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21일 설교 (주일 낮)
비틀거리는 인생에게 (암 8:11-14)
이 책에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통념을 깨뜨립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진보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서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대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세계상이 실은 사실이 아님을 이책은 보여줍니다. 이러한 편견을 실제 사실적 통계로 깨뜨리는 책입니다.
이 책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독자에게 13가지 질문에 대해 답할 것을 요구합니다. 세계에 관해 기초적인 정보를 묻는 어렵지 않은 질문입니다. 이중 2가지 질문만 제가 내보겠습니다.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문제입니다. 1번은 거의 2배로 늘었다. 2번은 거의 같다. 3번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다. 여러분들은 정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세계에 이 문제를 내놓고 정답률을 통계내보니까 정답률은 평균 7%였습니다. 정답은 3번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예상과는 달리 지난 20년간 인류는 커다란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극빈층 비율이 절반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또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 1세 아동 중 어떤 질병이든 예방접종을 받은 비율은 몇 퍼센트일까?’ 1번 20%, 2번 50%, 3번 80%. 정답이 뭘까요? 전 세계 사람들의 평균 정답률은 13%입니다. 정답은 3번 80%입니다. 현존 인류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본 보건 의료서비스를 어느 정도 받고 있는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들도 일반인들과 결코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침팬지보고 선택하라고 했을 때 아무 생각없는 침팬지들의 정답률은 확률적으로 1/3, 약 33%가 나왔습니다. 침팬지보고 바나나에다 1,2,3을 써놓고 문제를 크게 읽어준 후 바나나를 집어들게 했을 때 그들이 맞춘 정답률은 평균 확률적으로 1/3이 나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찍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 적극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가리켜줍니다. 사람들이 심히 왜곡되게 부정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실제보다 더 무섭고 폭력적이며 가망 없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통계는 이 세계가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사실에 근거한 세계관입니다. 그러면 왜 그럽니까? 왜 사실보다 왜곡해서 부정적으로 이 세계를 바라다보고 있게 된 걸까요? 이 책의 저자는 뇌의 본능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우리 뇌가 자극적이고 극적인 정보에만 귀를 기울이는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느낌 탓이라는 겁니다. 사실이 아니라 느낌 때문에 뇌가 그렇게 편향 인식을 유도한다는 겁니다. 세상이 나빠 보이는 건 부정적이고 드라마틱한 것을 크게 보는 뇌의 본능 탓이라는 해석입니다. 물론 이에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것들을 주로 보도하는 언론의 영향도 있겠죠.
이 책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와 아들 세 명이 함께 지었습니다. 시아버지 되는 분이 스웨덴의 보건학자요 의사이고, 이분의 아들 며느리는 구글에서 시각적인 정보를 구현하는 일을 하던 분들입니다. 이 셋이 함께 썼다기보다 시아버지의 견해와 사상을 아들과 며느리가 시각적 차트와 그래프로 구현해낸 책입니다. 이 저자 중 한 사람인 며느리가 최근에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기자가 질문했습니다: “대한민국 청년들은 한국을 ‘헬조선'이라고 불렀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실충실성의 관점에서 당신이 본 한국은 객관적으로 어떤 모습입니까?” 대답입니다: “한국은 최상위층입니다. 소득 수준과 건강 위생 보건에 따라 4단계로 분류했는데 이들 국가 중에서도 한국은 굉장히 건강하고 부유한 나라지요. 하지만 유럽 국가들에 비해 한국은 짧은 시간에 급속도의 발전을 이뤘어요. 한 세대가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자동차로의 진보를 모두 겪었습니다. 그 빠른 속도에 비해 청년 세대는 지금의 상황이 답답하고 정체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어요. 여느 국가들처럼 경제 성장은 통상 행복을 증진하지만, 어느 시점에선 멈춥니다. 한국도 물적 진보보다 가치 지향적인 행복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거죠.” (조선일보 2019.713)
우리나라는 경제나 외적 환경에 있어서는 세계의 탑 클래스로 올라섰지만 아직 물질적 가치를 벗어나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진단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가치가 필요할까요? 무엇이 우리 인생의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질문에 답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나 유명한 아모스서 8장 11절입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물질적 굶주림과 목마름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는 영적인 굶주림과 영적인 목마름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양식과 영의 음료를 먹어야 영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강조하듯이 인간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이 문제는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진작에 해결됐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요?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많고 교회도 이처럼 많고 TV만 틀으면 수많은 방송에서 설교 방송이 흘러나오는데, 왜 아직도 목마르고 왜 아직도 굶주려 있는 걸까요?
아모스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여로보암 2세 치하는 성경에서는 극히 짧게 극히 부정적으로 진술되었습니다만, 실은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거의 회복할 정도로 강대한 시대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부국강병책으로 국가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때였습니다. 여로보암 2세의 치세 기간인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대외적으로 확장되었고 경제적으로 번성했습니다. 종교활동도 활발해서 종교활동에 참여하는 북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북이스라엘의 여러 거점 성소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종교제의에 참여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에 경제가 흥한 만큼 종교적 열심히 가득했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이 성소를 순례하며 열심히 제의에 참여했고 소위 하나님섬김이 참 많았고 번성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말씀은 실종되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섬김이 이름은 하나님섬김이었지만 실제는 그들의 욕망 숭배, 그들의 탐심 숭배였습니다. 한마디로 우상숭배였습니다. 활발한 종교활동과 제의에 참여하고 열심 가득하여 중요 성소를 순례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듯하나 결국은 우상숭배였습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우상에게는 막대한 재물과 정성을 바치면서도,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히려 종교에서 얻은 힘과 확신을 가지고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제하고 탈취하려는 본성이 드러나는데 아모스선지자 시대가 바로 이러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 심판은 여호와의 말씀의 기갈로 나타났습니다. 말씀의 기갈이란 하나님의 현존의 부재요 하나님의 임재의 철수요 하나님을 예배 현장에서도 만날 수 없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줄 제사장과 예언자의 부재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습니다.
본문 12-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쪽에서 동쪽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쓰러지리라”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돌아다녀도 찾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쓰러지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비틀거리다’는 말은 물을 마시지 못해 죽을 지경에 처한 자들이 거의 죽은 자처럼 비틀거리며 본능적으로 물을 찾아 어디든 힘겹게 거의 기어가듯 갈지자처럼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렇게 지치고 탈진하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입니다. 심지어 젊은이들, ‘처녀와 젊은 남자’들도, 이때가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활력이 많을 때고 건강할 때인데도 그들 역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인해서 삶이 메마르고 탈진한 채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요엘서 2장의 말씀과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선지자 요엘이 보았던 환상은 무엇입니까? 그날에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시면 특히 젊은이들이 꿈과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죠. 이것과 정반대되는 모습입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촉구하는 참된 회복이란 무엇입니까? 아모스서 전체에서 울려퍼지는 질타는 무엇입니까? 일상 생활에서 정직한 도량형을 쓰고서 경제활동을 해라, 100g 추는 말 그대로 100g 이어야지 어떤 때는 80g으로 어떤 때는 120g 되면 되겠냐는 겁니다. 정직한 상거래와 정직한 도량형을 강조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의 것을 탈취하지 말라, 정당한 거래를 하고 정당함 임금을 지불해라는 것이었고, 시장에서 음식 파는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팔아라, 자기도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속여서 팔지 말고 자신이 먹을 수 있도록 만든 음식을 내다 팔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모스선지자가 제시한 진정한 회복은 종교적 열심을 내거나 종교제의라는 제도에 참여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정의와 공의를 일상해서 행하는데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야 다시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찾을 것이요, 그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요, 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배 현장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땅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땅에서 살면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어디서, 어떻게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정답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삶의 목적과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소명과 사명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가치 있어지고 삶이 올바른 방향에 들어서게 되어 비틀거리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예전에는 말씀을 분류해서 객관적인 지식 체계와 진리 체계로서의 말씀 곧 ‘로고스’와, 주관적으로 오늘 내게 주시는 결정적인 말씀 곧 ‘레마’로 나누었습니다만, 신학자들은 두 단어가 생각만큼 뜻이 나뉘어지지 않고 오히려 교대로 쓸 수 있는 단어라는 공감대를 얻고 있습니다만, 꼭 그 단어들은 아니더라도 객관적인 교리적 체계적 말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말씀, 평생 붙들고 달려가야 할 소명의 말씀, 바로 그 ‘레마’의 말씀 역시 그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소명의 말씀을 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인간은 영적 기갈에 빠져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자기 영혼을 소생케 해줄 무언가를 찾아나서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저마다 방황하게 됩니다. 시인 이상이 말했듯이, “모든 절망이 기교를 낳는다. 그러나 그 기교 때문에 더더욱 절망하게 된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받지 못한 인생의 현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만이 인간의 영적 기갈을 해갈시켜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서만 살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영적인 허기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이요, 인생의 목적과 의미 곧 소명이며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을 알려주는 말씀을 먹어야 우리가 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에 빛이 된 말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17명의 목회자들의 간증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이들 목회자들이 절망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소망 가운데,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간증이 담긴 책입니다. 이중의 한분의 간증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명성훈목사라는 분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님 밑에서 교회성장연구소를 조직하여 오랫동안 섬겼고 이후에는 분당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목회를 잘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분의 간증은 이분 자신의 간증이 아니라 이분 아버지에 대한 간증 기록입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황해도 분이신데 한국전쟁 때 월남하셨습니다. 전쟁 후 서울 마포나루 공덕동에 자리를 잡고 사탕 가게를 하게 되었습니다. 장사가 잘 돼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당시 전쟁 직후 어려웠던 시절인데도 정원이 있는 집에 살았고, 이분은 하얀 스타킹을 입고 유치원에 다녔을 정도로 집안이 부유했습니다. 가게가 잘 되자 아버지는 아예 사탕공장을 세웠는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정원 딸린 큰 집에서 살던 여섯 식구가 하나의 리어카에 단촐하게 생필품 몇개만 싣고 온 가족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정착지는 도화동 판잣집이었습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삶의 용기를 잃고 희망도 없이 절망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온가족이 단칸방 생활을 했습니다. 항상 진취적이고 쾌활하게 사업하던 아버지는 좁은 방구석에서 매일 술만 마시며 자신의 인생을 저주했습니다. 올망졸망한 4남매를 데리고 어머니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명성훈목사님이 유치원 나이였던 그 시절에 동네 아저씨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목사님은 재밌게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가족은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학교 끝나고 집에 갔더니 어머니가 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위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의사의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이 때만 해도 암 판정 받으면 바로 죽는 줄 알고 또 거의 다 죽었던 시절입니다. 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사나?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속으로 생각하며 오히려 마음을 다잡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순복음교회에서 아픈 사람들이 많이 치유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한걸음에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매일 술로 지낸 아버지가 교회를 들어선 날부터 술을 딱 끊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첫 전차를 타고 새벽기도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주로 표어처럼 내거는 말씀을 그때부터 듣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주로 들은 말씀은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는 사도요한이 기록한 요한삼서 2절 말씀이었습니다. 이 가족이 순복음교회에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씀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절망하면서 저주하면서 살아왔는데 교회에 와서 뜻밖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 뜻밖의 말을 들으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라는 말씀이 뜻밖의 말이었던 게 사업 실패 후 생을 저주하며 술만 먹고 버림받은 것처럼 살아온 인생인데 교회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받은 자녀라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여'라는 이 말씀이 이분의 아버지를 살렸습니다. 당신의 삶이 저주받은 게 아니라 사랑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에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그동안 잃었던 '마음의 힘'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살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힘'을 되찾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몸이 회복된 것입니다. 병이 낫자 아버지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집안에서 종이박스를 만드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종이나 박스를 받아오면 가족 모두가 달라붙어서 좁은 단칸방에 둘러앉아 힘차게 찬송가를 부르며 박스를 만들었습니다. 매일 둥글게 모여 단칸방에서 가정 예배를 드렸습니다. 훗날 아버지는 박스 공장을 세워 재기에 성공하기에 이릅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기를 간구'한 요한의 기도가 이 가정에서 현실이 된 것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사탕 가게와 공장이 잘 운영되었을 때 아버지가 믿었던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 돈을 모두 잃었을 때, 이분은 운명을 탓하고 자신의 생을 저주했습니다. 돈이 사라지자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것이죠. 그런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는 진정한 영혼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 마음으로 '예'라고 응답하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간증은 비틀거리던 인생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고 소생하게 된 생생한 간증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을 겪은 인생들은 모두가 비틀거리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지만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던져주십니다.
신약성경을 쓴 기자들은 위로부터 내리는 말씀 곧 “여호와께로부터 온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예수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라는 분의 인격, 예수라는 분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요한복음)이라고 부릅니다. 왜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전달하신 궁극적 말씀이요 결정적 말씀이요, 그리고 최후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최후의 말씀’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땅에 오심, 그분이 선포한 천국,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 승천하시고서 성령을 보내심, 이 모든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인격과 그분의 생애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맞이함으로써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가까이 다가옵니다. 가까이 다가와서 ‘너희가 용납되었다!’, ‘너희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다 사해졌다!’,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는 복음의 말씀 앞에서 비록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불경건한 자로 남아있는 우리지만 우리가 그 복음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고서 “예”하고, “긍정”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나 예배 현장에서 입을 크게 벌려 “예”(아멘) 해야 하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을 맞아들여야 합니다. 마음문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안산제일교회를 오랫동안 시무하시고 은퇴하셔서 원로목사님으로 계신 고훈목사님의 간증에 관한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지금은 성남 선한목자교회를 섬기시는 유기성목사님이 예전에 안산에서 목회하실 때 지근거리에 있던 교회가 안산제일교회였습니다. 유기성목사님이 쓴 고훈목사님에 관한 간증입니다. 고훈 목사님은 젊은 시절에 폐결핵으로 오래 고생하시다가 고침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한참 부흥되던 어느 날 병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병이니 아무도 곁에 오지 못하도록 교인들은 물론 장로님도 사모님도 병실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 아무도 오지 않자 버림받은 것 같고 자신이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요동하고 너무 두려웠다고 합니다. 어느 날 자다가 새벽 2시쯤 깼는데 둘러봐도 병실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의 마음에 ‘아,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은 정말 하나님밖에 없구나’ 이 사실이 깨달아지더랍니다. 아내도 아니고 장로님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결국 나의 힘이 되어주시고 나를 살려주실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깨달아져서 곧바로 병원 침상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일을 못하고 여기 이렇게 누워 있으니 어떻게 합니까?” 정말 교회가 한창 부흥이 되고 있는데 목사님이 덜컥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교인들은 물론이고 목회 걱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일 하지 마라. 내 일은 내가 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내 일은 내가 한다. 너는 예수로만 가득 채워라.” 그날 목사님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두려운 마음, 섭섭한 마음, 걱정되는 마음을 모두 예수님께 맡기고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1년간 요양하며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서적을 읽으면서 주님만 바라보며 지냈다고 합니다. 물론 설교도 안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만 마음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 후로 주님이 하신 그 말씀이 목사님의 목회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너는 일하지 마라. 일은 내가 한다. 너는 예수로 가득 채워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 곧 복음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누적된 죄악의 세상을 끝장내고자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새 생명에로 이끄셨습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 사건에 우리는 믿음과 세례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한 우리가 또한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께로부터 온 말씀’이 있습니까? 지금 이곳에 있는 여러분 자신을 위한 말씀, 그리고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를 위한 말씀, 그 말씀이 바로 복음의 말씀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공로를 힘입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분이 우리 인생의 소명이요 사명이요 인생의 목적이요 방향입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문을 활짝 열어 그분을 영접하심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방황을 끝내고 비틀거리는 인생이 아니라 정신 차린 인생,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생명으로 충만한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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