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1일 설교 (주일 낮)
신혼 때의 사랑 (렘 2:2,13)
도올 김용옥선생이 하버드대학교에서 불교에 관해 강의할 때 미국 학생이 손을 들고 질문하더랍니다: “그럼 불교는 일종의 심리학입니까?” 도올은 서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아~ 그렇죠. 그렇구말구요. 불교는 심리학입니다.” 이분이 언젠가 한 신학대학에서 불교에 관해 강의할 때였습니다. 목사후보생인 신학대학원 학생이 질문하더랍니다: “그럼 불교는 무신론입니까? 불교의 핵심 교리인4법인에 신에 관한 얘기가 하나도 없군요.” 도올이 대답했습니다. “아~ 내 강의를 정말 잘 들으셨군요. 그렇죠. 그렇습니다. 불교는 무신론입니다.”
최근에 이분이 또 책 한권을 내셨더라고요. 대승불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 중 하나인 반야심경에 관한 책입니다. 이책에서 이분은 불교를 대략적으로 소개합니다. 불교의 핵심교리는 사법인이라 부르는 4가지 명제입니다. 이것만 정확히 알면 불교에 관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제행’ 곧 모든 현상,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사물, 사건, 그 모든 것은 ‘무상’ 곧 항상됨이 없고 찰나찰나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 쉽게 말해서 인과에 의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제행무상은 두 번째 명제인 일체개고(一切皆苦)로 이어집니다. ‘일체개고’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명제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존재하는 모든 물건과 사물과 사건은 무아 곧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에 소위 실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상뿐이지 현상 배후에 본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법무아’는 마지막 명제인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이어집니다. 제법이 무아 곧 모든 것에는 실체나 본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열반에 들게 되어 고요하고 편안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열반’은 ‘니르바나’인데 ‘불을 끈다’는 뜻입니다. 열반은 불을 끈 상태입니다. 번뇌를 일으키는 욕망의 불을 끈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열반’은 죽고 나서 가는 곳이나 죽고 난 이후의 상태를 뜻하지 않고 살아서 얻게 되는 상태입니다. 즉 번뇌의 불길이 다 사라진 고요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제법 곧 모든 것이 무아 곧 아무런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은 사람은 아무런 집착이나 욕망의 불이 꺼진 열반의 상태에 들어가서 고요한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싯달타(석가모니)는 이것을 제일 먼저 깨닫고 제일 먼저 성불한 사람이 된 것이죠. 진정한 불교 전문가들은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도올이 이해한 불교는 이 책을 읽어보니까 정확히 파악이 되었습니다. 불교의 세계관 혹은 불교의 신관이 무엇인지 대략 감이 잡힙니다. 기독교하고는 참 많이 다름을 느낍니다.
성경의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전제하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추상적 원리나 깨달음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체임을 전제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으로서 우리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오늘 선지자가 전달하는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선지자는 생생한 언어로 하나님에 관해 말해줍니다. 특별히 선지자가 전하는 인상적인 대목은 하나님을 신혼 때의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참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신혼부부였냐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직후 시작된 광야생활이 허니문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광야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2장 2절을 보십시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시절을 일컬어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청년들의 순애보적인 사랑, 신실한 사랑, 마치 그 사랑뿐이라고만 생각하는 순결한 사랑이 ‘청년 때의 인애’요,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추구한 광야시절은 ‘신혼부부의 사랑’과 같았다는 하나님의 회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부부의 관계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입니다. 광야시절이 신혼부부가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만을 생각하는 그 신혼의 달콤한 사랑의 허니문 기간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광야란 어떤 곳입니까? 최근에 많은 사람들에게 불려지는 CCM곡 중에 ‘광야를 지나며’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를 소개해드립니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 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안타깝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 하나님을 향해서 순수하고 신실하고 뜨거웠던 사랑의 시간은 우리가 광야에 있을 때입니다. 씨앗조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신혼의 허니문을 지냈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야, 갈증과 허기로 괴로움을 겪는 광야, 바로 그 광야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만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바위에서 물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셔서 양식 삼아 살게 하신 바로 그 하나님을 말입니다.
평생을 신혼부부처럼 살아가는 부부가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부부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는 이것 저것이 없어서 불편하고 여러 가지 위협도 받고 미래도 불확실하고 보장받는 길이 없었던 시절인데도 하나님은 분명히 내 안에서 살아계셨고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이러한 은혜가 광야에서는 있었습니다.
교회사의 훌륭한 신앙인들 중에는 평생을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짧디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혼의 허니문과 같이 달콤한 교제를 누렸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는 젊은 선교사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분이 대학생 시절에 쓴 일기입니다: “하나님! 제게 거룩한 부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멸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의 것이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는 오래 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다만 주 예수님처럼 꽉찬 삶을 원합니다.” 이분은 에콰도르의 살인 부족인 아우카 족에게 전도하러 갔다가 이십 대28살의 나이에 순교했던 짐 엘리엇입니다. 이때 짐 엘리엇과 함께 갔다가 같이 순교한 네 명의 친구, 이렇게 다섯 명의 아내들이 나중에 아우카 부족의 마을로 들어갑니다. 오랜 노력 끝에 이 다섯 명의 부인들이 그 부족을 변화시키죠. 이러한 내용이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쓴 책 <전능자의 그늘>에 의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알려졌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라는 책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예일대학교 2학년 때 거듭나서 29살에 죽었습니다. 그는 인디언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인디언 말을 배우고 인디언 말로 전도하고 설교했습니다. 많은 인디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일기에서 자주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인디언 마을에 갔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쳤더니 또 감미로운 열정이 나를 사로잡아 또 기도했습니다. 주님! 기도가 너무 좋습니다!” (<청년설교1>, 김회권 저, 150-151쪽)
저도 대학시절에 다니던 교회 대학부에서 은혜 받고서 이 책을 읽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고 크게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어서 나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하고 마음에 소원을 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이처럼 달콤하고 벅찬 기쁨을 주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 책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인생들은 위기와 어려움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지만 나름 행복하고 안락하다고 여겨지는 시기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지만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또다시 광야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행복과 만족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숭배하는 맘몬 숭배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이 연장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진짜 광야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인생들은 목마르고 허무주의라는 늪에 빠집니다. 광야시절의 불편함은 벗어났지만 여전히 영적 공허감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진짜 광야생활 중입니다. 광야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하나님과 신혼 때의 사랑을 누리게 해준 곳이 되는가 하면, 이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누리며 살다가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됨으로 인해서 어디에 있든 그곳이 진정 광야같이 메마른 곳이 되는 역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2장 13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여기에 인생의 비극이 있습니다. 진짜 광야생활이 계속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광야생활이 시작된 이유입니다. 여기서 ‘생수’는 ‘살아 있는 물’, 즉 흐르는 물을 의미합니다. 흐르는 물이 있는가 하면 웅덩이로 대표되는 고인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흐르는 물, 곧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께로 가면 그 생수를 마실 수 있고, 목마르지 않고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스스로 웅덩이를 팠습니다.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물을 모아두기 위해서 물을 보관하기 위해서 웅덩이를 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판 웅덩이는 밑이 빠져있어서 결코 물을 담아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였습니다. 때를 따라 반석의 물을 구하는 것은 때론 힘들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느 때는 스스로의 힘으로 서려는 자만감에 반하게 느껴져서 더 이상 반석의 물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로 혹은 자신의 힘으로 평안과 안전을 도모하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무익한 시도요 헛된 시도요 결과를 달성치 못한 시도였습니다. 물이 고일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헛수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혀 물이 없는 반석에서도 물을 내셔서 갈한 심령을 채워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수의 근원 곧 흐르는 물의 근원이심을 믿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잡으려고 모아 둘 수는 없지만 언제나 마르지 않고 흐르는 물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마치 신혼 때의 사랑의 관계처럼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비록 그 물을 저장해서 내 소유로 삼고 필요할 때 내 힘으로 떠서 이용하는 그런 물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마르지 않는 샘의 원천과도 같은 하나님의 풍요함이요 신실함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생생한 인격적 사랑의 관계를 추구하고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늘 신선하게 매일 인생에 흘러넘치는 생수를 구하려는 노력 대신에 웅덩이를 파서 물을 고이게 만들고 그것을 든든한 안전판 삼아 살아보려는 시도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 곧 생수는 그렇게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하나님 대신에 우리의 심령에 무엇을 채워넣으려 해도 결코 만족이 없고 결코 기쁨이 없습니다. 결국은 헛된 시도 끝에 도달하는 덧없음이요 허무주의요 일체의 고통일 뿐입니다.
젊은 청년 때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결국 파탄난 상황입니다. 신혼 때의 뜨거운 열정이 식고 부부가 서로 딴곳을 바라보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씨를 뿌리기조차 어려운 척박한 광야에서 서로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던 부부가 이제는 물질적 풍요로움과 안락함에 빠져서 서로를 바라보는 대신에 딴 생각을 하기 시작한 상황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습니까? 청년 때의 순결한 사랑의 관계입니까? 신혼 때의 열정적 사랑의 관계입니까? 아니면 서로에 대한 사랑이 식고 다른 것들로 대체하려고 이런 저런 웅덩이를 파는 시도를 하게 된 소위 파탄난 관계입니까? 흐르는 물을 매일 신선하게 공급받기보다 보관하여 든든한 안정감을 확보하고 내가 필요할 때 길러 쓰려고 웅덩이를 파서 담아두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대신 다른 것들로 채워보려고 열심히 웅덩이를 파는 헛수고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께 매일 의존하려는 삶이 힘들어서 마음의 안전과 미래의 담보를 위해서 물을 담아보려고 헛된 시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새 정국에서 강남좌파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강남좌파라는 말을 만들고 처음 사용한 분이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강준만교수입니다. 좌파인데 강남의 생활에 젖은 좌파입니다. 삶의 취향은 부르주아이면서 그리고 그러한 안락한 삶을 포기할 용기도 없으면서 좌파적 이념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컬어서 강남좌파라 부릅니다. 강남좌파와 달리 골수 운동권 분자도 여전히 이땅에 있습니다. 최근에 월간 신동아를 보니까 민경우라는 분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이분은 골수 운동권, 운동권 중에서도 PD계열이 아니라 더 과격하고 급진적이었던 NL계열의 운동권인 분입니다. 1965년생인 이분이 원래 1983년에 서울대 의예과에 합격했습니다.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운동권 이념에 경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서울대 국사학과에 재입학했습니다. 전형적인 386세대죠. 스무 살 민경우는 학생운동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6월 항쟁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현재 권부(權府)를 주름잡고 있는 ‘운동권 친구들’과 사뭇 달랐습니다. 그는 학생회장 출신의 386 운동권이 ‘젊은 피 수혈’ 명목으로 제도권에 하나둘 흡수될 때도 운동 현장에 남았습니다. “나는 우리 아들을 과학고나 특목고에 보내지 않았고 과외도 안 시켰다. 심지어 재수학원도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으로 일했습니다. 통일연대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 기간 두 번에 걸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습니다. 2005년 출소한 뒤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NL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 2007년부터 2012년까지 내부 자정활동”에 나섰습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2012년부터 운동가의 삶을 접고 협동조합 형태로 서울 금천구에서 학원을 운영했습니다. 지금은 “수학교육 혁신에 인생 3기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을 과학기술과 경제·기업에 친화적인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어찌보면 전향한 것이기도 한데요.
이분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분이 그리스도인인 것 같지는 않은데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없이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사회 변혁을 위한, 20대 초반에 가졌던 생각을 구현하기 위해서 평생을 일관되게 줄기차게 노력하며 달려온 삶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가능할까? 이런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모든 인생의 활동들은 아무리 사회적으로 가치있고 보람되고 결실이 있다고 해도 참된 생수를 제공해주지는 못합니다. 흐르는 생수는 구덩이를 파서 담아둘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는 모든 활동들은 헛되고 무익한 시도로 그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 되고나서 이후의 이런 저런 활동들이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마치 신혼 때와 청년 때의 사랑의 관계처럼 생생하게 유지되지 못한 채로 이런 저런 활동들을 계속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코 대체할 수 없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사역보다, 일보다, 헌신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으로 생생하게 유지하고 발전시켜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광야에 서있으십니까? 그러면 절호의 기회입니다. 신혼 때의 사랑을 회복할 절호의 찬스입니다. 씨를 뿌릴 수조차 없는 광야에 서있으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사랑스럽고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어느덧 9월 1일 가을입니다. 교회가 제공하는 각종 모임과 예배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영혼이 살찌우시고 영적으로 성장, 성숙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깊어짐으로 인해서 한때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고 그 풍성한 사랑을 누렸던 신혼 때의 사랑을 회복하시는 2019년 가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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