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26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4)
나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하기 (요 1:19-28)
지난주에 예수님 안에서 충만하게 드러났던 하나님의 영광 곧 독생자의 영광, 다시 말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 뿐 아니라 그로써 자신도 영화롭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도 영광스럽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은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예수님만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자기를 비우고 오직 예수님만으로 충만하게 됨으로써 짧은 생애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사신 것처럼 세례요한은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과 같은 정신으로 살아가는 분의 간증을 어제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오늘 주보 칼럼에도 썼습니다만 성악가가 부르는 찬송가에 필이 꽂혀 지난 주 내내 찬송가를 들었습니다. 또다른 성악가가 없나 해서 유투브에서 검색해보니까 이용훈이라는 한국의 테너 가수가 세계적으로 굉장히 유명한 오페라 가수일뿐 아니라 본인은 선교사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그 바쁜 와중에도 선교활동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분은 세계의 3대 오페라 극장에서 주연으로 활약하고 있고 특별히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렇게 활동을 하면서도 지난 2014년부터 서울대학교 성악과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너무나 바빠서 교수를 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것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수락했고 특별히 모교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희생을 감수하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때 이미 그는 2019년까지 공연 일정이 꽉 차있었습니다. 서울대 성악과가 불법 레슨과 성추행 사건 등으로 인해서 교수가 많이 줄어들어서 교수를 채용하려고 했는데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서로 싸워서 1년 6개월간 교수를 한 사람도 채용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분을 특채로 교수로 임용한 것입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었고 이분이 찬양하는 곡을 거듭 들었습니다. 원래 신학을 공부하다가 경영학도 공부하고 음악과 관계없이 지내다가, 이분이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했다고 합니다. 찬양 인도를 하는데 이분의 목소리를 듣고, 성악과 학생이었던 이분의 친구가 자신이 가르쳐줄 테니까 성악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해서 노래를 더 잘하고 싶어서 성악을 배웠고 노래를 부르는 게 즐거워서 이 길을 가리라 마음먹고 5개월만에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했습니다. 수석 입학에 수석 졸업이었습니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행복하게 노래를 하고 배움의 과정에 있던 차에 그만 성악계의 어떤 비리와 가슴 아픈 일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이제 더 이상 음악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서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고심하면서 기도하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나는 네가 노래할 때가 가장 기쁘다. 너는 나를 위해서 노래를 부르지 않겠니?”, 하는 음성을 듣고 어렵지만 마음 추수르고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왔습니다. 그 당시 부유했던 집안이 갑자기 폭망해서 돈 한 푼 없이 도망치다시피 미국 뉴욕의 한 음대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던지 음대생이 백팩에 빈 큰 패트병을 가득 담아서 학교에 갔습니다. 물로 배를 채우려고. 학교가 약수터였습니다. 거기서도 실력을 인정 받았고 독일의 한 오페라 극장에서 주인공이 해고되는 바람에 공연을 2주 앞두고 전격적으로 주인공으로 캐스팅됩니다. 독일에서도 역시 먹을 게 없어서 오전에 다같이 연습하고 런치 타임을 갖는데 자신은 식사를 사먹을 돈이 없어서 극장에서 그냥 쉬었습니다. 집으로 가려고 해도 차비가 아까워서 그냥 극장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재개된 연습에 다시 참여했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주인공으로 노래를 연습해야 하는 일은 참으로 고된 일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형편과 사정을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연습날이 이어지고 계속 그렇게 하자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끼는 것 같아서 하루는 집에 갖다 오자라고 생각하고 길을 나섰습니다. 독일 도시에서 축제가 열린 듯했습니다. 광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길 한복판에 독일식 소세지를 구워서 판매하는 노점이 있었습니다. 너무도 배고파서 가격표를 봤는데 50유론가 그 정도 가격으로 판매하더랍니다. 갑자기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50유로가 없어서 저 소세지를 못사먹는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절로 쓴웃음이 나온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음성이었고 주님의 강력한 임재를 그 자리에서 경험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었고 주님으로 충만해진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 고백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임재만 있다면 평생 가난하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날 오후에 다시 극장에 돌아왔는데, 이날부터는 합창단과 함께 연습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합창단에 반가운 얼굴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서울대 성악과 선배들이 두 세명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부터 점심, 저녁 걱정은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섬김을 받고 잘 준비했습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을 겪고서 주님의 은혜로 대타로 출연하게 된 첫 데뷔무대에서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고 이후 유럽 여러 극장에서 계약을 맺고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로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2007년이었고 데뷔가 곧 대박이었습니다.
드디어 2010년에는 미국 진출과 더불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전속 가수가 되었습니다. 성공적으로 미국 무대에 데뷔한 이듬해 2011년에 일본에서 쓰나미가 있었죠.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는 5년에 한 번 일본에 가서 대규모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단원 중에서 선별해서 스타만 데리고 오페라 하우스 모든 직원들이 셋트까지 총동원하고, 오케스트라 단원까지 대대적으로 5년에 한 번 일본에서 공연을 갖습니다. 오페라 가수들이 그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공연이고 유명한 공연입니다. 2010년에 데뷔했기에 자신이 갈 위치가 아닙니다. 그때 세계적인 스타 테너가 일본 환경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원자력 사고 때문에 방사능 유출 문제로 인해서 자신의 건강 때문에 안간다고 한 것입니다. 그때 올릴려고 했던 작품이 '돈 카를로스', 이분이 바로 전 시즌에 메트로폴리탄 데뷔 공연했던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대타로 자신이 가게 됩니다. 일본 사람들이 자신을 궁금해 하고 동양인이기도 하고 한 번밖에 안선 사람이 오니까 주목을 했습니다. 인터뷰 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습니다. 오페라 공연이 다 끝나고 난 후 싸인해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1시간 이상 걸려야 할 정도로 줄을 서있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일본팬들이 싸인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가수들이 하얀 테이블에 앉아 싸인했습니다. 자신도 생전 처음으로 싸인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싸인은 "지저스 러브스 유"(Jesus loves you), 그리고 말씀도 아는 것 생각나는대로 써줬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오래 걸렸죠. 벌써 옆에 동료가 짜증나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유명한 사람, 이름만 대면 아는 테너, 성격이 괴팍한 분으로 정평이 나있던 분입니다. 카메라도 돌아가고 있었고 기자도 있었습니다. 그분이 테이블 치면서 손가락질 하면서 "종교활동하는 거 그만 하라고!" (Stop it!) 그냥 침묵하고 대응하지 않고 계속 싸인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점점 큰 괴성을 질렀습니다. 15-20초 동안, 그래도 반응이 없으니까 혼자 열받고 괴성 지르고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팬들이 다 쳐다보고 카메라 돌아보고 기자도 있고... 얼굴 찡그리지 않고 계속 싸인했습니다. 싸인회 끝나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극장장한테 보고 올라갔고, 사람들이 적당히 좀 하라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마음이 너무 어려워 밤새 뜬눈으로 밤새고 아침 QT 말씀 폈습니다. 말씀이 안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습니다. 어제 일에 대해 어떤 기사 났다 보려고. 이용훈 검색해보았더니 기사가 났습니다. 기사 내용인즉, 신인인데 떠오르는 별처럼 탁월한 공연 했다. 그런데 싸인회 할 때 문제 일으켰는데 기자가 "지저스 러브스 유"를 따옴표로 인용해온 것입니다. 이것만 안했더라면 인터네셔널하게 발전할 텐데 한계가 있다. 아쉽다. 이런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기사를 확인한 후 다시 큐티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말씀을 봤습니다. 그날 QT 구절은 빌립보서 1장 18절이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그때까지만 해도 웬 말씀이 이런가 생각했는데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데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분이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치고 지역 언론사에 인터뷰할 때마다 예수님 언급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선교사로서 그렇게 말을 해도 방송에서는 다 짤렸습니다. 이번에는 기자에게 내달라고 안했는데도 "지저스 러브스 유"가 실린 것입니다. 그 문구를 넣은 거, 부탁 부탁해도 안넣어주던 것을. 그 문구를 넣어준 겁니다. 그때 주님이 생각나게 해주신 성경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세례요한의 말씀이었습니다. 조롱 받았지만 자신은. 그렇지. 그래. 내가 외치는 소리라고 했는데 그가 흥하여야 하겠고 내가 쇠하여야 하리라. 그런데 내가 왜 아파하는 걸까. 그분의 이름이 실렸고 그분의 사랑이 증거됐는데 내가 잠깐 모욕당했다고 왜 슬퍼하지... 이것이 내 삶의 좌우명인데.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게 그리스도니! 너무 기뻐서 일본 공연 잘 마쳤습니다. 마지막 날 자기 방에 화환이 와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팬들에게 싸인하면서 지저스 러브스 유 할 때 단 한 명도 나도 예수님 믿어요 하는 분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몇 천명 싸인을 해주었는데도 말입니다. 4회 공연을 했는데도. 응답하는 관객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공연 때 화환이 왔는데 리본에 지저스 러브스 유. 역시 한 명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공연 마치고 그 화환을 들고 나가는데 일본 부부가 오시면서 너 맘에 들어 너무 맘에 든다 인사하고 감사하다 너 예수님 믿어 아니 안믿는데 근데 어떻게 그랬더니 네가 맨날 쓰니까 지저스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너도 사랑하겠구나 생각이 들어 자신도 그냥 그렇게 썼다... 그때 갑자기 성령님이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구나 주님을 모르는 이방인을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구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고 누구도 믿는 것 같지 않은 공격받고 비난받고 복음이 없는 것 같은 땅에서도 하나님이 그것 다 보시고 계셨구나 용훈아 내가 널 사랑한다 오직 답답했으면 찾다가 찾다가 없으니까 내가 널 사랑한다. 이런 응답을 받아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 외에도 이분이 세계적 성악가로서 무대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간증들이 굉장히 은혜가 넘쳤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하여튼 이분은 자신의 성대 결절로 인해서 한동안은 노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 잠깐 무대를 떠나야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붙지 않는 성대를 가지고도 지금껏 세계적인 무대에서 주연으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삶의 멘토는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처럼 오직 예수님만을 증거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오직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사시고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가치로서 자신을 바라본 것입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나의 길’과 ‘주님의 길’뿐입니다. ‘나의 길’은 영원에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끝이 있습니다. 도중에 끊깁니다. 반면에 ‘주님의 길’은 영생에 이르는 길이요 도중에 끝나지 않고 목표에까지 이르는 길입니다. ‘나의 길’을 추구하다보면 도중에 끝나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는 지점에 이르게 됩니다. 지나온 길이 허망하게 느껴지며 출구를 찾지 못해 허둥댈 수밖에 없습니다. 핵심은 나의 길과 주님의 길이 일치되는 것이겠죠.
박노해 시인이 충만한 삶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해습니다: “진정하고 충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비하면 죽음의 두려움조차 아무 것도 아니다.” 나의 길이 주님의 길이 될 때, 바로 이때가 충만한 삶입니다. 나를 비우고 주님으로 충만해져야 충만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님의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충만한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이 보낸 사람이 세례요한에게 무언가 물었던 것 같습니다. 세례요한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했고, 또 엘리야도 아니라고 했고 사람들이 종말에 올 것으로 기대했던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자신은 종말론적인 새 시대를 가져올 종말론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러면 너는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도대체 세례운동을 왜 하는 거고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세례요한은 구약성경 이사야 말씀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3절) 세례요한의 길이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이고 그의 사명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자신의 길임을 그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깨달았고 그래서 짧은 생애 살았지만 참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한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지 세례요한의 예를 통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 방법은 무엇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 내용과 비결은 무엇일까요? 세례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의 직분과 자신의 역할을 의식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말라기선지자가 예언한 종말에 오기로 예정된 엘리야냐고 물었을 때 세례요한은 부인했습니다만, 실은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오리라 약속한 엘리야라고 말씀하신 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바로 그 엘리야라고 인정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의 사역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야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데 세례요한은 자기를 비운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을 비운다면 내가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서, 내가 기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너무 큰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두 번째로 이어집니다.
둘째,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도대체 무슨 권세로 세례를 베푸느냐? 사람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던 종말론적인 새 시대를 가져올 사람이 아니라면 도대체 세례는 왜 베풀고 도대체 무슨 권위로 세례를 베푸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세례요한은 대답합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26-27a)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와 이어서 요한이 했었음직한 말, 그러나 여기서 생략된 말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메시야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를 넣어볼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는 다 그렇게 나옵니다.
물세례는 새 시대를 가져오고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오실 메시야를 받아들이기 위한 회개의 세례였고, 회개를 하는 목적은 다가올 시대의 생명 곧 영생을 얻고자 함인데 그 생명은 자신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내 뒤에 오실 분이신 메시야 자신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줌으로써 가져다주실 것임을 세례요한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세례요한 자신이 하는 일 모두가 주님의 도우심의 결과일 뿐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일이 더욱 중요함을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물세례는 주님이 주실 성령세례를 위한 준비에 불과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사역의 중요성과 역할의 기여를 인식하지도 않을 정도로 자신을 비울 수 있었던 세례요한의 자기 비움, 그래서 하나님으로 충만함은 자신이 하는 일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자신은 그냥 흉내만내는 거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까 이용훈 테너도 간증에서 계속 강조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무대에 나가 자신이 노래를 하지만 자신이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하신다는 겁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의 깨달음은 자신의 사역의 한계, 결국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에 비하면 자신의 일은 아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자신의 사역은 도무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사역조차도 의식하지 못하고 그 중요성에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주님이 하시려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요, 결국 주님이 하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세 번째로 이어집니다.
셋째, 종과 주인의 관계, 자신의 작음과 주님의 크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27절입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신발에 관련된 일은 노예가 하는 일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당시에는 제자가 노예가 하는 일을 스승을 위해 하도록 했습니다. 단 하나 신발과 관련된 일, 특히 신발끈 풀어주는 거나 신발 들어주는 것은 제자가 해서는 안되고 그 일은 너무 비천해서 오직 노예만 할 수 있다고 랍비들이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자신이 주님의 크심에 비교해서 너무 작고 비천해서 그 노예만이 할 수 있는 일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처음 두 가지 것들, 자신의 사역이 주님이 하실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자각, 그래서 자신의 사역과 역할에 아무런 의미와 중요성을 부과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주님의 크심을 그가 알았고 그것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철저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이고 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를 비울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오직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고 그래서 자기도 또한 그로 인해 영화롭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자신도 영화롭게 되고, 쓰임받는 사명자로서 충만한 삶을 삽시다! 세례요한처럼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으로 충만함으로써 진정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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