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6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사 52:7-10)
아더 애쉬라는 분은 60-70년대에 활약한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입니다. 이분은 모든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그랜드 슬램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했고, 그 중 한 번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에서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아더 애쉬는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인해 두 번이나 수술을 받게 됩니다. 설상가상, 수술 때 피를 잘못 받아서 AIDS에 걸립니다. 그는 1993년, 그의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AIDS에 걸린 것이 알려졌을 때, 그는 전 세계 팬들로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중 하나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을 그 같이 나쁜 병에 걸리게 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당신입니까?” 아더 애쉬가 AIDS를 신앙의 힘으로써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에 누군가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더 애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그 중 5백만 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 중 50만 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 중 5만 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 중 5천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 중 두 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제가 윔블던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이분이 쓴 회고록 <은총의 날들>에서 아더 애쉬는 AIDS에 걸리고 나서 많은 질문을 가져 보았으나, “왜 접니까?”라는 질문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더 애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제가 심장마비 혹은 AIDS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라고 묻는다면,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19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한 다음 날, 저는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만일 저의 승리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저의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이분의 믿음은 자신이 억울하게 AIDS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확신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참된 믿음은 현실을 해석하는 능력입니다. 자신에게 들이닥친 온갖 일들을 진리에 입각하여 해석하는 사람이 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무엇이 사실입니까? 꼭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이 결국 승리합니다.
예레미야 44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왜 하나님께서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땅을 황폐케하셨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유다가 멸망하고서 애굽으로 도망간 유다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은 유다가 저지른 우상숭배 죄 때문에 그땅을 멸망시켰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애굽에 피신 온 유다 백성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상황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제사드릴 때는 모든 것이 풍부하고 복을 받고 재난도 없었는데 그것들을 폐한 후부터 궁핍이 찾아왔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는가를 보면 우리의 믿음의 수준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은 풍요라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한 결과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어려움과 고통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결과라 해석할 수도 있고 하늘의 여왕에게 제사를 멈춘 결과라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따라 해석한 사람은, 선지자의 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결과로 지금의 어려움이 왔다고 할 때 회개하고 돌이키겠죠.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갖지 못한 자는,
자기들의 해석과는 다른 진리를 선포하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결국 더욱 하나님의 길에서 멀어지며 더욱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생생하게 드러난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아무 죄없는 예수님이 군중의 선동에 의해서 극악무도한 죄인으로 탈바꿈되었고, 예수님은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인 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죽음으로 예수님에게 모든 것이 끝났다면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없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입증해보이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시켜주심으로 역사의 주관자되심과 세상의 창조주되심과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입증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을 때 하나님께서 부활의 권능을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을 향해서 증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처럼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가므로 현재의 삶에서 부활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켜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10절 말씀에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도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의 통치의 증거임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벼랑 끝에 서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증거될 때가 많습니다. 홍해 바다를 앞에 두고 뒤로는 바로왕의 군대의 추격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그대로 진퇴양난의 위기 앞에서 벼랑 끝에 서 있게 되었죠. 이때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하심은 홍해를 가르고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너가게 하셨죠. 홍해를 건넌 후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소위 ‘미리암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맨 마지막에 뭐라고 고백했나요? 출애굽기 15장 18절,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진퇴양난의 위기속에서 건져올린 보석같은 진리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유다가 멸망해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장차 하나님은 그들을 해방시켜주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생생하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진리가 바벨론이라는 압도적인 현실적 장벽에 가로막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있고 고국에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이 세상은 누가 다스린다는 말입니까? 아무래도 바벨론이 다스리는 것 같고 권세자가 다스리는 것같습니다. 사망이 왕노릇하는 것 같고 소망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증거로 보았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바벨론에서 출발한 한 전령이 급히 높은 산을 넘어 시온 곧 예루살렘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습니다. 달리는 기운과 표정을 보니 분명 좋은 소식인 듯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오는 전령의 모습을 ‘놀랍고도 반가워라!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산을 넘어 달려오는 저 발이여’라며 벅찬 감격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란, “복된 좋은 소식”이란 평화와 구원을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와 구원은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입니다. 평화도 하나님의 통치로 인해서 왔고, 구원도 하나님의 통치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실 때 사람들간의 평화도 이룩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내적 평안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구원이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내세까지 이어지는 삶이건 현세의 삶이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셔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시작하셨기 때문에 평화와 구원이 가능해졌고, 이 평화와 구원이 이스라엘의 해방에 의해서 뚜렷이 보여지기 시작했습니다. 높은 망대에 올라 적의 침입을 살피며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파수꾼들이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전령들의 기쁜 외침,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소리를 듣고서 일제히 환호성을 지릅니다. 본문 8절입니다.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전령이 달려온 후 뒤이어 오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하나님과 눈이 마주쳐 모든 백성들이 환호성을 올리게 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위해서 입성하실 하나님을 친히 보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이어지는 9절을 보십시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하나님의 통치는 황폐한 곳에 임해서 그곳을 기쁜 찬양과 노래로 반전시켜줍니다. 아직 여전히 예루살렘은 황폐한 땅이지만 소망 중에 하나님의 통치가 분명하게 나타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몸소 체험했고 이로써 그들은 춤추고 환호하고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군림이나 압제가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는 다스림이요 자기 백성에게 해방을 주시는 참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방나라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들이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본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속량하셨으며,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팔을 걷어 올리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시되 그냥 오시는 것이 아니라 팔을 걷어붙이고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팔을 걷어붙이시고 그 자녀들의 역성을 들어주시며 위로하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십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누가 내 자식들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들었느냐? 누가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었느냐? 내가 이제 새 일을 행하리라. 황폐한 그땅을 물댄 동산처럼 회복시켜주겠다. 누가 내 백성을 압제했느냐? 내가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팔을 걷어붙이시고 자신의 백성을 돌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다 한 번쯤 다음과 같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 동네에서 친구나 누군가와 싸우고 얻어터지고 있는데 어머니가 팔을 걷고 나오시면모든 게임이 끝나죠. 때리는 녀석들이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가죠. 어머니는 저를 안고 집으로 안전하게 데려오죠. 어머니가 팔을 걷어 붙이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팔을 걷어 붙이셨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팔을 걷으시고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동안의 아픔과 고통과 눈물을 씻어주시면서 수고했다며 우리를 찾아오시고서 위로해주시며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팔을 걷으시고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찾아오심을 여러분들도 보고, 이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셨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민 처지가 되어서 절망 가운데 탄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바벨론의 침략과 예루살렘의 초토화,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이스라엘의 바벨론의 포로생활, 그것은 그들에게 절망이며 죽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절망과 죽음과 같은 상태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 되었다”(겔37:11)고 하는 ‘마른 뼈’의 환상으로 보았습니다. 이같은 이스라엘의 절망과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절망과 탄식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도 없는 분으로 간주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시편 42편 10절에서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라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또한 시편 3편 2절에서도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이같은 탄식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이스라엘을 돕지 못하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 않는, 즉 죽은 하나님이 아닌가라고 조롱하는 것에 대한 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 처했는데도 하나님은 개입하시지도 않고 능력을 행하시지도 않으셔서 마치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탄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15절에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고 고백할 때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본문 말씀은 이같은 이스라엘의 좌절과 낙심과 탄식과 죽음과 방불한 상황이,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하여’ 완전히 반전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인한 반전, 하나님의 통치는 때때로 그렇게 얼굴을 내미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탄식과 절망 대신 소망과 찬양이, 죽음이 아닌 생명의 상황으로 반전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인한 구원과 평화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순례자가 여행을 하는 중에 굉장히 지쳐있었습니다. 그런데 와보니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안에 있는 정원사가 순례자에게 들어오라고 손짓합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사자가 입구에 있었습니다. 사자가 있는 것을 보고 순례자는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정원사는 사자가 사슬에 묶여 있으니 들어오라고 하지만 무서워서 못 들어갑니다. 정원사가 아무 걱정을 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순례자가 용기를 내어 들어가는데 사자가 잠에서 깨어서 으러렁 거리며 달려들려고 합니다. 그러자 순례자는 사자 때문에 멈추고 맙니다. 결국 집안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상황이 어렵고 사탄의 역사도 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 역사가 후퇴하는 것같고 약속의 말씀, 소망의 말씀보다 현실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는 게 옳은 것 같을 때라도 우리가 굳게 붙들어야 할 진리는 우리의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참된 평화와 구원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19년 1월 첫째 주일입니다. 올해에 우리가 굳게 붙들어야 할 진리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화를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온다 해도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올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12월3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또 한 번 더 주어진 기회 (눅 13:1-9)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건에는 결정적인 때, 결정적인 국면이 있습니다. 오늘은 2018년의 마지막 주일이며 내일은 2018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때를 살아가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지난 1년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가 필요 없는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 해에 쌓인 죄악을 회개로써 씻어버리고 새롭게 2019년을 맞이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회개도 시기적절한 회개가 중요합니다. 얽매이던 것을 벗어버려야 새로운 미래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는 것이고 회개할 기회를 언제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늦기 전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언제든 일어나야 할 사건입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두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한 여인은 가슴을 치며 울면서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여인은 "목사님, 저는 별로 죄를 지은 것이 없어요. 자질구레한 죄는 많이 지었지만 큰 죄는 기억날만한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은 울고 있는 여인에게 "당신은 가서 큰 바위 하나를 가져오세요" 라고 말하고, 자질구레한 죄만 지었다는 여인에게는 이렇게 말합니다. "치마폭에 자잘한 돌을 많이 가져오세요." 얼마 후 울던 여인은 낑낑거리며 큰 바윗돌을 가지고 왔습니다. 다른 여인은 치마폭에 조그마한 자갈을 잔뜩 가지고 왔습니다. 목사님이 두 여인에게 말합니다. "가지고 온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으세요" 큰 죄를 지었던 여인은 바윗돌을 그 자리에 쉽게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나 자질구레한 돌을 가져온 여인은 난처해합니다. 목사님이 "왜 안 갖다 놓습니까?" 물었더니 대답합니다. "자질구레한 돌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어디에 갖다 놓아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십니다. "죄는 바로 지었을 때 그 자리에서 회개해야 됩니다. 잔잔한 죄라고 회개 안 하면 잔잔한 돌멩이 같아 회개하려 해도 어디서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또 몇 개인지 알지 못하므로 회개하기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죄는 그때그때 회개하며 청산해야 합니다."
(https://godpeople.or.kr/story/341593에서 발췌)
오늘 본문에 보면 두 개의 사건이 나오고 이 두 사건과 관련된 하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본문 첫째 부분(1-5절)에서는 최근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두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한 권력자의 악의에 의해서 생겨난 죽음입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어떤 갈릴리 사람들이 학살당했던 사건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을 맞이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고 거기서 유월절 양을 잡고 있을 때에 발생했던 일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종교제의의 순간에 로마 총독 빌라도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해버렸던 것입니다. 희생양의 피와 갈릴리인들의 피가 뒤범벅되어버릴 정도의 무자비한 학살이었습니다. 빌라도라는 정치 권력에 의해 갑작스럽게 죽게 된 그들의 죽음은 타인의 악의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죽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직 생존해있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사건이 되어야 바른 해석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덧붙여집니다. 그들이 더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비극을 경험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삶과 생존이 이와 같이 갑작스럽게 끝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급작스럽게 일어난 재난, 곧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예루살렘 실로암못 주위에 세워진 높은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게 된 사건입니다. 이들 역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뜻밖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한마디로 어쩌다가 부적절한 시간에 그리고 부적절한 장소에 서 있었다는 이유로 그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누구에게라도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는 불청객이 바로 죽임입니다.
이같은 비극을 목도한 사람들은 흔히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특별히 죄가 많아서 벌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그 당시 사람들이 보통 품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생각이 바람직하지도 않고 잘못되된 생각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언급하시고서 본문 2절에서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또 4절에서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토록 비참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보다 죄를 더 많이 지었기 때문이냐고 반문하시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라는 것이겠죠. 그리고서는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3절, 5절)고 두 번이나 같은 말씀으로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일반적인 회개의 중요성만은 아닙니다. 때의 분별과 회개의 시급성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또다시 주어진 기회의 한시성을 아울러 강조하는 비유, 곧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가 그래서 이어집니다.
본문 둘째 부분(6-9절)에서 소위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두 사건을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포도원에 심어진 무화과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비유로써 말씀하십니다. 비유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파라볼레’라는 단어인데요, ‘파라’는 곁에, ‘볼레’는 던지다라는 뜻입니다. 옆에 나란히 던지는 게 바로 비유입니다.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추상적인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구체적이면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나란히 던짐으로써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를 보다 쉽게 생생하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회개’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가 3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자 매년 와서 무화과나무를 유심히 관찰했던 포도원 주인이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포도원지기에게 명령합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덩치 큰 무화과나무를 다른 열매 맺는 나무로 대치하려는 것이죠. 그러자 포도원지기는 일년만 더 기다려보자고 요청합니다. 열매를 맺는가 보기 위한 기간으로 일년을 제시한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8-9절) 여기서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는 말은 ‘일년 만 더’라는 간청입니다. 이 간청은 법적인 용어로 말하면 ‘일년집행유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버리겠다는 주인의 말은 무서운 심판의 말입니다. 이 무서운 심판 앞에 서 있는 포도원지기는 심판을 거두어 주실 것을, 즉 ‘일년유예’를 간청한 것입니다. ‘일년유예’를 간청하는 포도원지기는 단단한 각오와 결단을 말합니다. 주인이 금년 한 해만 더 참아 주시고,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시고, 기다려주신다면, 그동안에 그 나무를 손질하고 관리하고 비옥한 거름을 주어서 한 번 좋은 열매 맺도록 살려보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년이 지난 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버리시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는 ‘아직은 늦지 않았다 해도 시간이 많지는 않다’, ‘아직은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어찌할 수 없는,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모든 것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비유이면서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때가 갑작스럽게 이를 수 있음을 아울러 강조하고 있습니다. 금년 한 해 더 열심히 일해서 열매를 맺음으로써 포도원에서 찍혀 나가는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면서도 이 기간은 한시적인 ‘일년집행유예’ 기간임이 균형 있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유예기간은 은혜의 기간이며, 동시에 회개할 수 있는 기간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무서운 경고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무화과나무 비유는 아직 기회가 남아 있으니, 즉 회개할 기회가 남아 있으니, 그 기회를 잘 포착하여 심판을 피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비유는 만일 남아 있는 은혜의 기간을 잘 보낸다면 심판을 피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치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찍혀 내버려지듯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 비유는 회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서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참으시는 하나님, 심판에 앞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이 비유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회개 촉구가 선포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마지막 시대를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 아마 그리 길지 않은 은혜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는데,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삶에 아무런 결실이 없는 이들 곧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왜 삶과 생존을 부여받고도 계속해서 자연의 자원을 그토록 비생산적으로 소모만 하고 있는 것일까요? 누구든 열매를 맺지 못하고 비생산적인 삶을 지속한다면 그리고 돌아서기를 뒤로 미룬다면 이 무화과나무가 당한 운명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은 악의에 찬 권력자의 손에 의한 죽음이었고, 18명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뜻밖의 불의의 사고로 인한 죽음이었다면, 무화과나무는 분명 아무런 열매 맺는 노력이나 활동이 없고 열매가 없어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사건들과 관련된 죄보다 더 큰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한 해를 넘기면서 새로운 각오로 회개하지 않고 마냥 뒤로 미루거나 변화를 위한 결심 부족에서 오는 죄는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이 죽음을 맞게 된 것과 관련된 죄보다 더 큰 죄입니다. 무화과나무 비유는 그렇게 뒤로 미루는 삶을 회개하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마지막 시대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마지막 시대는 ‘금년’에 국한됩니다. ‘신년’에 국한됩니다. 무작정 계속 연장되지 않습니다. 한시적으로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서 죄만 짓고 열매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결국 재앙을 당하게 된다는 단순한 사실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죄와 재앙을 연결시킴으로써 자신은 재앙을 당하지 않았기에 자신은 그런 죄와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고 그 때문에 재앙을 당하지 않았다고 여기며 자기의 삶에 안주하는 태도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그런 태도는 결국 죽는 길이며 망하는 길입니다. 회개가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절망적인 사람도 또한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체험하기 때문에 너무나 회개가 절실하다고 필요한 사람이 바로 살아있는 사람이고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불에 데이고 있는데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나 아예 불 가까이에 가보지도 못한 사람은 회개의 시급성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과 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에 입각하여 회개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미국의 철학자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이란 책에 보면 지옥과 천국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지옥은 ‘아차!’하는 간발의 실수로 가는 곳이 아니다. 인간은 털끝 하나 차이로 천국을 놓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외면하고 피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의 결과로 천국을 놓치는 것이다. ‘바깥 어두운 곳’의 심판의 처소는 결과적으로 원하는 자가 가는 곳이다. 삶의 방향 전체가 천천히 그러나 확고부동하게 하나님과 어긋나는 쪽으로 굳어진 자가 가는 곳이 지옥이다.” 천천히 데워져서 뜨거워지고 있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끓게 되는 가마솥 안에 넣어진 개구리와 같은 운명의 길을 많은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와야죠. 따뜻해지고 있다는 현상 때문에 오히려 안락함을 느낀다면 결국에 물이 끓을 때 거기서 뛰쳐나오지도 못한 채 죽게 될 것입니다. 거기서 뛰쳐나와 그리스도 안으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이며 그렇게 천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두 번이나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라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자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서 존재하게 되어서 존재의 빚을 지고 있는 존재들인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야 할 것이냐, 인생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바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죄로 인해 죽었던 인생을 살리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로 생명을 얻게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이냐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복음을 말씀을 듣고서 예수 안에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생명의 길이 있음을 믿기로 선택하고 작정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 백성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천국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세워진 나의 통치와 인간적 통치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성령에 이끌려 살지 못했다면 다시 회개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서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이 나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 가득하여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세상 질서와는 전혀 다르게 세워진 교회를 통해 세상에 대항하여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색으로 집안을 망친 한 사나이가 극적으로 회개, 빛나는 생애를 보낸 산 역사가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을 쓴 세계적 문호 빅토르 위고가 주인공입니다. 어느 날 이분의 외동딸 레오포르딘의 시체가 파리의 세느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유서도 함께 발견되었는데요. 아버지의 심한 외도와 과음, 거기에 짓눌려 사는 비참한 엄마 때문에 살 의욕을 잃었다는 유서였습니다. 위고는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외치며 회개하고서, 완전히 새 사람이 됐습니다. 공무원이 되어 헌신적으로 일해 프랑스 교육부장관까지 지내고 프랑스 국기인 ‘3색기’의 유공자가 되었습니다.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며 그의 문학도 더욱 깊어갔다고 합니다.
부흥사 무디 목사님은 “회개란 꽃병 속에 넣은 주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가리가 좁은 꽃병 안에서 주먹을 움켜쥐면 손을 뺄 수 없습니다. 돈 명예 지위 권력 구습과 옛 생활 등을 고집하면 회개는 어렵습니다. 주먹손을 비운 ‘열린 손’이 회개입니다. (http://blog.daum.net/elelel3/7100665에서 발췌)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항해서 자신의 통치를 세워보고자 마치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어 살아가려는 아담의 자손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올해도 살아갔고 또 내년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죄인이지만 살아가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중보자 사역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2018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2019년을 맞이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는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회개하고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2019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전개하셨던 ‘예수의 하나님나라(천국) 운동을 계승하는 동산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쁜 소식을 온몸으로 받고 전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가는데 앞장서기를 바랍니다. 진정으로 거듭 회개하여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이땅에서 계승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12월2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 (히 1:1-3)
선한목자교회 유기성목사님이 남미 브라질에 집회 인도 차 가셨다고 합니다. 일정을 마치고 이과수 폭포를 가보았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를 자랑하는 이과수폭포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국경 지대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이과수폭포를 브라질 쪽에서 가보고 광경에 압도당했습니다. 강 가운데로 길을 만들어 폭포 바로 앞까지 가 볼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그 다음날 일행이 또 이과수폭포를 가보자는 것입니다. 아르헨티나쪽으로 가서 보는 이과수폭포는 또 다른 광경이라는 것입니다. 이분은 브라질 쪽에서 본 광경이 너무 놀라와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주위에서 하도 권하길래 다음 날 아르헨티나 쪽에 갔습니다. 가보니 역시 강 위로 다리를 만들어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브라질 쪽에서는 강 아래에서 위로 보며 갔기에 가는 내내 경관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아르헨티나 쪽은 그저 평범한 큰 강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들어가 보니 굉음이 울리며 뭔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난 폭포 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과수 폭포를 위에서 내려다 본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브라질 쪽에서 보던 것과 또 비교가 안되는 광경이었습니다. 같은 이과수 폭포였지만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예수님이란 이와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각도로 조명받아야 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어느 한쪽으로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전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아십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3절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에서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성경의 모든 부분 부분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을 깊이 아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왜 예수님은 이땅에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셨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우주만물과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이땅에 가져다주신 하나님나라는 무엇인가?’, ‘왜 예수님이 이땅에 오실 때 가장 낮고 천한 구유에 연약한 아기로 오셨는가?’,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는가?’, ‘왜 예수님은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서 성령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가? ’왜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셨는가?’, ‘교회의 사명과 본분은 무엇인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가?’ 등등의 질문은 기독교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히브리서 1장 1-3절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여러 측면에서 예수님을 조명해보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통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말씀을 전하게 하셨고, 역사의 막바지에 이르러 최후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우리를 향해서 말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최후의 말씀이십니다. 이땅에 인간이 되셔서 오신 예수님의 성육신, 이땅에서 그분의 생애, 생애의 절정으로서 십자가의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부활 후 승천과 승천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심,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영을 교회에 보내셔서 능력으로 교회를 붙드심, 그리고 성경의 약속대로 이땅에 다시 오심 등을 통해서, 즉 예수님의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지금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뿐 아니라 천상에서 하고 계시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교회의 사명도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함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님을 보아야 합니다.
성탄절 즈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내려오사 인간이 되신 신비 곧 성육신의 신비를 많이 생각합니다. 하늘 영광 버리고 인간이 되심도 지극히 자신을 낮추심인데, 이땅에 오실 때 누일 곳이 없어서 동물의 거처인 구유에서 나시고 지극히 연약한 아기로 오셨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이렇게 이땅에 오심뿐 아니라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처참하게 고통당하고 피흘려 죽으심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극랄한 인간의 죄악의 형벌을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해서 무섭게 침묵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는 아들의 외침을 아버지는 외면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인정하신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아버지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신원해주시고, 십자가의 죽음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하나님께 인정받았음을 확증한 사건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입니다. 이로써 이땅이 얼마나 죄악에 물들어있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이탈했는지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를 죽음에 넘겨주시고 아들은 무력하게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이분의 사역 전부를 통해서 그리고 이분의 인격 전부를 통해서, 이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통보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가 되시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들도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은 독생자이십니다. 독생자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단 하나의 아들이시고 영원한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이땅에 파송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독생자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처음 태어난 자”라고 불립니다. 여기서는 유일성보다는 먼저 태어났음이 강조됩니다.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서 처음 태어난 자 곧 장자를 뜻합니다. ‘독생자’라는 말로서 아들이신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배타적 관계를 드러냈다면 ‘처음 태어난 자’라는 말로서 뒤따르는 동생들과 형제 자매 관계로서 사귐의 관계를 드러내줍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하나님이 예수님을 단순히 ‘그 아들’ 곧 ‘독생자’로만 남겨두지 아니하시고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많은 형제 중에서 예수님을 맏아들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 자매들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맏아들로 세우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5절에서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태어나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알아가고 예수님과 교제하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하고 처음 창조 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독생자이시고 맏아들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 가운데서 끌어올려져서 삼위일체의 교제 가운데로 끌어올려지는 것입니다. 독생자이신 아들의 성육신을 통해서 가능케 된 은혜와 축복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3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성육신의 의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질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함은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로 아담을 피조세계 위해 높이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리고 통치하는 존재로 높여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자라는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활용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려야 했지만,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아담의 반역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불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회복하고자 하나님은 여러 부분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구약성경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의 죄악됨으로 인한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둘째 아담, 최후의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심지어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인격 안에서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습니다. 그분이 거점이 되어 천국 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자신을 통해서 온전히 이땅에 모습을 드러냈음을 가르쳐주셨고 천국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통하여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 앞에 만나는 사람들을 세우시고서 도전하신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갔던 실패의 길을 가므로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둘째 사람 예수님이 죽기까지 복종하여서 십자가의 길을 가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드러낼 것인가 하는 도전입니다.
이 외에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이시며, “모든 세계를 지으신 분”으로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분”으로,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는 분”으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되시고 참된 형상이 되신 예수, 우리 모두는 나사렛 사람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결정을 내려야만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오늘의 삶을 결정할 것이고, 영원한 운명을 결판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예언의 말씀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표적인 예언의 말씀,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우리에게 난 한 아기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오 평강의 왕이라는 호칭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미가서 5장 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개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땅에서 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1973년에 서울 여의도에서 빌리 그래함 한국전도대회가 열렸을 때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송을 부른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1984년에 한국기독교 100주년선교대회가 역시 여의도에서 열렸을 때, 7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이 찬송을 불러 성도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복음성가 가수 조지 베버리 쉐어(George Berverly Shea)라는 사람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난해서 학교를 휴학하고 보험회사에서 근무했습니다. 어느 날 NBC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은 감동했습니다. 그는 별안간 갑자기 스타가 되었습니다. 여러 방송사들이 계약을 제의했고, 이제 인기와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왠지 기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늘 암송하는 시가 그의 마음에 떠올라 마음 가득 퍼져갔습니다. 그 순간 그가 어떤 길로 가야 할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영감을 받아 그 시에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 노래가 바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 94장)입니다. 결국 그는 부귀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가수의 자리를 버리고, 다시 평범한 보험회사의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다가 빌리 그레함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그와 함께 간증과 찬양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가 찬송을 부를 때마다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때마다 그가 남긴 한마디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숙연케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주신 박수 갈채를 그리스도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예수님이 가장 귀한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의 생애를 바꾸어 놓던 노래 가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제 찬송가에는 한글 가사 밑에 영어로 된 원래 가사가 함께 있는데 영어 가사는 한글 가사와 조금 다릅니다. 이 찬송가를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금이나 은보다 차라리 주 예수를 가지리, 큰 재물 갖느니보다 차라리 주 예수의 것 되겠네, 큰집과 넓은 땅 갖기보다 차라리 주 예수 가지리, 못 박힌 손에 이끌림이 차라리 나으리라”
그의 노래는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이 귀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귀하신 예수, 바로 그것이 그의 신앙이었고,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에서 울려 퍼지는 그의 노래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내일 모레면 성탄절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낮아지셔서 인간이 되시고 지극히 낮아지셔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 미천한 인생을 끌어올려서 생명의 근원이신 영원하신 하나님과 연합케 하시려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에 가장 자주 사용되는 단어는 ‘생명’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한 생명과 기쁨과 평화! 인생의 최고의 목표가 있다면 바로 예수님을 더욱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힘써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생명과 기쁨과 평화가 성탄절 즈음에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18년 12월16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그리움 (딤후 4:9-22)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방송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프로그램입니다. 중간에 없어졌다가 다시 방영되고 있는 프로그램인지 아니면 그때 이후로 쭉 계속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인지는 모르겠지만 요즈음에도 방송이 되고 있는 줄 압니다. 최근에 가수 현미씨가 나왔는데요, 이분이 나이가 82세입니다. 누구를 찾냐면 함께 미8군에서 음악활동을 함께 했던 올해로 80세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남자 동료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이분이 TV에서 나이가 들수록 옛 사람이 그립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립다’는 강재현 시인의 시가 있습니다. 제가 한 번 낭송해보겠습니다.
사람이 그립다
- 강재현
이유없이 사람이
그리운 날이 있다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서 있는 날
시선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마음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몸만 살아 움직인 날은 진짜 사람이 그립다
가슴 속 뒤주에 꼭꼭 숨겨두었던
속내 깊은 이야기 밤새 풀어놓고
마음이 후련해 질 수 있는
그런 사람
세월가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일지라도
눈물로 쏟아내면
채에 걸러 맑은 물로
내 가슴에 돌려 줄
뿌리 깊은 내 나무
아, 이젠
나 역시 누구의 눈물을 걸러 줄
그리운 사람이고 싶다.
12월이 되면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다 보니 그리움이 쌓여져갑니다. 한 해를 되돌아보며 아쉬웠던 일이나 후회 가득한 일들이 잘한 일들보다 더 생각나기 마련입니다. 그동안 스쳤던 사람들, 갈등했던 사람들, 미워했던 사람들, 그리고 좋아했던 사람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아울러, 12월에는 새로운 한 해가 다가옴을 느끼며 신년에 대한 어떠한 바람과 소망도 마음속에 생겨납니다. 새해에 대한 포부와 기대가,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미련과 함께 뒤범벅돼서 인간 본연의 정서라 할 수 있는 그리움으로 쌓여가는 것입니다.
국어사전에 보니 ‘그리움’이란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뜻합니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움에 사무쳐 애타게 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그리워하십니까? 무엇이 그립습니까?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단순히 연대순으로 마지막일 뿐 아니라 죽음을 앞에두고서 유작처럼 쓰여진 서신입니다. 노년의 바울, 그리고 죽음을 앞에 둔 바울, 디모데에 대한 그리움이 짙게 밴 바울의 유작과도 같은 마지막 말이 바로 디모데후서이고 그중에서도 서신의 마지막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로마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갇혀 있은 채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며 가끔 법정에 불려나가 심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로마에 죄수의 신분으로 오게 된 사도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일종의 가택연금 상태에서 찾아오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자유는 보장받았으나, 그후로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금 2차 투옥은 말 그대로 로마의 캄캄한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노년의 바울은 몸이 많이 약해져 있는 듯하고, 잘 알려져있는, 오늘 본문의 바로 직전에 있는 말씀 디모데후서 4장 6-8절에 보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아마 사형 판결이 곧 날 것이고 곧바로 이어서 사형 집행이 될 것으로 바울은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결연하고도 숙연한 죽음에 대한 발설 직후, 오늘 본문 디모데후서 4장 9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21절에서 한 번 더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다급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올텐데 겨울이 오면 지중해에서 항해가 어려워지게 되고 그러면 봄이 되어서야 로마에 올 수 있게 되니까 서둘러서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는 재촉입니다. 지금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데 디모데를 급히 찾는 이유는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평생의 동역자였고 영적인 아들처럼 여기는 디모데를 죽기 전에 만나보고픈 열망과 그에 대한 그리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은 영적 거장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역사적 위인 바울이 죽음을 앞에 둔 말년에 좀 쓸쓸해보입니다. 디모데를 오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바울 곁을 떠났음을 언급하는 데서 쓸쓸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10-11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다음주 금요일에 단체 관람을 하게 될 영화 <사도바울>에 보면 누가가 바울의 지하감옥에서 바울의 구술을 바탕으로 사도행전을 쓰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의사 누가는 지금 바울 곁에서 바울의 감옥생활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동역자였던 데마는 신앙을 버리고 또한 바울의 동역자였던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 데살로니가로 돌아갔습니다. 다른 동역자였던 그레스게나 디도 역시 다른 곳에 가서 사역을 하고 있어서 바울 곁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역자들에게 버림받은 것만 같은 기분에 붙잡혀있는 듯합니다.마지막이 가까워서 그런지 예전에 상처주었거나 갈등했던 사람에 대해 더욱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마가는 누구입니까? 안디옥교회에서부터 바울의 동역자였고 함께 목회했던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함께 하였으나 도중에 힘들어서 포기하고 돌아가버렸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에 바나바는 재차 마가를 데려가려고 했으나 바울이 반대했고, 이 일로 인해서 바울과 바나바는 크게 다투었습니다. 결국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자신의 고향이었던 키프로스섬으로 가서 선교활동을 하고 바울은 다른 동역자 실라를 택해서 2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마가와 바울의 관계가 어떻게 회복되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혹은 오늘 본문에서 유추해보면 바울이 죽기 전에 마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바울은 자신이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에 가져와야 할 것을 말합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13절). 바울은 다가올 추위를 대비하기 위하여 “겉옷”(13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일 수도 있고, 지금도 몸이 많이 약해져있어서 추위를 타고 있어서 “겉옷”이 긴급하게 필요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울러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감옥에서 읽기 위한 책이거나 성경책이었을 것입니다. 살면서 친구도 필요하고 우정도 필요하고 옷도 필요하고 책도 필요하죠. 책을 수시로 읽던 사람이 책을 못읽는 상황이 되면 힘들죠. 지금 지하감옥에서 쓸쓸하고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신앙의 힘으로 살아가는 영적 거장 바울이라고 해도 인간관계가 제공하는 우정을 하나님이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을 하나님이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비록 외롭고 쓸쓸하고 고독하지만, 나는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겠다. 그러니 인간관계나 우정은 필요없다!’, 결코 그럴 수 없죠. 외롭고 그리울 때는 친구가 필요하고 추울 때는 옷이 필요하고 시간을 보내기에는 책만큼 좋은 것도 없겠죠. 이런 것들은 좋은 의미로 굉장히 인간적인 것들입니다.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는 인간관계의 다양한 모습입니다. 그리운 사람(디모데), 배신하여 떠나간 사람(데마), 바빠서 떠난 사람(그레스게, 디도), 평생 곁에 남는 사람(누가), 한때 갈등하고 싸웠지만 관계를 회복하고 싶은 사람(마가), 그리고 결정적일 때 해를 끼친 사람 등. 14절을 보십시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아마 알렉산더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만든 2차 투옥의 밀고자가 아니었다 싶습니다.
이런 저런 인간관계 양상을 보여주지만 주조는 외로움과 쓸쓸함입니다. 이는 인생의 황혼기에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요. 이러한 외로움과 쓸쓸함과 그리움은 첫 번째 법정 심리에서 바울을 위해서 증언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음으로 인해서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16절에 “내가 처음 변병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처음 변명할 때”란 공식 판결에 앞서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법원이 증거나 증언 등을 심사하는 것으로서 로마법의 한 절차입니다. 로마법에 따라 바울은 변호사를 선임하고 증인을 내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나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바울을 변호해주거나 그의 편에 서서 증언해주고 재판에서 바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의 죄목은 로마 황제나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상황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바울은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뭇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어서 오라”고 재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그리워하십니까? 무엇을 그리워합니까?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도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을 보고 싶은 마음, 평생 추구했던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위로의 하나님, 어려울 때 도와주신 하나님, 연약할 때 힘주신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보고 싶은 그리움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낀다면 하나님을 피난처 삼고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강렬해질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대로, 심지어 로마의 법정에 와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쓸쓸하고 외롭고 그리움에 사뭇쳐도 주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자신에게 힘을 주시기 때문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복음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황이 마치 사자의 입에서 그 사자의 입을 하나님이 막아주셔서 잡아먹히지 않게 건져주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비록 감옥에 갇혀있고 죽음이 임박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시편 63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립습니까? 하나님의 얼굴 보기를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은 자연스레 천국에 대한 소망, 천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집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제 모교 신흥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섬기기도 했고 나중에 서울대 음대 초대학장으로 봉직했던 현제명이라는 작곡자는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곡에다 잘 담았습니다. 그분의 곡 ‘그 집 앞’에 보면 “오가며 그집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몰래 발이 머물며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읍니다.” 이 곡은 이은상 시조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인데요, 이분이 직접 작사 작곡한 '고향생각'에는 “1.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다 내 동무 어데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2. 고향 하늘 쳐다보니 별 떨기만 반짝어려 마음 없는 별을 보고 말 전해 무엇하랴 저 달도 서쪽 산을 다 넘어가것만 단 잠 못 이뤄 애를 쓰니 이 밤을 어찌해"라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세월이 흐르면, 그리고 나이가 들면,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지면 고향생각이 나기 마련입니다. 잘 알려진 동요 ‘고향의 봄’에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가 담겨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 꽂 살구꽂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러한 그리움은 시와 같은 예술 장르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되는 주된 주제가 되고 심지어는 대중가요에서도 자주 언급되는 그리움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은 결국 근원을 소급해들어가면 본향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어디입니까? 우리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품에서 나와 하나님 품으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본향 곧 돌아갈 곳은 처음 나왔던 곳의 다름 아닙니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리운 것이고 더 소급해들어가면 처음 우리를 창조해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품입니다. 어머니의 품이 그리운 것처럼 하나님의 품이 그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쓰다듬어주심과 위로해주심 그리고 만져주심이 그리운 것입니다. 우리 존재의 기원이자 우리 존재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리움이요 그래서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주님의 나라를 위해 뒤도 볼 것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던 바울이 지금 그리움에 사뭇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그리움,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천국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그리움이 단순히 그리움으로 그치지 않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그분 곧 영원하신 말씀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성육신하셨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대상인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를 천국에서 연합시켜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연합하게 됩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우리로 예수 안에 있게 하므로 하나님 안에 있게 하려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있게 하려고 영원하신 말씀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신학적으로 성육신 사건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창조의 완성입니다. 처음 창조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가시적 형상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이유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창조의 절정이요 창조의 면류관입니다. 첫 사람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지만,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존재임을 스스로 망각하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죄를 지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금령을 어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첫 사람 아담을 대신해서 이땅에 오신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그래서 창조의 완성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자 면류관인 참된 인간이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 지를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드러내주셨습니다.
이는 자연스레 성육신의 두 번째 신학적인 의미로 이어집니다.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이 이땅에 임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셨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이 오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서 그리고 창조의 완성이 되어주심은 곧바로 이어서 그분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도래한 것입니다. 천국의 임함입니다. 그렇게 천국이 이땅에 왔고, 천국에 대한 우리의 그리움이 드디어 임자를 만난 것입니다. 본향에 대한 그리움이 단순히 그리움으로 남지 않고 이땅에서도 성취되어 우리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도래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받게 된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이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의 신학자 스페인 사람 ‘십자가의 요한’은 성육신 사건을 일컬어 ‘하늘과 땅의 결혼식’으로 말했던 것입니다. 이는 처음 창조 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고 이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꼭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땅에 오신 것만은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있어서 이땅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창조의 완성을 위해서 천국의 임함을 위해서 곧 ‘하늘과 땅의 결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인간이 되셔서 오신 것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이오고 있습니다. 왠지 그리움이 쌓여져만 가는 이때, 우리의 영원한 노스텔지어, 영원한 향수는 본향 곧 천국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천국에 대한 그리움은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요, 우리 존재의 기원이자 목표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이러한 우리의 그리움이 단순히 그리움으로 끝나지 않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그리고 이땅에 오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온전히 성취되고 눈에 보이게 보여질 것을 확신하는 절기입니다. 천국의 임함으로 인한 기쁨과 평화가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아멘.
■2018년 12월9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모여서 기다리자! (히 10:19-25)
지난 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써 새 언약을 우리와 맺으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흘리신 피가 새 언약을 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곧 유월절 만찬을 나누면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2장 19-20절에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므로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위해 피를 흘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은 예수님께서 그냥 새롭게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그것도 언약을 깨뜨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먼 이국땅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유다 백성에게 새 언약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패의 자리에서 회복의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셨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은 언약의 법을 이제는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목적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를 이루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새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을 또한 약속해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죄를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그리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셨던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은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 속에 두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 백성답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새 언약의 약속은 언약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인데요, 부어주실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가능케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핵심은 마음입니다! 새로워진 심령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롭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심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의 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본문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언제든지 기꺼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려면 성전으로 가야했고, 아무나 성전의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일년에 단 한 차례,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대제사장만이 대속죄일날에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 처소로서 하나님께서 이땅 위에 허락한 유일한 곳, 곧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대제사장이 대속죄일날에 동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지성소 안에 있는 정방형모양의 언약궤 뚜껑인 속죄소 위에다가 가지고 들어간 동물의 피를 쏟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을 때 동물의 피를 하나님측 제단에 뿌린 것과 흡사합니다. 이제는 모든 인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편에 뿌린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그 피는 이미 우리에게도 뿌려졌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이미 우리에게 뿌려졌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편에게도 뿌려졌습니다. 새 언약을 맺기 위해서 흘리신 피입니다. 그분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겨져나가서 흘린 피입니다. 다시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서 성소는 성전 지성소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아무 주저함 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접근 권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어질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피로써 가능케 된 일입니다. 이어지는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셨을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0-51절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라고 말씀합니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져서 지성소의 속살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일년에 단 한 차례 대제사장만이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가 이제 열리게 된 것입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진 휘장이 곧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찢겨짐으로 말미암아 성소 휘장이 찢어져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살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곧 새 언약을 위해 흘리신 피를 가지고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21절에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라고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목회자들의 여러 비행이 심심찮게 방송으로 보도가 되어서 목회자들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버렸는데요, 그럼에도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목회자를 하나님의 종으로 알고 우러러보는 시선을 느낍니다. 저는 보통 예배드리기 10분 전에 강단에 올라옵니다. 이미 와 계신 성도님들이, 특히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 젊은 목회자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바라보심을 느낍니다. 죄와 허물이 많은 인간 목회자를 바라볼 때도 그러실진대,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한 대제사장이십니다. 하나님의 집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얼마나 믿음직한 분이십니까? 그분이 교회를 다스리시며 교회의 머리로서 하나님 앞에 인류의 대표로 서계신 것이 얼마나 듬직합니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십니까?
이러한 이론 위에서 오늘 히브리서 기자는 세 가지로 실천적 권면을 우리에게 줍니다. 첫째,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권합니다. 둘째, 소망을 끝까지 굳게 붙들라고 권합니다. 셋째, 사랑을 가지고 서로에게 베푸는 선행을 격려하라고 권합니다.
1.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고 그 외적인 확증과 인침의 증거로서 세례도 받았으니 우리가 무엇을 주저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기꺼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성령으로 새로워진 마음을 가지고 나뉘어지지 않는 한 믿음을 가지고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의 결단과 각오로써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이제부터는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겠다는 결단과 각오로 새출발하자는 것입니다.
2. 소망을 끝까지 붙들자!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우리의 믿음의 내용은 온통 소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자녀 삼아주신 구원자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부활시켜주시사 우리로 부활의 소망을 주신 부활에 대한 믿음, 영광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동참시켜주시기 위하여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혀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 영광을 누리게 하실 영광에 대한 믿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은 온통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영광스런 약속을 주신 분은 믿을만한 하나님이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에 충성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소망 삼아서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도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쳐와도, 사는 게 힘들어도 요동치 않고 소망을 바라보고 굳게 부여잡고 인생길을 인내하면서 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끝이 좋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법입니다.
세상에는 참된 소망이라는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좀 더 잘 살게 될 거라는 소망뿐이지만, 그 소망도 헛된 신기루와 같을 때가 많습니다. 유일하고도 참된 소망은 창조주 하나님이 약속해주시는 소망뿐입니다. 바로 그 소망을 끝까지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3. 사랑으로써 행해지는 선행을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말씀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해가는 서로를 돌보아주고 비록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으로써 행해지는 선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라는 것입니다. 선행은 죄악된 본성을 지닌 우리가 계속 해나가기에는 벅찬 과제입니다. 늘 성령의 도우심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공급받아야 계속해갈 수 있는 게 바로 선행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만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으로써 선행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선행을 지속할 수 있기 위하여 우리는 공동체로 모여서 서로를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선한 자극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선행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교회 사역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서로로부터 받는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하고 칭찬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게 보이죠. 사랑의 말이 나오게 돼 있죠. 남을 판단하고 쉽게 정죄하기보다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에만 갇혀서 자신만이 온통 문제를 안고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듯이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돌아볼 줄 아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것을 소망 삼아 끝까지 붙들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서 서로를 사랑하고 끊임없이 선행을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끊임없이 나아가고 소망을 붙들고 끝까지 인내로써 살아가고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선행을 계속 격려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모이기를 원하지 않고 믿음도 떨어지게 될 터인데, 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우리 교회는 더욱 힘써 모여야 합니다. 힘써 모여서 서로를 돌보아주고 서로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써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줘서 계속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연약한 믿음을 지닌 자에게 믿음에 관한 간증과 증거를 통해서 믿음생활을 계속해갈 수 있도록 도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권면해주어야 합니다. 너무 힘들어서 소망을 잃어버리고 낙심하고 좌절한 지체가 있다면 찾아가서 위로해주고 다시 소망의 말씀을 전달해주므로 영혼을 소생시켜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모야야 합니다. 교회는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이 모이면 교회가 형성됩니다. 모여서 서로에게 선한 자극이 되고 격려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올바른 방향이라면 비록 힘들고 고달파도 계속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가 힘이 되어주고 격려를 해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교회로 모여야 하고, 소그룹으로 모여야 하고, 구역으로 모여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모여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면 안됩니다. 모여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써 살아가고 또한 모여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이 설교 말씀을 듣고 제게 질문하고 싶은 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자꾸 교회에 모이기를 강조하는데 주님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꼭 교회라는 데 갈 필요 없이 내 집에서 혼자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 터이고 요새는 인터넷으로 예배드리는 미디어 교회도 있는데, 꼭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하나요?”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할까요? 난로에서 타고 있던 조개탄 한 개를 집게로 집어 가만히 바깥에 꺼내놓아 가령 콘크리트 바닥에 내려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활활 타던 조개탄도 금방 꺼져가겠죠. 꺼져가는 조개탄을 다시 난로에 갖다 넣으면 다시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겠죠. 교회도 이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야 할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흘러넘치게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 크리소스톰은 말하기를 “교회를 어머니로 삼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찾고자하면 교회를 찾으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 주님의 은총 받은 자들임을 믿고 더욱더 모이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모여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2018년 12월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고후 3:17)
오늘은 성례주일로 지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성경에 나온 두 가지 성례만을 시행합니다. 세례와 성찬인데요, 세례와 성찬의 의미에 대해 성경은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언약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성례, 특히 성찬 예식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개인 개인을 불러주시기 이전에 공동체로 우리 각자를 불러주셨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불러주신 것은 그 개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조성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의 백성을 조성하시려고 아브라함 개인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동체가 조성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 전체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 개인과도 언약을 맺으셔서 그의 헌신과 충성을 이끌어내셨습니다만, 그 언약조차도 그의 씨를 통해 이루실 그의 자손들과 믿음의 조상인 그를 통하여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축복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는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언약은 그의 자손 전체와 맺은 언약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와 하나님이 맺은 직접적 언약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중재로 하나님과 맺은 모세 언약입니다. 공동체적 단위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라 할 수 있는데요, 이 언약은 피로써 맺은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체결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율법을 선포하셨습니다. 율법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도 이때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로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도록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언약을 맺기 직전에 율법의 말씀을 지킬 것인지를 확인 받고서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출애굽기 24장에 언약 체결식이 나옵니다.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백성들의 다짐을 받고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동물 제사를 드립니다. 모세가 동물의 피를 양푼에 담아서 반은 시내산 쪽 제단에 뿌립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여호와께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게 하고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출 24:5-6) 그리고 나서 이미 선포되었던 율법의 말씀을 기록한 ‘언약서’를 가져다가 다시 백성들의 귀에 들려줍니다. 이미 선포되었던 율법, 특히 율법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이 포함된 책입니다. 그리고 나서 양푼에 담겨있던 나머지 반절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쪽에 뿌립니다.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7-8)
피로써 맺은 언약은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양측 모두에게 의무와 책임이 부과됩니다. 쌍무적인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버지로서 아버지 노릇 해주셔야 합니다. 아버지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인도해주셔야 합니다.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광야에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해주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하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율법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 의무 규정을 제대로 지키겠다는 의미에서 동물의 피를 제단 측에 곧 하나님편에 뿌렸고, 나버지 반을 이스라엘 백성쪽에 뿌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이 피로써 맺은 언약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연약하여 죄를 짓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약을 맺기가 무섭게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세세한 율법과 성막에 관한 설계도를 받기 위하여 사십 일간 시내산 정상에 머무르자, 모세의 돌아옴이 더디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금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이것을 하나님으로 섬기자고 했습니다. 모세가 없는 시간을 견뎌낼 수 없었던 그들은 신의 욕망을 투영한 우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섬긴 것입니다. 피로써 맺은 언약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언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그들은 언약을 내동댕이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사람들이 다시 언약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죄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제사 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만, 반복되는 죄악은 결국 언약의 파기로 이어졌습니다. 사람 편에서의 언약의 깨뜨림입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약 40년이 지난 후 모압 땅에서 갱신했습니다. 언약의 갱신인데요, 새로운 마음의 각오로 이전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적 전망을 내다보면서, 그들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서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언약 백성다운 삶을 회복할 것을 결단하는 언약 갱신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새로운 마음가짐이었고 새롭게 듣게 되는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와 또다시 언약을 갱신하게 됩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중재 아래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합니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흐른 후 여호수아의 죽음이 가까웠을 때 세겜에서 언약을 갱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약 백성답게, 피로써 맺은 언약 당사자로서 전심으로 여호와 하나니만을 섬길 것을 촉구하는 언약 갱신이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 헌신된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 또다시 언약 갱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다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세우고, 죄악으로 무너지고 황폐해진 그들의 일상을 다시 거룩함로 회복하고자 언약을 갱신한 것입니다. 혹은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앞두고 죄악된 시대를 결별하고 다음세대가 거룩한 세대로 일어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언약을 갱신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왕, 요시야왕, 히스기야왕 등 유다의 거룩한 지도자들이 언약 갱신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거듭 반복된 죄악된 이스라엘 역사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을 깨뜨려서 하나님의 심판과 언약의 저주를 받아서 그들은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포로 복역 기간이 끝난 후에 에스라 느헤미야 등의 지도자가 주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새로운 각오로 언약 갱신을 거듭하였습니다.
거듭되는 언약 갱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혀 새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잠시 잠깐뿐이었고 다시 예전의 죄악된 삶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언약에 불충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지 못했습니다. 우상숭배에 굴복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겠습니까? 근본 성향이 바뀌지 못하면 결국 언약을 지켜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 갱신 정도가 아니라 새 언약을 약속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멸망 직전에 활약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와 포로기 때 활약했던 에스겔 선지자에게 새 언약에 대한 비전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34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보여주신 새 언약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어떻게 다릅니까? 언약의 법을 이제는 돌판에 기록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의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언약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입니다. 새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을 또한 약속해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죄를 용서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언약 백성들이 언약의 파트너인 하나님을 자명하게 알게 될까요?
한 세대 후에 하나님은 포로기 때 활동하던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시 새 언약에 대한 비전을 주십니다. 에스겔서 36장 25-27절입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새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죄를 씻어주셔서 정결하게 될 것을 약속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언약 백성들의 마음속에 율법을 심어주어서 마음 다해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면, 에스겔 선지자는 여기서 한 발 짝 더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면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 속에 두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 백성답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새 언약의 약속은 언약 백성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인데요, 부어주실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가능케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전심으로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성령을 부어주셔야 죄악된 심성이 정화될 뿐아니라 사랑 없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은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으로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 부어지게 되며, 그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백성답게 바로 서게 되고 언약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새 언약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써 체결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 날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새 언약의 체결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 언약이 체결되어서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라도 새 언약의 덕을 덧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죄가 씻겨졌고, 우리가 거룩한 성전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이로써 사랑으로 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오직 새 언약의 영이신 성령으로 가능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새 언약의 영을 소유한 언약 백성들인 우리는 이제는 율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율법의 자구에 매이지 않습니다. 마지 못해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속박을 당하지 않습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자유의 영이신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거룩한 하나님을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며 이것이 내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 잔을 주시면서 이것이 새 언약을 위해 흘리는 내 피라고 하신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 최후의 만찬을 회상하고 재현하는 것이 성찬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제사와 피흘림이 또 필요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고 십자가 제사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언약 갱신처럼 새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다시금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정결하고 거룩하고 흠없게 서야 하기에 다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나뉘어진 마음이 오직 주님을 향한 뜨거운 일편단심의 헌신과 충성의 마음으로 새로워져야 하기에 다시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언약의 중재자로서 성찬식에서 새 언약을 갱신하는 언약 백성인 여러분 모두에게 새 언약의 영이신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우리는 성령으로써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의 연합이 더욱 견고하고 강하게 이루어지고 우리고 예수님과 굳게 결속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을 함께 받은 우리 모두가 공동체로서 함께 하게 되며 결속이 더욱 굳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 예식에 대해 가장 오래된 초대교회의 예전을 보여주고 있는 <사도전승>이라는 문헌에 보면, 성찬식 때 꼭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다음과 같은 기도입니다: “청하오니, 거룩한 교회의 예물(빵과 포도주)에 당신 성령님을 보내 주소서. 거룩 예식에 참여한 우리 모든 이를 결합시켜 주시고, 진리 안에서 믿음이 굳세어지도록 성령님으로 충만케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이러한 축복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2018년 11월2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함께 지어져가는 교회 (엡 2:19-22)
지난 한 주간 한적한 곳에 가서 지난 1년을 되돌아보았습니다. 작년 12월에 부임한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온 한 해였기에 잠깐 멈춰 서서 점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2019년 목회계획을 구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떠한 모습일까를 화두로 삼아 수시로 기도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2019년 우리가 나아갈 방향과 비전을 하나님께 구하고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계획을 짜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부족하지만 이러한 계획과 비전을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나눌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지난 한주간은 교회 밖에서 교회를 조망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목회자이다보니 교회를 향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염원도 가득했습니다. 2019년에는 작지만 여러 가지 변화가 시도될 터인데 성도님들의 적극적인 동참과 헌신이 있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그리고 총동원전도주일로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33명이 처음으로 교회를 방문해서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에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온 자들은 누구라도 두 팔 벌려 받아들여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아버지의 사랑은 마음씨가 선량한 이웃집 아저씨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기까지,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녀 삼아주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온 자들은 누구라도 내치지 않으시고 과거를 불문하시고 덮으시고 용서해주시는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강조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은 누구라도 두 팔 벌려 맞이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관계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신 사건이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복음이요 인류가 들어야 하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라고 시작합니다. 비유의 주인공은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입니다. 한 아들, 둘째 아들만 있는 게 아니라 아버지 곁에 늘 있었던 첫째 아들도 아들로 두고 있는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를 만들어서 비유로 들려주신 이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예수님을 책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 잃어버린 동전 하나를 위해 집안을 온통 뒤집어서 찾아보는 여인, 그리고 두 아들 모두를 관대하게 대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 이야기를 예수님이 들려주셨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유산을 미리 당겨 받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비참한 생활을 하던 끝에 살 길이 있다면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어려운 발걸음을 떼어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여겨달라고 간청할 참으로 아버지를 만나면 할 멘트까지도 머릿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발걸음을 떼고서 드디어 고향 마을 입구에 다다랐는데 사랑 많은 아버지는 아직 먼발치에서 오고 있는 둘째 아들을 보고 바로 뛰어와서 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쁨을 표출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돌아온 아들이라며 반갑게 그를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아들에게는 정말 좋은 소식이지만 반면에 그것은 또한 불편한 소식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조건도 안 붙여진 즉각적인 용서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동생이 돌아왔다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첫째 아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기보다 분노가 치밀어올랐습니다. 첫째 아들은 자신이 여러 해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섬겨왔고 아버지의 명도 어김이 없었는데 자신에게는 아무런 선물도 주시지 않고 축하 잔치를 열어주시지 않았던 아버지가 아무 기여도 안하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손해를 끼치고 겨우 먹고 살기 위해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이토록 무조건적으로 용서해주시고 기뻐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잃었던 것이 아닙니다. 첫째 아들의 태도를 보고 있노라면 첫째 아들도 공간적으로만 곁에 있었지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점에서 둘째 아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기뻐하는데 첫째 아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균열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은 늘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했고 곁에서 아버지를 도왔기 때문에 자신이 마땅히 받을 사랑을 아버지에게서 기대했습니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아버지가 사랑한 이유는 첫째 아들이 행한 것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둘째 아들도 그냥 사랑했듯이 첫째 아들도 그냥 사랑했던 것입니다. 사랑 받을 자격에 따라 첫째나, 둘째를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을 그냥 사랑했고 아들이 어떤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아버지의 성품이었습니다. 첫째 아들은 바로 그 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뻐하고 잔치를 배설한 아버지가 첫째 아들인 자신도 함께 이 기쁨에 동참하기를 기대하는 그러한 사랑을 첫째 아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쁨의 잔치에 동참하기를 거절하고 집밖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들어오라는 초대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사랑에 있어서 다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첫째 아들을 부르면서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둘째 아들에게로 향하였다는 이유로 첫째 아들에게 갈 사랑이 소진되고 부족해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사랑이 다른 아들, 첫째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에게는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듯이 그들 모두가 아버지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자녀요 그들이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중의 어느 한 사람을 위한 잔치는 가족 전부를 위한 잔치입니다. 적어도 가족에게는 말입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에게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다. 그래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너도 이 기쁨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에는 첫째 아들이 어떻게 최종 행동을 취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결말은 모릅니다. 단지 집안에서 진행되는 잔치 소리를 들으며 집밖에서 서있는 모습으로 끝날 뿐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자신은 의롭다며 밖에서 계속 홀로 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안으로 들어가 죄인들과 방탕한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경축할 것인가. 한 분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불려나온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형제자매로 연합할 것인가. 각자에게 달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둘째 아들에 초점을 맞췄다면 오늘 설교에서는 첫째 아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아들이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닐까요?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사랑으로 함께 형제자매를 이루는 것이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바가 아닐까요?
교회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정의는 교회가 한 분 아버지를 모신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과거 이방인들이었던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이스라엘과 같이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들어와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물리적으로 혼합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만도 아니고 유대인들만도 아닌 교회라는 제3의 인류가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방인과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교회로 부름 받아 역동적으로 창조된 제3의 종족, 제3의 인류로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한 가족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둘이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요 막힌 담을 허무는 능력입니다. 큰 장벽이 가로막혀 있어서 구분되었던 이방인과 유대인의 장벽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허물어졌고 그 둘은 하나가 되어서 한 분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유명한 필립 얀시가 교회에 관해서 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교회라는 가족 공동체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란, 단순히 싫고 좋고를 떠나, 무관심과 경쟁과 증오가 공존하는 세계에서, 어떻게 사랑이 존재하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곳이다”
이 책을 읽고 어떤 분이 다음과 같은 리뷰를 남겼습니다. “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꿈꾸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는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면, 잘 해보려고 하다가도 넘어지고 실수하고, 그래서 다시 회개하고, 또 다시 도전하는 일의 반복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왜 교회가 엉망진창인지 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저와 같이 참으로 부족한 사람들의 모임이니까요! 하나님을 모르던 저에게, 교회는 하나님이 새롭게 꾸려주신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새로운 가정(교회)이, 언제나 화목하고 평안한 장소이길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많았습니다. 부조리한 많은 것들, 또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 그래도 내 가정이니까,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내 가족이니까, 사랑으로 품고 서로 다독이며, 여러 문제들과 싸워나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늘 이런 식이지 않을까요. 그래서 책 제목처럼, '교회는 나의 고민이고 나의 사랑'입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참으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생각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이룬 한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바람 잘 날이 없을 때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전입니다.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단 한가지 공동된 특징을 꼽아보라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며, 이들이 모인 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클레시아)는 역동적인 개념입니다. 특정한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면 교회가 형성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끼리 교제하는 목적으로 등산하기 위해 모여도 거기에 교회가 새롭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교회가 함께 모여도 교회이고 구역 모임으로 가정에서 모여도 교회입니다.
교회의 불변하는 특징이요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를 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서 세운 교회이므로 예수님이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십니다. 교회의 모퉁잇돌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아무리 다양한 사람, 다양한 부류의 사람이 모여 있다 해도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힘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 한 가족입니다. 모두가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
큰 아치형 건물을 짓는 과정으로 본문을 이해하면 좋습니다. 돌과 돌을 쌓아서 둥근 아치형 건물을 지을 때 맨 마지막에 놓이는 돌은 크고 무거운 돌로서 아치형 건물의 중앙, 그리고 맨 위에 마지막으로 놓여집니다. 그 돌이 놓여져야 아치형 건물이 완성되고 균형이 맞춰집니다. 그 돌을 ‘모퉁잇돌’로 표현한 듯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으로서 교회의 맨 위에 놓여져서 건물을 완성시키는 모퉁잇돌과 같은 존재이십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란 곳은 예수표 상표를 부착한 건물이 됩니다. 이 건물은 단순히 돌과 돌을 쌓아올려 만든 건물이 아니라 돌과 돌을 쌓고서 예수의 정신과 예수의 임재라는 유기적으로 결합된 접착으로 완성하는 건물로서 성전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돌과 돌들을 단순히 올려놓아 건물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끈끈한 유기체적인 접착제로 돌과 돌을 단단하게 결합시켜서 하나님의 임재를 담아내는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22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느니라” 성전이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입니다. 교회란 곳은 하나님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는 성전과 같습니다. 교회란 곳은 지금도 공사 중으로서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과정에 있는데,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이 일을 교회 안에서 주도적으로 행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이렇게 지어지고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목적은 하나님이 거하실만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서 가장이신 하나님을 모시고 자녀들인 우리 모두가 한 형제자매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사랑을 나누는 가족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입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회란 함께 지어져가는 과정 중에 있다는 점입니다. 함께입니다. 아까 말한 필립 얀시가 그 책에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둘 있다. 하나는 결혼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결혼도 혼자서는 할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점이 다행입니다. 그래야 함께 부대끼면서 함께 마주서서 바라보면서 함께 성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종종 말해지는데 교회가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마주 서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에베소서 1장 23절에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여기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는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죠.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의 충만함입니다.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요 예수님의 가장 큰 임재가 있는 예수님으로 충만한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득한 예수님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마주 대하고 서있는 것입니다. 왜냐 우리 모두가, 곧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어떠한 관계입니까? 창세기 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아담이 홀로 지내는 게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 직역하면 ‘그에게 마주 서있는 도움, 그에게 상응하는 도움, 그에게 어울리는 도움’을 만드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서로를 보완할 수 있는 존재, 인격적인 교제를 나눔으로써 서로가 의지가 되는 존재를 만들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의 첫 부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첫 가정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서로를 향해 서서 보완하는 개념으로 둘이 하나가 되어서 함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마주 서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변화되고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이게 부부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을 때도 이러한 점을 연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마주 서있는 우리 모두, 마주 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는 교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와 연합한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에게만 마주 서있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 내의 다른 형제 자매와 마주 서 있어서 그들과 함께 보완하고 부대끼며 때론 갈등하고 때로 다듬어져가는 교회, 이게 교회입니다.
신영복선생의 글씨는 특색이 있죠. 잘 알려진 소주 ‘처음처럼’의 글씨가 그분의 것이죠. 이분이 서예를 배우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서예는 조화라는 것입니다. 글자를 쓰다가 잘못되면 서예의 특성상 고칠 수 없기 때문에 다음 글자를 통해서 그 실수를 만회해야 합니다. 한 획을 쓰다가 좀 뉘어지면, 그걸 고치는 대신 다른 획을 쓸 때 그 획을 세워서 이전에 잘못된 것을 보완해가는 식이죠. 글을 쓰다가 한 줄이 잘못 되어서 위 아래로 경사지게 되면 다음 줄로 보충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한 편의 아름다운 글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어찌보면 부분 부분의 실수를 만회해가는 과정속에서, 처음부터 정확무오하게 쓰여진 글이라기보다 실수와 그 실수를 만회하려는 노력과 보충의 과정을 통해서 명품 서예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부터 완전한 상태로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아무리 오래 믿어서 완전해지는 사람도 한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실수 투성이요 늘 잘못을 반복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이 모여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모퉁잇돌이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서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부대끼고 하는 과정을 거쳐서 바람에 곱게 풍화작용을 받아서 매끈하게 다듬어져서 어울리는 하나의 건물로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부족한 성도 한 사람 한사람이 모이다보니 가끔은 어쩌면 세상보다 더 심하게 일그러지고, 부족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위대하신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으로 지어져간다는데 교회의 위대함과 교회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한 건축자이십니다. 위대한 건축자에게는 버릴 돌이 없습니다. 작은 돌은 큰 돌과 함께 붙이고, 모난 돌은 부드럽거나 오목한 돌 옆에 나란히 세우실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몫도 있습니다. 어찌하든지 지금 내 옆에 위치한 돌과 내 자신이라는 돌이 함께 맞춰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둘째 아들과 첫째 아들이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다함이 없는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건축자이자 위대한 가장이신 거장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서 아름답게 다듬어져서 하나님의 거하실만한 성전으로 늘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하는 위대한 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2018년 11월18일 동산교회 총동원전도주일 설교 (주일 낮)
받아들여주시는 아버지의 사랑 (눅 15:18-24)
고대 그리스에서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형은 성실하게 일하는데 아우는 망나니였습니다. 막내는 도박하고 별짓 다 하고 다닙니다. 이 형제가 여행 도중에 해적한테 붙들립니다. 해적은 형제의 아버지에게 아들들의 몸값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어찌하든지 아들을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아버지는 모든 재산을 팔아 몸값을 확보하려고 애씁니다. 안타깝게도 겨우 한 명 몸값밖에 안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모든 재산을 팔아 생긴 돈을 가지고 먼길을 온 아버지에게 해적들은 야속하게도 형제 중에 한명만 골라 데려가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누구를 데려올까요? 형일까요? 동생일까요? 언뜻 생각하면 성실하게 일하여 아버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형을 데려와야겠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동생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붙잡혀 있는 동생은 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그동안 하도 방탕하게 살아서 얻은 병입니다. 동생은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저는 병이 들어서 가봐야 얼마 살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속을 좀 썩였습니까? 그러니 효자 형님을 데려가고 나같은 망나니는 버려두십시오. 형님을 데려가십시오.” 그러면서 우는 거예요. 그래도 아버지는 형을 놔두고 동생을 데려옵니다. 와봐야 죽을지 살지 모르는 동생을 데려오는 도중에 둘째 아들이 그만 죽어버립니다. 그리고 해적에게 붙잡혀 있던 형은 해적들 손에서 도망쳐나오는데 성공합니다. 아버지를 찾아온 형은 아버지를 원망합니다. “아버지를 열심히 모신 저를 버리고 아파서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그 녀석을 데려올 수 있습니까?” 아버지는 내 재산은 원래 다 네 것 아니냐고 달래지만, 형은 다 필요없다며 집을 나가버립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이어령 저, 118-9)
아무래도 아버지의 마음은 큰 아이보다는 막내에게 쏠리기가 쉽습니다. 더욱이 큰 아이와 막내가 터울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큰 아이를 키울 때는 부모들도 한창 때라 부모의 도움으로 잘 성장해가고 자리를 잡을 수 있으나 막내는 부모가 어느 정도 연로해진 터라 그러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어떡하나?”는 걱정이 들어 더 각별한 마음이 둘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막내에게 잘해주고 싶은 마음은 부모의 보편적인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잘난 자식보다 못난 자식에게 더 마음이 쏠리는 것도 부모의 마음, 특별히 아버지의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도 두 아들을 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찾아와서 자기에게 물려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합니다. 그걸 미리 받아 가지고 먼 다른 나라로 떠나서 거기서 새롭게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낯선 타국 땅에서 건실히 살아도 어려운 판에 동생은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탕진해버립니다. 돈이 다 떨어지자 갖은 고생을 하게 되고 비참하게 연명해갑니다. 게다가 그땅에 크게 흉년이 들어 먹을 것도 없었습니다. 보통의 유대인이라면 하지도 않을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하도 없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지만 주는 자가 없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고향에서 살 때는 몰랐는데 고향의 품을 떠나 살다보니 고향이 그리워졌습니다. 아버지의 품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거기서는 품꾼들도 풍족한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생겼구나’는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냥 여기서 있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돌아가면 아버지께 뭐라고 말할까 머리를 이리저리 써봅니다. 다짜고짜 엎드려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아버지 저를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보아주세요’라고 말하기로 하고서 어려운 발걸음을 떼 힘겹게 힘겹게 고향 마을로 돌아옵니다. 돌아가면서 별 생각이 다 들었겠죠. ‘아버지가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무슨 바람이 들어서 왜 아버지의 품을 떠난다고 했을까?’, 한편으로는 멀리서 바라보는 고향이 얼마나 정겹고 평화로운 곳인지,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다정했는지 후회 가득한 채 생각해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떠나보니까 아버지의 품이 참으로 따뜻했구나’, ‘집이 참으로 소중하구나’는 생각이 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늘상 집에 붙어 있는 사람은 집의 소중함, 그리고 아버지의 소중함을 알기가 어렵겠죠. 집을 나가봐야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집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어느새 저 멀리 마을이 보입니다. 드디어 마을 입구에 들어섰습니다. 어려운 발걸음을 한걸음 한걸음 터벅터벅 걸어오는데 멀리서 아버지가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닙니까? 언제나 아들이 돌아오나 목이 빼도록 기다리면서 아버지는 집밖을 서성이고 있다가 멀리서 아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달려와서 막내 아들을 안고서 입을 맞춥니다. 아들은 죄송스런 마음에 준비한 멘트를 합니다. “제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아들이 아니라 품꾼으로 보십시오.” 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아버지는 목이 멘 소리로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신발을 신기고 아들에게 주는 가락지를 끼워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열어라!” 죽은 줄만 알았던 막내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너무나 기뻤던 것입니다. 과거에 자신의 속을 썩인 것도, 유산을 미리 당겨 받은 것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친 것도 돌아온 아들을 보니 다 잊어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불효자의 이야기도, 허랑방탕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나그네 된 우리 인생 이야기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의 원래 뜻이 밖으로 ‘나간 이’를 뜻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간 이’ 곧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되어서 뛰쳐나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독립하여 멋지게 살아보려고 떠난 이야기입니다. 익숙해서 싫어진 고향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품이 그리 좋은지 모른 채 아버지의 간섭이 싫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담스럽고 마치 내 자유를 앗아가는 듯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모든 것이 행복할 걸로 생각했으나 막상 떠나보니까 찾아온 것은 궁핍과 허무뿐이었습니다. 새 출발하고자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지만 이내 타향살이에 지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참함입니다.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채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남는 건 죽음뿐인 인생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스스로 성공하면 행복할 거라는 신기루에 속아서 사막 같은 인생길을 힘겹게 달음질했지만 참된 안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점점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지고 고향땅이 푸근하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엄습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철부지 아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두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 –
아버지는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집과 같은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정겨운 고향과 같은 분이십니다. 아버지는 우리를 있게 해주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젊어서 아버지를 떠났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두 팔 벌려 받아들여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떠난 이유도 가지각색이겠지만 아버지 곁에 머무는 것이 통제받는 것 같고 간섭받는 것 같아 자유롭지 못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떠난 것이고 독립하려고 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규율과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마음껏 살아보고자 떠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도 없는 아들과 같은 숙명을 지닌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누구라도 돌아서기만 하면 아버지의 품안으로 돌아올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맞아주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마음씨가 좋아서,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은 분이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생성하고 창조한 아들이 자신의 곁을 떠나자마자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작업을 해놓으셨던 것입니다. 그 오랜 작업의 기록이 바로 성경입니다. 구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까지 이어진 신약성경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를 지은 것은 단순히 실수도, 잘못된 선택도, 운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아버지라는 존재가 거추장스럽고 부담스러워서 둘째 아들처럼 아버지 곁을 떠난 것이었고, 그렇게 스스로 아버지가 되려는 반역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스스로 주인 되고 하나님 되려는 교만이었고 자신을 지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멋진 우주만물을 다스리려는 선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들은 하나님 품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들을 창조하셔서 그들로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했지만 모든 인류는 스스로를 찬송하고 경배하기에 바빴을 뿐입니다.
아담 이래로 그의 자손들은 다 한결같았습니다. 똑같은 죄를 반복해서 하나님의 품을 떠났고 스스로 하나님 되려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인생의 주인인 양 하나님을 모른 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류를 되돌리려고, 그래서 인생의 본분이 무엇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에 맞는 삶은 무엇인지 알려주시려고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그리고 아버지 품에서 살아가는 인생이야말로 진짜 생명을 얻는 삶임을 보여주시려고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몸소 보여주셨고 증거해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던 죄인들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아니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들이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아들들의 죄를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해결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담 이래로 쌓이고 쌓인 누적된 죄, 하나님 곁을 떠나서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하나님 되었던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값을 치루셨던 것입니다. 무죄한 자로서 죄인들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부활시켜주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은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로써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님으로, 피조세계의 왕으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유일하신 아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하나님은 모든 아들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돌아서기만 하면, 스스로 하나님처럼 주인 행세하던 자리에서 돌아서기만 하면,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두 팔 벌려 기쁘게 받아들여주시는 것입니다. 과거를 불문하고 지은 죄를 불문하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다 덮어버리시고 돌아온 자를 누구라도 환영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열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라도 예수 믿으므로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놓으신 그 길을 따라서 우리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두 팔 벌려 맞이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아들들인 우리의 존재를 빚지고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날이고, 우리를 존재케 해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고, 올 한 해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호흡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날입니다. 곡물과 과수의 추수를 마치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아버지 품을 떠나서 살았던 분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초청하여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어느 새 허무감이 들이닥치고 언제부턴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간 아버지로서 열심히 노력해서 어느 정도 일가를 이루셨을 수도 있지만 어느 새 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마음 한 구석이 텅빈 것 같은 공허감을 감출 수 없지는 않으십니까? 바로 이때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바로 이때가 인생의 참된 유일하신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요, 예수님이 보여준 인생을 채택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써 만왕의 왕, 만유의 주로 인정되셨습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인정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로 나아가셔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는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2018년 11월1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공동체를 만난 사람들 (마 11:11-19)
복음서에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계보를 잇는 자로서 세례요한은 오실 분 곧 메시야를 증거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가져오실 메시야를 멀리서 증거했던 다른 선지자와는 달리 선지자로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직접 보고서 증거했습니다. 예수님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향해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극찬을 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위대함이 그의 인격이나 도덕성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세례요한의 탁월함을 칭송한다기보다 예수님과의 시공간적 거리에 의해서 매겨지는 그의 위대함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 곁에 예수님과 동시대에 존재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그의 사명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1절 하반절에서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이 선포되었습니다. 천국이 이땅에 임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전환 가운데에 서있는 세례요한은 이전의 누구보다도 더 위대했지만 이제 임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은 오실 분을 증거하는 자들보다 오신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더 큰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으로 인해서 비롯된, 새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의 사역은 무엇이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여기서 ‘모든 선지자와 율법’은 구약성경을 가리킵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은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로 수렴됩니다. 오실 구원자 곧 메시야에 대한 증거는 세례요한까지입니다. 세례요한이 구약 선지자의 마지막 주자이며 예수님이 가져오실 천국이라는 새 시대의 전환점에 그가 서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며 거의 마지막 선지자라 할 수 있는 말라기서에서 새 시대가 오기 직전 하나님이 보내실 선지자를 엘리야라고 칭했는데 세례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와야 이어서 천국을 도래시킬 메시야가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언약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과 행실이 돌아서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지자로서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구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광야에서의 금욕적 삶이었습니다. 금식하고 절제하고 불편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삐딱한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정상적이지 않고 미친 사람 같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재밌고 만족한 삶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데 거친 광야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음식도 최대한도로 절제하고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세례요한을 향해 “귀신들렸다!”, “정상이 아니다!”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은 실제로 이땅에 천국을 가져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그분이 먼저 증거하시고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셨습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 자체가 하나님의 통치였고 천국의 임함이었습니다. 물론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했지만 선지자로서 그리했다면 예수님은 천국과 일치되는 천국 그 자체로서 천국을 가져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의 도래를 천국 잔치로 그려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돌아옴이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회복이므로 잔치요 축제였습니다. 천국 잔치의 주인공은 물론 하나님이시고요 천국 잔치에 초대된 손님들은 손가락질 당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의 대명사인 세리와 창기들과 병자들이 주축을 이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렇게 천국 잔치를 배설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도 삐딱한 사람들에 의해서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본문 1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이 대부분의 삶이 추구하는 모습과는 다른 금욕적인 삶을 살아서 귀신들렸다는 비난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로 자처하고 그들과 함께 자주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회개와 심판을 강조하면서 절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고 의를 강조했다면 예수님은 천국이 도래했으므로 천국의 주인공인 하나님과 죄인들과 더불어 즐겁게 잔치를 벌였습니다. 거의 정반대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준 세례요한과 예수님이셨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비난했던 잣대와는 또다른 잣대를 가지고서 예수님도 비난했습니다. 세례요한의 라이프스타일을 비난했다면 예수님의 라이프스타일을 인정해야 했는데 예수님의 그것도 정반대의 이유를 가지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러한 세대의 세태를 꼬집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비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마 장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결혼식 놀이나 장례식 놀이를 염두에 두고서 말씀하신 듯합니다. 아이들이 어느 때는 결혼식 놀이를 합니다. 결혼식은 잔치죠. 피리를 부는 떠들썩한 잔치입니다. 어떤 아이가 피리를 불어도 다른 아이들은 춤을 추지 않습니다. 함께 동참하지 않습니다. 함께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놀이에 함께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장례 놀이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슬피 우는 흉내를 냈습니다. 결혼 놀이가 싫어서 참여하지 않았다면 장례 놀이를 하면 참여할 줄 알고서 놀이를 바꿔본 건데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뭘 해도 감동이 없는 세대, 뭘 해도 참여가 없는 세대, 함께 하기보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단한 시대의 동향이요 흐름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회개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고 훌륭한 메신저답게 메시지를 구현한 삶을 금욕적으로 살아냈는데도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귀신들렸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의 도래를 선포하시고 훌륭한 메신저답게 메시지를 구현한 삶, 곧 천국 잔치를 배설하시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지만 그가 죄인들과 먹고 마시며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하면서 잔치 자리에 참여하기를 거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대의 세태를 보여주었지만 그래도 천국의 주인공이 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같은 소위 죄인들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이 오히려 천국의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너무나 당연하죠. 천국을 가져오시고 천국 그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19절)이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제사장이나 당시 종교적으로 열심도 있고 존경도 받던 부류는 오히려 천국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천국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통치를 오히려 공고히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회개하라고 해도 회개하지 않고 기쁜 얼굴로 즐거워하라고 해도 즐거워하지 않고 잔치를 배설했는데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래도 천국을 빼앗아서 천국의 상석에 앉는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는 손가락질 당하던 부류의 죄인들이었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병자들과 같은 죄인들이고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천국을 침입해들어가는 약탈자와 같이 적극적으로 천국문을 두드렸고 침공해서 빼앗았습니다. 마치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처럼 천국을 침공해서 천국의 곳간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현재의 삶에 불만족했고 현 시대를 긍정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배고팠고 목말랐고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선포하자 특별할인 행사하는 마트가 열기가 무섭게 달려드는 사람처럼 천국의 상석을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는 최전방이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라는 천국 공간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나요? 소위 손가락질 당하는 죄인들이나 사회에서 연약한 부류로 일컬어지고 있는 약자들이나 물질적 풍요만 가지고는 만족하지 못한 채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갈급한 심령들이 교회를 침입해들어오고 교회의 은혜와 영광스러움을 약탈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들이 교회의 상석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예수님처럼 천국 복음은 선포하지만 메시지를 그대로 구현한 메신저의 삶이 부재한 탓일까요? 우리가 성경대로 그리고 예수님처럼 복음은 전하지만 예수님처럼 죄인의 친구가 되지 못한 탓일까요? 천국 잔치를 배설하지 못한 탓일까요? 죄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눌 작은 공동체가 없는 탓일까요? 술 담배하면 못 들어온다고 입구를 막아섰기 때문일까요? 죄인들은 들어올 수 없는 거룩한 공동체라고 거룩함을 오해한 탓일까요? 진리를 독점했다는 자부심이 넘쳐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는 입회할 수 없다고 높은 문턱을 세워놓은 탓일까요?
교회는 천국 공동체를 추구합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보여주신 천국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예수님의 개방성을 가장 주된 특징으로 합니다. 예수님은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으시려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고 호소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누구나 주님께 나오면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잔치를 배설했음에도 자충족적이고 자신이 인생의 주인되는 고집을 꺽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그런 잔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았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천국은 침노를 당합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12절) 누가 천국을 침노합니까? 침노해서 천국의 곳간을 약탈하고 천국의 상석에 자리를 잡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오늘날에도 가장 그럴 수 있는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에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때론 손가락질 당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천국을 침노하고 천국의 좋은 것을 약탈해갑니다. 그러한 일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습니까?우리 교회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은 있지만 복음에 합당한 삶이 없고 복음은 있지만 복음을 구현해서 보여주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 공동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천국의 최전방이요 교회의 최전방은 소그룹 공동체입니다. 구역이야말로 교회 내의 교회요 죄인들의 침공이 용이하고 거기서 복음의 영광을 약탈해가는 일이 발생해야 할 공간입니다. 죄인들에 의해 우리의 풍요로움이 약탈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먼저 믿은 우리의 평안과 기쁨과 소망이라는 천국 가치가 죄인들이 구역에 방문해서 빼앗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구역이 교회 내의 교회요 하나님나라의 최전선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안좋은 것은 배타적 공동체요 끼리끼리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가장 멀리 있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올해는 복음을 강조했다면 내년에는 공동체를 강조하려고 합니다. 복음과 공동체는 교회가 양손에 쥐고 있는 교회만의 트레이드마크요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바울이 개척했던 교회는 어떤 특정 가정에 모이는 가정교회 공동체였습니다. 가정교회들이 전체로 모이는 모임도 있었지만 매주 정례적인 모임은 어떤 특정 가정을 중심으로 여러 세대가 함께 모이는 공동체의 모임이었습니다. 함께 모여 소수자로서 세상을 살아내기가 쉽지 않은 힘겨움을 함께 나누고 어떻게 승리했는지를 간증함으로써 서로에게 도전이 되는 모임이었습니다. 야금야금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공동체였고, 세상에서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침입해들어오기가 용이한 삶의 최전선에 위치한 개방된 공동체였습니다. 들어와서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였습니다. 거칠고 냉정한 한기 가득한 세상에서 살다가 함께 모이면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따뜻한 공간이었습니다.
괜히 초대교회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입니다. 예수님이 구현한 천국 공동체와 가장 가까운 모습의 초대교회의 공동체입니다. 오늘날 제도화되고 거대해진 교회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가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일상이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면서 이웃과 함께 세워가는 하나님나라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모여 예배드리고 교육하고 섬김으로써 세상을 향해 하나님나라 대사를 파송하는 것입니다. 최전방에는 여러분의 가정이 있고 구역이라는 지역 공동체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 인정하는 교회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이어령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나라에 접속해줄 수 있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이버세계나 인터넷 공간에 접속해서 들어가듯이 교회는 하나님나라에 접속해줄 수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이 함께 사랑으로 섬기므로 하나님나라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이고 천국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구역이라는 소그룹 공동체가 개방된 공동체로 존재하면서 이웃들에게 열려있을 때 그들이 들어와서 사랑과 섬김을 보고서 하나님의 통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에 접속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천국에 접속했다가 다시 세상에 가서 치열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내고 다시 교회에 모여 그리고 소그룹으로 모여 천국에 접속해서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신학자가 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에 보니까 이분이 어렸을 때 다녔던 조그만 시골교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교회의 교회학교에는 평생 동안 3학년 반에 머문 도로시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모든 어린이들이 교회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 반드시 그 반에서 도로시를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도로시는 우리가 생각하기에 보조교사의 역할을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연필을 나누어주고 출석을 확인하고 연필을 거두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도로시는 다운증후군이었습니다. 이분이 50대 초반에 죽자 온 교인이 힘을 모아 그녀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그녀를 장애자라거나 불구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교회는 세상이 극히 보잘 것 없고 골칫거리로 여겼던 부류의 사람을 주일학교 3학년 반 한가운데에 놓음으로써 세상과 다른 하나님나라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최전방이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시연해주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곳으로서 예수님이 친히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심으로 인해서 연약한 자들이나 소위 죄인들이 마음껏 침입해들어와서 천국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약탈해가는 곳입니다. 부요한 자로서 가난케 되시고 많은 가난한 자들을 부요케하신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자들로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란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는 곳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입니다. 제도화되어 가므로 이러한 천국의 역동성을 보여주기가 점점 힘들게 된 교회는 교회 내의 교회, 곧 소그룹 공동체, 혹은 구역 혹은 가정교회를 통해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만큼이나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공동체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하나님나라와 같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2018년 11월4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모략 (마 16:13-20)
11월이 되었습니다. 11월 한 달간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장로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이사를 하고서 제일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가 교회를 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집 주위에 교회다운 교회를 찾기가 어렵다는 말 같기도 하고, 자신에게 맞는 교회를 찾는 어려움을 이야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좋은 교회든 자신에게 잘 맞는 교회든 단기간에 파악하기란 어렵다는 뜻도 포함된 것 같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다녀 봐야 교회가 좋은 교회인지 자신에게 맞는 교회인지를 알 수 있겠죠. 첫 인상만 가지고서는 잘못 판단하기가 십상이죠.
11월 한 달간 교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동산교회가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숙고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존 하워드 요더라는 신학자는 교회를 세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행동주의 교회, 회심주의 교회, 고백 교회입니다. 행동주의 교회는 교회가 좀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에 교회가 적극 참여해야 하며 그것이 곧 하나님나라 건설이라는 입장입니다. 소위 진보적인 교단이 추구하는 방향입니다.
회심주의 교회는 아마 우리 교단과 같은 보수 교단의 입장입니다. 사회 구조를 아무리 뜯어 고친다 해도 죄성을 가진 인간들 자체가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의 영혼에 우선적 가치를 둡니다. 영혼 구원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그것이야말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라는 분명한 방향성을 지닙니다. 사회 변화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사람이 세상속에서 믿음으로 살면 된다고만 생각합니다.
이 신학자는 고백 교회를 바람직한 교회로 생각했습니다. 고백 교회는 회심주의의 개인주의나 행동주의의 세속주의를 배격합니다. 고백 교회의 사명은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거나 사회를 변혁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 하여금 만유의 주이신 그리스도를 예배하도록 결단케 하는데 있다고 봅니다. 고백 교회도 회심주의 교회와 마찬가지로 회심하라고 요청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고백 교회가 말하는 회심이란, 세례를 받아 새로운 백성이 되어가는 과정인데, 대안적 공동체이자 대항문화적 공동체인 교회에 접붙여지는 긴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고백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교회를 이룸으로써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자 노력합니다. 고백 교회는 교회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다시 말하면 교회의 증언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은 살아 있고 생기 넘치며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공동체를 실제로 이루어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과제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세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모략이요 하나님의 전략이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땅에 교회를 세우는 일 자체가 그야말로 ‘산 위에 있는 동네’로서의 교회이며 ‘세상의 빛’인 교회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공동체성을 지니고 십자가 공동체로서 교회다운 교회로 우뚝 서는 것이야말로 이보다 세상을 향한 더 큰 발언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다 수용할 수는 없어도 교회에 대한 통찰력 가득한 견해입니다. 이 신학자가 고백 교회라는 교회 유형을 새롭게 생각해낸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고백 교회를 표방한 교회의 모임이 있었고, 거기서 긍정적인 교회의 모습을 본 듯합니다.
독일 고백교회는 1934년에 히틀러에 반대하여 설립된 독일의 에큐메니컬 교회 곧 초교파 교회 모임을 말합니다. 1935년 독일 바르멘에서 이들이 모여서 <바르멘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종의 대상이요, 하나님의 계시임을 강조한 선언문으로서 히틀러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였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했을 무렵 독일의 교회들은 곧 친 나치 성향으로 급속히 기울어졌습니다. 독일 아리안 족의 민족적 우월성을 강조하는 나치의 정책을 수용하고 지지하다보니 성경의 내용을 왜곡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이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조직을 결성하고 저항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고백교회입니다. 독일의 교회는 나치의 지배를 받는 대다수 국가 교회와 고백교회를 따르는 교회로 나뉘었습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고백교회 측의 인사 다수를 체포하는 등 탄압을 노골화했고, 1939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의 공개적 활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지하 활동으로 전환했고,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고백교회의 지도자들은 세계 교회 협의회에 <참회 선언문>을 제출했고, 독일 교회를 재건했습니다. 당시 고백교회의 슬로건은 ‘교회는 교회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영원한 교회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우실 ‘내 교회’에 대한 약속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베드로라는 인격과 그의 신앙고백 위에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워주실 교회에 대한 약속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교회의 권세에 대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한, 지극히 로마화되고 세속화되고 이방 신전으로 가득한 이방 도시에서 교회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시간적으로는, 이제 곧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을 출발하실 터인데 예루살렘에서 고난당하시고 죽게 될 것을 처음으로 예고하기 직전에 교회에 대한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13절)라고 물으시고서 이어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절)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올바로 대답했습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라는 한 인격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전체 제자를 대표하고 전체 하나님의 백성을 지금 대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올바른 신앙고백이야말로 영원한 교회의 금자탑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보내신 메시야로, 그리고 영원 전부터 계신 영원한 삼위일체로서의 성자 하나님으로의 고백입니다. 베드로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들으시고서 예수님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사람들의 인간적인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메시야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눈이 열린 사람이고 그러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라는 이름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헬라어로 ‘페트로스’입니다. 그런데 원래 베드로의 이름은 아람어로 ‘게바’입니다. ‘게바’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반석’이 헬라어로 ‘페트라’인데 ‘페트라’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남자인 베드로에게 여성 접미사 ‘-아’ 대신에 남성 접미사 ‘-오스’를 붙여서 ‘페트라’라고 하지 않고 ‘페트로스’ 곧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너는 게바로서 페트로스다. 너라는 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반석 교회라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세워진 교회가 될 것이다. 사망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생명의 기관이 될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한 개인의 인격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베드로는 좁게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고 넓게는 예수님의 메시야적 백성들을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인격만큼이나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반석 교회는 베드로의 교회라기보다 예수님께 올바로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입니다. 베드로의 올바른 신앙고백을 늘 새롭게 말하며 자기 자신을 바로 세우는 교회입니다. 교회가 이런 신앙고백의 반석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교회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울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음부의 권세’는 ‘음부의 문’으로서 ‘사망의 문’과 비슷한 뜻입니다. 사망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는데요, 보통 ‘문’은 ‘권세’라는 의미를 갖기도 합니다. 교회가 어디 천상에 세워질 것은 아니고 사망의 입구, 곧 온통 죽음으로 가득한 세상 한복판에 세워질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주가 되시며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교회는 영원한 생명을 가집니다.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하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대표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면서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베드로라는 인격에게 천국 입장을 통제할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세워진 교회의 기초석으로서의 사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베드로라는 인격에 부여하신 말씀이면서도 이 말씀은 전체 사도들 그리고 사도성을 계승한 전체 교회에게 주시는 특별한 권한입니다. 베드로의 수위권이나 그의 수위권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로마 교황에게 주어진 권한이 아니라 전체 교회에게 주어진 교회의 사도적 계승으로서의 교회의 사도성입니다.
이 구절을 베드로가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처음 전해서 하나님나라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분도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직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예루살렘교회가 태동되었고, 사마리아에서 많은 사람들이 빌립 집사의 전도로 회심을 했지만 베드로가 가서 안수할 때 성령이 오시고 진정한 교회가 세워졌으며, 고넬료라는 이방인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사람도 베드로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이 구절을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베드로라는 한 인격이라기보다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이땅에서의 교회의 권세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네 가지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사도성인데 교회가 복음 전파를 통해서 사도성을 계승하고 있고, 그 결과로써 천국 열쇠가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제자훈련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분이 고 옥한흠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은 선교단체 네비게이토의 훈련과정과 교재들을 통해 기성교회가 갖지 못한 세 가지 장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복음’과 ‘양육’ 그리고 ‘비전’이었습니다. 이를 모방하고 활용하여 소수의 대학생들을 데리고 제자훈련에 돌입했습니다. 옥 목사님은 5년 동안 매주 토요일에 제자훈련을 했습니다. 그 결과 맡았던 대학부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제자훈련에 관한 성경적 이론을 정립하고자 비교적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38세에 유학길에 오릅니다. 신학교 수업 중에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는데 우연히 교내 서점에서 발견한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의 <교회론>에서 번뜩이는 구절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의 신학사상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교회의 본질 중 사도성이 무엇인가를 명료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모든 평신도는 사도의 계승자로서 예외 없이 세상으로 보냄 받은 예수의 제자요, 소명자”라는 인식에 큰 감동을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왜 그토록 평신도를 깨워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야 하며, 이를 목회철학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해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책에 보면 “사도적 사명을 가진 교회가 사도적 교회이며, 이러한 사명은 특정한 직무가 아니라 전체 교회에 계승된다”는 글을 읽고 번쩍 눈이 뜨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사도적이어야 하며, 사도적이기 위해서는 평신도를 포함한 전 교회가 사도의 계승자라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고서 제자훈련에 대한 확고한 신학적 해답을 얻게 된 옥목사님은 귀국 후 교회를 개척하고 제자훈련 목회철학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옥목사님은 제자훈련 속에 숨어있는 신학적인 진리 즉 그것이 바로 교회론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터득하는 데는 거의 30년 가까이 걸렸다고 고백합니다. 교회론은 긴 시간 동안 목회와 씨름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눈을 열어주신 하나의 영적 경지라고 말합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세계적인 명지휘자인 정명훈 씨가 한 말을 언급했습니다. 그는 지휘자로서 테크닉을 배우거나 곡을 어느 정도 습득한다는 것은 참 쉬운 일이지만 어떤 경지를 터득하는 것은 3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는데 옥목사님 역시 제자훈련의 테크닉이나 프로그램, 교재를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는데 반해서 제자훈련 속에 숨어있는 신학적인 진리 즉 그것이 교회론인데, 그것을 터득하는데는 거의 30년 가까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옥목사님이 생각하는 교회론은 교회의 본질과 관계된 것으로서 교회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인가 아니면 평신도인가?’의 물음인데요 그분은 교회의 주체가 평신도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고, 교회 주체인 평신도를 위해 목회자가 어떤 사역을 우선에 두어야 하는지, 성도들에게 주어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신분과 소명이 무엇인지, 그것을 목회자로서 어떻게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지 등 이런 것을 고민하였습니다. 이것은 종교 개혁의 중심사상이기도 합니다. 만인 제사장직이 바로 그것인데, 교회 주체가 평신도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평신도를 깨운다>는 제목으로 책을 집필해서 오늘날까지 많은 목회자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옥목사님은 평신도를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는 주체, 동역의 대상으로 보았지 동원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도 좋고 열 사람도 좋았고, 단 한 사람이라도 바로 설 때 이것이 바로 교회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고백 위에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는 단지 신앙을 고백하고,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를 세워주실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를 교회되게, 교회가 교회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점뿐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나 주장이나 판단보다도, 인간적인 계산이나 의지할 다른 대상을 찾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거듭 거듭 고백해야 할 뿐입니다.
베드로의 인격 위에, 이 반석 위에 세워주실 주님의 교회는 반석교회이지만, 베드로라는 인격은 믿을 만한 인격은 되질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베드로는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던 그 밤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에게서 심문당하던 그 밤에 장작불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반석 교회는 어쩌면 베드로처럼 때로는 예수님을 실망시키기도 하고, 충성스럽지 못하고, 굳건한 믿음이 없어서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망각하고 세상의 파고에 휩쓸려가기도 하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예고대로 세 번 부인했음을 깨달았을 때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가롯 유다가 목매어 죽은 것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이처럼 반석 교회는 신앙고백을 할 뿐 아니라 신앙을 고백한 대로 살지 못하고 심지어 신앙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슬피 울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고 무릎 꿇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동하는 인생이었던 베드로를 그러나 주님은 반석이라고 불러주시고 인정해주십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지금도 교회를 붙들고 계십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교회를 주님이 세우심을 깨닫고 우리의 사명은 제대로 된 바른 교회, 교회로 머물러 있는 교회를 세우는 사명임을 깨닫고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그리고 세상의 빛으로 우뚝 서는 우리 동산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10월2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충성이 비전이다! (눅 16:1-8)
10월 한 달 간 인생의 비전과 사명이라는 주제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첫주에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우리를 천의 하나 만의 하나로 불러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자녀 삼아주신 목적은 우리로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즉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해주셨던 것입니다. 둘째주에 ‘돈보다 하나님, 염려보다 하나님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과 사명을 삼고 달려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는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일상 생활의 기본 염려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이땅에서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는 ‘역전과 전복으로서의 하나님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기존 세상의 가치의 역전과 전복으로 임합니다. 기존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반대의 흐름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이땅에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는 서로에게 종이 되어주는 섬김으로 구현됩니다. 하나님나라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는 지극한 섬김으로 말미암아 예수 믿는 우리들의 섬김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된 교회는 세상 질서의 가치의 역전이요 전복으로서의 하나님나라를 이루며, 세상의 대안적 공동체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구체적으로 섬김, 무엇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지난주 말씀대로 섬기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처럼 섬기려 할 때 무엇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둘째는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전과 사명이다!’입니다. 인생의 비전과 사명에 대해서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미래에 내가 어떤 위치에서 그리고 어떤 자리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 시간에 본 말씀처럼 야고보와 요한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서 왕이 되시면 왕좌 좌우편에 자신들이 앉았으면 하는 그들의 잘못된 바람과도 같은 비전입니다. 우리도 흔히 이러한 오류를 답습합니다. 자신의 비전과 사명을 확립할 때 내가 어떠한 자리에 오르고 어떠한 역할을 맡으면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생각하고 꿈꿉니다. 그러나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미래에 내가 어떤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께 쓰임 받을 것인가를 꿈꾸기보다 지금 나를 불러주시고 세워주셔서 어떤 위치에 세워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비전이요 사명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충성이 비전이 되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비유입니다. 어떤 큰 부자가 청지기를 세워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아마 땅을 빌려주고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상당한 퍼센트를 임대료로 돌려받는 경우이거나 현물, 가령 밀이나 올리브 오일을 빌려주고 이자를 덧붙여 돌려받는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청지기는 임대 계약을 맺을 때 주인의 이름으로 자신이 계약을 맺었습니다. 청지기에 전권을 주고 재산을 관리하게 하였는데 들려오는 소문이 청지기가 권한을 남용하여 주인의 재산을 야금야금 자신의 뱃속으로 챙긴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부자는 청지기를 해고하고자 결심하고서 청지기에게 지금까지 진행된 임대 계약과 재산 관리 자료를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지 못하도록 손을 떼게 하려는 절차에 돌입한 것입니다. 해고 통지나 다름없는 통보를 받고서 청지기는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먹고 살까를 염려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마지막으로 행사하여서 채권 채무 계약서에서 채무자가 기록한 채무액을 낮춰줌으로써 채무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그 대가로 후일을 도모하고자 한 것입니다. 주인에게 돌아갈 이자와 원금의 총액을 줄여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인에게 추가로 돌아갈 이자만 탕감해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청지기가 주인에게 돌아갈 몫을 탕감해주는 것이라면 남의 것을 가지고서 선의를 베푼 것이어서 다시 한 번 주인의 뒤통수를 마지막으로 친 것이 됩니다. 아니면 자신이 착복할 커미션을 포기해서 갚아야 할 액수를 줄여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이제 곧 해고될 터인데 막상 해고되면 자신의 몫을 감안해서 성사된 계약이라도 주인이 다 차지하게 될 것이고 자신에게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 몫을 탕감해주어서 채무자들의 인심이라도 얻을 심산이었던 것입니다. 청지기가 의도한 것은 어떠한 경우라 하더라도 채무자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인심을 얻고 해고된 이후에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면 그들에게 잠시라도 도움을 받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단 며칠이라도 식객 노릇 할 수 있는 채무자들을 많이 확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채무자들이 갚아야 할 액수를 줄여준 계약서로 다시 작성케 한 것입니다. 청지기가 다가올 위기를 대비하여 기민하게 행동하여 자신의 살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영악함이요 영악한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돌아올 몫이 어차피 사라질 것이 불보듯 뻔하니까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사람을 얻으려 한 것입니다. 나중에 길거리에 내쳐졌을 때 그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고, 당시 문화는 도움을 받았으면 반드시 도움을 갚아야 하는 소위 ‘상호성의 윤리’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어떠한 방식이든지 반드시 도움을 받게 될 기대는 헛된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청지기를 고용하고 청지기를 해고자하고자 했던 주인은 청지기가 자신의 살 길을 열기 위해서 기민하게, 그리고 영악하게 행동한데 대해서 칭찬합니다. 8절입니다.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어쩌면 지금 청지기가 자신의 뒤통수를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친 것일 수도 있는데 주인은 불의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합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주인의 것을 또다시 축내었다 해도 자신의 살 길을 위해서 그런 것이라는 점, 혹은 자신에게 커미션 몫으로 돌아올 것으로 기대한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포기하고 대신 사람을 얻고 후일을 도모한 점 때문이겠죠. 이상한 주인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비유는 마칩니다. 그리고서 이 이야기에 대한 예수님의 코멘트가 이어집니다. 8절 뒷부분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이 세대의 아들들 즉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의 살 길을 찾는데 있어서 하나님나라 백성들보다 더 영악하고 더 지혜롭다는 예수님의 논평입니다. 한 마디로 뱀처럼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뱀처럼 지혜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뱀처럼 영악할 정도로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바로 청지기의 이 점을 예수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이야기를 마치시고 비유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땅에서 돈을 값지게 쓰는 방법을 소개해주고서 죽을 때 돈을 가지고 갈 수 없음도 아울러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살 길을 찾아 기민하게 움직이고 자신의 커미션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포기해버리고서 대신 사람의 마음을 얻어서 나중에 그들의 도움으로 살 길을 열었던 영악한 청지기의 지혜를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좀 배우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불의의 재물”로 표현하는 이유는 재물 자체가 악해서라기보다 재물은 가끔 우리를 재물에게 집착하고 빠져들에 만드는 악마의 유혹의 손길을 펼치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영원한 소유가 될 수 없고 이땅에서 한시적으로만 유용한 재물이어서 영원함의 반대로서 불의하다고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돈을 사람 얻는데 쓰라는 말입니다. 죽어서 돈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나라 백성이라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이 시점에 무엇을 망설이냐는 것입니다. 마치 밭에 감추어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통째로 사도 오히려 낭비가 아닌 것은 보화가 밭에 감추어져 있고 그것을 그 눈이 보았기 때문인 것처럼,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불의한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겠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데 사용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하나님나라가 완성이 될 때 혹은 죽어서 천당에 갔을 때 자신의 헌신과 노력과 애씀과 희생과 비용 지불로 말미암아 거기서 만나게 될 사람이 자신을 얼마나 기쁘게 영접하겠습니까. 이 교훈은 오늘 본문에 이어서 누가복음 16장 19절 이하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미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집 앞에서 구걸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나사로를 외면했기 때문에 나중에 나사로의 영접을 받을 수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도 영접하는 이가 없는 곳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섬김, 무엇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하나님나라가 어떤 사람에게 임하려면 그래서 우리와 같이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을 무엇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겠습니까? 노골적으로 말합니다. 돈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돈에는 장사 없습니다. 돈을 지불하는 희생이 뒤따라야 태신자를 출산할 수 있습니다. 꼭 돈뿐이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재능과 은사, 그리고 기회와 역량을 총동원해서 섬겨야겠죠. 그러한 섬김으로써만 하나님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져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돈보다 귀한 자신의 생명을 드림으로 헌신하셨습니다만, 먼저 덜 귀한 돈으로도 섬기지 못하면 더 귀한 생명으로는 더더욱 섬길 수 없겠죠.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돈과 재물을 가리킵니다. 맡겨진 돈을 잘 관리하고 성실하게 책임감 있게 사용하는 사람은 돈보다도 큰 것도 잘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것에 불충한 사람은 큰 것에는 더더욱 불충하겠죠.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금은 사소한 것이어서 별로 소중하게 다루지 않고, 나중에는 큰 것이 올 것이므로 그때에는 내가 충성해야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안되면 나중에도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일상에서 성실하게 살지 못하면 나중에 큰일은 감당도 못할 것입니다. 청지기로서 돈 관리에 충실하지 못하면 이보다 고귀한 사람을 얻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11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청지기로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도 저것도 맡기기를 원하시는데요, 돈을 맡겨보았는데 돈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참된 가치를 지닌 것, 이를테면 사람을 관리하는 일이나 사람을 세우고 살리는 일이나, 혹은 재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부요함을 맡겨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작은 일을 맡겨보고 잘 하는 것을 보면 주인이 더 큰 일을 맡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잘 알려진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에게 한 달란트 맡은 사람이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대로 땅속에 묻혀두었다면 어떤 주인이 그 종에게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줄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이 돌아올 때 또다른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총 열 달란트를 주인에게 돌릴 때 어떤 칭찬을 받았습니까?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반면에 한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 25:26-30) 예수님은 작은 것에 불충한 사람을 악하고 게으른 종, 무익한 종이라고 평가하십니다. 어찌 더 큰 것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내 것이 아닌데 충성할 필요가 뭐가 있어? 내 것이 생길 때나 충성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것에는 충성할 마음이 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닌 것에는 충성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시는 분이 그 생각을 모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서는 주시는 분이 언제나 하나님이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금 충성된 모습을 볼 때 충성된 자들에게 직분을 주시고 비전을 주시고 사명을 주시는 것이지, 지금은 아직 내 본격적인 비전이 아니야, 내 사명은 미래에 주어질 것인데 그때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충성해야지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백성들의 생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걸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그러한 불충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의 것으로 주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남의 것 곧 주어진 주인의 돈에도 충성하지 못한 청지기에게 하나님께서 어찌 청지기 자신의 소유를 갖도록 하겠습니까?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비전에 충성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비전과 사명도 주어질 턱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추구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의 마음에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비전 따로 내 비전 따로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일치된 나 자신의 마음의 소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자리요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자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서 충성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자리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기서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새로운 직급과 위치를 바라보고 그것을 비전삼고 달려가기보다 지금 주어진 위치에서 성실하게 직무를 다하고 충성할 때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새로운 위상을 얻고 새로운 지위를 얻게 되어 더 큰 일에 쓰임받게 되는 하나님나라의 원리입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충성할 때 더 큰 일이 맡겨지는 것입니다. 남의 것에 충성할 때 내 것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종에게 큰돈을 주면서 집을 건축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종은 이처럼 큰돈을 준 것으로 보아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이 오래되고 낡아서 주인이 살 크고 무시무시한 집을 지으라는 지시로 받아들였습니다. 돈을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돈을 좀 삥땅쳐먹어도 표도 안날 정도로 큰돈이었고 또 짓게 될 큰 집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은 부실하게 건축했습니다. 설계도와는 다르게 건축 자재도 빼먹기도 했습니다. 마음을 들여서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서 집을 다 짓고 나서 주인에게 갔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말하기를 지난 수십년간 나를 위해서 수고해줘서 고맙다며 그 집은 너를 위한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종은 속으로 땅을 치고 탄식했습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충실하게 제대로 지을 걸...’ 인생은 대부분 이와 같습니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고 내 것이 하나도 없는 채 이땅에 와서 살다가 남의 좋은 일만 한다고 생각하며 인생의 지나감을 아쉬워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인생으로 마감하는 비극! 후회는 언제나 너무 늦은 후회일 뿐입니다. 극작가로서 독설가였던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짧게 의역하면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입니다. 이런 인생이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과 같은 인생도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사시렵니까? 지금 주어진 이 자리에서, 지금 주어진 일상의 삶에서 충성하십시오.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진정한 비전과 사명입니다! 충성이 비전이 되는 인생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들의 삶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18년 10월2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역전과 전복으로서의 하나님나라 (막 10:35-45)
지난 시간에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 ‘염려보다 하나님나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라는 명령이었고, 인생의 참된 비전과 사명이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구하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삶인지를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을까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전달하고 있는 사상이나 내용은 퍽 낯설고 급진적인데 반해서, 성경 자체는 너무나 익숙한 말씀입니다. 친숙하다보니 급진적 성격이 다소 무뎌진 느낌이 드는 말씀입니다. 날카로운 급진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는 말씀입니다. 실제 삶에서 실천하려 할 때 급진성이 도드라지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성경을 아는 것과 성경대로 사는 것이 분리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줍니다.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개선된 삶에서 그치지 않고 기존 가치의 역전과 전복으로서의 혁명적 변화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혁명을 하고 있습니다. 혁명으로서의 하나님나라 운동입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에서 일어나야 하는 혁명입니다. 세상나라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과 전혀 이질적인 삶이며 그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대안적 삶을 구축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나라와 세상나라의 결정적 차이점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 의해서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43절)로 표현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 백성들의 삶의 모습에는 없어야 하는 것이 세상나라 백성들의 삶의 주된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겠죠. 그것은 바로 자기 입지를 세우고 자기를 확장하고 자기 통치를 확립하는 것입니다. 한번뿐인 인생에서 자기 이름을 남기려는 몸부림이기도 하고, 선망하는 지위에 올라 사람들의 시선과 존경을 받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인 소망이기도 합니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성공한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 드디어 다윗 왕조를 회복하시고 왕으로 등극하실 기대감이 제자들 사이에서 고조되었습니다. 지난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닌 보람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신다면 예수님 가까이 곁에서 지난 3년을 함께 보낸 제자들에게도 한자리가 떨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기대감이 고조됨과 동시에 노골적인 요구사항을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십시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요구를 마땅히 들어주어야 할 것처럼 예수님을 코너에 몰고 있는 듯한 분위기와 뉘앙스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 알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36절에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까?
야고보와 요한은 노골적인 권력 의지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습니다. 37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들의 요구사항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왕의 보좌 좌우편에 자신들을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우의정 좌의정 시켜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죠. 야고보와 요한은 친형제였고 베드로와 더불어 이 셋이 예수님의 핵심 제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를 비켜두는 것만 빼놓고는 으레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은 요구사항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들만 따로 데리고 가셨을 정도로 열 두 제자 중에서 핵심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그룹 중에서 제자들 중의 제자들, 즉 이너서클을 이루고 있는 셋 중에서 이제는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베드로를 배제하고 자신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누지 못한다고들 생각하는데 조금 더 지나면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요청도 자신만을 더욱 가까운 곳에 앉게 해달라는 독점적 요청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등극하시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혀 달라는 것인데요, 그들은 예수님이 앉게 될 영광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리고 예수님의 자라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38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야고보와 요한이 요청한 것이 무엇입니까? 왕으로 등극할 예수님의 보좌에서 가장 지근거리의 좌석 아닙니까?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그곳을 모른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기대한 예수님의 보좌는 왕으로서 위엄과 영광이 빛나는 왕좌, 모든 사람들이 앉고 싶어하는 자리일텐데요, 실제 예수님이 앉게 될 자리는 고난과 모욕과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구한대로 들어주면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좌우편의 자리가 될 것인데, 나중에 누가 그 자리를 차지했나요? 예수님의 좌우편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가 차지했죠. 그러니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맞죠. 야고보와 요한이 기대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고난과 모욕과 수치와 희생의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스러운 왕의 보좌 좌우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면 그들이 앉게 될 자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좌우편에 매달린 그들의 십자가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 즉 내가 짊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너희가 너희의 십자가를 질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고 대답합니다. 39-40절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예수님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답입니다. 나중에 야고보와 요한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서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야고보는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순교를 당했고,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살면서 예수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핍박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목회를 수행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다!”고 대답했을 때, 순전히 착각으로 한 대답이었고 예수님의 질문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대답이었지만, 이들이 나중에 변화되어 예수님의 의도대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서 사명을 감당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들의 대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라고 대답하신 이유입니다. 지금 그들이 알고 싶어하고, 그들이 요청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대답해주십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십자가를 통과하고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앉게 될 영광의 자리 좌우편에 누가 앉게 될 것인가는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조차도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따라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누군가가 그 영광을 얻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말 그대로 오직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의 통치를 전하는 분이시고 유일한 통치는 오로지 하나님의 통치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게 될 위상과 자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누리게 될 안락함과 행사하게 될 권력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다툼과 싸움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생존을 확보하려는 본능과도 같습니다. 누구나 동일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일대 회개를 하지 않는 한 여느 누구도 이러한 삶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왜 다른 제자들이 화를 내는 겁니까? 야고보와 요한의 마음을 그들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는데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차고 나가니까 화가 나는 것이죠. ‘지들이 차지하면 우리 자리는 어딘데?’ 하는 분노심과 초조함입니다.
삶의 습성이나 인간의 본성은 생각보다 바뀌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관성이 있어서 삶의 방향전환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세 번이나 자신의 예루살렘행이 결코 영광스러운 왕으로 등극하는 자리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거기서 고난과 수치스런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기존의 자신들의 메시야관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로마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줄 왕으로 등극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된 이후 그들의 위상과 그들이 얻게 될 지위와 누리게 될 영광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야고보와 요한이 먼저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했으니 야고보와 요한이 얼마나 얄밉게 보였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도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을 탈피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혁명적 가치를 가르쳐주십니다. 기존 세상 가치의 역전이요 기존 가치의 전복으로서의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4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권력을 잡으려는 이유는 주관하고 싶어서입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렇게 권세를 부리고 싶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고 권력을 잡고 싶은 것입니다. 남보다 우위에 서고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맛이 나는 거죠. 풀이 죽은 채 인생 살기에 자신이 너무 귀한 탓이죠. 자기 보호와 생존 본능 상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잡아먹을 수 있는 힘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요 삶의 집착입니다. 본능적인 생의 방향이요 삶의 원동력입니다. 세상적 가치의 흐름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43절)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이러한 자아 집착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고 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교회는 무엇입니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소금입니다. 마치 소금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강조점은 조미료나 방부제 역할을 하는 소금의 용도가 아닙니다. 이보다는 소금 자체의 독특한 속성, 곧 소금 자체의 맛을 잃으면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무엇으로 맛을 잃은 그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입니다. 소금이란 한 번 그 짠맛을 잃으면 다시는 그 맛을 회복할 방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소금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히는 것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제자는 제자다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소금의 짠맛을 잃어버리는 안타까운 지경에 처하게 될까요? 제자다운 삶을 살다보면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박해가 따르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소금의 짠맛을 포기하고 세상의 가치관과 세상의 흐름을 거슬리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과 같아짐으로써 어려움을 피해가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짠맛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들끼리만 가치관을 공유하고 세상에서는 티를 내지 않기도 합니다. 아예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즉 교회 안에서만 짠맛을 드러내고 세상에서는 짠맛을 감추고 순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분리시키고 주일과 평일을 시간을 분리시키고 성전과 세상이라는 공간을 분리시키며 이원론적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짠맛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동화되는 것도 문제고, 짠맛을 지키려다보니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별히 후자의 꼼수를 겨냥하는 경고의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에 이어지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의 빛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위한 빛입니다. 소금에 관한 말씀이 소금의 용도를 다해 짠맛을 내라는 말씀이 아닌 것처럼 빛에 관한 말씀도 세상이 어두우니까 세상의 어둠을 밝히라는 권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제자의 존재 자체가 빛이고 빛의 속성과 닮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을 통해서 멀리서도 잘 보이는 높은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겨질 수 없듯이 빛이 가진 속성은 사람들에게 비쳐지는 것입니다. 빛이 사람들에게 비쳐져야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만듭니다. 빛 스스로가 보이는 곳에 있어야 다른 것들을 보이게 만들 수 있습니다. 도시를 산 위에 세웠다는 사실 자체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겠다는 의사 표시입니다. 만일 숨길 생각이었다면 땅굴을 파고 지하 시설을 만들면 되지 굳이 산 위에다 도시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란 ‘산 위에 있는 동네’와 같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란 듯이 만들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어지는 설명도 이러한 사실을 보강해줍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우리가 등불을 켜서 말과 같은 큰 통 아래 감추어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불을 잘 보이는 높은 곳에 있는 등잔대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래야 집안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숨어서 주변을 밝힐 수 없는 노릇입니다. 빛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드러난 위치에 있을 때라야 밝히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 있어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에 관한 말씀도 세상의 어둠을 밝히라는 권고가 아니라 예수의 제자들은 존재 자체가 빛과 같아서 그 빛이 사람들 앞에서 비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중요한 것은 ‘사람 앞에’입니다. 땅속 아래가 아니라 산 위에 도시처럼 우뚝 서서, 그리고 말 아래가 아니라 등잔대 위에 놓여진 등불처럼 고상하게 서서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빛이니까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세상에서 빛으로 반짝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빛이 비추이면 사람들은 그 빛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존재감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올바른 삶, 곧 제자다운 삶을 사람들에게 빛처럼 보여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지 않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 본문 43절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지금 성공하려면 역발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탑이 되려면 바닥부터 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커지고 으뜸이 되어서 사람들을 주관하고 영향력을 과시하고픈 동기를 삶의 원동력 삼아 살아가는데 반해서 오히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의 짠맛, 그리고 빛의 비춤은 세상에서 섬김과 종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섬기는 자가 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식탁에서 편안하게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옆에서 시중 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가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보여주지 못한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과 섬김을 그렇게 해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역전시키고 전복시킴으로써 공개되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정되는 하나님나라의 백성다운 정체성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입니다. 맨 먼저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신 길입니다. 개척하신 길입니다. 본문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잘 대접받고 인정받고 환호받고 영광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섬기러 오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대접받고 인정받고 권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는 자리에 오르려고 하는 흐름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습니다. 지극한 섬김, 곧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대신하여 내놓으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주인되어 자기 통치를 확립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애쓰며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그들을 대신하여 내놓으시고 죄값을 치루시므로 죄의 노예된 그들을 해방시켜주시러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죄악된 자기 통치의 세상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시고 드러내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세상 가치의 역전과 전복으로서 드러나고 확장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세상에서 내신 그 길을 뒤따라가므로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는 도구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10월14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돈보다 하나님, 염려보다 하나님나라 (마 6:25-34)
우리의 생명이 위협을 받으면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로서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염려가 엄습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염려는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방어기제입니다. 생명은 자신의 생존을 보호하고자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염려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5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하니까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실제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문제가 없다면 당연히 생존이 위협 받지 않으니까 염려할 필요도 없을텐데 먹고 마시고 입는데 문제가 있을 경우에 염려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5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씀하고 있고, 31절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5절의 ‘그러므로’는 24절에 뒤이은 당연한 결론입니다.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나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나 하나님 섬김이 다른 것들과 나란히 놓여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돈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물질적인 욕구를 따라 사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은 가치 중립적인 재화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이 될 수도 있고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돈의 역기능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돈이 우리에게 미치는 안좋은 영향이 몇가지 있습니다.
돈은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마비시키는 역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대학생들에게 초콜릿을 먹도록 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초콜릿을 먹기에 앞서 설문을 했는데, 두 부류로 나눠서 한쪽은 설문지에 선명한 돈 사진을 한 장 끼워넣었고 다른 한쪽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설문을 마치고서 두 쪽 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어 먹게 했습니다. 대학생들이 초콜릿을 얼마나 음미하며 먹는 지를 관찰하는 실험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생각을 슬며시 하도록, 돈 사진을 보여주고서 초콜릿을 먹게 한 것입니다. 차이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돈 사진을 보고 설문에 답한 쪽이 돈을 보지 않은 동료보다 초콜릿을 덜 음미하며 먹었습니다. 초콜릿을 더 빨리 먹었고, 표정도 덜 웃으면서 먹었습니다. 결과의 해석은 이렇습니다: “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착각을 심어준다. 그래서 초콜릿 같은 시시한 것에 마음 두지 않게 하고, 이런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킨다.”
돈의 역기능은 초콜릿이라는 먹는 자극을 음미하는 능력을 감소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사람이라는 자극에도 덜 관심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돈에 대한 생각을 집어넣으면 대화를 덜 하게 된다는 실험 결과도 있습니다.
또다른 돈의 역기능은 돈은 사람에게 ‘자기 충만감’ 혹은 ‘자충족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 쉽게 말하면 우쭐한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돈이 있으면 “너희가 없어도 난 혼 자 살 수 있어”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를 입증하는 실험이 있습니다. 대학생들을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기하게 했습니다. 실험 미션을 주기 전에 10분 정도 컴퓨터 앞에서 대기하면서 컴퓨터 화면 보호기에 한 부류는 다양한 돈 사진들을 보여주었고 다른 한 부류에게는 물고기나 동물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대학생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실험을 하기 전의 대기 상태라고 말해주었지만 실제 실험이 시작된 것입니다. 10분이 지나서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 받는 행위를 관찰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을 만들고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는지를 실험한 것입니다. 돈 사진을 10분간 본 사람들은 평균 68초의 시간을 할애해서 요청 받는 도움을 행사했지만 다른 부류의 대학생들은 다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는 같은 사안에 대해서 148초의 시간을 할애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남에게 얼마나 도움을 청하는지도 관찰했습니다. 해답을 낼 수 없는 어려운 과제를 풀도록 해서 17분 동안 참가자들 중 몇 퍼센트가 도움을 청하는지를 기록했습니다. 돈을 본 사람들은 30% 미만의 사람들만이 도움을 청했지만,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60% 정도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거의 무의식적인 수준에서 돈을 생각하기만 해도 다른 사람을 덜 도우려 하고, 남의 도움 또한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돈의 의식, 혹은 돈의 존재감이 커질수록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감은 작아진 것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다.”는 문장에 대해서 동의하는지에 관해서 국가별로 조사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이 문장에 대해서 “YES”로 대답한 비율이 가장 높은 국가가 어떤 나라였을까요? 우리나라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라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처럼 소득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는 대부분이 “NO”라고 대답했는데 유독 우리나라는 심지어 하루 세끼조차 보장되지 않는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돈을 더 중시한다는 놀라운 결과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 우리나라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시선에 크게 영향을 받는 집단주의 문화가 강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를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입니다. 집단주의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나라는 존재보다 오히려 더 크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인의 평가를 의식하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해지기가 어렵습니다. ‘남들로부터 신뢰와 존중을 받는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미국이나 덴마크인들의 90%가 그렇다고 대답했는데 반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56%만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같은 문화권인 일본 사람들은 66%였습니다. 이런 문화권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가 중요한데 지나치게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더 적어집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돈이 더욱 절실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은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물질적 풍요다.”가 되는 것입니다. (<행복의 기원>, 서은국 저 참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이 문화적 분위기나 압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어느새 우리도 이러한 가치관에 오염되기가 쉽습니다. 돈이 사람 관계에서도 사람 생각을 덜하게 만드는데 하물며 신앙에서는 그 파괴적 영향을 주지 않겠습니까? 돈과 신앙이 어느 정도 반비례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와 인간 본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심지어 먹고 사는 생존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 처한다 해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25절)입니다. 창조주께서 사랑 때문에 우리를 창조해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생명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도 주시지 않겠느냐, 창조주께서 우리를 창조해주시고 우리에게 몸뚱아리를 주셨다면 그 몸에 걸칠 의복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도 주셨는데 덜 중요한 것을 안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궁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가리키십니다. 26절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28절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언뜻보면, 예수님의 논리는 미래를 위해 식량을 준비하지도 않는 새나, 의복을 걱정하지 않는 백합화도 자연적 본능에 따라 잘 살고 성장해가는데 하물며 ‘심고’ ‘거두고’ ‘모아들이기’도 하는 너희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 동물이나 식물보다 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동물이나 식물들이 하지 않는 거두고 수고하고 길쌈을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냐는 책망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심고 거두고 온갖 수고를 다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이라면, 동물이나 식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오히려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겠죠. 음식과 의복을 위해 수고를 하는 것도 목숨과 몸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도 그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래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의도는 인간이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미래를 위해 준비하게 만드는 불안이나 염려를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수고하고 일하고 대비함으로써 미래를 맞이해야 하지만, 창조주께서 식물과 동물이 염려 없이 살도록 만들어주셨다면 이보다 더 귀하게 창조한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삶의 주인 되려고 미래를 대비하며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급하심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26절)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30절 말씀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찮은 들풀, 곧 사라져버릴 들풀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고 들의 백합화도 솔로몬의 옷보다 더 영광스럽고 화려하게 입혀주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그런데 웬 의복 걱정이냐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없는 인생이 되어서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고 여러 가지 수고와 노력을 하고 돈을 벌려고 애쓰는 인생들아 그렇다고 삶의 불안정성이 제거되고 든든한 안전감을 느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가련한 인생들아, 그러한 시도로써 늘 노심초사하고 염려가 끊이지 않는 인생들아 한 번 생각해보아라. 물질적 자원과 돈을 확보하기만 하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27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염려한다고 생명이 한 시간이라도 연장될 수 있느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두가지 번역이 다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물질적 수단을 확보하고 예비함으로써 염려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도 없고 불안으로부터 자신의 삶을 안전하게 할 수도 없다는 진리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세계에서 피조물들의 필요를 제공해주신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인생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핵심은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보냐”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연의 생명들도 돌보고 계시고 생명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주신다면,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염려 없이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없이는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셨는데 우리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에 지배당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31-3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겁니다.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로 미리 끄집어와서 앞당겨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 지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분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로부터 해방을 얻고 자유로워지려면 우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삶의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염려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헌신과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염려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에 이르는 길은 소극적으로 염려를 극복하는 것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창조주의 비전과 의도에 부합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는 인생입니다. 본문 33절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중요한 것은 “먼저”입니다.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세워져야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우리, 다시 말해서 피조물인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지려면 창조주의 목적과 의도의 흐름에 자신의 인생을 내맡길 때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교회를 통하여, 역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나라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가져왔고, 그때 이후로 계속 성장해가고 있습니다. 완성을 향해 계속 확장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완성, 이것이 하나님의 최후의 관심사라 했을 때 우리가 그 관심사를 공유하고, 그 흐름과 일치되는 인생을 추구한다면 거기서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며, 그 다스리심을 받는 그의 백성들입니다. 그 직접적 다스리심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예수님 인격 안에서 시작되었듯이, 먼저 우리 자신 안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함으로써 구원의 측면에서 확장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의 반대 개념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통치 방식이나, 힘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 나라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법칙과 뜻이 통용되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했을 때, 간접적으로 로마 제국에 반대했음은 물론입니다.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일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사회적 측면입니다. 이 사회와 국가가 그리고 내가 속한 학교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운영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나라라는 가장 중요한 목표를 첫 번째 자리에 놓는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물질적인 염려조차 하나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게 되면 염려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2013년에 소천하신 원경선이라는 분은 한국 유기농법의 선구자이자 식품그룹 ‘풀무원’의 오늘이 있게 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십대 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원경선은 일제 강점기 때 너무 가난해서 교사가 학비를 대신 내줘 그나마 초등학교만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졸업 후 모교를 찾아 농사지어 번 돈으로 학비를 반환했습니다. 교사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인 교장은 그의 정직함을 학생들에게 훈화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했던 원경선은 졸업 후 교장 추천으로 영농자금 혜택을 군청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어느 날 주일에 군청에서 모범 영농 시찰을 나온다고 했습니다. “주일은 교회에 가야 해서 안 됩니다.” 그가 거절했지만 돼지 잡고 술 받아 놓으라는 압력이 계속됐습니다. 주일 예배를 보는 중 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노발대발했고 소환장이 날아들었습니다. 군청 주사는 “조센징들은 근본 정신상태가 틀려먹었어. 천황폐하의 하늘과 같은 은혜를 도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는 짧게 답했습니다. “신앙에 위배되는 일로 나를 간섭하려 한다면 모든 것을 반환하고 내 길을 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고향이었던 황해도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해방 후 그는 토목건축 청부업에 뛰어들게 됐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급격히 신앙심이 흐트러졌습니다. 군정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공사를 딸 수 있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건 말 그대로 명목뿐이었어. 정신없이 타락했지. 양심의 가책도 나중에는 모르겠더라고. 그러다 결국….”
어느 날 미군 트럭 짐칸에 앉아 인천 부평 공사현장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과속하던 차가 미끄러져 전복됐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하나님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초자연 하나님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1949년 그는 타락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경기도 부천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아를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풀무원입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을 때 그는 주저 없이 답했습니다. “전도자입니다.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올시다.” (국민일보 기사 참고)
이분의 삶이 하나님나라를 이땅에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고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입니다. ‘나는 전도하는 목사올시다’, ‘나는 전도하는 OOO올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염려보다 하나님나라입니다. 염려에 사로잡히지 말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하나님나라를 추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해주실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돌보아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하나님나라가 여러분 인생의 비전과 사명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10월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계획 (엡 1:11-12)
오늘 본문 11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11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여기서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를 뜻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에서 사용된 ‘기업이 되다’는 동사는 ‘제비를 뽑아 결정되다’, ‘제비에 의해 선택되다’를 의미합니다. 제비를 뽑아 땅을 분배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제비 뽑혀서 하나님의 몫으로, 하나님의 분깃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하나님의 몫으로 할당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을 따라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몫으로 할당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주권적 뜻과 예정으로서 선택해주신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운명과도 같은 어떤 부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 각자를 향한 특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존재를 창조해주심은 아주 특별한 계획을 따라 그리 하신 것인데요, 그래서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분명한 설계도가 있고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창조주께서 계획한 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한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참된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 때에만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해 특별하게 디자인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그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우리 인생은 무엇을 하든 허무감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생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에서 뭔가 중요한 알맹이가 빠져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고성준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은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계신 목사님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서울대 수학과 교수셨고 이분도 서울대 수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의 U.C버클리에 유학을 가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U.C버클리는 명문대학이죠. 특별히 수학 분야에서는 하버드대학과 더불어 세계 최정상급 학교입니다. 여기서 박사학위를 땄으니 수학에 있어서 탁월한 분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이분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교수가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목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가 바로 접었는데, 이유는 이분이 어려서부터 말을 심하게 더듬었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남들 앞에서 속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많이 생각했을 정도로 심하게 말을 더듬었습니다. 남들 앞에 나가서 말한다는 것이 큰 공포였습니다. 학창 시절에 학교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 전날에는 긴장과 불안 때문에 밤잠을 설치곤 했습니다. 교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도 말더듬이라는 장벽 앞에서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수학자가 말을 안하고 살 수 있는 직업 같아서 수학 공부를 계속했고, 위상수학이라는 어려운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습니다. 박사학위를 마칠 무렵 이분은 하나님께 자신을 평신도 선교사로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그리고서 국내로 돌아왔습니다. 국비유학생은 학위를 마치면 한국에 돌아와 3년간 일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로 나가기 전까지 국내에서 훈련을 받고 3년간은 수학교수로서 일해야 했습니다. 때마침 미국에서 친하게 지내던 목사님이 수원에 교회를 개척하셨고, 미국에서부터 워낙 좋아하고 따르던 목사님이라 이분도 자연스레 그 교회에 합류했습니다. 이분은 3년간 수학교수로 일하면서 개척교회를 섬기고 파송을 받아 선교지로 나갈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께서 채 1년도 못돼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회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버리신 것입니다. 목사님이 안계신데 자신도 교회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교회 집사님 몇분이 이분을 찾아왔습니다. “국비유학 규정 때문에 3년 동안은 한국에 계셔야 되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목사나 선교사나 그게 그건데 3년간 교회를 섬겨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선교사로 작정한 사람이지만 평신도 집사에게 교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이분은 이 제안을 받고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습니다. 신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평신도 집사여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말더듬이였기 때문입니다. 당장 거절하지는 못하고 기도는 해보겠다고 대답하며 돌려보냈습니다. 이분은 기도원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목회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게 분명히 말씀해주십시오. 그냥 대충 감동이 있다. 이런 것으로는 안됩니다.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말씀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순종하여 목회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원래 계획대로 3년 후에 선교사로 나가겠습니다.” 이분이 대학 시절 보수적인 학생선교단체에서 하나님을 만나 신앙생활을 시작하였고, 장로교회를 다녔고, 미국에서는 보수적인 침례교에서 성경공부를 했던 신앙이력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응답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응답을 듣고 싶어서 그렇게 기도를 한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3일째 되는 날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기도 가운데 생생한 육성으로 주신 말씀은 “나는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기 원한다. 새로운 세대는 광야에서 죽어 없어진 모세의 세대와는 다르게 요단강을 건너 땅을 정복할 세대다. 너를 향한 나의 계획은 네가 선교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남아 새로운 세대인 다음 세대 청년들을 준비시켜 선교지로 들여보내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귀로 들었는지 마음으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나 선명하고 분명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목회가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뒤돌아보니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분이 섬기는 교회에서 훈련되고 파송된 많은 청년들이 이스라엘과 아랍 지역을 오가며, 실제로 요단강을 넘나들며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계획이 한치의 오차도 없이 틀림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낸 책이 <데스티니: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입니다.
영어 단어 ‘데스티니’(Destiny)는 ‘운명’, ‘소명’, ‘부르심’, ‘목적’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지만 이분이 생각하기에 영어 ‘데스티니’에 제일 근접한 번역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은 자신의 특별한 경험에 비추어서 모든 인생에는 데스티니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우리 삶에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명확한 설계도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되 우리를 향한 사랑 넘치는 계획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데스티니가 있는데, 그것을 이루어갈 때 행복하고 거기서 멀어져갈 때 인생이 허무해지는 데스티니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셨고 심어놓으신 데스티니입니다. 마치 우리 몸의 DNA와도 같이 각자에게 창조해 넣어주신 데스티니라는 DNA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이해하고 그 길을 선택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우리를 통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분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데스티니를 알고 그 DNA를 꽃피웠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독특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데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살아가므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써내려갔던 것입니다.
이분이 기도원에서 하나님께 응답을 받고 교회를 맡기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서 신학교에 입학했고, 개척교회 담임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주일이 돌아오자 공포심이 극에 달했습니다. 설교를 해본 적도 없을뿐더러 남 앞에 서는 일에 공포를 가진 사람이 설교를 해야 한다니, 토요일에 일찌감치 설교 원고를 만들어놓기는 했지만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씨름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함께해주셔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도는 원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왜 저만 미워하십니까? 말 잘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저같은 사람을 데려다놓고 이러십니까? 왜 저만 못살게 구십니까?” 이윽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제 기도는 살려달라는 애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주일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에 갔습니다. 설교하기 위해 강단에 섰는데 거짓말 같이 말을 더듬던 것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35년간 자신의 옭아맸던 자신의 가장 큰 한계요 장벽이었던 말더듬이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이후 20년 가까이 목회하면서 설교할 때 말더듬는 것 때문에 방해를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그 계획에 순종할 때, 즉 자신의 데스티니의 길에 들어서자 인생의 오랜 장벽이 무너져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분이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 진짜 장벽은 환경이나 나의 부족함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진짜 장벽은 데스티니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막는 진짜 장벽입니다. 이 장벽이 무너져야 합니다. 순종함으로 한 발을 내딛으십시오. 믿음의 발, 딱 한 발이면 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이고, 또 제가 경험한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신의 몫으로 제비 뽑아서 선택해주시고 할당해주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것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를 선택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이유요 존재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우리 인류의 오랜 오매불망, 오랜 소망 곧 “전부터 바라던” 것인데요, 오직 때가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소망이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녀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하기 이전에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고 반사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계시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보이고자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물의 대표로서 인간을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할 때에 주어졌다가, 타락했을 때 거의 상실된 것처럼 왜곡되었으며,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즉 거듭날 때에 회복되기 시작하여 평생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삼위일체 자신에게서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처소 삼아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히 빛났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창조를 다 이루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안에만 머물던 하나님의 영광이 온땅에 충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천지 창조 이후로는 우주만물에,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대표인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서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를 회복하고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처소인 참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담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독생자에게 주신 당신 자신의 영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래도 드러났고 하나님의 영광도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1-3절에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입니다! 처음 인간 창조 때,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될 때, 바로 그러한 목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 발산해내는 목적으로 창조가 되었는데, 이 목적이 오직 예수 안에서만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에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행위보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서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래 하나님 자신에게 머물던 하나님의 영광이 우주만물에 가득했으나 피조세계의 대표였던 인류의 반역과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철수했지만, 하나님은 이를 회복하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온 우주만물에 다시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불러내시고 선택해주신 것입니다. 마치 제비를 뽑아 선택하듯이 우리를 선택해주셔서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아주시고 우리에게 그러한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우리를 불러내주시고 자녀 삼으신 목적입니다.
점진적으로 이루아가야 할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평생토록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우리의 사명이요 비전입니다. 이는 처음 창조를 그대로 회복해야 할 과업이기도 한데요, 다른 말로 하면 창조주께서 심어놓으신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우리가 발견하고 그 데스티니를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잠재력을 뽑아내어 현실화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의도대로 우리가 본래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977년에 스코틀랜드 교회협의회는 기독교 영성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가운데 충만한 인간이 되는 것”으로 정의를 내렸습니다. 참된 영성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아들의 형상을 본받으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창조주의 의도대로 원래의 자기 자신을 충만하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보다 충만한 인간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한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읽고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멘.
■2018년 9월3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주여, 내 뜻을 아옵소서! (시 139:19-24)
오늘 주보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우리나라 10대, 20대, 30대에서 사망 원인 가운데 1위가 자살입니다. 특히 20대의 경우는 사망하는 사람들 중에서 거의 절반인 약 45%가 자살했습니다. 의학 기술이 좋아져서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많지 않은 영향도 있습니다만 사고사보다 자살의 비율이 높다는 건 특이한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현격하다는 점에서 참으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 자살했는가에 관한 ‘자살사건에 대한 심리사회부검 연구’ 결과 극단적 선택을 한 이들은 사회적 고립 상태에 있었고 스스로 인적자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을 때 자살에 이른다는 결론입니다. 곁에서 붙들어 줄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했고 결국 자살을 선택했다는 설명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로부터 이해받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잘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의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영랑 시인의 ‘내 마음을 아실 이’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띠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살다 보면 이러한 시가 마음에 가까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특히 몸이 아플 때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 때, 그리고 어려움에 처할 때 이러한 심정이 더욱 절실해집니다. 바늘에 찔린 작은 아픔조차도 다른 사람이, 설령 그게 부모라도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고통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숨이 넘어갈 때 내가 옆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감기만 걸려도 내가 대신 아파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김영랑의 이 시도 자기 혼자만의 외로움을 읊고 있습니다. 내 혼자만의 마음을 알아주시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없기 때문에 몹시 그립고 애가 타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절절한 그리움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는 그 임을 만나지 못한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동양문화권의 특징이라기보다 서양문화권의 특징입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어령 선생은 서양 문명, 특히 기독교 문명을 알려면 ‘나’와 ‘우리’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양문화권에서는 ‘나’보다 ‘우리’ 곧 ‘공동체’가 우선이었습니다. 함께 일해야 수확할 수 있는 농경문화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혼자 수렵을 하거나 가족 단위로 유랑하며 목축을 했습니다. 동양에 근대화가 이루어질 때, 서구 문물뿐만 아니라 ‘우리’로서의 ‘나’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나’라는 관념이 처음 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 서있는 개인적 단독자! 그래서 외로운 개체라는 의식이 동양문화권의 사람들에게 탄생한 것입니다.
이어령 선생은 하나님을 만나는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에 내가 고립되고, 사막 광야에 내던져졌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사상은 무인도나 사막에 떨어져보기는커녕 전통적으로 자연과 친하고 교섭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치열함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사람들은 그 텅 빈 사막, 광야에 홀로 서 본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개인으로서 하나님과 홀로 조우하기가 쉽지 않다는 분석입니다.
시편 139편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이 부당하게 뒤집어쓴 억울한 혐의에 대해 하나님께 결백을 호소하는 시로 읽히기도 합니다. 무죄를 천명하며 결백을 호소하는 노래라는 것입니다. 오늘까지 3주에 걸쳐서 시편 139편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1절부터 6절까지는 나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샅샅이 아시는 하나님의 지식 곧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7-12절은 내가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는 무소부재하시는, 즉 없는 곳이 없으신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나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하나님의 속성의 한 단면들입니다. 때때로 하나님이 어디서나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이나 하나님의 앎이 불편하기도 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만, 7절의 고백과 같이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자신의 시도가 헛된 것임을 곧 깨닫게 됩니다. 시편 139편의 저자인 다윗은 이렇듯 벗어버리고 싶은 굴레처럼 여겨진 불편한 하나님의 시선을 극복해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라는 성경적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적용해냄으로써 그렇게 했습니다. 멀리 있는 교리가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묵상하므로 가까운 삶의 교리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하나님이 자신을 지으셨다는 것인데요 어디서 언제 지으셨냐는 물음에 대해서 자신이 생겨나기도 전에 모태에서 형성되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신을 보셨고 아셨고 그렇게 자신을 지으셨다는 깨달음입니다. 마치 실을 짜서 옷감을 짓듯이 베틀질하고 길쌈하여 옷을 만들 듯이 그렇게 섬세한 공정으로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자기 자신을 형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발적 창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이루어진 의도적인 활동입니다. 16절에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고 고백하므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계획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모태에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마치 어머니 품처럼 따뜻하게 여겨졌습니다. 태반이 태아의 존재의 기반이었듯이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존재의 기반이셨습니다. 출생부터 살아가는 삶과 죽음까지 다윗이라는 한 개인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가까이계심은 불편한 시선이라기보다 따뜻하고 친밀한 보살핌이었고 임재였습니다. 그래서 17-18절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고 감사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내 뜻을 아시는 하나님, 내 고민과 내 형편과 내 사정을 다 아시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심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진정한 화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다윗의 생각의 진전이었습니다. 교리와 성경적 진리,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하나님의 편재하심에서 생각을 시작하여 창조 교리를 통해서 그것이 개인적으로 어떠한 축복인지를 묵상해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사유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제는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21-2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심히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하나님의 원수가 곧 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는 그들을 자신도 멀리한다는 고백입니다. 친밀감을 넘어선 하나님과의 일체감입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있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자신도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의 하나됨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드디어 자신이 처한 삶의 현실에 마주서게 되었습니다. 그 현실이란 악인들에 의해서 부당하게 어떤 혐의를 뒤집어쓰게 된 사람으로서의 억울함입니다. 때로는 다수에 의해서 그렇게 평가받다보니 더욱 외롭고 자신이 과연 올바른 위치에 서있는지 확신이 흔들리게 된 상황입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자기 주위에 있는 악인, 그들은 억울한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인데 그들로 인해서 다윗이 곤경에 처한 현실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해보니,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생각해보니 그러한 악인들에 의해 코너에 몰리게 된 다윗 자신이 결코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있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으며 심지어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느끼고 있는 자기 자신 주위에 가득찬 악인들, 이러한 삶의 현실과 ‘하나님과 나’라는 성경적 현실이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자들은 자신에게서 떠나가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 자신에 대해 악할 뿐 아니라 인간 심성의 왜곡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으로 헛되이 맹세하나이다” 자신 주위에 가득찬 악인들은 또한 하나님을 무시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나 진정성을 찾아볼 수 없는 거짓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확신에 대해서 어떤 해석자는 종교적 광신이거나 편협하게 자기만 옳다는 잘못된 확신이라고 폄하하기도 합니다만, 이보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신의 중심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 어떠한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보는 편이 더 낫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대하여 자신이 충성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삶을 살아왔다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부당하게 몰고 가고 어떤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있는 그들은 분명 악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오늘 다윗과 같은 심정을 토로할 때가 살다보면 많이 찾아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구별하옵소서”(렘 12:3) 사도 바울도 주위 사람들의 그릇된 비난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자신의 정당함을 호소했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3-4)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마음을 아신다는 확신입니다. ‘내 마음을 아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라는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부당한 현실에 맞서서 자신이 그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충성되게 살아왔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시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23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하나님께 자신을 올려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스캔해달라는 간구입니다. 1-6절에서 이미 말한 바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하나님이라는 믿음을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적용해보는 것입니다. 나를 살펴보시고 나를 시험해보셔서 자신의 중심이 어떠한지, 자신의 마음의 품은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어련히 잘 아시겠지만 외부의 비난을 직면한 억울한 현실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바로 서있음을 알아달라는 호소이자 간구입니다. 자신의 결백을 알아달라는 간청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팔아먹고 살아오지 않았다는 확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억울하다고 사람들 찾아다니면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해달라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우리의 사정을 아뢰야 합니다. ‘내 마음을 아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됩니다. 모든 다른 인간관계를 뛰어넘는 하나님과의 나의 관계입니다. 외로움과 고립감과 부당함과 억울함은 오직 나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고 어디서나 불꽃같은 눈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에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여, 내 선한 뜻을 알아주옵소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벗어나지 않은 내 선한 뜻을 알아주옵소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극히 작은 한 개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지으신 분이시고 나에 대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는 분이심을 압니다. 나를 향해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시고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외에 내가 누구에게 피하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향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내 불안과 내 걱정과 내 염려와 내 두려움을 아시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시오 내가 피할 바위시오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고 떳떳하게 살아왔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이 자칫하면 독선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만이 선이고 자신만이 옳다는 맹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체감을 넘어서버려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나 그렇게 넘어갈까봐 다윗은 우려하여서 다음과 같은 기도를 덧붙입니다. 마지막 24절입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자신이 아무리 옳다고 확신을 해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고 그래도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해도 영원한 무죄를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이 억울하게 느껴지고 자신은 순전히 피해자라고 확신을 해도 그것이 영원한 무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확신 있게 자기 정당화를 한다고 해도 그렇게 의로워질 수 있는 인생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간의 자기정당화 대신에 하나님은 우리가 의로워질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영원한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의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아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입혀주시려 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제물이요 화목제물로 세우시므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났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으면 우리가 영원히 의로워지는, 영원한 무죄의 길을 내셨던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죽게 하심으로써 무엇을 이루셨는지, 어떠한 공로를 행하셨는지를 알고서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켜주셨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분노를 진정시켜주셨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보여주셨고, 예수의 의를 우리의 의로, 그리고 우리의 죄를 그분의 죄로 여겨주셨습니다.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의롭지 않은 우리를 의롭다고 말씀해주시고 선언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피흘리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받음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영원한 무죄로, 영원한 길로 인도함 받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26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시편 139편은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창조주로서 그분의 신실하심이 특별히 곤경에 처한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를 묵상하고 적용한 삶의 진리입니다. 한 인생이 어떠한 혐의에 대해 결백을 호소하면서도 혹시라도 자신에게 어떠한 악이 남아있을까를 우려하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호소하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붙들고서만 설 수 있는 인생의 영원한 길을 제시해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9월 한달 간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승리요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구원의 승리요 무죄 평결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창조해주신 하나님의 선하신 궁극적인 뜻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창조해주시고, 아니 그 이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셨고 이땅에 보내신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결국에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공로 힘입어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9월23일 동산교회 설교
존재의 신비 (시 139:13-18)
매주 화요일 밤에 SBS에서 방영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불타는 청춘>에 가수 이재영씨가 최근에 출연했습니다. <불타는 청춘>은 40세 이상 중에 혼자 사는 연예인들이 한데 모여 함께 여행을 가며 서로 친구가 되어가는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입니다. 중견 스타들이 서로 자연스럽게 알아가며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서 오랫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가수 이재영씨는 1991년 데뷔해 가요 ‘유혹’ ‘대단한 너’ ‘사랑은 유행이 아니야’ 등을 불렀는데요 1998년 돌연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이후 뮤지컬 ‘맘마미아’ 등으로 무대에 서곤 했지만 브라운관 앞에서 근황을 공개한 건 20여년 만입니다. 그녀가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공백기 중 겪은 투병생활을 끝낸 뒤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극심한 허리 통증으로 입원 생활을 한 적이 있는데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습니다. 고통스럽게 투병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힘은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입원하려고 집에서 짐을 꾸릴 때 우연히 선물 받은 성경이 눈에 띄어서 병원에 가지고 갔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갈 때마다 성경을 붙들고 ‘내 몸이 회복되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기도했습니다. 2005년 퇴원 판정을 받은 뒤 기도한 대로 집 근처 교회로 향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데뷔 때부터 갖고 있던 의문들을 뒤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타’라고 우러러보는 시선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예활동을 하면서도 항상 원인 모를 허무감과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며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만난 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같은 철학적 의문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완성되는 기분을 경험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 뒤 만난 평안함은 상상 이상이었다”며 “태어나서 처음 느낀 기쁨”이라며 간증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CCM 음반을 발매했고 교회에 다니면서 찬양간증집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분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같은 철학적 의문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완성되는 기분을 경험했다”고 했습니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의문들은 풀리지 않은 미스테리한 질문입니다. 철학자들, 특별히 존재론을 다루는 철학자들에게 존재만큼 신비한 것은 없습니다.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차라리 무(無)가 아닌가?” 또는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질문인데요, 20세기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 질문을 철학의 근본 질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철학자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책을 썼습니다. 한 마디로 ‘있음’과 ‘없음’인데요 존재에게는 ‘있음’과 ‘없음’이 항상 같이 다닙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인데요. 존재라는 본질을 수립하기 위해서 우리 의식은 자신을 되돌아봅니다. 즉 우리의 의식이 우리의 존재를 수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성찰하고 있는 우리의 의식은 존재 자체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존재를 의식할 뿐입니다. 그리고 의식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존재는 과거의 존재로서 현재의 자기 자신이 아니죠. 이 의식은 존재와는 구별되고 거리를 두는 것으로서 존재가 아니라 붕 떠있는 말 그대로 의식일 뿐입니다. 이 의식이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 바로 무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 존재는 있음과 없음을 항시 같이 지니고 다녀서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태어났나?’, ‘왜 존재하게 되었나?’ 라는 질문은 필연적인 사건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태어난 인간이란 없으며, 모든 존재함이란 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존재의 구조에 속한다는 논의입니다.
이러한 철학자 논의를 살펴보고 있노라면 참 할 일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만큼 지성은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고 싶어합니다. 그만큼 존재란 신비한 것이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했고 ‘존재와 무’라는 자기 실존에 대해서 확고한 태도를 가졌던 샤르트르도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분이 노년이었던 1980년에 파리의 한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거기서 한 달 만에 돌아가셨는데 한 달 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기 병명이 무엇인지 의사에게도, 아내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여러 신문은 그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샤르트르의 말로가 왜 이렇게 비참했는가? 그것은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부모의 자녀이죠. 그래서 추석이 되면 긴 행렬을 따라 ‘고향 앞으로!’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근원을 찾아올라가기 위해 거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이 추석만 되면 고향으로 향하고 부모에게로 향합니다. 본향을 찾아가려는 종교 의식과도 같이 정기적으로 수행되는 고향 방문입니다. 부모가 내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이죠. 고향이 내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이죠. 회귀현상처럼 근원을 찾아가려는 인간의 열망입니다. 갓난 아기 때 해외로 입양 간 사람이 행복한 양부모 밑에서 좋은 환경에서 양육 받고 성장했어도 근원을 찾아 다시 한국에 와서 친부모를 굳이 찾으려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근원에 소급되어 이르기 전에는 자신의 존재가 해명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해명이 안되면 존재는 답답해합니다.
남궁인이라는 청년 의사가 있는데요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나날의 사투를 기록한 에세이 ‘만약은 없다'와 ‘지독한 하루'라는 책을 쓴 의사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불타고, 부서지고, 터지고, 짓이겨진 육체를 치료하는 현실의 응급실 의사로서 그는 매일 밤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들의 사고와 죽음을 생생하게 목도한 경험을 책으로 낸 것입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왜 아파했고 어떻게 죽는지, 그걸 아는 죽음과 모르는 죽음은 확연히 다릅니다. 저는 항상 제가 치료했던 환자의 시체 앞에 혼자 남아 죽음을 복기합니다. 나 자신도 납득이 되도록. 죽어가는 사람에게도 가족에게도 그 과정은 꼭 필요하지요." 납득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본인과 가족이 느끼는 죽음의 질은 천지 차이라는 것입니다. 이분이 하룻밤에 받는 환자가 23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루에도 4~5명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이분은 죽음을 당한 환자의 가족들에게 ‘어떻게 죽음에 이르렀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고 합니다. 왜 아파하다 죽는지, 그걸 아는 죽음과 모르는 죽음은 확연히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환자나 환자의 가족에게 죽음에 관해서 잘 설명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분에게 질문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무엇인가요?” "살아생전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이나 추억을 못 잊어 주위 사람들이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그런 죽음입니다." 또 질문했습니다. “물리적으로 평안한 죽음은 무엇입니까?” "건강히 오래 살다가 수면 중에 돌아가시는 거죠. 이러한 분들은 괴로운 표정이 전혀 없었고 오직 평온했습니다."
존재는 죽음도 납득되어야 하고 삶도 해명되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왜 죽는지?’ 등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존재를 수수께끼와 같은 차원에 남겨두지 않고 명백하게 답을 해줍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담담하게 선언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드신 세계, 그리고 나입니다. 태초에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인한 말씀으로 우리 생명을 불러내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은 처음 창조와 같은 말씀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혼을 새롭게 창조해내시고 계십니다. 아무 것도 없던 완전한 ‘무’에서 선한 것들이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로서 하나님께서 좋다고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이며, 창조의 면류관인 존재와 생명이야말로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아름답고 긍정적입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서 창조세계에 죄가 들어와 왜곡되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세계에 대해서 신실하시며 우리 생명들을 긍정하십니다.
교부신학을 완성한 신학의 거장 어거스틴은 창조론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피조물은 원래 무에서 창조된 것이므로 자기에게서 행복을 찾아낼 수 없고, 자기를 창조해주신 창조주에게서만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여전히 세계는 하나님의 세계이고 우리는 피조물이며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생겨났으며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선하신 창조주께서 행복하라고 창조한 존재라고 성경은 알려주는 것입니다.
시편 139편은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시킨 탁월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창조하셨다는 일반적 진리에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음을 근원적으로 그리고 실존적으로 성찰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언제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불편한 것이어서 가끔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는 충동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을 둘러싸고 자신을 축복해주시는 선하신 분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가끔은 하나님의 시선을 따돌리고 멀리 도망가고 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헛된 시도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아시고 자신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며 그 눈을 피할 수 없도록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을 피할 길이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생각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화해의 길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오늘 우리가 읽은 13-18절 본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는 자신을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존재의 기반이요 근거가 되시며 존재의 본향임을 실존적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 사실로 인해서 따뜻한 어머니 품같은 하나님에게로 진정 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여기서 ‘내장’은 원래 ‘신장’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신장’이라는 기관으로서 오장육부 전체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오장육부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만드셨다는 고백입니다.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모태 곧 어머니 뱃속에서 만드셨다는 고백입니다. 모태 곧 어머니 뱃속이 우리 존재의 근원이요 출처라면 더 근원의 근원은 모태에서 우리를 빚으신 하나님께로 소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만드셨다’는 단어는 ‘직조하다’ ‘길쌈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틀질을 하듯이 우리를 어머니 뱃속에서 섬세한 공정에 따라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되 나를 놀랍게도 고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특별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고 있습니다.
15절입니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다윗은 모태를 ‘은밀한 곳’과 ‘땅의 깊은 곳’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밀한 곳’이나 ‘땅의 깊은 곳’은 종종 음부 곧 ‘스올’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표현인데, 다윗은 어머니 뱃속을 스올과 같이 완전히 은폐된 곳, 완전히 어둠 가운데 있는 곳으로서 유사성을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마치 예술가가 밀폐된 작업실에서 예술 작품을 창조해내듯이 이렇듯 은폐되고 어둠 가운데 있는 어머니 뱃속에서 하나님께서 위대한 예술가처럼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감격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지음을 받되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직물처럼 엮어져가고 짜이고 조직되어 가는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자라가며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된 것을 음미하면서 감동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주님은 어머니 뱃속에서 존재를 창조해내시면서 ‘형체’와 ‘형질’이 형성되어져가는 과정을 지켜보셨습니다. 15-16절에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형체’나 ‘형질’은 뱃속에서 태아가 자라나는 과정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뼈와 모양이 형성되도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그 형성 과정 전체를 주님이 보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셨다는 것은 태아의 성장 과정을 지켜보셨다는 뜻만이 아니라 태아의 뼈와 형질이 형성되기도 전에 미리 보셨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시작부터, 아니 시작하기 이전부터 다윗을 아셨고 보셨고 그를 조성하셨으며, 심지어 그의 인생 전부의 운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예정하셨습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 모든 운명이 책에 기록되었고 그를 통해 하실 일 곧 그의 사명을 책에 기록해두셨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어머니의 태속에서 자신이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영감을 받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반적 창조, 이론적 창조가 실존적 창조로 실제적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이 점이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주님의 영원하신 뜻과 섭리의 결과로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자신에 대해 모든 것을 샅샅이 아시고 자신을 감찰하시고 자신과 함께하시며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이 더없이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존재의 기반이요 고향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자신을 자신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17-18절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하나님은 고향의 큰 산과 같이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시며 나를 바라보시는 시선이 보배로운 생각으로 가득찬 어머니와 같고 고향 같은 내 존재의 근원이요 내 운명의 주인이신 분이십니다.
성경은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고, 영원한 운명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 자신을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 때에만 참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관점을 받아들이면 허무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의해 기록되고 헤아려집니다. 단지 우연에 불과한 인생이나 우발적으로 존재하게 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적 관점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에 대한 명백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관건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른 관계가 세워져야 인생의 의미도 행복도 있습니다.
한국 CCC의 대부 김준곤목사님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지도’라는 섬입니다. 이곳은 전국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높은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섬인데요 이분 집안이 달마다 7대조까지 제사를 드리는 종갓집이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동네 유림회 회장이었고 늘 제사를 드리고 엄격한 규칙 아래 선비로 살아가셨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은 여덟 살 때 지도면 일대를 복음화시킨 문준경 전도사님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일제 시대 때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도망쳐 만주 목단강 근처의 조그만 마을에서 1여년간 숨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위기 속에서 살아난다면 일생동안 전도운동으로 우리 민족을 예수 믿게 하고 좋은 나라 만들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용광로처럼 활활 타올라 제일 먼저 아버지께 편지로 예수님을 소개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이 직접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익히며 아들에게 유교의 진리를 가르치셨는데 그런 아들이 서양 문물에 빠져 서양 귀신을 믿으니 족보에서 제명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완강하게 거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천도를 숭상하시면서도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셨습니다. 해방이 된 후 만주에서 만난 아내와 결혼해서 귀국했습니다. 6.25가 발발하자 유일하게 이승만 정권을 지지했던 아버지와 기독교인이었던 나와 아내는,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지도면 일대에서는 2천여 명의 민간인이 공산당에게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백여 명쯤 되는 공산당에 경도된 사람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사람들을 묶어 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아버지를 마당에 무릎 꿇리고 밧줄로 묶고 있었는데도 아버지는 유학자로서 선비의 기개를 버리지 않고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하시면서 호령하고 계셨습니다. 동네 뒷산까지 끌려갔더니 마을 친척들을 비롯한 60여명의 사람들이 끌려 나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먼 친척 아저씨와 그집안의 여덟 아들들이 모두 끌려 나와 죽음을 맞았습니다. 곤봉으로 사람들을 때려 실신시킨 후 한꺼번에 죽창이나 일본도로 찔러 절명시켰는데, 자신의 눈앞에서 아버지와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습니다. 여덟 살짜리아이가 도망치다 잡혀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무참히 짓밟고 검으로 찌른 그 사람을 보면서 목사님은 그들을 저주했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주님은 인류사에 모든 저주 받을 짓을 다 보셨겠지요? 지금 이 순간 맷돌을 만들어 저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사는 땅과 하늘을맞들어 맷돌질해서 없애주십시오.’ 그때, 의식이 가물가물해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그 때에 짐승의 울음소리, 마치 소가 울부짖는듯한 절규가 들렸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습니다. 곤봉에 맞아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셔서 아들인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고 계셨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던 나는, 아버지의 피 토하는 그 부르짖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숨이 멎어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부르셨던 그 외침, 죽음의 순간까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그 외침을 김준곤목사님은 평생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아들의 이름을 부르다가 숨이 끊어지셨습니다. 김준곤목사님은 시체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나중에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살펴보니 곤봉에 맞아 입과 턱이 피범벅이 되어다 깨어져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낳으신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의 기반이며 우리를 직접 창조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가장 깊은 뜻입니다. 이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18년 9월16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너무 기이하고 높은 지식 (시 139:1-12)
옌스 바이드너라는 독일의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지적인 낙관주의자>라는 책을 쓴 분인데요. 이분은 삶에 대한 낙관주의자가 비관주의자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고 더 행복한 삶을 산다고 주장합니다. 낙관주의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고 평균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며 더 많이 성공한다고 합니다. 일례로 낙관주의자는 심각한 병에 걸려 수술을 하더라도 그 회복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이분은 ‘평균이상효과’를 주장하는데요, 평균이상효과란 ‘자신을 평균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해서 사회생활에서 상처를 덜 받는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설사 실제 사실과 다를지라도 ‘평균이상효과'로 무장한 낙관주의자들은 그 어떤 비난에도 쉽사리 흔들리지 않아서 한결 수월하게 사회생활을 합니다. 이분은 심지어 사람들에게 약간의 과대망상을 권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이분은 사람들이 낙관주의자가 될 수 있도록 활발하게 저술과 강연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분들은 그렇지 않은 분보다 낙관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소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3주간 시편 139편을 묵상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해보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낙관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시편 139편은 150편이나 되는 많은 시편 중에서 구약학자들에 의해 ‘영성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장입니다. 어떤 학자는 시편 139편이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에 대한 가장 높은 사상을 담고 있다”고 말했고, 중세 시대의 한 랍비는 “이 시편은 시편 전집에서 그 짝을 찾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각자 하나님과 자신의 영혼을 아는 것에 비례해서만 이 시편의 뜻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마크 저커버그가 하버드대학교 재학 시절에 페이스북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는 "시편 139편 1~4절 말씀에서 페이스북에 관한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저커버그는 복음주의자였던 대학교 룸메이트로부터 처음 성경에 대해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성경을 읽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처음 펼쳤을 때, 시편 139편을 보았다. '와, 정말 훌륭한 사업 모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러한 회사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페이스북이 사생활 침해 논란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는데 "모든 이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자는 페이스북의 계획"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에서 열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셔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살펴 보셨다’는 말은 보석을 분별할 때, 법적 분쟁에서 증거를 저울질 할 때, 군사작전에서 적을 정찰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검사나 감찰관처럼 우리의 생각, 동기, 행동을 철저하게 조사해왔기 때문에 우리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2-4절은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해줍니다. 2절입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앉는 것’과 ‘일어서는 것’은 쉬고 일하는 ‘인생살이 전부’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활동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아십니다. 3절입니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나의 모든 길’은 공적인 활동들을 뜻하고 ‘내가 눕는 것’은 사적인 활동들을 가리킵니다. 나의 모든 공적 사적 활동을 주님께서 정확히 보고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4절입니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여기서 ‘내 혀의 말’을 아신다는 것은 단지 우리 언어를 이해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내 말의 배후에 있는 생각과 의도까지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입으로 나온 말뿐 아니라 ‘나의 혀에 말이 없을지라도 당선께서는 그것 모두를 아시나이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기 이전에 하려는 말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록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은밀한 의도를 완전히 파악하고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러한 사실이 이어지는 5절에서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신다’는 말은 원래 전쟁 용어로서 ‘포위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사방을 포위하시고서 안수해주십니다. 안수는 축복하는 행동입니다. 우리 곁에서 우리를 둘러싸시고 우리를 안수해주시며 축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이 시편의 저자인 다윗은 감격해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1-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가까이에 계셔서 다윗의 행동과 생각과 동기까지도 다 아실뿐 아니라, 정확하게 아시며 또한 친밀하게 알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지식’ 곧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자신을 너무나 잘 아신다’는 ‘지식’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지식이 다윗에게는 너무나 ‘기이하고 높게’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엄청나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에게 너무나 가까이 계시고 그를 너무나 잘 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므로 우리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한계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너무나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한 깨달음을 고백했던 다윗은 이러한 지식과 깨달음이 자신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 자신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은 너무나 놀랍고 경이롭지만 때때로 감당하기 벅찬 사실입니다.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보면 신을 살해한 한 없이 추악한 사람이 나옵니다. 신이 한없는 동정과 연민으로 사람을 불쌍히 여김으로 인해서 인간의 가장 적나라한 구석구석까지 파고 들어오는데 그것을 견딜 수 없어서 결국 신을 살해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긴 신을 증오하게 되고 신을 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짜라투스투라는 하나님을 살해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너는 그가 너를 보는 것을, 항상 너를 꽤뚫어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너는 그 목격자에게 복수를 했어... 너는 하나님의 살해자야." 그러자 그 신을 살해한 사람이 짜라투스투라에게 동의하며 대답합니다. "그는 죽어야 했어." 이유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는 눈을 갖고서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랍니다. 인간은 그런 목격자가 살아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마 10:30-31)고 말씀하셨는데 때때로 이러한 말씀이 하나님께서 나의 추악한 모습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다윗도 아마 그러했나봅니다. 주님의 친밀한 임재조차도 피하고 싶어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누구나처럼 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가 때론 불편하고 버거워서 하나님으로부터 도피를 추구하는 인간의 무익한 시도에 관한 묘사가 12절까지 이어집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도망치려는 충동은 아담의 타락만큼 오래된 것으로서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 행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8절입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께서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의 편재하심인데요, 심지어는 음부에도 계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로서 하나님을 피해서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이 어색해보입니다만, 이 부분을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 없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에게 적용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 없는 완전한 하늘을 향해 도약하려는 시도를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해오고 있지만 그러한 곳은 말 그대로 ‘유토피아’, 즉 ‘없는 곳’입니다. 이상주의자들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이상주의자나 진보주의자의 시도는 결국 좌절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피해 스올로 내려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요구와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바라고 죽음을 시도하는 자들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들에게 만족할만한 길을 제공해주지 못함을 죽음을 시도하는 자들도 분명하게 알고 있을 뿐입니다.
9-10절입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새벽에 떠오르는 새벽 빛 광선을 날개 삼아 세상 끝, 지중해 바다 끝, 서쪽까지 순식간에 날아간다 해도 거기서도 주님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수평적으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순간적으로 이동한다 해도 거기서도 주님의 임재에 포획될 것입니다. 아무리 과학 기술이 발달하고 정보화시대가 첨단을 걷는다 해도 인간의 문명이 하나님을 없애고 인간이 신이 되려는 미래를 위해 달려간다 해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붙잡혀질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우리가 때때로 하나님의 낯을 피해 흑암 속으로 도망치려는 충동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한 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의식 밖으로 밀쳐내고,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 없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겠노라고 속으로 은연 중에 다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스스로 어둠에 잠기려 해도 어둠조차도 주님에게는 어두울 수 없으며 밤도 낮처럼 빛날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 그럴 수 없음을 알면서도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조차도 가끔은 하나님 없는 인생을 추구하고 꿈꾸기도 하며 무익한 도피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결국 하나님께 체포되어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청년 루터도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에 대해서 증오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과 친밀한 임재는 그에게는 불편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무겁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이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 공명정대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을 증오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그분이 존재하는 것을 바랄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이 가장 지혜롭고 가장 강한 분이기를 바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수도사로서 자신의 내면에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증오를 발견하고 무섭도록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신학의 스승들에게 알리면 그들의 대답은 하나님의 엄중한 임재를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증오하는 신성모독을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시편 139편의 다윗처럼 그 어떤 하나님으로부터 도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궁극적 프라이버시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크고 우리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시고, 또한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붙들리고 간파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청년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죄인은 심판하고 의인은 보상’하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공의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그는 하나님의 의를 지닌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했지만, 자신의 사라지지 않는 죄성을 보게 되면서 오히려 심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두려움과 증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해소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죄악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주는 의이고,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의 깊은 의미를 로마서를 통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이전의 카톨릭의 잘못된 신앙체계와 결별하고 종교개혁의 혁신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한 분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에서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진정으로 알 수 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만난다는 것은 그분의 속성 역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성품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오늘 시편 139편 1-12절은 1-6절까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7-12절까지 하나님의 편재하심이라는 속성을 보여줍니다. 나에 관해 모든 것을 세밀하게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라는 깨달음은 너무나 기이하고 높아서 우리의 한계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디나 계시나는 하나님의 편재는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하나니의 속성이 그래서 때로는 불편하고 감당하기에 버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나 편재하심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속성으로 이해하면 거기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에 관해서, 그리고 역사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언뜻 생각해보면 심판이 불가피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기에, 은밀한 곳에서나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죄를 짓기 마련인 인간에게 심판 외에는 다른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출 34:6) 하나님이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실상을 더 잘 아시면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집나간 둘째 아들(탕자)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인간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인간에게 회개와 변화와 성숙이 가능한 시간을 허락해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의 지혜와 오래 참으심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하는 인간의 걸음을 인도하시고, 사랑에 대해 응답할지도 모르는 인간이 심지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인내하며 역사하는 심오한 지혜가 곧 하나님의 전지하심의 핵심 내용입니다.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은 모두 우리를 위한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어리석은 우리를 지혜롭게 만드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은 나약한 우리를 힘 있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비참한 상태에 처한 우리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심으로 인해서 우리를 인내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시도가 아니라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책임을 다하는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다음 시간에 살펴볼 시편 139편 13-18절의 주제입니다. 창조주로서 피조물을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알고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향한 좋은 생각들을 셀 수 없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가 결코 불편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인생을 더욱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언급했던 옌스 바이드너라는 독일의 심리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분은 "자녀를 위해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낙관주의자가 되길 바라야 한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을 책에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이분이 우리나라 한 신문사 인터뷰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어떻게 낙관주의라는 유산을 물려줄 수 있나요?”는 질문을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부모로부터 "너 대체 커서 뭐가 되겠니?" 같은 말을 듣고 자라면 비관주의자 클럽
에 입장권을 끊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의 실제 외모와 능력보다 더 많은 칭찬을 받을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좌절에 처했을 때 어린 시절의 칭찬은 그들의 회복 탄력성에 큰 도움을 준다. 무엇보다 자긍심 가득한 눈으로 표현하는 부모의 사랑의 언어는 훗날 아이들에게 의지할만한 보험이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의 보험이 될만한, 그래서 우리가 의지할만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백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은 너무나 안전한 토대 위에 인생이라는 발을 올려놓은 사람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기이하고 높은 지식에 대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싸 안는 사랑을 더욱 깊이 알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깨달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9월9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의 뜻과 마음의 소원 (빌 2:12-18)
오늘 주보 칼럼에 리더십에 관해서 글을 썼는데요, 스포츠 경기에서도 리더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계획된 훈련을 통해서 선수들의 기량을 끌어올리는 것에서부터, 실전 경기에서 선수를 기용하고 교체하고 전략적이면서도 순발력 있게 작전을 구사하고, 잠재력 있는 선수를 발굴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스포츠 경기에서 감독의 역할이 매우 많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야신(야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김성근 감독이 말했습니다: “리더는 고독하다. 하지만 그것이 힘들다고 느낀다면 자격이 없는 것이다” 리더가 고독한 것은 조직의 사활과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결정을 홀로 자주 내려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책 뒷표지에 재밌는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성공한 기업의 회장을 만나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회장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회장은 자신감 있게 말했습니다. “현명한 결정!” 기자가 되물었습니다. “그럼 회장님께선 어떻게 현명한 결정을 내리시나요?” “바로 경험이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경험을 쌓으셨나요?” 기자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회장은 회심의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나쁜 결정!” 이 이야기의 원래 저작권은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에게 있습니다. 그는 “좋은 결정은 경험에서 오고, 경험은 나쁜 결정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했습니다.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애니 듀크 저, 책 뒷표지의 글에서 발췌)
결정의 중요성을 이처럼 잘 표현한 문장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꼭 인생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만이 아니라 우리는 중요하든 사소하든 크고 작은 결정을 매일 내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네소타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에릭 클링거는 우리가 매일 300개에서 많게는 17,000개에 이르는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정을 내릴 때 안 믿는 사람들과는 달리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한 가지 사안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자신이 원하는 결정을 내려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결정을 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에 고민도 하고 기도도 하고 신중하게 결정을 합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찜찜함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겠죠.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김진혁이라는 젊은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몇 해 전에 한 교회 목사님에게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특강 부탁을 받고서 왜 하필이면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를 정하셨냐고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대답이 청년들 사이에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배우자를 찾는다면서 결혼을 미루는 기이한 분위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배우자를 찾는다는 명분을 가지고 배우자에 대한 눈높이를 한껏 높여서 결혼하지 않는 노총각 노처녀가 청년부에 많아져서 ‘하나님의 뜻’에 대한 특강을 부탁하신 것이었습니다.
청년들뿐 아니라 우리도 숱하게 다양한 이유와 형태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장 흔한 경우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고통의 때입니다. 이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왜’로 시작하는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왜 하필 나지?’, ‘지금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내가 지금 당하는 고통과 시련 이면에 담긴 하나님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 둘째, 중대사를 앞두고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대부분 ‘무엇’이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지?’, ‘어떤 전공 혹은 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까?’,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일까?’, ‘무엇이 최선일까?’ ‘남북한이 다시 평화롭게 통일되는 게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면 전쟁이 하나님의 뜻일까?’ 워낙 본인에게는 다급한 상황이다보니 긴급하게 ‘하나님의 뜻’을 간절히 구하는 질문들입니다. 가끔은 하나님의 뜻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우리의 욕심이나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해석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뜻은 우리와는 무관할 정도로 신비롭고 고상해서 알기가 어려운 걸까?’,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뜻에 따라 살아야만 하는 비극적 운명을 안고 있는 존재인가?’ 이런 질문도 가능합니다.
이분이 특강을 맡았던 청년부의 노총각 노처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기 전까지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고 데이트도 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이러한 태도가 과연 바람직할까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요한복음 7장 16-17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당시에 성경을 가르치는 랍비들은 이전의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성경을 해석했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도 여느 랍비처럼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라고 말씀하시지만 여느 랍비처럼 오랫동안 대물림된 인간의 전통을 토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가르침은 “나를 보내신 이”에게서 온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물론 예수님 이전에 등장했던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 역시 자신의 가르침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보내신 여호와의 말씀임을 강조했습니다만, 지금 예수님의 주장은 그들의 주장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전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라고 선언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다면 예수님은 아예 대놓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하시고 하나가 되어서 행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가르침을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가르침을 올바로 평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잘 훈련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헌신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심사숙고하고 알려고 애쓰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해서 알려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믿음의 헌신이 있는 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서 예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고 있고 예수는 지금 자기 말을 하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의 방향과 헌신이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가르침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국의 강해설교자 캠벨 몰간 목사님은 우리 인간 각자에게 개인적으로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의 계시의 분량과 명확성은 우리의 순종 행위에 크게 좌우된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려는 영혼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계시의 빛이 언제나 더욱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분은 덧붙이기를, “당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거든 순종의 길을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없이 알고자 하는 것은 마치 신탁을 구하는 이방 종교의 사람들이나 주술을 추구하는 미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점술 행위와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왜 알려고 하는지’를 먼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합니까? 자신에게 유익한 결정을 내릴 수 있기 위함입니까? 잘 되기 위함입니까? 성공하기 위함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성공이 우리의 우상이 될 것이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우상을 섬기는 일에 이용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동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인지 늘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브루스 월키라는 구약학자가 있습니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구약을 가르치셨던 분이신데요 어느 날 이분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습니다. 이 젊은이는 자신의 온갖 종율의 문제와 관련에 ‘자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하고, 어떤 학교를 다녀야 하고, 어떤 동네의 아파트를 구입해야 하고, 심지어는 어떤 자동차를 구해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거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이 교수님이 젊은이의 말을 다 듣고 질문했습니다. “동기가 무엇이지요?” 그는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원하는 것은 간단한 대답, 곧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맞출 수 있는 마법 같은 공식이었습니다. 그가 이분을 찾아와서 한 질문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를 유익하게 하기 위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는 고민이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은 그에게 두 번째 질문을 했습니다. “젊은이, 당신의 하나님은 누구신가요?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므로 독생자를 보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하나님이신가요, 아니면 좋은 자동차와 호사스런 집과 이상적인 직업과 개인적인 성공인가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때 어떤 특정한 사건을 가리켜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구체적 사건을 하나님의 뜻이라 부르는데 조심해야 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인격적 신뢰관계 속에서 피조물로서 우리 인간이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의 선함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은 언제나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기쁘게 만드는 것임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단하고서 삶의 전 방향을 그렇게 헌신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관한 김진혁교수의 특강의 마무리는 마치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려고 안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숨겨진 뜻에 맞게 사는지 아닌지 지켜보시고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려고 강박적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창조주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에게 부모의 의중을 헤아려 그 뜻을 찾아내서 거기에 이르러야 자녀를 보고 기뻐하는 게 아니라 자녀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해도 자녀를 보고 기뻐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의 결론은 ‘우리의 뜻에 임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소원에 임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일치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신앙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김진혁교수는 ‘우리의 뜻에 임하는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의 뜻’에 관한 긴 논의를 마쳤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정확하게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분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3절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우리의 마음의 소원과 뜻에 일치하는 하나님의 뜻을 강조합니다.
우선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통해 부르신 복음의 말씀을 듣고 복종한 이래로 그들은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향했습니다. 그리고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항상 복종했습니다. ‘복종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감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의 단락 이전에 어떤 말씀이 나옵니까? 빌립보서 2장 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리심이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복종하셨던 예수님처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항상 복종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어서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 채 바울이 떨어져 있을 때라도 혹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다시 만날 기회를 주셔서 그들이 바울을 대면할 수 있을 때라도 지금까지 항상 복종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임을 깨닫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듣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회개한 이래로 그들의 삶의 방향이 말씀의 뜻에 복종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처럼 초심을 잃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빌립보교회 공동체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제2차 선교여행 때 빌립보교회를 개척했던 설립자 바울이 있든 없든 구원을 이루어가는 문제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바울이 석방되어 다시 만날 때 새로운 각오로 이루어가야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항상 그랬듯이 계속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권면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내 노력이 계속되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할까 불안해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2절과 13절은 한 문장입니다. 본동사가 ‘이루라’입니다. ‘구원을 이루라’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은 이래로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복종했듯이 복종하며 살아가는 게 곧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1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는 종속절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명령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는 종속절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우리 각자의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인데, 그 하나님이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원함과 그 원함을 실행하도록 해주십니다. 이를 의역해서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설명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능력 있게 일하시고 효과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동사에서 영어의 ‘에너지’(energy)가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능력 있게 일하시는 하나님은 위대한 에너자이저이십니다.(The Great Energizer)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지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효과적으로 능력 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지치지 않고 다함이 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마음의 뜻을 갖도록 인도하시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실제적 능력도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선한 욕구를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의지에 힘을 더해주십니다. 결국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들은 이래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가지고 그렇게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데 이 사실에 대해서 불안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부합하는 선한 뜻을 일으키시고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책임 이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권하여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분이시지 단순히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도 아니고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능력도 주십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는 구체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빛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마음의 소원과 실행력을 가지고 변화된 삶, 그래서 세상의 빛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찬송가 540장)를 찬송해야 합니다. “주여 넓으신 은혜 베푸사 나를 받아주시고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주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피로써 나를 정케하소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특정한 일에 관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기보다 ‘과연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므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살고 있나요?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나요? 우리 안에서 지치지 않고 이 선한 뜻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힘입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된 마음의 소원과 그것의 실행이 나타나는 삶인가요? ‘예 아니면 아니오’로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모두가 아멘 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9월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남은 날들을 사는 법 (벧전 4:1-6)
우리는 9월 한 달 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척 스윈돌 목사님의 <신비로운 하나님의 뜻>이라는 책에 보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도들의 잘못된 방법에 대해서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남자가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 선교하러 갈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워싱턴 시가지를 운전하고 가는데 교통이 막혔습니다. 정체가 된 차 안에서 우연히 차창 밖을 바라보는데 필리핀 대사관이 있는 겁니다. 그는 필리핀 선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했습니다. 또 이스라엘 여행을 가야 할지 가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여행을 선전하는 팜플렛을 보니 이스라엘행 비행기는 보잉 747기를 타고 간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밤새 고민하다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 깨어 우연히 디지털 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계가 7시 47분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행을 가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대학을 다니다가 우연히 산업 현장에서 일하게 된 젊은 가장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돌아가 다시 공부하고 싶었는데 직장을 그만두기도 경제현실적으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은 직업을 갖기 위해 자격을 갖추기를 원했고 그래서 남선교회 조찬기도회에서 친한 친구이며 신앙적으로 훌륭하다고 인정받고 있는 한 집사님에게 그 문제에 관해서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이 경건한 집사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그 문제를 놓고 얼마나 기도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많이는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경건한 집사님이 “지금 당장 함께 기도합시다. 마음을 모두 비우세요. 그리고 기도를 마친 다음에 주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떠오르게 하셨는지 말해주세요. 알겠죠?” 두 사람은 함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경건한 집사님은 “주님의 뜻을 알려주소서”라고 말로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학교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 의심쩍기도 해서 망설이면서 조심스럽게 한 대답이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애쓰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MBC 기자로서 일했던 조정민이라는 분이 온누리교회 하용조목사님에게서 감화를 받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2013년에 베이직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이분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기도를 가르치신 대로 제일 중요한 분은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덧붙여 말하기를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나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연했습니다.
이분이 교회 이름을 베이직교회라고 지었는데 신앙의 기본에 충실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이분은 말합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입니다. 신앙의 목적도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예수님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하고 살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내 뜻을 이루어 줄 신을 찾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분의 뜻을 바로 아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예전에 어느 신학교 교수님이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생각납니다. 그분이 신학생 시절,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 궁금해서 교수님께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교수님의 대답, “내 뜻의 반대편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알뜻 모를뜻 선문답 같은 물음과 대답을 이야기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뜻이 마치 신비한 비밀처럼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나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주장하고 자신의 죄를 합리화할 때가 많음을 경계하자는 취지에서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뜻이 적어도 무엇이 아니고 큰 틀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왜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는지를 잘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죄를 그치게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죄를 그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에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죄값을 치루시고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은 죄의 세력을 처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세력에 철퇴를 가하여 예수를 믿는 자들이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죄의 세력을 척결할 목적으로 십자가를 지녔던 바로 그 생각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마음의 결단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난 이후에 우리의 각오와 결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두시고서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님 할 수 있거든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인류의 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받아들이신 것처럼 동일한 심정과 각오로 예수님을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죄를 단번에 처리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2절을 보십시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 후는 언제를 가리킵니까? 그리고 “육체의 남은 때”는 또한 어느 때를 가리킵니까? 예수를 믿고 난 이후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당연히 내 뜻대로 내 정욕대로 내 욕심대로 살았습니다만, 이제 예수를 믿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라는 것입니다.
3절에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씀이 이어집니다. 성적이 범죄인 음란과 정욕, 술취함과 술에 취해서 저지른 방탕과 향락, 그리고 결국에는 자신을 섬기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줄 우상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이어지는 죄를 짓고 먹고 마시며 살았던 과거에 그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물론 혈통적으로는 지금도 이방인이지만 그러나 지금은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 베드로 사도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다들 그렇게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의 뜻을 따라 죄를 짓고 살았지만 그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충분히 그러한 죄를 지었으니까 “많이 먹었다 아이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런 삶은 지나간 때로 족하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서도 그렇게 살아가면 되겠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내 자신의 정욕을 따르는 것, 그리고 예수 믿기 전의 이방인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반대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서 변화된 삶입니다. 거룩한 삶입니다. 정결한 삶입니다. 옳은 행실을 지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큰 틀에서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특히 베드로전서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성도들이 선을 행하는 삶입니다. 고난 받을 각오를 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백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7장 6절 말씀처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시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고 말씀하듯이, 거룩한 말씀을 받고 진주와 같은 보물인 하나님나라를 소유한 하나님나라 백성이지만, 우리가 다시 진흙탕속으로 뛰어들어가는 돼지와 같이 죄의 유혹은 참으로 끈질깁니다. 돼지처럼 가끔은 토한 것을 다시 먹게도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죄의 결박아래 갇히고 죄로 인해 신음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큰 틀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왜 우리는 그렇게 자주 하나님의 뜻보다는 예전의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 다시 기어들어가는 걸까요? 왜 우리는 하나님의 뜻보다는 예수 믿기 전의 이방인의 뜻을 따라 다시 살아가는 걸까요?
몇 가지 이유가 본문에서 제시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는 것이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이상히 여긴다’는 말은 ‘낯설어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낯설어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타지에서 온 사람, 외국에서 온 사람, 혹은 여행자처럼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낯선 가치관과 전통, 언행과 성품을 가진 사람들 대하듯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문제 삼고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가라는 압력을 은연 중에 받게 됩니다. 그 압력에 굴복하여 세상에서는 세상적 방식으로 살아가고 그러나 교회에 와서는 거룩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중적이고 이원론적인 신앙인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세상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말씀의 씨앗(헬라어로 ‘스포라’)을 품고 세상에 흩어진(헬라어로 ‘디아스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단지 관계적인 면에 있어서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업을 할 때 금전적인 손실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세상적으로 더 잘 될 수 있는 기회의 상실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을 보고서 박수 쳐주지 않고 오히려 비방합니다. 예전에는 방탕한 일을 함께 한 직장 동료가 갑자기 예수를 믿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그 일에 참여하지 않음을 보고 비난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밉보이지 않도록 살아가고 교회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로 예비하신 이에게 사실대로 고하리라” 여기서 ‘사실대로 고하리라’는 말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를 이유를 설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인간을 죽음으로써 자신 앞으로 소환하셔서 그들의 인생에 책임을 물으시고 소명하라고 요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 인생의 심판자이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실에 대해 우리의 선택에 대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인생에 대해 소명해야 함을 잊고 살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죄의 종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자각한다면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정욕을 따른 삶, 방탕한 삶, 이방인의 뜻을 따른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6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산 자’나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이유는 죽음으로 내닫는 삶을 끝내고 생명을 향하여,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자들에게 다시 복음이 전해져서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이 생전에 복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살아있는 우리가 복음을 듣게 된 이유와 같은 이유 곧 생명을 얻게 하려고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라면 지금 살아있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거나 그것이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듣고 새 생명을 얻게 된 사람은 이전의 삶과 전혀 다른 삶으로 살아가게 되어 세상 사람들의 비방과 따돌림을 받을 수 있기에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인간의 차원인 영의 차원에서 부활생명을 받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와 깨끗하게 단절된 삶을 살아 죽음으로 내닫지 말고 생명을 향해 살아가라고 복음이 증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 전파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복음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죄악된 세상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비방과 분노를 극복하고 승리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생명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겠죠.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할 수 있을까요? 고난 받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선한 삶을 살 수 있는가?>라는 책에 보면 저자는 ‘도덕의 간극’이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도덕의 간극’이란 인간의 자연적 능력에 비춰볼 때 도덕의 요구가 인간에게 너무 높다고 생각되므로 발생되는 간극입니다. 실제로 그렇죠. 십자가는 언제나 높은 곳에 매달려 있습니다. 왜 그 간극을 우리가 느끼게 될까요? 그분은 철학자이자 윤리학자이지만 기독교인으로서 ‘도덕의 간극’이 왜 생기냐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살도록 부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우리가 거룩해져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2절에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또 신약성경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둔스 스코투스라는 중세 신학자는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는 사랑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되어 삼위일체의 인격 사이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그분과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로 규정하신 방법에는 도덕과 거룩한 삶이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고 ‘도덕의 간극’ 문제를 해결할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을 검토하면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와주시는가? 그는 기독교의 전통 교리인 속죄, 칭의, 성화 교리를 검토하면서 우리를 도덕적 삶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의 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여 도덕적 삶으로 이끄시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세 시기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과거와 관련해서, 우리는 과거에 행한 일에 대해 용서받지 못했다는 죄책감의 짐을 더 이상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속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형벌을 받으셨고 그 결과 우리는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저지를 잘못에 대해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속죄의 의미입니다. 현재와 관련해서,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었습니다. 의롭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때 아직 뚜렷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있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실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의 의미입니다. 미래와 관련해서, 우리는 점점 성령의 감동 감화로 변화될 것입니다. 더욱 불완전함을 깨닫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거룩함에 더 가까워지는 점진적 과정 안에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처럼 영광스럽고 거룩함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의미입니다. 속죄와 칭의와 성화가 우리가 도덕적 삶이나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외적 환경을 변화시켜서 우리를 강제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내면에 하나님의 은혜가 흐리게 해서 우리의 삶을 조용한 혁명으로 뒤흔들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 딜레마에 빠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외적 환경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보통 하나님의 섭리로 나타나는 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외적 환경에 가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리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이 마치 숨겨져 있는 비밀처럼 접근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미 분명하게 말씀하신 선한 삶, 거룩한 삶을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도우심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중국 선교의 선구자인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스물 다섯 살의 젊은 나이에 중국땅을 밟아 평생동안 중국 선교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선교사로 보낼 수 있었습니까? 그러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지게 마련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신의 헌신 비결이 그리고 인생의 행복 비결이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부합하게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맞추는 일부터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기 이전과 믿은 이후가 확연히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 이러한 일이 어려워서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려는 유혹과 압력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은 이방인의 뜻이요 정욕을 따른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이제는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의 열매를 맺음이라는 부르심입니다. 최종적으로 거룩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안으로 끌어올려지는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고 욕을 맞고 고난과 비방을 각오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너무나 명백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8년 8월26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인생의 로망 (시 23:1-6)
여러분의 인생의 로망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삶을 추구하며 꿈꾸고 있습니까? 배고팠던 시절 한국인의 로망은 따뜻한 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남자의 로망은 보통 자동차인 듯합니다. 여자의 로망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차고 명품백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아닐까요?
가수 남진씨가 부른 노래 <님과 함께>에는 인생의 로망이 담겨있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살고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이분이 몇 해 전에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소강석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새에덴교회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최근에 이 교회에서 전교인 수련회를 했는데 이 무대에서 이분이 부른 노래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나만 믿고 따라와’라는 비교적 최근에 발표한 노래인데요. 가사는 남녀간 단순 사랑 노래 같습니다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던 부르심, 그리고 자신도 예수님께 부름을 받은 은혜를 표현하고 있는 노래입니다: “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니가 없으면 나도 없는거야 난 난 난 나는 너를 사랑해 넌 넌 넌 내가 필요해 한번쯤 너를 내게 맡겨봐 넌넌넌 내가 책임질 거야 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니가 없으면 나도 없는거야 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내가 너와 함께 가는 길이 힘들지라도 오직 한곁같은 그 사랑 그 사랑으로 너를 지켜줄 거야 그대와 나 우리 우리 함께 한다면 두려울게 뭐야 힘이들게 뭐야! 걱정일랑 하지말고 내가 안아줄게 평생지켜줄게 내가 책임질게”
이분이 어떻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되고 장로님까지 되셨는지 궁금해져서 이분이 어느 교회에서 했던 간증 영상을 찾아서 보았습니다. 이분이 1945년 생이니까 올해로 74세신데요, ‘국민 오빠’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생각보다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건강하고 활력 있게 활동을 하시고 특별히 교회를 찾아다니며 찬양간증집회를 많이 하시고 계십니다. 이분이 군생활을 해병대 청룡부대에서 했는데 월남전에 파병되었습니다. 군생활 대부분을 월남전에서 보냈습니다. 포탄이 바로 앞에 떨어지기도 하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죽음의 공포를 뒤집어쓰고 지내야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월남전에서 살아돌아온 후에는 조폭이 사시미칼로 허벅지를 관통시켰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대동맥이 찔렸으면 3-5분 내에 죽었을텐데 칼이 대동맥에서 5mm를 비켜가서 다행히 지혈이 되었고 병원에서 12시간 수술을 하고서 살았습니다. 여러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때만 해도 운이 좋아서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 뒤돌아보니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하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분이 20세에 데뷔하여 일찍 성공을 맛보고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이룬 성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만과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한 인기를 몇 십년을 누렸죠. 그러다가 나이가 들고 예전만 못한 인기로 인해서 뒤늦은 어느 때부턴가 삶의 허무함과 의미 없음과 특별히 외로움을 느꼈다고 합니다. 자녀도 많고 며느리와 사위도 맞이하고 손자 손녀도 보았지만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아마 허전함이었을 듯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주는 것이라지만 주는 만큼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아서 섭섭함도 쌓여져갔습니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래도 예수를 믿지 않았던 이유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성령으로 잉태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우연히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전기가 들어오는 이 작은 기계를 가지고 전 세계를 액정화면으로 돌아다니면서 엄청난 일들을 요새 하지 않습니까.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이 작은 스마트폰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묘막측한 일이죠. 스마트폰이 이룬 세상을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죠. 어떻게 이 기기가 작동하게 되는지 전문지식이 없는데도 잘 사용하고 있죠. 이 작은 머리로 스마트폰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스마트폰이 이룬 새로운 세상을 누리고 있죠. 이런 생각에 이르자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동정녀 탄생설도 하나님이 계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이가 들어가면서 새가 노래하는 것이나 꽃의 화려한 아름다움이 더욱 실감있게 다가왔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 것이죠. ‘이 대자연이 그냥 그렇게 있는 것일까, 아니면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지어진 작품일까. 스스로 의문을 갖게 되었고 만약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내 작은 머리로 창조주를 어떻게 내 머릿속에 넣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개미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맴돌면서 전지전능한 절대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게 되었고 예수님의 성령으로 잉태되심도 그냥 믿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뭐 따져들 필요도 없이 그냥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가 누군가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 아닌가.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되면서 더욱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하루 하루 교회에 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고나니까 이후의 모든 인간관계도 달라졌습니다. 마음에 참된 기쁨이 샘솟듯이 솟아났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구나는 생각을 요새 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간증이었습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백년 살고싶어’라고 인생의 로망을 구성지게 불렀던 가수 남진이 이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복을 누리면서 오직 감사, 이후의 남은 삶은 감사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뒤늦게 시작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다윗의 로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푸른 풀밭에서 쉼을 누리고 잠을 자고, 물이 없는 광야같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휴식할 수 있는 고요한 물가에서 안식하는 삶의 소망을 보여줍니다. 이는 아마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서 도망다니던 때에 피곤하고 지치고 생명이 경각에 달린 인생의 여정 중에 부른 노래가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3절에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고백한 것으로 보아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죽은 것과 방불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으로 인해서 다시 힘을 얻고 소생하였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도망다니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푸른 풀밭에서 쉬고 고요한 물가에서 목마름을 해갈하는 것이야말로 다윗의 로망이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다윗은 생애속에서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뛰어난 장군이었던 다윗은 생사가 걸린 여러 전쟁에 직접 참여했고 어렸을 때에는 목숨 내걸고 거인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했고 나중에 왕이 되어서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되돌아보니 목자 되신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아주셨고 지켜주셨고 이러한 축복을 주셨음을 감사하는 고백일 수도 있습니다.
목자 되신 하나님이 양무리에 속한 한 양인 자신에게 베푼 은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달마다 날아드는 고지서를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을까요? 워낙 경기가 안좋아 사업이 안되는 요즈음에도 진짜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나요? 원하는 대로 크지 않는 자식을 보고서도 이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관계의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어서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계속 삐거덕거리는데도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주시니 부족함이 없다고 진짜로 고백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고백은 예전에는 그랬을지라도 지금은 사업도 잘 되게 해주시고 속 썩이던 자식도 정상으로 돌아왔고 부부간 갈등도 해결되고 나름 경제적으로 안정도 찾도록 하나님께서 축복을 베풀어주셔서 이제는 진짜로 부족함이 없어져서 드리는 고백일까요? 건강은 나날이 안좋아지는데 이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정말 부족함이 없으십니까? ‘다윗이 그랬다는 것이지 우리가 그랬다는 말입니까?’ 라고 반문하고 싶으십니까? 부족함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럼 왜 부족함이 없다는 걸까요?
애플의 아이폰을 만든 대명사 애플의 창업주였던 스티브 잡스가 어렸을 때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열 세 살까지 그랬는데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1968년 7월 12일자 <라이프>라는 잡지에 가슴 아픈 사진 한 장이 표지에 실렸습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 지역에 사는 두 아이의 사진이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분리 국가였던 비아프라는 약 2년 반 동안 독립상태를 유지하다가 나이지리아의 무력으로 인해서 다시 통합되었습니다. 그 기간에 내전으로 인해서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열 세 살이었던 스티브 잡스는 당시 루터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는데 자신이 교회에서 배운 신앙과 이 사진속 현실이 맞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 문제에 답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는 주일에 교회에 그 사진을 가지고 가서 목사님에게 따졌습니다. “제가 손가락을 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제가 어떤 손가락을 펼지 미리 다 알고 계시나요?” 목사님은 대답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시지” 그때 잡스가 <라이프>지 표지를 꺼내 보이며 물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이것도 알고 계시나요?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도 다 아시나요?” 돌아온 대답은 스티브 잡스에게 양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잡스는 단 한 번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과 사진 속 아이들의 굶주린 비극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는 제가 최근에 읽은 앤디 스탠리 목사님이 쓰신 책 <노스포인트 교회 이야기>에서 본 내용인데요,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처럼 신앙을 포기해버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새로운 비전과 사명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앤디 스텐리 목사님께서 자신의 세 딸이 십대였을 때 전 가족이 교회에서 가는 단기선교를 아프리카 케냐로 다녀왔다고 합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 있는 빈민가는 약 8제곱킬로미터 안에 무려 5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었습니다. 대부분 녹슨 양철과 진흙으로 만든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정도의 판잣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전기도 없고 수도도 없습니다. 주민들은 돈을 내고 공중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데 그마저 돈이 없는 사람들은 비닐봉지에 대변을 모아 나이로비 강에 던지는데 이 강이 그 주민들의 식수원입니다. 참으로 경악할만한 비참한 현실입니다. 이 목사님의 자녀들이 다행히도 그러한 현실을 목격하고도 스티브 잡스처럼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단기선교에 참여했던 모든 청소년들도 신앙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족하지만 자신들이 그곳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욕을 갖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의 환경에 대한 감사와 더불어 그곳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의욕을 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끔찍하게 여기는 그러한 현실을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가슴아파하신다는 사실도 그들은 깨달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목격하고도 전혀 다른 해석이요 전혀 다른 반응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한 다윗의 진의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고백은 또한 어떠한 고백입니까? 부족함이 없어서라기보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참된 만족이라는 고백 아닐까요? 오직 하나님만으로 내가 만족하겠다는 결단이 아닐까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가겠다는 뜻 아닐까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목자 되신 그분께 내 인생을 순한 양처럼 맡기겠다는 뜻 아닐까요?
양이 생각보다 멍청한 동물이 아니라고 합니다. 소를 다루는 카우보이와는 다르게 목자가 양을 다뤄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양이 뭘 모르는 동물은 아닙니다. 소들은 몰아야 하죠. 고함소리를 내며 때로는 뒤에서 채찍을 가하면 소들은 이동을 합니다. 소몰이죠. 이에 반해서 양들에게는 이런 방법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목자가 양들 뒤에서 아무리 큰 소리를 내고 난리를 쳐도 앞으로 이동하지 않고 오히려 목자의 뒤로 옵니다. 양은 몰아서는 안되고 양떼들을 목자가 인도해야 합니다. 양들은 소심한 것이죠. 목자가 앞서가므로 모든 것이 괜찮다라는 안심이 들어야 뒤따라가는 게 양들입니다. 그리고 양들은 목자를 참으로 좋아한다고 합니다. 양떼들이 낮잠을 자는 때 목자가 인기척을 내고 돌아다녀도 양들이 깨지 않는 반면에 낯선 사람이 우리에 단 한 발짝만 들여놓아도 자다가 깨는 것은 물론이고 공포심에 우리 안이 아수라장이 된다고 합니다. 친밀해진 목자와 양의 관계는 목자가 양의 우는 소리만 들어도 아파서 내는 소리인지 즐거워서 내는 소리인지 구분할 정도가 되며, 양들 또한 목자의 목소리를 듣고서 밥시간인지 집에 갈 시간인지를 구분해낸다고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팔레스타인 베두인 유목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광경인데요. 여럿 목자가 자신의 양떼 무리를 이끌고 와서 여러 목자에게 속한 양 무리가 물 웅덩이에서 같이 물을 마시게 되는 상황에도 양이 섞일 염려가 없습니다. 물을 다 먹고나서 자신의 목자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양들이 자기 목자에게로 어김없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함께 살아가라>,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저, 207-209쪽)
바로 그 목자가 다름아닌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심하고 평안을 누리고 믿고 맡기며 순종하며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과 목자의 신뢰 관계와도 같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인도해주시므로 그러니 양인 내가 부족함이 없을 거라는 신뢰의 고백이며 믿음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어련히 알아서 우리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남진의 노랫따라 “너는 나만 믿고 따라와 내가 널 지켜줄게”하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심지어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대신 버리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신데 그분이 우리를 먹거리가 있는 푸른 풀밭과 마실 물이 있는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라는 목사님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두려워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그런 일이 닥칠 때 누가 우리와 함께 하실지 알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나 자신의 목자가 되어주신다고 해도 우리 인생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음을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우리가 안전하고 평안한 것은 상황이 그래서가 아닙니다. 새로운 집에 입주해서 느끼는 안전감이나 든든함이 아닙니다. 어떠한 집에 살든 진정한 집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나의 산성 나의 요새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자가 되신 하나님은 우리가 양무리에서 이탈해서 떨어져나간다 해도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나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선한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어떠한 것도 우리를 끊을 수 없는 위대하신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언제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품이 오직 하나님의 품임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하나님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다가 부족함이 없을 때가 언제든 있겠습니까마는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고, 목자 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품의 양과 같이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고 포기하지 않으심을 명심하며 하나님만을 피난처와 안식처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없는 것이요 참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6절을 보십시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우리를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약속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미쁘심과 사랑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이땅에서 평생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우리의 본향이 되시며 참된 피난처와 안식처가 되시는 우리의 영혼의 목자에게로 돌아가서 그분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이 인간에게 고유한 사람다움, 사람 노릇, 사람의 기능을 잘 하는 것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덕이므로 인간의 행복은 덕을 따라 활동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주요한 네 가지 덕을 용기, 절제, 정의, 지혜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덕을 함양하고 살아가는 삶이 행복한 인생입니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개념에 반기를 든 분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교부의 신학을 완성한 어거스틴이었습니다. 아무리 덕을 함양하고 인간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죽음이라는 운명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어찌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었습니다. 진정한 인간 본성의 완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것이며 거기에서만 영원한 행복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창조자시며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며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예수 안에서 주신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가 되시는 하나님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양입니다. 믿음 안에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시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