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2일 설교 (주일 낮)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자 (눅 11:5-13)
주간조선에 연재되는 <과학연구의 최전선>이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한국의 과학자 중에서 세계적 수준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분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연구동향과 연구결과 등을 설명 듣고 전해주는 연재물입니다. 언젠가 서울대 물리학과 정성훈교수의 최신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가 정성훈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물리학자로서 모르는 게 무엇인가? 알고 싶은 게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대답입니다: “자연은 왜 이리 복잡한가? 하나의 방정식으로부터 이렇게 복잡한 현상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별로 길지 않는 단 한 줄의 수학의 방정식으로 우주를 기술할 수 있는데 그 공식에서 생겨난 우주 삼라만상의 복잡함과 다양함이 신비스럽다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에도 공식 혹은 공리 같은 게 있습니다. 그 위에 모든 인생을 담아낼 수 있고 다양한 삶의 기반이 되는 근본과도 같은 공식입니다. 이 공식도 수학 공식처럼 단순합니다. 몇가지가 안됩니다.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로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셔서 주 예수라는 것,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 단순한 진리와 소박한 사실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인생의 파고가 다가오고 복잡한 현상에 마주하게 되더라도 이 근본 진리 위에서 다 해석될 수 있고 수용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 곧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단순한 신앙의 밑바탕과도 같은 공식이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크 엘룰이라는 분이 쓴 <우리의 기도>라는 책에서 그는 현대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다양한 이유 중의 하나로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아버지 개념을 들었습니다. 진정한 관계가 성립하려면 서로 간의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와 독립성이 필요하고 예속되어 있지 않으므로 생겨나는 자부심이, 그리고 남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이 필요한 법인데, 둘째 아들 비유(소위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그것들을 용납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둘째 아들을 아버지 밑으로 구속하고 굴욕적인 처지를 만들고서 위신을 실추시켜놓고서 받아들여주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참으로 가부장적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이미지가 현대인들에게 반감을 사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기도하기가 꺼려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거부감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인성이 얼마나 왜곡되고 삐뚤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기원이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기 어려운 연약한 자녀들을 돌보아주고 공급해주고 길러주는 역할을 하는 분으로서 아버지로 이해함이 자연스럽죠. 거기서 어떤 가부장적인 거부감을 추출해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낯설고 멀리 떨어진 관계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의 요청을 들어줍니다. 들어줄 것은 들어주되 모든 것을 들어주지는 않습니다. 자녀가 위험한 칼을 달라고 하면 어린 자녀의 손에 칼을 쥐어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아버지는 단지 자녀의 필요를 채워줄 뿐입니다. 이게 아버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버지되심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 기도하고 요청하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을 강조하십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가정 안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의 요구사항에 대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기르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주기도문으로서 가르치시고서 이어서 오늘 본문에서 기도에 대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실 때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 잘 이해하고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하나의 이야기로써 가르쳐주십니다.
밤중에 우리 집에 한 친구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습니다. 오늘날 정서에서 이것은 무례함이죠. 연락도 없이 밤중에 찾아온 사람이 잘못이죠. 그러나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성경이 기록된 그곳에서는 손님의 무례함보다도 손님을 융숭히 대접해야 할 의무가 더 강조되었습니다. 생판 알지 못하는 사람이 방문해도 대접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 친구가 찾아왔으니 더 잘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밤중에 찾아온 손님에게라도 기본적으로 내놓아야 할 음식은 빵과 차입니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요 손님 대접의 최소한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날따라 빵이 다 떨어졌습니다. 손님이 방문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날 가족끼리 먹을 빵만 구웠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난처한 상황이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습니다. 한 가정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우리라면 잘 설명하고서 돌려보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만, 그당시 그곳에서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을 그렇게 대우하면 안됩니다. 만약 손님을 그냥 돌려보냈다면 그것은 그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게도 수치스런 행동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 상황은 단순히 어느 한 집이 감당해야 할 문제로 국한되지 않고 손님 대접은 마을 공동체의 전체의 명예와 수치가 달려있는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당연히 이웃의 도움을 받아야죠.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죠. 한밤중이라는 사실이 주저하게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이 무례함보다도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무례함이 더 큰 무례함이고 이 문제는 어느 한 가정에게만 수치로 남는 문제가 아니라 마을을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낸 마을의 수치가 될 문제였기 때문에 한밤중에라도 이웃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고 비록 잠을 청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웃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자정 가까운 시간에 옆집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면 옆집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화재가 났던지 강도가 들었던지 급박한 위기를 감지하고서 그 위기를 확인하려고 할 겁니다. 문도 열어주지 않고 안에서 물어보겠죠. 도대체 뭔 일이냐고. 친구가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대접할 거리가 마땅치 않아서 혹시 파리바게뜨나 뚜레쥬르 빵을 가지고 있냐고 하면 미쳤구나 할 겁니다. 문화적인 차이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아까도 강조했듯이 손님 접대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한 개인, 한 가정, 심지어 한 마을의 명예가 달려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한밤중에라도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옆집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웃집에 찾아와서 손님이 찾아왔는데 대접할 것이 없으니까 빵 세 개를 빌려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겁니다. 이웃집의 반응은 당연히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이웃사촌이라는 이유나 친한 마을 사람이라는 이유로 인해서 요청한 빵을 주지는 않을지라도 “간청함” 때문에 요구한 대로 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밤중이고 그래서 자녀들도 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빵을 찾는 소리에 다 깨어난다 할지라도 그걸 구실과 핑계 삼아 요청을 들어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단언이요 그것을 제자들도 이의 없이 받아들이는 문화입니다.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만들어내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간청함”입니다. 예전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강청함”으로 번역했습니다만 같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가 ‘간청함’이라는 뜻보다는 ‘뻔뻔함’, ‘수치스러움’, ‘후안무치’, ‘얼굴이 두껍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복음주의 학자들이 쓴 누가복음 주석 네 개를 비교해서 보았는데 네 분의 학자가 모두 여기에 쓰인 헬라어 단어의 원래 뜻이 ‘뻔뻔함’, ‘수치스러움’, ‘후안무치’, ‘얼굴이 두껍다’는 뜻임을 다 동의합니다만, 이 기본적인 뜻을 가진 단어가 문맥에서 특별히 기도에 대한 가르침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끈기나 인내 혹은 지속적인 간구를 강조한다는 의미 맥락 하에서 ‘간청함’ 혹은 ‘강청함’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래야 기도하는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함을 강조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번역에 이미 해석이 들어간 셈이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 주석학자는 4명 중 2명이었고, 다른 2명의 학자들은 원래 뜻대로 해석해야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도가 더 잘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신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거나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거나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이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의 뻔뻔함, 수치스러움, 낯짝이 두꺼움, 혹은 체면 때문에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고 원래 단어의 뜻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요구하는 사람의 ‘간청함’이라기보다는 요청을 받고 있는 사람의 명예 혹은 수치 때문에라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만약 이웃집 사람이 손님 대접해야 한다는 이유로 빵을 빌려달라고 비록 한밤 중에라도 날 찾아왔더라도 비록 번거롭고 이로 인해서 자녀들이 잠에서 깬다 할지라도 만약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다음날 마을 사람들 가운데서 당하게 될 수치를 생각해서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참 뻔뻔한 사람이로군’ 하는 비난입니다. 그만큼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공동체가 소중했고 명예와 수치가 가장 중요한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다음날 일어나서 마을에 나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다 수군거리고 손가락질 하면서 마을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려고 했는데 도움을 주지 않은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것을 예상하고서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거라는 점을 예수님께서 반문하신 것이고 이에 대해 제자들은 아무런 이의가 없이 다 동의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상황입니다.
‘간청함’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세 번 말함으로써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강조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내세웁니다. 원래 뜻대로 ‘뻔뻔함, 수치스러움, 불명예, 체면’ 등의 원래 뜻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입장은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에 대해 가르치고 계심을 인정하면서 그 가르침이 기도하는 사람의 간절한 간구 혹은 간청에 있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아버지로서 하나님에 대한 강조임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것도 끈질기게 다양하게 하나님을 설득하고 압박해야 한다는 강조가 아니라 기도해야 할 상황의 다양성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기도해야 할 필요가 생긴 상황에서 기도란 “다른 사람이 제공해 줄 수도 있는 그 무엇을 구하는 것이요, 잃어버린 것이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처음의 그 위치를 알지 못했던 것을 찾는 것이요. 건물에 들어갈 허락을 얻기 위하여 문을 두드리는 것”(WBC주석)입니다. 이것이 기도해야 할 필요가 생긴 다양한 상황이요 기도라는 것입니다.
만약 원래 단어의 뜻대로 해석한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가르치고서, 그래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가르치고서, 지금 기도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까? ‘아무리 밤중이라도 설사 자녀들이 다 깰 상황이라도 손님이 찾아왔다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단순히 이웃사촌이라는 이유나 친구 사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만약 도와주지 않을 시 다음날 아침에 당할 불명예와 수치 때문에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다. 하나님 이름의 명예 때문에라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자녀를 돌보아주셔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체면 때문에라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하시고서 9-10절에 기도에 대해 가장 중요한 점을 진술하십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야고보서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우리는 보통 기도를 감안하지 않고서 그냥 현실적인 때가 많습니다. 기도를 고려해놓고 달라질 현실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기도하면 달라질 미래’, 이것을 생각해보지 않고 지금 현실적 경험에 입각해서 예측하고 생각함으로 인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달라질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고 계획도 하고 성장도 하고 추진도 해야 할 터인데 그럴 믿음이 부족하다보니 늘 현실경험에 입각해서만 판단하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그냥 그렇게 동일하게 살게 되는 겁니다.
구하면 받을 것을, 찾으면 찾아낼 것을, 두드리면 열릴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인간 아버지보다 더 선한 아버지요 자녀들을 더욱 사랑하시는 하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아들의 요청에 대해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신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도 자녀들의 요청에 대해서 어련히 알아서 좋을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날에는 부자관계도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패륜도 있고 존속살인도 있고 자녀를 학대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부성도 간혹 언론보도로 접하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아버지는 자녀들을 보호하고 양육하고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자녀가 무엇을 달라고 요청할 때 좋은 것으로 주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녀들의 간구에 대해서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인생에게 가장 절체절명의 과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인생을 원래 창조주가 설계하시고 계획하신 가장 좋은 제자리로 바꿔놓고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예수님을 구주삼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서 성령님을 선물로 받아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누리고 느끼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절체절명의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므로 인생의 진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대중예술이 이룬 성과가 국민의 자부심을 드높였습니다. 봉준호감독이 세계최고의 영화제인 칸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죠. 봉준호감독과 그리고 연기자 김혜자씨인 인연도 언론 보도에 소개되었습니다. 봉준호감독이 ‘마더’라는 영화에서 괴기한 캐릭터인 엄마 역할을 김혜자씨에게 맡긴 이유, 그리고 김혜자씨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것입니다. 계기는 이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김혜자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몰랐죠. 그것을 안 건 비교적 최근인데 이를 먼저 알게 된 사람이 바로 봉준호 감독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1992년에 홍대 쪽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사무실에서 김혜자씨의 자택이 보였다고 합니다. 보통 연기자로서 김혜자씨의 이미지는 전원일기에 나오는 ‘국민 엄마’인데 마당에 나와 담배를 그렇게 맛있게 피웠다고 합니다. 그걸 본 봉준호 감독은 대중들이 생각했던 이미지와 다른 김혜자의 모습을 발견했고, ‘마더’라는 영화를 기획해 4년간의 설득 끝에 함께 작품을 하게 됐다는 겁니다.
김혜자씨가 지독한 골초였다고 합니다. 거의 담배 중독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34년 동안 지독하게 피워댔던 담배를 끊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김혜자씨가 어느날 카페에서 담배를 피웠는데 그날따라 ‘담배 맛이 너무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마침 미국에 있는 딸에게서 전화가 왔고 ‘내가 혹시 무슨 병에 걸렸나’ 걱정되는 마음에 딸에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울면서 ‘사실 엄마의 금연을 위해 100일간 새벽 기도를 했다’고 얘기하더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김혜자 선생님은 그날부터 금연을 결심하고 바로 담배를 끊었다고 합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무엇보다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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