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27일 설교 (주일 낮)
쓰임 받는 사람 (행 6:1-7)
지난 4월에 프랑스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화재가 났습니다. 첨탑이 붕괴되고 지붕의 상당수가 불에 탔습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우리의 일부가 불탔다”며 깊은 슬픔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재건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전문가들마 의견이 다릅니다만 어떤 사람은 재건하는데 30년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복원 과정이 쉽지 않을 전망입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1163년에 착공을 시작하고 134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무려 100년이 넘게 지은 건물로 프랑스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건축물로 칭송되곤 했습니다. 그처럼 유서 깊은 건물이 화재로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져내렸습니다. 위엄과 위용을 드러내기까지 100년을 넘게 기다려야 했던 노트르담 대성당 공사에 참여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아마 건축 과정에 참여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자부심과 뿌듯함과 신앙심을 가지고 임했을 것입니다. 유한한 시간을 덧없는 인생길로 살아가면서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충만한 의미를 가지고 기쁨으로 동참했을 것입니다. 성전 건축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면서 영원을 쌓는 작업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아마 우리 역시도 이곳 예배당을 쌓아올리면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참여한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전 역사를 위해서 쓰임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기쁘게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일은 실은 눈에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자체가 그리스의 몸으로서 보이는 가시적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시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직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직분을 주시고 직분자들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직분자로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유한한 시간을 덧없는 인생길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도구가 된다는 뿌듯함과 가치를 깊이 인식하는 자에게 이 일은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과정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교회의 직분을 논합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직분을 부여하시는 목적을 에베소서 4장 12절을 따라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임을 말합니다. 직분자들의 헌신과 충성을 통해서 교회의 각 지체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십니다. 그래서 교회 직분은 성도가 누리는 최고의 영예임을 강조합니다. 아울러,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주님께서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능력과 은사를 주셔서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교회의 직분을 두 부류로 분류합니다: “통상직” 혹은 “항존직”과, “비상직” 혹은 “임시직”으로 나눕니다. 교회의 항존직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구성되며, 임시직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입니다. 교회의 임시직은 초창기 교회의 설립의 시기에 필요했던 “비상직”으로서 지금은 사도나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사도의 직분은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의 역할이 주된 기능이므로 오늘날 목사로 계승되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자로서 계시 기록이 완결된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으로 대체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도들을 도와서 복음을 전하고 성례를 시행하는 일을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 직분은 이후 조직된 교회에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항존직으로서 목사는 사도의 사역을 계승하면서도 사도와 달리 특정 지역 내에서 각각에게 맡겨진 양떼를 목양할 소명이 부여되었습니다. 교사의 직분은 “성경 해석”을 통해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를 보존하는데 있으며 목사는 이러한 교사직을 겸합니다. 장로는 다스리는 직분입니다. 문자적으로 연장자를 의미하죠. 장로는 도덕적인 견책과 권징을 시행하는 직분을 감당합니다. 집사의 직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역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볼보는 사역으로 이루어집니다. 은사 목록에서 소위 “구제하는 자”와 “긍휼을 베푸는 자”에 해당됩니다. 집사 직분의 고유한 사역이 있는 것입니다. 직분자는 “안수”를 받으므로 직분에 나아가는데 안수는 직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합법적으로 부여됨을 선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의미에서 직분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상이 칼빈이 말한 직분론입니다. 직분론을 마무리하면서 칼빈은 강조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신 아버지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 (<30주제로 풀어쓴 기독교 강요>, 문명호 저, 296-306쪽 참고)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본문은 교회의 직분 중에서 집사가 최초로 세워진 과정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로, 특별히 베드로의 설교로 한 번에 3천명이 회심하고 또 5천명이 회심한 이후 예루살렘교회는 소위 대형교회가 되었습니다. 나날이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났고, 수적으로 증가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이 많은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이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교회에 바치니까 이 물질을 가지고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사도행전 4장 34-35절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줌이라”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바친 재산을 공동체 내의 가난한 자들을 필요에 따라 분배해주는 일도 사도들이 했던 큰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시행하는 중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느 교회처럼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에도 교인들의 종류가 크게 두 부류로 구분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구분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대개가 그리스 문화권에서 살다온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서 헬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사람들이었던데 반해서 ‘히브리파 유대인’은 유대땅에서만 살아서 아람어를 구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두 부류는 율법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랐을 겁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좀 이방인적인 개방적 특성이 있어서 율법 조항에 심하게 매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고, 이에 반해서 ‘히브리파 유대인’은 성전 율법 체제의 강한 영향 아래서 자라났고 그 구속력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한 차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는 크게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으로 나뉘어지게 되었을 겁니다.
‘헬라파 유대인’이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지만 본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이유는 아마 고향땅, 특별히 거룩한 도시에서 묻히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개 황혼의 때에 타국에 있던 자신의 생활터전을 정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과부에 대한 돌봄 문제가 자주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과부들은 구제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을 겁니다.
문제는 과부를 구제할 때 아무래도 예루살렘교회 사도들은 주로 북쪽 갈릴리 출신으로서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였기 때문에 구제 업무를 감당할 때 헬라파 과부들이 소외되는 문제가 발생했던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헬라파 성도들이 히브리파 성도들에게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이런 문제가 불거지자 사도들이 중재에 나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사도들은 모든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씀을 제쳐놓고 구제하는 일에 힘쓰는 것이 자신들에게 마땅하지 않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인 전체를 ‘제자’로 명명했다는 점과 교회의 핵심사역이 크게 두 가지, 말씀사역과 구제사역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앞으로 나오겠습니다만 말씀사역은 단순히 복음 전하고 말씀 가르치는데 국한되지 않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 사도들이 말씀사역과 더불어 구제사역까지 모두 맡아서 했지만, 이제부터는 말씀의 사역에 집중하고 구제사역은 교인들 중에서 선택된 일꾼에게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제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3-4절) 사도들은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인 제자들, 그러니까 오늘날 용어로 공동의회의 멤버인 전 성도들에게 자격을 갖춘 7인을 그들이 선택하면 그 7인에게 구제업무를 전담하도록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사도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합니다. 구제업무를 전담할 사람의 자격은 세 가지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의회가 어떻게 7인의 집사를 선출했는지는 보도하지 않습니다만, 사람들에게 칭찬 듣는 사람의 자격을 통해서 보건대, 아마 전체가 참여하는 투표로 선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집사의 직분은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혜가 세상 지혜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서 드러난 성령의 지혜, 위로부터 난 지혜여야 합니다. 세상 지혜와는 다른 위로부터 난 지혜, 성령의 지혜입니다. 이 세 가지가 집사의 자격입니다.
사도들은 구제사역은 제쳐두고 이제 말씀 사역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말씀 사역을 들여다보니 기도와 말씀입니다. 이게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기도를 본질적으로 말씀의 사역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기도를 말씀의 사역 앞에 두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말씀의 사역’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사역입니다. 복음 전하고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제자로 세우는 사역으로서 말씀 사역은 기도가 앞서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는 말씀 사역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위험과 찬란함을 찬양했던 시편 119편 기자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무엘도 여호와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 “여호와여 말씀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고 말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지녀야 할 말씀을 듣기 위한 기도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눈을 열어주셔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말씀을 들여다보는 겁니다. 그래야 진리의 광맥을 캐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보면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와, 세례와 성찬의 성례와, 이에 더불어 기도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방편으로 보는 겁니다.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도 기도를 은혜의 방편으로 보았습니다. 기도로 말씀을 깨닫기 때문이며,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자만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이와 동시에 깨달은 말씀으로 주님께 기도를 하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한 송영>, 유해무 저, 204-228쪽 참고) 그래서 “기도와 말씀”입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했습니다. ‘힘쓴다’는 말은 본문 이전에서도 두 번이나 사용됩니다. 1장 14절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말씀하는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가 성령의 약속을 기대하면서 기도에 힘썼습니다. 또 2장 42절에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글성경의 번역은 예루살렘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만 힘쓴 것 같이 번역을 했습니다만 이 절에는 동사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힘쓰다”라는 하나의 동사에 네 가지 활동이 다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를 힘썼고, 서로 교제하기를 힘썼고, 떡을 때는 일에 힘썼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이 이 네가지 활동 모두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성도로서 그리고 사도는 사도로서 각자 직무에 힘을 쓰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을 쓰기 위해서 구제사역을 선출된 집사에게 맡기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힘씀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계속적으로, 지속적으로, 인내를 가지고 끈질기게 모든 힘을 다하여 충성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기도>, 유상섭 저, 178-9쪽)
사도들의 제안에 예루살렘교회의 전 성도들이 화답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는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5-6절) 선출된 일곱 집사의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그리스식 이름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이었던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과부가 구제 대상에서 빠지게 되는 일로 인해서 원망과 불평이 생겨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해결책은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이 구제사역을 맡기는 것으로 일단락한 것입니다. 공동체의 지혜요 선출 과정 가운데 개입하신 성령의 역사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열두 사도들은 대개 갈릴리 출신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헬라 문화에 친숙하지 못한 본토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대개가 히브리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단 두 사람, 안드레와 빌립만이 그리스식 이름으로 나타납니다. 12명 전부가 히브리파 유대인이었고 이름도 대개가 히브리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선출된 일곱 집사의 경우 모두가 그리스식 이름이고 이를 통해서 보건대 이들 모두가 헬라파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회중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는 못합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의 비율이 어떻게 되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충분히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히브리파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선출된 일곱 집사는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점에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 공동체가 혈연과 지연과 학연 등, 이러한 인간적 조건보다도 문제를 해결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서 공동의 지성과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이고 성령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역사하셨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성령충만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를 축복해주셨습니다. 본문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졌다는 것은 사람의 수가 불어나 번성하듯이 말씀이 많아지고 확산됨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점점 왕성하여’라고 번역한 동사가 사도행전 7장 17절에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여기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라고 번역한 동사와 같은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번성하여 많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교회의 제자 수가 더 심히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왕성함이요 말씀의 부흥이요 교회의 부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는 모든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할 많은 것들을 가진 성령의 충만한 역사와 순수한 열정과 헌신이 보존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에도 여느 교회처럼 문제가 있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지혜와 성령의 역사와 온 공동체 구성원의 전적인 참여와 헌신을 보게 됩니다.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직분자가 세워지고 직분자들의 역할 분담을 통해서 교회는 더욱 건강하고 더욱 활력있게 성장해감을 보게 됩니다. 우리 동산교회도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처럼 들이닥친 문제를 해결하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직분자를 세워감으로써 건강하게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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