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9일 설교 (주일 낮)
나의 짐과 남의 짐 (갈 6:1-5)
인생이란 각자의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고유한 짐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짐을 지기가 버겁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왜 나만’ 이토록 무거운 짐에 휘둘려 살아야 하나 자기 연민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남들은 어렵지 않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은데 왜 내 인생은 이렇게 고달프고 힘든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0절에서 지혜자는 인생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새번역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이제 보니,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수고하라고 지우신 짐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인생 살면서 수고하라고 짐을 지워주셨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어떠하든지 우리는 이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고달파도 우리 몫으로 할당된 짐을 어찌하든지 짊어지고 목적지까지 가지고 가야 합니다. 내가 지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짐을 우리 각자는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해서 벗어버린다면 내 몫으로 주어진 짐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짊어지지 못하고 포기함으로 인해서 나중에 후회하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미련이 남는 일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최선을 다하지 못해서 그래서 최상의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 되돌아보며 아쉬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 그때마다 짊어졌어야 할 짐을 이런저런 이유로 짊어지지 못한 탓입니다. 어렸을 때 자녀에게 아버지노릇 어머니노릇 제대로 해주지 못해서 장성한 아이를 보고 두고두고 후회하는 부모도 많습니다.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짐은 평생 동일한 짐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이 짊어지라고 우리에게 맡기신 새로운 짐들입니다. 젊을 때 힘이 있을 때 짊어져야 할 짐이 따로 있고 또 노년에 새롭게 생겨나는 짐들도 있습니다. 각 시대마다 시대적 소명이라는 게 있고 거기에 부응하여 응답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실로 인생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과정입니다. 책임감 있게 응답해야 할 책무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절에서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소설가 김훈씨의 신간 산문집 <연필로 쓰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역시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에 대한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순신장군이 임신왜란 때 쓴 <난중일기>를 토대로 이분이 역사소설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랑을 받았고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습니다. 이순신 전문가라 할 만합니다. 이순신이라는 한 무관이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위기 앞에 소환당하여 부르심에 응답해가는 면모가 실로 영웅적이고 초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은 1598년 노량대전에서 전사합니다. 그가 전사하던 날 7년간의 전쟁은 비로소 끝났습니다. 숨을 거둘 때 그는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전쟁이 있던 7년간 이순신의 삶은 소위 파란만장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맞이한 전쟁에서 초기에 큰 성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받고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서 전사하기 1년 전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감옥에서 치욕스런 고문도 받았습니다. 감옥에 나와서는 계급장도 없는 병졸의 신분으로 소위 백의종군 길에 나서게 됩니다. 다행히도 얼마 안돼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권되었고, 곧 이어 인류 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전승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는 명령대전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순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조선 해군은 거의 전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겨우 12척의 배와 사기가 땅에 떨어진 패잔병들뿐이었습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왕에게 보내 상소문에서 “아직도 배가 열두 척이 남아 있고 제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저의 몸이 살아있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짧게 썼습니다.
그러나 실로 어려운 형국이었습니다. 절망적일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맞아야 하는 생사를 건 전투, 식량 부족, 병졸들의 탈영, 겨울바다의 추위, 전염병 등.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로부터 아무런 물적 인적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시에는 보통 지방 관아가 수군에게 군량미를 대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군량미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피난민들의 경작지 이탈과 지방 관아의 부패 때문에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 난중일기에 보면 1593년 계사년 한 해 동안 휘하 6200여명 수군 중에서 약 600명이 굶어죽었습니다. 약 10%되는 병졸들이 굶어죽었던 상황에서 나머지 병졸들이라고 온전했겠습니까. 나머지 병졸들도 극심한 배고픔과 질병이 있었습니다. 총체적인 어려움이었고 단순히 전투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모든 것을 사령관으로서 책임져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군수, 병참, 보급, 징집, 부상자 처리, 전함 제작, 화포 제작, 탄약 생산, 농경 등. 이뿐 아니라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시련과 역경도 있어서 감옥에 갇히기도 했던 것 아닙니까. 심지어 전승을 하고 난 후에도 이순신은 직감적으로 전쟁이 끝나고서 전쟁에서 수운 공이 오히려 독이 될 것을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결론은 절망뿐입니다! 이순신은 어떻게 이 무거운 짐을 지도자로서 짊어지고 돌파해냈을까요?
명량해서전에서 12척의 배를 몰고 나가 적선 350여척을 대파했습니다. 일렬행대로 12척의 배를 세워서 대규모 전선과 맞장을 뜬 것입니다. 길목을 내주지 않고 일당백하고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아군의 군인들이 당연히 겁에 질려 있었겠죠. 예를 들어 거제도 현령 안위사람 사람도 진격명령이 떨어졌는데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후미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머뭇거리는 안위를 불러서 물었습니다. “안위야, 네가 물러서면 살 듯 싶으냐?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이 말에 안위는 앞으로 나아갔고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순신은 싸우다가 죽는 길 이외에는 아무런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한 겁니다. 이미 명량해전 출동 하루 전날 부하들에게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 하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고, 이어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절대로 살 생각을 하지 말라”고 비장한 각오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난세가 영웅을 만드는 법입니다만, 우리 앞에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고 우리가 응답해야 할 사명이 있고 짊어져야 할 ‘자기의 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담담하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입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다시 그것을 분명히 하고, 벗어버리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던 것이 실은 내가 져야 할 짐이라는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다시 기꺼이 짐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5절 말씀,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에는 ‘왜냐하면’이 빠진 채 번역됐습니다만, 원문에는 ‘왜냐하면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어지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에 이어서 5절에서 ‘왜냐하면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검사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많은 일을 행했는지, 더 잘 했는지를 따져들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 인해서 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함으로써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짊어지고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봄으로써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주어진 사명도 각자요 짊어져야 할 자기만의 고유한 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서 자긍하고 잘하고 있다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행위들을 면밀하게 검사해봄으로써만 자랑할 근거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룬 성과와 업적과 성취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것들과 비교하고서 교만해지거나 자만의 상태로 떨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행위들을 검사하고 살펴보고 성찰해봄으로써 스스로 속아넘어가는 자기 기만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인생이란 어차피 자기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교만이나 자만은 남과의 비교에서 생겨납니다. 우월감 역시 긍정적으로 기능할 때도 있지만 비교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놓고 비교함으로써 생겨납니다. 오직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짊어지고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큰 짐,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다는 자기 만족에 빠져서는 안되고 오직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짐을 잘 지고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성찰, 자기 검토, 자기 살핌이 확실하지 못하면 우리는 실제로는 이루지 못했음에도 이루었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잘못된 비교 대상을 골라서 비교하고서 상대적으로 우월감에 빠진 채 자기 기만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자기 기만은 자신이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 정도면 됐지’라고 안주하는 마음이 들 때, 즉 된 줄로 생각할 때 즉시 찾아옵니다. 실은 아무 것도 되지 못한 것인데 말입니다. 치열한 자기 성찰이 없으면 잘못된 비교로 인해서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됩니다. 스스로 속아넘어가게 되는 경우인데요, 그 내면에 교만과 자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룬 성과와 업적을 크게 보기 시작하는 교만과 자만이 내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 때 스스로 속게 됩니다. 자기 기만에 빠지게 된다는 겁니다.
‘이쯤하면 됐지’라는 생각이나 자신이 이룬 성과를 묵상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자기 만족에 빠뜨려서 교만과 자만의 늪에 허우적거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과 자만의 늪에 빠져서 지내면 안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교만하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절과 3절도 이어서 생각해보아야 하는데 2절 말씀,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에 이어서 3절은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절은 당대 시대에 유명한 격언이었던 듯합니다. 2절의 명령, 무거운 짐, 압박해오는 무거운 짐이 있다면 공동체 안에서 함께 힘을 모아서 서로 져야 한다는 그 명령에 따라야할 이유에 대해서 “(왜냐하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어떤 일도 완수되지 못했는데도 일이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속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과에 도취되어서 이룬 업적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마음과 자만하는 태도를 가지고는 공동체 구성원이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질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무거운 짐으로 인해서 헐떡거리는 동료가 있을 때 당연히 우리는 그 무거운 짐을 함께 짊어져야 할 터인데,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 명령에 따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우리의 교만과 자만에 있다는 지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2절 말씀이 핵심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여기서 ‘짐’은 원문에 보면 ‘무거운 짐’, ‘압박해오는 짐’을 뜻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각자 자기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인생 중에서 그 짐이 버거워서 홀로 감당하기가 어려운 지체들이 우리 주위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짐을 함께 나눠지라는 것입니다. 무겁기 때문에 힘을 모아서 함께 들고 가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연대성과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책임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질병의 고통으로 인해서 생과 사를 넘나들며 투쟁하고 있는데 그 고통에 둔감한 채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랴는 생각을 갖지 말고 그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줌으로써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눠들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어떤 중요한 사역을 진행하고 있을 때 어떤 책임자 한 사람만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다른 사람들은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한 배를 타고 간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지고서 그 과제를 함께 힘을 모아 세워가고 이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문제가 아니야, 이것은 내 일이 아니야, 이것은 내가 안해도 되는 거야’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이순신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순신 전라좌수사로서 임신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그러나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여러 부하들은 그 해역이 전라도 수군의 관할구역이 아니고 경상도 수군의 구역이라는 이유로 출전을 머뭇거렸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부하들을 소집하여 의도적으로 한 사람씩 전쟁 참전 여부에 대해 의견을 물었습니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우리 구역이 아닌데 왜 전쟁에 참여하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 부하들의 의견을 오랫동안 듣고서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단호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제 구역에만 앉아 있을 것이냐. 내가 너희들에게 물어본 까닭은 너희들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시험해본 것뿐이다. 우리는 나가서 싸우고 싸우다가 죽는 수밖에는 길이 없다. 감히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군율로 목을 베리라” 이러한 결연한 각오를 이야기하고 모든 부대가 전쟁에 나가서 임진왜란의 첫번째 승리를 얻었습니다.
다시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아마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침투해들어온 유대주의자들과 대결하고 있고 그들의 주장인 율법주의에 대해서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듯합니다. 단순히 문자로 내려오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완성해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담고 전달된 의도와 취지대로 성취되는, 예수님의 새 계명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중심해놓은 ‘그리스도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이 잘 담긴 ‘그리스도의 법’의 핵심은 서로를 도와주고 서로를 섬기는 것이요 이것이야말로 서로를 사랑하는 길입니다. 자신의 짐을 지고 가기에 그 짐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져서 비틀거리는, 공동체 안에서 힘들어하고 있는 지체가 있다면 그 짐을 함께 나눠지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서로를 사랑하는 길이요 공동체가 함께 세워져가는 과정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짐’이란 공동체 안에 혹은 내 안에 깃든 죄의 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지체가 죄를 짓고 넘어져있을 때 죄의 짐의 무게에 짓눌려 있을 때 우리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지체가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죄의 유혹에 빠져 넘어졌다면, 그렇게 범죄한 일이 드러났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냐는 겁니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그 잘못을 바로잡고 손을 내밀어 그 손잡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의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도 한 개인의 죄로 남겨두고서 나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바리새인의 감사가 아니라, 그리고 죄로 인해서 넘어진 사람의 연약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바리새인의 정죄가 아니라, 공동체라는 한 배를 타고 간 우리 모두의 연약함임을 인정하고 이것이 공동체에 파급될 영향을 고려해서 얼른 손을 내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으켜 세워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뿐 아니라 나 자신도 지금은 손을 내밀 수 있는 상황이지만 나 역시 넘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보는 게 지혜입니다. 나 역시 그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죄의 유혹에 넘어질 수도 있음을 늘 유의하고 경계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늘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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