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8일 설교 (주일 낮)
근심과 기쁨 (벧전 1:3-9)
인간이라면 누구나 근심이나 고통은 싫고 기쁨과 즐거움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은 근심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고서 얻게 된다는 것이 삶의 법칙인 듯합니다. 삶이 그런대로 잘 굴러가서 별 걱정 없이 마냥 순탄하기만 하다면 기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 기쁨이라면 ‘난 차리라 기쁘지 않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없이 그냥 굴곡 없이 평탄한 삶을 원한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슬픔과 기쁨의 굴곡을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밋밋한 직선의 길 위에서 살고 싶다’ 등등.
그러나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하여 그 길을 걸어가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목적지를 정하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지름길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나는 별로 원하는 게 없으니까 특별한 기쁨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근심도 없고 고통도 없는 평탄한 길로만 인도해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마치 내가 선택하고 정한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서 지지를 받고 도움을 받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목적지를 향해서, 그리고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로운 출발점, 인생의 종착지점인 목적지 곧 피니쉬라인(finish-line), 그리고 거기에 이르는 길. 이 길 위에 놓여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길 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을 근심과 기쁨으로 수놓도록 역사하십니다. 근심과 기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단련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인생의 새로운 출발지점은 어디입니까? 자연적 출생으로 시작되는 인생이 아니라 영적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성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는 아버지께서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위로부터 우리가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뜻합니다. 새로운 출발입니다. 자연적 출생으로 시작된 인생이 아니라 이후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새출발입니다. 거듭남으로 인해서 우리는 자연적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을 가지고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우리가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영적인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거듭남의 근거가 되는 사건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구원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해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그 구원 열차에 올라타면 우리도 구원 받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처럼 부활생명을 받고 영적 생명으로 살게 됩니다.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자들은 살아있는 소망을 품고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새로운 출발지점에 서있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기대와 설렘입니까? 어떤 산 소망입니까? 앞으로 펼쳐질 인생,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인생에게 어떤 기대와 설렘이 있습니까? 어떠한 산 소망을 가득 품고 이제 인생이라는 경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스도인이 품게 된 살아서 꿈틀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시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즉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세상이 아니라, 더럽지 않고, 즉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이 아니라, 쇠하지 않는, 즉 허무하게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헛된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게 해주심을 바라보는 소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해주신 것이어서 ‘하늘나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유업으로 받게 될 하늘나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의어는 5절에 보면 “말세에 나타나기로 예비하신 구원”이고 9절에서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입니다. 결국 산 소망이란 우리가 믿음으로 얻게 될 구원이요 우리가 상속받게 될 영원한 하늘나라에 관한 소망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해서 그 구원 사건에 믿음으로 합류하여거듭나서, 새로운 인생의 출발지점에 서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소망이며 최종 목표 지점, 피니쉬라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가 달려갈 길의 피니쉬라인입니다. 목표 지점, 골인 지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는 하나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러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거룩해지지 못한 모습으로 인해서 좌절하기도 합니다. 거듭남 곧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전에 입고 있던 허름한 운동복을 출발지점에서는 그대로 입고 있기 마련입니다. 새롭게 태어났다고 새로운 운동복이 제공되지는 않습니다. 예전의 허름한 운동복을 입고 그러나 새로워진 심령과 마음속에 새롭게 품게 된 산 소망을 가지고 옛 유니폼을 입고 새로운 출발지점에 선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경주가 어느덧 골인 지점에 이르렀는데 피니쉬라인을 통과하자마자 너무나 영광스럽게 변화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끝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과도 같고, 예수님의 비유에서 ‘겨자씨 비유’와도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겨자씨가 다 자라면 엄청나게 큰 거목이 되는 겁니다. 큰 나무가 되어서 많은 새들이 깃드는 그러한 거목이 될 줄 아주 작디작은 겨자씨를 뿌릴 때 누가 예측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음을 뒤늦게 알게 될 뿐이죠.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상속 받게 될 영광스러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적 생명의 미약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덧입게 됨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이토록 시작과 끝이 찬연하게도 대비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토록 놀라운 결말, 어떻게 가능합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 가운데서 계속적으로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살아있는 소망을 품게 하시고 새로운 출발지점에 세워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목표지점에 이르기까지 그 길 위에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경주에서 우리에게 어떻게 일하시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세 가지의 일을 해주심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이 세 가지는 다 현재형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십니다. 보호해주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우리가 목표지점에 이르지 못할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겁니다. ‘썩지 않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이 썩을 세상’에 몸과 마음이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더럽지 않은’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더러운 죄악된 세상에 몸과 마음이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쇠하지 않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허무한 것들에 몸과 마음이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그 구원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지금도 능력의 팔로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능력 보호’는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도달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일은 근심도 주시고 그 근심에 맞설 수 있는 기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근심과 기쁨을 아울러 주십니다. 근심을 집어삼키는 큰 기쁨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지만 왜 근심하게 됩니까? 인생의 시련이 들이닥치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엄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근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걱정 근심이 없는 때가 우리 인생 가운데 얼마나 될까요? 끊임없는 근심 걱정이 우리를 짓누르고 염려와 불안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데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잠깐’입니다. 근심, 걱정, 한숨이 없는 날이 하루도 없는 것 같은데 ‘잠깐’이라고 말합니다. 왜 ‘잠깐’입니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토록 누리게 될 안식과 기쁨에 비교했을 때 이땅에서 고통의 삶이 잠깐이라는 의미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결국 끝이 있고 그 이후에 영원한 안식과 기쁨이 있기 때문에 ‘잠깐’이라고 표현한 것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즉 상황이 좋지 않아서 걱정 근심을 하게 되었는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 그럴 일이 아님을 깨달아서 거기서 얼른 탈출할 수 있기 때문에 ‘잠깐’일 수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으로 인해서 근심하기 시작했는데, 우리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소망을 생각해보니, 그리고 그 소망을 바라보니까 더 이상 근심에 빠져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잠깐’ 근심하다가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상황이 좋게 변화되어서가 아닙니다. 상황은 여전하고 시련과 고통도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깐 근심하다가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왜 잠깐 근심입니까? 그리고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겁니까? 그리고 왜 이런 시험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왜 이런 고난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이것을 알면 어려움 가운데서도 더 이상 근심이 아니라 잠깐 근심으로 끝내고 큰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고난과 시험에는 ‘믿음의 연단’을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믿음의 확실함’으로 번역했습니다만, 예전 개역한글성경에서는 ‘믿음의 시련’으로 번역했습니다. 더 좋은 번역은 ‘연단’입니다. ‘믿음의 연단’입니다. ‘불로 연단하여도’에 사용된 ‘연단하다’로 번역된 동사의 명사형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연단’이라는 말은 검증을 거쳐서 진짜임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마치 광석에 들어있는 금을 정련하기 위해서 그 돌을 불속에 넣어 다른 것들은 다 녹이고 금만을 얻기 위한 과정입니다. 진짜 금만을 얻으려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이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진정함과 진짜됨을 드러내는 검증의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연단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연단을 거치게 돼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믿음의 연단’ 과정을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입구가 좁은 꽃병 안에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안에 들어있지만 꽃병이 깨지기 전까지는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소중한 결혼반지를 꽃병에 넣어두게 되었습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실수로 그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믿음의 연단’이란 이와 같습니다. 깨어질 때 그 속에 있는 모든 더럽고 불필요한 잡동사니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깨어질 때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추한 것, 더러운 것, 악한 것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던 것인데,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고 고통이 들이닥칠 때 그 충격으로 인해서 깨어질 때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고통은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보여주고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낱낱이 드러내줍니다. 잡동사니만 드러나는 게 아니라 언젠가 우연히 넣어둔 소중한 결혼반지도 찾게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자신에게 주신 소중한 믿음을 다시 찾게 됩니다. 신혼 때의 신랑 신부 간의 순결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상징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깨어진 꽃병에서 소중한 결혼반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반지처럼 소중한 진짜 믿음으로 단련되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순결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지금도 연단 받고 있는 중입니다. 순전한 믿음과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가다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7절) 하려고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할 만한 상황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 과정을 통해서 금도다 귀한 믿음으로, 그리고 진짜 믿음으로 검증되고 판명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와 선한 양심>, 채영삼 저 참고)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가지 시험과 어려움이 찾아와 근심을 하다가도 ‘잠깐 근심’으로 마치고 오히려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연단’ 과정임을 알기 때문이요, ‘믿음의 연단’ 과정을 거치고서 금보다 귀한 믿음,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단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근심을 삼켜버리는 기쁨’이 되기에 ‘잠깐 근심’이요 큰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연단’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데, 그 연단 과정은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한 ‘잠깐 근심’이지만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믿음을 소유하게 됨으로 인해서 주 앞에 설 때 칭찬을 받게 할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여정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세 번째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믿음의 연단’ 과정을 겪게 되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생겨나게 됩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처음에는 소망, ‘산 소망’을 말하고, 그리고 이어서 믿음, ‘연단된 믿음’을 말하고, 이제 주를 향한 사랑을 말합니다. 연단 과정을 거치면서 진짜 믿음, 순전한 믿음, 금보다 귀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이 됩니다. 참된 사랑의 교제로 인한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잠깐 근심’ 이후에 진정한 큰 기쁨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인한 기쁨이요, 주님과 교제를 나눔으로 얻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이를 일컬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찬송가 499장 가사처럼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기쁨이 없다면 세상살이의 근심 가운데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가지 시련에 목적이 있음을 안다고 해도, 그래서 그 과정이 우리의 믿음을 훈련하고 단련시키는 유익이 있음을 안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서 근심이 ‘잠깐 근심’으로 마무리되고, 더 큰 기쁨으로 나아가기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통과하면서 나를 향한 주님의 돌보심과 주님의 위로와 뜨거운 사랑을 체험하게 되니까 주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뜨거운 교제를 나누게 되는 겁니다. 그러한 사랑의 교제의 기쁨과 즐거움을 인생의 어려운 순간마다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근심이 ‘잠깐 근심’이 되고 오히려 더 큰 기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가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아무런 아픔이나 슬픔이나 고통이나 시련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해가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에 믿음으로 동참해서 거듭난 새로운 영적 생명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소망을 품고 출발지점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려고, 그래서 목표 지점까지 이르는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서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주십니다. 신앙 여정이 하나님의 보좌에까지 이르도록 믿는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의 팔로 붙들어주시는 겁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소망에 관한 확실한 믿음을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우리 인생에게 허락하십니다. 소위 ‘믿음의 연단’의 과정을 거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근심하게 되지만 그 근심이 ‘잠깐 근심’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은 ‘믿음의 연단’의 목적을 알고, 그 과정을 거친 후에 우리가 어떠한 믿음을 갖게 될지를 알고,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어떠한 칭찬을 받게 될 것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련과 어려운 인생의 고비고비를 겪으면서 우리는 더욱더 분명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을 예배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오직 주님으로 인한 기쁨이요 주님을 사랑함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여정 가운데서 구원의 길 위에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역사하셔서 우리를 빚어가십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친 후에 우리가 목표 지점에 도달하면 순간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우리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절), 결국 구원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요 소망이요 사랑이요, 그래서 우리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시달림과 어려움과 고통이 있으십니까? 이 놀라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대하신 구원의 은혜를 알고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심으로 근심은 ‘잠깐 근심’으로 기쁨은 ‘평생 기쁨’, ‘영원한 즐거움’으로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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