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3일 설교 (주일 낮)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단 3:13-18)
리 스트로벨이라는 분은 현재 미국에서 기독교의 역사성과 진리됨을 설득력 있게 증거하는 분입니다. 이분은 현재 목사로서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원래는 법조 전문기자였습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서 시카고 트리뷴이라는 신문사에 입사해서 기자로서 명성을 날렸습니다. 법조 분야의 탐사보도를 해서 상을 받았던 신문기자였습니다. 이분이 언론인답게 신앙에 있어서 지독한 회의주의자였고 무신론자였습니다. 이분의 표현에 의하면 “술에 절고 자아에 도취되어 부도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분의 아내가 먼저 예수를 믿었고, 믿고 나서 아내의 성품과 가치관이 이분이 보기에도 좋은 쪽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좋은 쪽으로 변화된 것은 알겠는데,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신기하기도 했지만 죄악된 심성 때문인지 예전의 아내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탐사전문기자답게 이분은 예수의 부활이 거짓임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를 논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문기자의 호기심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핵심 사건이랄 수 있는 부활의 역사성을 무너뜨리고자 증거를 찾아나섰습니다. 이분이 로스쿨에서 배운 게 바로 그거였으니까요. 증거나 증언을 평가해서 그게 확실한지 아니면 성립이 되지 않는지를 분간하는 것이 이분의 전공이었습니다. 2년 가까이 탐색한 끝에 예수님의 부활이나 기적에 대한 법률가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결론은, 기적은 대개 신빙성이나 설득력이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의 누적되어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강력하게 입증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분도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이분은 자신의 체험에 입각해서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예수에 대해 보도하고 있는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의 증언이 믿을만한 것인지를 조사해가는 과정으로 기술된 책입니다. 신약성경 사본과 신약신학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성경 기록의 역사성에 회의적인 전문가도 찾아다니면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에 따라 결론과 판결을 내리는 과정으로 기술된 책입니다. 예수에 관한 사안에서 이분이 내린 결론은 복음서의 보도는 믿을 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창조는 역사다>라는 책에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쟁점을 가지고 각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다니고 인터뷰해서 창조에 관한 케이스에 대한 결론도 내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쓴 세 번째 케이스는 <기적>에 관한 사안입니다. 과연 성경에서 보도하는 기적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인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기적이 과연 가능한지를 탐사한 책입니다. 이전의 책들처럼 이번에도 이분은 기적에 대해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그 점을 힘써 강조하고 설파하는 전문가에서부터,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기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와, 그리고 기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신학자를 인터뷰했습니다. 기적 케이스에 관해서 이분이 내린 판결은 오늘날에도 기적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고 성경이 보도하는 기적이 믿을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이분이 인터뷰한 분 중에서 인디애나대학교 종교학과 교수인 캔디 브라운이라는 분은 하버드대학교에서 최우등 학사 학위를 받고 석박사를 받은 분으로서 객관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연구합니다. 이분은 질병 치유에 미치는 다른 사람의 기도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합니다. 이분에게 “기도의 효과를 조사할 때 과학이 어떻게 쓰일 수 있습니까?”를 질문했습니다. “여러 방법이 있는데, 우선 기도 전후의 진료 기록부를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진단된 병명이 있었나요? 엑스레이나 혈액 검사나 기타 진단 절차를 통해 병이나 부상이 밝혀졌나요? 나중에 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까? 그리고 임상연구도 합니다. 임상 연구는 기도 후에 벌어지는 일을 측정하려고 단기간에 국한하여 진행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터뷰에서 캔디 브라운교수는 과거 기도의 효과에 관해서 학문적으로 입증된 여러 연구 사례를 열거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수행한 연구에 관해서도 말해주었습니다. 이분은 실제로 치유가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곳에 가서 연구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기적이 많이 보고되는 곳을 찾으려 했습니다. 보통 초자연 현상이나 기적이 많이 발생한다고 보고되는 곳은 주로 문맹률이 높은 지역입니다. 아무래도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을 무언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료 해택이 빈약해서 병자들이 의지할 데가 기적밖에 없는 곳에서 기적이 자주 발생하고 보고됩니다. 이런 곳에서 하나님은 기적의 능력을 베푸시는 경우가 많음을 알고서 이분은 그런 곳을 찾으려 한 것입니다. 이분이 선택한 곳은 아프리카 남동 해안에 자리안 모잠비크였습니다. 1977년부터 1992년까지 참담한 내전을 겪은 지역이고 기독교인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 나라입니다.
그곳에 가서 20년 넘게 모잠비크에서 선교사로 섬기면서 치유의 은사를 보여주었던 한 선교사 부부와 함께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들이 선택한 질병은 심인성 치유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 시각장애와 청각장애였습니다. 이 팀은 기도 직전에 여러 표준검사와 기술 장비로 청력이나 시력 수준을 측정했습니다. 기도를 받게 한 후 즉시 환자를 다시 검사했습니다. 기도는 선교사 부부가 했는데 짧으면 1분, 어떤 때는 5-10분까지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누가복음 4장 40절처럼 “해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항상 신체 접촉을 병행하면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를 받은 실험 대상자는 총 24명이었습니다. 결과는 매우 놀라웠습니다. “기도 후에 청력은 매우 의미 있는 차도가 있었고, 시력은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도를 보였습니다. 검사받은 피험자 거의 전원이 차도를 보였습니다. 아주 극적인 결과도 있었습니다. 어떤 대상자는 가청 임계치가 50데시벨도 더 떨어졌습니다. 보통 100데시벨은 근처의 오토바이나 잔디 깍는 기계의 소리고 80데시벨은 믹서기 소리고 50데시벨은 보통 집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고 0데시벨은 정적입니다... 시력의 의미 있는 차도는 시력 검사를 받은 집단 전체에서 고르게 측정되었습니다. 향상된 시력은 실레로 평균 열배 이상 정확해졌습니다.” 브라운 교수는 구체적인 사례를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앞도 볼 수 없고 소리도 들을 수 없는 한 노인 여성은 기도 전에는 양쪽 귀 모두 100데시벨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암석을 뚫는 드릴이 돌아가도 듣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기도 후에는 오른쪽 귀와 왼쪽 귀가 각각 75데시벨과 40데시벨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 되었습니다. 시력을 위해서 기도한 두 번째 기도 후에 검사해보니 시력도 맹인 수준에서 확연하게 향상되었습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서던 메디컬 저널>이라는 전문 학회지에 실렸습니다. 이후에 브라운 교수는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하려고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반복 연구를 실시했고 결과는 이전 실험과 유사하게 기도의 효과를 입증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리 스트로벨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고 신약성경이 보도하는 기적 사건이 믿을만하다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분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하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이끈 이분의 아내가 불치병에 걸려 날마다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일반 의술로 안돼서 고쳐보려고 침술, 안마, 건강 보조식품, 대체요법 등을 써보았지만 이분의 아내를 괴롭히는 만성 근육통인 섬유근육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벌써 수십년째 이분의 아내는 쑤시고 욱신거리는 통증을 달고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적 인터뷰를 수행하면서 이분은 기적이 오늘날에도 가능하고 기도가 기적을 일으킨다고 믿게 되었지만 속으로 “그런데 내 아내는?”이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분은 아내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치유해달라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아직도 차도가 없습니다. ‘왜 우리 아내에게는 기적이 없을까?’
그래서 이 책에서 리 스트로벨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한 한 미국의 신학교 교수를 찾아갑니다. 이분 역시 아내가 몇 년 전에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은 분입니다. 이분 역시 아내를 위해 오랫동안 기도해왔지만 소위 응답을 받지 못한 상태로 힘겹게 신앙을 이어가는 분이었습니다. 이분과 인터뷰를 하는데 다음과 같이 말하더랍니다: “때로 우리에게 치유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면 ”주님, 무엇이든 주께서 저를 위해 예비하신 그 일을 저도 원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당장은 아주 어렵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순종과 순복의 기도, 신뢰와 믿음의 기도입니다.”
캐서린 마셜이라는 분이 <기도에의 모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이분은 ‘수용’과 ‘체념’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수용과 체념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체념은 ‘이게 내 상황이다. 나는 단념하고 이대로 주저앉는다’라고 말한다. 체념은 하나님 없는 우주의 흙바닥에 누워 최악의 사태에 자신을 방치한다. 수용은 ‘이게 당장 내 상황인 건 맞다. 나도 현실을 냉철히 직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아버지께서 무엇을 보내시든 내 손을 벌려 기꺼이 받아들인다’라고 말한다. 이렇듯 수용은 결코 희망의 문을 닫지 않는다.” 또한 이분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신뢰하고 싶습니다. 제 기분과 상관없이 제 영혼은 영원히 믿을 만한 진리를 아오니 곧 아버지께서 제 곁에 계시고, 저를 사랑하시며, 제게 가장 좋은 길을 홀로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 의지의 행위로 이 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든 받아들이겠습니다.” 낸시 거스리라는 여성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강한 믿음의 정의란 하나님께 기적으로 고난을 없애 달라고 전심전력으로 간구한 뒤 그대로 해 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측정하는 기준은 하나님을 조종하여 내 뜻을 관철시키는 재간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순복하려는 의지다.”
윌리포드라는 경건한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실 확실한 공식은 없으므로 예수께서 언제는 허락하시고 언제는 안된다고 하실지 알 수 없다. 이게 절대주권의 이면이다. 가부와 조건과 시기와 방법은 다 그분의 소관이다. 그분이 어떻게 결정하실지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믿음의 근거를 특정한 기도 응답에 둘 게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에 두면 된다. 기적은 일시적이지만 예수의 말씀과 가르침은 영생 곧 진정한 삶을 가져다준다.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 안된다고 하셔도 그분의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덧붙여서 조언합니다. “당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면 하나님께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없지만 신뢰하고 싶습니다’라고 아뢰라. 이게 소망의 출발점이다.” (<기적인가 우연인가>, 리 스트로벨 저 참고)
오늘 다니엘서 본문은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왕이 바벨론의 신의 큰 금신상을 세워놓고 모든 지방 관리와 백성을 신상 낙성식에 강제로 참여시켜 그 앞에 참배하도록 한 내용입니다. 이때 다니엘의 세 친구였던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그 앞에 절하고 신상을 섬기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들이 굽혀 경배하기를 거절했다고 왕에게 보고했을 때 느브갓네살왕은 당장 이들을 죽이기보다 먼저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회유라는 형식이지만 이는 배교를 종용하는 것으로서 협박이 가미되었습니다. 금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뜨거운 풀무불에 쳐넣을 거라는 협박이었습니다. 이러한 협박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왕에게 말합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16-18절)
이들의 신앙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이들의 즉각적인 구원 여부와 상관없이 존귀를 받아야 하고 우리의 신뢰를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인간의 구원 경험보다 거룩하고 인간의 목숨보다 숭고하게 지켜야 할 가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박해를 당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으면서도, 동시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이땅에서 구원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삶에서 하나님의 즉각적인 손길의 개입과 도움을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죽음 이후에까지도 계속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는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이러한 말씀에 따라 신앙고백을 가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든 젊은이들을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호하시고 건져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땅에서도 극적인 반전의 개입과 도우심을 자주 펼치십니다만, 때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도 기독교 역사에는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다시 말해서 이땅에서가 아니라 내세에 가서야 구원의 손길을 펼쳐주실 때에라도 우리는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붙들어야 합니다.
1919년 4월18일 경기도 화성군 발안면의 제암리교회 성도들은 일제의 만행으로 예배당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습니다. 목격자이자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그들은 불속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하늘 가는 밝은 길이’를 찬송하며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불속에서 건져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학으로 읽는 다니엘서>, 김회권 저, 153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수준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역사에서 보여주는 신앙의 사람들의 순교적 신앙,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을 믿고서, 어떠한 어려움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기대하는 믿음이면서도 동시에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신실하심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에게도 ‘그리 아니하실라도’의 믿음이 있어서 이땅에서의 기적보다도 더 큰 구원과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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