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그리스도의 보혈 (계 5:6-10)
대부분의 사람들은 훌륭한 생애로 기억되지 죽음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소위 종교의 창시자라는 사람들 역시 추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그들의 가르침이나 숭고한 생애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좀 다르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이땅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이나 그분의 가르침은 분명 기존의 종교지도자들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역시 주목할만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기억되고 전해졌습니다.
꼭 종교와 무관하더라도 죽음으로써 기억되는 분들도 역사에 더러 있습니다. 가령 이수현열사입니다. 우리는 이분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떤 훌륭한 일을 그의 생애속에서 수행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있다면 이분이 자신을 바친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억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이분이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다가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을 때 뛰어들어 취객의 목숨을 구했으나 자신은 열차에 치여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27세의 한국인 청년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에 대해서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모리총리가 한국의 김대중대통령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습니다: “귀국의 청년이 일본인을 구하고자 하다가 귀중한 목숨을 잃은 것을, 어제 다보스에서 귀국한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일본국민, 그리고 각하를 비롯한 모든 한국 국민 여러분들과 함께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앞서 돌아가신 이수현 군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이수현 군의 부모님께도 진심으로 조의 및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하고, 위로하여 드렸습니다. 이수현군의 용기 있는 숭고한 행동은, 일본 국민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귀국의 우정의 가교가 된 이수현 군의 명복을 진심으로 빌며 그 용기를 기리고, 유가족 및 한국 국민 여러분께 무한한 경의를 표합니다.” (https://blog.naver.com/dgbtbilions7530/221451247261)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특히나 강조합니다. 대부분의 훌륭한 위인들의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되기는 해도 죽음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주목할만한 기적 행사와 가르침보다도 오히려 그분의 십자가 희생적 죽음으로써 더 많은 말씀을 우리에게 하시고 계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더욱 강조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말했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벧전 3:18)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알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전해주는 신약성경의 네 복음서도 예수님의 생애 중 마지막 일주일에 과도한 집중을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전체 분량의 1/3을, 누가복음은 1/4을, 요한복음은 무려 절반을 할애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둔 한 주에 포커스를 맞췄습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존스토트 목사 저 참고)
이어령선생이 기독교신앙을 갖기 전에 미국의 한 조그만 교회에 가서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한 영상을 보여주었는데 아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던 듯합니다. 투구를 쓴 로마 병사가 망치를 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못이 박히며 뼈가 부서지는 생생한 장면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머리엔 가시나무로 만든 관을 꾹 눌러써 피가 흐르고,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언덕을 오르는데 로마 병사들의 채찍질로 인해서 살점이 툭툭 떨어져나갑니다. 언덕 위 십자가 위에서 양팔을 벌리고 못을 박는데 못에 박히면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렸습니다. 이분이 이 영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잔인한 범죄자나 살인자도 고통스럽게 죽는 장면을 보고서 통쾌하다는 생각보다는 저질렀던 죄는 잊혀지고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일진대 예수님이 아무 죄 없이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서 기독교 신앙을 본격적으로 갖기도 전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이어령선생은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의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십자가형을 옛날 우리나라 사형법이었던 효수형과 비교합니다. 효수형은 중한 죄를 지은 사람의 목을 베어 그 목을 장대에 매달아 저잣거리에 전시하는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십자가처형이 바로 죄인에게 엄청난 고통뿐 아니라 수치를 주는 효수형과 비교할만한 것입니다. 그래도 효수형은 죽여놓고 수치를 주는 것이고 죽을 때는 고통없이 즉시 죽게 하는 것과는 달리 십자가형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피를 흘려 말려죽이는 고통스런 죽음이고 맨몸으로 못을 박아 십자가형틀에 달아서 죽을 때까지 수치스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인간이 고안한 사형법 중에서 가장 잔인한 형벌입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효수형 때 사용했던 장대와 같은 게 로마시대의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채택했다는데 의아한 마음이 든다는 겁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이어령 저 참고)
그만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그 어떤 사람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를 버린 희생적 죽음이었고,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꼽힐 정도로 인상적인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5장은 예수님의 제자 사도 요한이 본 환상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보았습니까? 본문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양이 서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한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을 보았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비쳐진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소위 천당에서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서계셨던 것입니다. 어린양께서 어떤 행동을 취하십니까? 7절입니다. “그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하시니라” 보좌에 앉으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 성부 하나님께 들려져있던 두루마리를 어린양 예수께서 취하셨습니다. 둘둘만린 두루마리는 일곱 개의 인으로 봉해져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5장 1절에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 안팎으로 썼고 일곱인으로 봉하였더라”고 묘사된 그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취한 것입니다.
두루마리는 무엇입니까? 구약성경 다니엘서가 예언하고 있는 바로 종말의 비밀에 관해 봉인된 두루마리입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시고 어떻게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인지를 비밀스럽게 담고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가 이제 예수님에 의해 열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획과 작정이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실행되게 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아울러 가리킵니다. 창조의 목적에 관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작정에 관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세상의 심판에 관한 두루마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이러한 일들이 실행되게 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이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적합한 분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창조세계에 대하여 주권과 통치를 다시 행사하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도래한 것입니다.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봉인된 두루마리가 어린양에 의해서 해제되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두루마리를 취하자 주위에 있던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경배드리며 찬송합니다.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관한 계획, 구원에 관한 계획, 세상 심판에 관한 계획 등을 담고 있는 종말에 관하 비밀스런 두루마리를 예수님께서 그 인봉을 떼어 공개하기에 적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분이 적격이냐면 예수님께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셔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그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이요 우리를 대신하여 흘리신 피 때문에 두루마리를 손에 쥐고 그 인봉을 떼어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과 구원의 경륜과 하나님의 온갖 작정을 실행하기에 적합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해서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등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만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당연히 용서해주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떤 분의 말처럼 용서가 하나님이 하시는 전문이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십자가를 내세울 필요도 없는 게 아닐까요? 어린양의 피가 꼭 필요한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요? 하나님에게는 죄를 용서하는 것이 심각하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러나 어떤 기독교 작가는 말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다.” 왜 그렇습니까? 죄는 우리의 생각보다 심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단순한 위반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거룩함은 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본 결과 용서는 거의 불가능한 과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난제, 곧 딜레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과 죄에 대해 심판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충돌, 이로 인한 난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에서 친히 어린양이 흘리신 피입니다. 십자가에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이, 어린양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직접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리를 취하셔서 우리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것이며 우리 대신 흘리신 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앞의 책 참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보혈은 예수님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희생을 원하십니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축복을 가지고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 쏟아져내렸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가지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고 옥한흠목사님은 설교 <예수를 따라가려면>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내가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문제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고 강조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마음을 무겁게 가질 필요가 없음도 아울러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려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가 숨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날마다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됩니다. “고난과 가난과 질병 속에서, 핍박과 실패 속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위로와 능력을 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설교에서 러시아의 유명 작가인 솔제니친의 예화를 소개합니다.
반체제 인사였던 솔제니친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형을 선고 받고 수년에 걸쳐 고생을 했으며 나중에는 서방 세계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하루에 열두 시간씩 중노동을 했습니다. 결국 영양가 없는 음식을 먹으며 심한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병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중노동은 계속되었습니다. 뙤약볕 아래에서 삽으로 모세를 퍼 엎는 일을 하던 그는 너무 지친 나머지 이렇게 말하고 삽을 내려놓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못하겠소. 이제는 끝이오. 삽자를 놓는 즉시 감시하는 사람이 와서 나를 사정없이 때리겠지만, 나는 아예 그 매를 맞고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오.” 그리고 매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옆에서 일하던 크리스천 죄수 하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삽으로 모래 위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는 솔제니친이 십자가를 보는 순간 싹 지우고 나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솔제니친은 십자가를 보고 나서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을만큼 힘이 솟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삽을 들어 모래를 퍼나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솔제니친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여러 달에 걸친 중노동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예화를 들고서 옥한흠목사님은 성도들에게 도전합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이처럼 대단합니다. 십자가를 보기만 해도 힘을 얻는데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는 얼마나 클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 선배들이 이미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지고 간다’ 결국 하나님이 능력과 기쁨과 위로를 주셔서 십자가를 거뜬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의 맛을 모르는 것이요. 아직도 어린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보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우리를 사셔서 하나님께 우리를 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나라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큰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힘과 은혜와 기쁨과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 희생과 예수님의 흘리신 고귀한 보혈의 피를 기억하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해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힘과 능력과, 은혜와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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