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19일 설교 (주일 낮)
사람아~ (미 6:1-8)
오해가 있으면 오해를 풀어야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야겠죠. 그래서 관계를 회복시키고 복원시켜야 합니다. 관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지금 어떠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있지 않다면, 결코 신앙생활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성공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특히 직장 상사와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직상 생활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아내 혹은 남편과, 그리고 자녀들과 관계가 좋지 못하다면 그 가정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인 경우 학교에서 교우관계가 좋지 못하면 학교 생활이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 되어 있지 못하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어떠하겠습니까?
고맙게도,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존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언제나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취미가 있는 인 간임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가 진토에 불과한 존재임을 하나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손을 내미는 쪽은 언제나 하나님이심을 믿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미가서 6장 말씀에도 바로 그러한 점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과 뭔가 오해가 있습니다. 관계가 썩 좋지 못한 상태입니다. 6장을 읽어보면서 받게되는 느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서 고발당한 느낌마저 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오해를 풀고자 하십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마치 재판과정과도 같은 엄숙함이 느껴지는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제기하신 소송과 같습니다. 이 소송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변호하실 터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변론을 잘 듣고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묵묵히 보았던 산과 땅을 증인으로 호출하십니다. 혹은 재판정의 배심원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서 변론을 진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고발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자기를 변호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3절,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내 백성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 내가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내게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나치게 요구하신다, 우리를 너무 괴롭게하신다’는 불평과 원망의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말을 좀 쉽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러한 불평의 말을 내뱉었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불평을 들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불만의 핵심은 하나님의 과도한 요구로 모아집니다. 자유를 얽어매고 무거운 짐을 지우게 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불만이요 원망입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뭘 지나치게 요구했다고 불만이냐, 뭐 이렇게 사람들에게 조목조목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자기 변호가 이어집니다. 4절과 5절입니다. “내가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여기, 하나님의 자기 변호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의롭게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의롭게 행한 일’은 히브리어로 ‘쩨다카’의 복수형입니다. ‘쩨다카’는 보통은 ‘의’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 로마서에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이것이 로마서의 주제라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의’와 정확히 같은 의미로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롭게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언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쭉 신실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기 위해서 책임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의, ‘공의롭게 행한 일’입니다.
로마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한다면 오늘 미가 선지자는 출애굽과 광야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의롭게 행하신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의롭게 행하셨다는 걸까요? 어떤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실하셨다는 걸까요? 어떻게 책임을 다하셨던 걸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만과 원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하나님은 구원을 주셨고, 인생의 무거운 부담에서 참다운 해방을 주셨음을 변호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역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증언해주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집트 노예생활, 종노릇에서 벗어나게 해준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 큰일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발람과 발락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정으로 보호하셨고 축복해주셨습니다.
민수기 22장에서부터 24장까지 모압왕 발락과, 발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왕 발락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수효와 강성함에 겁을 먹고, 소위 용하다는 발람을 찾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발람이 처음에는 자신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을 전할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계속되는 요청과, 뇌물과, 그리고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쓸쩍 들려고 할 때, 하나님은 발람을 막죠. 심지어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서 발람의 잘못을 지적하시죠. 그래서 결국 모압왕 발락은 자신이 원하는 저주를 듣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축복하시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고 또한 말씀합니다. 싯딤은 요단 동편에 있고, 길갈은 요단 서편에 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싯딤에서 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이후에 그들은 길갈에서 처음으로 진을 쳐 머물렀습니다. 싯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의 맨 마지막 정류지였습니다. 그리고 길갈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맨 처음 정류지였습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 이르는데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40년 광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도움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그리고 길갈에 이르렀습니다. ‘길갈’의 뜻은 ‘애굽, 이집트의 수치를 떠나가게 하셨다, 굴러가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집트 노예생활의 진정한 청산은 출애굽, 이집트에서 탈출했을 때 이루어진 게 아니라, 광야생활 40년을 끝내고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 길갈에 이르렀을 때 노예생활이 진정 끝났습니다. ‘길갈’의 뜻이 그래서 ‘애굽의 수치에서 벗어났다’입니다.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즉, 구원 이전과 이후를 곰곰이 생각해보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정의를 위해 참된 해방을 가져다준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을 떠올리면, 자신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기억해보면 곳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얼마나 의롭게, 얼마나 신실하게, 얼마나 언약 백성인 우리에게 책임을 다하셨는지, 즉 ‘공의롭게 행한 일’을 깨닫게 될 거라는 하나님의 주장입니다. 미가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그리고 부당하게 너무나 과도한 요구를 하셔서 자신들을 괴롭힌다고 불평했습니다. 이 불평의 말을 들은 여호와 하나님은 억울했습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이니까 더욱 억울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무거운 짐을 부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짐을 덜어주셔서 참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주신 분이라고 하나님은 자신을 변호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입장을 두둔하면서 하나님의 변호와 주장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억울한 것은 하나님뿐만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억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입니다. 더욱이, 지금 하나님께서 여태껏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소위 ‘하나님의 의’를 행하셔서 구원을 가져다주셨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까,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 걸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민이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처럼 공의롭게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하나님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예배의 현장으로 무엇을 가지고 나아가야 하는 걸까? 여기서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좀 부정적인 표현입니다. 너무나 우리를 향해서 기대치가 높으신 하나님, 무엇으로도 만족하시지 않는 분, 너무나 높이 계셔서 우리네 삶을 잘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시는 하나님, 어떤 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간다 한들 그 어떤 것이라도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는 크고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6절 하반절과 7절을 보십시오. “내가 번제물로 일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점점 강도가 세지죠. 1년 된 송아지로 드리는 번제는 희귀한 번제입니다. 보통은 1년 된 양으로 번제를 드립니다. 1년 된 송아지로 번제를 드리는 경우는 처음으로 드려진 제사장의 위임식 때입니다. 보통의 번제와는 다른 흔지 않은 헌신, 대단한 정성으로 나아가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천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 같은 기름’은 그야말로 막대한 양의 제물입니다. 심지어 ‘내 몸의 열매’ 곧 ‘맏아들’을 바치면 죄 문제가 해결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서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걸까. 점점 강도가 세지는 헌신과 드림, 진정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 정도의 지극정성을 보여주면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인가.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날 인정하시렵니까?’ ‘하나님 제가 어떤 헌신을 보여주어야 흡족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점점 더 강력하고 무거운 헌신을 요구하시는데...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뭐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과도한 부담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미가서 6장 1절에서 7절까지 보면, 하나님 입장에서도 억울한 측면이 있고, 그리고 우리는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정적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치 법정에서 검사측 주장과 변호사측의 변호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이때, 중재자가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나섭니다. 8절을 보십시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선지자가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인 ‘아담’ 곧 ‘사람’을 불러냅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온 단어죠. ‘아다마’는 ‘대지’, ‘흙’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담’ 곧 ‘사람’은 ‘흙에서 온 존재’를 의미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가 곧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불러내서 2인칭의 ‘너’로 호칭하면서 ‘하나님이 사람 너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를 이미 알려주셨다’고 말씀하는 겁니다. 8절 말씀은 흙으로부터 와서 흙으로 돌아갈 운명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하고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서있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사람의 본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한자의 착할 선자, 선하다할 때 사용되는 착할 선(善)은 양양(羊)자 밑에 말씀언(言)이 합쳐져 있습니다. 즉, 양은 말씀을 잘 들어야 그것이 곧 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양떼로서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선입니다.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믿음 없는 말을 듣고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재단해서도 안됩니다. 너무나 광대한 하나님을 자신의 이성이나 경험 안에 가두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잘 알지 못한 채, 습관을 따라 신앙생활 해왔다면 우리는 다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했던 나무의 이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까?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입니까? 그 나무의 과실을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이 그 나무에 결부됐기 때문에 그 나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그 자체에 신비한 마법적 효력이 있어서 ‘선악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무의 과실을 따먹지 않으면 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나무의 과실을 따먹으면 악, 그렇게 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해주신 말씀에 기반해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에게서 찾기를 원하신는 것은 크게 세가지로 제시됩니다.
첫째, “오직 정의를 행하며”. 우리가 읽은 본문 이전에 미가서 3장 1-3절에 보면,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꺽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참 신랄한 비판입니다. 이어지는 4절에 보면, “그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우리가 다 경계를 삼아야 할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람에게 찾으시는 것은 정의입니다. ‘정의’는 히브리어로 ‘미슈파트’입니다. 공평과 공정함으로 판결을 내리고 판단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둘째, “인자를 사랑하며”.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언약백성들인 우리는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을 신실하게 사랑해야 합니다. ‘헤세드’은 언약적 사랑이며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그래서 또한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을 향해서 성경은 로마서 1장에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겸손합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함께 길을 걸어갑니다. 함께 살아갑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주제넘게 앞서가거나 제 멋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언제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늘 하나님과 의논하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신중한 행보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기 위함이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가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도 삶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선을 행하되 끝까지 행할 수 있도록, 선을 행하되 낙심치 않고 끝까지 걸어가게 하는 힘이 됩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믿음에 회의가 찾아오고 삶에 시련이 들이닥쳐서 낙심되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더 중한 바’ 곧 ‘정의’와 ‘긍휼’과 ‘믿음’,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너라고 호칭하면서 알려주시고 우리에게서 찾기를 원하시는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 인생 본분의 길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이 길을 걸어가시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든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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