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요한복음 강해(1)
삶의 의미 (요 1:1-5)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이해하기가 참 쉽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소개하고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면서 빵(떡), 물, 빛과 어두움, 목자와 양, 포도나무와 포도주와 같은 이미지와 상징을 사용하기 때문인데, 그냥 읽어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요한복음은 문체가 간결하고 이야기가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은 분들에게 요한복음을 읽으시라고 권면합니다. 요한복음을 읽고 신앙을 갖게 되는 분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더욱 깊어지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의 묘사가 생생하고 뚜렷해서 예수님을 실제로 만나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요한복음은 평생토록 연구해도 늘 새롭게 다가오는 깊이가 있고 의미가 고갈되지 않는 샘과 같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은 읽으면 읽을수록 의미가 풍성해지고 골똘히 생각하게 만듭니다. 읽고 있는 본문의 표면보다 더 깊은 심층을 탐사하도록 자극합니다. (리차드 보컴의 <요한복음 새롭게 보기> 참고)
2020년 한 해 동안 주일예배 때 요한복음을 읽고 설교하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18절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서문)입니다. 앞으로 요한복음에서 전개할 복음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서문에 나오는 이미지와 개념들이 앞으로 본문에서 더욱 자세하게 다뤄질 것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하셨을까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그리스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당대 스토아 철학에서 꽤 유명한 개념이고 의미가 상당히 다양하게 포괄적입니다. 우주의 내적 질서나 원리 혹은 법칙, 그리고 거기에 상응하는 인간 내면의 이성, 이성을 드러내주는 말과 언어, 말이 담고 있는 의미 등 다양한 뜻을 지닌 단어가 ‘로고스’입니다. 상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용어입니다.
모든 성경이 ‘말씀’으로 번역했습니다. 아마 가장 좋은 번역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문맥에서 잘 선택된 번역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요한복음 1장 1절이 창세기 1장을 반향하고 있기 때문에 잘된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주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그 말씀으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주가 창조하셨지만 실제로 창조를 실행한 창조의 중보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의 대리인과 실행자로서 ‘말씀’과 ‘지혜’, 그리고 그분의 ‘영’을 제시합니다.
태초에 창조를 실행했던 하나님에게서 나온, 그래서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곧 로고스가 있었으니 그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말씀이었고 그래서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구분되는 말씀이신 아들과 또한 영이십니다.
실제로 창조를 실행한 분은 ‘말씀’이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아버지의 계획과 의도대로 말씀이신 아들이 창조를 이루셨습니다. 말씀 없이 이루어진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창조의 근원이신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창조세계에 메아리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엿보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말은 없어도 창조세계에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일반계시라고 부릅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만이 들을 수 있는 성경 말씀 곧 특별계시와 구분되는 누구라도 자연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일반계시입니다.
공자가 말년에 자신이 죽게 될 날이 가까웠음을 직감했습니다. 제자인 자공에게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고 말했습니다. 뜻밖의 말을 듣고 자공이 여쭈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면, 저희가 어떻게 도를 이어받아 전하겠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시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그러고서 공자는 말문을 닫았습니다. 병세는 점점 나빠졌고, 7일 후에 공자는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왈가왈부합니다. 공자가 유언을 남겼느냐, 아니면 유언을 남기지 않았느냐. 이걸 가지고 논쟁을 벌입니다. 공자가 남긴 유언은 침묵 유언이었습니다. 그러면 공자는 침묵으로써 대체 무슨 유언을 남긴 걸까요? 공자의 유언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공자의 침묵’이라고 말합니다. 공자는 단지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를 되뇌였습니다. 공자가 침묵할 때 누가 말을 했습니까. 하늘이 말을 하고 있었고 온 우주가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새가 울었을 것이고 비가 왔다면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 바람도 불었을 것입니다. 밤에는 어김없이 달이 뜨고, 별이 반짝였고 아침에는 태양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니 공자의 유언은 ‘침묵 너머’의 ‘우주의 소리’였습니다. 공자가 침묵할 때 한시도 쉬지 않고 쏟아진 ‘우주의 소리’가 바로 공자의 유언이었습니다. (중앙일보 백성호기자의 현문우답 2019.11.24)
성경으로 표현하면 태초에 우주를 생성시킨 말씀이었고 지금도 우주에 메아리치고 가득한 하나님의 말씀 소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주는 생성되었고 우주는 지탱되고 운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태초에 계신,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말씀, 그러나 하나님과는 구분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보자요 창조의 실행자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5-17절에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창조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창조의 목표와 목적 또한 그리스도임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조명하고 있다면 여기 바울서신에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로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합니다. ‘독생자’는 유일하신 아들,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각별한 관계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에 반해서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는 많은 형제 자매들 가운데 장자를 뜻합니다. 맏아들인 셈이죠. 예수님의 인성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아버지와의 배타적이고 유일무이한 각별한 관계로서 영원하신 아들 독생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그리고 많은 형제 자매들의 맏형으로서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거느리시는 예수님의 인성을 각각 강조합니다. 한 인격 예수님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관계로서 독생자로 표현되었고, 예수님과 만물의 관계,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모든 창조물에 대해서 처음 태어난 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형제로서 예수님과의 사귐과 교제속에서 수직적인 차원인 아버지와의 연합과 사귐과 교제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격 안에 있는 두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이십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나라 참고)
마태, 마가, 누가 등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주목하고 그 관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조망하고 묵상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로고스 안에는 생명이 있었습니다. 원래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들과 이 생명을 나누어주시기 위해서 참된 생명을 지닌 로고스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죽음을 죽으시고서 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로고스 안에 있던 생명은 하나님에게만 있는 영원한 생명이요 죄인들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부활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을 예수를 믿고서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이 생명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빛으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처한, 죽음 앞에 서있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 생명을 빛으로 던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자들은 생명을 얻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생명을 보존하고 지탱시키려는 것입니다. 생명에의 충동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왜 돈을 벌려고 합니까. 없을 때는 돈이 있어야 좀 편리하고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으니까 돈을 벌려고 합니다만, 평생 쓸 돈을 갖고 있는 재벌이라도 계속 돈을 추구하고 돈을 벌려고 하는 이유는 생명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지탱시키려는 충동의 다름아닙니다. 생명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인간은 생명을 욕망합니다.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인데, 욕망의 근원에는 생명에의 충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행을 통해서 억제하려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살려는 충동을 억누르고 삶과 죽음이 일반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는 것이 곧 고행이요 현생에서 업보가 해결되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는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요 그래서 수행을 통해서 사멸하고 존재를 멸절시키는 것이 곧 열반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안타까운 죽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스님 중에서 선을 수행하는 선승으로서 최고의 명망을 지니고 수행자로 살아가시는 봉암사의 적명 스님이 실족사하신 것입니다. 봉암사라는 절은 평소 때 일반 신도들에게 개방하지 않고 일년에 한 번 ‘부처님 오신 날’만 개방한다고 합니다. 오로지 수행하는 스님들의 참선을 위한 사찰입니다. 여기에 적명스님이 계셨는데 등산하다가 실족사하신 것입니다. 올해 80세이십니다. 이분이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삶이 죽도록 힘들다고 해서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 그렇게 끊으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업장(業障, 우리가 지은 업으로 인한 장애) 때문에 결국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해야 한다.” 만약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이렇게 해보라며 처방전도 내놓았습니다. “상대가 지독한 악인이라 해도 소중한 인연으로 여겨보라. 따뜻한 말 한마디부터 해보라. 내가 착해지면 그도 착해진다.”
이분의 다비식 때 장례위원장을 맡은 한 스님은 영결사에서 대중을 향해 이렇게 물음을 던졌습니다. “부처님과 조사도 이와 같이 가셨고, 범부와 성인도 이와 같이 가셨으며 오늘 적명 스님도 이와 같이 가셨습니다. 그러나 올 때도 온 바가 없고, 갈 때도 간 바가 없다고 하니 금일 적명스님께서는 지금 목전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것이죠. 삶과 죽음, 둘의 본질을 관통하면 오고 간 바가 없어집니다. 그냥 그 자리일 뿐인 거죠. (중앙일보 백성의 현문우답 2019.12.29.)
불교는 짙은 허무주의 색채를 띱니다. 그래서 불교는 대중에게는 현세 기복주의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 그 생명의 빛을 받아서 하나님에게만 있던 영원한 생명을 함께하자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생명을 주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생명의 빛을 우리에게 던져주는 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오지 않고 예전에 삶의 충동대로 생명을 붙들려는 생명의 충동대로 그냥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둠인지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영 멀어져서 오히려 생명을 얻지 못하는 길인지도 알지 못한채 어둠속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살이의 일상에서 생명에의 충동으로써 생명을 얻기 위해 욕망하고 욕망하는 것들을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결국 참된 생명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빛을 붙잡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발생하는 어둠이죠. 생명의 빛을 수용하지 못하는 어둠입니다. 어둠속에 살면서도 그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착각속에서 생명에의 충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쏟고있는 인생의 비극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 한 문장이 삶의 비극적인 현실을 여실히 진단해주고 있습니다.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 죽음을 이긴 부활생명이 오직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이 생명을 우리와 나누기 위해서 모든 형제 자매의 맏아들이 되신 예수님에게서만 이 생명의 빛이 있는데, 그 길로 나오지 않고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지탱시키려는 잘못된 방향의 생명에의 충동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인생의 안타까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빛을 비춰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사야 60장 19-20절입니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다시는 네 해가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영원한 빛, 생명의 빛을 주시려고 우리에게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치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도 영원한 생명에 있습니다. 영원하지 않고 일시적인 생명이라면 삶에는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라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는 것일까요? 진정한 의미는 영생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온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생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 가치를 자신의 활동으로 사람들의 인정으로 그리고 자신의 기여와 업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존재의 의의와 의미를 그런 식으로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삶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으로 초대하시는 바로 거기에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와 나누어주시고 우리가 믿음으로 그 생명을 받았다면,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생명에 동참한 자가 되었다면 그 자체가 우리 삶의 의미입니다. 살아야 할 이유요 진정한 생명의 충동이 바로 자리잡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살 길을 찾게 된 것입니다. 광명을 얻은 것이죠. “광명을 얻었네!” 영원한 빛을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한 가지 더 인생의 의미는 영생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또한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너무나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여기에 인생의 의미, 삶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태어나 고통을 반복하는 생명이 아니라 잘못된 충동으로 생명을 소진시켜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얻게 된 영생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참된 생명이신 예수님의 빛이 더욱 선명하게 여러분들에게 비춰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더욱 굳게 연합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영생의 축복을 누리시고 이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요 삶의 층만한 의미임을 깨닫고 이땅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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