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23일 설교 (주일 낮)
위로부터 난 지혜 (약 3:13-18)
최근에 상산고가 자사고 재지정 탈락 위기에 놓인 것이 국가교육의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상산고 설립자인 홍성대이사장은 상산고를 영국의 최고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스쿨'처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상산고에 많은 투자를 한 줄 압니다. 영국의 ‘이튼스쿨’은 영국의 최고 엘리트 사립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이튼스쿨은 만 13∼18세 남학생만을 모집하여 교육하는 중등 교육기관으로 연 학비만 약 6300만 원에 달합니다. 그래도 입학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고 합니다. 졸업생 중 약 3분의 1이 최고 명문 ‘옥스브리지’(옥스퍼드+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정도로 명문대 진학이 보장돼 있기 때문입니다. 역대 영국 총리 중에서 이튼스쿨 출신이 35%가 넘을 정도로 엘리트 정치인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다음달에 선출될 차기 영국 총리로 유력한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 역시 이튼스쿨 출신입니다.
이튼스쿨 출신들이 정치계에서 유달리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우수한 학생들이 모이기도 했지만 이튼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학교 내 수많은 소모임에서 서로를 뽑고 뽑히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표를 얻기 위해 속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매력적으로 행동하는 법부터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존슨 전 장관 역시 이튼스쿨과 옥스퍼드를 거쳤고 집안이 소위 빵빵한 집안 출신인데 대중들에게 어떻게 각인이 됐냐면 ‘매우 서민적이다’, ‘소탈해보인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소탈한 ‘동네 아저씨’ 이미지로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그가 의원 시절 흐트러진 더벅머리로 자전거를 타고 국회에 출근하던 모습이 아직도 대중에 각인이 돼있고,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한 기자는 분석하기를 “노숙인 같은 머리, 후줄근한 옷차림은 조심스레 ‘연출’된 결과물”이라며 “이런 모습이 상류층 정치인에게 반감을 갖는 유권자들의 환심을 샀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금수저인데 흙수저처럼 비치고 있다는 것이며 그 이미지가 먹혀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튼스쿨 출신들을 ‘이토니안’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뼛속까지 익힌 정치 감각, 타인의 호감을 유발하는 화술과 태도 등을 자연스레 습득하고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대중에게 어필이 되는 강점이 되는 것입니다. (동아일보 2019.6.22.)
이런 게 지혜입니다. 세상에서 성공을 가져오는 지혜입니다. 세상살이에서 지혜가 없으면 소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게 바로 지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마 10:16)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파송 받은 제자들은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6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살아갈 때 한편으로는 뱀 같이 지혜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지혜에는 뱀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이 함께 포함돼 있을 때 그것이 참된 지혜라 할 수 있고, 그 참된 지혜야말로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어느 교회 게시판에 한 젊은 성도가 올린 간증입니다. 이분이 취업 후 신입직원 교육을 받고 12월 중순에 부서로 배치되었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 직장선배들의 이름을 대충 알아갈 즈음, 연말이라 망년회를 하였습니다. 강남의 으리으리한 식당으로 30여명이 단체회식을 갔는데 처음부터 술판이 거하게 벌어졌습니다. 몇 번 술을 주고받더니 분위기 메이커인 이분의 직속상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며 술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앉은 순서대로 따르다가 이분 앞에 와서는 '어이! 우리 부서에 온 것을 축하한다. 술 한 잔 받아라' 하길래 '선배님. 저는 예수 믿어서 술 안 먹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선배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이 새끼 봐라. 선배가 술 권하는데 뭔 소리야? 받으라면 받아, 임마!' 하고 윽박질렀습니다. 계속 안 마신다고 했더니 술잔을 내 턱밑에 바짝 대고는 험악한 얼굴로 노려봤습니다. 그렇게 약 20초간 기싸움하다가 갑자기 술잔을 획 집어던졌습니다. '쨍그랑' 술잔 깨지는 소리에 그렇게 시끌벅적하던 회식자리가 찬물 끼얹은듯이 조용해졌습니다. 선배는 씩씩거리며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아버렸습니다.
10여초가 지나자 또다른 분위기 메이커가 '자, 자, 신경쓰지 말고 놉시다' 하며 떠들자 또다시 시끌벌적해졌습니다. 나는 이 엄중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나 고민고민하다가 10여분이 지난 후에 그 선배에게 술병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선배님, 술 한 잔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제가 선배님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예수 믿어서 술 안 먹습니다' 라고 하니 선배는 '야, 야, 됐다 임마. 알았으니까 저리 가라' 하며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해사 첫 회사 망년회는 어색하게 흘러갔습니다.
몇일이 지나자 또다시 회식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익어가자 역시나 예의 그 선배가 일어나 술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생각에 '아이구, 또다시 한 판 전쟁을 치뤄야겠구나' 싶어 바짝 긴장했습니다. 드디어 내가 술을 받을 차례가 되었는데, 이게 왠 일... 선배가 나를 보더니만 뒤돌아서서는 '야, 사이다 어딨어?' 하더니 사이다를 가져와 따라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무사히 감사하게 넘어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식사자리에서 아무도 나한테 술을 권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깨달은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믿음을 보여줘 버리니까 그들도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인정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술 안 권하는 것은 좋은데 술 먹으면서 회포를 푸는 회식자리에서 이분이 꿔다 논 보리자루마냥 점점 왕따가 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회사에서의 인간관계는 공식적 업무를 보는 사무실보다 비공식적 모임인 회식자리에서 다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되니 회사 동료 선후배들과 허물없는 인간관계를 맺기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하나님,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기도한 끝에 한 가지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회식을 하면 술병을 제일 먼저 잡고 술을 따라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잔에는 물을 따르고 같이 술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습니다. 물 한 잔 먹고는 마치 취한 것처럼 혀를 꼬부라트리고는 같이 큰 소리로 떠들며 어울렸습니다. 술을 안 먹어도 술 먹은 사람들보다 더 떠들었습니다. 술취한 사람들은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했던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데 끝까지 들어주고 맞장구쳐줬습니다. 그렇게 해서 1차 회식자리는 잘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2차는 보통 노래방으로 가는데, 예수 믿다 보니 세상노래를 다 까먹어 아는 노래가 없었습니다. 노래방에서도 왕따였습니다. 신나게 자기들끼리 노는데 탬버린만 힘없이 쳐주는 역할만 해야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노래 모른다고 2차에서 못 어울리면 동료의식이 없어지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요?'... 하나님께서 또 지혜를 주셨습니다. 대중가요 중에서 건전한 것들로 5곡을 달달 외웠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부터 노래방을 가면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분이 겨우 외워놓은 노래를 다른 사람들이 먼저 불러버리면 말짱 꽝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를 잡고는 첫 곡으로 분위기를 확 띄우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주로 윤수일의 '아파트'를 불렀습니다. 다음에 노사연의 '만남'이나 조용필의 '친구여' 등 느린 곡을 하나 더 부르고 빠지면 다시는 마이크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일단 스타트를 이분이 끊으면서 분위기를 달궈줬고 같이 동참한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줬으니 나머지 시간은 편안한 마음으로 탬버린만 열심히 쳐주면 되었습니다. 3차는 보통 맥주집이나 당구장이었는데, 3차까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다들 비틀비틀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도 정신이 말짱한 사람은 이분밖에 없었습니다. 다들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로 뛰쳐나가 '따블!', '따따블!'을 외치고 있는 동안 이분은 유유히 차를 몰고나와 그 날의 VIP들만 차에 태워 집까지 친절하게 택배서비스를 해드렸습니다. 이렇게 되니 이제 회식이 있는 날이면 상관들께서 'OOO씨, 오늘도 회식 참석하지?' 하며 은근슬쩍 물어오는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세상 사람들과 섞여 지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면 술자리 등과 같은 시험의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정면돌파를 하는 게 가장 지혜롭습니다. 이분이 세상문화에 섞이지 않으려고 힘들게 발버둥치다가 하나님의 지혜를 얻어서 이렇게 의연하게 대처하기까지는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며 5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유념할 것은, 예수 믿는다고 세상과 어울리지 않으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면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어울리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세상을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이분은 간증문을 마무리했습니다. (http://www.ds-ch.org/xe/235236)
처한 환경과 분위기와 여건에 따라 다양한 대응이 가능하겠지만 이분은 나름대로 조직 문화에서 유능하게 생존하면서도 신앙의 색깔을 잃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망각하지 않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서있는 듯합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면서도 비둘기와 같이 순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뱀같은 지혜만 있으면 세상적 지혜이지만 비둘기와 같은 순결이 함께 할 때 진정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사도는 땅의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땅의 지혜는 정욕적이고 마귀적이고 다툼과 갈등을 불러오는 것이요 위로부터 난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요 화평과 의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믿음도 그렇고 지혜도 그렇고 주머니속에 넣고 다니는 게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고 입증해내야 할 그 무엇입니다. 믿음도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하고 지혜도 행함으로 드러내보여야 합니다. 지혜롭게 행동할 때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인정되는 것이죠. 행함으로 지혜를 보일 때 특별히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동하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지혜에는 온유함이라는 게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지혜는 보통 싸워서 쟁취하고 대립하여 승리하는 세상적 지혜입니다만, 하나님의 지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온유함입니다. 참된 지혜는 항상 온유함을 동반합니다. 온유함이 아니라 독한 시기와 다툼의 기운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지혜는 서로 시기심을 발동시키고 이기적 욕심을 자극하여 더욱 다투게 하는 것이라면 참된 지혜라 할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시기와 다툼과 거짓이 동기가 되어서 자랑하는 말을 하게 되고 거짓말하게 되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온유함이 사라지고, 독한 시기나 다툼에 휩싸인다면 거기서 내뱉는 말이나 행동은 지혜로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지혜라 할 수 있다면 그 지혜란 세상적 지혜요 마귀적 지혜요 정욕적 지혜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어지는 15-16절을 보십시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지혜는 세상적 지혜와 전혀 출처가 다른 지혜입니다. 근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지혜의 특징도 다르고 지혜의 열매도 다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여기에 ‘위로부터 난 지혜’, 그러니까 하나님의 지혜의 8가지 특징이 묘사돼 있습니다. 이 8가지 특징은 아까 말한 ‘온유함’을 이루는 구성요소처럼 보입니다. 성결하다는 것은 ‘순결함’을 뜻하는데, 이는 섞이지 않은 것, 오염되지 않은 것, 나뉘지 않은 것입니다. 나뉘지 않은 전심이요 진심입니다. 이중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겉과 속, 안과 밖, 앞과 뒤가 일관되게 같은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일관되며, 하나님께 대한 말과 이웃에 대한 말이 서로 합치되며 조화되며 영적인 세계와 일상적인 세계가 하나로 일치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순결한 지혜란 동기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화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동기가 깨끗하여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서 나오는 시기나 다툼이 동기가 되지 않기 때문에, 화평을 추구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순결함이나 하나님께 대한 순전함을 잃으면 화평을 깨뜨리게 되고 요란과 다툼을 일으키게 됩니다. 대가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용하지도 않습니다. 화평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너그럽게 대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싸워서 이기고 짓눌러서 자신의 욕심을 성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양순하다’는 것은 ‘잘 설득된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받아들이는 마음이 양순함입니다. 정리해보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지혜, 위로부터 난 지혜,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은 우선 순결하고 그래서 화평을 추구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관용하며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양순하게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지혜의 특징입니다. 이어서 ‘긍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동기가 돼서 지혜가 발동되는 겁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긍휼, 곧 불쌍히 여김, 측은지심이 있는 곳에 도울 길이 마련되는 겁니다. 그래서 긍휼은 다음에 선한 열매로 이어집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수고가 뒤따르고 선한 열매가 맺어지는 겁니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여기서 ‘편견’이란 야고보서 맥락에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구원해주셨음을 안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라면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대해서도 외모나 다른 외형적인 소유를 가지고 판단하거나 차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로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긍휼로 대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세상 조건을 가지고 차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거짓이 없다’는 것은 위선적이지 않다는 것을 뜻합니다. 야고보서 맥락에서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춥고 배고픔을 겪고 있을 때 단순히 말로만 ‘평안하십시오. 따뜻하게 좀 하시지요, 무엇을 좀 드시지요’라고 말하고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백히 위선적인 행동입니다. 위선이란 선을 가장하는 태도죠. 겉으로는 선한 말과 행실을 하는 듯하지만, 속에서는 다른 동기로 움직이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진정으로 긍휼히 여길 줄 안다면 위선을 극복할 수 있겠죠.
이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라면 화평으로 심고서 의의 열매를 결과적으로 얻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열매란 이러한 온유함과 화평함으로 심고서 맺게 되는 의의 열매입니다. 순결하고 순전한 마음, 세상에 의해 나뉘어 있지 않아서 결코 독한 시기나 다툼에 격동되지 않는 그런 심령에서 솟아나오는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서 이웃에 대해 관용하고 양순함으로 관계에서 화평을 지켜내고, 더 나아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위선적이 않은 선한 열매들을 맺는 것,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된 지혜자입니다. (지붕 없는 교회, 채영삼 저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험한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우리에게는 성령충만뿐 아니라 지혜충만도 필요합니다! 성령충만하면 물론 지혜롭게 됩니다만, 강조점이 약간 다릅니다.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 능력이 있는 것하고 세상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것은 같은 말이면서 강조되는 측면이 다릅니다. 죄악되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에서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충만뿐 아니라 지혜충만도 받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은 교회에 충만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세상 한복판으로 나가서 세상 사람들 속에 살아가야 할 때, 그때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되어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고 유효하게 발휘되는 세상적 지혜, 정욕적 지혜, 마귀적 지혜가 아니라, 세상을 지혜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 위로부터 내리는 지혜로 우리가 충만하게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하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온유한 지혜, 온유한 지혜의 8가지 속성으로 묘사된 특징들을 우리가 보유해야 겠죠. 그렇게 해서 화평하고 의로운 선한 열매를 많이 맺어야겠죠.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참된 지혜의 출처가 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해져서 세상속에서 늘 승리하시고 소위 성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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