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9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6)
개명(改名) (요 1:35-42)
미국의 철학자요 저술가인 윌 듀런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50년에 걸쳐서 집필한 <문명이야기>나, 철학의 입문서로 아직까지 활용되는 <철학이야기>를 저술한 분입니다. 1930년 가을 이분이 자신의 집에서 갈퀴로 낙엽을 긁어모으고 있을 때 멋진 정장을 입은 한 신사가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놀랍게도 자신은 자살할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당대 미국에서 유명한 철학자인 듀런트가 자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줄 수 없다면 자살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듀런트는 먼저 직장을 구해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직장이 있다고 했습니다. 맛있는 식사를 드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듀런트를 찾아왔던 한 신사는 결국 아무런 해답도 듣지 못한 얼굴로 떠났습니다. 그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우연하게도 그 해에 자살하겠다는 사람의 편지를 여러 통 받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계기가 되어서 이분이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철학을 공부하면서부터 떠나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윌 듀런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해서 다른 유명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미국 전역뿐 아니라 세계 각 분야에서 유명 인사들을 선별하여, 총 100명인 그들에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편지를 발송하였습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의 영감과 활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며 당신을 노력하게 만드는 목적 혹은 원동력은 무엇인지. 당신은 어디에서 위안과 행복을 구하는지.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궁극적 가치는 무엇인지. 대부분의 문인들과 과학자들은 삶의 의미에 관해서 말하면서 알지 못하는 신을 언급하기를 꺼렸고 상당히 회의주의적인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냥 일을 열심히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라는 식의 답변이 많았습니다. 이에 반해서 간디의 답변은 종교적 색채를 띠었습니다. 간디는 종교와 도덕을 같은 것으로 보았고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합니다.”, “나의 위안과 행복은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봉사에 있습니다. 신적 본질은 모든 생명의 총계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어둠과 모든 악한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있습니다”라고 도덕교과서처럼 대답했습니다. 불가지론이면서도 반 기독교적 입장을 지닌 영국의 수학자요 철학자, 그리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버드란트 러셀의 답변은 가장 회의론자다운 답변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려니 유감입니다만, 지금 당장은 내가 너무 바쁜 나머지 삶에는 의미도 뭣도 없다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의 발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우리가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유명 인사들의 답장을 받고도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윌 듀런트는 자신 나름대로 삶의 의미에 대해서 정립해봅니다. 이분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나 인생의 만족은 자신보다 더 큰 존재나 가치에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즉 삶의 활력과 원동력은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적 이타주의에서 비롯된다고 본 것입니다. 자신으로 인해서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에게 인정받는데서 자신의 노력의 원동력을 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가정 즉 배우자와 아이 그리고 해야 할 일, 어찌하든지 일자리를 찾아내서 거기서 근면한 노동을 하는 것 등으로 삶의 의미에 관한 논의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윌 듀런트 지음) 참고) 아무리 거창한 의미를 찾아보려고 해도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최근 신문에 한 네덜란드의 작가요 저널리스트인 분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분의 동생이 4년 전에 안락사를 택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치병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의 동생이 10여 년 전부터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알코올 중독이었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발작했고,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어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르게 다쳐서 왔고, 그래서 경찰과 의료진이 수시로 집에 드나들었고, 치료소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었고 그에 따라 수치심도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형의 품에 안겨서 안락사를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반대했던 형도 “삶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다면, 그리고 죽음이 구원이라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의무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시 동생도 자신의 일기에서 “버러지 같은 이 삶을 정말 끝내고 싶다.”고 썼습니다. 안락사에 대한 고민을 1년 반 동안 하고서 안락사를 선택하였습니다. 처음에 이분의 동생의 삶은 멀쩡했습니다. 하던 사업도 일주일 내내 일해야 했을 정도로 번창했고 가정에는 아내와 두 아들도 있었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사우나가 딸린 멋진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술을 마시다가 심해져서 알코올 중독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서 아내와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알코올 중독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로 인한 고통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죽기 직전 부모와 함께 웃는 얼굴로 사직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 사이에는 커다란 공허감이 늘 자리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확신이 있다. 그가 원했다는 것이다. 선택지는 없었고, 다른 길도 없었다. 그는 죽고 싶어했다.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동생과 함께 그 길을 가준 것이었다.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지지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지금 네덜란드에서 발생하는 안락사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택하는 안락사는 전체 안락사 중 1% 수준이라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부터 안락사가 합법화돼 있었지만 육체 질병이 아닌 정신적인 문제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한 최초 사례로 당시 논란이 됐습니다. 그래서 당국의 심의와 허가를 얻는데 2년이나 걸렸습니다. 현재 네덜란드에서 한 해에 안락사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오천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형제간의 뜨거운 사랑이라기보다는 삶의 부조리함과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 한 켠의 느낌을 자아냅니다. 동생의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하고 존엄한 죽음을 함께 맞이하고 그 길을 마지막까지 가준 사랑(?), 다소 의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본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본인 외에는 알 도리가 없어서 그 고통에 대해서 잘 참지 못했다라는 판단은 내리면 안됩니다만 그것이 진정 형제 사랑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정신적인 공허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삶에 대한 확신과 삶의 의미와 는 전혀 다른 세계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한 형제가 등장합니다. 바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를 했죠.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을 보고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자신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이땅에 태어나서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신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그분이 주인이라면 자신은 종의 역할도 할 수 없는 비천한 종이다’ 이러한 증거를 거듭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음날에 예수님의 거니심을 보고서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유월절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거기서 흘린 피로 인해서 죄로부터 구원을 받게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듣고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사람 중에서 두 명의 제가가 예수님을 찾았고, 그중의 한명이 바로 안드레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이들이 자신을 따르는 것을 알고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묻습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물으시자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예수님이 머물고 계시는 곳이 어디인지를 오히려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허락하면 더 시간을 함께 하고 그분에 대해서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하루 일정을 마치시고 숙소로 돌아온 시간이 열시, 그러니까 오늘날 시간으로 오후 4시쯤 되었습니다. 해가 지고서는 보통 이동하지 않는 상례를 생각해볼 때 안드레와 다른 한 제자는 아마 예수님과 저녁 늦게 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서 안드레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증거대로 이분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부리나케 자신의 형 베드로를 찾았습니다. 본문 41절입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그리고서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은 우리들을 이끌어줄 강하고 지혜로운 스승을 만나기 원합니다. 아니 단순히 가르쳐줄 스승보다도 삶의 진리를 보여주고 무엇보다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분을 따라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처음 사례(철학자 윌 듀런트)에서 접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회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지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생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지 한편으로는 궁금해하면서도 알 수 없다는 입장 때문에 그 질문을 묵살해버리고 그저 살아갑니다. 자신의 욕망 충족과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지지를 얻는데 삶의 원동력을 삼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고통이 너무 심해지면 삶을 버릴까도 생각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안드레는 자신이 믿고 따랐던 스승 세례요한을 신뢰하였습니다. 그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보겠다고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서 그분과의 만남을 가졌고 그분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서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이 증거했던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인류 구원을 위한 유월절 어린양이요 하나님이 보내주신 메시야로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드레가 지금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고백하지만 메시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진정 깨닫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십자가 죽음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서 예수님에 대해 바른 신앙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이에 반해서 세례요한은 이미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알아보았던 것이 참으로 대단한 통찰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계시였음을 지난 주일에 생각해본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유월절 어린양이 단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구원자로 입증되었음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안드레가 세례요한의 증거에다가 자신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서 체험한 결과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따라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있습니다만, 진정한 구원자로서 예수님을 깨닫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었습니다.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인생의 삶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보통 우리는 존재 가치를 자신의 활동으로 사람들의 인정으로 그리고 자신의 기여와 업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의와 의미를 그런 식으로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바로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어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생명을 받았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면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요 진정한 생명의 충동이 바로 자리잡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살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광명을 얻은 것이죠. “광명을 얻었네!” 영원한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빛이란,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한복음 강해 (1) 중에서) 바로 그러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최고로 바르고 올바른 신학적인 증언을 자신의 스승 세례요한에게서 들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직접 찾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분이 진정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요 부활의 소망이다!, 바로 이러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확신을 갖고 나면 최고의 형제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죽기를 원하는 동생에게 편안한 죽음의 길을 허락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형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확신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형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 죽음 이후의 부활의 소망이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신 예수님에게로 내가 사랑하는 형제와 이웃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안드레처럼 말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나고서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나자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형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형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그리고서 형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본문 42절을 보십시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인생을 꽤뚫어보시고 아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아셨습니다. 그에게 별명을 지어주셨고 그것이 베드로의 새 이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원래 베드로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새로 지어주신 별명 혹은 이름은 게바입니다. 게바는 아람어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베드로입니다. 그렇게 시몬이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왜 시몬이 반석이 되었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올바르게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베드로라고 새롭게 이름을 지어준 것이다. 너는 반석이다. 너라는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를 교회의 반석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로 나오십시오. 그분을 열망하십시오. 그분에 관한 증언을 듣고 배우고, 그리고 몸소 직접 만나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를 예수님은 만나 주시고 인생에 대한 확신을 주실 뿐 아니라 살아가야 할 이유도 그 안에서 찾게 해주십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의 모든 정답임을 사랑하는 형제와 이웃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와 우리의 형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뿐 아니라 우리를 향한 변화와 계획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단순히 물고기 잡는 밥벌이로 인생사에 크고 작은 일에 웃고 울던 베드로라는 한없이 나약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를 주님의 나라의 반석으로 삼아주시는 획기적인 변화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이땅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손 안에 들려진 도구로서 새로워진 존재와 신분과 이름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더욱 깊은 만남과 사귐으로 인하여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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