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31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큰 소망 큰 기쁨 (겔 48:30-35)
에스겔 40-48장은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입니다. 그가 본 환상은 새로운 성읍과 새로운 성전이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자신이 본 환상을 전했을 겁니다. 완벽한 형태를 갖춘 새 성전과 이들이 거할 새 성읍에 관한 비전은 포로민들에게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에스겔 40-48장에는 새 성전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그 성전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돌아옵니다. 이미 에스겔은 10-11장에서 유다의 완전한 멸망과 더불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때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 새로 건축된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단이 회복됩니다. 아침과 저녁마다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절기 때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함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롭게 됩니다.
에스겔 47장에 이르면 새 성전의 문지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이 점점 많아져 큰 강처럼 흘러넘칩니다. 성전의 남쪽면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는 점점 많아져 발목에 차고 무릎에 차고 허리까지 차오릅니다. 큰 강처럼 흘러가서 흐르는 곳마다 생명의 꽃을 피워냅니다. 과실을 생산해냅니다. 심지어 죽었던 사해 바다까지 흘러들어가 그곳을 생명으로 가득채웁니다. 물이 흐르는 곳마다 사계절 과실이 열매를 맺으며, 그 강곁에 늘어서 나무의 잎사귀는 모든 사람을 치료하는 약재가 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마침내 성전이 있는 성읍 곧 예루살렘의 새 이름이 ‘여호와삼마’로 명명됩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신다”가 새 예루살렘의 이름입니다. 이 환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인지 알기 원한다면 당대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이 환상이 어떠한 메시지로 들려졌을 것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은 본래 제사장 가문의 사람입니다. 그는 유다가 완전히 멸망당하기 전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한 해가 기원전 587년인데, 그보다 10년 전에 에스겔은 바벨론에 사로잡혀 갑니다. 기원전 597년에 유다 왕조의 관료와 귀족과 제사장 중 일부가 바벨론으로 추방되어서 그발강가에 정착했습니다. 이때 에스겔도 포로로 잡혀갑니다. 에스겔은 본래 제사장이지만 그발강가에서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므로 선지자로 인정됩니다. 그발강가에서 에스겔이 본 맨 처음의 환상은 무엇이었습니까? 에스겔은 바퀴 달린 전차를 보았는데 그 전차가 하나님의 보좌를 떠받들고 있는 전차였습니다. 이 보좌 전차에 바퀴가 달려있었는데 바퀴가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영광과 임재를 철수하고 오히려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나아가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바퀴 달린 보좌 전차는 예루살렘을 떠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는 장면을 에스겔은 상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을 지나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서, 감람산에 올라가서 예루살렘 전경을 되돌아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마치 바퀴 달린 보좌 전차에 함께 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가 철수하고 하나님은 예루살렘이 아닌 먼저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 포로민들에게 거합니다. 그들의 성전이 되어주셨던 것입니다. 맨 처음 환상이 바퀴 달린 보좌 전차였다면 마지막 환상은 에스겔 40-48장에서 본 새롭게 된 예루살렘 성읍과 새 성전의 장관이었습니다.
유다가 완전히 멸망하던 해까지 에스겔이 본 환상의 주된 내용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저 포로로 잡혀가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간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거로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향하여 더 큰 심판이 남아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먼저 포로로 잡혀간 동족에 대해 비난했습니다.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남게 된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했고 하나님께서 완전한 파멸에까지 이르게 하시지 않을 거라는 거짓된 확신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셔서 예루살렘에서 내쫓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에스겔 11장 16절에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하나님은 오히려 바벨론에 먼저 포로로 잡혀간 그들에게 자신이 직접 성소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중보 건축물 즉 성전이 필요치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성전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가 성전입니다. 성전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성전의 크기와 구조와 제사 제도와 제사장직을 자세하게 규정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포로민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성전조차 필요치 않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포로민들 가운데 거하셔서 친히 성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성전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마지막 환상과 마지막 메시지는 예루살렘의 회복과 성전의 회복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입니다. 어떠한 회복입니까? 실제로 바벨론 포로민들이 대략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기원전 538년에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실제로 성전도 재건하고 예루살렘 성벽도 중수합니다. 다시 성전이 세워지고 제사 제도가 시행되고, 예루살렘 성읍도 원래의 형태를 회복합니다. 성전이 다시 세워졌지만 이전 성전에는 있었던 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세웠던 소위 광야교회의 성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습니다. 솔로몬왕이 지은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포로민들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어렵게 지은 제2성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보도가 없었습니다. 성전을 완공했을 때도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기록된 성경은 없습니다. 다만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포로민들이 돌아와서 지은 새 성전에 앞으로 가득할 영광에 관한 약속을 주셨을 뿐입니다. 학개서 2장 6-9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 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다시 건축된 제2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에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게 되면 그때 영광으로 충만하게 할 것을 약속해주고 있을 뿐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도 재건하고, 또 성벽도 중수하고 성읍도 재건했지만 온전한 회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가 재건되지 못했습니다. 바벨론에게서 벗어났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페르시아에, 그리고 이어서 알렉산더제국의 후예인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기원전 63년에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이 본 새 성전과 새 성읍, 그리고 그 성읍의 이름은 ‘여호와 삼파’ 곧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이름을 얻은 예루살렘의 회복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진정한 회복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에스겔의 마지막 환상 곧 에스겔 40-48장의 환상은 장차 올 메시아 시대에 관한 환상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실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진 회복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이 회복은 가까이는 바벨론 포로상태로부터 본국으로 귀환하는 회복이며, 멀리는 앞으로 장차 오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한 회복이며, 더 멀리는 앞으로 장차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회복될 것에 관한 비전입니다. 다만 이러한 궁극적인 회복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숙했던 옛 언약에 관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이며 성전의 제사제도이며 성전의 제사장직인데, 이것들이 회복된다는 것, 특별히 그 성전과 성읍이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는 성읍이 될 것임을 예고하심은 당대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온전한 회복의 그림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미리 내다본 미래는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를 함께 본 것이었습니다. 가까운 회복과 궁극적으로 성취될 온전한 회복을 동시에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가 저 멀리 장엄한 산맥을 다소 위에서 바라볼 때 여러 큰 산이 겹쳐져 있는 광경을 보게 되면 산과 산이 겹쳐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면에서 보는 산맥은 하나의 큰 산으로만 보일 뿐입니다. 오래 전 선지자가 본 미래에 관한 환상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회복된 미래를 볼 뿐이지만 산과 산이 겹쳐져 있음을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선지자가 본 미래의 회복은 포로기 이후의 성전 재건이며 하나님섬김의 회복이며, 아울러 또한 세상 마지막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이기도 합니다. 선지자는 너무나 먼곳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두 광경을 하나로 조망할 뿐입니다.
‘여호와 삼마’로 명명된 새 예루살렘과 성전에 관한 환상은 이미 임했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이미’라 함은 어떤 점에서 ‘이미’입니까? 신약성경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태복음 1장 1절 말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로 신약성경은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또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사십 육년 동안 지었던 헤롯 성전을 삼일 동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듣는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도대체 웬 해괴망측한 말이냐는 것이죠. 요한은 이에 대해 설명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예수님이 성전의 진정한 회복이십니다. 진정한 성전이십니다. 성전이란 하나님과 죄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만 진정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진정한 성전이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머뭅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여호와 삼마’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바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에스겔이 본 마지막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마지막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의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된 약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나님을 만났고 또한 만나고 있고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입니다. 아직 아닙니다. 이게 회복의 끝이 아닙니다. 회복되어야 할 더 큰 회복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요한도 환상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2절입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 새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서 보석같이 빛나는 장관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성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성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습니다.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성전이 되어주심으로 새 예루살렘성에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마치 바벨론에 사로잡혀와서 그발강가에서 정착했던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거하셔서 성소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셨던 약속과 동일한 비전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에스겔이 본 환상과 비슷한 환상을 봅니다. 신약성경에서 맨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그때까지도 에스겔이 본 환상이 아직은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5절입니다.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는 점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될 거라는 점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보고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만 거룩하게 변화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때가 되면 하나님을 보고도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여호와 삼마 곧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회복, 궁극적인 회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는 새 예루살렘에서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는 곳으로서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하나님께 경배와 찬송을 드릴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새 성전과 새 성읍에 관한 환상에 따르면, 성전 구역, 성전 뜰, 성전 벽, 성전 건물의 완벽한 대칭과 이스라엘 백성의 정확한 배치가 있는데요,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이 세우신 흠없는 제사장들에 의해, 하나님이 정한 절차와 방법대로 합당한 예배가 이루어질 새 성전에 관한 환상은 완전한 예배를 궁극적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는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완전한 예배, 순전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에서 우리는 한눈 팔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하고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서 딴 생각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배의 대상이 오직 하나님만이 될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인정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상대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은 하나님이 분명히 보여질 때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 눈앞에 밝히 보여질 때에만 우리는 감히 다른 것들에 시선을 두지 않고 다른 것들을 예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순전한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새 예루살렘성에서 부활의 몸을 입고 모든 성도들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신 분들을 거기서 모두 뵙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소망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뵈옵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소망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오직 하나님이 거기에 계십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 영광이 우리를 압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0-48장의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본문 35절입니다.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
오늘날에는 ‘빅’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보통의 자료나 정보가 아닌 ‘빅 데이터’,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큰 방향의 거대담론을 보여주는 ‘빅 퀘스천’(큰 질문), 그렇다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빅 소망’, ‘빅 기쁨’ 즉 큰 소망과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그분의 영광에 압도당해서 그분을 예배하게 될, 온전한 예배, 완전한 예배, 순전한 예배의 그날입니다. 이러한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우리가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오직 예수 안에서 만나므로, 그리고 오직 예수 안에서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를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큰 기쁨을 누리시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1
1662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