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영생 (딛 2:11-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리고 장래 우리 앞에 펼쳐질 내세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 소망과 영광이 얼마나 큰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말할 때 대전제는 구원이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극적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 간증을 들어보면 이구동성으로 강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예전에 소개한 바 있던 조혜련씨 간증이 국민일보에 역경의 열매라는 코너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조혜련씨가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게 된 계기가 참 재밌습니다.
조혜련씨가 재혼을 했는데 남편이 두 살 어린 연하입니다. 두 살 어린 남편이 늘 반말을 했습니다. 남편에게 서로 “존댓말을 쓰자”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조건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평생 존댓말을 할 테니 교회 한 번만 가자!” 주일 교회에 한 번만 함께 가주면 평생 존댓말을 해준다는 것이었으니 밑지는 장사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한 번만’에 강조점을 두고서 교회에 따라갔습니다. 예배당에 들어가 쭈뼛거리며 어색하게 앞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혹시나 사람들이 알아볼까봐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잠시 후 예배가 시작되는 종이 울렸습니다.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를 불렀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찬송을 듣는 순간 그만 눈물이 뚝 떨어졌습니다. 눈물과 함께 자신의 지난 생애가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래 나는 정말 쓸데없는 자다. 쓸데없는 가스나로 태어나서 엄마가 죽으라고 엎어놨고, 대학에 합격해서 돈 버리는 짓을 했다며 부지깽이로 얻어맞았고, 열심히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했지만 결국은 오해를 받으며 욕만 듣던 나, 그런 쓸데없는 자가 바로 내가 아닌가!’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찬양대의 찬송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라는 가사가 또 꽂혔습니다. ‘내 형편은 나를 낳은 엄마도 형제들도 내 아이들도 모른다. 심지어 나 자신도 내가 왜 이렇게 불도저처럼 자신을 괴롭히며 사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는 누구란 말인가?’
색다른 느낌을 갖게 된 첫 번째 교회 예배 후 다음주에 다시 교회를 찾았습니다. 이날은 담임목사님께 인사도 드렸습니다. 남편이 목사님께 내가 누구인지 소개했을 때 “조혜련 성도님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 참 많이 분주하게 사신 것 같네요. 이제 그 분주함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면 좋을 것 같네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돈과 명예 때문이었을까, 성취감 때문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는지 알지도 못 한 채 늘 분주했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분주함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떻게 내려놓는지 방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 그 주님이신 건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조혜련씨의 간증은 오후 예배 때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조혜련씨가 지금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고 너무나 열렬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분의 간증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합니다. ‘이 쓸데 없는 자’를 왜 구원하여 주시는지 알다가도 모를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입니다. 이처럼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다 해야 하는 거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디도서에는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과 더불어 우리의 역할도 말씀합니다. 디도서 1장 1-3절,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신 자들에게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주시는데, 이것들은 전도 곧 복음 전도와 말씀 전파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부르심이지만 사람을 통해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전도가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불러내서 구원 받게 해주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아버지로서 가르쳐주시고 양육해주십니다. 본문 12절입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여기서 “양육하시되”는 단순 교육만이 아니라 징계도 포함합니다. 훈련 개념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가 자녀들을 훈육시켜주시는데 회초리를 들고 교육하심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매를 맞기도 합니다. 엄한 아버지처럼 회초리를 대기도 하십니다.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엄하게 교육하는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무엇을 양육하십니까? 부정적으로는, 경건하지 않은 것,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게 하십니다. 단순히 악한 것들, 세상적인 것들을 피하게 하는데 그치지 않고 싫어서 내다버리게 하십니다. 악을 피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죠. 적극적으로 갖다 버리라고 명하십니다.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과 물리치고 버리는 것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요? 버린다는 말에는 미움과 혐오가 들어가 있는 말입니다. 죄악에 대해서, 경건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 미워하고 혐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혐오해서 다 갖다버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은 무엇입니까? 요한1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에 말씀하고 있듯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 이 세상에 속한 이 세상 정욕입니다.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양육하시는 걸까요? 긍정적으로는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를 훈련시켜주십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신중함’, 다른 말로 하면 ‘근신함’입니다. 예전 한글개역성경에서는 ‘근신함’으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스스로 자기 관리를 잘하여 절제하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self-controlled) 자기 관리가 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의로움’으로 살아야 합니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른 삶,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에 대하여는 경건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건함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마음 중심에 “하나님 있음”입니다. 구체적으로 경건이란 야고보서 1장 26-27절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것이 경건이요 하나님 있는 인생의 삶의 모습이요 언어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훈련시키고 교육시키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버려야 할 것은 버리고 함양해야 할 것은 함양하려는데 있습니다. 버려야 할 것은 경건하지 않은 것들, 이 세상 정욕을 혐오해서 물리치고 갖다 버려야 하고, 가져야 할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중, 근신, 절제, 자기 관리, 자기 통제입니다. 가져야 할 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로움 바른 삶 윤리적 도덕적인 삶이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함입니다.
하나님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말씀하실 뿐 아니라 이어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함을 말씀합니다. 내세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설명을 해도 알 도리가 없으니까 다만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말씀할 뿐입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우리는 이 땅에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마라나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기대요 우리의 기다림입니다. 여기서 ‘복스러운 소망’은 ‘영생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디도서에는 ‘영생의 소망’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아까 읽었던 디도서 1장 2절에 보면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의 소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확실히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또 디도서 3장 6-7절에 보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요 작정이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을 살게 하시고 궁극적으로 영생을 소유한 영생의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실 때 영생하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래 유대인에게, 혹은 구약성경에서 영생은 시간적 지속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의미보다는, 더 근본적으로는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오는 세대의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자연적 존재 곧 육적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첫 창조 때 영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도 영생은 두 번째 창조, 곧 새 창조로만 주어질 약속이었습니다. 새 창조로만 다가올 세대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창조로만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곧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 첫 사람 아담이나 똑같습니다. 이것이 영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아담이 품고 있었던, 그리고 우리도 품고 있는 영생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대조되는 것은 타락하기 이전에 죄가 없는 상태였던 첫 사람 아담과 영광스럽게 부활한 상태에 있는 마지막 아담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첫 사람 아담이 죄를 짓고 부패한 상태에 있을 때와 대조시키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기 전 죄가 없는 상태와 영광스런 부활의 상태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뿐 아니라 온 세계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왕으로서, 그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습니까?어떤 사명 감당에 신실하지 못했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의 명령, 창조 명령이라 불리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17), 이러한 명령에 순종하지 못했고, 사명 감당에 신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영생의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누리는 영광을 얻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3장 22-23a,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다시 말해서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내쫓았던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고 하나님께 반역한 결과입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과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의 복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는 새 하늘과 새땅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죠.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값없이 마시는 생명수가 흐르는 강가에 생명나무가 있죠. 요한계시록 끝부분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생명나무로 시작해서 생명나무로 끝납니다. 생명나무 곧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첫 사람 아담에 의해서 좌절되는 듯해 보였지만 하나님은 둘째 아담, 마지막 사람, 종말론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 타락하기 이전이라도 그것은 자연적 생명에 불과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신실하게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더 영광스러운 상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약시대에 이르러 생각해보니까 아담이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자신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함으로써 들어가야 했던 영생의 상태는 오늘 우리에게는 결국 부활의 몸을 입고 들어가야 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라도 아담 역시 신실했다면 썩지 아니할 영원한 몸의 상태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타락하기 이전에라도 아담은 자동적으로 영생을 보장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생의 소망을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더욱 분명하게 이 복스런 소망,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 영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을 살리심으로써 주실 부활생명이요 썩지 아니하는 몸을 입혀주심입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스러운 소망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너무나 분주하고 그것은 너무 멀리 있어서 당장의 발등의 불만이 관심사가 아닌지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영생의 소망,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죠.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형벌, 죄값을 받으셨죠. 그렇게 해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죄의 노예상태였던 우리를 위해서 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깨끗케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목적은 우리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입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주심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이땅을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한 소망, 곧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이땅에서 이땅만 바라보지 말고 참된 소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이땅에서 때로는 훈련하시고 때로는 징계하시고 때로는 교육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잘 다듬어서 복스러운 소망, 부활생명의 상태를 얻고 영생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 전부터 품고 계셨던 계획이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작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런 값없이 오직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를 하나님이 불러주셨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값없이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덧없는 이 세상에 속한 가치들에 사로잡혀 지내다 인생을 탕진하기보다는 이 세상 정욕은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훈련받고 다듬어지고 교육 받아서 경건하고 의롭게 이땅을 살아가고, 특별히 영생의 소망, 이 복스러운 소망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이땅에 다시 오실 그날, 우리에게 부활의 영광스런 몸을 입혀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이땅에서 선한 일을 열심히 하고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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