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1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2)
증언 (요 1:6-13)
가끔 인간은 참 위대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베토벤이 교향곡 ‘운명’을 작곡했을 때 그는 이미 청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밀레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시력을 잃고서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시각장애인 화가 박환씨입니다. 그는 40여년 가까이 그림을 그려온 중견 화가입니다. 2013년 큰 교통사고로 당해 머리를 크게 다쳤고 왼쪽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었고 얼굴에는 많은 인공뼈가 박혔고, 말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고로 인해서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습니다. 사고 이후 몇개월간 좌절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생명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희망이 없으니까 살 이유가 없잖아요. 하루라도 일찍 죽는 방법을 고민했죠. 동생 팔을 잡고 매일 걷던 집 앞 도로가 있었는데 하루는 차도에 뛰어들려고 시도했어요. 마음속으로 어머니께 다 인사하고, 하나, 둘, 셋을 속으로 세고 있었죠. ‘이때다’ 싶었을 때 동생이 “초록불이야, 오빠. 가자 이제”라고 팔을 잡아끌어 정작 시행은 못 했어요.” 한번은 그가 11층 아파트의 거실 창문에서 뛰어내리려던 것을 가족들이 발견해 붙잡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일어선 그는 연필 대신 핀과 실로 스케치하고, 손바닥 촉감으로 색을 구분해 그림을 그립니다. 작년에 세번의 전시회를 열 정도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작 자신의 눈으로 본인의 그림을 확인하지는 못합니다. 지금 그림이 완성된 것인지, 아니면 더 칠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안 설 때가 많습니다. 집중했던 작품에서 마음이 떠날 때, 그림을 마무리합니다.
이분에게 가장 큰 아픔은 자신의 작품을 본인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답답함입니다. “만약 내가 앞을 볼 수 있다면 햇빛과 사람의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린 그림들을 제일 보고 싶다”고 말합니다. “생각한 대로 그려놓은 것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일 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잘 표현을 했는지 지금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막말로 미칠 노릇이죠.”
전에는 세밀한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그림을 그렸다면 시력을 잃고나서는 선의 경계가 모호하게 그릴 수밖에 없었고 그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다소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된다고 평가합니다. 이분의 소망은 소박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싶은 소망만 품고 있습니다. 그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까닭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고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뿐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나는 그 불가능에 도전하는 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예술적 호평은 바라지도 않아요. 제 그림을 보고 누군가 감동을 받고 희망을 얻는다면 그게 기쁜 일이죠.” (한겨레신문 2020.1.11.)
연초에 듣게 되는 참으로 희망의 메시지요, 박환 이분은 참으로 희망의 메신저라 할만 합니다. 이분의 기사를 보고서 드는 느낌은 ‘눈으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총이요 축복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알다’와 비슷한 의미면서도 직접 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 시간에 볼 말씀입니다만,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영광을 보았다’고 표현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보니 예수님에게서 영광을 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쓴 복음서입니다. 요한은 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봄,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목격자로서 복음서를 쓰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뿐 아니라 그가 쓴 요한일서 1장 1-2절에서도 목격자됨이 강조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으로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만 목격자로서 예수님의 생애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공관복음, 그러니까 마태복음, 마가, 누가 역시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복음서를 기술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태 역시 자신이 직접 본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고,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여인들의 증언에 토대를 두고 복음서가 기술되었습니다.
추측건대, 복음서의 기록은 목격자가 나이가 들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기록으로 남겨둔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봅니다. 목격자요 증인이었던 열두 제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통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기 전에 사안을 판단하고 분별하기 위해서 증인을 불러 증언을 듣죠. 보통 이때 증언은 목격자의 증언일 가능성이 높죠. 목격자가 증인이 되어서 증언을 하고 그 증언에 대해서 판사가 판단을 내려서 사태의 진실에 접근해가죠.
요한복음에도 증인이 여럿 나옵니다.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증인이요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직접 본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고서 증언하는 일곱 증인이 나옵니다. 첫 번째 증인은 세례요한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입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 증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신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소개됩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 중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요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예수님은 자신을 증언함에 있어서 자신이 위로부터 내려온 자로서 하늘의 진리를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직접 본 것을 증언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서 자신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증인은 수가성에서 만난 한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요 4: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과 여러 대화를 나누고서 최종 결론은 이분은 구원자 메시야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서 이제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서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죠. 네 번째 증인은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요 5:31-32절입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37절에서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다섯 번째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나 표적이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요 5: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그리고 여섯 번째 성경 특히 구약성경도 예수님을 예언하고 증거합니다. 요 5:39절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증인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렸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마을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요 12:17절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렇게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일곱 증인이 나옵니다. 이들은 예수님 당대의 증인입니다. 예수님의 역사가 펼쳐지던 당대에 그들이 해야 할 증언을 한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당대의 증인뿐 아니라 앞으로 교회 역사에 걸쳐서 두고두고 예수님을 증언할 증인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증인이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과 제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2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보혜사 성령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증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생애 당대에 예수님이 하셨던 증언을 다시 증언해줍니다. 제자들 곧 두고 두고 교회 역사 속에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언할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 자신의 증언과 예수님을 증언했던 일곱 증인들의 증언을 다시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에 기록이 됨으로 말미암아 일곱 증인의 증언이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증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리차드 보컴 저, <예수와 그 목격자들> 참고)
설교도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설교자가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뵙지는 못했을 지라도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가지고서 다시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보혜사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에 예수님이 참되게 증거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는 예수님 당대의 일곱 증인의 증언을 조명하실 때에 이들의 증언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하게 믿음만한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여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이땅에 오신, 로고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예수님의 증인이신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를 구해야 합니다. 왜냐 보혜사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공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하려고 할 때 심지어 어떻게 말해야할지 인간적으로 준비하지 말고 성령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11-12절입니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전해주려고 할 때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친히 증인이 되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은 증언하러 온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증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소개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리고 7a절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무엇을 증언합니까? 누구를 증거합니까? 7b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여기서 빛은 무엇입니까? 빛은 누구입니까? 생명의 빛이죠. 지난 시간에 보았던 말씀,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의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 안에 있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이요 곧 영생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에게 던져진 빛이었죠. 생명의 빛입니다. 바로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의 증언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7c절,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고 예수님을 증언했던 이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면서 반복적으로 “내 뒤에 오시는 이”(15절, 27절)라고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합니다. 자신은 빛이 아니라 참 빛을 증언하기 위해서 예수님보다 먼저 보냄을 받은 자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사야서의 예언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23절)로 부르심을 받아 이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 일곱 증인들의 증언의 목적은 바로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이들의 증언을 수록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요한복음 20장 30-31절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만 있던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가지게 하려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모아놓은 것이 바로 요한복음입니다. 관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아버지를 온전히 계시하시는 유일하신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원자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십니다. 오직 그 이름을 힘입어야만 우리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빛으로 오셔서 이러한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셨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했고, 빛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거절했습니다. 이유인즉 자신의 어둠이 드러날까봐 나오지 못한 것입니다. 요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거절을 받았던 것입니다. 9-11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닌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가운데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맞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2절),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어지는 13절에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부모의 열정적 사랑이나 결정과 의지로 자녀가 출생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롭게 출생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출생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지와 계획 가운데서의 새로운 출생입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남 곧 중생을 가리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증언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확신은 얼마나 든든하고 큰 확신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입을 열어 증언하고 빛된 자녀의 삶으로서 증언할 때 우리는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이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뿌듯한 자기 정체성입니까? 복된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증언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명자라는 확신을 지니고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복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맞이하고 환영하고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면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님 안에만 있던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고 이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유일무이하신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아들’과 ‘자녀’를 세심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이시고 우리는 자녀들입니다. 이러한 복된 말씀을 증거하므로 예수님의 참된 증인으로 인정받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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