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7일 설교 (주일 낮)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전 11:1-8)
2절 끝부분에,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5절에도, “바람의 길의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신앙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성취하시기는 하지만 그 성취가 어떠한 과정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마치 바람의 궤적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뱃속의 태아의 뼈와 조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6절에도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침에 산뜻하게 출발했다고 그 상태가 저녁까지 이어질 거라는 생각은 단견입니다. 어떤 것은 잘될 수도 있지만 다른 어떤 것은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늘 지켜보고 주시해야 한다는 겁니다. 늘 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어떠한 재앙이 인생에 들이닥칠지, 그리고 일의 결과가 어떠할지 오리무중이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을 어떻게 성취해가시는지 잘 알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최근에 재밌는 신문 기사를 읽었습니다. 제목은 ‘사장은 사장실에서 뭘 할까’, ‘“기댈 곳은 없다” 매순간 고독한 결정’이라는 부제를 단 기사였습니다. CEO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회사 미래에 대한 결정들입니다. CEO의 크고 작은 결정이 회사 조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정을 내릴 때는 신중하게 해야 하면서도 한 번 내린 결정에 대해서도 탄력적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기사에서 지금의 삼성전자를 있게 했다고 평가 받는 윤종용 전 부회장의 말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삼성전자가 잘 나가는 비결을 묻는 질문에 윤종용 전 부회장이 이렇게 답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조령모개(朝令暮改)를 잘 했을 뿐이다.” 조령모개란 아침에 내린 명령을 저녁에 바꾼다는 뜻이죠.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말인데, CEO의 의사결정이 조령모개하는 게 삼성전자의 성장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만큼 세상이 예측 불가능하고 어떻게 전개될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은 급변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어제 내린 결정이 오늘에는 맞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급변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기를 주저하다가는 미래에 도태될 위험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윤 전 부회장은 엄청난 초기 투자가 들어가는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하는 도중에 건설을 중단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중단하면 그동안 들어간 투자비가 거의 고스란히 사라지는데도 말입니다.
최근에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삼성 국내 사업장 방문했을 때 이재용회장이 자신들이 지금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을 가리키면서 인천공항보다 세 배 비싼 공장이라고 했죠. 그만큼 반도체 생산라인을 건설하는데는 많은 돈이 듭니다. 그런데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인데도 건설하는 도중에 중단시켜야 할 정도로 급변하는 환경에는 거기에 맞춰야 한다는 겁니다.
이렇듯 중요한 결정을 수시로 해야 하고, 그것도 위에 상사가 없으니 소위 믿는 구석이 없죠. 자신이 마지막이죠. 자신의 결정에 따라 회사의 운명이 좌우될 수도 있는 결정을 홀로 내려야 하니 ‘매순간 고독한 결정’이요 막대한 부담이 뒤따르는 결정입니다. 마음이 심란해지고 머리가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겠죠. 그리고 회사 꼭대기에 있으면 밑바닥부터 올라오며 전해지는 흔들림이 훨씬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남들보다 더 큰 위기의식을 지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기감을 훨씬 크게, 그리고 먼저 느낄 수밖에 없겠죠. 어떤 CEO는 “365일 작두 위에 올라 선 기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기업의 CEO들이 입만 열면 위기를 외치는 이유가 있겠죠.
회사의 CEO와 같은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더 크게 위기를 느낍니다. 더 크게 미래의 불확실성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의사결정을 내릴 때 신중하게 결정은 하지만 그 결정이 가져올 위험부담을 더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보통 CEO까지 오르지 않습니까.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더 크게 위기를 느끼고 더 큰 미래의 불확실성과 다가올 재앙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요 비록 지금 내 손안에 떡이 쥐어져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의 한계입니다.
알지 못하는 것이 가득한 인생에서 확실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손에 쥐고 있는 것을 펴서 흘려보내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손에 쥐고 있는 자신의 떡을 물 위에 던지라니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떡은 무엇입니까? 생존을 위한 음식이요 당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주식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꼭 먹어야 하는 주식인 떡을 던지는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손에 있는 떡을 던지라는 것은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손을 펴서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도 ‘물 위에’다 말입니다. ‘물 위에’ 던진다는 것은 물에 떨어지자마자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릴 수밖에 없는 물 위에 던지라는 것이죠. 무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이요 불확실성에 내던지는 행동입니다. 불특정 다수에게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되돌려받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물 위에다 던지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요구요 어려운 명령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로 가득찬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어찌보면 말도 안되는 명령입니다.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손에 쥐어져 있는 알량한 것이라도 없으면 삶이 어찌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인생은 온통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요 미래는 불확실하고 예측이 언제나 빗나가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데, 다만 믿음으로 살아간다고는 하나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음을 믿고 만사를 창조의 목표를 향해서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다고는 하나 우리는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의 과정을 알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인생입니다. 출발이 그럴 듯하고 성공에 근접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저녁에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가봐야 아는 게 인생입니다. 온통 불확실성 뿐이요, 의사결정을 내릴 때마다 결과를 담보하지 못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인생의 경영자, 인생의 CEO인 우리에게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이라도 잘 지켜내고 간수해야 그나마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고 지혜자가 명령하니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참으로 무모하게 보이는 명령입니다.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참으로 손에 쥔 손을 펴기가 어렵고 내려놓기가 어려운, 온통 불확실한 것들 가운데서 그나마 확실한 것이 있다면 네 손 안에 들어온 떡인데 그 떡을 그것도 물 위에 던져서 되돌려받을 보장을 차단하고 불특정 다수가 혜택을 입도록 흔적도 없이 사라질 물 위에 던지라고 명령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손 안에 있는 떡을 물 위에 던지는데는 용기와 믿음이 필요하고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을 찾게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던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던져진 떡이 다시 자기 손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것도 확실한 수익을 눈덩이처럼 불려서 다시 손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이해하면 안됩니다. 원문에 보면 ‘도로’라는 말은 없습니다. 원문은 그냥 “여러 날 후에 네가 그것을 찾게 되리라”입니다. 도로 찾으리라가 아닙니다. 그냥 “찾으리라”입니다. 더 큰 이득으로 부풀려져서 다시 자신의 손 안으로 되돌아온다기 보다 물에 던져져서 형체도 모르고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모르지만, 처음에는 모르지만 나중에 어딘가에서 열매 맺게 될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절에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떡을 나눠주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 자신의 손 안에 들어와 있어서 나를 안전하게 보장해준다고 믿는 떡을 오히려 손을 펴서 나누어주라는 겁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게 지혜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우리의 세상살이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까닭에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확실하게 내 손안에 들어와 있는 것들이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호 불어버리시면 그것이 안전하게 내 손안에 계속 남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무슨 재앙이 우리를 기다릴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사는 우리 인생을 지금 내 손안에 들어와 있는 떡이 보장해주고 안전을 담보해줄까를 생각하지 말고 후하게 여러 사람에게 소중하게 여기는 떡과 재능과 은사와 건강과 달란트를 아낌없이 나누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믿는 떡이 언제 사라질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시간이라면 시간을 나누고 베푸는 것이요, 내게 소중한 것이 건강이라면 몸으로 봉사하라는 것이요, 내게 소중한 것이 돈이라면 돈으로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나누면 누군가가 혜택을 입게 될 것이고, 당장은 볼 수 없어도 언젠가는 그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찾게 해주시고 보게 해주실 거라는 것만이 유일한 보장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떡을 물 위에 던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기대 말고 베풀라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하게 가치 있게 여기는 것조차 아무 미련 없이 놓아버리고 내려놓고 던져버릴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유일하신 통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른 어떤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떡을 물 위에 던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진료도 잘보는 병원 중의 하나가 세브란스 병원입니다. 세브란스 병원의 모태튼 1885년 4월 10일에 개원한 제중원입니다. 제중원이라는 말의 뜻은 ‘중생, 사람을 구하는 집’입니다. 제중원은 의료선교사로 이땅에 왔던 알렌선교사가 세웠습니다. 제중원이 근대식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1893년부터 제중원의 제4대 원장으로 봉직했던 에비슨 박사가 1900년에 미국의 거부 루이스 세브란스를 만나서 조선 땅에 근대식 의료선교를 위한 병원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3만 5천 달라를 지원받았던 것입니다. 3만 5천 달러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돈인데 1900년에는 얼마나 큰 돈이었겠습니까. 이 돈으로 1904년 근대식 종합병원이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제중원이던 이름도 세브란스 기념병원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때 세브란스가 큰돈을 기부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받는 당신보다 주는 내 마음이 더 기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뚝 솟아있는 세브란스 병원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고 있는 세브란스 병원입니다. 세브란스는 떡을 물위에 던졌고 하나님은 그것을 이땅에서 찾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던지면 언젠가는 세워집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남과 공유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들을 과감히 물 위에라도 던지면 하나님은 언젠가 찾게 하시고 우리로 보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혜택을 입는 것을 보게 해주십니다. 던지는 것은 내가 할 일이지만 찾게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몫이 있고 또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 그 과정을 알지 못하고, 그래서 결과가 어떠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네 떡을 물 위에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게 해주실 것이라는 말씀만이 우리 인생에게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우리가 경험으로 터득한 진리가 있다는 거니다. 먹구름이 몰려보면 비가 땅에 내릴 것을 예측할 수 있고, 나무가 쓰러지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게 될 것임은 뻔히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경험칙이라는 게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겁니다. 불확실한 미래라지만 예측할 수 있는 지식과 정보와 경험을 모두 고려해서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그래면 어느 정도 맞는 예측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겁니다. 경험칙에 따라 판단해보면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하다는 거겠죠. 그럼에도 정반대의 말이 4절에서 이어집니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인생에게 완벽한 대비란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맞춰 의사결정을 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파종에 좋은 날씨는 아무래도 바람이 없는 잔잔한 날이겠죠. 바람이 불지 않아야 씨앗을 밭 전체에 골고루 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농부가 바람 없는 날, 완벽한 타이밍에 맞추려다보면 씨를 뿌려야 하는 적기를 놓질 수 있고, 영영 씨를 못 뿌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바람 없는 날을 만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죠. 바람이 조금 불더라도 어느 정도 손해를 보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씨를 뿌려야 하면 뿌려야겠죠. 추수할 때 비가 오면 안되니까 늘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완벽한 준비로 완벽한 타이밍에 해서 최상의 결과를 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인간입니다만, 그러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게 인생입니다. 해야 할 때는 완벽하게 갖춰지지 못했더라도 과감하게 실행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을 어떤 분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네가 알아낼 수 있는 정보는 다 파악하라. 하지만 완벽한 타이밍, 완벽한 환경, 완벽한 실력, 완벽한 조건, 완벽한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다. 풍세를 살펴보기만 하면 파종할 수 없다. 구름만 바라보면 거두지 못한다. 제한적인 상황에서 시도해야 한다.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도, 완벽한 보상이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어도 네가 가진 재능을 최선으로 여기며 주변 이웃을 위해 시도해야 한다...우리의 선택은 결국 둘 중의 하나, 즉 상황의 완벽함을 기대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완벽하심을 의지할 것이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손 안에 안전하게 들어와 있는 떡을, 손을 펴서 과감하게 심지어 물 위에 던지는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 손의 떡을 물 위에 던짐으로 인생살이의 주어가 나가 아니라 나에서 하나님으로 주체가 바꾸어지는 은총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상황의 안전함과 완벽함에 기대기보다 오히려 알지는 못해도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믿고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우리 인생을 그분께 맡겨드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보다 앞서 예수님은 자신의 떡을 과감하게 물 위에 던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소중한 몸을 우리를 위해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 더 지난 오늘 우리가 그 던져진 떡으로 인해서 세워지게 되었고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예배 현장에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던지신 그 떡이 오늘 우리의 생명이 되어서 우리 눈으로 보게 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을 펴서 여러분의 손 안에 있는 떡이라도 과감하게 던져버리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언젠가 반드시 그것을 찾으실 것이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세워지는 것을 우리로 보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순종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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