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16일 설교 (주일 낮)
새로운 아침을 맞으려면 (애 3:19-33)
그의 마음에는 분노로 가득찼습니다. 그는 공격적이고 분노에 찬 사람이었습니다. 인종차별이라는 인류의 거대악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악명 높은 로벤 섬 감방에서 혹사당함으로 인해서 분노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갔습니다. 침대도 없고 맨 바닥에 얇은 천만 깔고 잠을 자야 했고, 낮 동안에는 채석장에서 노역을 해야 했습니다. 바위를 부수는 의미 없는 일이나 종이봉투를 바느질하는 일 등을 자주 했습니다.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웠던 그에게 감옥에서도 인종차별을 당했습니다. 인종에 따라 식사의 배급량이 달랐던 것입니다. 유색인종 아시아인보다 아프리카 반투족은 더 적은 고기를 배급받고, 더 적은량의 식사를 배급받았고, 잼이나 달짝한 시럽은 아시아인들이나 백인들에게 주었지만 반투족에게는 주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서 그는 분노에 가득찼습니다. 분노에 가득찬 채 절망 가운데 수감생활을 하던 그에게 하나님이 어느 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독실한 감리교신자였습니다. ‘너는 이곳에서 27년을 지낼 것이야’
얼마나 절망했을까요?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겁니다. 감옥에 갇힌 것도 화가 나는데, 백인들에 대한 증오가 치밀어 오르는데, 감옥에서까지 차별 받고 의미 없는 일에 육체를 다 소진해야만 하는 이러한 감옥생활이 앞으로도 27년간 지속된다니, 얼마나 고통이 컸고 절망스러웠을까요? 이러한 분노로 가득찬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이 더 힘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거의 미칠 것 같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 절망의 상황 속에서 넬슨 만델라는 자신의 관심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고 묻는데 마음속에 들리는 소리가 ‘용서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용서해야 네가 산다. 용서해야 그 사람들이 산다’, 만델라는 결국 그런 마음의 소리에 항복하고 용서를 마음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만델라에게 도움의 손길을 허락하셨습니다. 한 감옥 간수의 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감옥에 들어와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데 그 공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생활 중에도 평화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27년을 지낸 후 그는 더욱 큰 아량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겪은 고난이 그로 성장하게 했습니다. 분노에 가득찼던 그가 인정 많고 배려심 많고, 적들도 포용하고 신뢰할 준비가 되어서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27년간의 감옥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이전보다 건강해졌고 마음도 병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감옥에서 살아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는 고 고백합니다. 감옥에서 나올 때 그의 나이는 72세였습니다. 출옥 후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급기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대통령이 되고서 그전에 당한 것을 되갚고 보복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인물로 남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우리의 어둠이 아니라 빛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누구기에 이토록 눈부시고 화려하고 재능 있으며 또한 탁월하단 말인가?’ 그렇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기 자신을 보잘것없게 여기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움츠러들어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식견 있는 태도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태어났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다.” 이렇듯 놀라운 신앙의 힘으로 절망을 극복하고 소망의 아이콘이 되었던 그도 잠깐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적이 있슶니다. 그가 27년 간의 복역생활을 마치고 감옥에서 나오던 날, 석방되던 날이었습니다. 세계가 이 일을 주목하였습니다. 심지어 TV에서 생방송으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TV를 시청했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당시 미국의 아칸소 주지사로 있었던 빌 클린턴이었습니다. 클린턴은 감옥에서 걸어 나오는 만델라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감옥문을 나서자마자 환호하는 군중들이 그를 둘러쌌습니다. 그때 TV에 잡힌 만델라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클린턴이 보기에 만델라의 얼굴이, 그러나 순간적으로 분노의 표정이었습니다. 클린턴은 깜짝 놀랐습니다. 화해와 용서의 사도요, 적까지 포용했던 온화한 만델라에게서 순간 지나가기는 했지만 분노의 표정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클린턴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됩니다. 정상회담을 할 때 클린턴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만델라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원망과 보복과 분노할만한 상황에서도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감옥에서 나올 때 어떻게 순간 분노가 스쳐지나가게 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잘못 보았나요?” 만델라는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군중들의 함성을 듣는 순간, 27년의 세월을 강탈당했다는 느낌과 더불어 울화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그런 순간을 느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오르던 바로 그때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내 귀에 말씀하셨습니다. '넬슨아, 감옥에 있을 동안에는 자유로웠는데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 군중 속에서 다시 감옥으로 들어갈 것이냐?' 감옥에서 자유했던 내가 군중 가운데서 분노로 인해서 부자유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 아닌 내가 나를 지배하고, 나 아닌 어떤 나에게 끌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의 삶은 이것을 고치고 버리고 화해와 평화의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는 그런 시간이 있었습니다.”
분노와 용서, 절망과 소망은 순간 교차되기도 합니다. 분노가 용서가 되기도 하지만 용서했던 마음이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화염이 되기도 합니다. 절망을 잘 극복하고 소망 가운데로 나아온 것 같은데 우리 마음은 늘 변덕스러워서 다시 절망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러한 소망과 절망의 관계가 생생하게 담겼습니다. 소망이 끊어지고 고통과 절망 가운데 사로잡혀서 지내던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순간 소망으로 나아올 수 있었던 절망과 소망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군대에 함락당하고 성전은 파괴되고 예루살렘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참상을 겪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오늘 본문 바로 전절 예레미야 애가 3장 18절에서 화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아무런 소망도 없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9절과 20절에서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라고 말씀합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끔찍한 참상이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고 마음속에 기억된 바가 되어서 좌절케되고 낙심케되고 모든 소망이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처절한 절망이요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런데 돌연 듯 갑자기 이 사람이 소망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21절입니다.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21절) 마음에 무언가를 담았더니 절망이 떠나가고 소망으로 나아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마음에 담아둔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후 22-24절에 나오는 세가지입니다. 이 세가지를 생각해보고 그것들을 마음속에 담게 되다 보니 절망은 사라지고 샘솟듯 소망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예루살렘 함락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살아 남은 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의 크심을 생각해내었던 것입니다. 진멸되지 않고 살아 있다는 여기서부터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재난이 닥치고 참상이 훑고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나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물론 고통 중에 신음하고 절망 가운데 처해있지만 날입니다. 자신이 생존하게 되었다는 그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겠냐는 겁니다. 대재난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지금 비록 고통스러워 한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여기 존재한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생각해낸 것입니다. 죽지 않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환경은 다 죽었고 심지어 성전도 죽었지만 그리고 간혹 이웃도 죽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다는 사실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절망 가운데 소망의 꽃을 피워낼 수 있는 시작입니다. 사태를 어떠한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소망의 싹이 어떻게 자라날 수 있습니까? 이어지는 23절을 보십시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인자’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언약에 신실하시고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긍휼’은 ‘자비로운’을 뜻하는 히브리어 ‘라훔’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긍휼’은 히브리어로 ‘레헴’인데요, 원래 뜻이 ‘자궁’, ‘태’,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존재하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 대한 사랑을 끝가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오,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주시고 돌보아주시는, 자녀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타락하고 부패한 영혼까지, 마치 자녀를 사랑하는 엄마처럼, 사랑하고 돌보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이란 모성적 애틋함으로 생명을 잉태하고 자녀를 품고 지켜내고 인내하고 희생하며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자비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들,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겁니다. 다함이 없고 소진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얼마나 성실하신 분입니까? 매일 아침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찾아오시되 무한한 사랑과 긍휼로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 그렇게 새로운 아침을 맞게 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성실입니다. 하나님의 끈기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성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인자와 긍휼과 성실, 이것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이요 가장 두드러진 인격적 특징입니다. 특별히 참상을 겪고서 고통 가운데, 재난 가운데 아무런 소망도 없이 새날을 맞이해야 하는 화자가, 날마다 인자와 긍휼로 새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마음에 생각해보니 소망이 생겨나는 겁니다. 소망의 싹이 이제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올해로 백세를 넘기고 101세가 되신 김형석교수님의 신문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철학의 벗이었던 안병욱선생과 자신이 인생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인격의 핵심은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가장 인격다움, 인격의 핵심이 사람의 성실이라는 것입니다. 성실한 사람이 가장 인간다운 사람이요 이것이 인간의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실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성실의 근거가 되고 지향점이 되는 겁니다.
인자와 긍휼로 매일 새롭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것도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느끼고 겨우 존재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인생들에게 매일 그 무한하신 사랑과 돌보심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처럼 성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보니 이제 살아갈 용기가 생기고 절망이 소망으로 전환되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망에서 소망으로, 그 세 번째 단계는 24절에 나옵니다.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인자와 긍휼이 크시고 성실하게도 매일 그 크신 인자와 긍휼로 자신을 찾아오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을, 그래서 소망하고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여호와를 나의 기업 삼고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기업’이라는 말은 원래 각 지파에게 할당된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업’은 ‘유업’이라는 말이나 ‘분깃’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됩니다. 그런데 12지파 중에서 특별히 레위인은 땅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땅 대신 하나님을 그들의 기업으로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신명기 10장 9절입니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그의 기업이시니라”
이제는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도록 크신 인자와 긍휼로 새롭게 찾아오시는 성실하신 하나님을 ‘나의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고 일어나겠다는 겁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겠다는 것이요 새로운 아침을 그렇게 맞이하겠다는 겁니다. 참상 가운데서도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살아계셔...’,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고 내 인생의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고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다리겠다는 겁니다. 하나님만을 소망하겠다는 겁니다.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소망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내 마음에 담게 되니 절망에서 벗어나 소망으로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비록 참상을 겪었고 지금도 고통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여전히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 이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는 징표가 됨을 생각해보는 겁니다. 절망 가운데 처하면 아침에 일어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쉽지 않습니다. 다시 절망 가운데로 기어들어가는 거니까 일어나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싫습니다. 그래도 다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이유,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이유는, 인자와 긍휼로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께서 아침마다 새롭게 나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다른 전혀 새롭고 무한한 인자와 긍휼로 다시 나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의 성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절망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매일 그러한 하나님, 소망의 하나님을 기다리고 바라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나의 영원하신 기업으로 삼고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역사하심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비로소 절망은 끝이 나고 소망의 미래가 열리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은 밤의 고독과 외로움과 슬픔과 절망을 뒤로 한채 새로운 아침을 맞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을 기다리고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찾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25-26절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시편 30편 5절에서도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붙잡고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든 소망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둔밤 지나서 동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주 예수의 나라 이땅에 곧 오겠네 오겠네" (찬송가 516장 중)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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