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2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8)
표적 (요 2:1-11)
우리가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핵심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을 보았습니다. 총 다섯 명의 제자(사도 요한, 안드레,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를 부르셨는데 나머지 제자들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핵심 제자들을 부르신 후 공생애의 첫 번째 사역이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예수님이 가나에서 있었던 혼인잔치에 초대된 것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의 친척 결혼식이 아니었나 추측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에서 가나는 북쪽으로 10km 이내에 위치해 있는 곳입니다. 지난 시간에 나온 나다나엘,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칭찬해주신 나다나엘의 고향이 바로 가나였죠. 가나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중에 그만 포도주가 다 떨어졌습니다.
결혼식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통과의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장 흥겨운 잔치고 신랑 신부에게는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혼인잔치는 더욱 중요해서 일주일동안이나 지속됩니다. 신랑측에서 연회를 주관하는데 신랑의 친구나 친척이 연회장을 맡아서 혼인잔치를 주관합니다. 흥겨운 잔치기 때문에 혼인잔치 때 포도주는 필수였고 참여한 사람들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취하기도 합니다.
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수치와 명예를 중시하는 팔레스타인 문화권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이만저만한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심각한 사태입니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알려주십니다. 기적을 요청했다기보다 이 사태를 발빠르게 대처하고 문제를 해결해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평소 의지했던 큰아들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본문 3절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입니다. 가장 흥겨워야 할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가장 핵심이 빠진 상황입니다.
혼인잔치에 오는 사람들은 꼭 초대받지 않아도 마을 잔치처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이들에게 굉장히 무례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 신부 일가에게 굉장히 큰 불명예요 수치스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어떤 상황일까요? 뭔가 핵심이 빠졌다는 것이요 알맹이가 없다는 것인데요. 기쁨이 사라진 것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동력이 사라진 것이기도 합니다. 계속 흥겨움을 이어가야 할 잔치에서 한마디로 김이 빠진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도 이와 같지 않나 생각됩니다. 신종 코로나 사태로 인해서 뭔가 주저앉은 분위기입니다. 많은 무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는 신천지가 한몫 했습니다만 종교행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 하나로 보는 듯합니다. 한마디로 니들 종교 갖는 건 뭐라고 안겠는데 사회에 피해만 주지 말아라, 종교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듯합니다.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을 시작한 2020년 연초에 이러한 일이 벌어지다 보니 막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 동력이 꺼지고 주저 앉게 된 상황입니다. 한마디로 잔치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모임은 당분간 폐지되고 가정예배로 대체해야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오늘 예수님의 어머니처럼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어떤 해결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동력이 상실되어 신앙생활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성령께 붙들리지 못한 채 여러 세상살이의 근심걱정에 함몰돼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이어가고 있다면 우리에게도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흥겨워야 할 교회가 적막해지고 뜨거운 기도의 함성이 울려퍼져야 할 교회에 기도가 사라지고 기쁨의 찬송이 감격스럽게 불러져야 할 우리의 신앙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심령이 되었다면 분명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예수님께 아뢰고 다시 주님께로 더욱 나아가야겠죠. 예수님의 어머니가 이러한 문제상황을 예수님께 아뢰고 예수님께 가지고 나아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좀 퉁명스럽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다 한들 내가 관여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직역하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역하면 “당신과 관계된 이 문제가 어떻게 우리들 모두의 공통 관심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문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자관계를 생각하고 어머니가 큰 아들을 찾고 그에게 문제를 알려준 것인데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는 지금 어머니에게 그 틀을 벗어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이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구속 사역을 완수하기 위한 대장정에 돌입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면서 이제는 더 이상 모자관계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려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좀 서운하게 들릴 수 있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 예수님도 대단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도 대단합니다. 이 놈이 날 서운하게 했다고 토라지기보다 이 난처한 상황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아들이 초인적인 능력이 있어서 기적을 베풀 것이라는 기대감이라기보다 평소 아들을 의지하고 아들이 가정사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을 토대로 아들이 이 상황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선 거절하신 이유는 가정사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한 개인의 결혼식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상황이 당사자들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거리임에는 분명합니다만,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심각한 대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황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요? 지금 예수님의 온통 관심사는 하나님이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이루어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과업뿐입니다. 그래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 예수님의 온통 관심사요 그 때를 위해서 한발짝 한발짝 나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그 때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희생제물로 돌아가실 그 때를 가리킵니다.
아직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기적을 행사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의미로 읽힙니다. 예수님이 지나치게 과민하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러시는 걸까요? 포도주와 혼인잔치는 구약성경에 보면 메시야 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과 혼인잔치를 벌이시고 연회에서 포도주를 함께 나눌 종말론적 잔치에 대한 기대를 유대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25장 6-8절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시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혹시라도 지금 예수님께서 이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이 상황에서 포도주를 풍성하게 공급해주신다면 혹시라도 민감한 사람들이 이 잔치를 메시야의 혼인잔치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메시야 시대의 연회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자신이 메시야로 추앙되거나 스스로 주장한다고 간주되어서 아직 아닌데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아직 아닌데 일을 그르치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때에 자신이 이땅에 보냄을 받은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온통 관심사가 그러다보니 다소 민감한 걱정을 하고 계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예수님은 이 상황의 전개를 미리 다 내다보고 여기서 행할 기적이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의미하고 가리키는 표적이라는 점을 지금 주위의 사람들, 특히 제자들에게 알리려는 의도로 문제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무겁게 대답하신 것이 아닐까도 생각해봅니다. 즉, 포도주가 떨어진 난처한 상황에서 당사자들의 난처한 문제만을 해결해주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종말, 메시야가 가져올 새 시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연회요 축제의 자리, 거기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는 종말론적인 미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시고 백성들의 수치를 제해주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심으로써 영생을 선물로 주실 바로 그 미래가 자신으로 말미암아 지금 가까이 왔다는 징조로서 혹은 징표로서 그러니까 표적으로서 이 기적을 보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내하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사건을 해석하면서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이 사건을 첫 번째 표적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수많은 기적을 보았고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려면 끝도 없을 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였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수많은 기적 중에서 선별해서 7가지의 기적, 그것을 요한은 표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7가지가 표적으로 뽑힌 이유는 특별히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 표적은 기적 너머의 의미, 그러니까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그 기적행사를 통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가리킨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그리고 마지막 표적인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오늘 첫 번째 표적,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풍성한 포도주로써 연회를 계속 흥겹게 이어가도록 하신 기적도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구약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 시대의 도래, 메시야가 가져오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 그 결과로써 눈물이 씻겨지고 수치가 제해지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망이 영원히 폐하여지고 영생을 선물로 주실 그 날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 때” 곧 십자가에서 그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질 것임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괜시리 심각하게 오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기적을 표적으로 보게 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요청에 처음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 거절한 듯 보이도록 하신 것입니다. 기적 사건을 제대로 표적으로 해석하도록 해석의 지침을 제공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움과 풍요로움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하인들에게 명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유대교 정결례는 복잡하고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쉽게 이해해서 깨끗해지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손님들에게도 정결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그 용도로 사용되는 돌항아리 여섯에다가 물을 가득 채우라고 명하십니다. 물을 가득 다 채우자 예수님께서 이제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하인들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연회장이 그 물을 마셨는데 이미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연회장은 신랑을 불러서 보통은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고 사람들이 취했을 때 안좋은 포도주를 내는데 당신은 좋은 포도주를 숨겨놓았다가 이제야 내놓냐며 책망 아닌 책망을 했습니다.
이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고 가리키는 숨은 의미가 있는 표적입니다. 기존 유대교의 정결례, 구약의 율법은 겉사람을 깨끗케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속사람까지 전인을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돌항아리에 담긴 물을 가지고서는 진정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붉은 보혈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자로 부르을 받아야 하나님은 거룩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한 성전 삼아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거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전이 될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메시야 시대의 축복, 죄 용서함 받고 깨끗해진 심령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고, 그 결과로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되는 복은 오직 예수님의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고 대신해서 포도주와 같이 붉은 피를 쏟으실 때 가능해지고 현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 제자들, 지난 시간까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더욱 신뢰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사람들이 특별히 제자들이 물을 단순히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만 보고서 예수님 참 대단하다, 그렇게 말해서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했던 새 시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영생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구나, 이를 통해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얻게 되는 영광이요 곧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것은 독생자의 영광이기 이전에 아버지의 영광,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기 때문에 이것은 구약 모세가 보았던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예수님을 통해서, 특별히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드러날 것이기에 그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입니다. 구약 출애굽기에서 말한 인자와 진실이 많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도주가 떨어지셨습니까? 잔치를 주관하는 신랑 신부에게는 수치와 불명예요, 잔치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흥이 떨어져버린 것이요, 신앙생활하는 우리에게는 신앙생활의 기쁨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의 동력이 꺼져버린 상황입니다. 상당히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결단하고 예수님께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으십니다. 다시 포도주를 우리 안에서 일으키셔서 다시금 즐겁고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다시 우리 안에서 성령의 불길로 타오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의미와 활력을 되찾게 해주실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의 상황, 한국교회의 상황은 잔치자리에서 포도주가 떨어져버린 상황입니다. 성령의 불길이 태우고자 해도 태울 재료가 사라져버린 상황입니다. 신종 코로나로 인해서 이것은 거의 재난 수준이요 막 일어나려고 하는 교회가 다시 주저앉게 되는 상황이요,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연초에 우리의 마음이 위축되어버린 상황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 예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이 상황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켜주심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다시 잔치의 흥겨움과 기쁨을 회복시켜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대의 교회의 혼란한 아픔과 어려움과 그리고 우리 각자의 심령을 다시 새롭게 회복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표적이 오늘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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