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24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실패와 좌절과 절망을 기회로 (행 16:22-34)
토론토대학의 심리학교수인 조던 피터슨이라는 분이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쿼라’라고 하는 질의응답 사이트에 글을 올린 것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터넷 사이트 ‘쿼라’에서는 누구나 어떤 종류의 질문을 할 수 있고,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글을 읽는 이가 공감하면 ‘추천’ 버튼을 누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면 ‘비추천’을 누를 수 있게 돼 있습니다.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은 위로 올라가서(상위 ranker) 더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그렇지 못한 글은 아래로 내려가 관심 밖으로 밀려납니다. 이분이 심심할 때 간혹 들어가곤 했던 ‘쿼라’에서 한 질문을 발견했습니다. 그 질문은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분이 임상심리와 종교심리를 폭넓게 공부한 분이고 원래는 하버드대 심리학교수였으나 본국인 캐나다로 돌아와서 토론토대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일하고 있었기에 이 질문에 할 말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생각하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인생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정리해서 올린 글이 바로 이 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분이 올린 대답의 글을 읽은 사람이 무려 12만명이나 되었고, 2300명에 의해 추천을 받았습니다. 이 사이트 ‘쿼라’에 올라온 약 60만 건의 질문 중에서 추천수가 2000회를 넘긴 답글은 수백 건에 불과한데, 이분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고 공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때의 답변을 확대하고 보강해서 쓴 책이 바로 <12가지 인생의 법칙>입니다. 당연히 이 책도 베스트셀러가 됐겠죠.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하는 그런 책입니다. 그 중에서 인생의 제1법칙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몸가짐이나 정신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는 강조입니다. 몸가짐이나 몸짓이 바뀌면 심리도 변화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 실험 중에서 실험 참가자에게 얼굴 근육을 한 번에 하나씩 움직여 슬픈 표정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고서 심리 상태를 확인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 과정에서 더 슬퍼졌다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얼굴 근육을 하나씩 움직여 행복한 표정을 지어 달라고 요청하고 심리 변화를 확인하면, 그런 표정을 짓는 과정에서 더 행복해졌다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인간 마음의 감정은 몸으로 표현되고, 그 표현 때문에 기존의 마음의 감정 상태가 증폭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가슴을 웅크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다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왜소하고 자신감 없는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스스로도 의기소침하고 무기력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굉장히 소극적인 자세인데 이런 자세는 마치 등 뒤에서의 공격을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평가하게 되고 그래서 무력감과 무기력이 더욱 증폭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자세와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패배자의 자세를 하고 다니면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 때문에 패배자로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허리를 쭉펴고 어깨도 펴고 당당한 자세를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사람을 다르게 보고 그것에 맞게 대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겉모습에만 해당되는 인생의 법칙은 아닙니다. ‘똑바로 선다’는 것은 또한 정신적인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려운 고난과 고통 앞에서, 그리고 인생의 재앙 앞에서 얼어붙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전하고, 움츠려드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불굴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분의 말입니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어떤 행동이라도 하겠다는 뜻이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방주를 지어 홍수로부터 세상 사람들을 지키고, 바로의 압제와 폭정으로 고통받는 동포들을 이끌고 광야를 건너겠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처럼) 안락하고 편안한 집을 떠나겠다는 뜻이고, 과부와 어린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자로서) 전하겠다는 의미다.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선다는 것은 옳은 것과 편한 것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분은 강조합니다. 먼저 자세부터 반듯하게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구부정하고 웅크린 자세를 버리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당당하게 요구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들에게서 긍정적인 인상을 남길 기회가 늘어납니다. 그 결과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지고, 실제로 좋은 일이 생기면 자신감도 커지는 선순환에 진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과 실라는 인생의 혹독한 시련과 외부의 박해에 대항에서 ‘어깨를 펴고 똑바로 서라’는 인생법칙을 실천하고 있는 듯합니다. 바울과 실라는 2차 선교여행 도중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지역인 빌립보라는 도시에 이르게 됩니다. 잘 아시다시피 2차 선교여행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함께 했던 바나바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나려고 했습니다만, 바나바의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는 문제 때문에 바나바와 갈라서게 됩니다. 1차 선교여행 때 힘들어서 마가가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가버린 일이 있었는데, 바나바는 이번 2차 선교여행 때 마가를 데려가서 다시 기회를 주자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이 일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가 크게 싸우게 되어 갈라섭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 구브로섬(싸이프러스)으로 선교여행을 떠났고,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를 택해서 그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출발부터 삐거덕거린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은 이후도 또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방문했던 곳을 재차 방문해서 세워진 교회를 다시 돌아보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1차 선교여행 때 교회를 세웠던 터키 내륙지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고 이상하게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진척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뭔가 잘 안된단 말이에요. 성령님께서 못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더디게 진행됐던 이유가 있음을 바울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하나님께서 밤에 바울에게 한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아시아 터키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 마케도니아 사람이 환상에 나타나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행 16:9)고 말하는 거예요.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서 즉시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유럽으로 가라고 하시는 거구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닫게 된 바울 일행은 즉시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로 건너갑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첫 번째 이른 도시가 바로 빌립보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보에서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귀신 들려 점을 치는 한 여종이 바울 일행만 보면 따라와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행 16:17)라고 크게 외치는 겁니다. 볼 때마다 그러는 거예요. 며칠을 그러는 거예요. 바울이 안되겠다 싶어서 여종에게 들린 귀신을 내쫓아버렸습니다. 귀신이 나오니까 소위 신기가 없어지고 그래서 점도 못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종의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돈을 못벌게 되니까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관리에게 고소했습니다. 이들이 유대인으로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로마의 도시 빌립보의 미풍양속을 해치고 성을 요란하게 한다는 죄목으로 고소한 것이죠. 여기에 많은 무리가 가세하게 되자 관리들은 법에 의거하지 않고 고발당한 바울과 실라에게 심한 매질을 한 후에 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3-24절입니다.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차꼬’를 차게 되면 아주 불편해집니다. 죄수들이 앉은 자세로 있을 때나 바닥에 누웠을 때에 잠을 잘 수 없도록 큰 불편을 초래하는 고통을 주기 위해서 중죄인에게 차꼬를 채운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심한 매질로 인해서 아마 밤중에나 깨어났을 것입니다. 깨어나고서 잠자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한밤 중에 깨어 있게 되었고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하기를 시작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러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한 선교여행, 그것도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뒤늦게 알고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오게 된 2차 선교여행, 그런데 결과는 심한 매를 맞고 차꼬에 채인 채 감옥에 갇히는 너무나 분명한 실패와 시련입니다. 얼마나 좌절됐겠습니까? 얼마나 낙심이 들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쯤되면 절망해버렸을 것입니다. 뒤늦게 알게 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선한 사업에 힘쓰다가 이렇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것도 심하게 맞아서 밤중에나 깨어난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으로 다가왔겠습니까? 바울과 실라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섰습니다. 크게 찬송하였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들릴 정도로 크게 찬송하고 기도했습니다. 아마 다른 죄수들이 생각하기에 ‘저 사람들 뭐야!’, 그랬겠죠. 관리들이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면서 간수에게 “든든히 지키라”고 주의를 줬던 간수도 참 의아한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제네들 뭐야!’
바울과 실라의 반응은 이후 간수의 반응과 비교가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26절입니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하나님께서 땅을 흔들어버렸습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고 차꼬가 풀리고 바울과 실라뿐 아니라 모든 죄수들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경험하고서 잠을 자고 있던 간수가 깨어났습니다.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서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간 것으로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래서 그의 선택은 무엇이었습니까? 27절입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간수는 죄수들을 잘 지켜내지 못하면 자신에게 임할 엄벌을 알았을 겁니다. 특별히 “든든히 지키라”는 특별 명령을 받고 수감된 바울과 실라를 지켜내지 못했다면 이후 얼마나 큰 벌을 받게 될 것인지, 그는 알았기 때문에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이뿐 아니라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더더욱 자살하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때 바울이 간수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지릅니다. 28절입니다.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바울은 자결하려는 간수를 안심시키려고 자신과 실라뿐 아니라 죄수들이 아직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다른 죄수들은 아마 어안이 벙벙하고, ‘이게 뭔일인가’ 하고서 도망갈 생각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간수는 바울 앞에 엎드리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29절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간수가 왜 두려움과 무서움에 떨었을까요?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보고서 이러한 비상사태에 직면해서 두려움이 생긴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러한 두려움과 무서움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관리들처럼 간수도 바울과 실라를 유대인으로 알았고, 그들이 섬기는 종교 때문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이고, 간수 역시 관리들이나 많은 빌립보성의 무리들처럼 바울과 실라는 맞아도 싸고 감옥에 갇혀도 싸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들을 감옥에서 든든히 지키라는 책무를 맡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밤에 바울과 실라가 곡조를 알 수 없는 종교적 노래를 부르고 주문처럼 자신의 신에게 기도하는 소리를 들었단 말이에요. 그러던 차에 이러한 놀랄만한 일이 일어나니까 ‘이거 뭔가 잘못됐구나. 이분들을 때리는 게 아니었는데, 이분들을 가두는 게 아니었는데, 이분들은 신의 대리자들이 아닐까’ 하는 종교적 두려움이 엄습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갑자기 일어나 비상한 재난 때문에 두려움이 생긴 것일 수도 있고, 이후 옥문이 열려서 죄수들이 도망가서 자신이 받게 될 처벌 때문에 두려움이 더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분의 무서움과 두려움은 신의 대리자들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종교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섬기는 신이 이 정도로 땅을 흔들고 차꼬를 풀게 하고 옥문을 열어버리는 기적을 보여주었다면 이후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러한 신의 진노 앞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사자, 신의 대리자로 여겨진 바울 앞에 두려워서 엎드렸던 것입니다.
간수는 엎드려서 당연히 종교적인 질문을 합니다. 30절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를 물었는데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는 말하고는 조금 의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구원’이라는 단어와 그당시 빌립보라는 로마의 식민지에서 살고 있던 로마제국의 간수가 생각하는 ‘구원’은 그 의미가 달랐을 겁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구원’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소테리아’라는 단어입니다. ‘소테리아’는 당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어떤 뜻이었냐면 당연히 세속적인 뜻이었습니다. 어떤 위험으로부터 구출이나 보호, 안전, 질병에서의 치료와 건강, 축복이나 혜택과 같은 좋은 상태 등을 뜻했습니다. 영적인 구원이나 영원한 구원 같은 개념을 찾아보기는 힘듭니다. 아마 빌립보 간수도 이러한 뜻에서 ‘구원’ 곧 ‘소테리아’를 말했을 겁니다. 벌어진 이 상황, 그러니까 아직 죄수들이 도망가지는 않았다 해도 옥문이 열려진 이러한 상황에서 죄수들이 도망갈 것이고, 괜히 죄도 없는 신의 사자 혹은 신의 대리인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갇히게 해서 앞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신의 진노를 받게 될 것인데,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나 어떻게 살아야 해?’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바울에게 가져오는 게 당연하게 생각되었을 겁니다. 바울은 이러한 기적을 불러온 신의 대리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 게다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거냐는 질문을 받은 바울은 ‘바로 이때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기회입니까? 복음 전할 기회라고 바울은 포착했습니다. 31절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바울의 대답은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마 간수의 질문의 의도를 알았을 겁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건지 묻는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에다가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개념을 더해서 포괄적인 의미로 구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러한 상황도 벗어날 수 있고, 어깨를 펴고 다시 당당히 살 수 있게 될 것이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정한 구원, 영적인 구원, 영원한 구원, 신의 심판과 진노 앞에서도 얻을 수 있는 기독교의 구원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어야 할 예수는 누구십니까? ‘주 예수’입니다. 여기서 ‘주’라는 말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면 간수가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라고 물었을 때 ‘선생들이여’라는 말은 정확하게는 ‘주인들이여’, ‘주인님’ 이러한 뜻입니다. 간수가 보기에 신의 대리자 혹은 신의 사자로 여겨진 바울과 실라는 주님이었던 것입니다. 이 말에 바울은 진정한 주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주님, 우리의 유일하신 주님이신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아무리 어려운 상황도 벗어날 수 있고, 헤쳐나갈 수 있고,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대답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복음을 전하는 말이기도 하고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이요 간증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왜 밤중에 노래를 불렀던 걸까요? 복음을 전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 실패를 경험하고 좌절을 겪고 낙심하고 심지어 절망적이라고 여길 만한 상황에서, 심한 매질에서 이제 막 깨어난 한밤 중에 바울과 실라는 소위 ‘밤의 노래’를 부르고 왜 기도했던 걸까요? 주 예수님께 기도했겠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겠죠. 예수님만이 주님으로 통치하시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다스리시는 주님이심을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할만한 상황조차도 ‘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바울과 실라는 그렇게 반응했는데 반해서 ‘주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간수는 자신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벗어나려고 자살하려고 시도했단 말입니다. 그러한 간수에게 내가 믿고 구원 받은 ‘주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는 말은 지금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고 바울 자신의 신앙고백이요 방금 전에 경험한 자신의 신앙간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당신뿐 아니라 당신의 집안 전체도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예언처럼 간수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성령의 감동으로 그 집안 전체가 구원 받을 것을 말했습니다. 32절입니다.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간수와 그의 온 집안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고, 이들은 빌립보교회의 첫 열매인 두아디라의 자색 옷감 장사였던 루디아와 더불어 빌립보교회의 기둥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34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온 가족이, 그리고 여러분이 작정한 아직 예수 믿지 못한 사람들이 다 주 예수님을 믿고 진정으로 이땅의 온갖 곤경과 어려움에서뿐 아니라 진정한 영적이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므로 큰 기쁨이 여러분들 가운데,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874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