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1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요 7:37-39)
정신의학과 심리학에서 동기 이론이 있습니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이론인데요, 무엇이 동기가 되어서 사람을 움직이는가를 설명하려는 이론입니다. 인간성의 가장 근본 성향이 무엇이냐를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0세기에 큰 족적을 남겼던 정신의학자 중에 지금에까지 유명세를 떨치는 3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프로이트와 아들러, 그리고 마지막으로 빅터 프랭클입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오스트리아 출신이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정신의학을 공부했습니다. 다 유대인입니다. 이러한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생각한 인간의 근본 동기는 각기 다릅니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본능을 따라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을 인간 본성의 중심에 놓았습니다. 비록 의식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간을 차지하고 있는 대부분은 욕망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을 충족하는 방향으로 인간 행동이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프로이트의 이론을 비판하고 나선 아들러는 어려서부터 형성된 열등감을 행동의 주된 동기로 보았습니다. 열등감을 극복하고 그것을 보상하려는 ‘권력에의 의지’가 인간의 주된 동기라는 것입니다. 소위 명예욕이나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곳에 위치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들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이었던 빅터 프랭클은 쾌락원리나 명예욕보다 더 근본적인 인간 성향은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누구나 인간에게는 주어진 것으로서 삶을 살아가는데, 그래서 불가피하게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된다고 본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했으나 찾지 못하고 그 의지가 좌절될 때 인간은 실존적 공허감을 느끼고 인생의 허기를 느끼게 됩니다. 그 공허감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소위 대용품이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과 욕망과 본능에 따르는 삶이요, 아들러가 말한 명예욕이나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요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삶일 뿐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심리학이나 상담학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신학자에게 인기가 있는 분입니다. 왜냐면, 이분의 주장, 삶은 주어진 것으로서 인간은 주어진 삶에 책임감 있게 응답해야 할 사명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지에 따라 동기화된다고 생각하는 인간 이해가 결국에는 인간이 자기를 넘어선, 다시 말해 자기를 초월한 어떠한 대상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자기 초월과 인간의 지향성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무의식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이 무의식에는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적 본능만 있는 게 아니라 영적인 무의식도 있다고 보았는데, 신학적 견해에 따라 그렇게 본 게 아니라 꿈이나 양심 같은 인간 현상을 분석함으로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꿈의 분석을 통해서 인간의 무의식에는 근본적으로 종교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보았고, 양심의 분석을 통해서 외부에서 주어진 양심의 초월성을 드러내보였습니다. 외부에서 주워진 양심을 통해서 삶의 의미가 발견될 수 있음을 보았고, 그래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의지는 자기를 넘어선 초월적 존재를 지향하게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쉽게 말해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인생이 어디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의 영역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종교심과 초월적 양심이 지향하는 대상 곧 무의식의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분은 자신이 신학자가 아님을 끊임없이 강조하면서 ‘위로부터의 삶의 의미’보다 ‘아래로부터 삶의 의미’를 아울러 강조를 하기는 합니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상황에 맞게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일컬어 ‘아래로부터 삶의 의미’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분이 쓴 책 제목이 <무의식의 신>인데 원제는 ‘궁극적 의미를 향한 인간의 추구’입니다. 책 전체의 흐름과 논증은 오히려 인간 정신 현상을 분석함으로써 도달한 신학의 도입입니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이분이 심리 요법 상담 치료 요법을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로고테라피’입니다. 의미 심리 치료법입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성향이 좌절된 사람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줌으로써 정신적 문제를 해결해주는 치료법입니다. 빅터 프랭클의 동기 이론이나 의미 요법은 자신의 실존적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분이 2차 세계 대전 때 유대인 포로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년을 지내야 했는데, 대부분이 죽어나간 그곳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공통점이 그 안에서라도 삶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향하여, 미래의 목표를 향하여, 미래에 실현될 의미를 향하여 삶의 방향을 정했던 사람들만이 대부분 생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잘 아시다시피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인간의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좌절시키는 곳이었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박탈해가는 곳이었습니다. 수용소 감독감들이 수감자들에게 약 50kg이나 되는 젖은 소금 부대를 옮기라고 지시했습니다. 넓은 수용소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짊어지고 간 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일이었습니다. 수용소 입구에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진 간판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고된 노동으로 인해서 너희는 자유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의미처럼 보입니다. 잘 먹지 못해 뼈만 남은 수감자들에게 무거운 소금 부대를 옮기는 고된 노역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의미한 고문이었던 것입니다. 무의미한 고역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좌절시킴으로 인해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시름시름 죽어나갔던 것입니다.
아우슈피츠 체험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에 빅터 프랭클은 자신의 심리분석을 실존론적 심리 분석이라 불렀습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성향이 좌절될 때, 즉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찾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허감과 허무감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공허감에 사로잡히면 자신이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맨탈 붕괴현상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그대로 따라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허감이나 허무감은 결국 다른 충동으로 이어지는데 그 결과를 빅터 프랭클은 세가지로 보았습니다. 우울증, 중독, 공격성입니다. 우울증이나 중독현상 가령 알콜중독이나 성중독이나 마약중독과 같은 중독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적 성향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공허감과 허무감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적으로 이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우울증 환자나 중독 환자나 공격적 성향을 뚜렷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탓이라는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삶의 의미도 하나의 주된 요소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인간 존재가 지향하는 대상이 되는 무의식의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삶의 의미와 목적이 해명되지 못하기 때문에 근본 치료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목마른 자들은 누구라도 자신에게로 와서 신선하게 흐르는 생수를 마시라고 초청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미 예수님은 허기와 굶주림에 찬 인생들에게 자신에게로 와서 생명의 떡을 먹으라고 초청한 바가 있고, 이번에는 목마름의 해갈을 얻기 위해서 자신에게로 와서 생수를 마시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초막절이 끝나던 제7일이나 팔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께서 성전 뜰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구약의 3대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동안 물이 없는 그곳에서 반석에서 물을 공급하여 주시고, 먹을 것이 없는 그곳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공급하여 주셔서 인도하여 주신 광야 40년의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또한 초막절은 시기적으로 가을 추수를 끝내고 풍성한 추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기후적으로 초막절은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이른비가 내릴 즈음에 위치에 있습니다. 오랜 건기를 지내고 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에서 물을 기원하는 축제의 절기가 곧 초막절입니다. 광야에서의 물없음과 물이 귀한 곳에서의 물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유대인의 절기로서 초막절, 이 명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성전뜰에서 일어서서 크게 외치는 장면입니다.
일주일간 지속되는 초막절 절기 때 제사장들은 소위 물의 의식을 치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예수님 탄생 약 200년 전부터 시작된 초막절 의식입니다. 제사장들이 실로암못으로 내려가서 물을 담을 수 있는 금으로 된 용기에다가 물을 담고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성전의 뜰에 있는 제단을 올라가 제단위에다 그 물을 붓는 의식입니다. 매일 한차례 진행하던 물붓는 의식이 초막절 끝날에는 일곱 번 반복합니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 째 제단에 물을 붓는 것이 끝나면 제사장은 손을 듦으로 의식이 끝났음을 알립니다. 아마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친 것이 아닐까 드라마틱하게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물이 귀한 그곳에서 사람들은 물을 제단에 부음으로써 풍성한 물을 기원했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체험하기 위해서 초막절에 자신의 집뜰에 장막을 치고 불편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일종의 광야체험을 한 것입니다. 광야생활의 가장 큰 불편함은 물이 없는 것이었으므로 초막절에 실로암못에서 물을 가져 제단에 붓는 의식은 풍성한 물을 가져다주실 하나님의 은총의 시대를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이 부족한 갈증을 영원토록 해갈시켜주실 하나님의 개입을 소망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종말론적 소망이 반영된 종교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해마다 초막절이 되면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의식을 집행하고 바라보았던 유대인들이 가득 모인 성전 뜰에서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지금 물붓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제사장이나 유대인 순례객들은 목말라서 저러고 있는 게 아닙니까? 광야에서 그토록 아우성을 치고 하나님께 투정하고 원망하고 불평했던 이유도 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광야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시게 하셨던 것처럼 풍성한 물을 한량없이 부어주셔서 유대인들의 오랜 기갈을 해갈시켜주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물붓는 의식에 참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한 채 표류하는 인생들에게, 그래서 늘 허기에 차있고 목마름에 어쩔 줄 몰라하며 실존적 공허감과 허무감에 사로잡혀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조차 모르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와서 마시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마시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생수를 마시라는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는 신선하게 흐르고 솟구시는 물을 주셔서 마시게 함으로 인생의 오랜 갈증을 해갈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배’는 누구의 배를 가리킵니까? 초대교회부터 2가지 해석이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는 견해와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 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입니다. 생수의 근원은 예수님 자신이시고 예수님이 공급해주시는 생수로 해갈을 먼저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생수의 통로로서 생수의 원천이 되어 그들 역시 해갈을 받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배’를 그리스도인의 것으로 보아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생수의 유일한 근원이시오 생수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이미 죽은 예수님을 확인 사살하기 위해서 로마 병정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예수님의 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3-34절입니다.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예수님의 배에서 흘러나온 이 물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예수님께서 초막절의 물붓는 의식이 끝날 무렵에 외쳤던 풍성하고도 신선한 생수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흘러넘치는 생수는 곧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신 이후에야 그 배에서 흘러나오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명을 완수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실 때 아버지에게서 받아서 보내실 성령님이 임할 순간에 성취될 해갈의 약속입니다.
믿는 자들만이 받게 될 성령님은 우리 인생의 생수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마름의 진정한 해갈입니다. 공허감과 의미 없음과 허무감의 진정한 치료약이십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향방 없이 표류하면서 다른 것들을 대용품으로 삼아서 끊임없는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헛된 시도 끝에 기진하고 탈진한 인생에게 성령이 오심은 인생의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와 방황을 끝장내버리는 사건입니다. 인생의 목마름의 진정한 해갈이요 삶을 의미로 충만케 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가능케 하며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성령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얻게 되는 성령님은 인생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무의식에서 지향하고 추구하던 존재인 바, 바로 그분을 우리가 소유하게 됨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참된 자유와 해방이요, 참된 해갈과 만족이요, 참된 의미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름효과(Name-Lettet Effect)’란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이름과 유사한 문자를 가진 직업과 행동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가 2002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예일대학 심리학과 교수 조지프 시몬스와 캘리포니아주립대학 샌디에고 캠퍼스(UCSD) 심리학과 조교수 레프 넬슨은 지난 5년간 메이저리그 선수 6398명, 경영대학원(MBA) 과정을 밟고 있는 1만5000명 등 총 5개 집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2002년부터 학계에 알려진 이름 효과에 따르면, 톰(Tom)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름과 비슷한 ‘도요타(Toyota)’차를 구매하고 토론토(Toronto)에 살 가능성이 높고, 데니스(Dennis) 데나 (Denn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치과의사(Dentist)가 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또 이름이 C나 D로 시작되는 미국 학생은 A나 B로 시작되는 학생보다 낮은 학점을 받을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름이 K로 시작되거나 끝나는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는 삼진 아웃(Strikeout, 약자 K로 표시)을 당할 확률이 월등히 높다고 합니다. 요약하면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연구를 맡았던 넬슨 교수는 “이름 효과는 주로 부정적으로 작용한다”면서 ”부정적 단어와 연결되는 이니셜은 부정적인 효과를 내기 쉽다”고 밝혔습니다. 시몬스 교수는 이름 효과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의 말을 덧붙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보다 자기 스스로가 어떠한 존재인가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자기가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은 사람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깨달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실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의이름과 관계없이 언제나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 남산편지(http://www.nsletter.net) (http://www.adventist.or.kr에서 재인용)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떠한 존재이냐는 겁니다. 우리는 성령을 소유함으로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에 의해 소유된 그분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이사야 43장 1절에서 말씀합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우리는 다 성령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혼돈은 이로서 끝났습니다. 목마름, 공허감, 허무감,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한방에 날라갔습니다. 이러한 존재임을 알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달하므로 인생의 진정한 생명수를 제공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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