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15일 설교 (주일 낮)
열매 맺는 인생 (겔 47:1-12)
여러분 6월 17일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세계 사막화 방지의 날’입니다. 전 세계의 기후변화와 무리한 개발과 자연환경의 오남용으로 인해 사막 지역이 넓어지는 사막화가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막화방지협약이 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기후적인 사막화만이 문제가 아니라 영적 사막화 또한 무서운 기세로 우리의 정신을 좀먹고 있습니다. 세상의 현실은 나날이 광야와 같은 불모지가 되어가고 죄로 인해 죽음의 사막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막화가 진행되는 세상을 향해, 그것에 맞서 사막화를 극복하는 생명의 관개용수 활동이 교회의 숭고한 사명입니다.”(김회권교수)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오늘 본문에 나오듯이 성전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의 핵심 내용이 성전의 본래 기능의 회복입니다. 회복된 성전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본래 제사장 가문의 사람입니다. 유다 왕조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았을 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로서 그는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나님의 계획을 환상과 비전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이 본 환상의 핵심은 회복된 성전입니다. 성전이 본래 기능을 회복하는 비전입니다. 에스겔은 성전 밑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흘러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적은 양의 물이었으나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물줄기로 커져갔습니다. 그 물은 처음에는 발목을, 점차 무릎을, 그리고 허리를, 나중에는 능히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강물이 되었습니다. 성전 문지방 밑에서 스멀스멀 물이 조금씩 나와 흘러가는데 그 물이 점점 많아져서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 되는 환상을 보았던 것입니다.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생명이 되살아났습니다. 성전이 회복되어 성전을 통해 생명수가 세계 전역으로 흘러가므로 죽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심지어 죽은 사해 바다조차 생명이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물줄기가 커져 강이 되었는데 강 좌우가에 있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새로운 열매를 산출했습니다. 강 좌우 가의 과실나무는 잎이 번성하고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삶이 어렵고 힘들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죽었던 것들조차 다시 살리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신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과 비전을 우리도 보고 그 생명의 사역에 쓰임받으므로 열매 맺는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거대한 강물처럼 크게 불어난 물은 처음에는 성전 건물의 문지방에서 스며 나왔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성소와 성소 안에 있는 성전 건물은 동쪽에 출입문이 있습니다. 바로 동쪽 성전 문 입구에서 물이 스며나왔습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물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요한복음 7장 38-39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참된 성전은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물과 피가 쏟아져나왔다고 말씀합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 19:3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의 전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로 깨끗해진 심령 가운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과 비전은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로부터 쏟은 보혈의 피와 그 육체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성령이 지금도 강같이 흘러 지금도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환상 속에서 처음에는 발목이 물에 잠기고 다음에는 무릎이 잠기고, 다음에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마지막에는 헤엄쳐야 할 만큼 많은 물이 있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처럼 되었습니다. 본문 3-5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천 척은 약 450m 가량 됩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은혜체험은 점점 깊어져야 하고 신앙은 전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체험과 신앙의 전진과 성장과 성숙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오로지 성령충만입니다.
성전 문지방에서 스며나온 물이 불어나서 발목이 잠기고 이어서 무릎이 잠기고, 다음에 허리까지 물에 잠기고 마지막에는 헤엄쳐야 할 만큼 많은 물이 있어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처럼 되었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갑자기 뻥튀기처럼 확대되는 것이 아니라 물이 흘러갈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점진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점점 수심이 깊어졌습니다. 발목, 무릎, 허리 깊이, 나중에는 온 키를 덮어버리는 강물! 이 가운데 어떤 상태에서 우리가 가장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었다고는 해도 발목만 물에 잠긴 상태라면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는 삶일 것입니다. 발목만 잠긴 상태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자신의 맘대로, 욕심과 본성대로, 예전 그대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이 자유란 마틴 루터가 말한 죄 짓는 자유로서 노예의지가 아닐까요?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대로 행하는 것은 결국 죄짓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구속을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성령의 소욕이 온통 우리를 지배하면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물이 발목만 찰 때와 허리까지 찰 때를 비교해보십시오. 허리에까지 물이 차면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의 지배를 더욱 받게 되는 상태입니다.
결국에는 누구도 건너지 못할 강이 되었습니다. 오직 강물의 흐름에 맡긴 채 수영해야 할 정도로, 키를 넘길 정도로 거대한 강수가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오직 성령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성령충만함입니다. 이때에는 육체의 생각보다 우리가 성령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사고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경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정도 물이 찼다고 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합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거듭거듭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인 전부가 성령의 이끌림과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성전 밑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온 물이 거대한 강수가 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까?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죽었던 것들이 되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있게 됩니다.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성전의 동쪽 입구에서 스며나온 물이 동쪽으로 흘러갔습니다. 동쪽에 무엇이 있길래 동쪽으로 흘러갔습니까? 거기에 죽음의 바다 곧 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바다가 있는 곳으로 하나님의 생명수 강물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왜 죽음의 바다 사해가 되었습니까? 사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해면 표고가 제일 낮아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너무나 깊은 곳에 생긴 바다이다보니 물이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 없고,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못하다보니 뜨거운 태양 아래 물이 계속 증발해 염도가 너무 높아져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된 것입니다.
생명수가 유입되므로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사해조차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의 물고기도 살아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1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까요? 사해의 모든 부분이 되살아나면 사해에서 더 이상 소금이 생산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금은 실생활뿐 아니라 제사드릴 때도 언제나 꼭 필요한 것이므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여전히 남아 있을 거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생명수가 유입되므로 죽음의 바다라 불리는 사해가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복음을 들고 나가면 변화되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이미 선지자 에스겔은 에스겔 37장에서 죽음의 아골골짜기에 가득한 시체, 이미 죽은지 오래되어서 마른 뼈로 널려있는 죽음의 공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그 말씀과 더불어 성령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이미 죽은지 오래된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가 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마른 뼈와 같이 죽은 영혼으로 가득한 사막의 현실 한복판에서 어떻게 생명의 역사가 꽃피워질 수 있었습니까?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역사,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믿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생명의 복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로 그 사람에게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을 전달해야 합니다. 누가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만이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말씀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실 것을 굳게 믿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12절에서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과실나무가 맺게 될 새 열매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서 생명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마치 시편 1편에 나오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시편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며 준행하는 사람을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적용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강물 좌우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사람입니다. 말씀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린 사람입니다. 이 나무들은 생명으로 푸릇푸릇한 상록수와 같고, 세상의 병든 것과 아픈 것을 치료하는 약재가 될 것입니다. 생명수로 소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성령의 생명을 전달하는 전달자 노릇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거대한 강물처럼 크게 불어난 물이 온갖 것들을 살리는 화려한 생명의 역사를 이룹니다. 그러나 여전히 강조되는 것은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12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교훈을 준다고 생각하나요? 모든 은혜의 원천은 예수님이시고 성령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능력은 사람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피조물이 되고 성령의 전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로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현장이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현장이요, 이곳에 모인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고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가는 곳마다 나아가면 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수가 강처럼 세상을 향해서 흘러가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음으로 가득찬 사해 바다까지 흘러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통해서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생명의 자리, 죽음이 아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의 통로로 우리가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다 생명수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로써 맺고 싶은 “새 열매”가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가을에 맺고 싶은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서 우리의 인격이 더욱 성장하기를 원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서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랑과 섬김으로 다른 지체들을 대해주고 그들이 이로써 기쁨을 얻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으로 인해서 소망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포로상태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수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을 내다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과 비전은 이와 같습니다. 좌절로 주저앉았던 자리를 일어서게 하는 힘이 바로 환상과 비전에서 나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이러한 환상과 비전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비전이 오늘 우리의 예배 현장에서 성령과의 교통속에서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서 실현되는 축복이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요한복음 15장 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생명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열매 맺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 가을에 우리가 기도하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강물 좌우에 심겨진 상록수와 같아서 다달이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으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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