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22일 설교 (주일 낮)
회복 (시 51:10-17)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성경은 평가합니다.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심각한 죄를 짓고 이후에 그 죄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고 죄 때문에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갈망하며 드린 오늘 시편 51편의 기도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서의 다윗의 면모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다윗이 결정적으로 넘어진 소위 밧세바 사건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왕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고대의 왕의 가장 큰 책무는 전쟁에 나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지자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할 때 내세웠던 이유 중 하나가 이민족과 전쟁할 때 왕의 역할이었습니다. 전쟁을 기획하고 전쟁에 참전하는데 제일 앞장서야 할 왕의 역할입니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전쟁은 주로 긴 겨울의 우기가 끝나는 봄철이었습니다. 봄이 되자 이스라엘과 암몬의 전쟁이 재개되었습니다만 다윗왕은 참전하지 않고 군대장관 요압이 사령관으로 참전했습니다. 이때가 다윗 왕권의 최전성기였고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굳이 다윗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워낙 충성스럽고 용맹한 요압이 전쟁을 승리로 끝낼 수 있을 거라 확신했던 듯합니다. 하여튼 다윗은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적절한 나날을 보내던 다윗은 석양이 질 무렵 지붕 위에 올라가서 백성들의 집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이날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충성스런 군인이요 다윗의 신하였던 우리아라는 사람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그때는 목욕하는 여인이 누군지 몰랐을 겁니다. 자신의 왕궁 사람을 시켜서 누군지 알아보게 했고 그 여인을 궁에 들였습니다. 그리고 범죄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왕궁에 소식이 들이닥쳤습니다. 밧세바가 보낸 사람 편에 임신 소식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이때부터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한 다윗의 잔머리가 발동되었습니다. 한참 최전방에서 전쟁에 참전 중인 우리아를 특별휴가 명목으로 왕궁으로 오게 했습니다. 별로 궁금해하지도 않은 전방 소식을 우리아에게서 듣는다는 이유였으나 오랫동안 전쟁 통에 집에 들르지 못한 우리아를 집에 가게 해서 밧세바와의 불륜의 열매를 덮어버리려는 불순한 의도였습니다. 너무나 충성스러운 군인이어서인지 아니면 예루살렘에 돌고있는 자신의 아내에 관한 소문을 알게 돼서인지 우리아는 자신의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동료들이 전장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자신만 집에 가서 편하게 있을 수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다윗은 술을 잔뜩 먹여서 취하게도 하고 별 수를 다 써보았지만 우리아는 길에서 잘지언정 자신의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이 방법을 포기하기에 이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더 큰 죄를 도모했습니다. 죄라는 게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지어야 하는, 소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죄의 특징입니다. 다윗의 잔머리는 무조건 충성하는 충견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우리아를 전쟁에서 적군의 손에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의 봉인된 편지를 전장에 복귀하는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냈습니다. 다윗의 잔인함입니다.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잔인함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심복으로서 편지를 들자마자 다윗의 의도를 알아챘습니다. 우리아를 죽이되 표나지 않게 처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 우리아를 투입에서 적군과 맞서 싸우다가 우리아를 제외하고 후퇴하여 우리아가 적군의 손에 죽게 하라는 편지의 내용이었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그대로 따랐고 표나지 않게 하려고 우리아뿐 아니라 몇 명의 동료 군사들을 죽게 했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고 요압이 다윗에게 편지로 보고하자 다윗은 우리아뿐 아니라 몇 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죽은 것에 대해 괘념치 말라는 의미로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기 마련이니 이번 일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고 답신했습니다.
우리아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윗이 밧세바를 궁으로 들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밧세바 임신으로 인해 촉발된 위기가 말끔히 해결된 듯 보였습니다. 다윗이 드디어 발뻗고 잠잘 수 있게 된 것일까요? 이처럼 일단락된 것처럼 상황이 종료되었는데 이때 성경은 그동안 다윗이 죄짓는 것을 지켜만보고 계셨던 하나님을 언급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이 일을 말끔히 해결하고 완료했다고 스스로 안전하게 느끼고 종결지으려 할 때 하나님이 나섰습니다. 다윗의 ‘이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했더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지켜보기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서 죄를 다 짓고난 후에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되는 경우입니다. 아예 죄짓지 못하도록 사전에 개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런 경우는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냅니다. 하나님이 자초지종을 나단 선지자에게 알려주셨을 겁니다. 나단은 어찌보면 목숨 걸고 다윗을 찾았습니다. 직접적으로 다윗을 언급하지 않고 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다윗이 편안하게 끝까지 무장해제한 채 듣게 합니다. 마을에 부잣집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양을 보유한 부잣집이었습니다. 반면에 암양 한 마리 밖에 갖지 못한 가난한 집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잣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부잣집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려고 자신의 많은 양이 아니라 한 마리 암양만 가지고 있는 가난한 집의 양을 빼앗아서 자신의 손님에게 대접합니다. 권력과 힘으로 그리한 것이겠죠.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정의의 사도인양 노발대발합니다. 내가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그런 부당한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며 나단 선지자에게 어디에 사는 누가 그런 죄를 지었는지 알려달라고 합니다. 일벌백계해서 정의와 공의를 세워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나단 선지자가 짧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이었을 겁니다. 충격에 망연자실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는 속사포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얼마나 큰 축복을 베풀어주셨는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시고 평강과 번영을 주시기까지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어주셨는지를 일러주었습니다. 부족할 것이 없이 축복해주셨고 설사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간구하면 이것도 저것도 주실 터인데 왜 정욕과 욕심과 탐욕에 이끌려 빼앗았느냐며 책망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범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처사라고 선지자는 책망했습니다. 그리고서 심판을 선고했습니다. 앞으로 영원토록 다윗의 집안에 칼부림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심판의 말을 듣고서 다윗은 핑계를 대거나 자신의 죄악에 대해 발뺌하거나 합리화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고 담백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습니다.” 자백을 했습니다. 밧세바에게 그리고 우리아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를 범했지만 죄는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번 죄의 열매인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생명을 거두어가심으로써 죄의 열매를 회수하셨지만 다윗의 회개로 인해서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상당히 큰 죄 정도가 아니라 죽을 죄, 용서받지 못할 만큼 큰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만 죄의 결과가 두고두고 다윗의 집안에 큰 고통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51편은 표제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붙어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했습니다”라는 죄 고백 후에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과 심정을 담은 참회시를 지었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회개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서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용서해주시고 정결케 해달라고 시 전반부에서 기도한 후 오늘 우리가 읽은 후반부에서는 죄로 인해서 깨어져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요 죄로 인해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신의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와 같이 다윗처럼 심각한 죄를 지은 경우가 우리에게는 아마 없을 겁니다. 심각한 죄는 아니더라도 크고 작은 죄를 짓거나 실수로 발을 헛디뎌 실족한 경우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와 헌신과 열정이 밋밋하고 미지근한 현 상태를 타개하고 예전 하나님과의 첫 사랑의 때와 같이 회복하기를 원하는 심정으로 다윗의 회복의 기도를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찌되었건 중요한 것은 회복입니다. 첫 사랑의 회복이요 거룩함의 회복이요 헌신과 열정의 회복이요 비전과 사명의 회복이요 삶의 의미와 의욕의 회복이요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까? 세 가지를 간구합니다. 첫째, 우리가 읽은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필요합니다. 천지창조 때 처음 창조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기록했던 창세기 1장의 동사가 여기서도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처럼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창조해주셔야 진정한 회복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죄 용서함 받는 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죄 용서함 받고 또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 연약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사슬을 끊고 죄로부터 해방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심령과 영혼을 새롭게하는 창조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정결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의 자아가 새로워질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창조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죄로 인해 넘어지지 않으려면, 그리고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내적 자아가 전혀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새 창조의 역사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러한 진정한 회복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의 심령과 영이 전혀 새로워지려면, 우리의 마음과 영에 새 창조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과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전혀 새로운 새 창조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전혀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전부가 새 창조의 역사로 새로 지음받게 됩니다. 단순히 죄에서 용서받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새롭게 다시 지음 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 받아서 예수님과 연합하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이전에는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인생이었다면 이제는 인생의 항해의 키를 예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인생과 삶의 주체가 되시는 겁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이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워진 우리의 심령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에서 이루신 새 창조의 역사입니다. 이게 진짜 회복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회복을 위해 기도합니까? 둘째, 11절을 보십시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내주가 있었지만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성령이 내주하신 것은 아니고, 또 내주하시되 영구적으로 성령이 내주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직임으로 부르신 사람들, 가령 사사나 선지자나 왕이나 성전 지을 때 기술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내주하셨지만 영구적 내주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다윗의 간구도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성령께서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염려하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주의 영으로 충만해서 지혜롭게 공의로 이스라엘을 그간 다스려왔는데 이번 범죄로 인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이 자신에게서 떠날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 내주하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친밀하게 계시해주심이요 알려주심이요 이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능케됩니다. 만약 하나님의 영을 거두어가심은 하나님 앞에서 쫓아냄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우려합니다.
신약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걱정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혜사 성령, 오순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죄를 짓고 넘어지기도 합니다만 그렇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떠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를 덮어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철수할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과는 반하게 성령을 소멸하게 만드는 죄악을 걱정할 필요는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에서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라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생활에 힘쓰지 않고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충만하게 거하시지 못하고 성령의 영향력과 지배력이 점점 줄어듭니다. 그것을 일컬어 성령의 소멸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다시 동일한 죄로 인해서 넘어지지 않으려면, 전혀 새롭게 지음 받고 전혀 새로운 삶을 살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우리가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받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복을 원하십니까? 지금의 상태로 만족하지 못하고 지금의 상태를 벗어나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친밀해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를 이길 수 있고 무미건조하고 미지근한 신앙상태를 벗어나서 뜨거운 열정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회복이 무엇입니까? 셋째, 12절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힘이 되어야 합니다. 자발적인 마음으로 기쁘게 주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즐거워야 합니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알기에, 어려울 때 도와주시고 위로해주신 하나님의 손길을 알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자원하는 심령에서 비롯되는 헌신이요 섬김입니다. 구원이 너무나 달콤한 소망으로 다가옵니다. 나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기대하게 됩니다. 말씀이 꿀보다 더 달게 느껴져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가슴을 설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것이 회복을 위한 간구입니다.
요한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의 공생애의 제일 첫 번째 표적이 무엇입니까? 표적이라 함은 다른 무엇을 상징하거나 가리키는 신호입니다. 일부러 이 표적을 행하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자신의 참 정체성을 내보이셨습니다. 대중 앞에 첫 선을 보인 것입니다. 어느 경우든 첫 선을 보일 때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기 마련입니다. 어떤 표적이었습니까? 즐거운 잔치가 되어야 할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져 난처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파티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넌지시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소 냉정하게 들리는 대답을 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때’는 늘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때는 곧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입니다. 어머니의 포도주를 청하는 말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처럼 심각하게 자신의 죽음의 때와 연결시키는 걸까요? 포도주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요? 예수님의 대답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옳소이다. 나는 이 세상에 축제의 기쁨을 가져올 수 있고 죄책과 수치로부터 인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나이다. 기쁨을 주러 내가 세상에 왔나이다. 그러나 어머니여, 그러러면 내가 죽어야 하나이다. 내 백성이 기쁨과 축제와 복의 잔을 마시려면 내가 죽음의 잔을 마셔야 하나이다”
이 첫 번째 표적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시작하신다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사역의 목적은 축제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잔치의 주인이니 결국 기쁨을 주로 왔노라 그래서 나의 정체를 드러내는 행동이자 첫 기적은 바로 만인에게 웃음을 주는 일이니라 나를 믿는 이들은 지금부터 기쁨의 강물을 마음에 품고 그 기쁨의 첫맛을 보리라 그 맛은 한없이 고달프고 메마른 시대에 생수처럼 깊은 위안과 새 힘을 주리니 결국 나는 그것을 주러왔노라 그래서 이것이 나의 첫 표적이니라”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축제의 기쁨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이땅에 오셨고, 이를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믿는 이들의 부활을 이루어 우리의 모든 악과 사망과 눈물을 그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인생질문>, 팀 캘러 저, 93-117쪽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를 모르면 예수님이 주시는 참 기쁨과 구원의 즐거움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씻어야 할 얼룩과 죄책과 수치가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회복은 이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이러한 진정한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므로 이 회복을 경험하고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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