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14일 설교 (주일 낮)
백합화와 백향목 같이 (호 14:1-9)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믿음, 생명력 있는 믿음, 삶의 열매를 산출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와 교통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이 성경대로 잘 이루어지고만 있다면 생명이 자라고 풍성해집니다.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뒤따릅니다. 거룩함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올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1절)고 외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지금까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불의했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이 엎드러졌고, 국가적 위기를 당하고 있으니 모든 문제의 근원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놓이지 못한 탓이라는 진단과 더불어,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언약 백성 삼아 주셨는데, 그 언약 관계에 이스라엘이 충실하지 못한 것이 곧 그들의 ‘불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의했다는 것은 불충했다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잘 가꿔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탄났다는 겁니다.
파탄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권면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복구할 수 있을지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했던 수많은 약속과 다짐의 말들, 그리고 너희가 걸어온 그릇되고 불의 삶에 대한 진실한 고백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동안 보였던 모든 불의는 거두어주시고, 대신 지금 하나님께 나온 것 자체, 즉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보이는 선을 취하소서’라고 고백하며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 입술로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불의와 죄악과 어리석은 삶은 하나님이 거두어 치워주시고, 지금 하나님께 나아온 진실한 돌이킴을 취해주십시오”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황소를 드리는 동물의 제사가 아니라 입술의 진실한 고백으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술의 열매”를 가지고 주께 나아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황소의 제사를 그토록 많이 드렸지만, 칼빈의 표현대로 하면 주일이 되면 되도록 교회 예배에 참여했던 명목상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리고 말씀대로 산다고는 하나 진짜 속내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행하지 않은 외식하는 신앙인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며 진실한 입술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다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참 믿음으로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황소 제사가 아닌 진실한 입술의 제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져야 할 것인지 이어지는 3절이 알려줍니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 호세아 선지자는 그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줄기차게 그들의 어리석은 행실을 고발했던 세가지가 여기서 반복됩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을 의지했습니다. 국가적 위기를 열강의 도움으로 해소하려고 했고, 비상한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믿음이 없었던 거겠죠. 하나님 대신에 어느 때는 앗수르를, 또 어느 때는 애굽을 의지해서 돌파하려고 했습니다. 어느 때는 자신의 국방력과 자신의 힘을 의지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이 좀 강하다고 생각되면 어김없이 자신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경제환경이 좀 좋아지고 형편이 나아지면 그것을 든든하게 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하니까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부담스러워 종교성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우상을 만들어서 섬겼던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와 같은 이전의 어리석은 행실을 이제는 뒤로하고, 이러한 어리석은 행실 때문에 지금 처한 형편이 마치 아무 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도움 받을 길도 없는 마치 ‘고아’와 같은 형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서, 오직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심만을 바라겠다고 고백하며 여호와께로 돌아가라는 선지자의 외침입니다. ‘고아’는 이스라엘이 당한 참담한 상황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형편이 지금 고아와 같다는 겁니다. 고아와 같아서 오히려 다행입니다. 하나님은 성정 상 고아와 같은 이를 결코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같은 이스라엘을 홀로 두지 않으시고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이 강하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들의 재물이 의지할만 하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황소의 제사를 풍성하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려 아무 것도 붙잡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는 고아와 같은 처지에 이르자 하나님을 비로소 바로 알게 되는 겁니다.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이 있는 겁니다. ‘내가 고아와 같다’는 이러한 생각이 오히려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아와 같은 상황에 처한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에 빠져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고아와 같은 우리를 보살피며 도우시는 분임을 깨닫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고백,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러한 고백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이스라엘이 지니고 있어야 할 입술의 열매요 입술의 제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와 같은 이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요, 그간 우리가 어리석게도 열방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과 재물을 의지하고, 하나님보다 우상숭배에 빠져 지냈음을 회개하면서 오직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만을 신뢰하겠다는 입술의 고백이요 입술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입술로 잘못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바라며 나아올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주실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가 그들의 반역을 고치고 기쁘게 그들을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그에게서 떠났음이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하나님은 외면치 않으시고 사랑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진정한 돌아섬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이 어떠하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패역한 마음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이 마음을 고쳐먹고 회개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돌아서면 하나님이 고치셔서 회개하게 되는 겁니까? 존 칼빈은 회개도 믿음의 열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하나님이 친히 고쳐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진술한 입술의 고백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고쳐주시는 겁니다. 반역이 고쳐지고 우리의 마음이 바로잡혀야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사랑해주시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친히 고쳐주시고 우리로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간 자신들의 어리석었던 삶의 길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마치 자신이 지금 고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입술의 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기쁘게 사랑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진정한 회개도, 진정한 돌이킴을 일으키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고아와 같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아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궁극적으로 변화시켜주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요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이것이 호세아가 그토록 강조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작은 한 걸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작은 한 걸음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받으시고 큰 걸음으로 나아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이슬’과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행하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소생시켜주시고 생명력으로 충만케 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슬처럼 행하시는 여호와로 인해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생명이 무럭무럭 자라고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른비와 늦은 비 사이에 계속되는 건기에 유일한 생명의 근원은 이슬에 있습니다. 이슬이 내려서 농작물이 자라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이 되어주셔서 이스라엘을 소생시켜주시고 생명력 있는 신앙의 성장을 가져다주시겠다는 겁니다. 이슬 같은 여호와로 인해서 있게 될 생명력은 이스라엘이 마치 “백합화”와 “백향목” 같이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풍성한 이슬을 머금고, 여호와 하나님이 내리신 은총을 머금고서 백합화처럼 피어날 것이요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백합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뿐 아니라 백향목처럼 든즌하고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이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힘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배후에 이슬 같은 생명력으로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은 진정 매력적인 꽃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나는 꽃으로 피어날 것이요, 하나님이 인생의 든든한 배후가 되는 뿌리를 견고하게 내린 백향목처럼 안정될 것입니다.
신앙의 힘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향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온유한 성품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백합화 같은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동치 않는 굳건한 토대 위에 뿌리를 내린 백향목 같은 견고함과 안정성이 있습니다. 죽음조차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게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피난처 삼는 인생에게 하나님은 친히 산성과 요새가 되어주십니다. 이보다 무엇이 더 안전하고 견고할 수 있겠습니까.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내가 그를 돌아보아 대답하기를 나는 푸른 잣나무 같으니 네가 나로 말미암아 열매를 얻으리라 하리라” ‘잣나무’는 레바논의 영광이라 일컬어지는 나무의 하나로서 화려하고 풍성함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성전을 짓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푸른 잣나무와 같다’는 말은 하나님이 늘 이스라엘과 함께 해주셔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풍성한 열매를 얻게 해주실 거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마치 이슬과 같으셔서 이슬 같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백합화처럼 피어나고 백향목처럼 뿌리를 내릴 것이며, 풍성한 인생의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구에게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 외에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어진, 마치 고아와 같은 처지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로서 고아와 같은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처지가 마치 고아와 같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슬과 같으셔서 놀라운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영화의 실제 주인공 새빛맹인선교회 안요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은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 목사님과 어머니의 신앙에 반항하는 아이었습니다. 어려서 이분의 원수는 하나님이었다고 합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어서였습니다. 그래서 종이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느니라(안요한 복음1장1절)''라고 쓰고서 벽에 붙여놓았을 정도입니다.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 자력으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진작에 멀리 떠났고 나이가 들어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유학을 가려는 오랜 꿈을 가지고 이제 유학을 가려고 하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가기 전에 눈이 흐려지더니 37살 때 실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눈이 실명이 되는데 뚜렷한 병명이 없었습니다. 안과 병원을 여러군데 다녀봤지만 안과 의사도 왜 실명되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아무 병명이 없이 눈이 깜깜해 지는 거예요. 전국을 헤매면서 눈을 고쳐 볼라고 했는데 아무 소용도 없었어요. 눈이 멀게 되자 아내도 아이도 다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보다가 안보이니까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눈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하였습니다. 죽고 싶어 집에서도 죽으려고 여러차례 시도해보았지만 죽지 못했습니다. 육교에서 떨어져 죽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뒤에 붙잡고 있는 듯하여 뒤로 손을 훌쳐 봐도 아무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잡으신 것이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눈 먼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 버림 당한 것이 제일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서 슬픔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구약성경 320쪽을 펴보아라"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 320쪽은 여호수아 1장이었습니다. 펴서 읽어본 구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1:9)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후 이분은 집을 나와서 물 흐르듯 흘러가서 어느덧 서울역에서 노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역의 노숙생활은 모든 불만이 감사로 바뀌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약속하였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만난 하나님만을 증거하며 살겠습니다" 서울역에서 구두 닦이, 넝마주이 등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도 가고 잠도 잘 수 있었습니다. 껌팔이, 구두딱이, 거렁뱅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끈끈한 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구두닦기 소년들이 가장 부러워 하는 것은 교복입은 아이들이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의 아이들도 꿈이 있었던 거예요. 학교를 다니고 싶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싶어하는지 교복을 사놓고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결심했습니다. 이 밑바닥의 아이들을 위해서 이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자, 이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의 복음을 심어 주자, 그렇게 해서 나중에 교육을 못받은 아이들을 위해 야간학교를 개설하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꿈을 이루게 되었고 나중에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가능했던 신학공부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분의 결론적 고백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은 강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십시다. 하나님만 의지합시다. 하나님만을 신뢰합시다. 우리를 고쳐주시고 치유해주실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삽시다! 우리는 빈손들고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바로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하며 나아갑시다. 이슬 같은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총과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주셔서, 우리로 백합화 같이 다시 피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백향목 같이 다시 견고하게 세워주실 것입니다. 푸른 잣나무와 같이 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 인생에 다시 풍요로운 열매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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