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28일 설교 (주일 낮)
뿌리는 기쁨 거두는 기쁨 (요 4:27-38)
그가 겪은 문제의 핵심은 세계적으로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지나간 자신의 삶은 온통 악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진 것이었습니다. 모든 게 죽음에 의해 사라져버리는 온통 신기루와 같은 삶에 대해 회의가 찾아온 것입니다. 살아갈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죽음으로 끝날 인생이라면 삶의 의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시절, 그는 매 순간 자살 충동을 느꼈습니다. 자살 충동이 자라나는 것만큼이나 그는 하나님을 찾으려 발버둥쳤습니다. 하나님을 본격적으로 찾으려고 하기 이전에 그는 이미 학문을 섭렵했습니다. 역사나 철학이나 문학뿐 아니라 과학책까지 뒤적였습니다. 삶의 해답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별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상황이 심각해졌을 때, 그는 본격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나섰습니다. <고백록>의 제12장의 제목은 “하나님을 찾는 과정”입니다. 그는 먼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내가 존재하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은 모든 원인들의 원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모든 것의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생각해볼수록, ‘이 원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과 내가 하나님이라 부르는 그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금세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느 때는 하나님께 간절히 하소연하듯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주여,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나를 구해 주십시오! 오, 주여, 나를 가르치셔서 내게 길을 보여 주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으니까 하소연할 분도 없다는 생각에 곧 사로잡히게 되어 또다시 절망에 빠졌습니다. 이윽고, 스스로에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통렬한 슬픔을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거야.” 이러한 고백을 하고 나면 자신 안에 어떤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느꼈고, 살아갈 가능성과 삶의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도 또다시 절망속으로 빠져들어서, 자살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기쁨을 느끼다가도, 갑자기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절망의 나락 속으로 빠져드는 일이 수백번 반복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3년 가까이 통과할 무렵, 지나간 생각들을 정리하는 어느 때에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랍니다: ‘지난 3년간 내 안에서 생명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일이 수백 번이나 반복되었구나. 내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만 오직 살아있을 수 있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을 때에는 내가 살아나고,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잊어버렸을 때에는 내가 죽는구나, 이렇게 죽는 것과 다시 살아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을 잃었을 때 죽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일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찾을 때에만 진정으로 살아 있게 된다. 그렇다면 네가 찾고 있는 그것은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순간 톨스토이 안에서 어떤 음성이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하나님 없이는,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사는 것은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아라, 하나님 없이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음성을 듣는 순간, 자신 안과 주변의 모든 것이 환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그 빛이 톨스토이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체험 이후로 자살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때 톨스토이는 ‘삶의 힘’을 찾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했던 어떤 ‘의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름 붙였던, 그 ‘의지’입니다. 불교와 회교까지 여러 종교도 연구했고 섭렵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모국어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앙입니다. “모든 신앙의 본질은 죽음으로 없어지지 않는 의미를 삶에 부여하는데 있다. 신앙은 ‘나는 왜 살고, 내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유일한 대답이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신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지를 우리가 알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의지에 굴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의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함으로써 그 의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때 비로소 그 의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것,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누군가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굶주린 거지를 넓은 과수원의 기계실에 데려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면서, 거기에 있는 어떤 장치의 손잡이를 위아래로 조작하는 일을 시킵니다. 거지는 자신이 왜 이곳에 데려와져서 이 손잡이를 조작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이 과수원이 제대로 잘 돌아가고 있는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그 손잡이를 조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손잡이를 조작하는 순간, 비로소 그는 그 손잡이가 펌프를 작동시키고, 그 펌프는 물을 길어 올려서 과수원 곳곳으로 이어진 수로로 내보내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는 과수원의 과일들을 거두며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허드렛일들을 하던 그에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중요한 일이 맡겨지게 될 것이고, 그는 자기가 속한 과수원의 구조와 운영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게 되고 거기에 더 깊숙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자기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를 묻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창조 목적에 부합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이란,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주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함께 둘러 앉아서 “우리가 왜 손잡이를 조작하는 이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을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토론하고 숙고를 거듭한 후에, “주인은 어리석거나, 존재하지 않고, 오직 우리만이 유일하게 지혜롭고 똑똑한 자들인데, 우리가 알게 된 유일한 것은 우리 삶은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삶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사람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톨스토이가 내리는 결론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자신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불행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하므로 이땅에서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업에 동참할 때 인간이 참된 만족에 이르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개인적이 행복을 추구하는 삶이 불행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노력이 결국 죽음으로 허망하게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이땅에 태어났고, 인간의 목적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며,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이어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총체적인 의미에 대한 대답이 바로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드는 느낌은 톨스토이가 감수성 짙은 소설가로서 하나님을 찾는 과정과 자신의 내면의 일지를 뚜렷하게 드러내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기독교 변호를 위해서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톨스토이가 얻어낸 결론은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도 그와 같은 말씀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은 사마리아땅 수가성의 야곱의 우물에서 뜨거운 정오에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영적인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영적인 대화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여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29절) 이 말은 수가성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돌아가서 마을 사람들에게 한 말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뜨거운 정오에 우물에 물을 길러 온 여인이 동네 사람들을 찾아가서 자신이 만난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닐까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는 사이에 마을로 음식 구하러 간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음식을 가져와서 예수님께 잡수라고 드립니다. 이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절) 제자들은 ‘그 사이에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드렸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알쏭달쏭한 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주님이 먹고서 힘을 내고 살아갈 힘을 얻는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고 보냄 받은 이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것’은 방금 전에 있었던 수가성 여인의 회심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요? 수가성 여인에게 메시야이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 여인에게 한줄기 삶의 빛을 제공한 것, 그렇게 살아갈 이유와 삶의 목적을 찾아주신 것! 한마디로 전도한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는 양식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두 가지 격언을 언급하십니다. 첫 번째로,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35-36절), ‘통상 사람들이 하는 말이 씨를 뿌리고 어떻게 바로 거둘 수 있겠느냐, 씨 뿌린 후에 최소한 4개월은 지나야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냐고 사람들이 흔히 말하지만 지금 수가성 여인에게 복음의 씨앗을 뿌림과 동시에 추수하게 되지 않았느냐. 파송과 수확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 종말의 축복이 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에 왔느니라. 이런 시대는 뿌리고 거두고 거두고 뿌리는 일들이 풍성하게 동시에 이루어져서 뿌리는 자나 거두는 자나 모두가 기뻐하는 축제의 시간들이다. 지금 이렇게 수가성 여인이 마을 사람들을 몰고 우리에게 나아오고 있지 않느냐’ (30절,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한마디로 지금은 복음의 씨앗을 뿌림과 동시에 거둠이 있는 수확의 시대, 추수의 시대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오히려 일꾼이 모자랄 정도의 결실의 시대요, 은혜의 시대입니다. 이 운동에 참여하는 자는 뿌리는 자든 거두는 자든 모두가 함께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축제의 시절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격언을 소개하십니다. 37-38절입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새로운 시대는 하도 풍성한 시절이라 파종과 수확이 동시에 일어나고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모두 함께 즐거워하는 축제의 시간이라 해도, 뿌리는 자가 그동안 있었기 때문에 거둘 수 있게 된 것이라는 격언입니다. 그동안 몇 번이나 역사의 과정속에서 씨를 뿌리고 심은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 수확이 가능케 된 것이라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가깝게는 예수님이 수가성 여인에게 심은 복음의 씨앗이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옴으로 추수하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제자들이 이 마을 사람들을 추수하러 예수님께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수님만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세례요한이 사마리아 근처 요단강 가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뿌렸고 그 이전에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뿌렸고 오늘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복음의 생수라는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그 수확을 오늘 제자들이 별 노력없이 거두게 된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게 우리 인생의 양식과 같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일’이란 문맥의 흐름을 보면 우리 인생에게 씨를 뿌리고 심고 거두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요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게 됩니다. 씨를 뿌린다고 꼭 우리가 거두게 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일은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교회의 대표적 목회자로 자리매김한 분당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간증을 그분이 쓴 <보호하심>이라는 책에서 보았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고신 교단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으로 정말 경건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조그만 개척교회의 담임목사였는데, 교회를 위해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시다가 그만 17일째 되던 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당시 이분이 한참 민감한 10대였는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교회를 불같이 일으켜 세워주지는 않으시고 그 담임목사를 데려가시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어린 나이에도 하나님이 참으로 원망스러웠습니다. 어린 나이에 당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분은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닌 바로 이분의 어머니였습니다.목사인 남편이 그토록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목사’라는 직분에 대해 회의감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머니는 이때 이후로 막내였던 이찬수목사님에게 “네가 커서 목사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교회를 정말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해 금식기도 하시는 중에 돌아가셨단다. 하나님께서 너무 빨리 부르셔서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셨지. 그러니 자식인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에게 아버지 뒤를 이어 목사가 되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이 견딜 수 없이 싫었습니다.
이분이 목사가 되고 언젠가 미국집회를 마치고 어머니가 계시는 시카고에 들렀다가 어머니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처녀 시절 예수님을 영접한 어머니는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하나님을 원망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습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이분의 머릿속으로 지난날에 대한 필름이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40일 금식기도를 하러 가셨다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오셨던 그 밤이 생각났습니다. ‘그날에도 어머니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택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서 이분의 가정은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해야 할 만큼 풍랑은 여전히 거세게 일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늘 ‘아 하나님의 은혜로’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시는 주님’, 자신의 모든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이 늘 돌보실 것을 확실히 아는 그 어머니의 믿음이 오늘의 자신을 있게 만들었다고 간증을 합니다.
끈질긴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서른 살 때 목회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고 미처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도의 열매를, 교회를 향한 그 기도의 열매를 자식인 자신이 지금 말도 안 되는 놀라운 방법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방법으로 거두게 된 것입니다. 분당우리교회를 개척한지 6년 만에 1만명의 성도가 모이는 구원의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뿌리고 심고 거두는 것입니다. 누가 뿌리게 될지 또 누가 거두게 될지 모를 일이고, 내가 심는다고 내가 거두게 될 거라는 보장은 없어도 내가 뿌린 씨앗은 반드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보장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만약 거두게 된다면 그것은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이 씨를 뿌린 노력의 결실임을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나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요 많은 사람들의 손길의 도움의 결과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은 가장 결정적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땅에 떨어져 썩어지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목숨을,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놀라운 희생의 결과로써 새로운 은혜의 시대, 놀라운 결실의 시대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씨를 뿌리면서 또한 거두기까지 하는 종말론적인 풍요한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결코 ‘헛됨’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해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삶, 이런 인생에는 삶의 회의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톨스토이처럼 삶의 힘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심고 또한 무엇을 거두어야 하겠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하나의 씨 뿌림에 비유합니다. 언제나 선택에 직면하는 우리의 삶은 마치 어떤 밭에다 씨를 뿌릴 지를 선택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나는 육체라는 밭이고, 하나는 성령이라는 밭입니다. 육체라는 밭 안으로 (‘위하여’보다 ‘안으로’가 더 나은 번역임) 씨를 뿌린 사람은 그 육체라는 밭으로부터 ‘부패’라는 소출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썩어 버린 것을 수확한다는 말 자체가 역설이죠. 궁극적인 멸망일 뿐입니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일 뿐입니다. 썩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라는 밭에다 인생의 씨를 뿌린 삶, 곧 세속적 욕망을 따라 살았던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반면에 성령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사람은 성령이라는 밭으로부터 영생이라는 값진 소출을 거둘 것입니다. 영생이란 성령이라는 밭에 씨를 뿌리는 삶, 곧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고 뿌려짐으로써 우리가 결실을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씨를 뿌리고 거두는 영적으로 풍요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은 성령이라는 밭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끝은 영생이라는 소중한 수확이 될 것입니다. 이 복음의 씨앗을 마음껏 뿌리고 또 풍성하게 수확하는, 삶의 의미가 충만하고 삶의 목적이 분명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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