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은총의 표적을 보이소서!
오늘 주일예배는 동산교회당에서 모여서 하지 않고 가정에서 인터넷 영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서 모임을 갖지 말라는 당국의 권고를 진지하게 듣고 교회가 사회의 지탄이 되거나 민폐가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에 모이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상황이 이처럼 되었는지 망연자실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상황이 너무 위태해서 이때가 기도해야 할 때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기도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다음과 같이 10가지 기도를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기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록 모여서 기도회를 진행하지는 못해도 가정에서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 홈피 팝업 창에도 올려놓았고 교회 본당 현수막에도 부착했습니다. 10가지 기도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우리의 기도
1.보건·방역 당국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감염 확산이 멈추기를 2.전 국민의 적극적인 협조와 기본 규칙 준수로 확산세가 차단되도록 3.국민은 국가를 신뢰하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나라다운 나라로 서도록 4.방역의 최전선에서 애쓰는 실무자들에게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5.질병에 걸린 자들을 치유,회복시켜 주소서 6.회개와 각성과 깨어 있는 한국교회 되도록 7.재난적 어려움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고 치유하는 한국교회 되도록 8.교회,예배,말씀,기도 등 영적생활의 소중함을 깨우치도록 9.신천지에 미혹된 사람들이 어서 속히 나오도록 10.주여, 우리를 눈동자같이 보호하여 주소서
이상의 10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가정에서 함께 전심전력으로 기도합시다! 절실히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상황이 절박합니다. 재난적 위기요 국가적 위기요 한국교회의 위기입니다. 이번 주간에 주일에 한 번 설교를 준비하다보니 이전보다 부담이 훨씬 줄었습니다만 마음의 부담은 더욱 컸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시간의 여유가 생겨 이런 저런 책도 읽었지만 기도해야겠다는 부담이 너무 컸습니다. 홀로 목양실에서 매일 1-2시간씩 기도를 했지만 혼자 기도하는 게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혼자서는 기도를 못한다기보다 매일 새벽예배 때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는 1시간보다 홀로 1시간 기도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이 악물고 기도를 했고 우리 교역자들도 매일 한 시간씩 전임사역을 하는 부교역자 4명이 지하 기도실에 가서 오후 2시에서 6시까지 릴레이기도를 했습니다. 그만큼 위태로운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이럴진대 모일 수 없는 성도들의 고충은 얼마나 클까 생각해봅니다. 영적 생활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목회자보다 더욱 힘든 시간들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믿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전화위복 시켜주실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뜻이 계신 줄 믿습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하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의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6편 말씀은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이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많은 다윗의 시 어떤 시보다도 더욱 절박하고 다급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상황 역시 절박하기에 그리고 절박한 기도가 다급하게 요청되기에 우리의 기도제목을 삼고자 시편 86편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시인 이상이 그랬죠. “인간의 모든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고 그리고 이어서 “그 기교 때문에 더더욱 절망한다”고 말했습니다만 그의 말 앞부분은 참이고 뒷부분은 하나님 없는 인생에게는 맞는 말인 듯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인생에게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하여튼 “인간의 모든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는 말은 참으로 맞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너무나 절박해서 사람들은 이런 시도 저런 시도 다 해볼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너무 위태하고 마음이 다급하고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이 없으면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드리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군더더기 없는 진실한 기도겠죠.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보니 여느 기도처럼 응답이 조금 늦게 와도 되는, 그런 상황이 아닐 때 우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가 될까요? 1-4절의 간구를 보면 하나님의 응답을 간청하면서 그렇게 해주실 수 있도록 뭔가 근거를 마련해보고 근거를 제시하려는 다윗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브루거만이라는 구약학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1절,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처지가 딱하다는 걸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응답해주셔야 하는 이유가 자신의 처지가 가난하고 궁핍하니까 다른 힘이 없고 다른 데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처지니까 기도에 응답해달라는 겁니다. 안 그러면 헤쳐나갈 길이 없다는 호소입니다. 2절입니다.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다윗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악인들에 둘러싸여서 공격을 당하는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 저는 경건하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저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저를 지켜주세요. 저를 건져주세요.’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입니까? 하나님앞에서 자기의를 내세우는 겁니까? 자기 자랑입니까? 그렇기보다는 절박한 간청입니다. 절박하게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겁니다. 건져달라는 겁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저의 경건은 헛것으로 간주될 터이요 제가 의지하는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사람들이 떠들어댈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나몰라라 하시면 그러면 정말로 하나님 살아계시지 않는 겁니다, 이 정도 뉘앙스로 읽힙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위기가 아니라 평소 때라면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당치도 않은 자기자랑이요,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과 거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죠. 그러나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기도를 요구합니다. 다급한 기도는 이것 저것 갖다 대는 겁니다. 응답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비상한 상황입니다. 뭐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재빠른 응답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을 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이런 아픔과 이런 고통과 이런 긴장과 이런 위기 가운데 계속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전대미문의 이런 사태 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고고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도, 어려운 때니까 기도로 극복하기 위해서 모여서 기도할 수도 없는, 그래서 힘을 쓰려고 해도 힘을 쓸 수가 없는, 이사야서에서 말한 대로 해산하려는 여인인데 해산하려고 하나 해산할 힘이 없는 비참한 상황에서 한국교회 우리 성도들, 우리 목회자들, 우리 모두 큰 것이 아니더라도 알량한 것이라도 우리의 경건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잘 것 없는 경건이라도 이거라도 봐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은 아니지만 알량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나와서 이 믿음 보아서라도 기도에 응답해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신자라면 하나님 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됐잖아요? 새신자 때는 뭔 기도를 해도 잘 들어주신다면서요. 이렇게라도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모이지 못하고 언제까지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언제까지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절박한 상황에서 드리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3절입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본 시편의 핵심 단어가 나옵니다. “은혜”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는 겁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니 은혜에 호소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그분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해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은혜도 지금 당장 주어지지 않으면 다 죽습니다, 이런 절박감이 있습니다. 왜냐면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으니까요.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져올 수는 없고 하나님의 일방적 호의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은혜지만 상황이 너무 다급하니까 지금 당장 은혜를 베풀어주시지 않으면 안되니까 근거를 대고 있는 겁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어야 할 이유를 대는 겁니다: “내가 종일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은혜로우신 하나님에게서 은혜가 임할 것을 믿지만 바로 지금 은혜가 임하도록 종일 기도한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루 하루가 힘겹고 은혜의 골든타임이 지나가면, 즉 자신이 죽고 나서 임하는 은혜라면 부활의 은총이기는 하겠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종일 다급하게 어서 속히 임하도록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며 시작한 기도는 마지막에도 은혜를 구하며 마칩니다. 본문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어디서 많이 본듯한 내용이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죠. 그러나 언약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 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진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멸하고자 했지만 모세의 간절한 중재의 기도로 인해서 하나님의 화가 누그러지고 다시 언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자신에게 보여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보고서 살 자가 없으니 영광이 지나가게만 해주겠다, 얼굴이 아니라 여호와의 형상의 뒤만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죠. 모세에게 지나가시면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계시하면서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 34장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모세가 보았던 여호와의 영광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계시해준 결과였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한 마디로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자비롭고 은혜롭고 화를 절제하시고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을 용서해주시는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십니다.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은 언약관계를 신실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가리킵니다.
오늘은 요한복음을 보지 않았습니다만,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아버지의 영광과 아들의 영광은 다르지 않습니다. 아들의 영광은 그래서 독생자의 영광이요 그 영광이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구약성경에서 ‘인자와 진실’과 같은 표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계시되므로 하나님께 영광이요 아들에게도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곧 아버지의 영광이요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요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세 관련 일화를 언급하고 평소 암송했던 말씀을 가지고 다윗이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자비와 긍휼과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이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면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 자체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는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신 것도, 그리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수립하게 한 것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 전부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우리가 믿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고서 다윗은 17절에도 이어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표적이라도 우선 보여달라는 겁니다. ‘은총의 표적’은 ‘상황이 좋게 될 것 곧 ‘토브’를 위한 표적’입니다. 히브리어 ‘토브’라는 것은 복되다는 것이요, 선하다, 좋다 이런 뜻이 있죠. 토브란 한 마디로 문제가 해결되고 위기가 극복되고 상황이 좋아지는 이런 토브, 결국 이 토브가 기도의 목표죠. 기도해서 안정을 되찾고 정상적인 삶을 회복하고 위기가 극복되고 다시 신앙생활이 영적으로 풍성한 신앙생활으로 회복되는 상태, 이러한 기도 응답이 당장은 아니어도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표적을 보여주는 것은 지금 당장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한층 안정을 되찾지 않겠냐는 겁니다. 코로나19가 지금 당장은 하루에도 수백명이 확진되고 마스크는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에 타도 옆에 탄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다 할지라도 ‘은총의 표적’만 보여주신다면 그 표적 붙들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겁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박멸되고 학교는 정상으로 개학하고 경제활동도 다시 재개되고 다시 요한계시록 성경공부하러 모이고 기도하러도 모이는 정상적인 삶, 안정된 삶, 좋은 삶으로의 회복은 앞으로 한 두 주 안에 찾아오기가 쉽지 않다고 해도 그것의 전조 혹은 징조, 징표, 표적이라도 보여주신다면 우리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것 아닙니까? 소망 가운데 인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은총의 표적 보여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은총의 표적이 필요합니다. 이 사태가 한국교회의 갱신과 변화의 계기가 되는 전화위복의 표적, 가령 이 일로 인해서 각 교회 추수꾼으로 들어가있는 신천지 위장 성도들의 명단이 이제 곧 드러날텐데 알아서 제발로 나가고 지들이 진리라고 믿는 곳에 가서 지들끼리 모여 더욱 가깝게 밀착해서 박수치고 아멘 아멘하고 신천지 교주랑 함께 어울려서 지지고 볶게 되는 전화위복, 그때는 제발 바이러스는 함께 어울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정통교회는 더욱 순결하고 말씀에 입각해서 건강해지는 그러한 변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멸에 앞서 나타나게 될 표적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상황이 자꾸 심각해지기만 하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도 ‘은총의 표적’이 필요합니다. “은총의 표적을 우리에게도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 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17절)
기도하면서 우리가 늘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어떠한 문제라도 하나님에게는 해결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하나님의 역사는 더욱 극적으로 우리 가운데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히 힘을 모아 함께 기도한다면 이 어려움도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상황이 안정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응답만 받고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은 아닐 겁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변화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꼭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은 우리의 변화입니다. 어려움을 통과하고서 순결하게 단련된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순결한 마음입니다.
시편 86편은 키아스틱 구조 혹은 동심원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키아스틱 구조 중에서 중앙집중적 구조를 이룹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시편 맨 첫 부분과 맨 끝 부분이 내용적으로 유사합니다. 맨 첫 부분 다음 부분과 맨 끝 부분 바로 전 부분이 또한 내용적으로 유사합니다. 그렇게 해서 가운데 맨 중앙에 가장 중요한 사상이 나오고 그 중앙을 전후해서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대칭구조를 이루는 중앙집중적 구조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상은 바로 한 번 나오는 맨 중앙에 있는 내용입니다. 맨 중앙이 바로 1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이 시의 핵심이 바로 11절입니다. 86편 전체가 어렵고 절박한 상황에서 건져달라는 간청이지만 가장 중요한 간구는 다윗 자신의 변화를 위한 기도입니다. 다윗의 믿음을 보여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행하심을 신뢰하며서 그 뜻을 알기를 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주의 도를 내게 가르쳐달라는 것은 여호와의 길을 알게 해달라는 겁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어김없이 작동하고 있을 텐데 이러한 어려움이 찾아온 데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길입니다. 그것을 가르쳐달라는 기도입니다. 깊으신 뜻을 알고자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면 내가 진리 가운데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내가 진리 가운데 걸어간다는 것은 여기서 하나님의 길에 상응해서 나 또한 하나님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믿고 의지하고 나도 하나님께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리고서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두려워하고 높이면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절박하게 간절하게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할 때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이 드린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하박국이 기도했던 것처럼 “여호와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온 교우들이 우리 모두의 기도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시선을 끌어온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라도 가지고 나아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당장 상황이 급반전되지 않을 상황이기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은총의 표적을 보여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실 하나님이심을 믿지만 이 어려운 상황을 버텨내고 소망을 가지고 인내할 수 있는 ‘은총의 표적’이 우리에게 시급합니다. 아울러 이런 상황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깊으신 뜻을 우리가 구해야 합니다. 그 뜻을 따라 우리도 진리의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마음을 다해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높여야 하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받는 계기가 되도록, 이러한 어려움이 전화위복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도록 우리는 마음을 모아 함께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로 말미암아 상황도 좋아지고 우리도 변화되는, 그렇게 넉넉히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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