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29일 설교 (주일 낮)
평탄한 길 (스 8:21-23)
우리는 평탄한 길을 걷기 원하지 험악한 길을 걸어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어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은 세월을 보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은 애굽왕 바로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47장 8-9절입니다.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평생의 삶이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이었다는 회고입니다.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평생 우여곡절이 많았고 어떻게 백삽십세까지 살 수 있었는지 의아할 정도로 쉽지 않은 삶이었다는 고백이겠죠.
우리 모두는 ‘험악한 세월’을 지내기보다 ‘평탄한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복음송 “내일 일은 난 몰라요”의 1절 가사입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이 찬양이 우리의 고백이리라 생각합니다. “평탄한 길 주옵소서!”, 이러한 마음의 소원이 응답되는 복된 인생,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에스라서 본문에서도 에스라가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에스라는 유다 백성들이 2차 포로 귀환할 때 지도자입니다. 바벨론에 멸망당한 후 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포로로 잡혀 간지 약70년이 되었을 때 바벨론에서 1차로 유다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1차 포로 귀환으로 약 5만명의 유다 백성들이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가 BC 538년입니다. 이보다 대략 80여년 후에 2차 포로 귀환이 있었습니다. 이때 지도자가 에스라입니다. 에스라의 지도 아래 1758명의 유다 백성들이 돌아왔습니다. 에스라는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 관리였고,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으로서 율법을 잘 알고 율법을 가르친 학사였습니다. 에스라 7장 6절에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라고 에스라를 소개합니다.
에스라는 아마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왕으로부터 유다 파견을 명 받았던 것 같습니다. 왕이 제국의 고위 관리였던 에스라를 본국으로 보내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게 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 정책 중 하나는 각 나라의 종교법을 존중하고 그 법을 활용하여 식민지의 치안과 행정과 사법을 안정적으로 경영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은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되었습니다. 라이벌 경쟁상대인 애굽과의 직접적 충돌을 막아주는 완충지대의 역할로 인해서 유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중요성이 인정되었습니다. 유다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유다의 성전체제를 정비하고 개혁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유대교 율법에 능통하고 성전에 익숙한 제사장 출신이면서도 페르시아법을 잘 아는 관리가 필요했고 그 일에 에스라가 적격이었습니다. 페르시아왕은 그를 일종의 전권대사로 파견해서 유대교 율법에 맞게 성전체제를 개혁하고 행정권을 수행하고 사법권을 확립하게 했던 것입니다.
왕의 부임 명령을 받고서 에스라는 마음에 결심했습니다. 에스라 7장 10절입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러한 결심을 가지고 에스라는 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돌아가서 왕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으려면 제사장 계층이나 레위인이 대거 함께 해야 했습니다. 왕의 허락을 받고 에스라는 본국으로 돌아갈 유다 백성들을 모집하였고, 특별히 제사장 출신과 레위인을 신경 써서 모집했습니다. 유다 달력으로 1월 1일에 모집 공고를 내고 모집하고서 1월 12일에 바벨론 아하와 강가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약 4개월의 험난한 여정을 보내고서 5월 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2차 포로귀환의 지도자로서 바벨론땅을 출발하기에 앞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에스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본문 에스라 8장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에스라는 유다땅으로 돌아갈 1500여명의 사람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도하였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지 적어도 100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 이제는 생활터전이 완전히 바벨론화된 사람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결심과 발걸음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린 자녀도 있었고 중요한 소유물들도 함께 했습니다. 가다가 어떤 일을 만날지 모르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앞날이었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특별히 더욱 위험하게 생각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성전을 회복하고 개혁하고 성전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바벨론에게 사로잡혀 빼앗겼던 중요한 성전 기구들을 가지고 갔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개혁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물도 가지고 갔기 때문입니다. 상당한 액수일 거로 추정할 수 있는데 이 거대한 행렬이 도둑떼에 쉽게 노출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한 소문이 이미 제국 안에 파다하게 퍼졌을텐데 길에서 매복하던 군사들이 이들을 공략할 수도 있을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위험은 에스라가 자초한 측면이 큽니다. 에스라가 왕의 임명을 받고 본국으로 귀환할 때 왕의 도움과 군사력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에스라 8장 22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왕의 임명을 받고 왕의 전권대사로 고국에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충분히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여서 제국의 군사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손쉬운 길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했다기보다는 왕에게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왕과 자주 알현할 수 있었던 고위관리였던 그가 왕에게 가끔 자신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왕에게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선, 곧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도우실 것을 종종 말해왔는데 막상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 왕의 군사력에 의존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왔던 것의 신뢰성이 타격을 받을 것을 에스라는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확실했습니다.
우리는 에스라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참 별 것 다 걱정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도움이고 하나님의 간접적인 도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참 유난스러운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에스라보다 13년 후에 그러니까 BC 445년에 제3차 포로귀환을 이끌었던 느헤미야는 에스라와는 반대로 아닥사스다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제국의 군사력의 도움을 받고 안전하게 유다 백성들과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와 비교하면 에스라는 어찌보면 근본주의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스스로 위기를 자처한 형국입니다. 편안 길, 쉬운 길을 마다하고 오히려 어려운 길을 선택해서 정면돌파하려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더욱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겠죠. 그래서 금식을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평탄한 길”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에, 그리고 닥쳐올 위기가 너무 크게 예상되었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평탄한 길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순히 기도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며 겸손하게 기도했습니다.
금식은 무엇입니까? 금식은 말그대로 곡기를 끊는 것입니다. 곡기를 끊음으로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극적인 구원의 능력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이요 금식기도입니다. 에스라는 온 이스라엘로 금식하게 하면서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기도하되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우리가 새벽예배 때 이사야서를 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23장까지 보았는데요 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국에 대한 심판 예언입니다. 대개 공통적으로 하나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는 이유, 열국이 심판당하게 된 원인이 무엇이냐면 바로 그들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제국을 심판하셨고 또한 교만한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열국은 그렇게 심판을 당하고 이스라엘이 심판을 당하는 것은 회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후에 이스라엘을 더욱 정결하게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욱 아름답게 빚어가십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생의 상식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면 ‘평탄한 길’은 요원한 길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록 범죄하고 하나님께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겸손하게 엎드리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엎드려서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하나님께서 금식하면서 겸비하게 엎드려 간절히 기도하는 2차 포로귀환 백성들과 에스라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낙해주셨습니다. 그야말로 “평탄한 길”을 주셨습니다. 에스라 8장 31절입니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2차 포로귀환 백성들은 무사히 안전하게 예루살렘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평탄한 길”을 달라고 그들이 드렸던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생각하는 평탄한 길은 무엇입니까? 에스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페르시아왕의 군사적 호위를 받고 안전을 미리 확보하여 사전에 위험을 대비하고, 그렇게 예루살렘을 향해서 떠나는 길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에스라는 전도 대상자라 할 수 있는 왕에게 조그만 오해나 하나님의 명성에 흠이 가는 것이나 자신의 신앙의 진실성에 대한 모순을 염려해서 평탄한 길을 거절했습니다. 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는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구하고 있습니다. 평탄한 길을 마다하고서 평탄한 길을 구하는 역설입니다. 왕이 제공하는 평탄한 길이 아니라 진정한 왕이시고 이 우주의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이 제공해줄 수 있는 평탄한 길을 구했습니다.
평탄한 길은 안락한 길이 아닙니다. 쉬운 길도 아닙니다. 때로는 인간의 도움을 구하면 오히려 평탄하게 갈 수도 있을 터인데 오히려 믿음으로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평탄한 길은 오히려 모험으로 사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평탄한 길은 믿음으로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이 가장 안전한 길이요, 하나님이 가장 좋은 대책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금식하며 겸비하고서 평탄한 길을 허락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만 임하는 도움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4장에 보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이 들어 죽음에 가까웠을 때 어렵게 낳은 독자 이삭의 신붓감을 구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이삭은 어느덧 40세가 되어 노총각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며느리를 구하는 소위 ‘평탄한 길’은 가까운 곳에서 즉 가나안 족속 중에서 며느리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쉬운 길이 아니라 믿음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어려운 길을 선택합니다. 멀리 떨어진 자신의 고향 나홀성으로 자신의 종을 보내서 거기서 이삭의 신붓감을 찾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고향땅에서 떠나게 하셨을 때 주신 약속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평탄한 길이 아니라 어려운 순종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이 어렵다보니까 순종을 할 때 평탄하도록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삭은 약속의 자녀, 약속의 씨로 여김을 받고 어렵게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가나안인이 아니라 자신의 동족에게서 신붓감을 구하려고 충성스러운 자신의 종 엘리에셀을 저 멀리 자신의 고향땅에 보냅니다. 가서 신붓감 구해오라는 특명을 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지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24장 7절입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고향 땅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그 사자를 너보다 앞서 보내실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지니라” 아브라함의 대단한 믿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예전에 약속한 말씀,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있는 아브라함입니다. 이 땅을 차지하려면 이 땅에서 거주해야 하고, 씨가 계속 자손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러면 이땅에서 결혼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아무에게나 장가보낼 수 없는 노릇이죠. 이러한 약속을 붙들고서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면서 ‘내가 지금 너를 저 멀리 내 고향땅에 보내서 적절한 신붓감을 구해오라는 명령은 운동장에서 바늘 찾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 분명하지만, 이러한 약속을 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너보다 앞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 순적하게 신붓감을 예비해놓으신 신붓감을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는 믿음의 말을 합니다.
나중에 이삭의 신부로 리브가라는 여인이 선택되죠. 리브가를 만난 것도 극적이었습니다. 엘리에셀은 충성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땅 어귀에 이르렀을 때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르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오늘 나에게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내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창 24:12) 엘리에셀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순조롭게 만나게 해달라”, “평탄한 길”을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평탄한 길’을 위한 간구는 종 엘리에셀 이전에 아브라함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 리브가를 만나고서 그의 집에 가서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에게 말합니다: “주인이 내게 이르되 내가 섬기는 여호와께서 그의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어 네게 평탄한 길을 주시리니 너는 내 족속 중 내 아버지 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것이니라”(40절) 아브라함이 종에게 하나님께서 사자를 너와 함께 보내서 너에게 평탄한 길을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 역시 아브라함의 고향땅 어귀에 이르러서 평탄한 길, 순적한 길을 구했던 것입니다. 종은 아브라함의 이 말을 가슴에 담고 간직하였고 고향 마을 어귀에서 하나님께 또 다음과 같이 그래서 기도했던 것입니다. “내가 오늘 우물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만일 내가 행하는 길에 형통함을 주실진대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42-43절)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평탄한 길과 형통함을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기도했던 것입니다.
평탄함과 형통함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에도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도 평탄함과 형통함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물론 조건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모세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지도자를 이어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는 것은 모세의 종이었던 여호수아에게 벅찬 과제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과 걱정뿐이었을 겁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평탄함을 원하느냐, 형통함을 원하느냐, 그러면 말씀대로 순종해라!”고 약속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탄한 길은 손쉬운 길이나 발쭉뻗고 아무 걱정없이 지내는 삶도 아니고, 안락한 길도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에 순종하려다보니 믿음으로 살아가는 과정속에서 평탄한 길을 구하므로 응답받는 길입니다. 때로는 위험이나 모험을 자처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선택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에 의해서 결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소망과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결정하는 믿음의 선택이기 때문에 결코 수월하지 않습니다. 험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험난함이 예상되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평탄한 길을 구하여 얻게 되는 길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에스라처럼 때로는 금식하고 때로는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평탄한 길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여정을 순적하게 형통하게 이끄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여생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로 인해서 ‘평탄한 길’로 인도함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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