음서가 기술되었습니다.
추측건대, 복음서의 기록은 목격자가 나이가 들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봅니다. 목격자요 증인이었던 열두 제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기 전에 사안을 판단하고 분별하기 위해서 증인을 불러 증언을 듣죠. 보통 이때 증언은 목격자의 증언일 가능성이 높죠. 목격자가 증인이 되어서 증언을 하고 그 증언에 대해서 판사가 판단을 내려서 사태의 진실에 접근해가죠.
요한복음에도 증인이 여럿 나옵니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이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고서 증언하는 일곱 증인이 나옵니다. 첫 번째 증인은 세례요한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 증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소개됩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언함에 있어서 자신이 위로부터 내려온 자로서 하늘의 진리를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직접 본 것을 증언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자신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증인은 수가성에서 만난 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요 4: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과 여러 대화를 나누고서 최종 결론은 이분은 구원자 메시야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서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죠. 네 번째 증인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요 5:31-32절입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37절에서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다섯 번째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나 표적이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요 5: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그리고 여섯 번째 성경 특히 구약성경도 예수님을 예언하고 증거합니다. 요 5: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증인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렸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요 12:17절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일곱 증인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대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펼쳐지던 당대에 그들이 해야 할 증언을 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당대의 증인뿐 아니라 앞으로 교회 역사에 걸쳐서 두고두고 예수님을 증언할 증인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증인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과 제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2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보혜사 성령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생애 당대에 예수님이 하셨던 증언을 다시 증언해줍니다. 제자들 곧 두고 두고 교회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언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 자신의 증언과 예수님을 증언했던 일곱 증인들의 증언을 다시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이 됨으로 말미암아 일곱 증인의 증언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리차드 보컴 저, <예수와 그 목격자들> 참고)
설교도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는 못했을 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가지고서 다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예수님이 참되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 당대의 일곱 증인의 증언을 조명하실 때에 이들의 증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게 믿음만한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로고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증인이신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공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할 때 심지어 어떻게 말해야할지 인간적으로 준비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11-12절입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주려고 할 때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증인이 되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증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소개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리고 7a절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무엇을 증언합니까? 누구를 증거합니까? 7b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여기서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누구입니까? 생명의 빛이죠. 지난 시간에 보았던 말씀,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의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이요 곧 영생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던져진 빛이었죠. 생명의 빛입니다. 바로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7c절,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예수님을 증언했던 이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반복적으로 “내 뒤에 오시는 이”(15절, 27절)라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합니다. 자신은 빛이 아니라 참 빛을 증언하기 위해서 예수님보다 먼저 보냄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부르심을 받아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 일곱 증인들의 증언의 목적은 바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이들의 증언을 수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만 있던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지게 하려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관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시는 유일하신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원자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십니다. 오직 그 이름을 힘입어야만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셔서 이러한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셨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이유인즉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까봐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요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거절을 받았던 것입니다. 9-11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닌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어지는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부모의 열정적 사랑이나 결정과 의지로 자녀가 출생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출생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출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계획 가운데서의 새로운 출생입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남 곧 중생을 가리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확신은 얼마나 든든하고 큰 확신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입을 열어 증언하고 빛된 자녀의 삶으로서 증언할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이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뿌듯한 자기 정체성입니까? 복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명자라는 확신을 지니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복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맞이하고 환영하고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면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 안에만 있던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하신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과 ‘자녀’를 세심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시고 우리는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복된 말씀을 증거하므로 예수님의 참된 증인으로 인정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1월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1)
삶의 의미 (요 1:1-5)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이해하기가 참 쉽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고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면서 빵(떡), 물, 빛과 어두움,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포도주와 같은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하기 때문인데, 그냥 읽어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은 문체가 간결하고 이야기가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은 분들에게 요한복음을 읽으시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신앙을 갖게 되는 분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더욱 깊어지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묘사가 생생하고 뚜렷해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은 평생토록 연구해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깊이가 있고 의미가 고갈되지 않는 샘과 같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가 풍성해지고 골똘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읽고 있는 본문의 표면보다 더 깊은 심층을 탐사하도록 자극합니다. (리차드 보컴의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참고)
2020년 한 해 동안 주일예배 때 요한복음을 읽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18절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입니다.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전개할 복음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서문에 나오는 이미지와 개념들이 앞으로 본문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뤄질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셨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당대 스토아 철학에서 꽤 유명한 개념이고 의미가 상당히 다양하게 포괄적입니다. 우주의 내적 질서나 원리 혹은 법칙, 그리고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 내면의 이성, 이성을 드러내주는 말과 언어, 말이 담고 있는 의미 등 다양한 뜻을 지닌 단어가 ‘로고스’입니다. 상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용어입니다.
모든 성경이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아마 가장 좋은 번역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잘 선택된 번역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창세기 1장을 반향하고 있기 때문에 잘된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가 창조하셨지만 실제로 창조를 실행한 창조의 중보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인과 실행자로서 ‘말씀’과 ‘지혜’, 그리고 그분의 ‘영’을 제시합니다.
태초에 창조를 실행했던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래서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곧 로고스가 있었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구분되는 말씀이신 아들과 또한 영이십니다.
실제로 창조를 실행한 분은 ‘말씀’이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버지의 계획과 의도대로 말씀이신 아들이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말씀 없이 이루어진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의 근원이신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창조세계에 메아리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엿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없어도 창조세계에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일반계시라고 부릅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성경 말씀 곧 특별계시와 구분되는 누구라도 자연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일반계시입니다.
공자가 말년에 자신이 죽게 될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했습니다. 제자인 자공에게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고 말했습니다. 뜻밖의 말을 듣고 자공이 여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이어받아 전하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러고서 공자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병세는 점점 나빠졌고, 7일 후에 공자는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왈가왈부합니다. 공자가 유언을 남겼느냐, 아니면 유언을 남기지 않았느냐. 이걸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공자가 남긴 유언은 침묵 유언이었습니다. 그러면 공자는 침묵으로써 대체 무슨 유언을 남긴 걸까요? 공자의 유언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공자의 침묵’이라고 말합니다. 공자는 단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를 되뇌였습니다. 공자가 침묵할 때 누가 말을 했습니까. 하늘이 말을 하고 있었고 온 우주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가 울었을 것이고 비가 왔다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 바람도 불었을 것입니다. 밤에는 어김없이 달이 뜨고, 별이 반짝였고 아침에는 태양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의 유언은 ‘침묵 너머’의 ‘우주의 소리’였습니다. 공자가 침묵할 때 한시도 쉬지 않고 쏟아진 ‘우주의 소리’가 바로 공자의 유언이었습니다. (중앙일보 백성호기자의 현문우답 2019.11.24)
성경으로 표현하면 태초에 우주를 생성시킨 말씀이었고 지금도 우주에 메아리치고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주는 생성되었고 우주는 지탱되고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계신,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 그러나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보자요 창조의 실행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17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창조의 목표와 목적 또한 그리스도임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조명하고 있다면 여기 바울서신에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독생자’는 유일하신 아들,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각별한 관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에 반해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는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장자를 뜻합니다. 맏아들인 셈이죠.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버지와의 배타적이고 유일무이한 각별한 관계로서 영원하신 아들 독생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그리고 많은 형제 자매들의 맏형으로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거느리시는 예수님의 인성을 각각 강조합니다. 한 인격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로서 독생자로 표현되었고, 예수님과 만물의 관계,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모든 창조물에 대해서 처음 태어난 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형제로서 예수님과의 사귐과 교제속에서 수직적인 차원인 아버지와의 연합과 사귐과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이십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나라 참고)
마태, 마가, 누가 등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주목하고 그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조망하고 묵상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로고스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원래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들과 이 생명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참된 생명을 지닌 로고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죽음을 죽으시고서 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로고스 안에 있던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이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예수를 믿고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 생명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빛으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처한, 죽음 앞에 서있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 생명을 빛으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생명을 보존하고 지탱시키려는 것입니다. 생명에의 충동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없을 때는 돈이 있어야 좀 편리하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으니까 돈을 벌려고 합니다만, 평생 쓸 돈을 갖고 있는 재벌이라도 계속 돈을 추구하고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는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지탱시키려는 충동의 다름아닙니다. 생명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인간은 생명을 욕망합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인데, 욕망의 근원에는 생명에의 충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행을 통해서 억제하려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살려는 충동을 억누르고 삶과 죽음이 일반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는 것이 곧 고행이요 현생에서 업보가 해결되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요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사멸하고 존재를 멸절시키는 것이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스님 중에서 선을 수행하는 선승으로서 최고의 명망을 지니고 수행자로 살아가시는 봉암사의 적명 스님이 실족사하신 것입니다. 봉암사라는 절은 평소 때 일반 신도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일년에 한 번 ‘부처님 오신 날’만 개방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수행하는 스님들의 참선을 위한 사찰입니다. 여기에 적명스님이 계셨는데 등산하다가 실족사하신 것입니다. 올해 80세이십니다. 이분이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이 죽도록 힘들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그렇게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업장(業障, 우리가 지은 업으로 인한 장애) 때문에 결국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이렇게 해보라며 처방전도 내놓았습니다. “상대가 지독한 악인이라 해도 소중한 인연으로 여겨보라. 따뜻한 말 한마디부터 해보라. 내가 착해지면 그도 착해진다.”
이분의 다비식 때 장례위원장을 맡은 한 스님은 영결사에서 대중을 향해 이렇게 물음을 던졌습니다. “부처님과 조사도 이와 같이 가셨고, 범부와 성인도 이와 같이 가셨으며 오늘 적명 스님도 이와 같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올 때도 온 바가 없고, 갈 때도 간 바가 없다고 하니 금일 적명스님께서는 지금 목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것이죠. 삶과 죽음, 둘의 본질을 관통하면 오고 간 바가 없어집니다. 그냥 그 자리일 뿐인 거죠. (중앙일보 백성의 현문우답 2019.12.29.)
불교는 짙은 허무주의 색채를 띱니다. 그래서 불교는 대중에게는 현세 기복주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 그 생명의 빛을 받아서 하나님에게만 있던 영원한 생명을 함께하자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을 주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오지 않고 예전에 삶의 충동대로 생명을 붙들려는 생명의 충동대로 그냥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둠인지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영 멀어져서 오히려 생명을 얻지 못하는 길인지도 알지 못한채 어둠속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살이의 일상에서 생명에의 충동으로써 생명을 얻기 위해 욕망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결국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빛을 붙잡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발생하는 어둠이죠. 생명의 빛을 수용하지 못하는 어둠입니다. 어둠속에 살면서도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착각속에서 생명에의 충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쏟고있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한 문장이 삶의 비극적인 현실을 여실히 진단해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 죽음을 이긴 부활생명이 오직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이 생명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모든 형제 자매의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에게서만 이 생명의 빛이 있는데, 그 길로 나오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시키려는 잘못된 방향의 생명에의 충동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인생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빛을 비춰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60장 19-20절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영원한 빛,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우리에게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도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생명이라면 삶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일까요? 진정한 의미는 영생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온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 가치를 자신의 활동으로 사람들의 인정으로 그리고 자신의 기여와 업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의와 의미를 그런 식으로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바로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어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생명을 받았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면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요 진정한 생명의 충동이 바로 자리잡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살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광명을 얻은 것이죠. “광명을 얻었네!” 영원한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한 가지 더 인생의 의미는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여기에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하는 생명이 아니라 잘못된 충동으로 생명을 소진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얻게 된 영생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참된 생명이신 예수님의 빛이 더욱 선명하게 여러분들에게 비춰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더욱 굳게 연합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고 이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요 삶의 층만한 의미임을 깨닫고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29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기억과 망각 (사 43:14-21)
2019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뭐든지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입니다. 이제 한해를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그리고 다가오는 2020년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하고 교훈으로 간직해야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참 원론적인 이야기입니다만 실천이 어렵죠.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한 해의 묵은 것은 털어버리고 또 간직하고 가지고 갈 것은 2020년까지 가지고 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은 일종의 종말의 하나님께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서 결산하게 될 그 날과 상응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나중에 역사의 종말, 우주의 종말, 최후의 심판과 상응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 후에야 신천신지 새하늘과 새 땅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진입할 수 있겠죠.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 죄를 인정하고 또 털어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가야 될 것은 가지고 붙잡고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예배시간에 한해를 마무리하는 이 때에 우리에게도 필요한 지혜라고 여겨집니다. 그럼 어떻게 그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던 일을 기억하기를 강조합니다.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과 기념이 강조가 됩니다. 과거의 하나님이 하셨던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곱씹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어떠한 분임을 알고서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미래와 앞으로 내가 경험해야 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 것을 예측하고 한번 기대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을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3장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주신 분으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리고서 과거의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출애굽 사건을 회상시켜주십니다. 오늘 본문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사 43: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사 43: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일을 지금 상기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 때 바다 한복판에서 길을 내고 마른 땅처럼 건너가게 하셨던 하나님의 과거의 구원 역사를 회상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을 기억해보라는 것은 교훈을 삼으라는 것이겠죠. 과거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압제받는 자들에게서 구출해주셨다,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주셨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신 그 하나님을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어려웠던 시기도 있었을 거예요. 고난의 시절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난 자체를 기억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을 기억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거예요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기의 순간에 어려움에서부터 우리를 건져주신 이 구원을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출애굽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우리를 구원해 주신 기적을 베푸셔서 어려움에서 건져주신 출애굽 사건조차 잊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이어지는 18절을 보십시오.
(사 43: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출애굽 사건이 굉장한 구원 사건이었고 엄청난 기적을 베푸신 사건이었어도 그것을 기억하지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하나님이 나에게 행하셨던 놀라운 기적이고 위기에서 건져주신 출애굽인데 그것을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일까요?
왜 그렇습니까? 이어지는 19절을 보십시오.
(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께서 왜 출애굽이라는 기적과 같은 놀라운 어려움을 극복해 낸 구원사건조차도 기억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하나님께서 이제 앞으로 행하실 일은 이전에 했던 일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고,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들의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역사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에 출애굽 사건조차 이것을 기억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전 역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더 엄청나고도 새로운 일을 시행할 것이기 때문에 이전 경험과 이전 역사를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행하실 일은 과거 출애굽 사건 때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가게 한 것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방식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을 이제는 홍해를 건널 때처럼 물을 갈라서 바다를 길로 만들어 건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의 포로민들을 이스라엘로 돌이킬 때에 광야에다가 목마른 광야에다가 길 없는 광야에다가 길을 만들고 사막에다가 물을 마실 수 없는 사막에다가 강을 내어서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에 했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창조요 새로운 역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포로민들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돌이킬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는 것은 광야에 길을 내는 것이고, 사막에다가 강을 내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역사로 가능케 될 것이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을 하나님의 백성들, 참 소망없고 낙심에 사로잡히고 포로 시간이 언제 끝날까 사로잡혀 있는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귀환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돌이키게 할 뿐만 아니라 메마른 광야를 지나올지라도 목마르지 않도록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백성이 될 것입니다. 자 이어지는 21절을 보십시오. 20절을 먼저 보고 21절까지 보겠습니다.
(사 43: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강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향 땅으로 돌이키실 터인데 그 광야 사막과 같은 곳, 그래서 목마를 수밖에 없고 물이 없는 그곳에 강을 내서 마시게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새로운 백성으로 창조하시겠다는 겁니다. 이건 전혀 새로운 반전이요 예기치 못한 절망속에 소망이요 하나님이 행하실 새 창조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전에 하나님이 행하셨던 놀라운 일이지만 출애굽 사건조차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2019년을 생각해볼 때에 참 어려움도 많았고 고비도 많았고 헤쳐나가야될 도전도 만만치 않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어요.
그것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새로운 2020년은 2019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예측하는 2020년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창조의 역사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새 창조 역사를 기대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새창조 역사는 말 그대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전의 경험과 누적된 어떤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를 때로는 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 발목 잡혀 있지 말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때로는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나서 새롭게 미래로 나아가야 될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올 한해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베푸셨지만 그래서 감사할 것도 많지만 과거에 받았던 은혜를 기반으로 해서 2020년을 예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해왔고 성장해왔기 때문에 2020년도 이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예측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래의 우리에게 부어주실 더 큰 은혜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미리 예단하고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르겐 몰트만이란 신학자의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분이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을 통해서 세계적인 신학적인 반열에 올랐는데요. 이 책에서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미래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미래라는 것은 과거의 상태나 현재 상태에서 이렇게 해서 누적이 돼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에서 즉 바깥에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미래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 향해서 주신 약속이 새로운 가능성을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이지 과거가 이렇게 돼서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아가니까 내일이 이렇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서 성장해서, 그리고서 새 하늘과 새 땅에 진입하라고 우리를 불러주셨고 우리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새로운 세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이제 약속으로 우리에게 주셨어요. 그래서 여태까지 2019년까지 신앙생활해왔던 패턴을 가지고서 또 그것 가지고서 2020년을 예측하고 그것을 기반해서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새로운 일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의 예상과 예측과 달리 우리를 놀래키는 새로운 영의 역사로 새 창조를 이루실 수 있는 분을 믿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잊어야할 것은 잊어야 합니다. 잊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이 새 창조 역사에 합류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가올 2020년이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를 전혀 새롭게 경험하게 될 한 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잊어버려야 할 것을 어떻게 잊어버릴까, 또 간직하고 가지고 가야될 것을 어떻게 가지고 갈까,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컴퓨터가 성능이 업그레이드 되려면 용량은 똑같은데 어떤 컴퓨터가 더 속도가 빠르려면 메모리가 비어 있어야 되죠. 하드디스크의 빈 공간이 많아야 속도가 향상됩니다. 바탕화면 파일을 엄청나게 깔아놓으면 속도가 절반으로 줄어들어요. 비워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억을 지워내야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겁니다. 뇌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억력이 좋은 게 참 좋은 것입니다만 세세한 것까지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기억하면 병입니다. 병이 되요. 우리 뇌는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학습을 많이 하고 많은 것을 기억하도록 뇌가 기억 창고가 이렇게 발달해 갑니다만 이제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제는 용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을 기억하려면 옛 것을 지워버리고 빈공간이 되어야 새로운 정보를 우리가 입력할 수 있는 겁니다. 근데 잊지는 않고 계속 기억만 쌓아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기억력이 너무 좋아서. 5년 전에 무엇을 했는지 이걸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해 내는 사람이 수백만명 중에 몇 명 있다고 합니다. 그런 게 좋은 것 같지만 이게 정신적 장애로 나타납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나 우울증으로 나타나기 쉽습니다.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지우지 못해서 생겨나는 정신질환이에요. 그래서 잊어버리는 것도 복입니다. 우리가 올 한해 살아오면서 정말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었을 거예요. 잊어버리고 싶어도 늘 표면 위로 의식위로 떠오르는 것들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만 뇌라는 것도 망각을 할 줄 알아야 능률이 높아지고 컴퓨터도 비어있어야 속도가 향상되고 우리의 뇌도 때로는 잊어 버려야 새로운 정보도 들어올 수 있고 그리고 정신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느 때는 참 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때가 있어요. 치매도 아닌데 잘 잊어버리는 망각을 많이 하게 되는 때라면 그것은 그만큼 지금 내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망각을 여유 있게 받아들이라고 이렇게 전문가들은 권면을 합니다. 과거를 기억하면서 고통이 더 배가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행복해질 수 있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이 불필요한 것들을 잊어버리려면 기억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고통만 가져다주는 것을 잊어버리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임희택이라는 심리학자가 망각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망각의 즐거움이라는 책에서 3가지를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잊어버리는 것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어요. 올 한해 실수 한 번도 안한 사람 없을 것입니다. 후회가 되는 일도 많이 했을 거예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동물 중에서 오직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곱씹고 되씹고 마음속에 다시 끌어 올려서 수천 번이나 되는 대가를 치른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입니다. 기억력 때문에 생각이 떠올라서 괴로워하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입니다. 머릿속에 기억이라는 쓰레기통을 막 뒤져서 수시로 그걸 끄집어냅니다. 과거의 안타까운 고통스러운 장면들을 실수와 미련과 후회가 가득한 장면들 자꾸 끄집어냅니다. 그러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스트레스 받죠. 고통을 당합니다. 그래서 망각이라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은 불필요한 스트레스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도록 해주는 하나의 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잊어버리는 것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두 번째는 모든 스트레스는 우리의 기억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마치 물건처럼 다룰 때가 많아요. 생각을 물건처럼 소유하려고 합니다. 어떤 생각이든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생각을 계속해요. 그리고 특별히 완벽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사소한 것까지 디테일, 아주 세세한 것까지 생각을 해서 뭔가 완벽을 추구하는데 이는 자기학대입니다. 고통스러운 자기 학대예요. 많은 생각들이 쌓아둔 물건처럼, 가끔은 버려야되는데 집안의 물건이 계속 쌓이면 이게 처리 불능 쓰레기가 되듯이 생각들도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부패하고 독설을 내뿜는 악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스트레스가 우리의 기억과 생각에서 나옵니다.
자 마지막 세 번째,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냐, 어떻게 하면 망각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고 방법이 뭐냐면 몰입과 집중입니다. 몰입은 망각과 기억 사이의 어찌보면 중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잡다한 생각으로부터 탈출해서 꼭 필요한 것만 집중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몰입과 집중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망각의 즐거움, 망각이 참 유용하고 그리고 진짜 잘 망각하려면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면 불필요한 것들은 잊어버릴 수 있다, 이게 이 책의 주장이에요.
자 그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또 새로운 2020년을 내다보면서 우리가 무엇에 집중해야 될까 무엇에 몰입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온갖 좋은 것들의 근원이 되시고 빛들의 아버지시고 온갖 좋은 선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과 관심을 집중하고 몰입할 때에 잊어버릴 건 잊어버릴 수 있고 하나님께 집중할 때 상처도 치유될 수 있고 과거의 아픔이 내 발목을 잡지 않는 새로운 미래로 우리가 비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테라는 중세문학의 대가가 쓴 신곡이라는 책, 너무나 유명하죠.이 책을 보면 참 상상력이 천재적이다 이렇게 느껴지는데요. 내세에 우리 인간이 죽어서 가는 내세에서의 여러 영역을 누리는 순례자의 기록을 이 책에서 썼어요. 처음에는 지옥을 통과하고 그 다음에는 연옥을 통과합니다. 지옥에서 사람들은 고통을 받죠. 어떤 고통을 받냐면 자신이 저지르는 악을 떠올리게 하고 악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왜 여기서 고통 받는 이유를 알게 하는 고통을 받습니다. 그렇게 고통당합니다. 그 다음에는 연옥입니다 연옥에서는 기억을 해요 자신의 악행을 자신에게 안 좋았던 추억들 막 기억합니다. 근데 그 기억은 정화되기 위해서 연옥에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옥과 연옥을 통과하고 나면 이 땅의 지상 정원 에덴동산과 같은 지상의 어떤 순진한 낙원에 이릅니다. 그 지상 정원 그 낙원을 지나야 천상 낙원으로 향할 수가 있어요. 그 지상의 정원 에덴동산과 같은 정원에는 2개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레테의 강이고 하나는 에우노에의 강입니다. 레테의 강은 망각의 강이요 에우노에의 강은 기억의 강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상에 있는 에덴동산과 같은 정원을 통과해야 천상낙원으로 갈수 있는데 그 지상에 정원에 흐르는 강물이 두 개가 있어요. 그것이 망각의 강이요 기억의 강입니다. 천상을 향해 가려면 잊어버릴 것은 잊어버리고 기억해야 될 것은 기억해야 천상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죠.
레테의 강 망각의 강은 맛이 씁쓸합니다. 에우노에의 강물은 달콤합니다. 그래서 망각의 강에 들어가서 몸을 씻고 그 쓴 물을 마십니다. 그리고서 에우노에의 달콤한 물에 몸을 씻고 물을 마십니다. 상징적인 의미가 있죠. 천상으로 향하는 지상의 여정 속에서 망각에 해야 될 것은 자신의 죄, 어두웠던 추억들, 아픔들, 상처들, 이런 것들은 망각의 물에다 다 씻고 그리고 다 털어버리고 이제는 좋은 추억들 그리고 내가 했던 선행들 좋은 기억들을 머금어서 간직해서 천상으로 여정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마침내 천상의 낙원에 이르렀습니다. 천상의 낙원에 이르면 그 세계를 규정하는 분위기는 빛이예요. 하나님의 빛이 여기 천상에까지 올라온 자들을 끌어당깁니다. 인력처럼 꽉 끌어당겨요. 다른 것을 못 보도록 완전히 시선이 그 하나님의 빛에 압도가 당할 정도로, 하나님의 빛이 온통 복된 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깁니다. 그 빛 안에 모든 선이 다 들어가 있어서 과거의 지상에서 내가 해냈던 선행, 또 내가 상상했던 좋은 추억 모든 선이 그 빛 안에 담겨있습니다. 복된 자들은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의 얼굴에서 나오는 빛에 완전히 몰입이 되고 그렇게 집중하고 바라봄으로 인해서 모든 좋은 것들을 떠올리고 선을 기억하게 됩니다. 무한한 선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그 얼굴의 빛에 압도당해서 다른 모든 것들은 잊어버리게 됩니다. 모든 죄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내가 당했던 과거의 상처와 아픔과 악행들도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오직 그 빛 안에서는 선만, 좋은 것들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 속에서, 신앙 속에서 하나님 바라보며 천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망각하기와 기억하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의 필수 단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빛의 세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레테의 강과 에우노에의 강을 건너야 하고 물을 마시고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서 완전한 사랑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면 영혼들은 우리의 복된 자들은 하나님의 선한 빛에 압도당하고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무한한 선과 사랑에 푹 빠져서 무한한 선이신 그 분 외에 다른 것을 보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고 그렇게 다른 것을 바라볼 능력도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한 선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우리의 시선이 고정이 되고 몰입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온갖 안좋은 추억들과 아픔과 상처와 죄악들과 악행들은 기억나지도 않고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선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완전한 사랑의 세계속에서 우리의 영혼은 죄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 몰입하고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선이시며 그분 안에서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그 빛이 지상에서 우리가 경험헀던 모든 선과 상상했던 모든 좋은 것들을 보존하고 기억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악행에 대해서 내가 떠올리기 싫었고 아픔과 상처로서 누군가 나에게 악행을 저질렀던 잘못된 추억이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고 생각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단테의 신곡은 그 점을 강조합니다.
어거스틴이라는 신학자도 <신국론>에서 내세에 복락을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땅에서 악행을 당했던 과거의 안 좋은 기억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악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고 모든 선으로 충만해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고 모든 범행과 처벌은 다 잊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게 천성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오늘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2020년을 맞이하는 것은 일종의 종말과 상응하는 면이 있다고 설교 서두에 말했습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악이 다 생각날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에게 저질렀던 잘못도 기억날 것이고 상대방이 나에게 부당하게 했던 것이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생각날 것이에요.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털어버리고 최후의 심판을 거치고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통해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전혀 새로운 미래를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새 창조를 기대하면서 그 미래로 도약할 수 있으려면 그러려면 먼저는 2019년에 우리 안에 남아있는 상처들, 아픔들, 깨어진 관계들 이런 것들이 다 해결되고 털어버리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2020년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도 유용한 지침이 되는게 뭡니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 내 관심사가 붙들리고 하나님을 한번 몰두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고 몰입하면 하나님의 그 빛이 천상에서 보이는 완전하게 우리를 사로잡는 빛보다는 약하겠지만 그래도 그 빛의 인도함을 받아서 2019년에 어두웠던 기억의 터널을 벗어날 수가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2019년에 우리가 어두운 기억의 터널을 지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어두운 터널 한복판에 서 있을수도 있습니다만 이곳에서도 빛되신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고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면 전혀 새로운 미래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그런 약속의 말씀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 43: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거예요. 과거에서 현실이 나고 현재에서 미래가 나오는 이런 역사의 흐름이 아니라 미래로부터 돌출해들어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이 열리면 새로운 미래가 창조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무거운 것들을 털어버리고 새로운 한 해를 전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역사하실 새 창조의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서 조우해서 우리가 걸어가기 위해서는 이제는 버려야 될 것 버리고 잊어버려야할 것 잊어버리고 회복해야할 것 회복하고 그렇게 새로운 미래로 걸어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묵은 것을 털어버리는 것 아픔과 상처들을 하나님께 집중해서 잊어버리는 것도 중요하고 또 한 가지 우리가 실천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털어버리고 가기 위해서 용서입니다. 용서를 실천해야할 것입니다. 칼빈이 용서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용서란 분노와 미움, 복수심을 마음에서 기꺼이 몰아내는 일일뿐 아니라 불의한 일에 대한 기억을 기꺼이 망각의 영역으로 추방하는 일이기도 하다” 용서란 것은 복수심 같은 것, 내 안에 미움 같은 것을 내모는 것일 뿐만 아니라 기꺼이 기억을 망각의 영역으로 잊어버리는 것이죠. 추방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용서는 망각과 잊어버리는 것과 관계가 깊어요. 잊어버릴 줄 아는 것도 복이라는 게 그런 이유입니다
칼 라너라는 가톨릭 신학자는 1964년 바티칸 공의회에서 카톨릭 신학을 세우는데 가장 역할을 한 사람인데요. 망각의 능력,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망각하는 분이고 우리 또한 용서받음으로 인해 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망각하시는 분이에요 하나님 자신이 때로는 망각하십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예레미야서를 읽고 있는데요. 예레미야에게 주신 새 언약의 약속이 너무나 새로운 언약이에요. 그 약속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어떤 약속이 놀랍냐면
(렘 31: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이 얼마나 새롭냐면 우리의 악행과 죄를 하나님이 잊어버리겠다 기억하시지 않겠다 망각하겠다. 그러니까 용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 망각의 은사를 구해야합니다. 하나님 내가 너무 가슴 아프고 상처받고 분노가 일어나고 때론 내가 용서못할 것 같은 그것도 잊어버리게 하옵소서. 하나님도 잊어 버리신다니까 나도 좀 잊어버리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다행히 제가 좀 기억력이 안 좋아요. 다 잊어버려요.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서 죄 짓고서 이렇게 간구했죠.
(시 51: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마지막 주간 오늘 2019년 마지막 주일에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어요. 올 한해 좋은 일도 많고 안 좋은 일도 많았고 잘했던 일도, 못했던 일도 많지만 하나님 정리하고 가기를 원합니다. 내 모든 죄악을 지워주소서. 하나님께서 잊어버리로 약속했으니까 흔쾌히 지워주실 것입니다.
(시 25:7) 여호와여 내 젊은 시절의 죄와 허물을 기억하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주께서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으로 하옵소서
한해동안 지은 죄, 젊은 날에 지었던 죄들은 다 기억하지 마시고 나를 다만 이렇게 기억해주십시오.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따라서만 나를 좀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올 한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2020년은 2019년을 기반으로 예측할 수 있는 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새로운 창조의 역사로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고 그것은 마치 광야에 길을 내는 것 같고 사막에 강을 내는 것 같은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예언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같이 한번 읽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역사는 너무나 놀라워서 이전에 것들은 생각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2020년에 우리 가정에 우리 일터에 나의 삶에 하실 역사가 너무나 새로운 역사이기 때문에 이전에 아픔과 상처와 슬픔과 모든 인간관계의 모든 잘못된 것들이 생각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생각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새 창조의 역사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고 그렇게 용기를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새로운 2020년을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2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선택 (엡 1:3-6)
우리가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의 첫 문장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입니다. “내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는 고백입니다. 이 신앙은 어디에서 옵니까?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의거한 고백입니다.
우주만물이 존재하게 된 것도, 그리고 우리에 있게 된 것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죠. 시편 33편 9절에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말씀하시니까’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나님처럼 인격적 존재로 지음받아서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고귀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영원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고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바빙크라는 선교학자가 자신의 저서 <인생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인간이 고귀한 존재인 이유에 대해서 세가지로 말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도덕적인 존재인 까닭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과 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선과 악을 구별하고 그 차이를 아는 존재입니다.
너무나 유명한 C.S 루이스도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옳고 그름이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증거를 두 가지 가지고 있는데 창조세계인 우주 자체가 창조자를 가리키고, 그리고 인간 내부의 도덕률이 또한 창조자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둘째, 우리 인간에게는 배우고자 하는 선천적인 충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우리를 둘러싼 환경 가운데서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탐구하는데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늘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죠. 우리 모두는 피조세계에 관해서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궁금해하는 존재요 알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공동체를 이루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평화롭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 까닭입니다. 우리의 마음 소망은 이 세계를 뛰어넘어서 위로 올라가고자 하는 성향이 존재합니다. 이 세계의 온갖 소란함을 피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교제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이 세가지 특징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세계 위에, 모든 존재의 정점에 서게 되는 것이요 피조물 중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는 타이틀을 얻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 엡 1장 3-6절에 보면 사람이 이보다 더 고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더 큰 이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계획과 목적은 창세 전에, 즉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하나님에게 있던 계획과 목적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기 힘든 진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수도 없이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왔다가 가는데, 태어났다가 죽는데, 결국 하나님의 의도, 이 세계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최근에 한 시대 바둑계를 평정했던 이세돌 기사의 은퇴 경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고향 신안에서 마지막 대국을 펼쳤습니다. 대국 기사는 인공지능 AI 한돌이라는 컴퓨터였습니다. 알파고에게 유일하게 한 번 이겨본 기사지만, 아마 이제 알파고가 더 강해져서 이 세상에서 알파고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이세돌 9단은 마지막 대국을 인공지능 컴퓨터와 벌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공지능이 고수가 되었습니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고수인 사람과 바둑을 두거나 장기를 둘 때 우리가 돌을 놓고 장기를 두는 것이지만 고수는 몇 수 앞을 내다보면서 자신이 세워둔 계획대로 게임을 진행하죠. 그 틀안에서 우리가 장기를 두는 것입니다. 먹고 먹히고 잡고 잡히기도 하지만 고수는 그 모든 것을 이미 내다보고 예상한 수죠. 고수는 이미 모든 가능성을 다 검토했고 결국 자신의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바둑게임이 계속되더라도 고수가 세워놓은 계획 안에서만 고수가 원한 것만을 할 수 있게 됨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내가 가장 좋은 수를 세워서 바둑알을 놓아도 그것은 내 승리가 아니라 그분의 승리를 앞당기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앞서 말한 바빙크라는 선교학자는 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체스 게임, 우리식으로 말하면 장기 게임이라고 말합니다. 가장 고수인 하나님이 두는 장기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만물이 성립이 되고 현상이 이루어지고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선택했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십자가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이미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그 배후에 공중의 권세잡은 악의 세력이 사람들을 충동질했고 선동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방에서 공격하고 붙잡아서 결국에는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창조주가 그의 피조물에 의해서 패배를 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또한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기획된 것이었습니다. 엄청난 패배 같았지만 이또한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의 권세가 박살났고,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이 권능으로 도래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는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심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오셨습니다. 십자가가 성육신의 동기입니다. 신학자들은 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를 더 깊이 숙고해왔습니다. 죄의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 즉 인류 역사의 우발적인 사건에 대해서 응급처방으로써, 일이 일어난 사후에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몰히 연구하면서 대처한 것이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가 인간이 되셨는가? 왜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땅에 오셨는가?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창조주의 사랑 때문임을 말하였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우주만물을 조성하셨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사랑 받는 대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사랑의 만족에 안주하시지 않으시고 사람을 창조하시는 모험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그 모험이란 이미 창조 시부터 내재되어 있던 것인데 사람이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한 까닭입니다. 거절의 두려움은 인격이 경험하는 최고의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 역시 그 고통에 자신을 기꺼이 노출시킨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에 의해서 압살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외적 세계를 창조하시고 특별히 사람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랑 받는 대상을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사랑 받는 대상을 향해서 나아가게 돼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셨던 바 그것이 곧 성육신입니다. 성육신하셔서 인간과 끊을 수 없고 분리될 수 없는 굳은 결속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면, 하나님이 그 넘치는 사랑 때문에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은 인간에게로 오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을 자신에게 끌어오시려고 인간에게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온 것만이 아니라 아예 인간이 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시기 위해서 아예 인간이 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인간이 된 아들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십니다. 인간이 된 아들로 인해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자기를 넘어서는 자기 초월이요 상대방을 향하여 나아가는 용기요 자신을 열어젖히는 개방성이요 상대방과의 연합과 연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에서 비롯된 성육신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탄절에 생각해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에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는 말은 간단히 말해서 하늘로부터 오는 이 놀라운 축복은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복이 우리에게 임했기 때문입니다. 이 복은 하늘로부터 곧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삶속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이어지는 4절을 보십시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은 창세 전에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우리가 이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그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셨고, 영원토록 영적인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세우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는, 여러분은 이러한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 포섭돼 있습니다. 내가 존재하게 된 것이 우리 부모가 나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창세 전부터 이루어진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 안에서 내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존재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믿기가 힘들고 받아들이기가 힘든 진리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온 세계의 창조주가 별 것 아닌 ‘나’라는 한 사람에게 그토록 관심을 기울시고, 그와 같은 중요성을 부여하시고, 심지어 세상을 창조하시기도 전에 나를 염두에 두셨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만약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에서, 혹은 우리의 바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참으로 주제넘은 것이겠죠.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너는 나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생각해왔던 존재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출 33장)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에게도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알려졌고 우리의 얼굴이 알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무한히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창세 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심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시켜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이 선택은 창세 전부터 계획된 것으로 예정된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의지를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심은 사랑 받는 대상이 되는 우리에게서 자발적인 사랑의 응답을 받고자 하심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놀라운 은혜를 거저주신 이유는 이 은혜의 놀라움을 사람들로 알게 하고 그 은혜를 영원토록 찬송하게 하려는 이유 때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탄절을 앞둔 오늘 주일에 기쁨으로 모여서 우리의 마음을 다해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마음으로 이러한 찬양을 부르면서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배우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만물이 기원하는, 창조주 하나님임을 알게 됩니다. 창조를 하신 동기가 그분의 본성상 흘러넘치는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창조와 구원과 이 모든 하나님의 계획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신 계획이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복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그러나 인간 경험으로는 믿기 힘든 진리의 말씀입니다.
최근에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에 개그우먼 조혜련씨 간증이 계속 실리고 있습니다. 이분의 간증을 통해서 큰 도전을 받고 은혜를 받습니다. 이분이 신앙을 갖게 된 후 오히려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게 됐다고 모든 문제가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방송 활동이 잘 나가던 때보다 더 어려워졌습니다. 섭외가 잘 안들어는 거예요. 방송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습니다. 그때 조혜련씨는 하나님께 투정을 부리며 떼를 쓰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그리스도인도 방송인으로 잘 나가야 하나님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저는 아직 감도 죽지 않았고 쌩쌩합니다. 같이 활동했던 동료들처럼 저도 더 많은 일을 하게 해 주세요.’
그 때 하나님이 다음과 같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방송 잘하는 사람은 정말 많아. 근데 나를 진심으로 알고 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네가 나에 관해 연구하고 그것을 전하는 일 좀 하면 안 되겠니?’ ‘제가 어떻게 그걸 해요? 저는 하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요!’ 이때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성경 바람잡이!’ ‘네? 뭔 바람잡이요?’ ‘성경 바람잡이! 너는 어렸을 때부터 시장에서 다른 사람보다 쑥갓도 잘 팔고, 피에로처럼 웃기고 뭐든지 바람을 잘 잡잖아! 나의 말인 성경을 읽지 않고 자기가 상상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바람 좀 잡아줘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마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상상한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너무 모르니까 성경 바람잡이가 되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성경의 바람잡이가 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결단했더니 2017년부터 교회에서 간증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작은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까지 다니며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부정했던 이분이 간증을 하며 “성경을 열심히 읽자”는 메시지를 전하자 가는 곳마다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간증했던 많은 교회에서 전 교인이 성경 읽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만난 83세 할머니는 “이 나이 되도록 성경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했어. 내가 죽기 전까지 조혜련씨보다 더 성경을 많이 읽다 죽으려오. 이런 마음 갖게 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을 전혀 새롭게 만드는, 내가 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을 완전히 뒤바꾸는 혁명적 시각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인간과 성경이 말하는 우리는 너무나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되 창세 전에 선택하셔서 영원한 존재로 지으시고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랑을 나누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모든 계획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시고 실제로 그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우리는 더욱더 감사와 기쁨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올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에 이러한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1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손바닥 (사 49:14-18)
최근에 ‘현대판 장발장’ 사연이 온라인에서 화제입니다. 30대 아버지와 12세 아들이 지난 10일 오후 인천의 한 마트 식품 매장에서 우유 2팩과 사과 6개 등 소량의 식료품을 훔쳤습니다. 해본 적이 없는 ‘어설픈 절도’여서 금세 발각됐습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선처를 호소했습니다. 택시를 모는 이 아버지는 당뇨와 갑상선 질병을 앓고 있어서 6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엔 홀어머니와 7세 둘째 아들도 있었습니다. 경찰은 “기초생활 수급자로 선정돼 있었지만 네 가족이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라고 전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이었지만 우리 사회의 훈훈함을 경험하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마트 대표는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고발이 아닌 선도 차원”이라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고 쌀과 생필품도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들 부자를 훈방 조치하고, 돌려보내기 전 식당으로 데려가 따뜻한 국밥을 한 그릇씩 시켜줬습니다. 또 아버지의 일자리를 알선하고 아들에게 무료급식 카드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한 경찰은 MBC 인터뷰에서 “요즘 세상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시민이 불쑥 나타났습니다. 경찰이 데리고 간 식당에 느닷없이 들어와 하얀 봉투 하나를 내려놓고 떠났습니다. 봉투에는 현금 20만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시민은 아버지와 아들이 마트에서 선처를 구할 때 사무실 바깥에서 묵묵히 지켜봤던 인물이었습니다. 우연히 부자의 딱한 사연을 듣고는 현금을 뽑고 일부러 식당까지 따라가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아직 우리 사회가 살 만한 사회라는 것을 알려준 소식이었습니다. 성탄절을 앞둔 연말에 참으로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준 훈훈한 소식입니다. (미디어오늘 2019.12.14)
한 해가 기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 마음도 쓸쓸해지고 육신이 위축되는 분들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습니다. 전주로 돌아오고 나서 아무래도 서해 바다를 많이 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주로 동해바다를 많이 갔었는데, 서해는 참 쓸쓸합니다. 새해가 시작되면 많은 사람들이 새해와 더불어 일출보려고 동해를 가죠. 떠오르는 태양은 뭔가 희망차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의욕으로 충만하다면 지는 해는 뭔가 쓸쓸한 느낌 지울 수 없습니다. 몇 해 전에 돌아가셨던 정치인 김종필씨가 자신의 노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겠다면서 석양으로 하늘을 붉게 물들어놓겠다고 공언했습니다만, 공언에 그치고 말았죠. 소위 ‘해질무렵증후군’이 있죠. 석양이 지면 마음이 스산해지고 쓸쓸해지죠. 일몰 명소가 많은 서해바다는 그래서 어딘가 쓸쓸합니다.
한 해가 기울어지고 날씨가 추워지는 이때, 오히려 사랑이 역사할 공간이 생깁니다. 나태주 시인의 '사랑에 답함'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시입니다.
사랑에 답함
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
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
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저는 신문에서 사람을 인터뷰하는 기사를 유심히 봅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말들과 그들의 정신을 엿보고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서 즐겨 봅니다. 신문 인터뷰도 인터뷰를 진행하는 기자의 역량에 따라 어떠한 사람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최근에 이은주라는 분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이분은 일본에 유학을 갔다고 온 분이고 일본문학을 한국에 번역하는 문학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로 노인들을 돌보는 50대 여자분입니다. 최근에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경험했던 소소한 일들과 느꼈던 감정을 담은 책을 출간해서 신문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일은 어찌보면 고통과 죽음을 목격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돌봄 노동’이죠. ‘돌봄 노동’을 통해서 뭘 배우냐면 사랑을 배운다고 합니다. 돌봄의 대상이 되는 석양이 깃든 노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드리면 어김없이 그들로부터도 사랑을 돌려받는다고 합니다. 이분은 자신의 돌봄의 대상이 되는 노인분들에게 자신의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애쓴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분들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보여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로병사를 겪으며 돌보고 돌봄 받는 우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라는 기자의 물음에 대답합니다: “중요한 건 하나에요. 개별적인 존재에 대한 사랑. 그렇게 공간에 온기가 돌면 어떻게든 웃으며 살아요.” (조선일보 2019.12.14.)
역시 사람은 사랑을 주고 받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으시고 다함없으신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합니다.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기 막바지입니다. 대략 기원 전 540년 경으로 추측합니다. 538년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바벨론 포로기 막바지에 전달되기를 기대했던 예언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뭐든지 막바지가 제일 힘든 법이죠.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도무지 끝이 언제일지 모르니까 포기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는 게 우리 인생의 군상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40장부터 계속적으로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시는데 아직 끝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대만큼이나 실망이 커져가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한 번 따뜻한 사랑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재건하고 재번성시켜주시겠다고 다시 한 번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바로 전절, 이사야 49장 13절을 보십시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히브리어에서 긍휼은 ‘자궁’(히브리어로 ‘라함’)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생각하면 긍휼이란 말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이것이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신반의합니다. 도대체 언제쯤 끝날지를 모르니까 그러는 거예요. 14절에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이렇게 말한단 말예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향해 긍휼과 인애가 풍성하세요. 절대 우리를 잊어버리시지 않는데 때때로 우리는 상황 때문에 혹은 문제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오해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불신이고 무지죠.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상황이 그러니까 그럴만도 하지 생각도 됩니다만, 우리는 진리에 기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납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보다 우리의 필요를 더 잘 아시는 아버지 같은 분, 어머니 같은 분이라는 점이에요. 심지어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한), “하나님은 세상과 화목하셨다”(고후) 말씀하세요. 자녀는 자녀죠. 자녀가 아무리 잘못을 해도 기본적으로 자녀는 자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15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다 젖먹이와 같고 하나님은 젖먹이는 어미와 같다는 거예요. 자기 태 곧 자궁이죠.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때때로 잊고 살아가지만 부모는 자녀를 잊을 수 없는 법입니다.
14세기 후반 영국의 영성 작가 노리치의 율리아나는 ‘하나님의 모성’에 대해서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을 현존하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 은혜의 우리의 어머니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어머니가 고통과 죽음으로 우리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자신의 모유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귀중한 어머니 예수는 그 자신으로 우리를 먹일 수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영적인 출생 곧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의 어머니시라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하나님이 자신의 손바닥에 새기는 것(파는 것)을 가리킵니다. 무엇을 뜻하는 말씀일까요? 구약성경에 찾아보기 어려운 표현입니다만, 신명기 6장 8절에 보면 너무나 중요한 유일하신 하나님 여호와만을 전심 전력으로 사랑하라는 쉐마의 말씀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라고 말씀했는데 이를 직역하면 “네 손바닥에다 표식으로서” 묶으라고 한 명령입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팔과 손바닥에 감는 이 팔찌가 그 위에 기록된 말씀과 함께 지속적으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로 기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손목시계를 보는 것과 유사하게 말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무지개가 언약의 징표가 될 것이라고 했죠.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이제는 더 이상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보호해주시고 오래 참으실 것을 상기하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의 역할과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게 만들고 생각하게 만드는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들,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확실히 그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흔했던 어떤 관습을 추측해볼 수 있게 합니다. 자신의 손이나 팔에 흔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표시로 또는 상징으로 자신들의 사랑과 열심을 보여주기 위해 상처를 내는 것이죠.
이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생각 속에 존재 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셀 수 없는 생각을 지니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변함없으신 사랑과 충성과 열심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야 할 환경인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라는 사항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사가 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을 입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들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지워지지 않는 증거를 어디서 보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에 상처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너희들이 ‘내 손바닥 위에 새겨져 있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손에 못 박은 상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손에 상처를 얻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상처는 영원까지 지니고 있을 인자의 상처입니다. 그것으로 교회의 벽들을 영원히 확실하게 보호해줍니다. 그리스도의 수난, 귀중한 십자가, 그리고 그의 손의 못자국은 우리 인생의 안전한 벽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상처는 환난 또는 핍박 중에 있는 모든 신실한 자들을 위해 확실하고 안전한 피난처이자 성소가 되어줍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부인 성 어거스틴은 “주여, 당신의 손이 나를 만들고 나를 형성했습니다. 진실로 그 손은 나를 위해 못으로 고정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손의 행사를 무시하지 마소서. 나는 당신꼐서 당신의 손의 상처를 바라보시기를 기도합니다. 보소서, 주 하나님, 당신은 당신의 손 위에 나를 새겼습니다. 그 새긴 것을 읽으시고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 19-20절, 그리고 27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일에 두려워서 은신처에 문을 꽁꽁 닫고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라고 말씀하시고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 중에서 의심 많은 도마는 없었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도마도 마침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에 도마의 마음이 녹아져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예언과 분별>, 월터 모벌리 저 참고)
못 자국이 난 그리스도의 손 위에 있는 우리의 이름들이 우리의 마음을 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곧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의 깊이는 어머니의 사랑을 능가합니다. 그 사랑이 시온을 회복시키고 재번성시켜주실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그들이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반드시 그 모든 무리를 장식처럼 몸에 차며 그것을 띠기를 신부처럼 할 것이라”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 불모지와 같은 메마른 땅에 시온에서 태어날 “자녀”로 넘쳐나게 하실 것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주민들을 ‘신부의 장식” 처럼 보게 될 것 이라고 맹세하십니다. 즉 신부의 장식은 시온 곧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이는 하나님의 용납해주심의 상징입니다.
이 세상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거기다가 많은 자녀까지 생산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워낙 파멸로 인해 황폐함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이는 네 황폐하고 적막한 곳들과 네 파멸을 당하였던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하십니다. 포로로 잡힌 자녀가 돌아올 뿐만 아니라(49:17-18) 더 많은 자녀가 그 어미 시온을 통해서 태어날 거라고(49:19-21) 주장하십니다.
이 회복이 하도 신기해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입니다. 49장 21절입니다. “그때에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아들을 낳았는고 나는 자녀를 잃고 외로워졌으며 사로잡혀 유리하였거늘 이들을 누가 양육하였는고 나는 홀로 남았거늘 이들은 어디서 생겼는고 하리라”
오늘 본문 이사야서의 문맥은 시온의 재건과 재번성을 일차적으로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오늘 우리 신약백성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못자국난 손바닥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으로써 우리를 회복시켜주시고 공동체를 새롭게 재건해주시는 동기가 되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를 위한 전적인 자기 희생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모성을 보여줍니다. 아이를 젖먹이는 어미, 자궁에서 아이를 10개월 동안 품어서 세상에 내보내는 어미, 늘 자녀를 향한 셀 수 없는 생각에 매여 있는 어미, 그래서 자녀를 결코 잊을 수 없고 자녀를 불쌍히 여길 수밖에 없는, 마치 자신의 손바닥에 새긴 자녀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르는 CCM곡 중에서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손에 나의 손을 포개고
또 주의 발에 나의 발을 포개어
나 주와 함께 죽고
또 주와 함께 살리라
영원토록 주 위해 살리라
주 위해 살리라
주 보혈 날 정결케 하고
주 보혈 날 자유케 하니
주 앞에 나 예배하는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주께 드리네
주의 손 날 위해 찢기셨고
주의 발 날 위해 박히셨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것이라
이러한 사랑으로 훈훈한 연말을 보내시며 이 사랑을 흘려보내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어미와 같은 사랑,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긴 사랑,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의 못박힌 손에 새겨진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사랑에 감격하며 이 사랑을 더욱더 이 사랑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실천하는 성탄절과 연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영생 (딛 2:11-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장래 우리 앞에 펼쳐질 내세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망과 영광이 얼마나 큰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말할 때 대전제는 구원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극적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 간증을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예전에 소개한 바 있던 조혜련씨 간증이 국민일보에 역경의 열매라는 코너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조혜련씨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된 계기가 참 재밌습니다.
조혜련씨가 재혼을 했는데 남편이 두 살 어린 연하입니다. 두 살 어린 남편이 늘 반말을 했습니다. 남편에게 서로 “존댓말을 쓰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조건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평생 존댓말을 할 테니 교회 한 번만 가자!” 주일 교회에 한 번만 함께 가주면 평생 존댓말을 해준다는 것이었으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번만’에 강조점을 두고서 교회에 따라갔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혹시나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잠시 후 예배가 시작되는 종이 울렸습니다.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불렀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을 듣는 순간 그만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눈물과 함께 자신의 지난 생애가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 나는 정말 쓸데없는 자다. 쓸데없는 가스나로 태어나서 엄마가 죽으라고 엎어놨고, 대학에 합격해서 돈 버리는 짓을 했다며 부지깽이로 얻어맞았고, 열심히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했지만 결국은 오해를 받으며 욕만 듣던 나, 그런 쓸데없는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찬양대의 찬송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라는 가사가 또 꽂혔습니다. ‘내 형편은 나를 낳은 엄마도 형제들도 내 아이들도 모른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불도저처럼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는 누구란 말인가?’
색다른 느낌을 갖게 된 첫 번째 교회 예배 후 다음주에 다시 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날은 담임목사님께 인사도 드렸습니다. 남편이 목사님께 내가 누구인지 소개했을 때 “조혜련 성도님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참 많이 분주하게 사신 것 같네요. 이제 그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면 좋을 것 같네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돈과 명예 때문이었을까,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알지도 못 한 채 늘 분주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분주함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떻게 내려놓는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 그 주님이신 건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조혜련씨의 간증은 오후 예배 때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조혜련씨가 지금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너무나 열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분의 간증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 쓸데 없는 자’를 왜 구원하여 주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다 해야 하는 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과 더불어 우리의 역할도 말씀합니다. 디도서 1장 1-3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신 자들에게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데, 이것들은 전도 곧 복음 전도와 말씀 전파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부르심이지만 사람을 통해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내서 구원 받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로서 가르쳐주시고 양육해주십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여기서 “양육하시되”는 단순 교육만이 아니라 징계도 포함합니다. 훈련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을 훈육시켜주시는데 회초리를 들고 교육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매를 맞기도 합니다. 엄한 아버지처럼 회초리를 대기도 하십니다.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양육하십니까? 부정적으로는, 경건하지 않은 것,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십니다. 단순히 악한 것들, 세상적인 것들을 피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싫어서 내다버리게 하십니다. 악을 피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죠. 적극적으로 갖다 버리라고 명하십니다.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과 물리치고 버리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버린다는 말에는 미움과 혐오가 들어가 있는 말입니다. 죄악에 대해서, 경건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혐오해서 다 갖다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은 무엇입니까? 요한1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에 말씀하고 있듯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 이 세상에 속한 이 세상 정욕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양육하시는 걸까요? 긍정적으로는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훈련시켜주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신중함’, 다른 말로 하면 ‘근신함’입니다. 예전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근신함’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스스로 자기 관리를 잘하여 절제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self-controlled) 자기 관리가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의로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른 삶,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건함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 중심에 “하나님 있음”입니다. 구체적으로 경건이란 야고보서 1장 26-27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것이 경건이요 하나님 있는 인생의 삶의 모습이요 언어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함양해야 할 것은 함양하려는데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경건하지 않은 것들, 이 세상 정욕을 혐오해서 물리치고 갖다 버려야 하고, 가져야 할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중, 근신, 절제, 자기 관리, 자기 통제입니다. 가져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로움 바른 삶 윤리적 도덕적인 삶이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실 뿐 아니라 이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내세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도 알 도리가 없으니까 다만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말씀할 뿐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마라나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기대요 우리의 기다림입니다. 여기서 ‘복스러운 소망’은 ‘영생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디도서에는 ‘영생의 소망’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아까 읽었던 디도서 1장 2절에 보면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의 소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히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또 디도서 3장 6-7절에 보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요 작정이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을 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영생을 소유한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 영생하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유대인에게, 혹은 구약성경에서 영생은 시간적 지속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의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는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자연적 존재 곧 육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첫 창조 때 영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도 영생은 두 번째 창조, 곧 새 창조로만 주어질 약속이었습니다. 새 창조로만 다가올 세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창조로만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곧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 첫 사람 아담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아담이 품고 있었던, 그리고 우리도 품고 있는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타락하기 이전에 죄가 없는 상태였던 첫 사람 아담과 영광스럽게 부활한 상태에 있는 마지막 아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부패한 상태에 있을 때와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죄가 없는 상태와 영광스런 부활의 상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뿐 아니라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습니까?어떤 사명 감당에 신실하지 못했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 창조 명령이라 불리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고, 사명 감당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영생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누리는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3장 22-23a,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서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내쫓았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입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복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땅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값없이 마시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생명나무로 시작해서 생명나무로 끝납니다. 생명나무 곧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첫 사람 아담에 의해서 좌절되는 듯해 보였지만 하나님은 둘째 아담, 마지막 사람, 종말론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 타락하기 이전이라도 그것은 자연적 생명에 불과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게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더 영광스러운 상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약시대에 이르러 생각해보니까 아담이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함으로써 들어가야 했던 영생의 상태는 오늘 우리에게는 결국 부활의 몸을 입고 들어가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라도 아담 역시 신실했다면 썩지 아니할 영원한 몸의 상태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라도 아담은 자동적으로 영생을 보장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생의 소망을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이 복스런 소망,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영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을 살리심으로써 주실 부활생명이요 썩지 아니하는 몸을 입혀주심입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스러운 소망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너무나 분주하고 그것은 너무 멀리 있어서 당장의 발등의 불만이 관심사가 아닌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영생의 소망,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죠.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형벌, 죄값을 받으셨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죄의 노예상태였던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입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주심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이땅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한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이땅만 바라보지 말고 참된 소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땅에서 때로는 훈련하시고 때로는 징계하시고 때로는 교육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다듬어서 복스러운 소망, 부활생명의 상태를 얻고 영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품고 계셨던 계획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작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값없이 오직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를 하나님이 불러주셨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값없이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덧없는 이 세상에 속한 가치들에 사로잡혀 지내다 인생을 탕진하기보다는 이 세상 정욕은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훈련받고 다듬어지고 교육 받아서 경건하고 의롭게 이땅을 살아가고, 특별히 영생의 소망,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그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혀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이땅에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2월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그리스도의 보혈 (계 5:6-10)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생애로 기억되지 죽음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소위 종교의 창시자라는 사람들 역시 추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들의 가르침이나 숭고한 생애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다르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나 그분의 가르침은 분명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역시 주목할만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기억되고 전해졌습니다.
꼭 종교와 무관하더라도 죽음으로써 기억되는 분들도 역사에 더러 있습니다. 가령 이수현열사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떤 훌륭한 일을 그의 생애속에서 수행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이분이 자신을 바친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억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분이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을 때 뛰어들어 취객의 목숨을 구했으나 자신은 열차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27세의 한국인 청년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에 대해서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모리총리가 한국의 김대중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귀국의 청년이 일본인을 구하고자 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잃은 것을, 어제 다보스에서 귀국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본국민, 그리고 각하를 비롯한 모든 한국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서 돌아가신 이수현 군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수현 군의 부모님께도 진심으로 조의 및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하고, 위로하여 드렸습니다. 이수현군의 용기 있는 숭고한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귀국의 우정의 가교가 된 이수현 군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그 용기를 기리고, 유가족 및 한국 국민 여러분께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https://blog.naver.com/dgbtbilions7530/221451247261)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특히나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훌륭한 위인들의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되기는 해도 죽음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주목할만한 기적 행사와 가르침보다도 오히려 그분의 십자가 희생적 죽음으로써 더 많은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고 계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더욱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했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알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해주는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도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일주일에 과도한 집중을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전체 분량의 1/3을, 누가복음은 1/4을, 요한복음은 무려 절반을 할애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한 주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존스토트 목사 저 참고)
이어령선생이 기독교신앙을 갖기 전에 미국의 한 조그만 교회에 가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한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아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듯합니다. 투구를 쓴 로마 병사가 망치를 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못이 박히며 뼈가 부서지는 생생한 장면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머리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꾹 눌러써 피가 흐르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데 로마 병사들의 채찍질로 인해서 살점이 툭툭 떨어져나갑니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못을 박는데 못에 박히면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이분이 이 영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나 살인자도 고통스럽게 죽는 장면을 보고서 통쾌하다는 생각보다는 저질렀던 죄는 잊혀지고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일진대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갖기도 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어령선생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십자가형을 옛날 우리나라 사형법이었던 효수형과 비교합니다. 효수형은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의 목을 베어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저잣거리에 전시하는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처형이 바로 죄인에게 엄청난 고통뿐 아니라 수치를 주는 효수형과 비교할만한 것입니다. 그래도 효수형은 죽여놓고 수치를 주는 것이고 죽을 때는 고통없이 즉시 죽게 하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형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흘려 말려죽이는 고통스런 죽음이고 맨몸으로 못을 박아 십자가형틀에 달아서 죽을 때까지 수치스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이 고안한 사형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효수형 때 사용했던 장대와 같은 게 로마시대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채택했다는데 의아한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이어령 저 참고)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어떤 사람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를 버린 희생적 죽음이었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힐 정도로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5장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본 환상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한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비쳐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천당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서계셨던 것입니다. 어린양께서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7절입니다.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께 들려져있던 두루마리를 어린양 예수께서 취하셨습니다. 둘둘만린 두루마리는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해져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5장 1절에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으로 봉하였더라”고 묘사된 그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 다니엘서가 예언하고 있는 바로 종말의 비밀에 관해 봉인된 두루마리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를 비밀스럽게 담고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가 이제 예수님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획과 작정이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실행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아울러 가리킵니다. 창조의 목적에 관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세상의 심판에 관한 두루마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이러한 일들이 실행되게 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적합한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창조세계에 대하여 주권과 통치를 다시 행사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도래한 것입니다.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어린양에 의해서 해제되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두루마리를 취하자 주위에 있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경배드리며 찬송합니다.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관한 계획, 구원에 관한 계획, 세상 심판에 관한 계획 등을 담고 있는 종말에 관하 비밀스런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그 인봉을 떼어 공개하기에 적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분이 적격이냐면 예수님께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그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이요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 때문에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그 인봉을 떼어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과 구원의 경륜과 하나님의 온갖 작정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당연히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의 말처럼 용서가 하나님이 하시는 전문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내세울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요? 어린양의 피가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하나님에게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 심각하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떤 기독교 작가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왜 그렇습니까? 죄는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단순한 위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은 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본 결과 용서는 거의 불가능한 과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난제, 곧 딜레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죄에 대해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충돌, 이로 인한 난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에서 친히 어린양이 흘리신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이, 어린양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리를 취하셔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며 우리 대신 흘리신 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앞의 책 참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은 예수님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희생을 원하십니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축복을 가지고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 쏟아져내렸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 옥한흠목사님은 설교 <예수를 따라가려면>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문제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무겁게 가질 필요가 없음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려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숨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날마다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됩니다. “고난과 가난과 질병 속에서, 핍박과 실패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와 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설교에서 러시아의 유명 작가인 솔제니친의 예화를 소개합니다.
반체제 인사였던 솔제니친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형을 선고 받고 수년에 걸쳐 고생을 했으며 나중에는 서방 세계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중노동을 했습니다. 결국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으며 심한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중노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삽으로 모세를 퍼 엎는 일을 하던 그는 너무 지친 나머지 이렇게 말하고 삽을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못하겠소. 이제는 끝이오. 삽자를 놓는 즉시 감시하는 사람이 와서 나를 사정없이 때리겠지만, 나는 아예 그 매를 맞고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오.” 그리고 매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옆에서 일하던 크리스천 죄수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삽으로 모래 위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는 솔제니친이 십자가를 보는 순간 싹 지우고 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솔제니친은 십자가를 보고 나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만큼 힘이 솟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삽을 들어 모래를 퍼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솔제니친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여러 달에 걸친 중노동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예화를 들고서 옥한흠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처럼 대단합니다. 십자가를 보기만 해도 힘을 얻는데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는 얼마나 클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 선배들이 이미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 결국 하나님이 능력과 기쁨과 위로를 주셔서 십자가를 거뜬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의 맛을 모르는 것이요. 아직도 어린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힘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 희생과 예수님의 흘리신 고귀한 보혈의 피를 기억하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해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힘과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1월24일 동산교회 총동원주일 설교 (주일 낮)
천국의 사냥개 (눅 15:1-7)
여러분이 잘 아시는 개그우먼 조혜련씨의 간증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장손이어서 대를 이을 아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딸이었습니다. 첫째를 딸로 낳았을 때 친할머니는 “그래 첫째 딸은 재산이라 카더라”면서 마음의 위로로 삼으셨습니다. 또 둘째와 셋째도 딸이었습니다. 넷째마저도 딸을 낳자 엄마의 실망은 물론이고 할머니의 역정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나면 할머니는 문을 빼꼼히 열고 “아들이가? 딸이가?”라며 성별 확인을 하시고는 딸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와서 밭매라!”고 하셨습니다. 일거리를 준비해 아들을 낳지 못한 대가를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다섯 번째 아이를 가졌을 때 엄마는 그동안 한 번도 꾸지 못한 태몽을 꿨습니다. 꿈속에 커다란 호랑이가 먼 곳에서부터 돌진해 엄마 뱃속으로 훅하고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용맹스러운 호랑이가 꿈속에 나타났으니 누가 아들이라고 믿지 않겠는가.
매일 다르게 불러오는 배를 어루만지며 엄마는 아이에게 이렇게 주입했습니다.
“니는 아들이다. 아들이어야 한데이. 나를 살려낼 아들이다.”
호랑이 태몽이었지만 결과는 딸! 조혜련씨가 다섯째 딸로 태어난 것입니다.
“이를 우짤끼고. 배신자 가스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엄마한테 들은 말은 배신자였습니다.
그날 밤 엄마는 옆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던 아기를 거꾸로 엎어놓은 채 이불을 뒤집어씌웠습니다. ‘꼴도 보기 싫은 가스나! 그냥 확 죽어버리라.’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된, 목도 못 가누는 아이를 엎어놓는다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겠죠. 그만큼 실망감이 컸습니다. 한참 뒤에 엄마가 이불을 들쳐보니 땀을 잔뜩 흘리면서 목을 돌려서 숨을 편하게 쉬면서 아주 잘 자고 있더랍니다. 갓난 아기가 엎어놓았는데도 고개를 돌려서 숨을 쉬고 생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질긴 목숨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 일곱 번째도 딸을 낳은 엄마는 여덟 번째 만에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조혜련씨의 어머니가 남묘호렌게쿄(남녀호랑개교)의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자연스레 조혜련씨는 어미니를 따라 이 종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열심히 믿었냐면 전에 다른 종교생활을 할 때엔 하루에 10시간씩 100일동안 주문을 외며 기도한 적도 있었을 정도입니다. 수많은 십자가들을 보며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던 조혜련씨가 44년간 하나님을 부정하다 지난 2015년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개그우먼 이성미집사가 캐나다에 있을 때 조혜련이 김영철과 함께 방문을 했는데 욕도 잘하던 이성미 집사가 얼굴에 광채가 나서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고 하자 사실 요즘 새벽기도회에 나가고 있다고 하며 너를 위해서도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조혜련은 언니 고맙지만 내 이름은 빼줘라고 했을 정도로 거부감이 컸습니다. 돌아와서 이성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각자 종교를 존중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성미 집사가 한국에 와서도 조혜련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며 전도했는데 너무 극성으로 전도하니까 전화번호를 삭제해버리고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이분이 예수를 믿게 된데는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재혼하게 된 이후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조혜련에게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읽어주었을 때 비로소 신앙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학교 다닐 때는 진화론을 믿었고 다른 종교에 심취했을 때는 윤회설을 믿었는데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이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고백하자 순간 자기의 힘겨웠던 과거가 스쳐지나가며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자기를 내팽개치듯 키웠기에 자신은 항상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죽을 힘을 다해 쓸모있는 인간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것이 자기를 너무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시장에나가 어머니가 재배한 쑥갓을 내다팔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습니다. 시장에서도 매장이 없이 노점상처럼 팔다보니 단속반이 나와서 뒤엎고 회수해갈 때도 당돌하게 가져가지 말라고 사정사정해서 돌려받기도 했던 억척이었습니다. 이렇게 자라다보니 평소에도 인정 받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힘든 인생을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자기의 모든 짐과 죄의 짐을 대신 지게 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조혜련은 자유로워졌습니다. 전에는 힘겨울 때 술에 의지했는데 이제 주님을 의지하며 이보다 든든한 백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느끼며 마음의 평안을 찾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성경이 너무 달콤해서 성경을 잘 알기 위해서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기도제목은 32명이나 되는 친족이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죽고 예수만 사는 기독교인 되는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그녀의 어머니 최복순 씨도 하나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분의 변화는 조혜련씨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된 어머니는 딸에게서 배워서 성경 읽기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었을 때는 하루 10시간 기도를 올려도 복잡했던 마음이 성경을 읽고 찬송을 하고 설교를 들을 때는 편안하고 걱정도 없다”고 어머니는 말합니다. 허리 건강 때문에 성경 읽기가 편하지만은 않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에 벌써 예수 믿은 지 1년 만에 벌써 성경 8독째를 끝냈다고 하니 그 어머니의 그딸이라 할 만합니다. 어머니는 성경 읽기에서 나아가 성경 암송에도 도전했습니다. CTS기독교TV가 주최한 제4회 부산국제성경암송대회에 최고령으로 참가하게 된 겁니다.
조혜련씨의 간증을 들으니 이분이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배후에서 놀라운 역사를 계획하시고 이루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조혜련씨의 구원을 위해서 7년간 도고기도한 개그우먼 이성미씨가 있었고, 조혜련씨가 소속된 연예기획사 사장이 독실한 신자인데 이분도 14년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번만 교회 출석하자고 권한 지금의 남편, 이들의 합작품으로 하나님은 조혜련을 불러주셨던 것입니다. 조혜련씨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추적에 결국 조혜련씨가 백기투항한 것이죠.
몇 해 전에 돌아가신 존 스토트 목사님은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수학자요 철학자요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석학 버드란트 러셀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낸 적이 있는데 이 책에 대한 응답으로 스토트 목사님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라는 책을 쓴 것입니다. 이분이 그리스도가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자신의 부모나 스승의 영향도 아니고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결단 때문도 아니고, 바로 ‘천국의 사냥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이 되어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고자 도망할 때조차도 끈질기게 자신을 추적하고 쫓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천국의 사냥개’로 지칭했는데, 조금은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존 스토트목사님 자신도 우려하면서도, 영국 스코틀랜드 북부에서 서식하는 콜리라는 사냥개는 목장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는 양치기 개인데, 너무나 좋은 사냥개라는 점에서 그냥 그 표현을 쓰기로 합니다.
원래 ‘천국의 사냥개’라는 표현은 한 시인의 시의 제목입니다.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에도 그리고 낮에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수많은 세월 동안을.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속 미로 같은 길로.
그리고 슬픔 속에서도
나는 숨었네, 겉으로는 연이어 웃으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오르다가도
두려움의 골짜기 거대한 음울 속으로
곤두박칠쳐 버렸네.
나를 따라오는, 추적해오는 그 힘찬 발소리로부터.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는 걸음걸이,
일부러 속도를 내며, 장엄한 긴박감으로,
두드린다-그리고 한 목소리가 두드린다, 발소리보다 더 긴박하게-
‘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모든 것이 너를 배반한다’
...
가여워라, 너는 알지 못하는도다,
네가 얼마나 사랑받을 만하지 못한 존재인지!
너처럼 비천한 자를 사랑할 이 누가 있으랴,
나, 오직 나 외에는?
...
내가 너에게서 가져간 모든 것은
너를 해롭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품에서 찾게 하려는 것이라...
일어나라, 내 손을 잡아라, 그리고 내게로 오라!
‘천국의 사냥개’라는 시를 통해서 시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끈질긴 추적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애송하는 시편 23편은 어떻게 시작됩니까?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고 마지막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로 마무리됩니다. 이를 좀더 쉽게 번역해보면,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더 쉽게 번역해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추적하고, 붙어다니며 괴롭게 하고, 내 걸음 하나하나를 미행하리니” 참으로 끈질긴 추적, 목적이 분명하고, 자애롭지만 무자비한 추적입니다. 이 열심에 굴복당하지 않을 영혼은 없습니다. 바로 이 열심히 여러분을 오늘 이 자리에 불러내셨고 오늘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손가락질 받던 세리와 죄인들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의 교제를 종종 나누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중동지방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다는 것은 “평화와 신뢰와 형제애와 용서를 제안하는 것”이라고 한 신학자는 말했습니다.(요하킴 예레미아스) “한 마디로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것”의 의미까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자신의 사명과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이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하나님께로부터 전달하라고 받은 말씀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9장 10절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내시려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죄인과 세리와 식탁 교제를 함께 한다는 비난을 받고서 예수님은 한 이야기로써 응답하십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는데, 자신에게 있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다 방치하기까지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끈질기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추적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그 한 양이 잃어버린 양이기 때문입니다. 양 무리에서 이탈하여 위태한 상태에 처한 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되찾았을 때의 감격과 기쁨이 크기 때문입니다. 본문 5-6절을 보십시오.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어깨에 메고 온다는 것은 잃어버린 양이 부상을 당했거나 잘 먹지 못해서 주린 상태였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양의 무리에서 이탈해서 목자의 품을 떠난 양의 상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분주하게 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인생은 결국 생명이 소진되는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죽을 위기에 처한 양을 되찾게 되어서 얼마나 기쁜지 돌아와서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벌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잃어버린 양을 되찾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있던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회개하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회개하여 창조주께로 돌아오면 하늘 아버지가 너무나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라면 하나님은 두 팔 벌려 받아들여주십니다.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죄인들에게 이보다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열심과 추적을 받고 있는 우리가 이 사랑을 외면한다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죄를 짓는 것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의 끈질긴 사랑과 추적의 결과로써 이 자리에 오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랑에 굴복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이전에 달려왔던 모든 것들이 허망하게만 느껴지는 허탈감, 그리고 이렇게 살아가면 안되겠다는 자책감, 그리고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아무것도 아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격,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진정 열매 맺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새로운 마음, 오늘 이러한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넘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굴복하시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다시금 영접하고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1월10일 성례주일 설교 (주일 낮)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 19:1-10)
성찬식은 성만찬 혹은 주의 만찬으로도 불립니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주의 만찬’(Lord’s supper)이라고 불립니다. ‘주님이 베풀어주셔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식사’라는 의미입니다. 이땅에서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과 식탁을 함께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식탁의 자리로 초대하셨는데 그중에는 주로 죄인과 세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난과 비판을 자주 받았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식사에 대해서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막 2:16) 예수님께서 일부러 죄인들의 집에 찾아가서 식탁을 함께 하기도 했고 또 예수님께서 친히 죄인들을 초대하셔서 식사를 함께 나누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식탁의 특징이었고 ‘주의 만찬’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핵심 사역 중의 하나는 함께 식사하기였습니다. 죄인들을 초청하여서 환대하시고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심이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함께한 공동체를 일컬어 ‘밥상 공동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올해 표어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계승하는 동산교회’라고 했는데 여러 주된 사역이 있을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초대되지 못하는 연약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초청하고 환대하면서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식탁의 교제를 나누는 것도 주된 사역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밥상 공동체’로 의도하셨던 것은 하나님나라의 임함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예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이와 같다고 실제로 보여준 것입니다. 손가락질 받던 죄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은혜의 왕국을 건설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 예수님 주위로 몰려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받아들여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친히 마련한 성대한 식사로 묘사합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가심으로써 오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식사를 제공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성대한 혼인 잔치로 묘사합니다. 하나님나라를 혼인 잔치로 비유한 내용이 마태복음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 2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나라 곧 천국이 혼인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치에 손님들을 초대합니다. 왕은 손님들을 위해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었음을 분명히 알리면서 초대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초대에 응하지 않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혼인 잔치에 오지 않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또 어떤 사람은 사업장으로 가고 또 어떤 사람은 초대장을 배포하는 왕의 종을 오히려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초대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포기하고 길에 나가 만나는 대로 아무나 데려오게 합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손님들로 가득하게 됩니다. 연회장에 손님들로 가득차서 어느 정도 목적을 달성한 임금은 연회장을 둘러보다가 제대로 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말합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1-14) 초대에 응해서 단순히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초대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함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혼인 잔치로 비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예수님 안에서 주시는 구원의 복과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풍성한 식탁은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영적인 복과 은혜를 보여줍니다. 구원과 생명, 기쁨과 평화의 풍성함을 잔치 비유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의 만찬’은 궁극적으로는 주님과 함께함, 우리의 가장 큰 복이 주님을 뵙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교제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더 큰 잔치, 더 큰 풍성한 식탁이 배설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 나오는 소위 ‘어린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왜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부릅니까? 예수님을 어린양이라고 증거한 사람이 누굽니까? 세례요한이죠. 요한복음 1장 29절에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세상 죄를 없이하고자 죄를 짊어지신 어린양이라고 말하므로 예수님의 사역이 죄를 없애기 위한 것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어린양은 구약성경에서 유월절에 먹는 음식이기도 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집트(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구원해주신 해방절입니다. 출애굽 전날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을 죽여서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면 그 피를 보고 애굽 땅을 치고 장자를 칠 때 그 집을 넘어가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넘어간다는 의미에서 유월절이 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어린양을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되면 온 가족이 모여서 어린양을 불에 구워 먹습니다. 유월절 저녁식사의 단골 메뉴가 어린양 고기입니다. 유월절 만찬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은 유대 명절 유월절 만찬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이었습니다. 이때가 유월절이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을 육신의 가족이 아니라 영의 가족인 제자들과 함께 나누셨고, 이때 성찬식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이때의 주의 만찬은 유월절 만찬이었고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이었습니다. 유월절 만찬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어린양 고기였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 전날 밤에 함께 한 유월절 만찬에는 어린양 고기가 없었습니다. 왜 없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유월절 마다 유대인들이 출애굽 해방을 기념하면서 먹었던 어린양 고기는 진정한 유월절 양,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거기서 흘린 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벧전 1:19)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 중에 성찬식을 제정하십니다. 떡을 떼어주면서 “이것이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시고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바로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시므로 성찬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성찬식을 제정하면서 하셨던 말씀 중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이 있는데요, 마가복음 14장 25절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미래에 정해진 때가 오기 전까지는 의도적으로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될 때요 이땅에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자신의 백성에게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상속받게 할 날입니다. 그때가 돼서야 예수님은 포도의 열매를 다시 마실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은 성대한 메시야의 연회에 관한 언급이요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에 나오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언급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찬식을 제정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다시 오셔서 더 풍성한 잔치로 영적으로 배불리 먹게 해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19장 6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통치하시면 달라도 한참 달라지겠죠. 하나님나라의 완성입니다. 온전한 통치의 수립입니다. 7절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어린양의 혼인 잔치의 주인공은 어린양과 그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는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들입니다. 신부로서 준비된 영광스런 교회입니다. 우리의 준비는 우리가 입게 된 예복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이 예복을 친히 입혀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어진 옷을 입고서 그 은혜 아래서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때 입어야 할 예복입니다. 9절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청함을 받은 자들’만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죠. 그래서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식은 이런 점에서 소망을 다시 되새기고 소망 가운데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결단하는 예식입니다. 어떠한 소망입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실 더 풍성한 축복과 영광스러움과 기쁨의 교제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식사로서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을 친히 뵙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풍성한 식탁과 교제를 소망하면서 이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주님을 향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의 심령에 불일 듯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로서 친밀한 교제를 나눌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서 신부로서 합당한 예복을 갖추기 위해서 이땅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주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 곧 그리스도로 옷입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9년 11월3일 설교 (주일 낮)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리 스트로벨이라는 분은 현재 미국에서 기독교의 역사성과 진리됨을 설득력 있게 증거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현재 목사로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법조 전문기자였습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서 시카고 트리뷴이라는 신문사에 입사해서 기자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법조 분야의 탐사보도를 해서 상을 받았던 신문기자였습니다. 이분이 언론인답게 신앙에 있어서 지독한 회의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습니다. 이분의 표현에 의하면 “술에 절고 자아에 도취되어 부도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분의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었고, 믿고 나서 아내의 성품과 가치관이 이분이 보기에도 좋은 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좋은 쪽으로 변화된 것은 알겠는데,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죄악된 심성 때문인지 예전의 아내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탐사전문기자답게 이분은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를 논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기자의 호기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랄 수 있는 부활의 역사성을 무너뜨리고자 증거를 찾아나섰습니다. 이분이 로스쿨에서 배운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요. 증거나 증언을 평가해서 그게 확실한지 아니면 성립이 되지 않는지를 분간하는 것이 이분의 전공이었습니다. 2년 가까이 탐색한 끝에 예수님의 부활이나 기적에 대한 법률가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기적은 대개 신빙성이나 설득력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누적되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강력하게 입증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분도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이분은 자신의 체험에 입각해서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예수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인지를 조사해가는 과정으로 기술된 책입니다. 신약성경 사본과 신약신학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성경 기록의 역사성에 회의적인 전문가도 찾아다니면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라 결론과 판결을 내리는 과정으로 기술된 책입니다. 예수에 관한 사안에서 이분이 내린 결론은 복음서의 보도는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창조는 역사다>라는 책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쟁점을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인터뷰해서 창조에 관한 케이스에 대한 결론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쓴 세 번째 케이스는 <기적>에 관한 사안입니다. 과연 성경에서 보도하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기적이 과연 가능한지를 탐사한 책입니다. 이전의 책들처럼 이번에도 이분은 기적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그 점을 힘써 강조하고 설파하는 전문가에서부터,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기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와, 그리고 기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신학자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적 케이스에 관해서 이분이 내린 판결은 오늘날에도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성경이 보도하는 기적이 믿을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이분이 인터뷰한 분 중에서 인디애나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캔디 브라운이라는 분은 하버드대학교에서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고 석박사를 받은 분으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연구합니다. 이분은 질병 치유에 미치는 다른 사람의 기도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이분에게 “기도의 효과를 조사할 때 과학이 어떻게 쓰일 수 있습니까?”를 질문했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는데, 우선 기도 전후의 진료 기록부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진단된 병명이 있었나요? 엑스레이나 혈액 검사나 기타 진단 절차를 통해 병이나 부상이 밝혀졌나요? 나중에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그리고 임상연구도 합니다. 임상 연구는 기도 후에 벌어지는 일을 측정하려고 단기간에 국한하여 진행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캔디 브라운교수는 과거 기도의 효과에 관해서 학문적으로 입증된 여러 연구 사례를 열거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수행한 연구에 관해서도 말해주었습니다. 이분은 실제로 치유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곳에 가서 연구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기적이 많이 보고되는 곳을 찾으려 했습니다. 보통 초자연 현상이나 기적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되는 곳은 주로 문맹률이 높은 지역입니다. 아무래도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언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료 해택이 빈약해서 병자들이 의지할 데가 기적밖에 없는 곳에서 기적이 자주 발생하고 보고됩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기적의 능력을 베푸시는 경우가 많음을 알고서 이분은 그런 곳을 찾으려 한 것입니다. 이분이 선택한 곳은 아프리카 남동 해안에 자리안 모잠비크였습니다.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참담한 내전을 겪은 지역이고 기독교인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나라입니다.
그곳에 가서 20년 넘게 모잠비크에서 선교사로 섬기면서 치유의 은사를 보여주었던 한 선교사 부부와 함께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이 선택한 질병은 심인성 치유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였습니다. 이 팀은 기도 직전에 여러 표준검사와 기술 장비로 청력이나 시력 수준을 측정했습니다. 기도를 받게 한 후 즉시 환자를 다시 검사했습니다. 기도는 선교사 부부가 했는데 짧으면 1분, 어떤 때는 5-10분까지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누가복음 4장 40절처럼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항상 신체 접촉을 병행하면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받은 실험 대상자는 총 24명이었습니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기도 후에 청력은 매우 의미 있는 차도가 있었고, 시력은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도를 보였습니다. 검사받은 피험자 거의 전원이 차도를 보였습니다. 아주 극적인 결과도 있었습니다. 어떤 대상자는 가청 임계치가 50데시벨도 더 떨어졌습니다. 보통 100데시벨은 근처의 오토바이나 잔디 깍는 기계의 소리고 80데시벨은 믹서기 소리고 50데시벨은 보통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고 0데시벨은 정적입니다... 시력의 의미 있는 차도는 시력 검사를 받은 집단 전체에서 고르게 측정되었습니다. 향상된 시력은 실레로 평균 열배 이상 정확해졌습니다.” 브라운 교수는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앞도 볼 수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한 노인 여성은 기도 전에는 양쪽 귀 모두 100데시벨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석을 뚫는 드릴이 돌아가도 듣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후에는 오른쪽 귀와 왼쪽 귀가 각각 75데시벨과 40데시벨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위해서 기도한 두 번째 기도 후에 검사해보니 시력도 맹인 수준에서 확연하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서던 메디컬 저널>이라는 전문 학회지에 실렸습니다. 이후에 브라운 교수는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반복 연구를 실시했고 결과는 이전 실험과 유사하게 기도의 효과를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리 스트로벨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고 신약성경이 보도하는 기적 사건이 믿을만하다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분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이분의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날마다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일반 의술로 안돼서 고쳐보려고 침술, 안마, 건강 보조식품, 대체요법 등을 써보았지만 이분의 아내를 괴롭히는 만성 근육통인 섬유근육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벌써 수십년째 이분의 아내는 쑤시고 욱신거리는 통증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 인터뷰를 수행하면서 이분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가능하고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게 되었지만 속으로 “그런데 내 아내는?”이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아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치유해달라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아직도 차도가 없습니다. ‘왜 우리 아내에게는 기적이 없을까?’
그래서 이 책에서 리 스트로벨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한 미국의 신학교 교수를 찾아갑니다. 이분 역시 아내가 몇 년 전에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은 분입니다. 이분 역시 아내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왔지만 소위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로 힘겹게 신앙을 이어가는 분이었습니다. 이분과 인터뷰를 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더랍니다: “때로 우리에게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면 ”주님, 무엇이든 주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그 일을 저도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당장은 아주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순종과 순복의 기도, 신뢰와 믿음의 기도입니다.”
캐서린 마셜이라는 분이 <기도에의 모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이분은 ‘수용’과 ‘체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용과 체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념은 ‘이게 내 상황이다. 나는 단념하고 이대로 주저앉는다’라고 말한다. 체념은 하나님 없는 우주의 흙바닥에 누워 최악의 사태에 자신을 방치한다. 수용은 ‘이게 당장 내 상황인 건 맞다. 나도 현실을 냉철히 직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아버지께서 무엇을 보내시든 내 손을 벌려 기꺼이 받아들인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수용은 결코 희망의 문을 닫지 않는다.” 또한 이분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싶습니다. 제 기분과 상관없이 제 영혼은 영원히 믿을 만한 진리를 아오니 곧 아버지께서 제 곁에 계시고, 저를 사랑하시며, 제게 가장 좋은 길을 홀로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의지의 행위로 이 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낸시 거스리라는 여성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강한 믿음의 정의란 하나님께 기적으로 고난을 없애 달라고 전심전력으로 간구한 뒤 그대로 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측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을 조종하여 내 뜻을 관철시키는 재간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복하려는 의지다.”
윌리포드라는 경건한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실 확실한 공식은 없으므로 예수께서 언제는 허락하시고 언제는 안된다고 하실지 알 수 없다. 이게 절대주권의 이면이다. 가부와 조건과 시기와 방법은 다 그분의 소관이다. 그분이 어떻게 결정하실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믿음의 근거를 특정한 기도 응답에 둘 게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에 두면 된다. 기적은 일시적이지만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은 영생 곧 진정한 삶을 가져다준다.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안된다고 하셔도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조언합니다.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면 하나님께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지만 신뢰하고 싶습니다’라고 아뢰라. 이게 소망의 출발점이다.” (<기적인가 우연인가>, 리 스트로벨 저 참고)
오늘 다니엘서 본문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이 바벨론의 신의 큰 금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지방 관리와 백성을 신상 낙성식에 강제로 참여시켜 그 앞에 참배하도록 한 내용입니다. 이때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앞에 절하고 신상을 섬기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들이 굽혀 경배하기를 거절했다고 왕에게 보고했을 때 느브갓네살왕은 당장 이들을 죽이기보다 먼저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회유라는 형식이지만 이는 배교를 종용하는 것으로서 협박이 가미되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불에 쳐넣을 거라는 협박이었습니다. 이러한 협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절)
이들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이들의 즉각적인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존귀를 받아야 하고 우리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구원 경험보다 거룩하고 인간의 목숨보다 숭고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박해를 당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이땅에서 구원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손길의 개입과 도움을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죽음 이후에까지도 계속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러한 말씀에 따라 신앙고백을 가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젊은이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건져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땅에서도 극적인 반전의 개입과 도우심을 자주 펼치십니다만, 때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기독교 역사에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이땅에서가 아니라 내세에 가서야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실 때에라도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붙들어야 합니다.
1919년 4월18일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의 제암리교회 성도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예배당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목격자이자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불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찬송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속에서 건져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김회권 저, 153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수준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역사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사람들의 순교적 신앙,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고서, 어떠한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기대하는 믿음이면서도 동시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신실하심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 아니하실라도’의 믿음이 있어서 이땅에서의 기적보다도 더 큰 구원과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