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조영남 사건’이 화제였던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그리지 않은 그림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판매해서 이득을 취했고 대작했던 송모씨에게 박하게 대우했다는 법정공방입니다. 1심에서 유죄, 2심에서 무죄 선고 받고 이제 대법원 판결이 남았습니다. 상식과는 달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미술계의 미술 개념에 따르면 조영남의 창작이 인정된다는 겁니다. 그를 두둔했던 진중권씨의 말입니다: “처음으로 화투를 그릴 생각을 한 것은 조영남이고, 화투 시리즈를 화랑과 전시회에 들여보낸 것이 조영남이고, 개별 작품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조영남이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주문을 넣은 것이 조영남이고, 그렇게 그려진 작품에 덧칠을 한 것이 조영남이며, 그것을 제작품으로 인정하여 사인을 한 것이 조영남이라면, 그 작품은 700% 조영남의 ‘원작(original)’이다. 이것이 이른바 ‘개념적 혁명’을 통해 관철된 현대미술의 논리다.” (월간 신동아 2019년 12월호)
화가가 조수를 두어 그림을 그리게 해도 화가의 그림으로 인정되는 아이러니입니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화가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얘깁니다. 그만큼 기술적인 그림그리기와 색칠하기보다 창의적 개념과 아이디어가 창작의 핵심이기 때문이겠죠.
예술가에게 창의성은 본질입니다. 창의성의 고갈은 곧 ‘창작의 위기’입니다. 창작의 샘이 마르면 더 이상 예술가일 수 없습니다. 창작의 영감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아야 계속적으로 예술가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도의 창의적 작업이 요구되는 예술은 아니어도 설교도 부분적으로 창작이 맞습니다.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텍스트 삼기 때문에 완전 창작은 될 수 없어도 청중의 공감대를 끌어내고 청중을 향한 효과적 전달을 위해서도,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해서도, 설교자의 창의적 기여가 필요합니다. 평생 붙들고 씨름해야 할 성경 말씀은 분량이 방대해도 여러 번 다루게 될 때가 많으므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가 분명히 있고 청중의 상황에 맞게 적실성 있게 적용하는 과업이 그때마다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창의적 영감의 원천은 아무래도 말씀의 저자가 되시고 말씀을 적용시켜주시는 성령님입니다. 예술가에게 쏟아져내리는 창의성 역시 신의 은총이요 성령의 일반적인 영감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기독교적인 언사일까요. 과학자가 자연법칙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보였을 때 그에게도 신적인 계시의 찰나가 있지 않았을까요. 일반 직업활동에서도 전혀 새로운 접근과 기획이 필요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던대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시도해야 할, 용기 있는 창의적 기여가 실제로 열매로 맺힐 때 직업세계에서 소위 잘나가게 될 것입니다.
새벽예배 기도 시간에 조그만 수첩과 필기구를 들고 갑니다. 기도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을 적고 목회적 실수가 없도록 두루 살펴야할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래도 기도하다보면 놓쳤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이렇게 해야겠다’는 마음의 확신이 듭니다. 그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적습니다. 그리고서 추진하고 실행하고 목회환경 주위를 둘러봅니다. 그렇게 성령이 인도하시는 교회, 성령의 피조물로 세워져가는 교회가 달성되어가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창의적 영감과 현실을 꽤뚫는 통찰력의 원천은 기도와 성령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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